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an Song 下 (完)

미카슈 뇨테로 아가씨 AU

낭만실조 by 바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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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V. Deux bouquets et un amour orphelin

  열여섯 살의 아가씨는 불행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출신의 행운이 불행에 비례하는 것인 건가 싶을 만큼, 아가씨는 꽤 자주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카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었다. 아가씨의 곁에, 혹은 그보다 아주 조금 더 멀리.

  나는 불운했고, 아가씨는 불행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아가씨의 뒤를 쫓아다니며 본 그녀의 모습은 항상 변함없이 예뻤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아가씨는 새장 속의 새처럼 보였다. 

  지옥 같은 성장통을 견디고 자신의 안에서 많은 것들을 털어내며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것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으나 오직 미카와 인형들만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씨의 열여섯을 미카는 안다.

  아가씨의 열여섯 살에, 손가락 사이사이에 있던 자잘한 상처들을 시작으로— 마루 밑 바느질 상자, 옷장 속의 비단과 천 조각들, 가볍게 스케치한 의상 도안과 치수를 기록해 놓은 종이들이 발견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후작은 아가씨에게 벌을 내렸다. 

  이제 그녀는 온실 속 화초였던 작고 인형 같은 소녀가 아닌, 곧 황실과 결혼할 후작가의 자산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가볍게 끝낼 수 없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모든 물건들이 압수되었으며 그대신 갖가지 미술품들이 아가씨의 방에 들어섰다. 출입을 금지당할 뻔했던 미카는 아가씨의 시중을 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아이라며 두둔해 준 사용인들 덕분에 간신히 오후에만 그녀를 보러 올 수 있었다. 

  그녀의 방은 탈바꿈되어 있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동화나 책을 읽어 주던 작은 안락의자는 사라지고 그녀의 키에 맞춘 크고 기다란 소파가 들어서 있었으며 마루 또한 틈새 하나 없이 꽉 막힌 채 다시 깔려져 있었다. 모든 인형들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선반에는 고상한 여인이나 꽃을 그린 작은 그림이나 장식품들이 나열되어 홀로 빛났고, 아가씨의 보물 창고나 다름없었던 옷장은 깔끔하게 치워져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미카가 알던 아가씨의 방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가씨 또한 없었다.

  아가씨를 찾아 급하게 방을 나서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보이지를 않았다. 하지만 미카는 정식 사용인도 아니었기에 방에 들어가 찾아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그저 두리번거리고만 있자 평소 친하게 지내던 부엌데기 하나가 미카에게 살살 다가왔다.

    - 아가씨를 찾고 있는 거야, 미카?

   - 으응, 그런데 어디에 계신지 도저히 모르겠구마⋯⋯. 

  - 아가씨는 아마 중앙 홀에 계실 거야. 하지만 가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몰라, 사용인들은 전부 불려갔거든. 요리사부터 다락방 청소하는 노파까지 전부 다. 

  누가 봐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는 집합이었다. 아가씨는 분명 중앙 홀에 모든 사용인들과 함께 있다. 급히 부엌데기에게 인사한 미카는 뒤를 돌아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가씨가 곁에 있었다면 경박하게 뛰지 말라고 분명 잔소리했을 텐데. 아까 그 부엌데기의 말대로 저택은 텅 비어 있었다. 평소 바쁘게 움직이던 하녀나 하녀장, 집사도 보이지 않았으며 흔한 청소부 하나도 보이지를 않았다. 미카는 불안한 마음에 걸음을 더 빨리했다.

 

중앙 홀은 후작가의 자랑이었다. 진주와 흰 석영으로 장식된 샹들리에와 아름답고 화려한 패티스트리, 값진 대리석 기둥과 바닥의 무늬 하나까지 무엇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언제나 정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들을 골라 아가씨의 방과 중앙 홀에 꽂아 놓게 명령할 만큼, 이곳은 후작 저택의 얼굴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중앙 홀에, 후작 부부와 아가씨 그리고 저택의 모든 사용인들이 있었다. 미카가 문을 열고 급히 들어가자 많은 사용인들 때문에 앞이 보이질 않았다. 그저 아주 작게 속닥거리는 몇몇 소리와 무언가를 때려 부수는 커다란 소리만이 미카의 귀를 채웠다.

 

후작은 중앙 홀 계단 두 개가 이어지는 실내 스탠드에 서서 모든 사용인들과 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뒤에 후작 부인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서 있었고, 저 아래 계단에— 미카가 그렇게 찾던 아가씨가 평소와 다름없는 고아한 모습을 한 채 있었다. 다소곳하게 손을 모은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는 중앙 홀의 가운데를 향했다. 아가씨의 한쪽 손은 계단 난간에 걸쳐져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미카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보이질 않았다.

  죄송합니데이, 죄송합니데이⋯⋯ 연신 사과하며, 미카는 사용인들의 틈새를 파고들어 홀의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괜히 옷매무새를 점검한 미카는 고개를 들어 아가씨를 비롯한 모든 사용인들이 보고 있는 굉음의 시작점을 눈에 담았다.

 

무참히 부서지는 옷장과 안락의자, 인형들의 옷을 보관하는 상자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뭐야? 미카는 두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우람한 체형의 하인 두 명이 커다란 방망이 같은 것으로 아가씨의 가구들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모든 사용인들과 미카, 아가씨, 후작 부부가 보고 있다. 이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셔서였는지, 미카의 귀에서 잠시 소리가 멎었다. 그저 미카의 발밑으로 점점이 떨어지는 나무조각과 가구의 잔해들, 웅웅거리는 소리, 아가씨의 작은 까치발만이 눈앞에서 빙빙 돌았다.

 

아가씨를 닮은 보라색 눈으로 그 처참한 것을 차갑게 바라보던 후작은 이내 내려와 아가씨의 손목을 잡고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가씨는 마치 숨이 없는 인형이라도 된 듯 그에게 끌리듯 계단을 내려왔다. 사용인들은 파도처럼 갈라져 그들에게 길을 터 주었고, 이제 더 이상 부술 것도 남지 않은 가구들은 무력하게 짓밟혔다. 아가씨의 표정이 보이질 않았지만, 사용인들이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어 보니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닌 듯했다. 미카는 급하게 인파를 뚫고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미카는 빠르게 달렸지만 미카에 비해 한참은 더 장신인 후작과 아가씨는 이미 저만치까지 가 있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는 잔디밭의 한가운데에. 정원사 두 명과 허드렛일을 하는 소년 하나가 서서 아가씨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그들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타닥, 타닥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낮게 타올랐다. 아가씨의 표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그녀의 뒷모습이 너무나 작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후작은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힐끗 확인한 뒤 방향을 틀어 저택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가씨는 남겨졌다. 대체 무얼 태우고 있길래 이렇게 매캐한 냄새가 나는 걸까. 타고 있는 잔해들 안에서 간신히 버티던 어느 동그란 물체 하나가 결국 도르르 굴러 아가씨의 발치까지 닿았다.

  신의 축복 같은 5월, 봄날이었다. 

  아가씨의 눈이 허무한 색을 띠고 텅 비어 빛났다. 보라색 불길이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춤을 추었다. 절망으로 얼룩진 상황과는 달리, 어디선가 아가씨가 연주하던 피아노의 소리가 귀에서 울렸다. 단조롭고 간단한 곡. 불은 바람에 맞춰 살랑살랑 흔들렸다. 불 안에서 불타던 인형과 눈이 마주쳤다. 유리구슬 같은 눈만이 타지 않은 채 뜨거운 불 안에서 아가씨와 미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돼, 너무 가까워. 미카가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아가씨의 발치에 있던 인형의 머리에서 불이 옮겨붙었다. ⋯⋯ 플뢰르. 미카는 타오르고 있는 플뢰르를 가엾게 생각할 새도 없이 급하게 아가씨에게 다가가 그녀를 잡고 불에서 떼어놓았다. 다행히 드레스의 끝부분이 살짝 그을린 것뿐, 아가씨는 다치지 않았다. 그저 영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하고 목석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아가씨, 이래 넋 나가 있다가는 불에 같이 타 버릴 낍니더⋯⋯.

 

미카는 저런 눈을 본 적이 있다. 불쌍하고, 가엾고 운이 지지리도 없이 태어난 어린 시절 꽁꽁 얼어붙은 수도의 어느 강에 비쳤던 한 쌍의 눈. 아가씨는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꽃 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눈을. 카게히라, 하고 그녀가 낮게 불렀다. 미카는 항상 그랬듯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인형들로 가득했다. 미카가 잡고 있는 가냘픈 몸이 떨렸다. 미카는 그녀를 더 꾹 잡았다. 아가씨까지 불에 빨려들어갈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불에 뛰어들 것만 같았다.

  지금이라도 물통을 가져와 물을 끼얹어 버릴까? 불길에 손을 뻗어 하나라도 구할까? 아가씨가 가장 사랑한 인형인 마드네도 저 안에 있나? 그렇다면⋯⋯. 미카는 불이 타오르고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가씨가 저런 눈을 하는 건 싫었다. 불운은 덜어낼 수 없지만 불행은 덜어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아가씨의 불행을 직접,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었다. 

  글을 쓰는 손은 오른손이니까 망가져도 되는 손은 왼손. 기회는 단 한 번뿐, 정확하게 청록색 눈을 찾아서 꺼내 오면 된다. 미카는 아가씨를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불길을 향해 뻗었다.

  -카게히라.

  왼쪽 어깨를 누군가 강하게 잡아 돌렸다. 제비꽃 같은 눈이 보였다. 아가씨가 자신만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안 순간 미카의 심장이 뛰었다. 아가씨는— 겁에 질려 있었다. 미카가 자신을 바라보자 아가씨는 더욱 힘주어 그를 불 가까이에서 끌어냈다. 눈을 커다랗게 뜬 미카는 이제야 조금 눈높이가 맞아 제대로 보이는 아가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가여울 만큼 고고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가 답지 않게 겁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감정의 동요가 드러나는 아가씨는 처음이라 그랬는지, 미카는 한동안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늘게 떨리는 팔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사랑스럽고, 가엾은 아가씨. 미카는 무척 괘씸하게도 안타까운 기분을 느꼈다. 가여운, 가여운, 가여운, 가여운 아가씨. 

  아가씨의 보라색 눈동자에 빠져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은 기분이 들 때 즈음 그제야 다리 부근에 통증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자 바짓단이 불에 닿았는지 연기가 나고 있었고, 신고 있던 구두는 이미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팔을 잡은 아가씨의 흰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아가씨, 마드 누나만이라두⋯⋯.

  -너마저 불타 버렸다면 어쩔 뻔했지?

 

화난 건가? 미카가 놀란 눈으로 쳐다본 아가씨는 마치 불꽃 같은 모습이었다. 죄송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가씨가 깨지기 직전의 유리처럼 보였다. 제 목소리 하나에도 와장창 깨져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미카는 아가씨에게 잡힌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서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인형들의 잔해가 점점 재로 변하며 불도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저 고약하고 매운 연기만이 더 진하게 남았다.

  정원사가 냄새가 더 짙어지고 있으니 몸에 배기 전에 얼른 들어가시라며 어렵사리 말을 꺼내자 미카와 아가씨 사이에 흐르던 정적이 깨졌다. 아가씨는 손을 놓더니 고개를 홱 돌려 정원사를 외면했다. 미카는 안절부절 못하다 정원사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아가씨를 모시고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 미카는 온몸에 인형 누나들이 타며 난 냄새가 진하게 밴 걸 느꼈다. 아가씨는 말이 없었다. 

  그녀를 혼자 두어야 할지 곁에 있어야 할지 연신 고민하던 미카는 문턱에서 멈춘 뒤 이만 쉬시라 인사하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미카가 먼저 들어간 아가씨의 등에 대고 인사하려던 찰나, 아가씨가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 ……목욕 시중을 준비하거라.

  목욕? 

 

 미카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목욕이라면⋯….

 

아가씨는 그런 미카의 속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화장대에 앉아 하고 있던 장신구를 떼어내기 시작했다. 매캐한 탄내 때문일까,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예민해 보였다.

  -내 몸을 이 저택 사람들한테 맡긴다니 끔찍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

  탁 하고 그녀가 귀걸이를 화장대에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미카는 달아올랐던 뺨이 식는 걸 느꼈다. ⋯ 그러실 만도 하다. 그렇게 무참히 태워버렸으니. 온 사용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아가씨의 위상을 깎아내렸다. 그것도 아예 노골적으로 대놓고, 아버지라는 인간이. 아까 그 불꽃은 아가씨의 몸속 어딘가로 옮겨붙은 듯했다. 미카는 망설이는 마음을 티내지 않으려 애쓰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욕조와 주위에 있는 여러 통들을 보며 막막함을 느꼈다. 뭐가 뭐고, 저건 또 무엇인지⋯⋯ 미카가 알 리 만무했다. 아가씨의 인형이고 그녀의 가장 가까이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도 씻는다고 씻긴 씻지만, 해봤자 커다란 나무 대야 안에 들어가면 베넷 아저씨가 위에서 물을 끼얹어 주는 정도였다. 그와 물놀이를 하는 기분이라 즐겁긴 즐거웠지만 자신이 아가씨의 머리 위에서 그녀에게 물을 끼얹는 상상을 하자 저도 모르게 눈이 타악 감겼다. 

  일단 물을 받고— 작은 금색 수도꼭지를 돌리자 따뜻한 물이 콸콸 쏟아져 내려왔다. 물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통을 집어들자 안에서 무언가가 출렁 하는 느낌이 들었다. 미카는 눈을 한껏 찡그리고 통에 쓰여진 글씨를 읽기 시작했다. 거품. 미카는 아주 살짝 손에 덜어 물에다 풀었다. 하지만 아무 변화가 일지 않아 자세히 보려 고개를 숙이자 통에서 왈칵 하고 액체가 쏟아졌다. 응아아, 일났데이⋯⋯ 하며 미카가 급히 수면을 확인하자 수도꼭지 주위에서 커다란 거품이 솟기 시작했다. 이게 맞나? 아가씨가 이걸 보면 뭐라고 하실까. 

