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해 보겠다는 흔적

이것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는 이야기

--사랑이 당신을 구원하기까진 / 나츠안즈

주의사항

1. 앙상블스타즈!!의 2차 창작 소설로 공식과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2.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3. 엑스트라가 정말 많으며, 앙상블 스타즈!!의 인물이 아님을 밝힙니다.

4. 나츠메의 어미는 편의상 기울임체로 대체했습니다.

5. PC열람을 추천드립니다.


추천 음악 : Ringing Evil Phone - EVIL NUM+

https://youtu.be/bYIrOAuANxY?si=DDqo7ulH9FvahqEF

(원고하면서 200번 정도 들은 듯 합니다)


0. 이것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는 이야기

 “잠시 후, 오후 아홉 시부터 본 크루즈의 승선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승객 여러분은 질서정연하게 대기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휘슬을 삑삑 부는 어느 어린 아이가 제 키보다 두 배는 되는 사내들을 줄 세웠다. 붉은 모자를 쓴 어느 장정도, 푸른빛이 넘실넘실 춤추는 드레스를 입은 여인도, 노란 장화를 신은 부인도 선에 합세했다. 그리고 그건 안즈도 마찬가지였다. 손에 쥔 티켓 한 장. 여린 손으로 꼭 쥔 여행용 가방. 그리고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수수하고 하얀 원피스 하나 걸친 안즈는 가만히 크루즈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안즈는 이 크루즈에서 한 달을 지낼 참이었다. 예술의 대지라는 곳을 떠나 새하얀 항구 도시로 가는 여정에는 어느 정(情)도 있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서. 그것만이 이유라서, 이 크루즈에 몸을 맡기고 가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어둡고 푸른 눈을 지켜보는 샛노란 햇살.

 붉은색의 장발을 가진 한 남자는 안즈를 응시했다.


 안즈에게 쥐여진 객실 열쇠의 번호는 401. 바다가 잘 보이는 사 층이었다. 새삼, 표를 예매해준 선배의 배려에 눈물까지 날 지경이었다. 그래, 상념에 빠져 있을 시간이 많을테니까 파아란 바다라도 봐야지. 안즈는 철컥 하고 객실의 문을 열었다. 그래도 초호화 여객선 아니랄까봐, 하얀 새 침구와 분위기 좋은 조명에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그는 침대에 풀썩 눕고는 포근한 이불을 만끽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왜 그렇게 필사적이었을까, 사실 여기에 오고 싶지 않았는데. 눈을 끔뻑거렸다. 조그맣게 달린 천장의 샹들리에가 바닷바람에 조금씩, 조금씩 흔들렸다. 맞다, 이번 연극 무대에 샹들리에가 쓰였지. 샹들리에에서 양초 하나를 꺼내들어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하는 말.

 “……이것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는 이야기.”

 —사랑이 당신을 구원하기까지는. 안즈는 조심히 문장을 읊고 스르르 잠에 빠졌다.


 이것은 안 씨의 이야기.

 안 씨는 여느 때처럼 갑판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있었다. 갑판 위에서는 승객들이 밤새 파티를 벌일 미래만 흩어져 있지만, 그건 안 씨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다. 안 씨는 이 크루즈의 승무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그의 동료, 그러니까 같은 크루즈의 승무원인 엘에게는 공통점이 아니었다. 안 씨가 갑판의 의자에 앉아 위스키를 따르던 엘에게 물었다.

 “웬일로 위스키야? 평소에는 와인만 고집하더니.”

 엘은 묵묵히 위스키를 넘겼다.

 “경사라도 있나보지? 뭐, 이번에는 좀 괜찮은 사람이 있나봐?”

 엘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은 살짝 미소짓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여전히 속내를 알 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안 씨에게 엘은 웃으며 제 일을 하러 가보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래, 전화나 잘 받으셔.”

 담뱃불을 끄고 손을 흔드는 안 씨.


1. 반전 없는 이야기


 밤 열 시에 잠들어서 오후 세 시에 일어나는 것은 대체 어느 경우인가. 안즈가 천천히 눈을 뜨자 시계는 어느덧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새벽일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방으로 들어오는 겨울 햇살은 그렇게 말하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래, 낮인 건 이제 인정했고. …이제 뭘 해야하는 건지. 독서를 하기에는 그럴 상태도 아니고, 파티에 참여하기에는 그럴 목적으로 온 것도 아니었다. 단지 마음을 정리하는 것. 한 달 동안 덩그러니,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 홀로 남겨진 이유에 따라 과제를 충실히 해내야 했다. 그러나 뭘 해야할 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는 참이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안즈는 상념을 멈췄다. 안즈는 제 힘껏 “누구신가요?”라고 외쳤지만, 작은 목소리는 역부족이었는지 방문 밖의 누군가는 자꾸 문을 두드릴 뿐이었다. 안즈는 옷차림을 대강 정비한 뒤 문틈을 조금 내비쳤다. 왜인지 낯익은 얼굴을 한 작은 체구의 소년이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다른 건 아니고, 어제 승선 이후부터 쭉 나오지 않으셔서 무슨 일 있나 싶어 찾아온 거예요. 아앗, 아차, 제 이름은 셀이에요. 이 크루즈에서 승선과 하선을 돕고, 간단한 잡무를 처리하고 있어요.”

 안즈는 순식간에 쏟아져온 말들에 당황하다가도, 셀이란 아이에게 꾸벅 인사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별 일은 없습니다.”

 “다행이에요. 크루즈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물어봐주세요! 저는 보통 프론트 데스크에 자주 있으니까요.”

 아이의 은백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노란 눈이 반짝였다. 열댓살 되어 보이는데 꽤 강도가 있는 일을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 기특하기까지 했다. 안즈가 다시금 고맙다고 인사했다. 해맑게 웃는 아이와 함께 싱긋 미소 짓던 참이었다.

 “셀.”

 중저음의 목소리가 소년을 불렀다. 안즈와 셀은 그들을 호명한 누군가를 슥 바라보았고, 적색 장발에 하얀 브릿지를 가진 금안의 남자가 가만히 그들을 응시했다. 그러자 셀은 히익 소리를 내며 “손님,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라고 외치듯 하며 그 적색 장발의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안즈는 뒤에서 그런 광경을 쭉 지켜보다가 적발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안즈에게 가볍게 목례하며, 셀을 데리고 무어라 야단을 치는 건지 입을 바삐 움직였다.


 셀과 적발의 남자가 떠나고 한 시간 후 쯤. 안즈는 간단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뭐라도 하지 않는다면 무엇도 바뀌지 않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구하기도 어렵다는 대형 유람선의 표였다. 솔직히 좀 아쉽달까, 술을 잘 입에 대지는 않지만, 한 번 쯤은 이런 곳에서 샴페인을 터뜨려보는 로망이 있었다. 간단하게 얼굴 화장을 마치고, 하얀 블라우스 아래 검은색의 벨트, 남색의 긴 치마를 차려 입었다. 객실 안에는 벽 마다 긴 거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안즈는 문 쪽의 거울에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만화책에서나 보던 이상한 포즈를 따라해보다가,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려 급하게 포즈를 집어 넣었다.

 “네, 나가요!”

 안즈가 황급히 문을 열고 나가자 셀과 방금 전의 적발의 남자가 가볍게 목례했다. 셀이 빙긋 웃고만 있자 적발의 남자는 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에 셀은 히익, 소리를 내며 제 본분을 다시 떠올렸다.

 “사실 오늘 저녁 갑판에서 파티가 열려요. 이런 대형 크루즈는 매일 열리긴 하지만, 으음, 그래도…. 손님께서 꼭 한 번 참여하셨으면 좋겠어요.”

 안즈는 셀의 말에 눈을 두어번 끔뻑거렸다. 승선한 건 어제다. 그러니까 안즈처럼 모종의 사유로 파티에 참여하지 않은 승객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굳이 콕 집어서 본인인 이유가 궁금했던 안즈는 호기롭게 물었다.

 “그런데 굳이 제게 이런 요청을 해 주시는 건 왜인가요? 다른 분들도 피곤해서 파티에 안 나가셨을 수도 있잖아요.”

 “그건….”

 “이 크루즈에는 단순 여행 목적으로 탑승하시는 분들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묵묵히 셀의 옆에 서 있던 적발의 남자가 제 모자를 정리했다. 백정장에 달린 여러 브로치가 햇살을 받아 이리저리 빛났다.

 “저는 엘이라고 합니다. 셀과 함께 승선과 하선을 돕고 있고, 웬만한 승무원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승선과 하선 과정 중 승객분들의 얼굴을 살피게 되는데, 아무리 봐도 여행 목적으로 타는 표정이 아닌 분들이 있습니다. 그게, 401호 승객 분이었습니다.”

 안즈는 그의 말이 끝나지 않았지만 무슨 목적으로 이리 길게 말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안즈의 전의 상실을 목격한 셀과 엘, 두 승무원은 단지 안즈의 기운을 북돋고자 파티에 초대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차츰 읽어내자 안즈는 빙그레 웃었다.

 “네, 오늘은 꼭 참여할게요. 갑판이랬죠?”

 그때 문득, 안즈의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 —갑판으로 어떻게 나가지?

 “저녁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 크루즈 내부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한 건 엘이었지만, 그는 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빤히 바라보았다. 셀은 또 다시 겁에 질려 “네, 제가 안내해드릴게요.”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셀의 확답 뒤로 엘은 그 자리를 떠났다. 안즈와 셀은 걸을 때마다 좌우로 흔들리는 붉은색과 하얀색의 오묘한 조화를 바라보았다.


 “엘은 정말 나쁘죠. 성격이 어떻게 저렇게 못돼 먹었는지 모르겠어요. 무뚝뚝하고, 말은 잘 안 하면서 일은 다 제게 떠넘기고!”

 객실 복도를 나가 크루즈의 로비, 메인 홀로 나가는 길에 셀은 투정 부렸다. 안즈는 그저 미소 지으며 그 투정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 줄 뿐이었지만, 셀은 아무렴 상관 없었다.

 “엘 뒷담을 이렇게 마음껏하니까 기분이 좋네요. 승무원은 총 쉰 명 정도인데, 저처럼 딱 담당을 맡아서 하는 사람들은 세 명 밖에 없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그저 어디서 일 해야하는 지 배정만 받은 거죠. 선장실이라든지, 창고라든지, 주방이라든지…. 근데 대부분 허드렛일 밖에 안 한다는데. 아, 이게 아니지. 아무튼 그래서 저는 담당을 갖는 두 명과 같은 방을 쓰는데, 엘이 그 중 한 명이구요, 남은 하나는 승무원을 총괄하는 안 씨예요. 성격이 털털하고 체격도 꽤 있는 편이라서 미더운 분이죠. 아니 근데, 그 분에게 엘의 뒷담을 털어 놓는 순간 뭐라는지 알아요? ‘엘이 원래 그렇지~ 네가 좀 참아.’ 이런다니까요?”

 많이 답답했나보다, 안즈는 셀의 속사포 뒷담을 듣고 머릿속으로 답답했을 셀을 떠올렸다. 조금 귀엽기도 하고.

 “그렇네요, 아이를 괴롭히는 어른은 좀 혼나야 하는데.”

 “그렇죠? 손님께서 엘을 혼 좀 내주실래요? 왠지 엘은 손님의 말이라면 꼼짝 못 할 것 같으니까요.”

 “손님의 말이라면 승무원 누구든 꼼짝 못 하지 않나요?”

 안즈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러나 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손님을 갑판에 초대하자는 생각을 한 것도 엘이고, 그걸 물어보러 간 것도 엘이에요. 게다가 승선 때 저는 봤거든요? 엘이 손님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고요. 정말이에요. 혹시 엘이랑 아는 사이예요? 막 연인? 그런 정도인가요?”

 연인이라는 말에 손사래를 친 안즈,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크루즈 내부를 안내하기 시작한 셀.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여기가 바, 저기는 라이브 홀이고요, 거기는 가면 안 돼요. 기계실이라서. 하나하나 짚으며 성심껏 안내하는 셀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안즈의 머릿속에는 엘이라는 남자만 떠오를 뿐이었다. —왜 굳이 나였을까. 또 다시 이런 상상에 사로잡혀 셀의 설명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나가던 참이었다.

 쾅!
갑판에서 무언가 나동그라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셀은 급하게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째깍째깍, 열심히 시간이 흐르고 있는 시계는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셀은 눈이 동그래져서는, 안즈에게 소리쳤다.

 “갑판에서 파티가 시작됐을텐데…! 얼른 가봐요!”

 공상에 잠겼던 안즈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방금 봤던 바의 옆에 있는 계단을 타고 갑판으로 급하게 올랐다.


 “너지? 이 새끼야, 너잖아!”

 파티는 황홀하지는 못했지만 당혹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갑판에 놓인 하얀 탁자들 아래로 떨어져 깨진 화병, 나동그라진 의자, 음식이 놓인 탁자는 뒤집어 엎어져 여러 소스가 살해현장처럼 튀었다. 갑판의 중앙 즈음에서 한 남자가 빈 와인 병을 들고 행패를 부렸고, 그 주위로는 상황을 아무도 말릴 생각이 없는지 원으로 빙 둘러싸 어머나하며 구경만 하고 있는 승객들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행패의 대상, 그러니까 피해자는 이미 병으로 맞은 건지 머리 왼 쪽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제 머리색깔처럼, 하지만 흰 부분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안즈의 눈이 커지고 손이 떨렸다. 엘이다, 백정장을 제 피로 적신 사람은, 엘이었다.

 “너 이 자식, 제인을 어떻게 해 먹은 거야? 크루즈에서 너를 만난 후 제인의 눈이 새까매졌다고. 온통 전의를 잃고 살아갈 의미를 잃었단 말야. 영혼을 잃은 것 마냥! 다시 돌려내, 돌려내라고!”

 그 대화를 듣고서 눈이 커진 건 비단 안즈 뿐이진 않겠지만, 안즈는 이를 깍 깨물었다. 저 진상이 누구인지 차츰 깨달았다. 제 전 연인, 렌. 바람을 피워서 단박에 이별을 선언했지만, 그 과정이 차마 깔끔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바람을 피운 상대는 안즈의 오랜 친구 제인. 그 이름을 다시 듣자니 주먹을 꽉 쥔 손은 파들 떨리고, 피는 거꾸로 솟는 듯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제 전 연인을 만났기 때문에 화나는 게 아니었다.

 “그만해, 렌!”

 엘의 앞에 서서 병으로 내리치려는 손을 내쳤다. 렌의 미간이 금세 찌푸려지며 그가 온갖 욕설을 퍼부었지만, 렌도 안즈를 알아차린 터, 그도 움찔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안즈가 뒤를 돌아 엘의 상태를 살폈다. 날카로운 눈매의 금안이 안즈를 제대로 응시했다. 이미 벗겨진 승무원의 모자 덕에 더 적나라하게 보이는 엘의 상처가 쓰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이러다가는 위험해. 안즈가 급하게 셀을 불렀다. 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지혈하며 도움을 요청했으나 애석하게도 응답은 경직 뿐이었다.

 그 즈음, 뒤에서 들리는 소리.

 “안즈? 너도 그 자식이랑 같은 편이야?”

 렌은 술에 취한 지 오래다. 안즈가 무어라 말을 할지언정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  누구라도 도와줄 줄 알았는데. 안즈가 눈을 질끈 감았다. 병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엘을 지혈하는 손은 꼼짝도 않았다.

 …어라.

 무슨 소리라도 들릴 줄 알았는데 갑판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안즈가 살포시 눈을 떠 위를 올려다보았다. 렌이 가만히 서 있다가, 앞으로 맥 없이 쓰러졌다. 그러자 뒤로 보이는 것. 엘과 같은 백정장을 입고, 조금 기른 수염과 처진 눈매, 전부 뒤로 넘긴 머리. 단박에 알아차렸다. 셀이 말했던 안이라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이 사람이 렌을 기절시켰구나.

 “자자, 셀. 이 손님을 일단 객실에 모셔다드리자고. 죄송하지만 엘은 손님께서 데려다 주시겠어요? 선실은 3층에서 왼쪽 복도로 들어가시면 나오는 방입니다. 엘, 보기보다 가벼워서 충분히 옮기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안즈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승객들이 어수선해질 즈음, 안즈는 엘을 그를 일으켜 세우고 부축했다. 안즈가 엘에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의식은 없었다. 기절한 건가. 그럴만 했어, 피를 너무 많이 흘렸으니까….

 그러면서 엘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마주한 것은, 바닥에 떨어진 한 쪽지였다.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내게 영혼을 팔아. 여기로 전화해.’라고 적힌 쪽지.

 쪽지의 활자를 단시간에 읽자마자 숨을 헉, 들이마셨다. 심장이 쿵 떨어지며 물에 잠긴 듯 먹먹해져왔고 철렁했다.

 안즈는 왜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쪽지를 주워 제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2. 협상의 이야기

 엘을 선실에 데려다주고 안즈는 제 침대에 풀썩 누웠다. 기분 전환 차 참여한 파티였는데,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안즈의 전 연인이 이 곳에 타고 있다는 것—만 가득 얻어오는 참이었다. 오늘도 그냥 이대로 잠드는 걸까,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노려보았다. …그래, 잠이나 자자. 어려운 건 내일 생각하자. 안즈는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려 벨트를 풀었다. 그때 즈음, 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 무엇인가 싶어 꺼낸 것은 두어 시간 즈음 갑판에서 주운 쪽지였다. 안즈는 다시 풀썩 누워 쪽지를 읽기 시작했다.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내게 영혼을 팔아. 여기로 전화해.

