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같아서
마코안즈
<주의사항>
1. 유메노사키가 아닌 일반고를 기준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2. 엑스트라는 전부 원작과 관련 없는 인물임을 밝힙니다.
추천 음악
사실 아무것도 듣지 않고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그렇게 썼어요 후하하
그날은 그런 날이었습니다. 가을의 시작과 함께 울린 2학기의 시작, 아침부터 늦잠을 잔 탓에 허둥지둥거리다가 교복 셔츠 단추를 밀려 잠구었습니다. 초침이 째깍째깍 움직이고 매일 학교에 일찍 오던 제가 웬일로 늦자 연락하는 친구들의 전화 소리는 요란했습니다. 그렇게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만, 의외의 곳에서 멈추어버린 것입니다. 교통 카드 리더기에 평소처럼 갖다댄 휴대전화의 뒷면, 그러나 리더기는 “사용할 수 없는 카드입니다.”라며 문전박대를 시늉했습니다. 순간 모든 것이 하얘지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어젯밤 2학기니까 휴대전화 케이스를 바꾸자고 마음 먹었던 것이 이렇게 돌아온 것입니다. 모두가 바쁜 출근길, 뒷사람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귀를 찌르길래 현금을 찾을 생각도 못한 채 내리려고 했습니다. 그랬습니다만, 뒤에서 “청소년 두 명이요.”라는 말소리가 들리길래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온전히 한 명이었습니다. 다른 일행도 없이, 그저 오직 혼자였습니다. 한껏 당황해서 손가락으로 제 자신을 가리켰더니 그 아이는 싱긋 웃었습니다. 거짓말 같았어요. 초면이었으니까요. 선행을 받은 걸까 고민하다가 기억 속 누군가와 닮은 것 같아 빤히 바라보았어요. 살랑 흔들리는 가을 바람에 조금씩 움직이는 짧은 금발. 제대로 올려 쓴 파란 안경. 무선 이어폰을 하나씩 귀에 단 사람들과는 다르게 홀로 유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어요. 그 아이를 유심히 관찰하다 고맙다는 인사도 못한 채 인파에 휩쓸려 거리가 훌쩍 나 버렸어요. 불러보려다가 버스가 출발하길래, 균형 잡는 데에만 신경 썼어요. 그리고 그와 함께 그 생각도 접었어요. 그래, 저 아이는 나와 초면이야. 그저 도와준 거겠지…….
“안녕, 내 이름은 유우키 마코토야. 잘 부탁해.”
유우키 마코토.
책상에 눈을 두고 있다가 어느 누군가의 자기소개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 시기에 전학생이라니, 시의적절한가요?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고, 누가 전학 오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을 거란 생각에 책상의 흠집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랬습니다만, 어딘가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들고 얼굴을 살피었을 때는 그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머리를 뎅하고 친 기분이었습니다. 희미하게 미소 짓는 얼굴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짧은 금발, 화사한 녹안. 그 위에 얹은 파란 뿔테의 안경. 오늘 버스에서 본 그 아이와 하나부터 열까지 같은 바람에 헉, 하는 소리를 속으로 삼켰습니다. 세상에,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가을의 날씨에 맞추어 입은 카디건은 그 아이에게 몹시 잘 어울렸습니다. 눈만 깜빡거리며 바라보고 있었습니다만 여느 순정만화와는 다르게 제 옆에 그 아이가 앉는 일은 없었습니다. 제 자리와는 조금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잡은 오늘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감사 인사를 하자. 혹시 오늘 그 사실을 벌써 잊었을 수도 있으니 자기소개부터 하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1교시부터 애썼어요. 쉬는 시간에 다가가려 했으나, 넘치는 인파로 실패—너는 어디서 왔어? 게임 좋아해? 운동은? 원래 어떤 학교였어?—했어요. 점심 시간에 다가가려 하자 어느새 여기에 없고 교무실에 갔다는 이야기만 한참 들었습니다. 청소 시간에 접근하자 담임 선생님의 호출로 제가 불려갔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7교시 국어 시간에는 잠깐 체념한 채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언제 전할까, 언제 전할까…… 꿈에서까지 그 생각을 할 정도로 애썼습니다만 하루가 끝나기까지도 그 말은 전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하교할 즈음이 되면 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생각했는데, 종례가 끝나자마자 제가 주번이라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2학기가 시작되었으니 새로 비품을 주문했다고 각반의 주번은 종례가 마치고 오라는 학생 주임 선생님의 말도 천천히 떠올랐습니다. 결국 한숨을 푹푹 내쉬며 교무실로 갔습니다만, 주번인 학생들이 전부 성실히 출석해 일렬로 줄을 서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받기까지는 10분도 더 지나고, 15분도 더 지나……. 기다린 지 20분만에 비품을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반으로 달려가 분필을 나란히 정돈하고, 칠판 지우개를 올려두고, 마지막으로 문까지 잠그고 나서야 문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래, 내일 고맙다고 하자. 내일도 만날 테니까.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자 하얀 신발장들이 줄을 섰습니다.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자리에서 가만 서 있는 그 아이가 찬찬히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엇.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저는 가만히 서서 눈을 깜빡였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그 아이가 곧 열려고 하는 그 신발장은 제 신발장인지라 화들짝 놀라고선 다가갔습니다.