  -그 정도면 되었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미카는 욕조에 몸 앞쪽을 걸친 그대로 굳었다. 아가씨가 욕실에 들어와 있다는 건⋯ 내가 보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미카가 그렇게 머릿속으로 정신없이 회로를 돌리는 동안 아가씨가 의아해하며 그의 옆으로 와 어깨를 확 돌렸다. 옅은 분홍색의 실크 가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녀의 가냘픈 몸 선이 전부 드러나지만, 적어도 미카의 상상보다는 훨 낫다. 미카는 놀란 숨을 삼켰다. 

  -뒤돌아 있도록 해라.

  얼 빠진 얼굴을 나무르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명령하자 카게히라는 욕조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고개를 돌렸다. 욕실이 아무리 넓다 해도 그녀의 방보다 좁았고, 단둘이었고, 작은 소리도 폭발적으로 들렸기 때문에 미카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걸 느꼈다.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무언가 수면에 닿고 물에 들어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얼마 안 가 이리 오라며 아가씨가 명령했고, 미카는 격한 내적 갈등을 애써 외면하며 뒤를 돌아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상체와 하체의 반이 거품 사이에 파묻힌 아가씨가 덤덤한 표정으로 거품이 너무 많다며 한마디를 던졌다. 미카의 속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이 상황을 의식하고 있는 건 오직 미카뿐인 모양이었다. 거품 위로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 팔— 종아리, 맨발까지 죄다 새하얗다. 욕조에 걸쳐진 그녀의 종아리와 발목은 무척 얇고 가늘었다. 저대로 툭 치면 부러져 버릴 것만 같다. 미카는 제 심장 소리가 들릴라, 그녀와 조금 거리를 둔 채 욕조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와 눈높이가 맞았다. 

  길다란 머리를 향기 나는 액체와 섞어 문지르는 동안 아가씨는 말이 없었다. 표정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욕조 안에 기대고 누워 아무 미동도 없이 미카에게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그렇겠지, 방금 그래 아끼던 인형들이 죄다 타 버렸는데 사람이 어떻게 태연할 수 있긌나. 미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품과 섞었다. 

  마무리는 자신이 하겠다며 먼저 나가라는 말을 듣자, 미카는 도망치듯 욕실을 빠져나와 그녀의 방에서 큰 숨을 내쉬었다. 거품을 많이 내서 다행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 고역이었을 게 분명하니까. 자신의 몸을 이곳 사용인들에게 맡기는 게 끔찍하다고 말한 아가씨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아가씨는 조금 시간이 지난 뒤 나왔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 바닥에 닿으며 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의자 위에 천천히 앉은 그녀는 화장대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미카의 존재를 망각하기라도 했다는 듯. 

 

-아가씨, 이거 신으시래이.

 

옷을 걸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는 빈껍데기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미카가 말했다. 아가씨는 아, 하고는 미카를 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아가씨의 속눈썹이 무척 길었다. 아가씨가 미카 앞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척을 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그렇게 하도록 교육을 받았고, 이 저택 안에서 미카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미카도 그녀가 괜찮지 않음을 안다. 하지만 왜 모르는 체를 하냐고 묻는다면 미카는 아가씨가 모르길 원하니까, 하고 대답할 것이다. 줄곧 그래왔다. 

  미카는 조심스레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열다섯 살이 되며 키가 이미 너무 커 버렸기에 그다지 눈높이가 낮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가씨는 미카의 성장을 묵인했다. 왜일까? 미카는 분홍빛이 도는 그녀의 새하얀 다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드레스 자락에 가려져 걷는 데에만 쓰여지는 게 아까울 만큼 아름다운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실내용 구두를 든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아가씨가 말수가 적어졌기에 주위는 그저 조용하기만 할 뿐, 숨소리나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도 적나라하게 들렸다. 손가락 끝이 그녀의 발에 닿았다. 원래 귀족 아가씨들은 다 살이 이래 부드럽나? 제 거친 손이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왼쪽 발을 조심스레 신발 안에 넣은 미카는 다시 주의를 기울여 천천히 들고 있던 왼쪽 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아가씨가 자신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덜 마른 분홍색 머리카락에서는 아까의 그 거품 냄새가 났다. 둥근 어깨에 늘어져 있는 살짝 젖은 머리카락이 아가씨의 옆얼굴을 가렸다. 아몬드형의 갸름한 얼굴형이 자랑인 아가씨는 언제나 머리를 귀 뒤로 넘긴 채 풀고 다니곤 했는데, 이렇게 가린 걸 보니 마치 그녀가 머리카락 안에 얼굴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카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의 오른쪽 발을 손에 쥐었다. 마치 갓 태어난 새 생명이라도 되듯, 아가씨의 작은 발을 미카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입맞추고 싶다.

  새하얀 발등을 보다 불현듯 들은 생각에 발을 들고 있던 손이 움찔했다. 가는 발목 아래로 이어지는 둥글고 부드러운 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 괘씸할지 몰라도,

부디 이게 작은 위로가 되길. 미카는 그녀의 발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발끝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까마득하게 어릴 적 인형들에게 입을 맞추던 아가씨를 생각하며. 그리고는 다시 발등에 입술을 댔다. 그리 긴 시간 동안 대고 있던 것도 아닌데 괜스레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저 새하얗기만 하던 그녀의 발은 예상 외로 무척 따뜻했다. 

  아가씨는 자신의 발에 입을 맞추는 미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눈을 꼭 감은 채 발에 입을 맞추는 미카가 자신의 발이 마치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도 되듯 너무나 소중히, 그리고 조심히 감싸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입술을 뗀 미카는 여전히 붉은 뺨을 한 채 구두를 들어 그녀의 발을 끼워 넣었다. 단순한 움직임에도 지나치게 많은 손의 면적이 발에 닿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미카는 꾸지람을 듣는 것도 무섭지 않은지 고개를 똑바로 들어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미카는 한참 동안이나 그녀의 세계에 잠긴 채 그녀의 발을 감싸고 있었다.

  그날 밤. 

  아가씨가 통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어찌어찌 침대로 옮긴 미카는 그녀를 눕힐 엄두도 내지 못하고 등을 받쳐 준 채 이불을 끌어와 그녀 주위에 둘러 주었다. 거리감이 너무 가까워서 심장은 터질 것 같고 그녀의 등허리를 감싼 팔을 뺄 수도 없었지만, 아가씨가 제게 기대고 있는 것만큼은 좋았다. 아가씨는 해가 져도 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미카도 오두막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후작도, 후작부인도, 그 어떤 사용인도 아가씨의 방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가씨의 방은 미카와 그녀, 둘만의 세계가 되었다. 

  - ⋯⋯ 방이 낯설지 않나?

  정적 속에서 잠든 것만 같던 아가씨가 불현듯 꺼낸 말이었다. 미카는 살짝 놀라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발에 입을 맞춘 것에 대한 얘기도 아니고, 그저 방 얘기. 미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는 이 방이 낯선 모양이다. 아가씨가 사랑한 인형들도, 그녀의 옷들도 없는 외로운 공간이 되어버린 방 한가운데에 그녀는 고립된 채로 떠다니고 있었다. 미카는 괜스레 그녀의 어깨까지 고개를 숙였다. 좋은 향기가 났다. 

  - 죄송합니더. 마드 누나, 구하지 못해가⋯⋯. 

  - 네가 타지 않았으니 되었다, 카게히라. 

  조심스레 내려다본 그녀는 고요했다. 당장이라도 잠들 듯 살짝 풀린 얼굴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 미카는 손을 한 번 폈다가 꽉 쥐었다. 왜 잠에 취한 채 당신은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아가씨는 얼마 안 가 옅은 숨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는 아가씨의 얼굴을— 미카는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운데도, 아가씨의 숨소리는 너무나 옅어 잘 들리지 않았다. 

  아가씨가 너무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일까? 미카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살며시 그녀의 맥을 짚었다. 다행히, 그리고 당연히 그녀는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저 눈을 감고 잠들어 있을 뿐. 미카는 그녀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었다. 아가씨는 미카가 이렇게 거리감 없이 행동해도 혼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좋아해야 할지, 안타깝게 여겨야 할지 여전히 감이 잡히질 않아 미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가냘픈 몸 속 깊은 곳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미카는 그것이 아름다운 음악이라도 되듯 눈을 감지 않은 채 감상에 잠겼다. 

  마치— 작은 새의 심장 소리 같았다. 

‧✧̣̥̇

  

  사박, 하고 풀을 밟는 소리가 울렸다. 

  한 손 가득 꽃을 쥔 검은 머리의 소년은 다 되었다는 듯 작게 숨을 뱉었다. 두 색이 다른 눈동자에 광활하게 펼쳐진 들판이 있었다. 손톱에 풀물이 들었데이, 아가씨한테 혼나겠구마⋯⋯ 하면서도, 소년은 얼굴을 붉혔다. 어디선가 꽃과는 사뭇 다른 달콤한 향내가 나는 것 같아 미카는 급히 꽃다발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꽃이 예뻐 무작정 아무거나 꺾었다가, 조잡한 색조합이라며 아가씨가 도로 가져가라 할 것만 같아 가장 귀하고 예쁜 꽃들만 나름 색을 맞춰 꺾었다. 작은 쌀알처럼 귀여운 꽃잎이 달린 흰 꽃과 아가씨의 눈을 닮은 보라색의 꽃, 그리고 제 눈을 닮은 노란색의 작은 들꽃까지. 하지만 여전히 가져가기 망설여졌다. 나 따위가 이걸 줘도 되나— 그리고 이걸 받아 주시려나, 하는 마음이었다. 

  미카는 꽃다발을 안고 뛰었다. 꽃다발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만큼 작고, 예쁜 꽃만 엄격히 선별해 꺾느라 꽃의 모양도 각기 제각각이었지만 아가씨에게 주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하면서 주면 좋을까. 꽃이 예뻐가 가져왔습니데이⋯⋯ 아니야, 너무 뻔해. 꽃이 아가씨를 닮아가⋯⋯ 아니야, 너무 속 보여. 으아, 뭐가 이렇게 어려운 기가. 머리를 작게 흔든 미카는 여전히 발그레한 뺨을 한 채 저택 인근으로 발을 옮겼다.

  아가씨는— 다행인지 아닌지, 지난밤을 기억하지 못했다. 악몽의 열기에 취해 있었을 뿐이었던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태연한 태도를 유지했고, 그저 미카만 유달리 긴장하고 그녀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미카는 여전히 그 촉감과 열기가 선했다. 이 꽃다발은 사죄의 의미라고, 그런 생각을 했다. 

  제법 성큼성큼 걸으며 저택을 가로질러 아가씨의 방 앞에 도착했고, 점잖게 문을 두드린 뒤 그녀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자그마한 꽃다발은 등 뒤에 숨긴 채로 들어간 넓은 방 한가운데에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밝은 하늘색의 실내용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길쭉한 몸은 앉아 있어도 조각상 같기만 해 미카는 잠시 넋을 잃고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긴 채 서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온 편지를 읽고 있는 그녀의 앞 테이블에는⋯⋯ 커다란 꽃다발이 있었다. 

  “들어왔으면 넋 놓고 있지 말고 이리 오도록.”

 

어, 하지만 이 꽃다발⋯⋯ 미카는 결국 그녀의 앞으로 죄를 짓기라도 한 듯 느린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아가씨는 그에게 말을 했다. 짐은 다 정리했나 하고 묻는 질문에 미카는 으응, 하고 대답을 얼버무리며 커다란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내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화려하구마. 틈을 봐서 제 꽃다발은 어디다 두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보낸 걸까, 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유심히 바라보자 필기체로 쓰인 이름이 보였다. 황실의 문양이 찍혀 있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녀의 약혼자에게서 온 모양이라, 미카는 자그마한 꽃다발을 더 꽉 쥐었다. 작은 보라색 꽃잎 하나가 살랑 하고 바닥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때마침 미카를 향해 고개를 돌린 아가씨가 그 꽃잎을 보더니 물었다.

 

“뒤에 뭘 숨기고 있나?”

  “아, 아무것두⋯⋯.”

  “네가 꽃도 아니고 꽃잎을 흘리고 다닐 리가. 내놓아 보거라.”

  차라리 내가 꽃이면 좋겠습니더, 확 날아가 버리게. 머릿속으로 수백 번을 망설인 미카는 꽃다발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내밀어진 꽃다발을 보는 아가씨의 눈동자가 커졌다.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여전히 주춤거리며 꽃다발을 내미는 자신이 영락없이 상사병에라도 걸린 것만 같은 모양새였기에, 미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만히 보고만 있던 아가씨는 손을 내밀어 미카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 뒤 조용히 꽃다발을 가져갔다. 살짝 향기를 맡은 뒤,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미카는 아까 자신이 저 꽃다발에 얼굴을 파묻었던 게 떠올라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아가씨가 꽃다발의 향을 맡은 건지, 꽃다발에 입을 맞춘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아 괜스레 등 뒤로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길 반복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게냐?”

 

유독 보라색 꽃의 비중이 많은 게 의아했는지 꽃다발을 유심히 살피던 아가씨가 물었다. 살짝 놀라 예, 예 하고 더듬거리며 대답한 미카는 아가씨의 눈동자 색이라서요— 하는 뒷말은 꾹 삼켰다. 어디서 꺾어 왔느냐 묻는 아가씨에게는 저택 후문 밖에 있는 들판이라고 답을 했고, 수만 번이나 황실에서 온 커다랗고 화려한 꽃다발을 힐끗거리며 자신의 것과 비교했다. 응아아, 괜히 드린다고 가져왔데이⋯⋯.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쉰 미카에게 아가씨가 말했다.

  “함께 갈까.”

