케이소마 장편

거짓말, 진실마음 - 1

정략결혼

하스미 케이토 X 칸자키 소마

AU, 모르는 사이

약 5500자

가볍게 씀

-

하스미 케이토, 19세. 그는 늘 생각했다. 자신의 인생은 소설의 주인공과는 동 떨어진, 평범한 인생이라고. 뭐, 딱히 그 사실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으나….

“…음.”

이런 소설을 원하지는 않았는데. 제 앞에서 고운 기모노를 입은 채 앉아 있는 신부를 보며, 그는 한참이나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덮쳐온 사실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나에게는 오래전 혼약한 신부가 있었고, 제 앞에 앉은 사람이 바로 그 상대이며, 오늘은 약혼일이었다-는 걸 아침에 막 들은 참이었다. 케이토가 막막함에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갑작스러운 것 아닌가? 그 전까지는 조금의 연락도 언급도 없었으면서, 신부가 성인이 되기까지 두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 예정대로 약혼식을 진행하자고? 그 예정에 내 의견은 왜 없는 건가…. 자신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쉬자, 신부가 - 칸자키 소마라는 이름이었다 - 몸을 움찔했다. 그것을 인지한 케이토가 입을 꾹 다물고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 분도 나와 비슷한 사정일 텐데, 이런 태도는 무례하겠군. 헛기침을 큼큼 하고서 그가 조심스레 소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적잖은 불안감이 느껴졌다. 낯선 공간이기에 불편할 것이고, 갑작스럽기에 초조하겠지. 케이토가 깊게 숨을 들이쉬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녀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케이토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의 행동에 소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고만 있자, 케이토가 눈을 감고 말했다.

“…그냥, 낯선 곳이라 불안한 것 같아서 가까이 왔다. 그렇다고 마주보고 앉으면 너무 부담스러워할 것 같기도 하고.”

“….”

“칸자키 소마, 라고 했던가. 내가 당황한 것 만큼 네녀석도 놀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께서 옛날에 멋대로 혼약을 진행한 건 사과하지.”

케이토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죄할 것 같은 태도였기에 소마가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그녀의 반응에도 케이토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어떻게든 타개할 방법을 찾으려는 것 같았다.

“…네녀석도 이 혼인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마. 안심해라. 합방을 한다거나, 허락없이 손을 댄다거나 하지 않아.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네게 자유를 돌려줄 테니, 당분간만 참아봐라. 돌아가기 전까지는… 그래, 뭐. 템플 스테이라도 한다고 생각해줘. 내 친구들이라던가 다른 사람들도 가끔 그렇게 머물곤 했거든.”

“….”

케이토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와 말투에는, 그녀를 달래기 위한 다정함이 듬뿍 묻어 있었다. 소마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케이토를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묘하게 어색해진 기류를 흐트리고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주 예쁘구나. 화장도, 옷도. 나와 만나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꾸몄는데, 신랑이라는 사람이 약혼을 깰 생각만 하고 있다니… 조금 미안해지는군.”

그의 말에 소마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녀가 시선을 피하자, 케이토가 또다시 웃었다.

“네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라. 너라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까지 꾸미지 않아도 충분히 예뻐보이고.”

얼굴이 완전 붉어진 소마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어쩔 줄 몰라하자, 케이토가 속으로 안심했다. 긴장은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이토가 문득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말을 못하는 건가?”

그의 물음에 소마가 깜짝 놀라고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제 옆머리를 괜히 손가락으로 돌돌 말며 소마가 작게 답했다.

“…아, 아니오….”

“…음, 그런가. 그러면 그냥 말수가 적은 거였구나. 오해해서 미안하다.”

여자치고는 조금 탁한 목소리군. 오래 말을 안 해서 목이 잠긴 건가. 다시 말을 잃은 소마를 바라보던 케이토가 몸을 일으켰다. 어디가냐는 듯 소마가 눈을 크게 뜨고서 케이토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강아지 같다는 생각을 하며, 케이토가 피식 웃었다.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잖나. 일어나라, 네가 쓸 방을 안내해주마. …아, 내 방과 가까운 곳으로 주려고 하는데, 괜찮은가?”

소마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보다 키가 작고 뼈대가 가늘었지만, 옷 아래로 곧은 자세와 약간의 근육이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칸자키 가문은 무사집안이라지. 딸에게도 엄격하게 훈련을 시킬 줄은 몰랐다만. 의아함이 조금씩 피어올랐지만 그저 고개를 저었다.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그가 안내해주는대로 뒤따라가며, 소마는 마른침을 삼켰다. 편히 쉬라는 인사와 함께 케이토가 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한참이나 그녀는 경계를 늦추지 못했다. 잠금쇠가 걸렸는지 세 번은 확인한 뒤에야 그녀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옷을 벗었다. 소마의 가슴은 붕대로 감겨 있었고, 붕대 아래에서는 두께있는 천이 보였다. 조심스레 붕대를 풀어내리자 천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제야 살겠다는 듯 어깨를 돌리는 소마의 가슴은 볼륨없이 평평했다.

마치 남자의 신체처럼.

“언제까지 속일 수 있으련가….”

유카타로 갈아입은 뒤, 이불 위에 드러누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마의 목소리는 청아했으나 다소 낮은 편이었다. 낯선 천장과 낯선 방이 주는 불안감보다도, 커다란 거짓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불안감이 더 무겁고 고통스러웠다.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소마가 눈을 질끈 감았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았는데, 하필….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되다니, 안타깝게 되었소.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평범한 여인과 함께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셨을 듯 하온데. …본인이 아니라.”

소마가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나 문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남자인 신부가 어디 있소이까.”