“엇, 안녕. 그런데 이 신발장이 내 신발장이라…….”
타박타박 다가가서 겨우 입을 열자 그 아이가 깜짝 놀랐습니다. “우왓, 그렇구나. 미안해.” 그렇게 덧붙이며 짧은 머리를 쓸어내렸습니다.
“오늘 전학 온 유우키 군이지?”
운동화를 꺼내며 그 아이를 돌아보았습니다. 짧은 금발이 가볍게 휘날렸습니다.
“어, 응. 어떻게 알았어?”
“같은 반이니까, 우리. 나는 안즈야.”
운동화를 욱여 신으며 유우키를 슥 훑었습니다. 여전히 실내화 차림인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근데 왜 아직도 집에 안 갔어?”
유우키가 앗, 하는 소리와 함께 난처한 웃음을 내비쳤습니다. 시선을 살짝 돌리며 주변 신발장들을 찬찬히 훑던 그 아이는 입을 열었습니다.
“전학을 와서, 신발장을 배정받지도 못했거든. 그래서 선도 선생님 말에 따라 배정받은 곳이 없는 신발장 빈 곳 아무 데나 넣었는데…. 그게 어디었는지 잘 모르겠어. 그런데 다른 친구들 신발장을 막 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 말에 가만히 눈을 깜빡였습니다. 그럼… 20분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는 이야기야? 당사한테 물을 수는 없으니까 속으로 삼켰습니다. 저는 운동화를 다시 신발장에 넣은 후 가방을 잠시 내려놓았습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그 아이를 보며 입을 열었습니다.
“찾긴 찾아야 하지? 도와줄게, 다 열어보면 알지 않을까?”
그렇게 말한 본인이 웃겨서 큭큭 웃어버렸습니다.
말은 그렇게 쉽게 했지만 전교생이 오가는 이 신발장을 전부 열어보는 건 확실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역시 쉽지는 않았어요. 하나 둘 열어보는 저와 마코토는 그렇게 열고 닫고만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나란히 서서 열심히 신발장을 열어보다가 먼저 입을 연 쪽은 저였습니다.
“오늘 아침 고마웠어.”
어딘가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앞뒤를 다 잘랐습니다. 유우키는 신발장을 열다 말고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뭐가?”
“오늘, 버스 탔을 때 말야. 네가 대신 내 준 애가 나였어.”
“아, 그렇구나.”
유우키는 살짝 미소 지었습니다. 확실히 어딘가, 제 기억 속 어디에 파묻혀 있던 사람을 꺼내 오는 느낌에 의아함을 느꼈습니다. 오래된 신발장에서 끼익 거리는 소리가 연신 울렸습니다.
“괜찮아. 혹시 그 일로 미안함을 느껴서 도와주고 있는 거면 괜찮아.”
저는 그 말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으음, 아냐. 물론 그 일때문도 있겠지만, 사실은 조금 누가 생각나서.”
“누가?”
“어릴 때 친구.”
그 이상을 이야기 해보았자 어차피 모르는 사람일테고, 그 정도에서 마무리하자 싶어서 생긋 웃었습니다. 시선을 그 아이에게 두었기 때문에 같은 신발장에 손을 올린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앗, 놀라서 손을 떼는 건 그 아이도 마찬가지인지라 괜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곳에 파란 운동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꽤 자주 신은 듯, 애정이 보이는 운동화. 유우키의 확신의 미소가 떠오르자 저 역시 활짝 웃었습니다.
“네 거야?”
“응!”
