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림
나기이바
3,864자
“그러고 보니까 이바라, 머리 많이 길었네요.”
“아~…….”
“뭔가요 그 반응.”
이바라는 눈썹을 슥 밀어 올리더니, 거 되게 빨리도 물어본다 싶은 표정으로 샐러드를 마저 씹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머리카락은 이미 어깨 위로 늘어질 정도로 길어 있었다. 뒷목만 덮어 놓는 어중간한 기장을 요 몇 년간 유지했던 걸 고려하면 그로서는 꽤 이례적인 변화였던 셈인데 그걸 이제서야 알아챘냐는 것이다.
“아니, 설마 제가 그걸 지금 알았겠어요!? 요즘 바빠서 관리를 못 한 건줄 알았는데 계속 안 자르길래 물어본 거예요. 작정하고 기르려던 거였으면 저희한테 먼저 상의했을 거 아니에요.”
쥰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쥐고 있던 포크를 휘적거렸다. 이바라는 네가 날 그렇게 잘 아냐고 한바탕 쏘아붙이려다 금방 그만두었다. 하기야 외모로 먹고 사는 직업에 머리카락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가 제일 잘 알았다. 스스로 마음먹고 머리를 기르려던 거였으면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에덴의 모든 사람과 상담했을 것이다. 그래, 스스로가 작정한 거였다면 말이다. 그는 잡스런 생각을 이어가는 대신 제가 얼마나 피곤하길래 별것도 아닌 일로 쥰에게 한소리 하려고 했던 건지를 가늠했다. 이번 일주일 동안 총 몇 시간 잤더라?
“뭐, 별일은 아닙니다. 각하께서 제가 머리 기르는 걸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적당히 잠깐만 기르고 있을 뿐입니다.”
“엥? 나기 선배가요?”
“대뜸 자기 머리를 잘라보고 싶다고 하시기에 안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저보고 길러달라고 하시던데요.”
그랬다. 이바라는 그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위에 구멍이 열 개는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대체 뭐 때문에 당신 머리를 지금까지 애지중지 관리해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 말을 날것 그대로 내뱉었는지 조금 정중하게 가다듬어 말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덕분에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거의 평생 긴 머리로 살았으니까 한 번쯤은 짧은 머리로도 살아보고 싶어. 어쩌고 저쩌고. 되도 않는 소리를 질리지도 않고 자꾸 해대는 통에 막막함이 가중될 무렵 “그러면 대신 이바라가 머리 기르는 걸 보여줘”라고 선회해버리는 탓에 얼렁뚱땅 고개를 끄덕여 버린 것이다.
추후에 조금은 그 대답을 후회했지만 곧 에덴도 휴식기였으니 크게 거리낄 건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한몸 바쳐 각하의 만족을 최대한 봐 드리는 것도 그의 일인데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챙기는 것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아니, 저는 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요…….”
“뭐가요? 그리고 따지자면 밥 챙겨드리는 것보다 머리 기르는 게 더 편합니다.”
“음, 아닌가? 뭐 됐어요. 저보단 이바라가 더 잘 알겠죠.”
쥰은 슬그머니 고개를 치드는 의문을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가령, 그거 그냥 이바라가 머리 기르는 걸 보고 싶어서 나기 선배가 일부러 무리한 요구로 정신을 빼놓은 거 아닌가? 하는 것들.
그러고 보면 이바라는 요즘들어 부쩍 나기사에 한해 허술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무섭다고 해야 하는지, 다른 요인도 있다고 해야 할는지.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선 재밌었으니 굳이 그걸 지적해줄 의리를 느끼지는 못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사랑의 일종 아닌가? 빈틈투성이 일면도 상대방에게 내어주게 되었다는 말이지 않나.
뭐, 아무튼 힘 내시라고요.
“그러고 보니까 휴식기도 곧 끝인데 그대로 계속 기르나요?”
“안 그래도 곧 말씀 드려보려고 하던 찹니다. 슬슬 머리 길이 따위엔 흥미를 잃으셨을 때도 됐으니 설득해보면 어떻게든 되겠죠. 안 되면 뭐…… 이쪽도 강하게 나갈 생각이니 너무 염려 마세요.”
물론 안 됐다. 나기사의 드물게 단호한 반대에 이바라는 그 이후 몇 달은 더 머리를 길렀다. 이바라가 머리 자르는걸 보는 즉시 자기도 단발까지 자를 거라나. 말이 되나? 남의 머리 길이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이렇게 귀찮게 굴어?
어쨌든 나기사의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을 금보다 값지게 치는 이바라로서는 패배를 시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치밀하고 영악한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 해?”
“아…… 아뇨. 머리 자르는 생각?”