  미카가 얼이 빠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외출 준비를 하라는 말이라며 타박한 아가씨는 들고 있던 편지를 접어 작은 서랍에 넣었다. 미카가 한 박자 느리게 대답하고는 급히 아가씨의 방을 나와 옷들이 있는 방으로 내달렸다. 왜인지 모르게 심장이 자꾸만 뛰었다. 왜 그곳에 데려다 달라고 하신 거지? 꽃들이 마음에 드셨던 걸까? 미카는 그녀의 향기로 가득한 옷방에 들어가 골똘히 생각했지만 답은 나오질 않았다. 아가씨의 속내는 아무리 곁에 오래 있어도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 작게 한숨을 쉰 미카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진한 자홍색의 드레스를 꺼내 팔에 걸쳤다. 

  “들어가겠습니데이, 아가씨.”

  똑똑 두드리고는 방 안에 들어섰지만 아가씨는 없었다. 욕실에 계신 건가? 하고 미카는 아까 그 테이블을 힐긋 바라보았다. 커다란 꽃다발은 온데간데없고 길쭉하고 작은 화병 하나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화병 안에는 작고 부끄러운 꽃다발 하나가 꽂힌 채로 테이블에 자그마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미카는 아가씨의 드레스를 더 꼭 쥐었다. 

  아가씨는 침대 뒤편 가려진 곳에서 나왔다. 침대 기둥을 잡은 채 모퉁이를 돈 그녀는 옷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고, 미카는 평소대로 하녀들을 호출하는 벨을 울리고 그녀에게 옷을 건넨 뒤 뒤돌았다. 하녀들이 들어와 그를 지나친 뒤 아가씨에게로 가 옷을 갈아입히는 소리가 들렸다. 바스락 하고, 한동안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끝나자 아가씨는 채비가 다 되었다며 하녀들을 물렸다.

  분명히 무언가 할 게 있어서 아가씨네 방에서 지내게 된 것 같은데. 하지만 아가씨는 미카에게 평소와 다른 일은 어느 것도 시키지 않았다. 그저 아가씨의 방에서 자고 일어나 함께 생활하고 같은 시간에 잠들면 그뿐. 왜일까? 미카는 양산과 손수건을 챙기며 의문을 품었다. 

  그나저나 그 들판까지 나가려면 저택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괜찮을지 모르겠구마⋯⋯. 미카는 아가씨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가씨를 앞질러 걷는 것은 이 저택에서 후작 부부와 소후작에게만 허락된 일이었기에 미카는 아가씨의 앞에서 걸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계속, 막연히 그녀의 곧은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커다란 드레스 치마 위로 보이는 그녀의 상체가 오늘따라 무척 가늘어 보였다.

  “앞을 보고 걸어라, 카게히라. 나만 보며 걷다가는 넘어지고 말 테니까.”

  “응아아, 죄송합니데이⋯⋯.”

  “왜 그리 매번 넋이 나가 있는 게지?”

  “아가씨는 언제 봐도 예쁘다 싶어가, 눈을 떼기 힘들 때가 종종 있습니더.”

  이렇게 대놓고 낯간지러운 칭찬을 해도 아가씨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라는 듯 콧방귀를 뀌며 아첨하지 말라 핀잔을 줄 뿐. 미카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하다못해 그를 못마땅하게 흘겨보자 에헤헤 웃으며 조금 더 따라붙은 미카는 그녀의 발 박자와 맞추기 위해 애를 썼다. 항상 일정한 보폭으로 걷는 그녀와 달리 미카는 매번 보폭이 들쭉날쭉해 자칫하다가는 그녀보다 앞서나갈 것만 같아, 항상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녀의 구두가 땅에 닿는 소리를 귀에 새기며 자신이 태엽 달린 인형이 되었다 각인한 뒤 걷곤 했다. 

  “얼마 전에 이곳으로 편지가 왔어.”

  아가씨는 미카를 쳐다보지 않은 채 말했다. 갑자기 편지 얘기? 미카는 의아해하면서도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가씨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네 친척이라는군. 지금 이 제국 바다 건너 어느 섬나라에 살고 있는 모양이다.”

  미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친척이라니, 이제 와서? 미카가 얼어붙은 수도의 길바닥에서 굶어 아사할 뻔했을 때, 고아원에서 같이 생활한 아이들이 각자 친척들의 손에 거둬졌을 때도 미카에게 피붙이로부터 온 연락은 없었다. 그래서 혈혈단신 천애 고아인 거지 소년 꼬리표를 떼지 못한 채 이 저택에 들어오게 된 거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친척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찾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미카의 굳은 표정을 본 아가씨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감스럽게도 과거에 참전해 지금은 다리 하나를 잃은 채 살고 있다고 하던데.”

  편지는 베넷 아저씨가 볼까 봐 아가씨가 따로 가져갔다고 했다. 친절하고 가슴 따뜻한 베넷 아저씨라면 분명 미카가 거부한다 한들 자신이 따로 편지를 썼을 것이다. 가져가서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라는 말에 미카는 속으로 잠시 망설였다. 피붙이에 대한 미련이라는 것은 평생토록 미카의 결핍이 되고, 구멍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괘안습니데이.”

  내는 아가씨만 있음 됩니더. 미카는 얼굴 하나 붉히지 않은 채 혼잣말이라도 하듯 대답했다.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일까, 경어를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가씨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카게히라, 하고 조용히 읊조린 그녀의 목소리에 미카는 귀를 기울였다.

  “내가 수도로 가 황실과 결혼하면 너는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 없을 게야.”

  후작 부부는 그녀의 결혼 이후 이츠키 가의 저택을 수도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사용인들도 모두 수도의 사람들로 바꿀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니 베넷 아저씨도 고향으로 내려가야 하고, 미카는 더 이상 그 오두막에서 살 수 없다— 라는 이야기. 미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 드러난 감정이 읽고 싶었지만, 아가씨는 그저 날카로운 눈매 아래 보라색 눈동자로 그를 곁눈질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고아하고, 그저 태연한 얼굴이었다. 

  “알아보니 네 친척이라는 사람,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아 제법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는 모양이야. 네 부모에 관해 알아보던 와중 네 존재를 알게 되었고. 후계자로 너를 들일 생각인 것 같더군.” 

  덤덤한 목소리가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미카는 양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말을 요약하자면 얼마 안 가 미카는 이곳을 떠나야 하고, 베넷 아저씨와 함께 갈 수도 있지만 그는 생계가 어려워질지도 모르니 섬나라에 있는 친척 밑으로 가 행복하게 살라는 내용이었다. 누릴 수 있는 것을 늦게라도 마음껏 누리며, 아가씨가 없는 세상에서. 미카는 오랫동안 안식처로 삼아 오던 그녀의 세계를 떠나게 되고, 아가씨는 모든 인형을 떠나보낸 채 고아처럼 황실과 결혼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왜일까, 그녀를 멋대로 떠나간 인형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아가씨가 저를 주우셨으니⋯⋯.”

  미카는 생각했다. 내가 떠나면 이 사람은 분명히 쓸쓸한 얼굴을 할 것만 같다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 아무것도 없는 고아 소년에게 이름을 주었으니까. 


 “아가씨가 저를 떠나기 전까지는 떠나지 않을 낍니더.”

  나는 당신을 떠날 수 없어. 

  마드네도, 레일라도, 플뢰르도 인사 없이 아가씨를 떠났지만. 아가씨는 여전히 대답 없이 그에게서 눈을 돌리고, 더 이상 편지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후문으로 가는 길까지, 아가씨보다 살짝 뒤에서 양산을 든 채 걷던 미카는 그녀가 정문 바로 앞에서 딱 발걸음을 멈추자 저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었다. 저택 영지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어서 그러는 걸까. 미카는 그녀를 앞질러 후문 문턱을 넘은 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손을 아가씨는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마 안 가, 장갑을 낀 손이 미카의 손에 얹어지고 아가씨는 발돋움해 후문 문턱을 넘었다. 평소의 그녀와는 다르게— 조금 더 크고, 사뿐한 보폭으로. 저택을 등지고 있는 아가씨는 무척 이질적이었다. 미카는 속으로 제가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들판에 가까이 가자 꽃 내음이 물씬 났다. 아가씨는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지 손으로 머리카락을 살짝 걷어내고 있었다. 가장 좋은 터를 발견한 미카는 아까 챙긴 손수건을 펴 아가씨가 앉을 자리를 만든 뒤 그쪽으로 아가씨를 데리고 갔다. 꽃을 밟는 게 미안하기라도 한 걸까, 그녀는 무척 조심스럽게 걸었다.

  “네 것은?”

  “안 가져와가, 그냥 앉았습니데이.”

  “그러다가는 옷에 풀물이 든단 게야.”

  “에헤헤, 검은 바지라 괘안습니데이.” 

  미카는 다시 사람 좋게 웃었다. 옷을 소중히 하라며 잔소리를 한 아가씨는 얼마 안 가 꽃밭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미카는 꽃밭을 한 번 보고, 아가씨를 보고, 다시 꽃밭을 보기를 반복했다. 생각에 잠긴 깊은 보라색의 눈동자도 예쁘고 양산을 쥐고 있는 손가락도 예쁘다. 얄쌍한 콧날과 붉은 입술 하나까지 전부 다 예뻤다. 미카는 어디를 봐도 눈이 즐거워 연신 웃었다. 아가씨는 레이스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카게히라.”

  “예, 아가씨.”

  “내일이면 넌 나와 함께 수도로 가 내 데뷔탕트에 참석할 게다.”

 

프릴이 달린 양산 아래로 분홍색의 긴 머리가 바람에 날렸다. 양산을 쥔 손가락이 또 손잡이를 살짝 돌리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이어져 온 그녀의 버릇은— 그녀 자신도 모르고, 오직 미카만 알았다. 그녀의 속내를 살짝 훔쳐볼 수 있는 유일한 길. 

 

“말만 데뷔탕트지, 속이 시커먼 속물들이 모여 제 자식들을 자랑하는 곳이라 널 데려가는 것이 탐탁지 않지만 사정이 그렇게 되었어. 그러니⋯⋯.”

  아가씨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아가씨의 보라색 눈에 비친 자신이 보였다. 

  “다른 이들이 널 험하게 대하지 못하게 하거라. 널 함부로 대하거든 그 자리를 빠져나와 내게 와도 좋으니.”

 

에? 그래도 되는 기가? 미카는 의문을 가졌다. 귀족도, 하다못해 평민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그가 어떻게 귀족 자제들의 말을 무시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아니, 그래도 되는 건가? 하지만 아가씨의 표정이 너무 굳건해 보여 미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마주보았다. 미카는 꽃밭에 얹은 제 손과 아가씨의 손끝이 닿는 걸 느꼈다. 간지러운 감각. 

 

“인자 얼라도 아인데, 너무 걱정하지 마시래이. 무례한 사람을 만나면 퍼뜩 아가씨께 가겠십니더.”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건 언제나 무서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가씨가 있으면 괜찮을 것도 같다. 아가씨는 착한 아이, 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표정으로 손을 들어 미카의 뺨을 쓰담았다. 맨손의 부드러운 감각이 왜인지 그리운 느낌이 들어 미카는 그 손에 제 손을 얹었다. 어릴 땐 그저 길고 저보다 한참 커 보이기만 했던 손이 이리 펼쳐 잡으니 한 손에 꼭 들어간다. 

  아가씨, 사랑에 빠진 눈을 알아요?

미카가 속으로 물었다. 제비꽃 같은 사랑을, 진주 귀걸이 같은 사랑을, 작은 새의 심장 같은 사랑을— 알아요? 당연하게도, 아가씨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리광은, 하며 나무라는 듯 솔직하지 못하게 구는 그녀만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바람에 날릴 쌀알 같은 흰 꽃잎 몇 장이 그녀의 드레스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미카는 그 장면을 계속 바라보았다. 오래오래 기억하기 위해, 훗날 아가씨의 세계를 떠나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기억할 수 있게. 

chapter VI. Voleur de fleurs

  계절의 끝자락, 수많은 귀족 자제들의 사교계 첫 입문을 알린 데뷔탕트의 화려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 신문 제 1면에 실린 사진에도 다 담기지 못했다. 데뷔탕트를 개최한 궁전의 아름다움과 갓 사교계에 입문한 영식, 영애들의 풋풋함에 대해 형식적으로 첫 운을 뗀 신문은 얼마 안 가 한 영애를 칭송하는 글로 한 면을 꽉 채웠다. 데뷔탕트가 끝난 뒤, 제국의 귀족들 중 그 기사를 읽지 않은 이들이 읽은 이들보다 수가 적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기죽지 마라, 카게히라.”

  엣, 하고 미카는 퍼뜩 눈을 뜨고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데뷔탕트가 정식으로 시작된 지는 이십 분 정도가 지났고, 이미 수도의 귀족들은 전부 저 커다란 문 건너편에 모여 있다. 아가씨는 그 어떤 하인이나 하녀도 거느리지 않은 채 오직 미카 하나만을 뒤에 두고 말을 건넸다. 

  다들 아가씨를 보느라 내한테는 눈길도 안 줄 것 같아가 걱정은 안 합니더. 미카는 그 말을 목구멍 뒤로 꾹 삼킨 채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진주색의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는 새신부처럼 아름다워 눈을 떼기 힘들었다. 화장대 앞에서 몇 시간을 보내더니, 당장 어디 명화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 왜 그래 오래 하십니꺼, 아가씨?

 

  아가씨의 준비가 너무 길어지자 지쳐버린 미카는 의자에 두 다리를 쭉 편 채 걸터앉아 하품했다. 뒤돌아 있는 아가씨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만에 하나 보았더라면 아마 경악하며 혼을 냈을 거다. 화장품을 내려놓은 아가씨가 답했다.

  - 나는 오직 아름다움을 위해서만 치장을 하는 게 아니야.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기 위해. 미카는 그녀 또한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저런 치장 또한 그들의 따가운 눈초리 속에서도 태연해 보이기 위해 하는 준비 중 하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름다움 속에 본심을 숨기면 사람들은 가장 빛나는 것만 보기 마련이었다. 아가씨가 또다시 가여워 보이기 시작한다. 