세상 기쁜 듯 웃던 그 아이가 신발을 꺼내며 시간을 확인했습니다. 어느새 다섯 시를 넘겨 점점 하늘이 주황빛으로 변해 갔습니다. 헉, 유우키는 허둥지둥 신발을 신었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 고마워!”
초승달처럼 접은 눈꼬리에 점점 누군가 더 익숙한 것입니다. 저렇게 허둥대는 것도.
“자, 잠시만. 왜이리 서둘러? 혹시 버스때문에 그래?”
그래서 잡으려고 애썼던 걸지도 몰라요. 유우키는 잠깐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노을 빛을 등 진 채 웃는 그가 멋졌습니다. 좋았습니다. 마냥 웃을 수 있던 그때처럼…….
“배 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
신발장 소동 이후 제법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주에서 삼 주 정도 흘렀을까요. 마코토는 잘 적응했습니다. 테니스부에 들어가 제법 맹활약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서 천장에 덕지덕지 붙은 스티커를 바라보았습니다. 어릴 때도 그랬는데. “배 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라고 외치던 그가 아직도 생각납니다. 생각해보면 이 주변에 섬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섬이 있습니다. 배를 타고 사십 분이면 도착합니다. 이렇게 상세히 아는 이유는 제가 거기서 살다 이사왔기 때문입니다. 그저 간단하게, 어머니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별로 떠나고 싶지 않던 그 섬에서 떠날 때, 그 섬에 오직 하나 있는 또래가 그리도 많이 생각났습니다. 벌써 구 년 전이라 얼굴도 희미하지만……. 그 아이는 심심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밖에 없던 또래가, 하루 아침에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으니…. 자전거를 유독 못 타던 그 아이를 떠올리자 세상이 희미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회상에 빠질 새도 없이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안녕, 마코토 군.”
매일 아침 가장 일찍 오던 저는 어느새부터인가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주 이른 시간인데 학교를 가면 마코토가 항상 저를 앞질렀으니까요. 배 시간이 이르다보니 훨씬 일찍 온다는 건 알고 있지만, 교실 문을 열쇠로 열며 들어가는 게 나름 재미는 있었는데 그것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그건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아침 일찍 와서 손을 흔들어주는 마코토를 보는 건 그것대로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자리에 가방을 내려둔 후 마코토의 앞 자리로 향했습니다. 매일 아침 늦을까 제가 전화로 깨워주는 친구의 자리입니다. 오늘도 여덟시가 되면 전화를 해 주어야겠지, 라며 자리에 앉았어요. 휴대 전화에 몰입하고 있는 마코토를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무슨 게임해?”
“어? 아, 별 거 아냐. 그냥 RPG 게임.”
“재미있어?”
“하다보면 괜찮은 것 같아.”
“음… 이 캐릭터는 조금 귀여운 것 같아.”
화면을 빤히 바라보다 한 캐릭터를 가리켰습니다. 하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귀여운 캐릭터가 활짝 웃었습니다. 그리고 마코토도 활짝 웃었습니다.
“그치? 이 캐릭터는…….”
마코토가 갑자기 말이 많아졌습니다. 저는 그저 웃으며 하나하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코토는 뭐랄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면 속사포처럼 말이 많아진다는 속성이 있어요. 평소에는 말수가 적당한 편인데 갑자기 휘몰아치고난 후 “앗, 미안.”이라며 애매하게 웃어버린다는 게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마코토가 저도 좋고.
“오늘도 일찍 나오느라 아침 제대로 안 챙겨 먹었지?”
마코토가 섬에 산다는 사실은 이미 공유했습니다. 그는 휴대전화를 끄고 난 후 고개를 좌우로 휘저었습니다. “먹고 왔어, 괜찮아.” 그렇게 덧붙이는 그는 곧 사실을 명명백백히 드러냈습니다. 정적 사이로 꼬르륵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푸하하 웃었습니다. 얼굴이 화끈해진 마코토가 잔뜩 얼타자 마지못해 초콜릿 하나를 건넸어요. 같은 초콜릿을 이내 입에 넣은 둘 사이에서는 웃음만 새었습니다. 푸하하, 하하하…….