그는 남자였으니까.

십 년 전, 케이토의 아버지가 장례를 돕기 위해 한 집안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보통의 장례식이 으레 그렇듯 슬픈 분위기였으나, 그 집안은 뭔가 좀 더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 죽음을 쉬쉬하는 분위기랄까. 남의 집안 사정을 캐묻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의아함을 삼키고서 늘 하던대로 장례를 진행했다.

회식 시간에 가주로 보이는 사람이 그에게 술을 권유했다. 한 잔 두 잔 술을 마시던 중에, 한 아이가 문가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잠시 그 아이를 바라보던 하스미가 살풋 웃고는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예쁜 아이군요. 저희 집에도 꼭 저만한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이 있으시오?”

“네. 올해로 아홉살입니다. 귀하의 자녀 또래로 보이니, 친구가 될 수도 있겠네요.”

“우리 소마는 올해로 여덟살이니, 확실히 또래로구려.”

무언가 생각하는 듯 싶더니, 그가 손짓으로 소마를 불러왔다. 아버지의 부름에 소마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소마를 제 무릎에 앉히며 그가 말했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이온데, 제 딸과 그대의 아들을 혼인시키는 것은 어떠오?”

“…음?”

그의 말에 소마가 놀란 표정으로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그저 소마의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하스미 또한 놀랐는지 술잔이 공중에서 멈췄다. 어색한 공기가 셋을 감싸안았다.

“…조금 갑작스러운 것 같네요. 아직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만.”

“천천히 생각해보셔도 괜찮소. 허나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생각하오. 우리 소마는, 벌써부터 집안일도 잘하고 요리에도 재능이 있어서, 장차 좋은 부인이 될 것이기에.”

“흐음….”

하스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마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곱고 얌전해보였으니까. 나쁘지 않은 제안 같기도 하고. 취기 덕분에인지 깊은 생각이 어려웠다.

“정 결정이 어렵다 싶으면, 성인이 되기 직전에 약혼을 진행해보는 것은 어떻소이까. 잘 맞으면 한 쌍의 부부가 될 것이고, 맞지 않으면 좋은 친우가 될 것이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요. 집에 돌아가서 얘기해보겠습니다.”

“하하,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시어 고맙구려. 자아, 조금 더 드시오.”

다시금 어른들끼리의 대화가 시작되었기에 소마는 방 밖으로 달려나갔다. 아버지께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한참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그때의 죽음은, 분명 신병神病이었소. 그때 당시 우리 집안의 사람이 성인이 되자마자 크게 앓다가 죽어버린 사건. …오래도록 없었던 일이 어째서 다시 재발한 것인지는 모르겠소만…. 잠시나마 칸자키 가문에서 형식적으로 벗어나거나, 혹은 이 칸자키라는 성을 영영 잃는 것이 본인을 살릴 수 있는 방도라고 생각하셨을 거요. …허나….”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소마가 끄응 앓는 소리를 내었다. 꼼짝없이 속아버린 하스미 공네는 어찌하면 좋소이까…. …뭐, 성인이 되고 두어달 정도만 더 숨기면, 그 이후에 다시 돌아가도 문제 없을 것이라 하긴 했소만…. …네 달은 더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뜻이잖소이까! 아아, 벌써부터 막막하구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서 그가 다시 문을 바라보았다. 케이토가 떠난 문. 그의 뒷모습이 아른거리는 그 문.

…사실, 소마는 오늘 그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버릴까 고민도 했었다. 사실 본인은 남자이며, 피치못할 사정이 있으니 당분간만 거짓에 동조해달라고. 뭐, 거짓말보다는 이게 더 마음은 편할 테니까. 결혼이 아니라 약혼만 한다면 나중에 기록상으로 문제되지도 않을 거고. 다만 이 계획을 진행하지 못한 이유는….

“…하스미 공이라는 분, 좋은 사람이었소.”

소마가 다시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의 귀가 꽤나 붉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그는 케이토에게 반해버렸다. 잘생긴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 다정한 말투까지. 같은 남자인 게 통탄스러울 정도로 그는 소마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본인이 정말로 여인이었으면, 당장 내일 혼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요구했을 수도 있겠소이다. 이불을 주먹으로 콩콩 내리치며 그가 후회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한다면 공적인 관계가 되어서 자연스레 멀어질 것인데, 그것은 싫소이다! 거짓된 관계이오나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소…. …너무 늦게까지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거요. 음, 물론. 스스로에게 자꾸만 변명을 하며 소마가 힐끔 문을 보았다. …저녁 먹으러 데리러 오시려나. 분명 그러시겠지. 그럼 다시 뵐 수 있는 거요. …조금만, 정말 조금만 거짓말을 하는 게외다!

한편, 약혼을 취소할 방법을 찾던 케이토가 문득 손을 멈췄다. 애초에 말로 이어진 약속이었으니 어렵지 않게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석이 싫지 않다고 하면, 나는….”

그가 침을 꿀꺽 삼키고서 고개를 저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솔직히, 싫지 않았다고 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일이 잘 해결되지 않는다고 조금만 더 미루고 함께 있을까. …그러다가 정말로 결혼해버려도-

“…아니, 아니. 진정하는 거다 하스미 케이토. 너무 비약했잖나. …하아.”

괜히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이런 일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분명 더 좋은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을 사람인데.

“….”

주먹을 꽈악 쥐었다. …뭐, 아직은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까. 천천히 해도 되겠지. …너무 늦지는 않게.

고개를 들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야겠지. 딱히 사심이 있는 건 아니고, 일단은 내가 안내해줘야하는 입장이니까. 그래. 그뿐인 거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꽤나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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