  문이 열리자, 까마득히 높은 천장과 호화로운 무도회장이 드러났다. 무지하게 화려하구마⋯⋯. 사람이 너무 많았고, 그 모든 사람들이 아가씨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가씨는 그런 시선에 기죽지 않은 채 평소처럼 태연한 모습으로 그들을 눈으로 훑은 뒤 앞으로 나아갔다. 미카는 그림자처럼 아가씨의 뒤에 꼭 붙은 채 그녀의 뒤만을 따랐다. 분명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아가씨가 지나갈 때에는 그게 꼭 거짓말이라도 됐었다는 듯 고요해졌다. 

  “여기서 기다리도록.”

  구석에 있는 작은 소파에 앉아 있던 아가씨는 후작 부부가 도착하자 이만 가 봐야 하는 건지 미카에게 가만히 있으라 명령했다. 미카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아가씨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혼자 남겨졌지만 괜찮아. 아가씨는 분명 다시 와 주실 테니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도, 조금은 참아 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여긴 귀한 출신의 사람들 뿐이라, 온갖 옷들이 다 번쩍거리고 사방이 화려했다. 미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짝 겁먹은 채로 아가씨가 어디쯤 있나 하고 기웃거렸다. 

  다른 여자 귀족들보다 족히 몇 뼘은 더 큰 키를 가진 아가씨는 저 멀리 있는데도 눈에 들어왔다. 말없이 상대를 바라보고만 있는 아가씨 옆에서 후작 부부와 어느 귀족 부부가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귀족 부부의 자제로 보이는 남매는 아가씨를 곁눈질하느라 바빴다. 

  사실 그뿐 아니라, 이 무도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가씨의 얘기만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아가씨는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세간에 떠돌던 말은 다 헛소문이었군요. 세상에, 키가 무척 커요. 황실과 약혼했을지도 모른다니 장점으로 통하겠지만 황자 전하보다는 키가 작길 바라야겠네요.” 

  “식솔은 데려오지 않은 모양이죠?“

  “저기 앉아 있는 하인을 제외하면 전부 수도에 묵고 있는 호텔에 있다고 들었어요. 어쩜, 전부터 돌던 소문은 진짜일지도 몰라요.”

  “정말인가요? 그—”

  아가씨를 보며 수군대던 귀족 무리는 이내 미카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에 뼈대만 자라고 여전히 소년 태를 완전히 벗지 못한 앳된 모습을 하고 있는 ‘그’ 이츠키 아가씨의 하인을 향해. 그는 두 눈의 색이 다르고 무척 아름다운 외양을 가지고 있었기에 호기심에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린 귀족들은 쉬이 눈을 떼지 못했다.

  “한쪽 눈이 금안이고 나머지 눈은 벽안이예요. 이 제국에서 홍채 이색증을 가진 사람이 달리 있었나요?”

  “없었죠. 어쩜⋯⋯.”

  입을 닫고 있는 이츠키 아가씨의 하인이 열렬히 바라보는 쪽에는 방금 전 한 떨기 장미 같다는 평을 받은 이츠키 가의 차녀가 위치해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귀족들은 빌미를 얻어 더욱 수군거렸다. 맞네, 맞네— 하며. 하지만 미카는 말 그대로 거의 아가씨에게 온 정신을 빼앗기기라도 한 듯 시선이 그쪽에 못박혀 있었기에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아가씨가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둘러싼 채 춤을 추기 시작했고, 아가씨는 소후작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행히 외간 남자도, 그 약혼자도 아니었다. 미카는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춤을 추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발을 딛고 나머지 한 발은 뒤로 한 채 가볍게 허리를 돌리고, 상대에게 눈길을 던진 후 드레스를 꽃잎처럼 펼치며 다시 뒤돌아 턴을 한다. 장갑을 낀 손끝 하나하나까지 전부 다 섬세했다. 손가락 관절마저 그녀가 전부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카는 아가씨가 춤을 출 때가 좋았다.

그녀가 가장 자유로워 보였고, 가장 아름다웠으며 가장 그녀다웠다. 아가씨 본인도 완전히 춤에 매료되어 있는 듯한 표정이 좋았다. 어릴 때 이후로 그녀의 세계가 좁아지며 보지 못한 표정을 오직 춤을 출 때만 훔쳐볼 수 있어서, 미카는 오랫동안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언제인지, 아가씨와 함께 춤을 추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꿈에서도 아가씨에게 정말 수도 없이 혼나고 핀잔을 들었지만 그럼에도 미카는 무척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춤을 출 땐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해 주었고, 그녀의 세계의 반쪽이 될 수 있었으니까. 마지막이 될 즈음 스텝의 간격이 완벽히 맞아떨어지고 그녀가 꽃잎처럼 펼쳐졌다가 자신에게 빨려들듯 돌아오는 턴을 돌았을 때— 미카는 숨을 삼켰다. 

  꿈에서 깨고 나서도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날 이후 어느 날 미카는 그녀의 드레스를 들고 어설프게 춤을 따라했다.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자홍색 드레스를 들고, 제 손도 들어가지 못할 만큼 얇은 소매를 손에 걸친 뒤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아가씨가 연습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눈에 담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꿈속의 그녀가 제대로 가르쳐 준 덕분인지 나름대로 비슷하게 따라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아가씨가 없는 방에서 조용히, 몰래 그녀의 잔상과 춤을 췄다. 바스락 하고 드레스가 내는 소리에도 살짝씩 놀라며. 

  그 상황을 머릿속으로 재현하며 남몰래 뺨을 붉히던 중 그의 정신을 흐트러뜨린 건 다름아닌 와인잔이었다. 진한 색의 내용물을 흘리는 동시에 가벼운 소리를 내며 그의 발치까지 데구르르 굴러온 유리잔은 그의 구두코에 닿아 딱 멈추었다. 미카는 놀라서 그 유리잔을 응시했다.

  “이런, 구두가 엉망이 되어 버렸네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일면식 없는 사람들이 네다섯 명쯤 몰려 있었다. 전부 아가씨와 또래인— 미혼의 귀족들로 보였는데, 하나같이 은근한 눈빛으로 미카를 바라보았다. 미카는 어색한 표준어로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하며 유리잔을 들고 일어나 그녀에게 건넸다. 

  맨 앞에서 미카의 행동을 눈여겨 살피던 한 여자 귀족이 그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두 눈의 색이 다른 탓일까? 미카는 살짝 턱을 당기며 그녀에게서 고개를 뒤로 뺐다. 양쪽 눈 색이 다른 건 물론 이쪽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겠지만, 미카는 본인의 눈이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괜스레 위축되었다. 

  그때, 뒤에서 작지만 선명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카는 눈을 크게 뜨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츠키 양이 데리고 온 하인이시군요?”

  은근한 목소리로 누군가 물었다. 하인? 미카는 의아한 기분에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내는 아가씨의 하인 따위가 아닌데, 왜⋯⋯. 미카가 아무 대답을 않자 그들은 그저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가씨는 내를 인형으로 데려온 기지, 하인으로 부리려고 데려온 게 아닌데. 요즘은 거의 시중을 들어 드리고 있기는 하지만. 

  주눅들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린 미카는 유리잔을 다시 내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받을 생각도 없어 보이는 얼굴로 그를 그저 뚫어져라 올려다보았다. 미카는 어정쩡한 자세로 의미를 알 수 있는 시선들 사이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이리로 쏠리고 있었다. 어쩌면 아가씨가 볼지도 몰라, 후작 부부도. 미카는 불안한 생각이 엄습하는 걸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다. 

  “부탁이 있어요. 그대는 귀족의 고용인이니 내 부탁도 들어줄 수 있죠?”

  “저는⋯⋯.”

  “어려운 건 아니에요, 다름이 아니라 제 구두에도 음료가 묻었으니 닦을 만한 걸 가져다줘요.”

  닦을 만한 것? 가엾게도 미카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미카는 조금 더 먼 테이블에 냅킨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허리를 살짝 숙여 그리까지 팔을 뻗어 몇 장을 집은 뒤 맨 앞에 있는 여성에게 건네었다. 

  냅킨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눈치챈 걸까? 여자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이제는 주위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이쪽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닌 척, 관심 없는 척을 하며. 미카는 왜 아가씨가 이곳이 ‘속물’들이 모인 곳이라고 이야기했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손이 고우시군요.”

  난데없이? 그녀의 얼굴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미카가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자마자 뒤에 서 있던 귀족들이 또 은근한 웃음을 던지기 시작했다. 미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수군거림도 깊어져만 갔다. 얼른 냅킨을 건네고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와중, 맨 앞에 서 있던 여성이 입을 열었다.

  “기왕 냅킨을 드셨으니, 직접 닦아 줄래요?”

  한없이 부드러운 어투와 자애로워 보일 지경인 얼굴을 보며 미카는 온몸이 굳는 걸 느꼈다. 그녀는 제 드레스 자락을 들추더니 음료수는커녕 먼지 하나 묻지 않았을 것 같은 구두 신은 발을 내밀었다. 굴욕적인 것보다, 아가씨에게 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신분의 차가 있었고 모두의 시선이 미카를 억누르고 있었기에 미카는 한쪽 무릎을 꿇은 뒤 그녀의 발을 조심스레 손에 쥐었다. 열여섯을 앓던 아가씨의 발에 입을 맞추었던 그날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렇게 말없이 제 구두를 닦는 미카를 내려다보며 여식은 숨을 삼켰다. 흠잡을 데 없는 아름다운 외관의 미인이었다. 마른 체형에, 검은 머리와 각기 다른 색의 눈을 가진 남자. 그가 내민 건 분명 거칠어 보이는 손이었지만 허드렛일을 하는 소년들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얇은 편이었고, 그저 손가락 마디가 굵을 뿐 전체적으로 봤을 때 궂은일을 해 온 손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이츠키 영애가 데리고 다니는 어린 남자 정부라는 소문이 그렇게 자자한데, 호기심이 안 들 리가 없었고. 

  이 제국에서 이츠키 후작 가를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제법 적은 편이었다. 특히나 젊은 여식들 사이에서 ‘이츠키 양’은 황태자비의 자리를 얻을 기회를 다른 이들에게는 주지도 않은 채 빼앗아간 원흉에 불과했다. 또한 사교계에 중심에 있으려 해도 그녀의 이야기만 들려오면 언제나 화제가 그리로 쏠리고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곤 했기에 그녀를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가엾은 일이었다. 

  세간에는 후작 부부가 그녀를 고립시키고 황태자비로 올린 뒤 꼭두각시처럼 부리려는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았고, 대부분의 이들은 그게 암묵적으로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가엾고, 불쌍하지만— 그저 남의 이야기일 뿐. 

  미카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으며 수치심을 꾹 참은 채 묵묵히 구두를 닦았다. 이깟 건 버되면 돼. 괜히 소란 일으켰다가는 아가씨만 곤란해질 끼다. 그런 생각을 반복하자 조금은 태연해질 수 있었다. 어차피 아가씨가 이곳으로 시집을 오게 되면 미카는 아마 평생 발 들일 기회조차 없을 곳이다. 평생 다시 볼 기회조차 없을 사람들이었다. 미카는 꿇은 무릎이 살살 아파오는 걸 느꼈다. 

  “카게히라.”

  익숙한 음성에 눈을 뜨고 고개를 확 올리자 더욱 익숙해서— 심장을 뒤흔드는 얼굴이 보였다. 노여움도, 피곤함도, 두려움도 전부 감추어져 있는 고아한 얼굴이. 두 손을 곱게 모은 채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아가씨의 주위에 사람들이 홍해처럼 갈라져 길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는 무도회장의 사람들 중 거의 절반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가씨가 옆에 서자 주위 사람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 만도 하지. 미카는 반가움을 숨기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발에서 손이 떨어진 지는 오래였다. 아가씨, 하고 미카가 들릴 듯 말 듯 웅얼거렸다. 

  “이츠키 양.”

  귀족 무리가 드레스 자락을 들고 한 발을 뒤로 한 채 공손히 인사했다. 그들에게 눈길을 한 번 던진 뒤 아가씨는 상황을 똑바로 보려는 듯 다시 미카와 내밀어진 발, 옆에 흐른 음료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상황 설명을 종용하는 듯한 눈빛에 가장 앞에 있던 여식이 입을 열었다. 

  “이츠키 양의 하인에게 간단한 부탁을 하나 했답니다. 음료를 제 구두에 흘렸거든요.” 

  아가씨는 대답하지 않은 채 미카에게 손을 뻗었다.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그저 손 하나만 툭 내밀고 있는 그녀에게 어떻게 반응하고 있어야 할지 몰라 버벅거리던 미카는 그 손에 제 손을 얹은 뒤 가녀린 팔에 의지해 꿇은 자세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바짝 서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대의 집에는 하인이 없는 모양이군.”

  하인과 하인이 아닌 이도 구분하지 못하는 걸 보니. 그렇게 말하는 아가씨의 낮은 음성은 소름이 돋을 만큼 좋았다. 미카는 아가씨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저 태연한 얼굴이었다. 일단 그녀가 앞에 서 있는 여식에 비해 키가 머리 하나는 더 컸기에 여식이 아가씨를 올려다봐야 했으므로— 아가씨가 훨씬 더 든든해 보였다. 억수로 멋있어가, 반할 것 같데이⋯⋯. 하고 속으로 웅얼거린 미카는 손을 한 번 세게 쥐었다 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을 때의 감촉이 여전히 선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른 지 얼마나 지났을까. 부디 무례를 용서하세요, 라고 말한 귀족 무리는 아가씨가 미카의 손을 이끌고 외부 정원으로 나갈 때까지 그들을 지켜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회장에 있는 모두가. 미카는 꽉 잡힌 손을 보며 불안한 생각을 했다. 이대로 나가면 분명 끝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 아니 직감이었을까.