“또 그 소리.”
나기사는 이바라의 머릿결을 손가락으로 헤집다가 두피를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적당한 세기의 기분 좋은 압박감에 이바라는 투덜거리다 말고 만족스럽게 목을 울렸다.
그의 머리 길이가 간신히 날개뼈에 닿았을 무렵부터 나기사는 이바라의 머리카락 관리를 자처했다. 이것도 잠깐 하다 보면 질리겠지 싶어 별 생각 없이 수락한 거였는데 몇 달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는 이바라의 머리를 붙들고 한동안 놓아주지 않고는 했다. 이바라가 예나 지금이나 그리 해주는 것처럼.
요즈음의 각하는 정말로 예측이 어렵다. 저를 남겨두고 훌쩍 나아가는 듯한 그의 모습에 이따금 입이 쓰기도 했다. 예전엔 그저 골치 아프다고만 여겼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사람 앞날은 통 알 수 없을 일이다. 그건가? 부성애라던가?
나기사가 알면 황당해할 생각을 어영부영 이어가던 도중 뒤에서 알 수 없는 톤으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슬슬 괜찮으려나.” 다부진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한데 묶어 쓸어내리더니 길이를 가늠하는 듯 중단부를 쥐어보는 손놀림이 능숙했다.
“예? 뭐가요?”
“잠깐만 기다려.”
그러고는 훌쩍 일어나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또 예측할 수 없는 짓을 한다. 이바라는 스물스물 올라오는 불안감을 익숙하게 눌러냈으나 드러난 실상은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다. 이바라는 나기사의 손에 얌전히 들려 나온 물건을 보고 싱거움에 혀를 찼다.
“그건?”
“응. 머리끈.”
“아니, 그건 압니다만…….”
어쩐지 눈에 익지만 그만큼 낯선 생김새였다. 고급진 원단을 사용한 푸른빛 단색의 리본끈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옛 피네의 무대에서 꾸준하게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기사가 낙원으로 들어선 이후 이바라의 지도하에 다신 세상 빛을 보지 못했던 물건이었는데. 그게 지금 왜? 그보다 갖다 버린 거 아니었나? 나한테 거짓말 한 거야?
“이건 잠깐 압수.”
“앗,”
어느새 이바라 앞으로 바짝 다가온 나기사는 그가 무릎 위에 놓고 쓰던 노트북을 가볍게 집어 소파 옆자리로 치워 버렸다. 허망하게 들려 사라진 노트북에 잠깐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 귓가에 더운 숨이 성큼 와닿았다.
예고도 없이 가까워진 거리에 이바라가 숨을 삼켰다. 나기사는 여상한 낯으로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춘 채 그의 목 뒤쪽으로 양손을 가져가더니, 긴 머리카락을 다시 꼼꼼히 모아 쥐고는 그것을 왼쪽 어깨 앞으로 끌어왔다. 오갈 데 없는 시선에 방황하다 코앞에서 팔랑거리는 긴 속눈썹에 홀린 듯 눈길을 빼앗겼을 무렵 부지런히 손을 놀리던 나기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긴장을 놓은 이바라는 그제서야 제 한쪽 어깨 위로 모양 좋게 매듭잡힌 리본끈의 존재를 깨달았다. 구 피네 시절의 나기사가 늘상 고수하던 그 헤어스타일이다.
그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불편한 뒷맛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걸 갑자기 나한테? 다른 끈도 아니고 하필 나기사가 옛날부터 썼던 리본으로? ……왜?
“저, 이건 대체?”
“그냥. 한번 해 보고 싶어서?”
문득 이바라는 아까 들었던 “슬슬 괜찮으려나”라는 말이 떠올랐다. 설마 고작 이걸 시켜보고 싶어서 머리를 길러 달라고 애처럼 떼를 쓴 건 아니겠지. 이런 거야 주변에 널린 당신 친구들한테 부탁하면 되잖아. 히비키 씨라던가….
그가 불경한 생각을 이어가거나 말거나 나기사는 미동도 없이 팔짱을 낀 채 이바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는 그를 긴가민가한 얼굴로 잡아뜯을 듯 관찰하는 눈빛이 집요했다. 표정은 태연한데 두 홍채에서 무언가가 들끓는 듯했다.
돌연 꺼림칙함을 느낀 이바라가 뭐라고 반문하려던 차에 나기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짧게 중얼거렸다. “……아버지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방금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그보다 이거 풀어도 됩니까? 간지러운데요.”
“안 돼. 좀 더 그러고 있어.”
역시 열 길 사람 속은 알아도 한 길 각하 속은 모를 일이다. 이바라는 미간을 좁힌 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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