그리고 우리 둘은 제대로 된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일단은, 으음……. 공부에 큰 뜻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는 것도 있습니다. 밤에 늦게 자면서. 그러니까, 이게 무슨 의미냐면… 수업 시간에 많이 졸았고, 존다는 것이지요. 어느 날은 수학 시간이었습니다. 칠판에 그려지는 화려한 곡선에 정신을 못 차리고, 이게 수학인지 영어인지 뭔지 싶어졌습니다. 그 즈음 생각하자 누가 마취총이라도 쏜 듯 픽하고 쓰러졌습니다. 네, 정말 픽, 하고……. 그래서 선생님께서 제 번호를 부르신 줄도 몰랐어요. 선생님의 딱밤과 함께 뒤에 가서 서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수학 선생님은 유독 무서우세요. 네, 정말로……. 가만히 뒤에 서서 판서를 필기하는 척 수첩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동그라미를 그리고, 고양이 귀를 달고……. 고양이 한 마리가 나오자 실실 웃음이 샜습니다. 그리고 한 번 더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리자 조금 더 즐거웠습니다. 마코토가 애매하게 미소 지으며 뒤로 나오고 있었거든요. 서 있어도 졸리던 참이었는데 잘 되었습니다. 저는 수첩에 무언가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수학 선생님 엄청 무서우시다.’
마코토가 글자와 저를 번갈아보더니 수첩을 넘겨 받았습니다. 둥그런 필체로 하나하나 글씨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러게.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안 이랬는데.’
‘전에 학교는 섬에서 다녔어?’
마코토가 가만히 글씨를 읽더니 펜을 움직였습니다.
‘응. 고등학교 하나 있었는데 폐교되었어. 중학교 졸업하자마자…. 그래서 이렇게 등교하게 된 거지. 섬에서 가장 가까운 고등학교로.”
‘원래 있던 친구들이랑 헤어져서 슬펐겠네.’
마코토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동급생은 아무도 없었어. 세 살 차이 나는 선배들은 몇 명 있었지만 말야.’
‘엇, 그럼 또래는 아무도 없었던 거야?’
‘응. 엄청 어릴 때 한 명 있었던 것 같기도 해.’
‘우와, 나도 어릴 때 친구 한 명 있었어.’
저는 웃고서 제가 쓴 문장의 ‘친구’에 화살표를 긋고서 이렇게 첨언했습니다.
‘자전거는 엄청 못 타고, 항상 덜렁거리던 친구였어.’
‘…그게 뭐야. 헉, 생각해보니 나도 자전거 잘 못 타는데.’
마코토와 저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 소리 없이 큭큭 웃었습니다. 웃음을 참느라 잔뜩 들썩이는 두 학생들을 빤히 바라보던 수학 선생님은 잠깐 표정을 굳히다 이내 수업을 재개하셨습니다. 그 뒤로도 필담은 이어졌습니다. 가끔 수첩을 주고받다 겹치는 손이 꽤 커서, 조금 화끈해진 것 같다가도 신기해서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소다 같은 맛이었어요. 가을이었는데.
마코토는 그 이외에도 저를 챙기고, 저는 마코토를 챙겼습니다. 도서관에서 키에 닿지 않는 책을 꺼내준다든가, 가끔 교복을 빌려준다든가—그래봤자 자켓만 가능하겠지요. 제 조끼를 빌려주면 마코토는 배가 다 드러날 것이니까요. 자켓도 저만 일방적으로 빌렸습니다만….—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재미있었어요. 매일이 놀랍고 멋졌어요. 제법 친해진 게 느껴져서 즐거웠어요. 어릴 적 그 아이가 떠올라서 더 잘해주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그 아이가 왜 그리도 선명한지. 그리고 마코토를 볼 때 어째서 더 신경 쓰게 되고, 그렇게 되는지……. 글쎄요, 저는 아마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제가 추천해 준 책을 들고서 활짝 웃는 마코토가 왜 이리 좋은지, 그것만으로도 왜 이리 행복한지……. 짧은 금발이 휘날릴 때면 마음도 붕 뜨길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고민도 했습니다. 맞아요, 그날도 그런 고민이었어요. 선착장에 가야 배를 탈 수 있는 마코토와 집으로 가는 저는 어쩌다보니 같은 버스를 탔고,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매일 같이 하교했어요. 두서 없는 이야기로 웃고, 그렇게 떠들다가…. 가만히 버스를 오르고 그 아이는 노을이 져 가는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어요. 이인석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다가, 문득, 그렇게 웃는 게 정말 예쁘다고 생각해버린 거였어요. 심장이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빠르게 다시 벅차 올랐어요. 물에 빠졌다가 다시 올랐다가, 그렇게 어지러운 심정 속에서 숨을 들이 마시며 그 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노을진 붉은 하늘에 담는 초록색 눈을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어느새 거리의 모습이 지나 바다가 보이기 시작할 때 즈음, 그애를 잡고 싶었습니다. 자는 것도 아닌데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싶었어요.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선착장에 다다르면 웃어주는 그 모습이 좋아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있지, 안즈.”