  

‧✧̣̥̇

  밤의 기운에 젖은 정원은 여러 꽃들이 피어 무척 아름다웠고, 다듬어 놓은 수풀들이 벽처럼 높고 미로처럼 길이 복잡해 나가는 길을 도무지 찾지 못할 것만 같았다. 달빛이 푸른빛을 띠고 있었기 때문일까, 흰 장미가 마치 푸른색처럼 보였다. 아가씨의 드레스도. 잡힌 손에서 자그마한 힘이 느껴져 미카는 괜스레 긴장했다. 그녀의 무언가를 느낄 때면 이상하게 고양되는 느낌이 들어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아가씨.”

  용기내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도 뒤돌지도 않았다. 굽이치는 분홍색의 곱슬머리가 달빛에 빛나 미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역시 잡을 수 없다. 하얗게 드러난 아가씨의 어깨가 추워 보여 감싸 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반면 무도회장은 지금 무슨 상황일까 하고 불안해지기도 했다. 아가씨, 하고 다시 부르자 그녀는 탁 멈추더니 뒤를 돌아 그에게 성큼 다가왔다. 미카는 숨을 꾹 참았다. 눈높이가 비슷해서, 그녀의 얼굴이 바로 제 코앞에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박동했다.

  아가씨, 사랑에 빠진 눈을 알아요? 

  제비꽃 같은 사랑을, 

  진주 귀걸이 같은 사랑을, 

  작은 새의 심장 같은 사랑을

  당신은 아나요?

  미카는 마른침을 삼켰다. 미카가 사랑해 마지않는 보라색 눈동자가 코앞에서 일렁였다. 그걸 보자 확신이 들었다. 

  저는 아는 것 같아요, 아가씨. 

  머릿속 어딘가에서 쉬어버린 목소리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가씨의 두 손이 미카의 양 팔을 쥐었다. 뭔가 말하려는 듯, 그녀의 입술이 약간 움찔거렸다. 그녀에게서 무도회장의 여러 냄새에 섞여 아찔할 만큼 좋은 냄새가 났기에 미카는 입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랬다가는 경멸당할 게 분명한데. 

  “카게히라.”

  아까의 단단한 목소리와는 다른 나직한 목소리가 부르자 미카는 아가씨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을 맞추고, 가엾고 아름다운 고아가 홀로 사는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제 양 팔을 잡은 아가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는⋯⋯ 결코 하인 따위가 아니야.”

  아가씨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흘러내린 머리카락 새로 가냘픈 어깨가 드러났다. 그게 또 추워 보여 손을 내어 그녀의 팔을 감쌌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는 아닌 척하면서도 상냥하니까, 아까 자신이 남에게 무릎을 꿇고 구두를 닦아 준 일을 자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내는 하인 따위도 아이고 아가씨만의 인형이니까⋯⋯ 하나두 안 속상했습니더."

  “⋯⋯.”

  “그리고 남이 하인이라 캐도 상관없어가, 아가씨가 그리 자책하지 마시래이. 아가씨 곁에만 있을 수 있으면 뭐로 불려도 아무 상관없습니더.”

  아가씨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별안간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약해 보였는데, 뭐가 또 심기에 거슬린 걸까? 미카는 그녀가 평소대로 돌아온 것 같아 안심하면서도 제가 말실수를 했나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아가씨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을 한 채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러면? 미카는 의아한 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아주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너는 내 것이야. 다만 네 출신이 천하다 하여 그걸 조롱거리로 삼았다는 게 고까웠을 뿐이고. ⋯⋯ 널 이곳에 데려온 건 내 탓이니까.” 

  밤의 어두움에 물들어 있던 그녀의 얼굴이 달빛에 드러났다. 아가씨의 눈동자는 옆을 향해 있었다. 미카는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번지는 것을 느꼈다. 당연한 말을 왜 그렇게 간지럽게 하는 걸까? 얼굴이 붉어졌을 게 분명해 고개를 떨굴까 말까 고민하던 미카는 결심한 듯 마음을 굳히고는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전해져 오는 체온이 따뜻했다. 

  왜냐고 물으며 저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마냥 소년 같기만 하던 아이의 두 뺨이 여전히 빨갰다. 어릴 적에도 있던 버릇은 아무리 몸이 크고 뼈대가 굳어지며 단단해져도 사라지질 않아 그대로 남아 있다. 슈는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볼 엄두가 나질 않아 입술을 오물거리기만 하다 작게 얼버무렸다.

  “⋯⋯ 모르겠어.”

  심장이 주제도 모르고 빠르게 뛰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제 몸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아니면 카게히라의 소리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겨우내 용기를 쥐어짜 바라본 그의 두 눈에서 왜인지 위험한 느낌이 들어 슈는 입 안쪽 여린 살을 살짝 물었다. 조금 떨어진 저 넓은 홀 안이 사람들로 가득 차 화려한 데뷔탕트 연회가 열리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을 만큼 이곳은 그저 풀벌레 소리와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로 가득할 뿐, 다른 세계처럼 조용했다. 언제나 저만 떨어져 있던 세상에 카게히라가 성큼 들어온 느낌이었다.

  팔을 잡고 있던 손이 들어져 허공에서 연신 망설이다 아주, 아주 조심스레 제 뺨을 쓸었다. 이 아이는 언제쯤 나를 당장 깨져 버릴 유리 따위처럼 만지지 않게 될까. 제 체온보다 현저히 높은 온도의 손이었다. 남이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감각이 처음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카게히라의 뼈마디 선명한 손이 낯설기 때문이었을까. 슈는 그와의 거리감이 처음으로 무척 간지러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둘 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야 할지 몰랐다. 미카가 왼쪽으로 꺾으면 아가씨도 왼쪽으로 꺾을 것 같았고, 미카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아가씨도 똑같이 할 것만 같았다. 허공에서 엇갈릴 것 같아 불안하던 두 입술은 연신 주저하다 이내 맞물려졌다. 같은 온도의, 같은 망설임을 가진 입맞춤이었다.

아가씨는 맞닿은 입술뿐만 아니라 안쪽 살까지도 무척 부드럽고 따뜻했다. 꼭 감은 눈이 좋고, 망설임을 담아 서투른 움직임도 좋고, 저를 잡은 손 하나까지 전부 다 좋았다. 전의 밤처럼 온도가 높은 입맞춤은 아니었지만 미카도, 아가씨도 서로를 온전히 느끼고 인지하고 있었기에 미카는 이쪽이 훨씬 더 붕붕 뜨는 느낌이었다. 숨이 부족해 작게 떼었다가도 제가 다시 입술을 포개자 그녀는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어디선가 풀벌레가 울었다. 

  작고 뜨거운 숨소리를 뱉으며 아가씨가 먼저 입술을 떼어냈다. 그녀의 가슴이 연신 올라왔다 내려가길 반복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사랑스러워 미카는 제가 그녀를 뒤로 몰아붙이고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녀의 손에 입이 막혔다. 그만, 하고 달아오른 숨을 섞어 뱉어낸 달큰한 목소리조차 좋았다.

아가씨의 무방비한 모습을 이런 식으로 보긴 처음이라, 미카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녀의 모습을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뺨과 입술이 5월 장미처럼 빨갛고, 숨은 끊어질 것처럼 가빠 보인다. 미카는 제 입을 막은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 입을 맞추었다. 새하얀 손등에 한 번, 가냘픈 손목에 한 번을. 아가씨는 나무라지 않은 채, 여전히 열기가 만연한 눈과 붉은 뺨을 한 채 미카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또— 눈을 맞추었다.

chapter VII. Calla

  

  늦여름. 

  꿈 속을 걷고 있었다. 

  아가씨의 열여섯, 그리고 미카의 열다섯. 물에 잠긴 방처럼 빛이 일렁이던 과거 아가씨의 방. 익숙한 안락의자와 젖은 숲의 색을 담은 유리 눈동자. 꽃병에 꽂혀 있던 연한 분홍색의 장미, 그리고 미카엘. 짧아진 소매와 불에 앞코가 그을린 구두. 접시에 묻은 슈의 크림과 붉은색의 니트. 진주 귀걸이와 끈 짧은 드레스, 그리고 거품. 바닥을 구르는 유리잔과 풀벌레 소리. 고아, 그리고 고아. 

  그 안에서 수천 송이의 장미 안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익사했다. 누군가 피아노를 쳤다. 안 돼, 치지 마. 미카가 익사하는 와중에도 웅얼거렸다. 피아노를 치면 아가씨가 책 읽기를 멈춘단 말이야. 가시에 팔이 긁히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검붉은 피가 줄기를 타고 흘렀다. — 이기적이야. 젖은 숲 같은 색을 띤 눈이 어디선가 속삭였다. 어라, 청록색이 둘이다. 아니, 셋인가? 

  잠에서 깨어난 미카는 꿈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난해한 기분으로 한참을 침대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아가씨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는데 내내 아가씨의 꿈을 꾼 느낌이었다. 미카는 하얀 시트를 꾹 쥐었다. 어째 기분이 영 찝찝해. 그렇게 의미를 알 수 없는 꿈의 여운에 한참 붙잡혀 있을 즈음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아저씨였다. 

  “미카, 아가씨 말이다⋯⋯. ”

  “응아아, 맞데이! 내 잊어뿟다.” 

    그 말에 급히 일어나 분주하게 나갈 채비를 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아저씨가 막아섰다. 미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돌연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끙 앓는 소리를 낸다. 

  “오늘은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아가씨가 후작님과 한바탕 한 모양이야.”

  미카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가씨가? 아저씨는 너무 걱정하진 말라며, 그리 큰 일까진 아니었다고 얘기해 주었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간만에 쉬렴, 하고 미카의 등을 툭툭 두드려 준 아저씨는 1층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남겨졌다. 미카는 막연한 기분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날 데뷔탕트 이후로— 미카와 아가씨 사이에 이렇다 할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들 사이에 존재했던 벽 같은 것이 허물어졌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기에 그날의 일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아가씨를 그리기만 할 뿐, 쉽사리 손을 뻗지 못했다. 

  이 저택에서 요새 아가씨의 상태가 날로 나빠지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데뷔탕트 이후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은 근거와 빌미를 얻어 더욱 악랄하고 자세하게 변했고, 후작은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안달이었다. 아가씨는 후작 저 안에서 철저히 짓밟히고 있었다. 조부와의 면담을 금지당했고, 그녀를 옭아매는 교육은 더욱 심해졌다. 사실 미카와의 관계에 무언가 변화가 있을 수 없던 이유도 데뷔탕트 이후 그녀가 너무나 벼랑 끝까지 몰린 상태로 지내왔기 때문도 있었다. 

  ‘한바탕’을 한 것을 아저씨도 알고 있고, 그래서 미카에게 가지 말라고 한 걸 보면⋯⋯ 아마 또 사용인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가씨를 욕보인 모양이었다. 아가씨가 조금이라도 손을 댄 옷들을 불태워 버리는 식으로— 아가씨는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이 저택에서 조금이라도 설 자리를 남겨 두기 위해서인지 최대한 아무 감정도 티내지 않은 채 묵묵히 보고만 있었다. 가엾게도, 그 모든 장면들이 악몽이 되어 아가씨를 괴롭혔음에도.

 

  아저씨가 커다란 자루를 등에 매고 숲과 저택 정원 쪽으로 가는 게 창문으로 보였다. 낡은 나무 창틀에 걸치고 그의 뒷모습이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린 미카는 이내 나갈 채비를 마저 끝마친 뒤 집을 나섰다. 밖은 슬슬 축축한 초록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늦여름이니까. 미카는 밤이 되면 약간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늦은 여름의 숲이 좋았다. 비록 아가씨가 좋아하는 꽃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은 아쉬웠지만. 

  저택에 들어서 아가씨의 방이 있는 층까지 올라가던 도중 아는 하녀를 마주친 미카가 반갑게 인사하자 그녀도 밝아진 얼굴로 화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엣, 누나 얼굴이 퀭한데 무슨 일이라두 있나?”

  “그건 아니고, 얼른 아가씨에게 가 봐.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셔. 실은 어제 새벽부터 동 틀 때까지 계속 후작님이 들볶으셔서 말이지⋯⋯.”

  

  하녀가 덧붙였다. 식사를 가져다 드려도 대답도 없으시고, 아무도 안 들여보내시고 계셔.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하녀의 말이 사실인지, 제가 아가씨의 방에 가까워질수록 제발 아가씨 좀 어떻게 해 보라는 말을 하는 사용인들이 늘어났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미카는 그런 불안을 떠안은 채 아가씨의 방 문고리를 잡았다. 

  안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작게 두 번을 노크했지만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아 미카는 또 한참을 망설여야만 했다. 잠드신 걸까. 아니, 혼자서는 절대 잘 못 주무시는 분인데. 미카는 천천히 문고리를 쥔 뒤 돌려 당겼다. 작은 소리와 함께 열린 문틈 새로 보이는 방은 엉망이었다. 깨진 꽃병과 거기서 흘러나온 물, 마구잡이로 어질러진 여러 옷가지들과 책장에서 떨어져 나온 책. 미카는 방에 들어선 뒤 문을 작게 닫았다. 

  항상 깨끗하고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들의 방 같은 상태를 유지하던 공간이 마구 어질러져 있었다. 아무리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망가지고 깨졌다지만 아가씨의 물건들이었기에, 미카는 그걸 밟지 않으려 까치발을 한 채 걸어 침대로 다가갔다. 무언가 밟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발 아래를 보자 웬 실 뭉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작게 앓는 소리를 낸 미카는 다시 발을 뗐다. 

  “…⋯ 아가씨.”

  혼자 눕기에도, 둘이 눕기에도 넓어 보이는 커다란 침대의 한가운데에 잔뜩 웅크린 무언가가 있었다. 이불을 둘러쓰고 희고 고운 맨발을 내놓은 채 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건 가엾게도 아가씨였다. 미카는 그녀가 무사히 있는 것에 왜인지 모르게 안도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여운 아가씨. 원래도 말랐으면서 더 살이 내려앉아 이제는 걱정이 될 지경에 다달랐다. 이 커다란 방은 바다 같고 커다란 침대는 표류하는 배, 그에 비해 턱없이 가냘픈 아가씨는 바다에서 길을 잃은 여자 같았다. 미카는 그녀의 손을 들고 입술을 댄 채 눈을 꾹 감았다. 