밤 중 전화 환영!(열 시부터 새벽 네 시)

 102-0406’


 이 크루즈에 들어설 때부터 평범한 건 하나도 없다는 건 알았지만, 협상이라도 하자는 건지. 게다가 협상할 상품은 영혼이다. 속세에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용이다. 연극에서나 볼 만한 내용에 안즈는 이마를 짚으며 쪽지를 찢어버리려 중앙을 잡았다.

 ‘영혼을 팔아.’

 그렇지만 이 문구가 왜이리 인상 깊은지는 영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제대로 알고 있다. 방금 전 갑판에서 렌이 그랬지. 제인이 영혼을 잃은 것 마냥 전의를 상실했다고. 안즈는 렌보다도 제인을 잘 알고 있었다. 같은 극단에 속하면서, 제인의 슬럼프 증세를 못 알아차릴 만큼 멍청하진 않다. 제인의 연기는 날이 갈 수록 빈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령, 제인의 특기였던 눈물 연기는 어느새 그의 약점이 되어 있다든가, 격정을 품은 문장의 화두를 시작할 때는 전혀 화가 느껴지지 않았다든가. 그래서…. 안즈에게 크루즈 표를 건네 주었던 그 선배에게, 똑같이, 같은 표를 받았지. 조금 쉬다 오라는 말이었지만 제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제인의 역할은 이미 기성 배우에게 넘어갔고, 제인이 크루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극단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분명 나도 그렇겠지.

 지금의 안즈는 제인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슬럼프는 어렵다. 특히, 이런 연기에서의 슬럼프는 더더욱.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예술이다 보니 한 사람의 흠은 곧 작품 전체의 흠이었다. 그래서 극단은, 어딘가 하자가 생긴 배우들을 금세금세 갈아치웠다. 문제는 그 중 하나가 안즈라는 것. 안타깝지만, 아마 이 여행이 끝나면 새로운 극단을 찾아야겠지.

 하지만,

 다시 연기를 할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다. 제인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이런 퇴출 사례가 팽배했으니까 제인도 무의식 중에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단순 절망에서 시작한 공상은 죽음까지 이른다. 그런 과정에서 이런 쪽지를 봤다면….

 분명 전화했겠지.

 그건 안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안즈의 객실은 4층이었다. 오늘 오후에 셀이 안내해 준 희미한 기억을 천천히 떠올리면, 1층 로비에서 라이브 홀로 들어가 우측 문을 열고 나가면 카지노와 몇몇 전화가 놓여있다고 들었다. 어차피 1층으로 가는 길이니까 3층의 엘의 상태를 볼까도 고민했지만, 곤히 잠들어 있을 것 같아 발길을 돌렸다.

 1층에 도착했을 때 갑판에 있던 일 때문인지 사람은 꽤 있었으나 들뜬 분위기는 아니었다. 안즈는 쪽지를 꼭 쥐고서 인파를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프론트 데스크에서 가만히 서류를 살피던 안과 마주쳤다.

 “아, 저기.”

 그냥 지나가려던 안즈였지만 안은 호기롭게 말을 걸었다. 사람 좋게 웃어보이는 안은 가장 먼저 안즈에게 감사를 전했다.

 “아니에요, 해야 할 일이었는 걸요.”

 “멋지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자칫 큰일 날 뻔 했는데.”

 “아, 음…. 저는 그럼,”

 자리를 비키려는 안즈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안에게 물었다.

 “엘은… 괜찮은가요?”

 안즈의 말에 안은 호탕하게 웃었다.

 “엘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많이 친해지셨나 봅니다. 상태는… 글쎄요, 그 녀석,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사람이니까요. 저도 선실에 가 봤는데 없어져서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아마 괜찮을 거예요. 무리할 정도로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안즈가 꾸벅 인사하고 안은 가볍게 목례했다. 안즈는 다시 발길을 돌려 열심히 라이브홀로 향했다. 흐음, 그나저나 이상하네. 그 정도 상처면 쉽게 움직이기는 힘들텐데.


 작은 악단이 연주하고 있는 라이브홀을 지나, 드디어 우측 문을 연 안즈는 카지노의 시끄러운 소리에 가장 먼저 놀랐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조심히 공중전화에 다가섰다. 이 쪽지의 내용대로라면 전화 내용이 굉장히 의심스러울텐데, 공중전화를 쓰는 사람은 없었고 카지노의 소리 덕에 덮여 내용이 알려질 일도 없으니 안심인가. 아니, 애초에 이 쪽지를 믿는 본인도 이상해서 고개를 저을 뿐이었지만.

 번호를 확인하고 다이얼을 돌렸다. 1, 0, 2, 0, 4, 0, 6. 드르륵 거리는 소리가 일곱 번 울리고, 뚜르르 거리는 타전음은 안즈가 침을 꼴깍 삼키게 했다.

 “안녕,”

 …연결이 됐어.

 “좋은 밤이, 잘 지내고 있?”

 남자 목소리지만 그리 낮지 않은 미성이 안즈의 귀를 간질였다. 수화기를 잡고 있는 손이 심하게 떨렸다. 안즈는 말 한 마디 전하지 못하고 멍하니 수화기 너머에 귀를 기울였다.

 “연결 되니까 신기하지 않? 솔직히 쪽지를 주웠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 사실이길 바란 거? 만나서 반가워, 소개를 먼저 할.”

 상대측만 독백을 늘어 놓았다. 수화기 저 편에서는 무엇이 재밌는지 가끔 웃는 소리도 들렸다.

 “아니, 역시 싫. 만나는 게 좋겠. 내가 갈.”

 “어, 어디있는 줄 알고…”

 “걱정마, 어디든지 갈 수 있.”

 터벅,

 “만나서 반가,”

 터벅,

 “내 이름은….”

 누군가가 안즈의 어깨를 두드렸다. 적발의 남자가 싱긋 웃고는, 안즈에게 부쩍 가까이 붙었다.

 “기억해줘, 사카사키 나츠메.”


 전화가 놓인 복도를 조금 더 지나면 갑판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하나 더 나왔다. 사카사키 나츠메는 세상 당연한듯 안즈를 이끌고 갑판으로 향했다. 갑판은 일곱 시 즈음 난리가 있던 것과는 다르게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사카사키는 하얀 탁자에 풀썩 앉고는, 안즈에게는 제가 앉은 탁자의 의자에 앉으라고 가리켰다.

 “이름은?”

 “안즈예요.”

 “예쁜 이름이. 나이는?”

 “올해 스물 일곱이에요.”

 “동갑이구. 나는 삼백스물일곱이지.”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안즈에 사카사키는 큭큭 웃어댔다.

 “무슨 일을 ?”

 “연극 배우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럼 이 크루즈에는 극단 일로 타게 된 건?”

 “아뇨, 극단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사카사키 나츠메는 제 머리에서 길게 뻗어 나온 머리카락을 빙빙 꼬았다. 그제야 그의 인상착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검은 티셔츠를 안에 받쳐 입고, 위로 입은 겉옷에는 무겁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브로치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날렵하게 생긴 얼굴, 노란색 눈에다가 날카로운 눈매. 하얀 브릿지까지. …누구를 닮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적에 그가 물었다.

 “영혼을 팔고 싶?”

 안즈가 흠칫 놀라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왜? 뭘 그렇게 갖고 싶길래 영혼까지 팔?”

 “갖고 싶은 건 없어요.”

 “그럼 계약 성사가 힘든. 영혼을 팔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는 거?”

 안즈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의아해져 물었다.

 “영혼을 가져간다는 거 보면 악마 같은 존재일텐데, 그러면 아무런 대가 없이 가져가는 건 좋은 일이 아닌가요?”

 “악마가 맞, 걱정하지 말고. 그리고 그런 짓은 몰상식한 애들이나 하는 거, 나는 아니라.”

 연극의 대본에서 악마는 항상 사람들의 영혼을 뺏어가려 안달이었는데, 그런 이미지 때문인지 제 앞의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 너는 이 크루즈 여행이 끝나면 뭐 할거?”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그래, 정확한 목표가 있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살아있을 사유는 만들 수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보길 바랄.”

 “예를 들면?”

 적극적으로 되묻는 안즈에 제법 놀랐는지 사카사키가 눈을 크게 떴다가 흘겼다.

 “글쎄, 나는 이 여행이 끝나면 죽을 생각인.”

 ………

 보통 악마가 죽는다고 하나? 그런 생각이 얼굴에 쓰인 안즈를 보며 사카사키는 웃어댔다.

 “이유가 궁금? 뭐, 나 같아도 그렇겠. 회의감을 느꼈거. 내게 영혼을 판 사람은 육체만 현세에 존재해 고통스럽지 않겠지만, 나는 보이잖? 영혼을 판 사람의 가족이라든가, 연인이라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이 일을 왜 해야 할지 계속 이유를 잃어버.”

 “원래 악마가 그런 일을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좀 다른가. 견디기 힘드.”

 사카사키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왜인지 필사적으로 안즈가 제게 영혼을 파는 것을 막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제 손에서 사과 하나를 소환하더니, 와삭 깨물었다.

 “그런데 솔직히, 너도 열심히 살아온 네 영혼이 이렇게 사과 하나가 된다면 아쉽지 않을?”

 그의 손에서 와삭 부서진 사과를 보며 괜스레 아쉽다고 생각하게 될 즈음, 안즈는 가만 물었다.

 “그러면 왜 이 크루즈에 탄 건가요? 죽을 거라면.”

 “글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과가 된 영혼을 먹으려고 그랬? 솔직히 말하자면 두루뭉실. 환상적인 일을 경험하고 싶었. 너는?”

 안즈는 그의 말을 듣고서 눈을 아래로 흘겼다. “굳이 말하자면 새로운 자극일까,”라고 중얼거린 안즈에, 사카사키 나츠메는 가만히 미소만 띄었다.

 “새로운 자극이, 환상적인 일이. 좋은 일을 경험하려고 이 초호화 유람선에 탔는 둘 다 생각하고 있는 게 좋지는 않. 솔직히 할 수 있는 게 많은 것 같지는 않, 그렇지?”

 안즈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카사키 씨라면 충분히 파티도 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가 안즈의 시선에 마주하며 큭큭 웃었다.

 “그건 너. 잘생겼다고 해 준 거라고 착각해도 되나 모르겠. 하지만…. 이 크루즈에서 할 수 있는 게 고작 그게 다라는 게 문제. 매일밤 정장을 빼입은 수많은 남자들과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들 사이에 끼여, 별 시답잖은 이야기로 웃고 떠들. 하는 게 그거 아니면 전화로 남들의 영혼을 앗아가는 게 다라. 아쉽네, 아쉬.”

 그가 탁자에서 내려왔다. 안즈가 앉아 있는 의자 앞에서 눈높이를 맞추더니, 안즈의 머리칼을 하나하나 정돈했다.

 “영혼을 파는 건 다시 생각해.”

 그는 뒤를 돌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떠나가는 그의 모습은 제법 가벼워보였다. 안즈가 그 말을 내뱉기 전까지는.

 “크루즈에서 일어나는 사랑 정도면 낭만적이고 환상적이지 않나요?”

 안즈는 거의 따지듯 외친 그 말 후에 아차, 하고 후회했다. 아차, 어떡하지. 최근에 연극 때문에 관련 기사나 글을 너무 많이 읽은 모양이다. 하지만 어째 사카사키는 발을 돌렸다. 그는 안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사랑?”

 사카사키는 점점, 점점 더 가까이 몰아붙었다.

 “네, 그, 사랑.”

 발을 헛디딘다면 입이라도 맞출 정도의 거리에서, 둘은 눈을 맞췄다.

 “네 말은, 내게 사랑을 해 보아… 그런 의미인 거?”

 “그렇네요, 어쩌다보니.”

 사카사키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안즈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그렇구나, 사랑이 네게는 환상적인 일이구나. 안즈가 무안해질 정도로 웃다가, 그는 단번에 웃음을 멈췄다.

 “재밌네, 좋아. 그렇게 해 볼.”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랄게요.”

 “……계약 성사가 잘 안 된다면 그렇겠.”

 사카사키가 다시 안즈에게 가까워져 안즈의 옆머리에 키스했다. 안즈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소름이 오소소 돋고 있던 참에,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사카사키가 말을 이었다.

 “나랑 계약하, 안즈쨩. 너도 영혼을 팔고 싶잖.”

 안즈는 아무 말도 않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말, 한 달만에 사랑할까, 둘 다. 서로를 말.”

 안즈가 눈살을 찌푸리며 사카사키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게 가능하냐는 의심이었으나 그는 여전히 웃었다. 그래, 영 거짓으로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너는 내게 영혼을 파는 대신, 나는 네게 새로운 자극을 선물해줄. 자신 있거, 이런 일은.”

 그러고선, 사카사키 나츠메는 안즈의 귓가에다 속삭였다.

 “너는 좋다고만 말하면 . 맡겨.”

 이 즈음 되니 안즈는 왜 사카사키가 아직까지 악마라는 칭호를 달고 살 수 있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만큼은 굉장히, 정말, 사람이 다르게 보였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싫지 않다. 안즈는 고개를 조금 비틀어 사카사키를 제대로 응시했다. 금안과 벽안이 부딪히는 사이에서, 안즈는 정확하게, 하나하나 제대로 말했다.

 “좋아요.”

 계약 성사의 목소리.


3. 구질구질한 이야기

 며칠 전에 있던 이야기가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안즈는 침대에 누우면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슨 연극의 주인공에게만 일어날 일만 같았고, 현실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만 뇌리에 내내 맴돌았기 때문일까. 안즈는 마른 세수를 하며 여전히 객실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세상에. 사카사키 나츠메와는 어제도 만났지. 매일 밤마다 만나 자질구레한 이야기부터 진지한 이야기까지 장벽을 넘어다니며 내내 대화했다. 게다가 호칭도 바꿨고 말투도 어떻게 하다보니 교정당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둘 다 스물 일곱이니 말을 놓자는 것, 물론 안즈는 삼백 살이나 차이나는 사람에게 마음 놓고 말을 놓냐 항의했지만 그는 벌써 안즈를 ‘아기고양이쨩’이라는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며 편하게 대하는 참이었다. 결국 안즈도 반쯤 포기했다. 처음으로 그에게 ‘사카사키 군’이라고 부른 어제, 그는 세상 따스하게 웃었다. 이런 것만 보면 악마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무섭다가도, 이 여행이 끝나는 한 달 뒤라면 전부 잊어먹을테니 초연해졌다.

 천장을 바라보던 안즈는 문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문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아래문틈으로 쪽지를 밀어넣고 간 모양이었다. 안즈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쪽지를 펼쳐 내용을 살폈다.

 ‘일주 전 쯤 갑판에서 나서주시고,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 보답을 하고자 하니 오늘 오후 다섯 시 즈음 로비에서 뵐 수 있을까요?

-엘 드림.’

 그렇게 딱딱하게 생긴 사람이라면 필체도 명조체처럼 딱딱할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는 동글동글한 유한 글씨체에 안즈가 큭큭 웃었다. 근데 참, 연애를 안 해 본 건가. 지금이 세시 반인데. 제대로 꾸미려면 한 시간 반은 턱도 없다. 안즈는 혼자 있는 방에서 홀로 헤실 미소 지으며 여행용 가방을 뒤졌다. 혹시라도 기분이 나아진다면 입으려고 마련해둔 예쁜 옷이 하나 있다. 최근에 사카사키를 만나고서도 있지만, 엘이나 셀이나, 또 안까지 두루두루 친해진 덕에 기운을 많이 차렸다. 그렇다고 완전히 나은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는 괜찮았다.

 안즈는 그렇게 오랜만에 제대로 화장하고 예쁘게 차려 입었다.


 —왜 하필 그 애를 만나서는.


 안즈가 로비에 도착했을 때는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네시 사십분 즈음 로비에 도착한 안즈는, 엘을 찾다가 자신이 꽤 이르게 도착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때까지 뭘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프론트 데스크에서 졸고 있는 셀과 서류를 읽고 있는 안에게 말을 걸었다.

 “401호 승객 분 아닌가? 반갑네요. 최근에 낮에는 안 나오시고 밤에만 나오시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 생활 패턴 다 무너집니다?”

 안은 간단한 안부 인사를 전한 후 농담식으로 말을 건넸다. 그 말에 안즈는 뜨끔했지만. 안의 말에 틀린 건 없다. 왜인지 낮에는 만나주질 않는 사카사키 덕분에 새벽녘까지 깨어 있는 날이 꽤 많아졌다. 함께 일출을 보고, 사카사키가 401호에 안즈를 데려다 주면 그제야 안즈는 잠에 들었다. 그 시간이 한 아침 일곱 시 정도인가. 안즈가 깨어 나면 세상은 오후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네요. 사실 불면증이 조금 있어서요. 잠에 좋은 차를 좀 마셔야 할까요?”