오늘도 지각을 겨우 면한 친구가 능청스레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주번 일 때문에 남고, 친구는 저번 지각에 대해 벌점을 상쇄하려 벌청소를 했어요. 칠판 지우개를 정리하고 가방을 메었습니다.
“왜?”
“혹시 연애해?”
…응? 분필을 정리하던 손이 공중에서 멈췄습니다. 고개를 돌려 친구를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친구는 빗자루질을 하다 말고 입을 열었습니다.
“전학생 친구랑 잘 지내는 것 같길래. 매일 하교도 같이 하고.”
“그건, 그냥 가는 길이 같아서 그래.”
“그래? 으음, 그냥… 좀. 잘 챙겨주는 것 같아서.”
“그럴 수도 있잖아?”
“맨날 섬에서 열심히 등교하는 친구 챙겨주느라 힘들겠네.”
그 말에 잠시 또 멈칫해버렸습니다.
“무슨 의미야?”
“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섬에서 살 수도 있지, 혹시 문제될 거 있어?”
“왜 그래? 아무 사이 아니라며.”
친구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서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섬에서 사는 게,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야. 애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좋은 눈치는 아니더라고. 그러니까 너도……….”
“……맞아.”
“뭐가?”
침을 살짝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마코토 군을 좋아하는 것 같아, 내가.”
친구가 엥, 이라며 고개를 좌우로 떨어뜨렸을 모습과, 노을이 천천히 비추는 칠판과 책상. 어느 누군가가 먹는 것을 깜빡한 박하사탕. 손에 들린 색색의 분필. 미숙한 손길로 배열된 책걸상……. 그리고 뒷문 너머, 누군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 모습이 어린 시절 누구랑 닮아보였습니다. 이사 간다는 소식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한 채, 집의 어른에게서 그 소식을 들은 그 아이가 제가 보는 줄도 모른 채 뛰쳐 나가던 그 모습이 녹록히 드러나던 것이었습니다. 짧은 금발을 보자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저도 발을 옮겼습니다. 친구가 부르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거면 된 것이었습니다.
신발을 빠르게 갈아신고 숨을 깊게 내쉬었습니다. 마코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갔을까, 역시 선착장으로 갔을까. 숨을 내쉬다가 어딘가 울컥해서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게, 그렇게 싫었을까. 그런 생각도 들다가 지금 쫓아가서 할 수 있는 말이 대체 뭘까 고민했습니다. ‘오해야, 그렇지 않아.’ 그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철저히 숨기는 것과 동시에 확실히 말하고 싶은 충동은 항상 혼재했으니까요.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가자, 선착장으로. 똑바로 보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좋아한다고, 어린 시절에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제대로. 어린 시절, 지금 되새겨보면 첫사랑이었던 아이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떠나버릴 수 밖에 없던 것이 아니라, 확실히…….
버스를 타고 도착한 선착장에서, 나는 마코토를 보았습니다. 누군가 놓고 깜빡한 자전거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마코토는. 하나에 숨을 마시고, 둘에 숨을 내쉬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어떤 말로 입을 열어야 할까. 그렇게 손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고 가만히 시선만 그 아이에게 남겨둘 때,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쳐버렸습니다. 안타깝게도. 평소와 똑같이 미소 지은 그 아이가 어째서인지 다른 사람처럼 보일 것만 같았습니다.
“안녕, 안즈쨩.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맞이하는 그의 모습이 노을을 등져 어두웠습니다.
“너는? 마코토 군, 안 늦어? 이러다 마지막 배도 놓치면 어쩌려고 그래.”
“마지막 배는 조금 남았어. 선착장에서 할 게 없나 싶어 자전거를 정리하고 있었고.”
“으음, 그렇구나…….”