  당신을 구해 줄 순 없지만 망망대해에서 같이 죽어 줄 순 있을 것 같다. 

  하얀 손등에 작게 볼록 튀어나온 뼈도, 희미하게 보이는 실핏줄도, 끊어질 듯 약한 맥박도, 바늘이 익숙하지 않을 때 생긴 흉터도 전부 좋았다. 가지런한 분홍색의 손톱도.

  “아가씨, 식사도 안 챙겨 드시고⋯⋯ 그라믄 몸 상합니더.” 

 

  아가씨는 대답이 없었다. 넋이 나가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기만 했다. 미카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에 있던 트레이를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작은 고기와 생선, 빵, 샐러드. 뭐든 좋으니 조금이라도 드셔 주시면 좋으련만, 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아가씨는 음식에 눈길도 주지 않으셨다. 

  포크도, 나이프도⋯⋯ 너무 많았다. 미카는 그 수많은 식기들 중 어느 것도 쓸 줄 몰랐다. 그저 가장 중간에 있는 걸 들어 어설프게 그녀의 식사에 손을 댔다. 아가씨가 식사하는 것은 드물게 본 적이 있다. 정말 손가락 만한 포크부터 시작해서 손바닥 만한 것도 있었다. 아가씨는 그 모든 식기를 능숙하게 썼다. 미카는 그 장면을 기억하며 생선을 작게 잘랐다.

  괘씸하다고 혼난들 상관없었다. 미카는 조심스레 두 손으로 그녀의 입가까지 포크를 가지고 갔다. 아가씨, 하고 나직하게 부르자 그녀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입을 작게 열어 주었고 미카는 그 안에 음식을 집어넣었다. 작은 입술에서 서툰 움직임의 포크가 들락날락하기를 몇 번, 아가씨는 속이 좋지 않다며 더 이상의 음식을 거부했다. 다행히 작게 자른 생선 몇 점과 빵 몇 조각, 샐러드도 몇 입 드셔 주셨다. 미카는 안도하며 그녀의 입에 들어갔던 포크를 가만히 내려다본 뒤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초점 없이 눈을 뜨고 있던 아가씨가 이내 미카를 보았다.

  내 꼴이 우스우면 비웃어도 좋아. 그녀가 작게 고개를 돌렸다. 미카는 그녀가 침대에 내려놓은 손에 제 손을 겹친 채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이 언제쯤 내게 우스워질 수 있을까요. 미카는 속으로 물었다. 말없이 식기를 치워 트레이를 밀어놓은 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씨, 식사도 하셨으니 산책이라도⋯⋯.”

  미카가 겹친 손을 내려다본 그때였다. 이불 새로 보이는 발목이 미카의 눈에 들어와, 무례한 짓인 걸 알면서도 그녀의 이불 자락을 들어 확 들추었다. 팔락 소리를 내며 가볍게 옆에 안착한 여름 이불 앞에 제비꽃 같은 보라색으로 물든 두 발목이 있었다. 미카는 손으로 발목을 감싸 들었다. 아가씨의 눈이 커졌다. 

  생채기 하나 없던 귀한 몸에 이렇게 큰 멍을 낼 사람이 이 저택에 달리 누가 있을까. 미카는 답을 알면서도 질문한 것이었다. 치가 떨리게 화가 나 미카는 당장이라도 후작의 방에 처들어갈 기세였다. 

  “멈춰, 카게히라. 어리석은 짓이다.”

  아가씨가 옷자락을 잡고 살짝 끌었다. 하지만 어쩌다…⋯ 미카는 한 손에 다 들어가는 얇은 발목을 보며 속으로 연신 한탄했다. 후작이 어쩌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걸까? 아가씨는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후작이 한 짓이 맞구마.”

  “카게히라.”

  “사람을, 그것도 친딸을⋯⋯ 이래 대할 수 있는 깁니꺼?”

  내는 피 섞인 가족이 없어가 그런 건 모른다. 미카는 속으로 말을 꾹 삼켰다. 그래도 안다. 가족이란 건 이런 게 아니라는 걸. 

  “그래도 그렇제, 어째 발목을⋯⋯.”

  “그는 원래 성정이 그런 사람이니 흥분하지 말도록 해. 그리 심히 다친 것도 아니야.”

  거짓말. 멍이 이렇게 크게 들고, 무력하게 침대에 감싸고 앉아 식사를 가지러 나갈 수조차 없었으면서. 아가씨는 미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말을 이었다. 

  “그는 나를 이대로 두면 카게히라, 너와⋯⋯ 도망이라도 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더군.”

  도망? 

  “내가 대답이 없자 그가 한순간 낯이 굳더니 물었어, 감히 진짜 그럴 수 있냐고.”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미카는 대답을 종용하듯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불 자락을 꽉 쥐었다. 보라색 눈동자에 비친 제가 보였다. 

  “⋯⋯.”

  대답은— 보라색 멍이 피어난 그녀의 발목이 대신했다. 도망. 미카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아가씨의 세계는 좁았고, 그럼에도 미카는 완전히 푹 빠져 있었기에 이츠키 저택 외의 곳에서 아가씨를 마주한다는 건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미카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 결혼은 앞당겨졌고 넌 빠른 시일 내에 여기서 쫓겨날 게야. 어쩌면 오늘 이후로 당장 나와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르고.” 

  미카는 말이 없었다. 아가씨도 그 말을 하고 나서는 그저 침묵에 잠겼고, 둘의 세계는 고요에 빠져들었다. 아가씨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는, 살갗에 와닿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아가씨는 결혼해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좋아하시던 인형놀이도 할 수 없고, 바느질도 할 수 없으며 어쩌면 자신과 영영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고 이츠키 가의 꼭두각시로 전락해 정치의 수단으로 이용되며, 원하지 않는 아이를 낳고, 그렇게 불행한 여생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결혼은 언제로 앞당겨지신 깁니꺼?”

  “정확히 한 달 뒤.”

  다리가 다 낫고 나면. 아가씨는 아마도 당분간은 걸을 수 없어 보이는 발목을 손으로 살짝 쓸어 보았다. 

  가끔은 숨이 막혀, 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한 달이라는 기간이 미카의 머릿속에서 계속 소용돌이쳤다. 한 달이면⋯⋯ 될지도 몰라.

  “⋯⋯아가씨.”

  필요 이상으로 주저하는 티가 나는 목소리가 튀어나와 미카는 저도 흠칫 놀랐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는 대답하지 않은 채 미카를 쳐다보았다. 미카는 고개를 들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의 시선이 와닿는 느낌이 들었다.

  “지는 출신도 천하고, 가진 것도 없는 고아라 지금처럼 풍족하고 호화롭게 살게 해 드릴 수는 없지마는⋯⋯.”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서, 거의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미카 자신도 알고 있었다.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하고, 예전의 자신이었더라면 감히 엄두도 못 내고 생각도 못 했을 것이라는 걸. 

  귀족의 삶을 사랑하는 아가씨. 느지막히 일어나 적은 식사를 하고 한가로이 정원을 거닌 뒤 호화롭고 화려한 드레스, 보석들 사이에서 가장 반짝거리는 귀족. 저와는 시작부터 다른 길을 걸어와 앞으로도 그럴 여자. 사는 세상이 다르고, 감히 닿을 수 없는— 

  “만약 허락해 주시기만 하믄⋯⋯ 한 달 안에 반드시 아가씨를 데리러 오겠습니더.”

  당신을. 

  미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공기 중의 미세한 소리까지 전부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가씨와 자신이 앉은 침대가 호수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아. 눈을 감고 속으로 탄식했다. 하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후회할 것만 같아, 미카는 말을 주워담지 않았다.

  바로 수락하거나 거절할 수 없는 이야기인 건 알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고요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미카는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맨발, 보랏빛의 발목, 다리, 가는 허리, 가슴, 목덜미, 턱끝— 얼굴, 눈. 

  미카가 평생을 바쳐 사랑한 눈동자였다. 자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꿈을 꾸다가도 불현듯 생각나 가슴께를 저릿하게 만들던 그 눈. 미카는 부디 자신의 불안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길 바랐다. 아가씨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그저 눈에 조금 더 힘을 준 채 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억겁 같은 시간이 흘렀다. 아가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달이면, 확실히 돌아올 수 있는 건가?”

  명쾌한 수락, 혹은 거절의 말이 아니어서 미카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리고만 있자 아가씨가 다가와 그의 두 팔을 잡고는 작게 흔든 뒤 속삭였다. 대답해, 하고. 이 공기, 대화, 상황— 어느 것 하나 현실처럼 와닿는 것이 없었다. 

 우리가 드디어 함께 미쳐 버린 걸까요, 아가씨. 

  미카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텅 비었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반드시,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아가씨의 눈이 커졌다.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눈으로 무언의 대화를 나누길 몇 분, 아가씨는 이불을 마저 벗어던지고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제법 큰 키의 아가씨가 성치 못한 발목 때문에 휘청이자 미카는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아가씨는 침대 옆 작은 서랍장을 열더니 조그만 주머니를 꺼냈다. 

  “내 소유의 재산은 대부분이 저택 내부 금고나 수도의 은행에 있으니 이거로 배편을 구해서 가거라.”

  그래도 넉넉하니 아무 배나 구해 타지 말고, 라며 주머니를 제 손에 쥐여 주는 하얀 손이 작게 떨렸다. 미카는 그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진짜로 미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니, 미쳐 있다. 그러니 제정신이 들기 전에 당장 저질러야 해. 제 앞에서 보라색 눈동자 속 무언가가 작게 흔들렸다. 미카는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반드시,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데이.”

  “⋯⋯ 믿어.”

  아가씨가 쥐어짜내듯 속삭이며 말했다. 미카는 머뭇거리다 아가씨에게 다가갔다. 밖에서 불어온 바람에 늦여름의 젖은 향이 실려 들어왔다. 이마를 맞대고 콧등을 맞댄 채 눈을 맞추었다. 아가씨의 눈이 저를 힘주어 쳐다보다 이내 눈꺼풀 아래로 감겼다. 미카도 눈을 감았다. 그들의 세계가 침묵에 잠겼다. 

  한시가 급해 서둘러야만 했다. 한 달 안에 배를 타고 삼촌이 계신 섬까지 가 상황을 설명드린 다음 절차를 거치고 아가씨를 다시 데리러 돌아와야 했으니까. 아가씨는 반드시 오늘 해가 지기 전에는 샛길로 저택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저택 정문을 통해 나가면 빙 돌아가야 하니 아가씨의 방 테라스를 통해 나가기로 했다. 미카는 여전히 자신이 해내야 하는 일도, 상황도 비현실적이기만 해 몇 번이고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서두르거나 허둥대지 말고, 낯선 이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말고.”

  아가씨는 아직도 내가 물가에 내다놓은 애 같기만 한가 보다. 그녀는 불안하고 심란하지 않은 걸까? 미카는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없지만 아가씨는— 모든 걸 버리고 떠나야 했다. 모든 것을. 그리고 한 달 동안 기약없는 미카를 무력하게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데. 단 하루라도 늦으면 그녀는 이미 결혼해 수도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가씨가 황궁에 한 발짝이라도 들이면 그땐 끝이었다. 하지만 아가씨는 불안하지 않다고 했다.

  “너는 지난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정오를 넘긴 적이 없었으니까.” 

  시계도 읽지 못하는 주제에, 고작 종소리 하나에만 의지해 십 년이 넘도록 그녀를 기다리게 한 적이 없었다. 맹신은 불안을 부르기 마련인 것을. 미카는 옅게 웃었다. 그럼에도 저버리지 않겠다는 약속. 

  테라스 난간을 넘어 그녀를 등지고 있던 순간 아가씨가 갑자기 불렀다. 

  “카게히라.”

  미카가 뒤돌자 테라스 난간에 기댄 아가씨가 몸을 숙여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 새에 남겨진 여운이 깊었다. 고개를 숙이느라 흘러내린 분홍색의 머리칼 몇 가닥이 미카의 뺨을 간지럽혔다. 미카는 그 입술을 한참 바라보고만 있었다. 뛰어올라 끌어내려 강하게 입맞추고 싶었다. 아가씨는 눈을 내리깔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뛰거라, 카게히라.”

  그 말에 미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모습, 체향, 목소리를 뇌리에 깊게 새겼다. 십 년이 넘는 기억이 부디 한 달 남짓한 시간에 전부 닳지 않길 강하게 바라며. 

  늦은 여름. 탁한 초록색의 잔디밭을 뛰어 숲으로 들어가 오두막을 향해 달리며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잔디밭 중간을 뛸 때까지만 해도 테라스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아가씨가 숲에 들어가기 전에는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미카는 무언가 속에서 튀어나오려 하는 것을 꾹 삼키고 다시 뛰었다. 주머니 속에서 짤랑거리는 아가씨의 금화들이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뛰어, 미카. 하고. 

  

‧✧̣̥̇

  유년기의 슈는 이질감이 느껴질 만큼 예쁜 소녀였다. 커다란 보라색의 눈에 약간은 갸름한 눈매, 작은 얼굴과 매사 발갛게 물들어 있는 뺨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섞이면 까만 풍경 속 새하얀 무언가처럼 불가항력으로 눈에 띄었다. 가여운 사실이었다. 걱정과 심려로 잘 포장한 저주와 비난, 수군거림, 이유 있는 척하며 은근슬쩍 배척하는 태도를 어린 여자아이가 이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저리 가. 넌 올라가서 인형놀이나 더 해.