 “그거라면 크루즈에서 제공하는 서비스가 있는데 승무원을 하나 붙여드릴까요? 별 다른 건 아니고, 취침 시간 즈음에 캐모마일 같은 차를 제공해드리는 서비스입니다만…. 역시 그런 일은 엘이 제격이죠. 엘을 붙여 드릴까요?”

 앗,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안즈는 안의 제안을 거절할까 싶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달라고 말하며 싱긋 웃던 참이었다.

 “이거 안즈 아냐? 여기서 또 보네.”

 안즈가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그 순간 방금까지 미소를 지니던 얼굴은 금세 어두워지고, 눈살은 찌푸려졌다. 안즈의 전 연인, 렌. 그는 여전히 음흉한 미소를 띠었다.

 “며칠 전에 갑판에서 봤을 때는 깜짝 놀랐어. 내가 술에 취해서 환각을 보고 있나 싶었다니까? 그런데 정신 멀쩡할 때 보니까 또 감회가 새롭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안즈의 목소리는 가시를 품었다. 그런 안즈의 태도에 렌은 쯧쯧 혀를 찼다.

 “너는 항상 그게 문제지. 상처 받으면 내내 뒤끝만 길어. 좀 벗어날 줄도 알아야 하는 거 아냐? 아무리 내가 좀 심한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한심하네.”

 렌의 말은 언제나 그랬듯이 날카로웠다. 그는 팔을 꼬고선 안즈를 내려다보았다. 단지 키 차이에서 오는 시선이 아니라, 무시와 조금의 연민이 섞인 기분 나쁜 시선이었다.

 “손님, 말이 좀 심하신 것 같은데요.”

 어느새 안은 서류를 내려놓고 렌을 바라보았다. 셀도 잠에서 깨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듯 했고. 점차 살기를 띠는 기류에 승객들은 예전처럼 둥글게 에워싸고 또 웅성거리기만 했다.

 “아, 할 말 있는데. 네가 그때 그 사람이지? 갑판 싸움에서 내 목을 쳐서 기절시킨 애. 한 번 더 하면 고위층에 직접 문의 넣을 거야.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세요, 네?”

 “그만해, 렌. 너야말로 지금 뒤끝 있는 거 알아?”

 렌은 안즈의 말을 무시하고서 제게 다가오는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를 끌어 안았다.

 “……제인은 어쩌자고?”

 “미안, 안즈. 나는 한 사람만 바라볼 정도로 올곧은 사람이 아니거든. 생각해보니까 나는 이제 극단에서 버린 애들을 좋아했더라. 나는 잘 나가는 배우인데.”

 안즈의 눈살이 갈 수록 찌푸려졌다. 하지만, 여느 때에서나 마찬가지로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봐봐, 너도 이 크루즈에 탄 걸 보면 제인처럼 네가 속한 극단에서 버려진 거 아냐? 이제 가치가 없는 거지, 그렇지 않아?”

 가치가 없어?

 아니야, 그렇지 않아. 안즈는 속으로 열심히 되뇌었지만, 그렇지만.

 역시 그렇지, 하고 수용하게 되는 것은 대체 어느 부분에서인 걸까. 안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를 아득 갈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덜덜 떨리기만 하는 손, 사고가 정지한 머리라든가. 하나같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받아들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랬어야 할, 그런 순간에.

 렌은 깔깔 웃다가 어느 순간 웃음을 멈췄다. 그러고선, 의식은 있는 채 앞으로 우당탕 고꾸라졌다.

 “뭐가 가치가 없고 가치가 있습니까?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손님의 말은 들어줄 가치가 없습니다.”

 엘은 검은 장갑을 낀 손을 탁탁 털며 렌에게 다가갔다. 굽이 있는 구두를 신은 그가 아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렌의 왼손을 밟았다. 아아아악! 렌은 힘껏 비명을 질렀지만 그럴수록 엘은 그의 손을 짓이겼다.

 “너, 너 이 자식이!”

 엘이 무릎을 굽혀 렌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췄다.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매 사이 번득이는 금안에 렌은 입을 다물었다. 

 “크루즈에서 계속 난동을 부린다면 최대한 가까운 항구에서 강제로 하선 조치하겠습니다. 한 달짜리 여행을, 일주일 조금 넘은 시간 동안 즐기고 버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쥐 죽은 듯 즐겨주십시오.”

 엘은 자신의 뒤에서 따라오던 두 승무원에게 렌을 객실에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렌은 빽빽 소리질렀지만 점점 들리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승객들은 다시 흩어졌고, 엘은 덤덤하게 손목시계를 살폈다. 다섯시 사 분 즈음. 엘은 안즈에게 목례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신입 교육 때문에 조금 늦어졌네요.”

 안즈는 그를 올려다 바라보았다. 엘은 눈만 깜빡이며 안즈를 내려다보았다.

 “저, 그게, 감사해요.”

 그 말에 엘은 조그맣게 미소지었다.

 “이게 제 일인걸요. 그나저나 손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안즈가 그저 그렇다며 애써 웃어보이자 엘은 안즈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엘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는 손을 조심히 잡았다.

 “제 삼 자인 제가 뭐라 말 올리는 것도 좀 그렇지만, 신경 쓰지 마세요. 대체 누가 남의 가치를 막론할 수 있습니까? 그저 남을 욕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도 있습니다. 가령 방금 승객 분처럼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시고, 신경도 쓰지 마세요.”

 엘은 그 말을 끝으로 아, 하며 제 겉옷의 안주머니를 살폈다. 작고 검은 상자 하나를 꺼내 조심히 안즈에게 건네 주었다. 안즈는 부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그 상자를 열었다. 그 속에서는 하얀 백합 모양의 브로치가 빛을 내고 있었다. 

 “저번에 목숨을 살려주신 데 있어 보답입니다.”

 엘은 살짝 미소 지었다. 안즈가 그와 브로치를 두어번 번갈아 바라보며 시선을 자꾸 바꾸었다. 이때까지 남몰래 쌓아온 이미지가 전부 무너지는 느낌은 생소하다, 역시.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런 점은 나쁘지 않았다. 안즈는 가만히 미소 지으며 감사를 전했다.

 …그런데,

 누구를 좀 닮지 않았나?


 “그렇구나, 네 이름은 준. 왜 영혼을 팔고 싶? …그렇구, 집이 가난하니, 네 영혼을 팔아서 가족들이 여생을 편하게 살았으면 하구. 기특한 아이. …….”

 사카사키 나츠메는 전화를 하며 “하지만”이라는 어두로 시작할까 말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래, 하지만. 네가 없어진다면 가족은 슬퍼할텐데. 그러나 그 말 조차도 ‘하지만’이라는 어두로 흐려졌다. 어린 아이가 제게 전화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일텐데. 혹여나 남이 부추겨서 하는 건 아닐지, 사카사키 나츠메는 수화기를 붙들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선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그래, 알겠. 지금 바로 계약해도 ?”

 건너편에서 그렇다는 목소리가 들려 사카사키는 천천히 읊었다.

 “그래, 계약자는… 너, 준. 나, 사카사키 나츠메는 책임 지고 네 가족들이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그는 수화기를 잡은 손이 아닌 다른 손으로 공중에 여러번 손짓했다. 그의 손에 주어진 푸른색의 사과, 그리고 수화기 너머 끊어진 목소리.

 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다두고 사카사키 나츠메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제 손에 주어진 푸른 사과를 보며, 다른 손으로 두어번 핑거스냅을 했다. 천천히 숨을 몰아 내쉬었다. 이 정도면, 가족들이 현재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겠지. 아마 이 즈음 됐다면 그들 손에 꽤 값비싼 보석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하지만, ……기쁠지는 모르겠다. 삼 남매의 장남이 빈껍데기만 남아버렸으니까.

 얼른 내가 사라져야지, 얼른 내가 없어져야지. 사카사키 나츠메는 푸른 사과를 그러쥐며 혼자 읊조렸다. 장장 몇 년 전만 해도 계약자가 나오면 세상 기쁘게 맞이했는데, 언제부턴가 달갑지 않았다. 갱년기도 아니고, 무슨. 평생 이십 대의 몸으로 살아가게 됐는데 그런 건 터무니 없었다. …아, 그게 문제였나. 영원한 젊음, 영원한 삶. 섣불리 사랑하다간 상처는 전부 본인의 몫, 섣불리 계약을 맺었다가는 남은 사람들의 서투른 절망을 전부 목도해야 하는 역할을 가졌다. 남의 절망이 이렇게 싫어졌던 때가 언제더라. 악마 답지는 못한 생각이지만, 그래서 죽으려고 하는 거겠지. 사카사키 나츠메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전부 끝날거야, 며칠만 지나면. 그때까지만 모두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노력하자.

 “그러면 속이는 일도 끝날……….”

 “저, 사카사키 군?”

 사카사키 나츠메는 누군가 제 팔을 건드려 돌아보았다. 갈색 머리카락의, 물색의 눈동자. 항상 웃는 모습만 보여주려고 했는데 형편 없네. 그가 금세 미소 지었다.

 “응, 좋은 밤이. 아기고양이쨩.”



4. 사사로운 이야기

“잠시만, 잠시! 기다려, 아기고양이쨩!”
안즈는 그의 손목을 잡은 손의 힘을 풀었다. 하아, 하아. 천천히 숨을 몰아내쉬고 제 뒤를 바라보았다. 사카사키는 안즈보다도 훨씬 빠르고 짧게 호흡했다.

 어쩌지, 안즈는 헉헉대는 그를 보며 천천히 생각했다. 보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봤다. 안즈가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볼 때 보던 표정과 많은 점이 닮은 얼굴. 절망적이고, 자조적이고, 희망이란 없는 듯 새겨버린 얼굴. 그리고 그때만큼은 그것이 그토록 장난스런 미소를 많이 짓던 사카사키의 얼굴이었다. 물론 그의 심연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토록 깊은 심연을 들여다 본 안즈의 첫 소감은 이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달아나서 어떻게든 그곳에서 끌어올리는 것. 아직 남을 끌어안을 수 없기에, 그것밖에 할 수 없지만…, 아니, 이게 문제다. 그래. 어떻게 설명하냐는 것. 네가 슬퍼보여서? 네가 그때 비참해보였으니까? 아니. 그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안즈는 그가 느끼는 진득한 정서를 알기에. 입을 다문 안즈와 달리 사카사키는 하아, 하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뛴 거? 하고 싶은 말이 있으 천천히 하. 나는 도망가지 않으니.”

 사카사키는 제 앞머리를 쓸어넘기고 다시 풀어 헤치기를 몇 번 반복했다. 안즈는 적당한 구실을 찾아내려 생각을 헤엄치고 있었다. 아,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무슨 말을 해야 네가 평소처럼 웃을 수 있을까. 그저 네가 여자친구의 변덕을 받아들이며 웃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상황에서 눈은 데굴데굴 잘도 굴러갔다. …아! 저거다!

 “……쇼핑, 같이 하고 싶었어.”

 안즈가 조심히 로비에 줄이은 상점가를 가리켰다. 화려한 옷가지부터, 악세사리, 귀여운 자수가 새겨진 손수건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넘실거렸다. 사카사키가 그 상점가를 쭉 바라보며 인상을 풀었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는 안즈의 옆머리를 쓸어넘겨주었다.

 “그렇구나, 다음부터는 말 먼저 해 줘야? 상점 마감 시간이 임박했다하더라 갑자기 뛰면 곤란하니.”


 크루즈의 상점가는 대체로 잡상인들이 운영했다. 매번 승선 때마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의 탑승을 허가해주는 모양이다. 물론, 별로 좋지 않은 상품을 파는 상인을 들이는 것은 관계자 측에서도 곤란하다. 그래서 그런지 화려한 드레스들의 옷감은 도시에서 사는 것보다 몇 배는 고왔으며, 반짝거리는 보석의 가공은 하나같이 장인의 솜씨를 거친 것이었다.

 “사카사키 군, 저것 봐. 원단 진짜 예쁘다!”

 안즈가 포목점에 들어서자 재봉틀 소리가 끊겼다. 사카사키도 이리저리 둘러보며 함께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세자매 포목점에 오신 걸 환영해요.”

 수많은 원단들 뒤에서 한 명, 한 명, 한 명, 총 세 명이 빼꼼거렸다. 셋째로 보이는 한 여자는 가장 밝게 인사했고, 둘째로 보이는 한 여자는 조심히 원단 상태를 살피며 여러 장식을 포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첫째로 보이는 여자는 재봉틀을 사용해 드레스를 만들고 있었다.

 “여긴 어떤 곳인지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

 사카사키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앞의 여자는 이런저런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는 포목점. 포목점이라는 말 그대로 원단을 파는데, 언니들의 재주가 좋아서 여러 장식들도 만들고 원단을 고르면 이 주 안에 옷을 만들어주고 있다고. 안즈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듣고 있었다.

 “……이 정도예요! 그런데 혹시, 그쪽들 커플? 연인?”

 “아니에요.”

 사카사키는 “보이는 그대.”라며 안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볼까도 고민했지만, 안즈의 단칼같은 답변에 “그래, 그렇지.”라며 후후 웃을 뿐이었다.

 “에이, 아쉽다. 그럼 즐거운 구경들 하세요!”

 셋째는 제 언니들에게로 총총 걸어갔다. 사카사키는 분홍색의 고운 원단을 보고 있는 안즈의 귀에 속삭였다.

 “왜? 우리 사랑하는 사이 아니었?”

 “아직 아니야, 이 정도가 사랑이라니 인정 못해.”

 농을 치는 듯 단칼에 거절하는 안즈에, 사카사키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게 봐도 안 돼.”

 “그래, 뭐. 내일이 내가 네 남자친구인 걸 너도 인정하겠.”

 “크루즈에서 하선하는 날에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는데.”

 “너무하네, 쌀쌀맞.”

 사카사키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곱게 만들어진 장신구가 줄지은 진열대에 다가갔다. 머리핀부터 머리띠, 브로치와 목걸이. 하도 반짝거려서 눈을 질끈 감을 정도였다. 사카사키는 장신구들을 훑어보았다. 뭐가 잘 어울리려나, 저 옷에는 이것도 잘 어울리겠지. 그러다 뭔가를 발견하고는 계략을 세운 듯 이상하게 웃어버렸다.

 안즈는 방금 상점 소개를 해 준 여자와 잔뜩 떠들고 있었다. 어쩐지 쑥스러워하면서도 넓게 펼쳐진 옷감들 옆에 여러 번 서 보았다. 그러자 어울린다느니, 손님을 위해 만들어진 옷감이라느니 왠지 진심으로 들리는 소리가 오갔다. 안즈가 배시시 웃으며 감사합니다, 라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할 때 그 여자는 이 옷감 저 옷감 다 들고 오고 있었다. 귀족 부인들은 까다로우니까, 저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안즈와 대화하니 훨씬 편한가보다. 그러다보니 안즈의 품에는 수많은 옷감이 들려 있었고, 사카사키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무슨 원단이 가장 잘 어울리는지 저울질하고 있었다.

 “저, 아기고양이쨩?”
제가 그의 남자친구라는 듯, 그렇게 도장을 찍어버리듯 웃어보인 사카사키에 안즈는 무미건조하게 반응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살짝 놀라서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남이 다 있는 데 그런 호칭은 안 돼, 안즈라고 불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의 입을 틀어막느라 한 뼘 가까워진 둘 사이의 거리를 사카사키가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그는 자연스레 안즈를 제 쪽으로 조금 더 당기고선, 제 손에 들려 있던 장신구를 안즈의 머리에 씌웠다. 딸랑, 청량한 방울 소리가 들리며 안즈가 깜짝 놀랐다.

 “뭐야? 뭐 한거야, 사카사키 군?”

 “거울이 어디있으려, 매장에서 잘 찾아?”

 안즈는 제 품에서 조그만 거울을 꺼내 제 머리를 살폈다. 검은색 고양이 귀가 안즈의 머리 위로 빼꼼 튀어 나와 딸랑딸랑 방울 소리를 냈다. ………! 안즈의 얼굴이 그라데이션 마냥 점차 붉어졌다. 그러나 부끄러워하는 것도 잠시, 장신구가 놓인 곳에 타박타박 걸어가 하얀 고양이 귀 머리띠를 사카사키에게 들고 갔다. 사카사키가 씌우려는 손길을 요리조리 피하며 안즈의 얼굴을 살폈다. 그래, 귀엽네. 큭큭 웃다 방심한 사이 저에게도 머리띠가 씌워졌다.

 저도 먼저랄 것 없이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세번 정도 꼼꼼히 살피다가,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푸흐흐, 푸하하! 잔뜩 폭소했다. 결국 둘은 포목점에서 각각 색만 다른 고양이 귀 머리띠만 가져가는 참이다.

 문득, 계산을 하던 중 셋째인 점원은 사카사키를 쏘아보며 말했다.

 “연인 사이 아니라면서요? 하는 것만 보면 완전 연인인데.”

 “연인 맞아. 그런데, 보시다시피 제 여자친구가 낯을 많이 가려…”

 “절대 아니에요, 절대!”

 싱글생글 미소만 짓는 사카사키가 오늘따라 밉다. 안즈가 골을 짚으며 숨을 후 내쉬었다. 머리가 뜨거웠다. 머리 좀 식히겠다며 먼저 나간 안즈에게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줬다.