뒤 돌아 하던 일을 마저 하려는 마코토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다가 어딘가에 부딪혀 파스스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흔들렸습니다만, 그 아이도 흔들리는 건 대체 무슨 경우였을까요. 제가 잘못 본 걸까요? 왜 그 아이는 무언가 무거운 것을 끌고 가는 듯 흔들리고 있는 걸까요, 흔들려야 할 것은, 나 같은데. 이렇게 일상의 대화처럼 끝나면 안 되는데. 그래서, 그래서……….
“들었어?”
멈칫, 마코토는 멈추어 섰습니다.
“혹시……. 들었을까.”
문득 확신이 사라져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마코토가 천천히 뒤를 돌았습니다.
“…진짜야?”
“응?”
“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 그거 말야.”
바닷바람에 짧은 머리가 휘날리고, 제 갈색 머리칼도 함께 휘날렸습니다. 마코토는 어딘가 불안정해보였습니다. 툭 치면 넘어질 것 같고, 후 불면 사라질 것 같고. 희미하게 웃어보이는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렇다면 좋겠다. 그러면, ……구 년만에 전할 수 있을 테니까. 내 쪽에서도.”
그 말에 바다의 소리가 한 순간에 전부 물에 가라앉았습니다. 바닷속에서 천천히 어린 아이의 형상이 올라오는 것 같아 흠칫했습니다. 마코토는 어느새 저를 등졌습니다. —배가 곧 올지도 몰라. 누군가 속삭였습니다. —구 년만이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조금 더 용기를 낼 수는 없을까?
안즈는 한달음에 마코토를 안았다. 뒤에서 안은 그의 등은, 어느새 보니 누구보다 커 있었던 것이다. 구 년 전에 좋아하는 아이와 멀찍이 떨어지고, 좋아했던 마음을 묻으려고 했으나 결국에는 묻지 못한 아쉬움과 미련 탓이다. 하아아, 숨이 떨리고 마코토의 눈은 점차 커졌다. 자신을 힘껏 안은 사람이 울고 있는 걸지도 몰라서, 그래서.
“구 년 전에도, 지금도…….”
마코토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안즈가 고여 있는 눈물을 닦아내고서 해사하게 웃었다. 마코토에 가려 노을 빛이 제대로 다가가지도 않는데 세상 예쁘게도 웃었다.
“좋아해. 정말.”
아아, 아아아……….
숨을 끝까지 밀어 내쉬고 나서는 숨을 들이 쉬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두 사람의 고동이라면 바다까지 넘실거릴것만 같았다. 구 년 전에 바다에 내다 버린 진심과, 그러지 못한 진심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하지만, 마코토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뜨며— 결국 네가 웃을 때 세상을 얻은 것만치 기쁘다면서, 결국은 그렇구나라며. 구 년 전에 묻어둔 줄 알았던 것도 사실은 아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첫사랑을 조심히 안았다. 얼굴이 붉어지진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도 했지만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되었다.
“좋아해. 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정말이야…….”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마를 콩 부딪혔다. 둘 다 얼굴이 새빨갰다. 그걸 보고서 둘 다 웃어버리고는, 동시에 “진짜 얼굴 새빨개,”라며 덧붙였다.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아직은 미숙해서, 여러모로 엇나가며 어영부영 손을 잡았을 때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설레었다. 어릴 적에, 워낙 자전거를 못 타던 마코토에게 안즈가 손을 내밀어 천천히 가르쳐 주던 게 떠오르는 것만 같아서.
“있지, 나말야. 자전거 연습 많이 했어.”
마코토가 웃었다. 정리 중이던 자전거 하나를 움직였다.
“한 번, 같이 타주지 않을래?”
그렇게 마코토와 함께 탄 자전거는 새로웠습니다. 뒷좌석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쭉 지나갈 적에 느낀 그 시원함이, 어째서 법을 어겼다는 느낌보다 훨씬 생경했습니다. 어릴 적에는 이럴 적이 없었는데. 그런 마음에 그를 조금 더 안았습니다.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있지, 마코토 군.”
구 년, 그 시간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많이 없었지만, 이 말은 꼭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기억해줘서 고마워.”
소중히 해줘서 고마워, 간직해줘서 고마워. 너와 내가 같아서, 정말 기뻐.