  순수한 호의는 가식이 되고, 조금의 무지는 비난의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그것을 슈는 어릴 때 배웠다. 사촌들은 절대로 그녀를 놀이에 끼워 주지 않았고, 슈는 언제나 큰 가족 연회에서 홀로 고립된 외톨이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나를 친척이나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랑할 때를 빼놓곤 찾지 않아. 어렸던 슈는 그것 때문에 자신이 불행한 것을 몰랐다. 그래서 그저 조금이라도, 부모의 순수한 걱정이 받고 싶어 연회에서 빠져나와 새로 확장하고 있는 정원을 거닐었다.

  너무 멀리 와 버린 걸까, 나무들은 점점 높아졌고 저택 내부가 맞나 싶을 만큼 숲이 우거졌다. 슬슬 구두를 신은 발도 아팠고, 습기를 먹은 인형은 품에서 축축 늘어졌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는다. 슈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꾹꾹 삼키며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 아가씨?

  그렇게 낯선 숲에서 떨던 슈를 발견한 건 웬 덩치 큰 아저씨였다. 그의 몸이 너무 크고 인상이 무서웠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준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을까. 슈는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숲이 무서웠다. 저택 안의 사람들이 무서웠다. 사촌들의 매정함도, 친척들의 시선도, 부모님의 무심함도. 와중에도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팔에 인형을 끼운 채 조그마한 손으로 눈을 가린 슈의 머리 위에 투박한 손 하나가 올라앉았다. 

  고개를 들어 눈물 젖은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때의 기억은 흐릿해져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의 커다란 손이 따스했고, 제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 주었으며, 제 손을 꼭 잡고 친척들과의 연회가 열린 연회장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것만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슈가 연회장으로 돌아가기 전 망설이며 뒤를 돌아보자 그는 들고 있던 모자를 벗어 공손하게 인사한 뒤 웃었다. 슈는 한참을 그렇게 머뭇거리다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슈는 멍이 든 발목을 공허하게 바라보았다. 그깟 일에 연연하며 울지 않게 된 지 꽤 되었다. 이젠 그때의 감각도, 이유도 전부 잊었다. 아까까지 카게히라가 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여워 보여서 거두었는데 이제는 날 구원하러 든다. 

  풀숲에서 처음 카게히라를 발견한 건 그저 우연이었다. 머리색도 얼핏 보면 청록색이 돌아 풀숲 속에서 잘 보이지 않았고, 체구도 깡말라 몸은 완전히 숨겨져 있었는데도— 그저, 나뭇잎 사이로 선명한 금색의 눈이 우연히 보인 것뿐이었다. 

  마차에 치였다는 아이, 왜 구한 거니? 어머니의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딱히 이유라 할 것은 없었다. 그저 어리고, 연고 하나 없는 고아라 병원에서조차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하자 옅은 동정심을 느꼈을 뿐. 

  그렇게 풀숲을 손으로 걷어내고 눈에 담은 소년은 예상외로 무척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슈는 그 얼굴을 처음 보자마자— 무언갈 떠올렸다. 무엇이었을까. 

  - 태어나서 아가씨만큼 예쁜 사람은 처음 봅니더. 그게, 이상하게 신기해가⋯⋯.

  겁 많은 아이, 작고 딱한 아이. 그를 보고 처음 이상한 감정을 느낀 이유는 이제껏 그만큼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것을 본 게 처음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적당한 때가 되면 보낼 예정이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슈가 카게히라의 후원자가 되어 그를 수도의 학교에 보내 줄 생각을 했다. 사람을 대하는 법을 조금 더 배우고,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버릇을 고치고. 고아의 그림자를 벗겨낸 뒤에는 보내야지.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처음엔 분명 슈가 카게히라를 가여워했는데, 가면 갈수록 카게히라가 슈의 곁에 남아 주는 것만 같았다. 저택의 모든 사람이 슈를 외면할 때 오직 카게히라만이 그녀의 곁을  내내 지켰으니까. 정오를 넘긴 적 없이, 매번 종소리와 함께 찾아왔으니까. 

  이제 돌이킬 수 없으니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털어내면 되었다. 슈는 욱신거리는 다리 위로 이불을 덮었다. 

  떠난다고 생각하며 그날 무엇을 챙기면 될까 곰곰이 짚어 보자 막상 나오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후작의 명의로 산 모든 것들을 놓고 갈 생각이었고, 슈가 챙길 수 있는 건 조부가 준 작은 선물 몇 가지와 옷가지 정도였다. 그저 덧없구나. 슈는 속으로 되뇌었다. 

  저택 사람들은 미카가 무언가에 의해 오두막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몇몇은 걱정스러워 찾아갔다고 하지만, 베넷이 모두 돌려보낸 것 같았고. 매번 정오만 되면 찾아오던 이가 오지 않으니 슈는 일상에 커다란 허전함을 느꼈다. 

  그녀가 식사를 재개하고 다친 발목을 치료하려 하는 조짐을 보이자 후작은 이때다 싶었던 듯 그녀를 찾아와 장황하게 사죄한 뒤 떠들었다. 곧 그녀가 이 제국에서 가장 귀한 여성이 될 것이며, 이츠키 가를 성공길로 이끌 것이라고. 결혼에 대해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슈는 그런 그를 보며 역겨움을 참았다. 

  당신은 한 달 뒤 내가 사라지면 무슨 얼굴을 할까. 저렇게 자신만만한 얼굴이 절망과 충격에 휩싸일 것을 생각하니 이제껏 제게서 찾아볼 수 없던 인내심이 다 생겨나왔다. 

  신문은 이제 대놓고 이츠키 가의 차녀가 머지않아 황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떠들어댔다. 여전히 몇몇 작은 신문사들은 ‘이츠키 가 차녀의 남자 정부’에 대해 간간이 언급했지만, 굵직한 대형 신문사들은 황실 혹은 이츠키 가의 뒷돈이라도 받은 건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싹 다물었다. 

  귀족들의 태도 또한 볼만했다. 매일같이 이츠키 가에 선물들이 쌓였으며 슈와 가벼운 친분을 쌓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들이 한 바구니씩 전달되었다. 물론 후작은 제가 알아서 뚫은 연줄을 타며 그들을 쥐락펴락했지만, 거기까지는 슈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차피 한 달 뒤면 이곳에 없을 테니. 

  ⋯⋯ 글도 쓸 줄 아는 아이이니 도착했다고 서신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을 했다. 카게히라가 겨우 며칠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고, 사용인들은 그가 매일같이 들락날락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애초에 이 저택에 카게히라 미카라는 사람은 없기라도 했었다는 듯이. 

  카게히라가 사라지자 무료한 일상만이 반복되어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다만 가면 갈수록 저택의 사용인들이 하나둘씩 고향으로 돌려보내지기 시작했고, 그녀의 결혼이 임박해 결혼 준비를 시작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슈를 조급하게 했다. 

  황실에서 보내 온 새하얗고 아름다운 결혼식 드레스 도안을 보며 슈는 저도 모르게 손톱 옆을 뜯었다. 약속한 한 달은 아직 되지 않았지만 그에게 소식이 하나도 없자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돌아오겠지만 난 네게 돌아갈 수 없게 되니. 유모가 머리를 빗겨 주는 순간에도 슈는 그의 생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복잡한 표정이세요, 아가씨.”

  “⋯⋯ 아.”

  유모는 작게 후후 웃었다. 이해해요, 결혼이 다가오면 어느 여자든 다 심란한 밤을 보낸답니다. 그녀의 말에 슈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모의 익숙한 손길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쓸고 지나갔다. 

  “제가 먹이고 씻기며 돌보아 온 아가씨가 결혼한다니 저도 감회가 새로운걸요.” 

  주책이죠, 이리 일찍 결혼하시는 게 당연한데요. 아가씨는 어리실 때부터 무척 예쁘셨으니. 그 말에 슈는 살짝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아첨은 관둬, 유모.”

  “진심이랍니다. 제가 이제껏 돌보아 온 아이들 중 가장 예쁘셨죠.”

  슈는 마지못해 옅게 웃었다. 예쁘다는 말 따위— 한평생을 들어 왔고, 그 때문에 불행했던 적도 적지 않았기에 남들에게는 그저 기쁠 예쁘다는 말이 슈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카게히라가 말했을 때도 그랬다. 

 밤이 되자 슬슬 서늘한 기운이 돌아 유모는 창문을 닫은 뒤 그녀의 잠자리 시중을 들었다. 창밖을 잠시 내다보던 유모가 말했다.

  “그나저나 요즘은 안 오네요, 그 아이.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슈가 움찔했다. 유모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한참을 대답하지 않자 유모는 그저 신경쓰지 않는 얼굴로 이만 쉬라고 말한 뒤 문을 닫고 나갔다. 슈는 한참이나 그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버릇이 생겼다. 밤마다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눈을 감았다 뜨면 금방이라도 카게히라가 그리운 표정을 하고 제 얼굴을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발목이 낫기 시작한 이후로는 테라스에 나가서 밖을 내다보기도 했다. 저 숲 한가운데에서 제게 뛰어올 누군가를 기다리며. 

  “생각이 많은 얼굴이군.”

  슈는 제 앞에 있는 약혼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훤칠하게 잘생긴 얼굴이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이 남자는 언제나 그랬다. 경박하나 속물은 아닌 듯한 미소를 입가에 달고 가벼운 말을 던졌다. 어쩌면 그 나름의 발버둥인가 싶은— 그런 태도를 슈는 눈감아 주고 있었다. 그는 아마 피해를 볼 테니까. 약혼자가 도망을 가 파혼되다니, 불명예스러운 소문이 따라다닐 것이다. 슈야 어차피 외딴 섬나라로 떠난다 쳐도 이 사람은 그렇지 않을 테고. 

  그녀가 여전히 대답 없이 눈을 돌려 다른 곳을 응시하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쯤 내 말에 답해 줄 건가? 하고 장난기를 담아 물으며. 슈가 소리 없는 한숨을 작게 뱉고 대꾸했다. 그리 서운하시면 말을 붙이지 않으면 되실 듯합니다. 그러자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하며. 그는 손을 뻗어 슈의 머리칼을 조금 손에 잡고 부드럽게 쓸었다. 분홍색의 머리카락이 매끄럽게 손가락 사이에서 흘렀다. 

  “그대는 아름답고⋯⋯.” 

  그는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 슈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음 말을 종용하는 듯한 얼굴을 하자 그는 또다시 그녀를 마주보며 웃었다. 

  “이제는 드물게 궁금해하는 표정인데.”

  온실 어딘가에서 흰색의 나비가 둘 사이에 날아들었다. 

  “그 다음 말은⋯⋯ 결혼 후에 말해 주지.”

  뭐?

  슈가 살짝 인상을 쓰자 그가 다시 웃었다. 얼굴을 막 쓰지 마, 말한 뒤 두 손가락을 그녀의 미간에 놓고 펴 주며. 그가 웃자 왼쪽 뺨에 보조개 하나가 작게 폭 들어갔다. 슈는 그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약혼은 슈를 옭아매고 불행하게 했다. 그러나 약혼자는 그렇게까지 그녀를 괴롭게 하지 않았다. 드물게 그녀를 가볍게 받아넘길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였고,  슈는 매번 장난스레 구는 그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지만 만약 누군가 그의 성격에 대해 묻는다면 섣불리 경박하다 하고 대답하진 않을 것이었다. 그의 가벼운 성격 뒷면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카게히라에 대한 소문이 사교계에 만연할 때도, 슈가 그를 데리고 데뷔탕트 도중에 빠져나갔을 때도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찾아와서는— 

  - 정원의 흰색 장미는 그대의 취향인가?

  하고 물었었지. 슈는 고개를 돌렸다. 정원의 구석에 보라색의 작은 꽃들이 가지런히 자라고 있었다. 슈는 그 꽃을 한참이나 바라보았고, 그녀의 약혼자는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눈에 담았다. 

  황자가 돌아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슈는 작은 크기의 말린 꽃다발 하나를 손에 들고 눈으로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보라색을 좋아하나 싶을 만큼 군데군데 작은 보라색 꽃들이 가득 들었던 작은 꽃다발. 

  꽃다발은 선물할 이를 생각하며 만들지. 슈는 커다란 장미 꽃다발과 이 꽃다발을 번갈아 보며 다른 생각을 했다. 한 사람은 저를 커다랗고 화려한 분홍 장미로 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저를 작고 약한 들꽃으로 본 듯했다. 슈는 가만히 작은 꽃다발을 입가에 갖다 대었다. 마치 입맞추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벼운 입맞춤을 실어 떠나보낸 남자아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흰 드레스에 연한 보라색의 리본을 허리에 묶어 포인트를 줘야겠어요. 하고 디자이너가 후작 부인에게 말하는 걸 들으며 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아름답단다, 슈. 넌 아마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될 거야.”

  -아가씨는⋯⋯ 제국에서 가장 예쁜 신부가 될 낍니더.

  불현듯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슈는 가벼운 웃음을 뱉었다. 

  “그나저나, 어수선한 분위기인데 결혼식이 제대로 되려나 모르겠네.”

  “아, 요새 세간이 떠들썩하더라고요. 풍랑이 심상치 않다고 하더라죠?”

  “그래. 무역선 하나가 실종되었다던 모양인데.”

  디자이너와 후작부인이 나누는 대화에 슈가 귀를 기울이다 멈칫했다. 풍랑? 

  “어머나, 슈. 왜 그러니? 옷이 불편해?”

  슈는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는 허리를 조이는 리본을 풀어냈다. 야속하기도 하지. 하필 배를 탄 아이를 기다리는데 풍랑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고작 무역선이 섬에 갈 리는 없으니 아마 거기 타진 않았을 것이다. 풍랑이 험하다 한들 이미 도착했을 것이다. 귀환이 조금 늦어질 뿐이겠지. 슈는 끝없이 되뇌었다. 불안의 파도가 일었다. 

  발목이 모두 나아 오래 걷는 연습을 할 때 즈음, 해안 마을에 폭풍우가 심해져 경보가 내려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카게히라는 소식이 없다. 태연한 척을 하기 이토록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해가 떠 있을 땐 그럴 리 없다고 끝없이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면서도, 해가 지면 불안함에 연신 테라스 난간 끝에서 카게히라를 기다렸다. 