 “저, 그런.”

 “네?”

“저기 하얀 원단이, 분홍색 원단은 포인트로 해 정장과 드레스를 만들어주실 수 있을까?”

 “그럼 치수를….”

 “눈대중으로 해도 맞을 겁니.”

 사카사키가 웃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점원에게 줘야할 것보다 더 주고는 뒤로 돌아 안즈를 쫓았다.


 “어디로 간거.”

 사카사키가 마른 세수를 하며 주위를 살폈다. 이제 슬슬 폐점 시간이라 남아 있는 상점도 많이 없는데, 어째서인지 안즈는 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뭐, 네가 날 두고 떠날 리는 없으니까. 안즈의 성격을 되짚어보고는 그저 웃어버리는 사카사키 나츠메는, 주변을 둘러보다 각종 보석으로 만든 악세사리를 취급하는 상점을 발견했다.

 “어서오세요, 손님.”

 단정한 차림을 한 노부부가 정중하게 그를 맞았다. 하얀 천 위로 정성스레 한땀한땀 빚어진 악세사리들이 반짝 빛났다. 사카사키는 꾸벅, 가볍게 목례하고 가만히 상품을 살폈다. 붉은 가넷을 포인트로 한 목걸이, 푸른색 사파이어가 반짝 빛나는 반지. 사카사키 나츠메는 호오, 하는 눈빛으로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그 사이 안즈, 안즈는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화장품 사이 둘러싸여 있었다. 상점가를 정처 없이 둘러보다가 보인 화장품 가게에 이끌리듯 들어갔다. 화장을 즐겨하는 편은 아니지만, 연극 일 때문에 화장은 물론 분장도 꾸준히 해 왔다. 크루즈에서 나가면 화장에 관심이 많은 동료나 선배에게 선물이나 해야겠다, 생각하며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

 방금부터 이상하게 달라붙으려 하는 한 남자를 떨어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 화장품 상점의 점원같은데, 어째서인지 계속 은근히 붙어 말을 건네왔다. 열심히, 열심히 무시하며 각종 파우더와 연지, 립스틱을 둘러 보고 있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사카사키 나츠메가 제 곁에 있다면 좋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애가 여기 있을 리가 없지. 안즈가 숨을 푹 내쉬었다. 방금까지 있던 포목점에서 꽤 거리가 있는 상점이다. 그라면 아마 포목점 주변 상점에서 다른 물건을 구경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돌아올 거라는 걸 어지간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안즈는 거의 반 포기한 채 다시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립스틱이 줄 지은 선반에서 걸음을 멈춰서고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며 무슨 색이 잘 어울릴까 여러모로 비교해보았다. 그때도 끈덕지게 달라붙는 저 남자 때문에, 살짝 어질할 지경이었지만.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애써 에둘러 거절한 안즈의 마음은 알 바가 아닌 모양이었다. 대충 잘 어울려 보이는 걸로 하나 사고 얼른 나가자, 그렇게 다짐하고 립스틱을 하나 집어든 뒤 결제했다. 상점에서 입술에 천천히 발라보았지만,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점원 때문에 영 집중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조금 번졌다. 그리고 그 덕에 상황은 점입가경이었다. 그래, 대충 손으로 닦아내려는 안즈와, 계속 붙으며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라며 음흉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한 남자. 그리고, 그 광경을 목도한 사카사키 나츠메.

 “아기고양이쨩, 립스틱 샀구?”

 어딘가 불만이 있는 듯 구두 굽 소리를 딱딱 울리며 그가 화장품 상점에 들어섰다. 사카사키는 안즈에게 쑥 가까워지더니, 시선을 내렸다. 살짝 지쳐 보이는 푸른 눈, 조금 번진 립스틱 자국. 립스틱을 쥔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가 안즈의 얼굴을 조심히 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에서 립스틱을 가져간 뒤 천천히 안즈의 입술에 발랐다. 빈 곳이 없게, 꼼꼼히. 급하게 바르느라 제대로 칠이 되지 않은 입술에 꼼꼼히 칠했다. 간지러운 건지, 이 거리가 부담스러운 건지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안즈에, 사카사키는 칠을 끝낸 후 이마를 콩 부딪혔다.

 “좋은 립스틱이, 향도 있.”

 “응? 아, 응. 무슨 향인 것 같아?”

 애써 웃으며 눈을 돌리는 안즈에,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던 사카사키가 중얼거렸다.

 “키스해도 ?”

 안즈의 눈이 커졌다. 샛노란 눈의 까만 동공이 무서울 정도로 가까웠다. 안즈는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는, 가까워지는 체온을 살결로 느꼈다. 서로의 숨소리와 심장 박동만이 둘을 이루고 있을 것 같을 때, 사카사키 나츠메는 싱긋 웃으며 안즈의 어깻죽지에 제 얼굴을 묻고 그를 끌어안았다. 안즈가 눈을 점차 뜨고, 그 눈은 갈 곳을 잃은 채 좌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카사키 군?”

 “누구?”

 “응?”

 “아까부터 계속 따라붙는 사람 말하는 거.”

 “그게, …나도 잘 모르겠어, 계속 따라붙어.”

 사카사키가 고개를 들어 그 남자를 응시했다. 한껏 당황한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크게 벌린 남자의 얼굴. 그래, 볼만하네. 세상과 작별을 시켜줄까도 고민했다. 사람 하나 없애는 것 정도야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뭐, 살생은 내 연인이 싫어해. 사카사키는 생각을 끝낸 후 안즈에게 중얼거렸다.

 “정강이를 확 차 버리면 안 되겠?”

 안즈가 그의 말을 듣고 사카사키의 품에서 벗어났다. 뒤를 돌아 그 점원에게 다가가서는, 왼쪽 정강이를 빡,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후렸다. ‘후리다’라는 표현이 적격할 정도로 시원하게 점원을 넘어뜨린 안즈가 숨을 내쉬고 사카사키에게 웃어 보였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사카사키는  함께 큭큭 웃어버렸다.


 “사카사키 군, 화났어? 미안해, 진짜야.”

 산 것을 정리하느라 안즈의 객실에 들어선 사카사키는 침대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방금 막 씻고 나온 안즈를 바라보고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 세게 토라졌다. 웬만한 고양이보다 달래주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즈는 그의 옆에 살포시 앉았다.

 뭐, 이 정도로 간단히 끝낼 생각은 없지만. 안즈는 제 양팔을 가볍게 벌렸다.

 “안아도 돼.”

 그런 안즈를 눈을 흘기며 바라보던 사카사키는, 절대 그러지 않을 줄 알았으나, 안즈의 허리를 확 끌어안고 제 쪽으로 당겼다.

 “…그런 건 내쳤어야.”

 “미안해, 하도 거절했는데 떠날 생각을 않더라고.”

 “나는 네 연인이, 적어도 여기 있는 동.”

 “알고 있어.”

 “그러면 그렇게 대우해.”

 “그럼, 오늘 같은 일은 다시 없을거야.”

 사카사키의 머리칼을 조심히 훑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럴 때 보면 삼 백 년 산 악마가 아니라 제 또래의 사람 같다. 그것도 막 이제 첫사랑을 시작한 사람. 제 사람이 떠나려하면 어떻게든 붙잡을 듯한, 귀엽고 무서운 구석까지 가진 사람같았다. 귀엽네, 귀여워. 후후 웃던 안즈는 그를 안고서, 뒤로 훅 넘어가버렸다.

 문득 넘어가는 중심에 사카사키가 당황해하며 손을 풀고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미 늦었다. 안즈는 침대에 콩 부딪힌 지 오래였고 저는 그 위에서 어떻게는 닿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안즈가 잡아 당기는 바람에, 둘은 사이 좋게 침대에 누웠다. 아주 밀착한 채.

 “피곤하네. 미안, 먼저 잘게. 잘자, 사카사키 군.”

 사카사키가 그 말에 안즈를 급하게 바라보았지만 정말 눈을 감고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지금말야, 네가 뭘 한지 모르는 거야? 심장이 빨랐다. 미치도록 빨라서 죽을 지경인데, 제 옆에 누운 사람은 평온하게 잠이나 청하고 있다. 게다가, 벌써 잠들었다. 그가 제 얼굴을 감싸며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밤 동안 자는 얼굴이나 구경할게. 그게 네가 원하는 거지? 혼자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안즈를 향한 시선을 놓지 않았다. 색을 바르지 않아도 충분히 예쁜 입술, 오밀조밀 모인 이목구비 중 코, 속눈썹이 있고 둥글게 생긴 예쁜 눈. 그리고…… 내내 화장으로 가리고 있던 꽤 짙은 다크서클.

 “잠을 잘 못 ?”

 그가 홀로 중얼거렸다. 다크서클을 살짝 훑었다. 그래, 방의 양초도 라벤더 향이 물씬 느껴지는 향초로 잘 바뀐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너말야, 크루즈 서비스 중에 차를 내어주는 서비스도 신청했던데. 그 명단에 네가 있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네, 그렇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손으로 가볍게 입술을 훑기도 해 봤다. 어떡하지, 나는 정말 네가 좋은가본데, 너는…. 안즈를 조심히 안고서 어깻죽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은은한 과일향이 살결에 감돌았다.

 “………한 번만…… 다시,”

 얼굴을 파묻다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안즈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게다가 눈물까지 맺혀 스르르 흘러내렸다. 그가 안즈를 다시 끌어 안고서는, 괜찮아, 하고 중얼거렸다. 위축된 등을 조심히 토닥였다. 안즈의 인상이 풀렸다. 다행이다, 사카사키가 안즈의 얼굴을 바라보고서 웃었다. 그때 즈음, 안즈는 조심히 눈을 떴다. 완전히 뜬 것도 아닌, 세상 모든 게 흐리게 보일 눈을 떴다.

 “……엘?”

 홀로 중얼거리는 안즈에, 입술을 말아넣는 사카사키 나츠메.


5. 열리는 이야기

 안즈가 조심히 눈을 떴을 때, 그의 행동은 분명 밤중 그곳에 있었을 무언가를 그러쥐는 듯했다. 하지만 뚜렷한 형체는 그러쥐지 못하고, 바스락거리는 하얀 이불만 그러쥐었을 때 안즈는 눈을 다시 감았다. 어제 본 건 애매한 허상이었나, 그래, 그렇지 뭐. 악몽이 잦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은 절실한 마음에 환각을 보는 일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어제는 분명 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것만큼은 허상이라고 간주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똑똑.

 가벼운 노크에 안즈가 잠옷 차림인지도 모르고 문을 열었다. 앗, 적장발의 남자. 엘은 노란 눈을 연신 깜빡이며 안즈의 차림과 마주했다. 그의 시선에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제 위아래를 훑어 본 안즈는 금세 얼굴이 달아오르며 “저, 죄송한데, 딱 3분. 딱 3분만 뒤에 다시 노크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외쳤다. 엘이 그러겠다고 말한 것도 듣지 못한 채 문을 쾅 닫고서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3분 뒤 즈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 안즈가 문을 열었다. 엘이 문 너머로 방을 살짝 둘러보았다.

 “티 서비스를 신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셀에게 부탁해 양초도 라벤더 향초로 바꿨는데 마음에 좀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안 그래도 감사 인사하려고 했어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어제 잘 잤어요.”

 “안색이 그리 밝지는 않으신데요.”

 그가 애써 미소 지었다. 안즈가 그 얼굴을 보고서는, 홀로 중얼거렸다.

 “…닮았네.”

 “네?”

 “아, 그게 아니라,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그 쪽과 닮은 사람이 있어서요.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은근히 생각하고는 있었어요.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엘이 살짝 고개를 푹 숙여 모자를 정리했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승무원이 승객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도 웃기지만…”

 “아뇨, 괜찮아요. 뭐든 편하게 말해주세요.”

 엘은 잠시 눈을 흘겼다. 본인도 이 상황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느 정도의 상념을 마치고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흘간 셀을 돌봐주실 수 있으실까요?”


 안즈는 홀로는 처음으로 갑판에 올라갔다. 갑판에 서자 푸르른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항해하고 있는 크루즈의 상황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하긴, 하도 실내에서만 있긴 했지. 가끔은 밖에 나오는 것도 좋네. 난간을 붙잡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쪽은 물이 맑은지 작은 물고기가 열심히 도망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러고선 다시 시선을 올려 가까워지고 있는 육지를 바라보았다. 작은 마을이 모이고 모이다 작은 도시가 된 항구도시였다.

 저기가 이 크루즈의 목적지는 아니다. 그러나 크루즈가 저 항구도시에 정박하려는 이유는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첫째, 연료가 부족하다. 둘째, 식재료가 생각보다 금방 동났다. 셋째, 선박에 작은 흠이 생겼다. 엘은 그 말 뒤로, “식재료가 부족한 건 정말 놀랐습니다. 여태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거든요.”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저 항구도시에 정박하는 일수는 딱 사흘이렸다. 절대 넘기지도, 남지도 않을 거라며 딱 사흘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때 그가 부탁한 것. 안즈는 바닷바람에 눈을 살짝 감으며 대화를 떠올렸다.

 “정비는 저와 안이 주를 맡습니다. 하지만, 셀은 아직 열댓살이라서요. 대화해서 아시겠지만 아직 미숙한 면도 많고 가만히 두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제 몫의 일을 적당히 잘 해내고 있나만 봐주시면 됩니다. 셀은 보통 프론트 데스크에 많이 있으니까 가끔 들러 봐주세요.”

 사례는 분명히 하겠다는 엘의 말에 손사래를 치고 오는 길이다. 이미 받은 것만 왕창인데 뭘 또 받느냐, 프론트 데스크에는 자주 가니까 정말 괜찮다고 호들갑을 떨며 거절했다. 엘은 그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상관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자신이 도와줄 차례라고 마음에 새겨둔 지 오래였다.

 바닷바람이 시원했다. 그래도, 겨울이지. 이제 슬슬 눈이 녹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쌀쌀한 날씨는 부인할 수 없었다. 이제 돌아가야겠다. 안즈는 뒤를 돌아보았다.

 “……안즈?”

 갑판에서 검은 긴 생머리의 여자가 눈을 깜빡였다. 안즈가 푸르고 큰 눈을 연신 깜빡이다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유리아!”

 안즈가 유리아에게 다가갔다. 유리아도 반색하며 반갑다는 듯 활짝 웃었다.


 “네가 여기 타고 있을 줄 상상도 못했어. 아니, 왜 이리 크루즈 안에서 아는 사람을 많이 만나지?”

 유리아는 식은 핫초코를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는 듯 외쳤다. 안즈가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시고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응, 역시 지금 봐도 예쁜 아이다. 검은색 긴 생머리에, 초록 눈. 항상 해맑고 긍정적인 유리아는 안즈를 바라보고서 웃고 있었다.

 유리아 역시 극배우다. 안즈와는 다른 극단이지만, 다른 극단과 함께 하는 연극에서 처음 만났다. 주인공 자매를 하나 하나 맡았는데, 그 조합이 상당히 많은 인기를 얻어서 제법 다른 작품들도 함께 맡았다. 생각해보니 그 극도 유리아의 극단과 함께하는 거였나. 내용을 잊어버리려 노력해서 그런가, 대사 한 줄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이것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는 이야기, 사랑이 당신을 구원하기까진.’

 “유리아, 아직도 렌이랑 같은 극단이야?”

 “아, 응. 진짜 너무 싫어서 모함을 해 볼까도 고민했는데, 이번 극이 끝나면 제 발로 나갈 것 같더라고. 걔 또 바람났더라. 이번에 우리 극단이 크루즈에서 연극하기로 해서 같이 들어왔는데, 진짜 가증스러워. 별로.”

 유리아는 여전했다. 안즈가 렌과 좋지 못한 사유로 헤어지고, 렌이 제인과 연애하다 또 바람 피웠을 적보다 훨씬 전부터 유리아는 렌을 혐오하듯 했다. 같은 극단이지만 절대 말 한 마디 섞지 않는다. 사랑 이야기의 극에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자리에 렌과 유리아가 오른다면, 유리아는 절대 연기에 제대로 임하지 않았다. 물론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지만, 안즈는 그런 유리아가 좋았다. 줏대 있으니까, 누구처럼 이리저리 붙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나저나, 안색이 밝아보여서 다행이야. 물론 상대적이지만. 네가 잘 되지도 않는 연기를 꾸역꾸역 하고 있을 때보다 훨씬 나아. 다행이다, 안즈. 솔직히 그 ‘환상'이라는 극 나도 마음에 안 들었어.”

 아, 맞다. ‘이것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는 이야기'라는 대사가 있던 극제목이 ‘환상’이었다. 그 극은 유리아의 극단과 합을 맞춘 거라 기억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극이 안즈의 마지막 극이었기 때문이지만. 무대도 하지 못하고 끝나버린.

 “그래? 다행이다. 크루즈 며칠 타고 있을 때는 너무 싫었는데, 좀 지나니까 몇몇 개는 그냥 잊어버린 것 같아.”

 “응, 훨씬 낫다. 뭐, 새로운 취미라도 찾았어? 너 바느질 좋아했잖아. 자수라도 다시 두기 시작한 거야?”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내일은 자수 둬야겠다.”