바닷바람에도 새빨개진 두 얼굴은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헐 진짜 끝낫네 어.. 어머나
6월달인가 이 리퀘를 받았습니다. 6월은 시험기간이니까 그렇다 치고, 7월에 마감해서 여름 낭낭한 느낌으로 드려야지! 생각하고 그때 열심히 썼는데, 죄다 잘 안 써지더라구요. 되게 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선도부 안즈에게 눈에 띄기 위해 불량하게 입고 온 마코토라든지, 얼죽아 안즈와 따뜻한 음료만 마시는 마코토라든지, 밴드부와 방송부도 있었는데 역량 이슈로 다 쓰는 데 실패했어요. 그런데 이 소재는… 어제 생각난 거예요. 자전거를 토대로 어째어째 살을 붙이고 하다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재미있게 보셨을까 고민되는 밤입니다.
청춘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저…. 보이시죠. 제가 쓴 청춘물 다 읽어보시면 대체로 고백이 다 오해에서 시작합니다. 사실 고백 씬만 놓고 보자면 저번 마코안즈와 거의 비슷한 느낌인데, 저것말고는 떠오르지가 않아서 참…… 조금 죄송한 느낌도 듭니다. 하지만 어떻게 고백해야 참신할지 하나도 생각이 안나는 거예요. 사실 저는 이때 고백해야지~ 하고 말하는 계획성 고백보다는 어? 망했는데? 라며 수습하기 위해 하는 고백을 더 좋아합니다. 엉망진창 고백이죠. 동양풍이나 이런 곳에서는 모르겠지만(이때는 보통 죽어서 고백시킵니다!!) 청춘물은 항상 이렇게 쓰게 되네요. 죄송합니다. 기대에 과연 충족하는 글이 될지… 여전히 아이러니하네요.
생각해보니까 고등학생~대학생 이거 쓸려고 했었는데요! 어쩌다보니 어린시절~고등학생 이렇게 되었네요. 의도한 건 이쪽이었으니 다행입니다~~
좀 TMI를 말씀드리자면 평소에 구글 문서 나눔머시기 서체 11포인트로 글을 써요. 보통 이런 단편 소설도 10페이지를 넘어가는데 이번 소설은… 무려 9페이지입니다. 깜짝 놀랐어요. 많이 주절거린 것 같은데 9페이지라니…. 게다가 9페이지 맨 끝도 아니고 맨 위였다네요. 후후. 그리고 필담!! 필담 소재를 꼭 써보고 싶었어요. 수업 시간에 글로 이야기했던 거, 저는 재미있었는데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오랜만에 새록새록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올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언제나 응원해주시는 분들 말은 차곡차곡 기억해나가고 있어요. 항상 기꺼이 봐주시는 분들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포기했을거랍니다. 후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점점 글이 길어지네요.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댓글 2
평화로운 뱁새
이학님의 마코안즈는 언제나 옳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글 읽고 울 뻔했어요... 아니 사실 조금 울었답니다🥲 특히 선착장 쪽에서 있었던 대화가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추천해 주셨던 노래 분위기랑도 잘 맞고,,, 안즈를 9년 동안 그리워했다니⋯⋯ 마코안즈가 순애라니!!!!!ㅜㅜㅜ 그 정도 오래됐으면 안즈를 잊어버릴 만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정말 좋아했다는 거 아닙니까 하 다시 생각해도 너무너무 좋아서 참기 힘드네요😭 그리고, ‘조금 더 용기를 낼 수는 없을까?’ 이 부분 강조하신 거 진짜 천재 같으셔요!!! 그쪽만 몇 번을 읽었는지... 이학님 혹시 글의 신이신 거 아니에요? 이번 연도 안에는 쓰시겠다고 하셔서 크리스마스에 올라오려나... 하고 기다렸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세상에나. 이학님 글이!!! 글이!!!!! 올라와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덕분에 기운찬 하루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후기 쪽에 써주신 여러 마코안즈 소재들도 다 좋은 것 같아요ㅜㅜ!!! 아까부터 자꾸 좋다고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습니다 1분 1초 계속해서 나오는 걸요🥺 이학님이 두고 가신 소재들은 재밌게 망상을 하며 놀아보겠습니다,,,😌 꼭 참신한 고백이 아니더라도, 이학님이 주시는 글이라면 뭐든지 괜찮습니다!!!! 이거로 100번 1000번을 우려먹겠다 하서도 입 열고 잘 받아먹을 자신이 있다구요...🍴기대했던 것보다 더 감동받아서 평생 이학님을 받들어야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춘물 하면 역시 이학님 글 아니겠어요? 이번 글도 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이학님😻 마코안즈 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해요,,,💗 좋은 하루 보내시구, 오늘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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