 “엥, 새로운 취미가 생겨서 안색이 밝은 게 아니었어? 그럼 뭐지, 으음. 그런가, 아, 그건가보다.”

 유리아는 몇 번 중얼거리다가 다 안다는 듯 씨익 웃었다. 안즈가 그런 유리아의 웃음에 당황하다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사랑? 그런거지? 맞지?”

 “아, 아니야. 절대로!”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전부 실패했다. 안즈의 반응에 유리아는 오, 오오, 그렇구나, 그렇게 추임새를 넣더니 곧바로 질문에 접어들었다.

 “잘생겼어?”

 “아니라니까, 유리아.”

 그렇게 부인하면서도 안즈는 어쩐지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빨간 머리, 하얀 브릿지. 꽁지마냥 튀어나온 머리칼 하나. 노란 눈. 점점 뚜렷해지는 누군가의 모습에 안즈의 얼굴은 점점 달아올랐다.

 “진도는 어디까지?”

 팔짱을 꼬고 한창 재밌다는 듯 바라보는 유리아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유리아의 뜬금 없는 질문에 그 장면이 자연스레 빼꼼 고개를 내미는 건 대체 어떤 이유에서인가. 거기 그 장면. 화장품 상점의 직원에게 꽤나 당혹을 먹고 있을 때, 잔뜩 화난 그가 다가와서 했던 말. ……….

 “승객분들에게 알립니다! 잠시 후 항구에 정박할 예정이오니 자리에 앉아 계셔 주시길 바랍니다. 선체가 흔들릴 수 있으니, 마땅히 앉을 자리가 없다면 무엇이라도 잡고 있어 주시길 바랍니다!”

 카페에 들어선 셀이 힘껏 외쳤다. 유리아가 “아, 맞다.”라며 해야할 일이 있다고 말하고서는 화제를 옮겼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안즈는 콩콩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만 내 머리에서 나가줘, 제발, 사카사키 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말하지 않을 말을 대강 떠올리고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항구 도시에 도착하고 이틀 간은 별로 바쁠 것도 없었다. 유리아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엘과 사카사키, 셀이나 안을 제외하고도 이야기를 할 상대가 생겼고, 엘에게 부탁받은 사항은 십분 간단했다. 한두어 시간 정도 간격을 두고 가끔 셀을 보러가는 일이면 되었다. 엘은 생각보다 남 걱정을 과하게 하는 타입인가 보다. 안즈가 유독 자주 프론트 데스크에 들린다는 것을 알아챈 셀이 캐물었을 때, 결국 안즈는 엘에게 부탁받은 것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셀은 이때까지 엘에게 들은 말 중 가장 터무니 없고 화나는 이야기라는 식으로 외쳤다.

 “아니, 저도 열여섯인데 엘은 뭐하러 그런 걸 부탁한대요? 나참, 허. 오늘 들어오면 한 소리할게요. 감사해요.”

 듣자하니 엘도 서른이 안 되는 모양인데 잔소리하고 참견할 여력은 있나보다.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안보다 엘의 참견이 더 심하다고. 안즈는 숨을 내쉬며, 그렇구나. 그렇게 대답하고 나오는 참이었다.

 가장 바쁜 건 마지막 정비일인 사흘 째였다. 마지막이라니 왠지 크루즈 사람들이 쭉 항구쪽으로 나와 항구도시를 구경하자는 분위기에 휩쓸렸다. 그 덕분에, 사흘 째에 늦잠으로 일어난 안즈는 썰렁한 선내를 보고서 제가 아직 잠이 덜 깼나 싶기도 했다.

 썰렁한데 넓기는 아주 넓은 크루즈 안에서 거의 홀로 있는 것은 굉장히 애매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할까 싶어 가방을 열었다. 웬만한 옷은 다 한 번씩 걸쳐 입어본 것 같다. 그래도 오늘은 여행 목적이니까, 안즈는 승선 거의 첫날에 입었던 옷을 꺼냈다. 그때는 다 망쳤지만, 지금이라도 스타트를 잘 끊을 수 있다면 상관 없다. 안즈는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그 아래에 남색의 롱스커트를 입은 후 검은 벨트로 고정했다. 엘이 언젠가 주었던 백합 모양 브로치를 겉옷에 달았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크루즈 상점가에서 샀던 립스틱을 발랐다. 그러고보니 그때, 급한 마음에 칠이 잘 되지 않은 안즈의 입술에 사카사키가 직접 칠을 했던가. 그 일이 떠오르자 립스틱을 쥔 손에서 힘이 훅 빠져버렸다.

 밖으로 나서자 바다 특유의 짠내가 올라오면서도 청량이 온몸을 감싸안았다. 항구도시에 내리쬐는 햇살은 겨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반짝거렸고, 도시는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한 번 둘러볼 때는 하얀 건물을, 두 번 둘러볼 때는 하얀 건물들 사이에 빼꼼거리는 형형색색의 천막을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다니느라 활기가 흘렀고 마을 사람들은 불화 없이 내기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어쩌면 당연한가, 안즈가 이때까지 살았고, 살아왔던 예술의 도시라는 곳은 겉만 휘황찬란하지 속내는 썩어 문드러졌으니까.

 사뿐사뿐 걷자 축제 분위기인 것이 물씬 느껴졌다. 시장에 들어서자 형형색색의 천막 아래서 사람들은 제가 직접 만든 공예품부터 음식이나 수예품까지 팔고 있었다. 아이들이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뛰어다녔고, 열심히 채소를 옮기고 있는 사람들이 넘어질 뻔 하고, 그 뒤에 서 있던 공작들이 “에크!”라며 품위를 잃었다. 그 모든 게 웃겼다. 그래서, 안즈는 주체하지 못하고 푸하하 웃으며 시장거리를 구경했다.

 “거기 언니, 이거 하나만 사주시면 안 돼요?”

 안즈가 어느 가게를 지나치고 삼 초 후쯤 누군가 외쳤다. 그 말에 자연스럽게 뒤 돈 안즈는, 금발에 녹안을 가진 한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소녀는 안즈와 구면인 마냥 이리 오라고 손짓했고, 안즈는 눈만 깜빡이다 인파에 휩쓸려 보기 좋게 그 소녀 앞에 도착했다.

 “야, 호객 행위는 적당히 하라니까.”

 뒤에서 금발에 녹안을 가진 한 소년이 빈축했다. 소녀는 입을 삐죽 내밀며 가볍게 무시하고, 자연스레 안즈에게 붙었다.

 “저희 마을 오늘이 축제 마지막인데, 저희 가게가 생각보다 잘 못 팔았어요~. 하나만 사 주시면 안 될까요?”

 어린 아이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그 당돌함. 안즈는 그 당돌함에 주춤 뒤로 발걸음질 쳤지만, 생각해보니 조금 측은해져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진열대에는 별사탕 모양을 주로 한 악세사리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런 별사탕 모양이 포인트인 물품을 시장을 돌아다니며 많이 보았다. 분명 자수도 별사탕 모양이었고, 시계도 별사탕 마냥 삐죽삐죽했고…. 안즈가 물품을 보며 상념에 빠진 걸 그 소녀는 쉽게 알아챘다. 그 소녀는 후후, 하며 입을 뗐다.

 “저희 마을 시그니처랄까요?”

“시그니처?”

 “네. 저희가 항구 도시긴 한데요! 별이 진짜, 진짜 잘 보여요. 어느 정도냐면 내로라하는 천문학자들도 유성이 떨어진다 하면 저희 마을에 온다니까요? 그 사람들 말로 하면 오늘 별이 떨어진대요. 그래서 방문객들이 많은 날 맞춰서 축제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별을 주제로 한 물품이 많은 거죠!”

 안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다, 좋네. 하나 정도는 기념으로 가지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팔찌를 살까, 목걸이를 살까. 뭐든 예쁘네. 안즈가 잠깐 대보기만 해도 되냐 물었다. 소녀는 아무렴 좋다는 듯 거울까지 내밀었다. 파란 별이 중앙에 반짝이는 목걸이를 들어 제 목에 잠깐 대어 보았다. 하얀 블라우스 위에서 파란 별이 살랑 흔들렸다. 이걸로 할까. 거울을 빤히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예쁘다고 해 줄까…….”

 “네? 손님, 남자친구 있어요?”

 거울을 들고 있던 소녀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안즈는 헙, 하고 제가 한 말을 어떻게든 주워 담으려 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아니에요, 없어요.”

“그럼 방금 말은 뭐예요? 아, 혹시 짝사랑 중이신……”

“그, 그건 더 아니에요!”

 안즈가 손사래를 쳤다. 급한 마음에 금발 머리 소년에게 다가가 결제해달라고 부탁했다. 어쩌지, 목덜미가 홧홧했다. 어떡해, 계속 네가 떠올라. 빠르게 목걸이를 결제하고 작은 종이 봉투에 담아 가게에서 뛰쳐 나왔다. 그러나 가게 입구를 막 빠져 나갈 즈음, 뒤에서 방금 그 소녀가 힘껏 외쳤다.

 “저희 가게 전설이 하나 있어요!”

 안즈가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소녀가 지금만큼은 진심이라는 듯 안즈의 손을 꼭 쥐고선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이거, 생각보다 오래된 가업이거든요. 저희가 벌써 사 대째예요. 그래서 생각보다 유명한 전설이 하나 있는데요,”

 소녀가 안즈의 귀에 비밀이라는 듯 장난스레 속삭였다.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 이렇게 보색으로 악세사리를 산 다음 나눠가진 사람들은 어떻게든, 꼭 연인이 된대요. 그리고 그 인연은 워낙 질겨서 잘 끊어지지 않는데요.”

 어떻게 호응해주고 다시 갈 길 갔으면 됐을텐데, 그럼 됐을텐데. 그 말에 혹할 건 무엇인가. 결국 노란 별이 찰랑거리는 팔찌까지 구매하고 나서야 숨을 놓았다.

 “응원해요!”

가게를 나설 즈음에 소녀는 힘껏 외쳤다. 안즈는 고개를 꾸벅하고, 가게를 나왔다.


 시장 구경을 조금 더 하자 짐은 늘었고 해는 저물었다. 안즈는 제 손에 얌전히 남아 있는 노란 팔찌가 담긴 봉투를 가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꾹 쥐었다. 좋아해줄까? 그러면 좋겠다. 침을 잠깐 삼키며 손에 힘을 풀고 웃었다. 그러다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 안즈가 그 시선을 의식해 조금 고개를 들어올렸다. 담장 위에서 뾰족한 귀를 가지고 꼬리를 살랑거리는 한 물체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저문 해에, 하필 그 물체가 해를 등지고 있어 샛노란 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대강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고양이다! 조금 더 형체가 나타나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가만히 지켜 보고 있을 적에, 그 고양이는 성큼 뛰어 안즈에게로 거의 날아올랐다. 그러고서 안즈의 손에 쥐인 것을 확 낚아채고 다시 또 성큼 뛰었다. 폴짝, 폴짝. 안즈는 눈을 깜빡이며 제 손만을 바라보았다. ……팔찌! 무엇이 없어졌는지 금세 알아챈 안즈는 기함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하필 그걸 훔쳐가! 고양이의 뒤를 쫓는 안즈는 찰랑찰랑 소리를 분명 들었다. 팔찌의 체인이 휘날리며 노란 빛이 반짝거렸다.

 고양이는 어느새 풀숲까지 들어가 온통 나무를 비집었다. 잔디를 비집는 소리가 사사삭 들려오고, 안즈는 애써 큰 길로 돌아가보고자 했으나 다른 길이 없어 결국 풀숲을 가로질렀다. 가끔 찔러대는 나뭇가지를 손으로 내치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고양이는 세상 현란하게 도망쳤다. 이리저리 도망치고, 또 도망치며 자신의 입에 물린 것을 뺏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그건 안즈도 마찬가지였거든. 처음으로 주는 선물이었다. 꼭 주고 싶었다.

 고양이가 수풀을 파삭, 하고 벗어났다. 수풀을 헤치고 지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안즈는 헉헉거리며 샛길로 돌아갔다. ……안 보여. 안즈가 고개를 푹 숙이고 숨을 몰아내쉬었다. 아, 이렇게 되어버렸네. 어느새 세상은 깜깜했다. 더 찾기도 무리였다. 항상 왜 일은 되는 게 없을까. 잠시 묻어뒀던 부정적인 생각까지 방파제를 넘어 흘러넘치려고 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왜 이럴까, 미안해. 그러나 그 생각을 비집듯, 야옹거리며 반항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남의 물건을 뺏으면 안 돼, 고양아.”

 이제야 위를 올려다 본 안즈의 눈이 커졌다. 별하늘 아래, 쏟아지는 유성우. 구름 하나 없는 깨끗한 겨울 하늘 아래 풀숲 언덕에는, 한 남자가 위스키 한 병과 함께 앉아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칼을 가지고, 하얀 브릿지를 했으며, 백정장을 입은 남자. 그는 고양이의 팔을 붙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애옹거리며 고양이가 반항하다 결국 포기한 듯 제 입에 물린 것을 놓았다. 그제야 그 남자는 고양이를 놓아주었다. 그러고선, 언제부턴가 느껴진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엘?”

 안즈가 그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엘은 가만히 눈만 깜빡거리다 힐끗 웃었다. 그의 얼굴은 조금 붉었다. 반 정도 남은, 도수가 꽤 높은 위스키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손님께서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그가 남은 잔 하나를 꺼내며 물었다. 승무원이 승객에게 술을 권하는 건 분명 말이 안 될텐데, 그걸 어엿한 성인인 둘 다 분명 알고 있을텐데. 안즈는 조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날에 조금은 괜찮지 않나. 안즈는 잔을 받고 엘은 술을 따랐다. 누구도 무어라 하지 않았지만 가볍게 잔을 부딪히고 한 모금 홀짝거렸다.

 “여기는 처음 봐요. 어떻게 알고 여기 오셨어요?”

 “첫째날에 시장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어영부영 헤매다가 발견했어요. 별이 특히 예뻐서 보여서 사흘 째에는 와서 구경이라도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게요, 고양이 덕분에 좋은 구경하네요.”

 엘은 제 손에 얌전히 놓인 종이봉투를 그제야 안즈에게 내밀었다. 안즈가 고개를 꾸벅하며 감사를 표하고 종이봉투를 받았다. 엘이 가만히 바라보다가,

 “선물용인가요?”

 “아, 네.”

 엘은 안즈의 대답을 듣고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러고선 차가운 밤 공기에 혼자 중얼거렸다.

 “부럽네요, 선물 받는 분은.”

 앗, 그 말에 안즈는 눈만 깜빡였다. 샛노란 눈이 오늘따라 누군가를 더 닮았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응석부리는 것 마저도.

 “……그, 이것 봐요.”

 안즈가 제 겉옷을 가리켰다. 백합 모양 브로치가 별빛에 조심히 인사했다. 엘은 그 브로치를 사뿐 바라보다가, 이내 웃었다. 하하, 입을 가리고, 눈을 초승달처럼 접고 그는 이야기했다.

 “잘 어울리네요, 맘에 드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안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매해진 분위기에 위스키만 한 모금 더 마셨다. 엘의 잔이 거의 비워져서 이번에는 안즈가 술을 따라주었다.

 “별을 좋아하시나요?”

 엘이 묻자 안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멍 때리면서 보기 좋다고 생각해요. 바다 다음으로.”

 “뭐, 바다는 질릴 정도로 많이 보시지 않았나요? 이 주 정도 항해하고 있는데, 매일 아침 보이는 건 파란 대양이니까요.”

 엘의 말에 그렇죠, 하며 안즈가 웃었다.

 “그나저나 내일부터 다시 항해인데 꽤 도수가 높은 위스키를 마셔도 괜찮은가요?”

 “괜찮습니다. 숙취는 적은 편이라서요.”

 “부럽네요, 저는 무리하면 바로 몸이 비상을 외치는 사람인데.”

 둘은 싱긋 웃고 잠시 정적을 지켰다. 서로 술을 마시고 따르는 상호작용만 몇 번 반복하고 있었다. 결국 둘이서 위스키 한 병을 비웠다. 생각보다 도수가 높아서 안즈는 살짝 어질했지만, 자신이 마신 건 저 한 병의 반의 반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제 옆의 사람이 마셨다. 그는 고개를 꾸벅거렸다. 하긴, 피곤하겠지. 사흘 동안 크루즈에서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오늘 아침에도 분명 정비에만 힘 썼을 터, 밤바람이 차가워서 안즈가 입을 열었다.

 “이제 들어갈까요?”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는 벌써 눈을 감고서 쪽잠을 청하고 있었다. 엘은 고개를 꾸벅이다, 안즈의 어깨에 가볍게 제 머리를 기댔다. 제 옆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가슴 언저리가 간질거렸다. 안즈도 그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댔다. 조금 더 별이나 구경하다 들어갈까. 무릎을 감싸안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멋진 하늘이었다. 별이 총총히 하늘을 메우고 세상은 달빛을 빛 삼아 돌아갔다. 달은 동등하게 모두를 감싸안았다. 그 달 아래에서, 세상은 아직 꺼지지 않을 터였다.

 “……저는,”

 “네?”

 엘이 조심히 눈을 떴다. 그가 중얼거렸다. 누구도 듣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그러나 하나쯤은 들어줬으면 하는 그런 독백이었다.

 “별을, 좋아합니다.”

 그가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앗아…… 모든 생명들이 저기 빛나고 있으니.”

 …….

 “죄의 무게를 다시 체감할 수 있어서, 그래서.”

 “엘.”

 안즈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지만, 조심히 흘러내리는 눈물 방울 하나와 함께 그는 중얼거렸다.

 “내가 얼른 사라져야 할텐.”

 안즈가 그 말을 듣자 몸을 비틀고 엘의 어깨를 붙잡았다. 순간 놀란 엘이 고개를 들고 눈을 떴다. 안즈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모자를 벗겨 내려두었다. 설마, 설마. 손이 마구 떨렸다. 극이 주업이기에 가발을 쓰고 벗는 것 정도야 쉬웠다. 하나, 하나. 천천히, 그러나 떨리게. 하나 둘 다 걷어내었다. 엘이 놀라 몸을 뒤로 주춤거렸으나, 안즈는 그럴수록 더 가까이 붙었다. 그의 긴 머리칼이 툭 떨어지고, 전부 사라진 후에야 안즈는 그의 허리를 확 안을 수 있었다. 하얀 브릿지, 빼꼼 흔들리는 잔머리칼.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던 따스한 웃음이 흔들리는 것마저 그였다.

 “나츠메, 나츠메 군.”

 “……”

 “사카사키 나츠메지, 엘이 아니라.”

 “……응, 맞.”

 “왜 그랬어?”

 “이렇게 살아 왔으니.”

 그의 자조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웃음은, 어딘가 물에 젖어 있는 듯 무거웠다. 안즈가 다시 그를 끌어 안고서 말했다.

 “왜 나를 속였어?”

 사카사키가 안즈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속였다고 말한다 조금 슬플 것 같. 내가 백번천번 네 자신을 망가뜨리지 말라고 얘기해, 너는 듣지 않을 거잖. 그래서 잠시 누군가의 모습을 빌린 것 뿐이.”

 “그렇게 살아왔다는 건 무슨 소리야?”

 “나는 참 나쁜 아이였. 그래서 승무원의 얼굴을 하,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에게 접근하는 걸 좋아했. 크루즈에 승선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여행을 목적으 한 사람이 많았지만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도 많았. 너처럼 말. ……그런데, 온통 거짓말쟁이였 내 말을 믿지 않아도 괜찮겠지 말야, 나는… 죽기 전 한 명 정도 내 손으로 구원하고 싶었. 그런데 너는 내 말을 들을 여지조차 안 보이니, 남의 모습을 빌렸. 그렇다면 너도 조금은 받아들이겠, 하고서 말.”

 사카사키 나츠메는 안즈를 제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숨이 막힐만큼 힘껏 끌어안은 그는, 안즈의 어깻죽지에 제 고개를 파묻었다.

 “그런데 어쩌, 어떻게 해야할. 네가 행복해질 수록 어쩐지 죽는 게 무서. 적당히 사랑할 생각이었지 그런 게 어딨을, 그런 건 미리 알고 있었는데 왜 그랬을. 그러니, …나는 너를 사랑. 네가 웃을 때부터, 네가 잠에 들때까, 전부.”

 그의 손길은 마지막을 향하는 듯 흔들렸다. 사카사키 나츠메의 모든 것은 어느 순간부터 무너져 내렸다. 안즈는 그것을 알게 모르게, 그러나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즈가 그의 등을 토닥였다. 글쎄, 무슨 말을 해 줘야 할까. 그러면서 눈을 흘겨 제 어깻죽지에 얼굴을 파묻은 그를 바라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조금은 애처롭다. 그러면서도, 그 떨리는 손으로 세게 저를 안은 그가 보시다시피 역설적이었다. 잃겠지, 하며 잃고 싶지 않아하는 사람. 미련한 사람아, 어째서 너는 떠나갈거라 확신한 존재를 더 끌어안는가. 살폿 눈을 감았다. 그에 대한 보답이다. 네가 솔직해져서 새삼 들키기 싫은 심연까지 밝혔으니, 나도 사실을 말해줄 것.

네가 무엇이든 나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최종적으로는 기뻐.”

 안즈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닮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워낙 목소리도 성격도 다른데다 누가 변장을 했다 생각하겠어. 그래서 뭔가, 지금 속은 느낌이라 괘씸하기도 한데, 그래도 결국 기뻐.”

 “…대체 어디?”

 “나는 네가 좋거든. 평소에는 그렇게 대담하다가, 이렇게 바보같이 상냥한 사람이 되는 점이 특히.”

 사카사키가 고개를 들었다. 안즈가 그의 이마에 콩, 하고 제 이마를 부딪혔다.

 “네가 사랑하는 방식이 좋아, 나츠메 군. 그래서 기뻐. 악마 주제에 내가 울지 않았으면 하는 네 마음때문에.”

 안즈가 헤실 미소 지었다. 사카사키가 인상을 조금 풀고, 제 앞에서 세상 무해하게 웃어보이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있지, 나츠메 군. 온통 거짓말쟁이인 너를 사랑해도 될까?”

 “…….”

 피할 수 없으니 그의 표정을 전부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나 제 얼굴을 보여주기가 싫어서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나야말로 끝까지 사랑하게 해 달라고 빌어야 하지 않을.”

 “응, 그러면 서로 사랑하자.”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말야. 아득바득 이를 갈고, 안간힘을 부리고, 악을 쓰며 사랑하자.

 “……그런데.”

 사카사키가 포옹을 풀고 안즈의 어깨를 잡았다. 그때처럼 무언가 불만이 많아보이는 얼굴에 안즈는 눈만 깜빡였다. 방금까지 좀 진지했던 것 같은데? 심술 많은 고양이마냥 저를 노려보는 사카사키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우리 연인이?”

 “응, 그렇지.”

 “언제부?”

“언제부터라니? 내가 너랑 계약했을 때부터 잖아, 나츠메 군.”

 “그런데 연락도 없이 남자랑 술을 마시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

앗. 그렇네. 안즈가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으래, 그렇지. 마, 맞네. 엘은 사카사키가 맞긴 했지만, 그걸 알기 전에는 한 남자에 불과했으니까. 그러고는 곧 다시 헤실 웃어보였다. 사카사키가 눈을 흘기고 안즈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 할 때 즈음 안즈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쪽.

 그의 볼에 살짝 입 맞추고 싱긋 웃었다. 사카사키가 잠시 멈칫하더니 목덜미부터 시작해서 귀와 손까지 붉어지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 도망가려는 안즈를 그가 뒤에서 끌어 안았다. 말이 안 돼, 손이 덜덜 떨렸다. 안즈가 숨 막힐 정도로 꽉 끌어안고서, 사카사키는 천천히 읊조렸다.

 “그래도 안 .”

 “아무것도 안 했어.”

“장난 치지 , 아기고양이쨩.”

 여전히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그 기세는 많이 누그러졌다. 돌아왔어. 응, 그래, 이게 너잖아. 나츠메 군. 안즈가 하하하! 웃으며 제 겉옷 주머니에 있던 작은 종이봉투를 건넸다.

 “네 거야, 나츠메 군.”

그가 조심히 받아 들었다. 노란 별이 대롱대롱 매달린 팔찌가 달빛에 반짝거렸다.

 “부러운 사람이 되어 보니까 어때?”

 팔찌를 바라보고 있는 사카사키에게 말을 툭 던졌다. 그가 따스하게 미소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기.”

 질투받는다는 건 생각보다 좋은 일이구나.


6. 우려의 이야기

 “안즈—.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아, 으응. 유리아.”

 객실의 문이 열리자 안즈는 침대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에 놓여 있던 물수건이 툭 떨어져 다시금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누워 있어도 돼, 괜찮아.”

 “아냐, 네가 왔는데 어떻게 누워만 있어.”

 “저기요, 안즈 씨. 너 지금 열 엄청 난다니까? 안 힘들어?”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하나도!”

 유리아는 그렇게 외치며 안즈를 마저 눕혔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리아의 말이 전부 맞다. 눈앞이 핑글 돌아갔고, 애써 뜬 눈은 애매하게 풀려 있었다. 안즈가 맥 없이 넘어가며 침대에 누웠다.

 “나참, 어쩌다 이렇게 갑자기 아픈 거야? 항구 도시에서 뭐 잘못 주워 먹었어?”

“아니야, 그런 건 아닌데.”

 솔직히 이유가 모호한 건 아니었다. 아니, 너무 훤하게 보여서 민망할 정도인 거지. 항구도시는 겨울 날씨인데도 생각보다 따뜻했고, 그에 방심했다. 안즈의 옷은 제법 얇았고, 밤 중에 술을 마시는 바람에 달아오른 체온으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 뿐이다. 찬바람을 되는 만큼 전부 맞은 안즈는 꼼짝 없이 몸살에 걸렸다. 안즈는 그날을 가만히 회상하다 싱긋 웃었다. 그래도 그날 즐거웠는데. 아무것도 없었는데 헤실 웃는 안즈에 유리아가 외쳤다.

 “뭐가 그리 재밌어, 지금 이 상황이 웃겨?”

 “아니, 그냥.”

 그러고선 또 웃는 안즈에 유리아는 살짝 의아했다. 유리아가 손목시계를 살피더니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하지. 너, 간병해줄 사람은 있어?”

 “간병까지는 괜찮아. 그 정도로 아프지는 않아.”

 “내가 널 본 세월이 얼만데 그런 이야기를 하니. 너, 맨날 안 아프다고 그러다가 큰 병 생겼던 거 기억 안 나? 갑자기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데.”

 “그래도 괜찮아. 걱정마, 유리아.”

 “그렇다니 알겠어. 극 연습이 있다고 해서 가 봐야할 것 같아.”

 “얼른 가야지.”

 “그래야겠지. 안즈, 너 절대 무리는 안 돼. 알겠지?”

 안즈는 사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알겠어. 애써 서투른 말을 두어번 정도 하고나서야 유리아를 떠나 보낼 수 있었다. 방문을 나가면서도 신신당부를 전하는 유리아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살짝 의식이 흐렸다. 으음, 하긴… 최근 좀 무리했나. 논다고 무리한 건 처음이다. 낮에는 유리아와 만나서 떠들다가, 밤에는 사카사키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반복이어서 그런지 최근 수면 시간을 전부 합쳐야 성인 평균 수면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으음, 조금만 자자. 끼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안즈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까?

 —아, 네. 간병을 붙이려고 했는데 찾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누구의 말소리가 들리는데, 누구인지 분간도 안 될 정도로 어지러웠다.


 “안즈, 여기 크루즈 표야. 천천히 쉬고, 우리 다시 생각해 보자…….”

 헉,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에 안즈가 숨을 몰아 내쉬었다. 이 기억은 아플 때도 괴롭히는구나. 잔인하다. 하아, 숨을 내쉬고 생각을 정리했다. 얼마쯤 자고 일어났을까, 아직 세상은 흐리게만 보였지만 안즈는 제 이마에 올려진 수건이 아직 차갑다는 걸 느꼈다. 별로 시간이 흐르지 않은 건가, 안즈가 눈을 조금 더 뜬 뒤 주위를 살폈다. 시계는 째깍째깍 흐르며 오후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잠든 시간이 오후 두 시였단 걸 가까스로 기억해낸 안즈는 한숨을 내쉬며 홀로 “미쳤나 보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렇네, 다들 미쳤나 보.”

 제 곁에서 어느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란 안즈가 흐린 눈을 선명하게 뜨고 몸을 일으켰다. 사카사키 나츠메, 하지만 아직 엘의 모습이다. 그는 모자를 벗고 핑거스냅을 딱, 쳤다. 그러자 긴 머리카락은 온데간데 없고 원래의 사카사키 나츠메로 돌아왔다.

 “승무원 일이 늦게 끝났거. 늦게 와서 미안?”

 뭐라도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서 애매한 웃음만 지었다. 사카사키 나츠메가 “그러지 말고 얼른 누.”라고 말하며 안즈를 눕혔다.

 “어떻게 알고 여기 왔어,”

 굉장히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사카사키는 단번에 알아 듣고선 대답했다.

 “내가 네 사정을 모를 리가 없잖. 언제 어디서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

 “그건 좀 무서운데.”

 “그만큼 널 잘 알고 있다는 거. 너는 이때까지 날 하루에 한 번씩만 봤다고 생각하겠지, 실은 하루에 수십번 넘게 만나 마주치 지나치 있었으니.”

 “…솔직히, 너한테 승무원이라는 일 잘 어울려.”

“고마. 하지만 이제 관둘거니.”

 “그렇구나.”

 사카사키가 안즈의 이마를 훑었다. 으음, 방금보다는 열이 좀 내렸나. 식은 수건을 가져가 찬물에 담갔다가 물을 짰다. 다시 정성스레 올린 찬 수건에 안즈가 인상을 풀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방금 말했듯이 좀 늦었. 여덟 시 즈음 온 것 같은?”

 “전혀 안 늦었어.”

“늦었다고 투정이나 좀 부려. 그럼 다음에는 더 일찍 올테니.”

사카사키가 셔츠 소매를 걷었다. 제법 젖은 소매에, 안즈는 소매를 잡지 못하고 그의 손을 살포시 쥐었다.

 “네가 수건을 계속 바꿔줬구나.”

 “그렇. 당연한 일이.”

 “왜?”

“왜라, 여자친구가 아프다는 걱정하는 게 남자친구의 역할 아니?”

 “그렇네, 맞다, 그랬지.”

 안즈가 눈을 감고 큭큭 웃었다.

 “최근 연애 경험이 너무 안 풀려서, 깜빡 잊고 있었어.”

 안즈가 그의 손을 제 뺨에다 가져다 놓았다. 실내인데도 그의 손은 제법 차가워서, 안즈는 잔뜩 꾸깃했던 표정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그런데, 아기고양이쨩.”

“응, 말해.”

 “평소에도 악몽을 자주 ?”

 아, 혹시 악몽을 꾸면서 중얼거렸나. 뭐라도 말해서 숨겨볼까 고민했다가, 사카사키에게 숨겨서 이득될 건 없다고 판단했다.

 “응, 크루즈에 승선하고는 더 많이 꾸는 것 같아.”

 “어느 정도?”

 “거의 매일.”

 “생각보다 심각하.”

 “걱정마, 나름은 살만 하니까.”

 “전혀 안 그러니까 이렇게 묻겠?”

 사카사키가 안즈의 침대에 걸터 앉고는 조심히 안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열이 오른 얼굴이 뜨거워서 안쓰러웠다.

 “무리하면 안 , 아기고양이쨩. 밤에 만나는 게 무리면 말해 . 낮에도 올 수 있.”

 “낮에는 일 해야지, 나츠메 군.”

“됐. 이 일도 휴가 정도는 있거. 하루 정도는 셀이나 안에게만 말해두면 승낙해줄 거.”

 그가 안즈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끼웠다. 그러쥐듯 깍지 끼며 손을 잡은 그가 안즈를 바라보았다. 곧 끊어질 것 마냥 위태로운 호흡이 옅어질 수록 그는 조금 더 세게 손을 잡았다.

 “아프면 안 .”

 “응, 그렇네.”

 안즈가 애써 웃었다. 사카사키는 후, 하며 얼굴만 바라보던 눈을 돌렸다. 다른 건 전부 이불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조심히 안즈의 손목을 감쌌다. 거의 세 마디 정도 여유롭게 남는 걸 보고서 홀로 중얼거렸다.

 “너무 얇은 거 아니?”

 이제 말하는 것도 힘에 부쳤는지 안즈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사카사키는 안즈의 손을 빤히 바라보며 조금씩 쓰다듬어보기도 하다가, “아,”하며 핑거스냅을 튕겼다. 악세사리 보관함으로 보이는 상자가 가만히 그의 손에 놓였다.

 사카사키는 상자를 열어 반지 여럿을 꺼냈다. 어느 순간부터 열심히 모아왔던 것이었다. 이 크루즈에서 산 것도 있었고, 몇 십 년 전에 꽤 거금을 들여 구매한 것도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선물한 것도 있었고, 자신이 직접 보석을 골라 만든 것도 있었다. 그는 안즈의 오른 검지 손가락에 반지 몇 개를 끼웠다 뺐다를 반복했다. 백합을 연상케하는 배치의 보석이 양초의 불빛을 담아내었다. 안즈가 어느 감촉에 눈을 뜨며 제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선 단숨에 미소 지었다.

 “옛날에 줬던 브로치 같다, 예뻐.”

“갖고 싶으면 가져도 .”

 사카사키는 안즈의 오른손 중지에도 몇 개를 끼워보고 있었다. ……한 예닐곱 개는 끼워봤을까. 그는 반지를 가만히 늘어놓고 이마를 짚었다. 아, 어떡하지. 뭐든 잘 어울리네. 그래, 지금 난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뭐든 잘 어울려 보이겠지. …하지만, 정말 예뻤다. 정말, 헤실 웃는 모습마저 사랑스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사카사키의 손목에는 노란 별의 팔찌가 달랑거렸다. 안즈가 팔찌를 확인하고서는, 앗, 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그거 마음에 들어?”

“누가 줬는 어떻게 마음에 안 들 수 있, 아기고양이쨩.”

 안즈가 그의 말에 이불을 조금 내려 제 목을 보여주었다. 푸른 별이 얌전히 잠들었다. 사카사키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더니, 맑게 웃었다.

 “세트였구, 몰랐.”

 “보색으로 사서 나눠 가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들었어.”

“뭐야, 그런 의미였? 기쁘. 앞으로도 평생 안 풀고 살아야겠.”

 그가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그가 안즈의 뺨을 쓰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있지, 아기고양이쨩.”

 “응.”

 “다음주에 라이브홀에서 크게 공연을 한. 크루즈에서 내리기 전 마지막을 장식하는 무대라 수식할 정도라는. 악단도 있, 마술도 있. 각 분야에서 고문을 맡을 정도인 사람들이 공연하는 거.”

 “멋지다…. 좋은 공연이네.”

 “같이 갈? 밤에 시작하니까 나도 충분히 갈 수 있.”

 “좋아.”

 안즈의 풀린 눈을 본 사카사키가 자리에서 조심히 일어났다. 이불을 다시 정리해주고는, 수건을 한 번 더 갈아주었다. 그가 손의 물기를 털며 말했다.

 “그만 자야. 환자가 오래 깨어 있으면 안 .”

 “……”

 “잘 , 무슨 일 있으 네가 계약할 때 전화했던 번호로 전화.”

 그가 방에 설치된 작은 수화기를 살며시 안즈 옆으로 밀었다. 싱긋 미소 짓고 뒤를 돌아 나가려는 찰나, 무언가가 자신을 잡고 있는 게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안즈가 몸을 일으키고선 사카사키에게 천천히 말했다.

 “오늘만,”

 안즈의 말은 툭툭 끊겼다.

 “같이 있어주면 안 될까.”

 사카사키가 눈만 깜빡이다가 제 손을 꼭 쥔 안즈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 네 부탁이라.”

 사카사키가 가까이 다가가 몸을 일으킨 안즈를 안았다. 작은 어깨를 안자마자 느껴지는 체온은 뜨거웠다. 안즈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웬만하면, 이렇게 아주 오랫동안 있길 바라며.

 웬만하면 아주 오래간, 내 최후까지도 네가 나의 마법사로 남아주면 좋을텐데. 남은 기간이 며칠 남지 않을 존재를 조금 더 끌어 안는 내가 미울 정도로 널 좋아하는데. 미안해, 응석은 안 부리려고 했는데… 오늘은 홀로서 과거에 맞서는 게 두려웠어.

 이 중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안즈는 잠을 청했다. 레몬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붕 뜨게 하는 향에 그를 조금 더 끌어 안고 어깻죽지에 고개를 파묻었다.

 ………가지 말아주세요, 조금만 더 사랑한다고 말하게 해 주세요.

 악몽은 그날 사그라들었다.


7. 어느 극단의 이야기

 여느날처럼 사람 구실할 정도로만 꾸미면 된다고 생각했건만, 유리아는 그 말을 듣고 “뭐?”라고 육성으로 소리쳤다.

 “말이 돼? 안 돼. 남자친구랑 데이트라며? 그럼 더더욱 안 되지, 안즈. 최대한 예쁘게, 최대한 멋지게. 아니야?”

 “데이트라기에도 애매한데.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라이브홀에서 하는 그 공연 보러 가는 거야.”

“문화생활도 같이 하는 남자친구 부럽네. 그게 데이트야, 안즈. 부럽다, 부러워. 나도 연애나 해야지.”

 “그렇구나, 으음…. 하긴, 생각해보니 데이트 같기도 하고.”

 “그렇지? 그러니까 앉아 봐.”

 유리아는 객실의 화장대 앞 의자에 안즈를 앉혔다. 안즈가 갑자기 폭삭 내려간 시선에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잔뜩 물음표를 표했지만, 이미 늦었다. 유리아의 손에서는 웬만한 화장품이란 화장품이 쏟아지듯 하고 있었으니까.

 가볍게 얼굴에 분을 바르고, 연지를 발라 옅게 홍조를 띄웠다. 눈썹도 그렸는데, 속눈썹까지는 괜찮다고 애써 거절한 안즈였다. 유리아는 명암을 조금 넣을까, 어떻게 할까 살짝 고민했지만 결국 거기에 대해서는 손을 놨다. 생각보다 일찍 끝난 화장에 안즈가 물었다.

 “이대로 끝내도 괜찮아?”

 “립스틱만 바르고 거울이나 보셔.”

 안즈는 조심히 립스틱을 바르고 화장대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외친 말.

 “누구……?”

“너야, 안즈. 봐봐, 완전 예쁘지? 으아아악, 빛나서 눈을 못 뜨겠다~!”

 안즈가 거울 속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유리아는 옆에서 팔짱을 끼고 바라보다가, 아! 하며 머리끈과 빗, 온갖 머리핀까지 가져오고 있었다. 안즈가 “유, 유리아! 진정해!”라며 힘껏 외쳤지만 전부 소용 없었다. 유리아는 안즈의 머리를 땋고 빗으며 이야기했다.

 “후후, 남자친구가 왜이리 예쁘냐고 하면 친구가 해줬다고 말해.”

 “그 정도야?”

 안즈가 애매하게 웃었다. 그러자 유리아는 머리칼을 땋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연하지. 원래 너는 화장 안 해도 예쁘긴 하지만 말야.”

 “뭐, 그건 유리아 너도잖아.”

 “아니거든요. 나 지금 명암까지 다 넣은 얼굴이라고.”

 “나는 네 민낯 알아.”

 “잊어, 그럼.”

 그런 대화가 오가다가 유리아가 안즈의 머리칼에 하얀 리본을 달았다. 중앙에 달린 진주 장식이 포인트가 되는 귀여운 장식. 유리아는 안즈의 머리를 땋아 반묶음을 했고, 리본까지 달자 제법 그럴싸했다. 유리아는 그 모습을 안즈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했지만 어떻게 보여줄 방법이 없어 잔뜩 한숨을 쉬었다.

 “아~ 안즈 남자친구는 부럽다~ 이런 모습 혼자 독차지하고~.”

 “뭘, 유리아. 너무 띄우지 마.”

“뭘 띄워. 과소평가라면 수용하겠는데, 과대평가라고는 생각 안 해. 안즈.”

 유리아가 시계를 보고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웬만하면 옷까지 골라주고 싶었는데 약속이 있어서.”

 “괜찮아 유리아.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

 “으응, 아, 부러워. 안즈 남자친구.”

 “분명 좋아해줄거야.”

“안 좋아한다고 하면 헤어지자고 해야지.”

 유리아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안즈가 웃었다. 유리아를 배웅하고 안즈는 제 여행가방을 펼쳤다. 뭘 입어야 하지? 웬만한 부인들처럼 예쁜 드레스를 들고 온 것도 아니었다. 하긴 뭐, 사교 목적으로 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안즈가 잔뜩 고민하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고 조심스레 문을 열어주었다.

 안이었다.

 “401호 손님, 잘 살았나 모르겠네.”

 언제나처럼 시원스런 말투의 안을 보고 안즈는 사뿐 인사했다. 안이 안즈의 모습을 보더니 껄껄 웃고 말했다.

 “크루즈에서 연인이라도 생겼나 봅니다? 마누라가 생각나서 즐겁네요.”

 앗, 맞다. 엄청 꾸몄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린 안즈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허리를 푹 숙였다. 그나저나 안이 왜 제 객실에 온 거지, 안즈는 눈을 깜빡였다. 적어도 엘(사카사키)이 올 줄 알았는데. 안즈의 의뭉스런 눈빛에 안이 웃으며 자신이 온 목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포목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마침 어제 옷이 완성되었다고요. 입는 방법을 알려드릴테니 오늘 안에 와 달라고 전해주라 했습니다.”

“네?”

안즈가 멈칫했다. 순간 많은 찰나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포목점을 들른 적은 있지만, 옷을 주문한 적은 없다. 이름이 똑같은 사람이 주문한 걸 안이 착각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경직을 풀었다.

 “저는 주문한 적이 없어요. 동명이인이 주문한 거 아닐까요?”

 “으음,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요청 받은 쪽지라도 보여드릴까요?”

 아마 그 세 자매 중 하나가 썼을 쪽지였다. 안이 건넨 쪽지에는 날카로운 글씨체로 주문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카사키 나츠메, 안즈.’

 사카사키의 이름을 보자 반가우면서도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일단 안에게는 감사인사를 전하고, 포목점으로 가 보기로 마음 먹었다.


 “아, 오셨다.”

 포목점은 여전히 세 자매가 다같이 운영하고 있었다. 안즈가 포목점에 들어서자 제법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둘째가 첫째에게 옷을 받아 가져왔다. 그때였을까, 안즈는 가만히, 멀뚱멀뚱 서 있다가 어느새 보니 두 자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옷이 꽤나 복잡하다면서 입는 방법을 천천히 알려주는 둘째는 코르셋을 채웠고, 셋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첫째는? 안즈가 주위를 둘러보자 첫째로 보이는 사람은 세상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다.

 어질한 상황이 끝나고 나서 셋째는 안즈를 전신 거울로 끌고 가듯 했다.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겠는데! 안즈는 끌려 가면서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거의 밀려서 온 전신 거울의 앞, 안즈는 거울 속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순백의 오프숄더 드레스였다. 중간중간 프릴이 아낌 없이 들어가서 훨 화사한 느낌을 주었고, 팔에 걸친 분홍색 천은 포인트가 되어 봄내음을 물씬 풍겼다. 불편한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안즈의 특징은 어째 알았는지 코르셋은 그다지 조이지 않았고 드레스는 다른 것들보다 훨씬 유동성 있었다. 안즈가 거울 속 자신을 보고 처음으로 감탄을 멈추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청순함이 물씬 묻어나는 거울 속 사람이, 정말 자신인가 싶어 눈만 계속 깜빡였다.

 “안 늦었?”

 뒤에서 마루바닥을 울리는 구두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사카사키 나츠메는 작게 분홍색으로 포인트를 준 백정장을 입고서 타박타박 걸어왔다. 그가 싱긋 웃으며 안즈를 바라보았다.

 “역시 어울릴 줄 알았. 오늘 정말 예, 아기고양이쨩.”

 “그, 그 호칭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쓰지 말랬잖아.”

 “뭐 어? 저 사람들도 되게 만족스러워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잖.”

 과연 그의 말대로 포목점의 세 자매들은 후후 웃으며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카사키가 안즈를 다시 한 번 훑다가, 무언가 다른 점을 발견한 듯, 그리고 그 다른 점이 그에게 불만을 심은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또 저 얼굴이다. 오늘은 대체 뭐가 불만이야. 안즈가 지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카사키는 딱히 말하지 않고 제 정장의 소매를 걷었다. 노란 별이 찰랑거렸다. ……쟤, 지금 목걸이 안 찼다고 뭐라 하는 거 맞지? 안즈가 어린 애같은 그의 모습에 큭큭 웃으면서 손에 쥐고 있던 목걸이를 꺼냈다. 푸른 별이 목에서 반짝거렸다.

 그제야 인상을 풀고 만족스럽다는 듯 웃는 사카사키는 안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같이 가 볼.”

 안즈가 사뿐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잘 부탁해.”

 “나야말.”


 라이브홀에 들어서자 하얀 탁자들이 줄 지어 있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미리 탁자에 놓여 있던 물을 따라 마셨다. 주변 귀족 부인들이 한껏 떠들기에 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오늘따라 달라 보이는 사카사키의 얼굴을 맘껏 구경할 수 있었달까. 안즈는 턱을 괴고서 사카사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은 말하지 않고 최대한 오래 그를 구경하고 싶었으니까. 여러모로 바빠서 얼굴은 자세히 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 느낀 그의 얼굴의 감상평은…. 잘생겼네. 렌보다 훨씬 잘생겼어. 그리고 무려 삼백 년을 산 악마라서 그런가 어딘가 품위가 있었다. 멋진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시선을 돌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재미있?”

“뭐, 뭐가?”

 “으음, 내 얼굴 구경?”

앗, 다 들켰나. 안즈가 눈을 흘기자 이번에는 사카사키가 안즈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얼굴에 다 드러.”

 “미안해. 단순해서.”

 “그렇네, 거짓말도 잘 못하. 완전 순수결정체.”

 서로 별일 아닌 걸로 큭큭 웃었다. 역시 나는 네가 좋은가봐, 선뜻 웃어버린 안즈의 미소는 해사했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지역 곳곳에서 모인 수재들이 보이는 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

 멋들어진 정장을 입은 사회자가 힘껏 외치자 모두 일사불란하게 제 자리로 돌아갔다.

 “자, 거두절미하고 바로 첫 공연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미꽃잎이 휘날리더니 마술사가 나타났다. 마술사는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여러 마술을 선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색이 입혀지는 마술부터, 만화에서나 봤던 모자 속에서 비둘기가 튀어 나오는 마술까지. 빠르게 휙휙 휘날리는 카드 마술에 정신을 완전히 뺏겼다. 몇 분이 지난 줄도 모르고 멍하니 지켜보자 마술은 금세 끝났다. 안즈가 박수갈채를 보내고, 사카사키는 작게 박수쳤다. 그가 안즈에게 붙더니 슬쩍 이야기했다.

 “자, 아기고양이쨩.”

 그가 핑거스냅을 탁, 하더니 손에서 붉은 장미가 튀어나왔다. 안즈가 우아, 하며 함성을 터뜨리고는, 장미를 받아들었다.

 “나츠메 군 마술 배운 적 있었어?”

 “아니, 없는.”

 “그럼 이건 뭐야?”

 “마법이, 뭐.”

 그가 앞을 가리켰다. 자, 다음 것도 시작한다. 다음은 악단의 연주였다. 경쾌한 음악부터 느린 음악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연주했고, 중간에 잠시 등장했던 플룻의 독주는 가히 굉장했다. 다음은 작은 오케스트라, 피아노 독주, 복화술…. 쉴새 없이 많은 수재들이 여러 공연을 선보였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안즈는 박수를 치며 모두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러던 중,

 “다음 공연 바로 만나보겠습니다! 최근 엄청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극단이죠? 거두절미하고 바로 만나보겠습니다.”

 극단?

 안즈가 눈을 깜빡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유리아가 무대 왼편에서 나와 천천히 대사를 읊었다. 몸짓 하나하나가 부드러웠다.

 “곧 세상은 파멸할 것이다!”

 예전의 유리아는 몸짓이 영 자연스럽지 않아서 많이 지적을 받았던 것 같은데, 많이 노력했구나. 곧 오른편에서 다른 배우가 걸어나왔다.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그 파멸을 막을 것입니다.”

 앗, 저 분도 극할 때 봤는데. 대사를 잘 외우지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대사가 아니라고 착각할 정도다. 덕분에 잘 끊어진 시작으로 안즈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역시 극의 처음을 여는 대사에는 언제나 져 버린다. 무언가 임팩트 있는 대사가 나올 거라 생각하지만 언제나 상상을 초월해 심장을 둥둥 쳐 버린다. 오랜만에 연극을 보며 즐거웠다. 싱긋 웃고서 나오는 배우들을 살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 분도 본 적 있는데, 그때보다 훨 연기가 자연스럽네. 앗, 저 분은 그때 감정이입이 어려웠는데 지금은 거의 등장인물 자체가 되셨구나. 음 그리고, 저 분도… 저 분도…….

 “걱정 마시라, 내가 있으니까.”

 ……그리고 렌도.

 몇 년 전 가지고 있던 약점이 전부 강점으로 승화되어 무대에서 빛을 발하고 있구나. 그걸 알아챈 순간, 심장이 마구 뛰었다. 단순 동경이 점점 불편한 감정으로 변질됐다. 누군가가 가슴에 장미덤불을 심어 놓은 듯 따끔거렸다. 전부 노력했구나, 누구도 빠짐 없이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그렇구나, 그렇구나. 다들 지난 몇 년간 아주 노력했구나.

 …나는?

 안즈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어쩌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아주 불편한 진실. 자신은 어느 사유든 간에 무엇에 발목이 잡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지만, 남들은 어떻게든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 분명 아주 노력한다고, 세간이 못 알아봐준다고 그렇게 치부하며 살아왔던 세월이 스쳤다. 실은 아니었나. 머리가 어질했다. 드디어 마주한 그 진실에 구역질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무의식중에 의자에서 일어나 라이브홀을 뛰쳐나갔다. 열패감이 기도를 감쌌다. 열등에 이를 물고 추함에 치를 떨었다. 도망치지 않으려 했지만, 철저히 도망가고 있던 것이었나. 그러나 인생을 산다면 언젠가는 마주할 진실이리라 생각은 했지만, 그렇지만.

 …나는 왜이리 구원받지 못하는지.

 그리고, 안즈가 뛰어나간 걸 알고 있는 것은 사카사키 나츠메 하나 뿐이었다. 이름을 부를 새도 없이 뛰어간 안즈였다. 때문에 그는 당황할 틈도 없이 곧바로 쫓기 시작했다.

 오판이었나. 아니, 물을 것도 없지. 오판이었어. 완벽하게도 흐트러진 판단이었다고. 사카사키 나츠메는 안즈의 흔적을 쫓으며 계속 되뇌었다. 착각했다. 안즈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던 것은, 연극에 대한 슬럼프를 극복한 게 아니라 연극을 잠시 잊은 것 뿐이었다. 그 현상을 보고 괜찮다고 착각해버린 자신이 미친건가 싶어 이를 아득 갈았다. 어디로 간 거야, 어디로 갔어. 사카사키가 갑판으로 가는 계단 앞에서 멈춰섰다. 그러고보니, 오늘 하얀 리본을 달고 있었던 것 같은데…. 계단 층계참에 떨어진 하얀 리본을 조심히 주웠다. 그가 리본을 조심히 쥐었다. ……모든 건 내 오판이었어. …하지만. 그는 어금니를 꽉 물고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네가 살아간다면, 네가 네 존재 자체로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꼭 마주했어야 할 불편한 진실.

 그래, 지금부터 사카사키 나츠메가 이행할 이야기는 계약 성사를 무효화하는 이야기.


 갑판에 올라서자 밤바다의 고요한 파도가 선체에 부딪혀 파스스 사라졌다. 가만히 난간을 붙잡고 바다와 초승달만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은 겨울 밤바람에 파슥 사라질 것만 같이 흔들렸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자는 끝도 없이 밀려 오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즈.”

 조심히 그 여자의 이름을 부른 사카사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 번 더 불렀다. 어딘가 잠시 격양을 품은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대답은 여전히 파도 소리밖에 없었다.

 한 번 더 불렀다.

 “응, 나츠메 군.”

 그 목소리에 세상은 고독으로 잠들었다.

 “돌아가자, 밤바람 많이 쐬면 감기 걸.”

“미안해. 먼저 돌아가.”

 “…안 . 오늘만큼은 안 .”

 그의 말로 끝을 맺은 대화가 다시 시작됐던 건 애매한 정적이 끝나고 나서야.

 “놀랐겠네, 미안해. 말도 없이 도망쳐서.”

 “도망쳤다고 생각하지 않.”

“도망친 거야. 그건 부인할 생각 없어. 그렇네, 이 진득한 감정도 사흘이면 끝이겠구나. 네가 내 영혼을 가져갈 테니까. 그건 금방 끝날테니까 다행이다.”

 다행이라고 말하지마,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사카사키는 꾹꾹 눌러 담았다. 겨울하늘에 안즈가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직 겨울이라고 하얀 입김이 흔들렸다.

 “있지, 나는 스물이 되자마자 연극을 시작했어. 꽤 이르지? 처음에는 나이에 비해 재능 있는 아이였거든. 연극 자체에도 애정이 있었고, 많이 좋아했어. 그런데 스물일곱정도 되니까 생각보다 이쪽이 치열하다는 걸 알게 됐어. 관객은 질이 좋은 연기를 원했고, 그러면 슬럼프가 있는 배우는 힘들거든. 내가 딱 그런 경우였지. 남자친구가 있었어. 그 애는 나와 합동 연극에서 여자 주인공 역과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았지. 그런데, 알다시피 바람 피웠어. 당연히 나는 그 극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처음으로 겪어보는 쓴 실패에 슬럼프가 확 겹쳐 버렸지. 극단에서는 나를 받아주기 벅차했고, …그렇게, 그렇게 여기로 왔어. 아마 다시 받아주지 않겠지. 오랜 전통이었거든.”

 안즈가 숨을 몰아 내쉬었다. 여전히 파도는 부서졌다.

 “그러게. 나는 대체 뭘 바라고 여기에 탄 걸까. 그냥 집에서 조금 슬퍼하면 좋았을텐데. 승선할 때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는데 주어졌기에 놓을 수 없게 되었어. 나는… 나는 말야, 그렇게 강한 사람도 아닌데 강한 사람을 바랐어. 내가 무너질 때 잡아줄 수 있는 사람. 과분한 사람이지, 내게는. 그런데, 정말 찾았어. 내가 무너질 때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말야.”

 안즈가 엷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같이 자조를 비수처럼 품고 있었다.

 “그게, 너였지. 나츠메 군.”

 사카사키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입술을 깍 깨물고 안즈를 마저 바라보았다. 여전히 뒷모습이었지만.

 “하지만, 너는 며칠 후면 사라져버려. 내 욕심 때문에 남에게 남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그렇게 된다면, 너는 영생에서 도망치고자 죽음을 선택하는 건데 나 때문에 다시 연명해야 하니까. …그래서 좋았어. 며칠 후에, 각자가 생각하는 행복의 길을 가는 것. 나는 영혼을 잃고, 너는 삶을 그만두는.”

 “아기고양이쨩.”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해. 그렇기에 놓아주는 거지.”

 “안즈쨩, 제발.”

 “마지막까지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참, 맞아. 기억나? 내가 전남자친구와 합동 연극했다고 했잖아. 그 극의 대사가 이거였어.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지만.”

 안즈가 이내 뒤돌았다. 가만히 미소 짓고서, 눈을 감고 천천히 읊었다.


 “이것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는 이야기. 사랑이 당신을 구원하기까진.”


 안즈는 공중에 손짓하다가 손을 거둬들이고 주먹을 쥐었다. 제 가슴팍에 오른손을 올리고, 해사하게 웃으며,

 울었다.

 그래서 사카사키는 그 모든 몸짓에서 ‘그 말’을 본 걸까. 그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다, 한 걸음 앞으로 향했다.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점점 뛰었다. 하나둘셋, 하나둘셋. 갑판에 구두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다가, 그는 단숨에 안즈를 확 끌어 안았다.

 “이기적이고 뭐, 전부 집어치워. 다 비약이.”

 그래, 그 말. 안즈가 어느 순간부터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던 말.

 “과분하다, 강하다. 다 틀렸. 다 틀렸다.”

 어느 순간 안즈는 홀로서 모든 것을 감당하기 두려워하고 있었다. 혼자 남는 것을 두려워했다.

 “절대 널 홀로 두지 않, 그게 연인이. 단지 사랑하는 존재를 연인이라고 부르지 않. 약하고 약한 존재가, 그렇게 만나서 사랑이라는 매개로 서로에게 의지하는 . 그 관계가 연인이. 애초에 강한 사람이 어디있. 우리는 어딜 가든 전부 약한 존재일텐.”

 놀란 듯 급하게 숨을 들이 마시는 안즈를, 사카사키가 더 끌어 안았다.

 “왜? 네가 믿고 있는 게 하나같이 비약이라는 게 느껴? 나는 강하지 않아. 너에게 과분한 존재도 아니. 너말야, 제대로 착각했. 나는 네게 구원받았는데 네가 왜 이기적인 존재. 네가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줘, 나를 받아들여줘서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는. 그래서, 오랜 시간을 지나쳐 오면서 처음으로 생경한 감각을 살결로 느꼈. 그래, 살고 싶다는 충동. 이제야 알겠더라. 도망치고 싶었, 회피하고 싶었. 그게 당연한 거. 모두가 약한 존재기 때문 그 나약한 권리라 가지는 거라. 실패에 쓰러지고 죽어가는 게 우리야, 안즈.”

 나는, 나는, 나는…….

 “하지만 그에 비해 일어나려, 살아가려 발버둥치는 것 또한 우리. 있지, 너는? 나랑 있으면서 다시 시작해보 싶다고 한 번이라도 생각하지 않았? 이기적이든 뭐든 다 관두. 네가 날 사랑하듯, 나도 널 사랑. 네가 무너질 때는 분명 내가 손을 내밀 거고, 내가 무너질 때는 네가 손을 내밀어주겠. 말하는데, 그 이유에는 어떤 대가도 필요하지 않. 그저 서로를 사랑하니까 그 역할을 해내는 거. 연인이란 게 그런 거 아? 서로를 지지하는 역할 말이. 그러니까, 안즈. 홀로 살아가는 것은, 이토록 외로운 일이니. 의지할 곳이 없는 채 살아가는 것은 이토록 슬픈 일이니, 나는 웬만하면 아주 오랫동안 너의 곁에서 숨쉬고 있겠지. 네 외로움이 나의 체온으로 달아오를 때까지는, 아주 영원히,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욕심을 부리는 것도 연인이야. 네가 행복했으면 하고, 살아가길 바라고, 서로의 안녕을 갈구하는 존재가 연인이지. 그러니까, 안즈. 나의 안즈,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꼭 전하고 싶대. 한 번만 들어주면 안 될까.”


 “다시 함께 살아가자, 다시, 다시….”


 홀로 살아가는 것이란 이토록 외로운 일이던가. 안즈는 제 허리를 끌어안는 사카사키의 얼굴을 정확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사랑이 괴로운 자의 얼굴을 한 그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사랑이 괴로워진 날. 연극에 대한 사랑이 식은 날, 제 전연인이 바람을 피운 걸 목격한 날, 이 크루즈에 승선한 날이 그랬나. 아아, 이토록 외로운 날에 나의 심장은 뛰었으나 피가 흐르지 않아 동사했던가.

 하지만, 하지만. 사카사키 나츠메가 사랑이 괴로운 이유는 직감적으로 이때까지와는 결이 다른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그는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깊은 수렁으로 빠지기에 온몸으로 괴롭다 외치고 있었다. 아주 순수하게, 그저 네가 아프지 말았으면 하기에 사랑이 괴로웠다. 바보같은 사람아, 조금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노력이라도 보이지. 안즈가 입술을 물었다. 그 사람의 바보같은 사랑은 여름(夏)의 햇볕만큼 뜨거웠으며 노란 눈(目)처럼 가만 빛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사랑은 온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완전히 끌어안을 수 있었기에…….

 그제서야 안즈가 깨달은 것.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아, 아 하고 소리내었다. 사랑받고 있구나, 사랑하고 있구나. 찬란하고 슬픈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구나. 눈물이 툭툭 떨어지고, 손은 흔들렸지만 분명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이제서야 마주한다는 듯 좀 더 끌어안았다. 바보같이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가지 말아달라 애원했다. 사카사키 역시 안즈의 어깨를 안으며 조금 더 살아가길 빌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분명한 의도를 담았다. 서로가 아주 각별하다는 것을 서로에게 각인시킨다는 의도.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주저 않고 사랑이라 불렀다.

 이토록 외롭고 슬픈 세상에서 다시 발을 딛게 하는 찬란한 기적을 사랑이라 불렀다.


 이것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는 이야기.

 사랑이, 당신을 구원하였다.


 “나츠메 군, 나츠메 군.”

 안즈가 목이 메인 목소리로 외쳤다. 사카사키 나츠메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 안즈는 말할 수 있으리라하는 막연하고 충동적인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막연하고 터무니 없는 확신이 하나 더 들었는데, 그것은….

 단지, 당신과 함께라는 이유로 용기를 내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있지, 널 사랑해도 될까? 이렇게, 너에 비해 터무니 없이 작은 존재인데도, 나약한 존재인데도.”

감히 널 좋아해도 될까.

 사카사키의 답변은 이러했다.

 “마음껏 사랑해줄래? …그리고말야.”

 나도 널 마음껏 사랑해도 괜찮을까. 널 앓고, 널 떠올리고, 널 꿈꾸어도 괜찮을까.

 사랑해, 단지 너만을. 너의 모든 것을.

 그리고 둘은, 눈을 감고서 천천히 입을 맞췄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고 누구도 계획하지 않은 채로. 어딘가 이것을 분석하다면 ‘자명한 사실'이라고밖에 칭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혀로 훑고, 숨결을 살결로 느끼고, 다시 서로를 바라보며 여전히 입을 맞췄다. 도망이란 없었다. 도망칠 이유도, 도망가야만 하는 이유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에게 주어진 과업이라 하면, 서로가 제 앞에 있다는 것을 감각으로 느끼는 것. 죽기 싫어, 다시 해 보고 싶어. 몸부림치듯, 무언가를 증명받으려는 듯 그들은 키스했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꼭 말하고 싶어. —사랑이라는 말이 진부하면 어때, 사랑이라는 말은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났는걸.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말로는 전할 수 없어, 그렇지만 이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너의 영생을 반으로 나눠줘. 부탁할게. 너와 마저 삶을 살고 싶어. 정말 살고 싶어. 모든 걸 바쳐서라도 말야.”

 —계약 성사는 없던 것으로 종결. 서로의 언명은 오늘부터 효력을 잃는다.


8. 이것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는 이야기


 안녕하세요, 본 크루즈의 승무원, 엘이라고 합니다.

 한 달간의 여행은 어떠셨나요? 관광 목적으로 오신 분들은 추억을 가득 쌓아가시길 바라며, 마음에 짐을 쌓아 놓았던 분들은 가볍게 전부 털어내고 가시길 바랍니다. 형식상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모든 분들이 그러하기를 소원하겠습니다.

 저는 이번 여행을 마지막으로 승무원을 그만둡니다. 꽤나 오랫동안 이 크루즈를 이용해주신 분들께는 아쉬운 마음이 남네요. 함께 크루즈의 승선과 하선을 맡던 셀에게는 미리 전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전하게 되어 미안한 마음도 듭니다.

 짧고도 긴 승무원 경험을 마치며 소감을 얘기하자면, 살아보니 인생은 찬란하기도 탁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 중 인생이라 함은 탁류만 흐르는 것이라 상상하고는 했는데, 바다를 보면 그 생각은 자신이 알아서 모습을 감추더군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바다기에, 승무원 생활을 삼 세기 정도를 걸치며 했던 것 같은데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생각보다도 맑은 하늘이 보이고 푸른 바다가 흐르는 날도 많다는 것을요. …물론, 삼 세기 동안 승무원 생활을 했다는 건 농담입니다. 하하.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아직 세상이 푸르다는 것입니다.

 물론 새까만 날들도 있겠지만, 아직 인생의 단편이기에 뒤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은 참 흥미롭습니다. 그러니 부디 다시 한 번 재고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선 여러분이라는, 아주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주인공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크루즈를 떠나 사랑하는 사람과 작은 항구도시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어느 날에는 분명 고난이 휩쓸겠지만 힘껏 살아보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도 무거운 짐은 이 크루즈에 전부 내려두시고 다시 살아보리라 다짐하시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여러분의 시작 또는 재시작의 순항을 염원합니다.

 이상, 하선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독자분들! 정말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오랜만에 나츠안즈 엄청 길게 써 보네요. 계획만 엄청 거창한 소설이었는데 이걸 다 써서 올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고 인생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사실 이거 4월 말에 원고 시작했거든요. 다 쓰고 나니까 공미포 사만 삼천자였나 그랬는데 역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할 때 신나나 봅니다. 너무 길어서 맞춤법 검사도 안 된대요 깔깔

그런데 작업할 때마다 안경 쓰는 걸 깜빡해서 눈이 아프네요 아아악

이번 소설은 대강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2차 셔플과 크루즈 기반이었습니다. 아니 저 사실 반탈앙했었는데.. 그 9주년 방송에 애들 키 큰 거 프로필 나온대서 제 오시들만 확인하고 방 빼려했죠 아니 근데 갑자기 사카사키 나츠메가

뭐 아무튼 저는 그렇게 발등을 도끼로 찧었습니다. 재밌죠 근데 이번에 소마도 배수로 떠서 두 배로 재밌습니다. 더 웃긴 거 말씀 드릴까요 저 천지명동 못 땄어요 20만점 남겼는데 패스 2000개 안 뺐더라고요 ㅋㅋㅋㅋ 웃으셔도 됩니다.

이제부터 다시 정장입고 본론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암만 생각해도 말은 화자에 따라 신빙성이든 내용이든 다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면접에 츄리닝 입고 오신 분과 정장 풀세트 차려 입고 오신 분 중 같은 말이라면 정장 입은 분을 뽑고 싶잖아요. 사실 이 소설은 거기에 주목했습니다. 그거 아세요 혹시 나츠메는 즈! 때부터 꾸준히 안즈에게 같은 조언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까지 하고 있는 걸 보면 사람은 잘 변하지 않나봅니다.

그래서 나츠메를 엘이라는 아이에게 엎어 씌웠다는 이야기. 짜라쟌

자캐놀이가 되진 않았을까 조금 떨립니다. 이 사유로 비계에서 읽어달라고 부탁한다고 막 고래고래 트윗 써놨는데 천사분들이 읽어주시고 따봉 날려주셔서 업로드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합니다. 사랑해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나츠안즈는 어떤 건가요? 사실 이번 소설에 제가 생각하는 나츠안즈를 진짜 다 때려넣었어요. 소설 작문에서 정해진 이야기 틀같은 걸 플롯이라 하는데 영화 세 얼간이처럼 한 놈은 안 변하고 주변 놈들이 변하는 걸 촉매 플롯이라고 해요. 사실 저는 앙스타 처음 팔 때 나츠메가 안즈의 촉매인 줄 알았습니다. 나츠메는 평생 마법사고 안즈는 나츠메에 의해 바뀌는 존재……. 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겁니다. 짜라쟌. 쌍방촉매더군요. 제가 이 관계성을 엄청 좋아해요 광광광광

예상과는 달리 생각보다 잘 완성된 것 같습니다. 얘는 진짜 소장본 뽑으려구요. 그런데 항상 하는 생각. 이것갖고 내가 돈을 받아도 되나…. 호호호 아마 제게 돈 쓰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온리전이 아닌 이상 평생 무료로 열람 가능하지 않을까요. 헤헤헤.

더 이상한 거 찌끄리기 전에 이쯤에서 마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후기 대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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