  카게히라,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슈는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나직하게 속삭여 뱉어낸 이름이 왜인지 모르게 그리운 느낌을 주었다. 

  몇 번의 밤을 떠나보낸 건지 헤아릴 수도 없던 날. 결혼식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결혼식 드레스는 정해졌고, 수도로 미리 가 있자는 걸 아픈 발목을 핑계로 거부해 저택에서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날. 

  덩치 큰 아저씨 하나가 숲에서 나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창가에 걸터앉아 창문에 기댄 채 밖을 바라보던 슈가 놀라 미간을 찌푸린 채 그쪽을 바라보았다. 확실해, 하고 슈가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베넷이었다. 

  카게히라가 없는 지금— 저택 내에 업무가 없는 문지기인 그가 이곳에 올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슈는 급히 테라스로 나갔다.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저 멀리에 정원사 하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베넷은 자신을 확인한 슈를 발견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모자를 벗어 공손히 인사했다. 

  “아가씨.”

  그가 테라스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는 슈가 굳이 몸을 숙이지 않아도 될 만큼 키가 컸다. 

  “미카 녀석에게서 쪽지 하나가 왔는데 저는 글을 몰라서, 일단 혹시 몰라 아가씨께 드립니다.”

  그리고 제 앞에 내밀어진 건— 쪽지가 아니었다.

  “이건 쪽지가 아닌데.”

  

  그 말에 베넷이 웃었다. 

  “말씀대로 이건 쪽지가 아니라 꽃다발이죠. 쪽지는 꽃줄기에 묶어 두었습니다.”

  저택 내의 시선을 의식한 건가. 슈는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흰 꽃들이 수북했다. 평소 보지 못했던 하얀 꽃잎에, 가운데는 진한 보라색이 번진 모양새의 커다란 꽃이 신기해 슈가 한참을 쳐다보고만 있자 베넷이 멋쩍은 듯 말했다.

  “여름이 지나니 예쁜 꽃이 다 지고 있어서 말입죠. 마침 숲에 이른 가을비가 내려 야서과가 피었길래 가져왔습니다.”

  “⋯⋯ 고맙군.”

  야서과. 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돌아 자신의 방 탁자에 앉았다. 카게히라에게서 온 쪽지.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종이의 작은 매듭을 푸는 손이 살짝 떨렸다. 종이는 작았다. 아마 많은 내용이 들어 있지는 않을 듯했다.

 

  사흘 뒤.

  간략한 한 문장이 적힌 쪽지 위로 희뽀얗고 동그란 꽃잎 하나가 내려앉았다. ⋯⋯ 무사히 귀국했구나. 슈는 떨리는 숨을 남몰래 뱉었다. 카게히라가 늦으면 사흘, 빠르면 이틀 내에는 저를 데리러 올 것이었다. 슈는 쪽지를 조심히 접은 뒤 작은 불꽃을 피워 태웠다. 가는 연기 한 줄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

  수도 근처의 항구는 소란스러웠다. 미카는 근처 상점에서 망토 두 개를 구매한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을이 지는 중이었다. 

  “내일이지? 하여간 수도 귀족들은 유난이라니까.”

  “암만 그래도 몇 년 만에 황실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데, 성대하게 해야지.”

  지나가는 상인들과 평민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 다행이다. 늦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카는 급히 탈것을 구했다. 이미 선객이 있던 고속 마차 하나에 값을 지불하자 마부는 그를 마부석에 태워 주었다. 

  “소란스럽죠, 손님?”

  빠른 속도로 달리는 와중에 마부가 말을 걸었다. 미카가 흠칫 놀라 그를 곁눈질하자 그는 미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내일 여기 황자님하고 어디 후작가 영애가 결혼한다 해서 이렇게 수도가 떠들썩합니다.”

  외국인 분들이 많이 놀라시는데, 구경할 건 많을 겁니다. 미카는 작게 호응하고는 바람이 귀를 때려 망토를 더 깊게 싸매었다. 언제쯤 도착하냐 묻는 질문에 마부가 고민하더니 답했다.

  “손님 목적지까지는 조금 걸리겠네요. 선객도 있으시고, 여기가 수도 항구 쪽이라 고속 마차도 한계가 있어요.” 

  그렇군요 하고 답한 미카는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늦지 않게 잘 도착했으니까⋯⋯. 만나기만 하면 된다. 망토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삼촌이라는 사람은 바퀴 달린 의자를 타고 미카를 마중나왔다. 평화롭고 수도에 비해 집도 적고 한적한 섬의 해안가에 위치한 제법 큰 흰 저택. 

  혈육. 미카는 평생을 그런 것 없이 살아왔기 때문일까, 마중나온 삼촌에게 섣불리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삼촌은 미카를 보자마자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미카가 자신에게 오기까지 바퀴 의자를 움직이지 않은 채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미카의 존재를 알고 고아원으로 찾아가려 했지만, 이미 그 근방은 전쟁의 피해를 입어 허허벌판으로 변해 버린 뒤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찾아 다행이라며, 그는 미카의 손을 잡았다. 아직은 어색했지만, 미카는 그를 마주보며 옅게 웃었다. 

  아가씨의 얘기를 들은 삼촌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괜찮겠냐고 물었다. 미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대답 대신 미소지었다. 이제 보니, 웃을 때의 얼굴이— 약간 닮은 것도 같았다. 

  도착했습니다, 하고 마부가 말하는 소리에 회상에서 깨어난 미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후작가 주위였다. 급히 고맙단 말을 하고는 숲 쪽으로 뛰었다. 

  뛰면서 망토를 벗어 팔에 걸쳤다. 여름의 막바지라 그런지 약간은 서늘한 것도 같았다. 숲에 있던 꽃들도 대부분 져서, 온통 축축한 초록색의 잎사귀들만이 눈앞을 스쳤다.

  차박 차박 하고 젖은 흙이 밟히며 내는 소리가 들렸다. 밤의 숲은 언제나 지나칠 만큼 고요했다. 어릴 땐 무서워하곤 했는데, 이제는 집처럼 느껴지는 숲을— 뒤로하고 뛰었다. 

  얼마나 간 걸까,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오두막은 지나치지 않은 걸 보니 샛길로 샌 모양이었다. 미카는 더 박차를 가해 뛰었다. 이미 자정을 넘겼다고 하니 더 늦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뛰어 잘 정돈된 풀숲에 둘러싸인 테라스 앞에 섰다. 미카는 숨을 크게 쉬었다. 아가씨를 불러야 하는데. 테라스 끝에 발을 딛고 기둥을 잡은 뒤 힘껏 몸을 끌어당기자 몸을 걸칠 수 있었다. 미카는 커다란 숨을 뱉었다. 

  “⋯⋯ 아가씨.”

  한 달. 미카가 삼촌과 함께 섬에서 미카와 아가씨가 살 수 있는 조치를 하고, 가짜 신분을 만들며 보낸 시간이었다. 겨우 그동안 입에 담지 않았을 뿐인 호칭인데 지나치게 그리운 느낌이 들어 미카는 제가 불러 놓고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답이 없는 빈 방. 아가씨가 없었다. 늦어버린 걸까? 미카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박혀 서 있었다. 낯익은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고 비워져 있었다. 분명 내일이 결혼식이랬는데. 이미 황궁으로 떠난 건가? 

  절망스런 기분에 미카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서 있는데, 문고리가 돌아가더니 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달칵, 하는 소리에 미카가 고개를 홱 돌렸다.

  “⋯⋯ 카게히라?”

  미카가 대답하듯 다시 읊조렸다. 아가씨, 하고. 그녀는 문을 닫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슈의 손이 미카의 뺨에 조심스레 닿았다. 미카는 슈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제 심장 소리가 들릴라 숨을 죽였다. 

  “챙길 거 얼른 챙기서야 됩니더, 시간이 얼마 없어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다 미카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재회의 기쁨은 나중에, 일단은 먼저인 일이 있었다. 아가씨는 아, 하고 중얼거리며 손을 떼었다. 

  슈는 걸어가 침대 밑에서 여러 개의 커다란 캐리어들을 끌어당겨 꺼냈다. 미카가 급히 그리로 가 큰 캐리어 몇 개를 꺼내자, 안에서 중간 크기의 가죽 가방 하나가 나왔다. 슈는 그것을 품에 안고 나머지 캐리어를 미카와 함께 안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미카는 슈에게 다가가 망토를 둘러 주었다. 슈는 캐리어를 잠시 내려놓더니 분홍색 머리카락을 꼼꼼히 망토 안에 집어넣었다. 미카의 심장이 연신 쿵쿵거리며 뛰었다. 함께 큰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이었다. 

  “항구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배편은 구했나?”

  “배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고, 빠른 마차를 얻어타면 한 시간두 안 걸릴⋯⋯.”

  갑자기 미카가 말이 없자 슈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왜 저러지? 망토를 두른 채 뒤돌아 미카의 시선의 끝에 닿은 곳에는— 슈의 유모가 있었다. 

  “⋯⋯ 유모?”

 

  들킨 건가? 슈는 미카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유모가 낌새를 알아챈 걸까. 아니면 그저 우연히 발견한 걸까. 어느 쪽이 되었든, 당장 그녀의 입을 막아야 했다. 슈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유모, 이건⋯⋯.”

  “아가씨.”

  유모가 낮게 읊조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옅게 떨리고 있었다. 슈는 그제야 유모가 놀라거나—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놀랍게도, 그녀는 슬퍼하고 있었다. 

  “아가씨가 떠나신다던가, 다른 생각이 있으시단 건 이미 알아챘습니다.”

  슈를 어릴 적부터 돌봐 온 유모였다. 밤만 되면 밤잠을 이루지 못해 누군가를 기다리듯 테라스에서 한참을 기대 있고, 아무런 미련도 없는 얼굴을 하고, 무언가를 떨쳐내려는 듯 애쓰는 슈를— 알아 주지 못할 리 없는. 유모는 슈의 손을 꾹 잡았다. 

  “—멀리 가세요, 아가씨.”

  후작도, 그 누구도 찾지 못할 곳으로. 유모가 놀란 듯한 슈의 손을 잡아 가져다 제 가슴 위에 놓았다. 지금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한 건 무엇일까. 어리고 가여웠던 과거의 슈를 차마 구하지 못하고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죄책감? 어릴 적부터 슈를 키워 와 생긴 모성애? 어느 쪽이든, 슈는 유모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슈의 손을 놓은 유모는 제 앞치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떠나시기 전에 이걸 가져다드리러 왔습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예요.” 

  미카는 그것을 알아보았다.

  젖은 숲이 든 청록색의 눈, 밀색의 곱슬머리, 상냥한 목소리를 가진, 슈가 사랑한 인형— 마드네였다. 그날 타오르던 불길 속에서 재가 되어 버린 줄만 알았던 마드네가 유모의 손에 있었다.

 

  “몰래 빼내 와서 황실로 가실 때 드리려 했지만, 부디 받아 주세요.”  

  마드네를 받아 든 슈의 얼굴이 미카의 방향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본 유모가 슬프게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는 점에서, 슈가 솔직한 마음을 얼굴에 드러낸 걸까— 했다.

  “아가씨, 이제 가야 합니더.”

  슈는 유모의 손을 놓았다. 그녀는 슈가 미카의 쪽으로 가는 걸 막지도 않고 그저 바라보았다. 십여 년 전처럼 제 뒤로 슈를 숨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유모는 한참이나 슈를 눈에 담다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오직 슈의 품에 안긴 마드네만이— 유모가 나간 문 쪽을 바라보았다. 

  먼저 테라스 난간을 넘어 땅에 발을 딛은 뒤 그녀에게 손을 뻗자 난간 위에 앉아 있던 그녀가 미카에게로 살짝 뛰어내렸다. 두 손에 꼭 들어가는 허리를 잡아 땅에 내려 준 미카는 그녀의 손을 잡고 왔던 길을 다시 뛰었다. 슈도 뛰었다. 두 사람의 발이 잔디밭을 바쁘게 가로질렀다. 

  숲길로 가면 너무 늦어. 미카는 정원을 소리 없이 달려 제가 처음 이 저택으로 숨어들어왔던 그 길로 향했다. 한 손에는 슈의 손을, 다른 한 손에는 가죽 가방을 든 채. 

  아가씨, 부디 모든 괴로운 기억들은 저택 안에 두고 왔길. 미카는 속으로 빌었다. 미카는 이미 다 져 버린 장미 정원에 눈길을 주었다. 만약 피어 있었다면 아가씨의 마지막 미련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잔디가 발목을 스쳤다. 슈는 뒤에서 망토 자락을 잡은 채 뛰고 있었다. 미카는 잠시 발을 멈추더니 손을 앞으로 향해 그녀를 제 앞으로 보냈다. 슈의 속도에 맞추고 싶었다. 슈는 멈추지 않고 뛰었다. 새하얀 색의 발이 연신 풀 사이를 밟으며 지나갔다. 미카는 슈의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앞에서 가볍게 흩날리는 분홍색의 머리카락이 마치— 새의 날개 같아서, 슈가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았다. 아이처럼, 그런 게 다 불안했다. 

  숨이 차오르자 미카는 속도를 낮추었다. 울퉁불퉁한 숲의 길은 슈가 뛰기에는 너무 거칠었다. 슈의 품 안에서 마드네가 연신 흔들렸다. 맞잡은 손에 힘을 주자 슈도 그의 손가락 사이를 더 깊게 쥐었다. 

  어디선가 길을 잃은 어느 작은 아이를 본 것만 같았다. 제 보호자가 알려 준 길 말고 혼자 숲을 거닐다 길을 잃은 아이를. 그게 어린 시절의 슈인지, 미카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둘이 사라진 방향에서 미카와 슈는 손을 잡고 뛰어오고 있었다. 

  슈의 눈동자에 어두운 숲들이 간간이 비추어져 지나갔다. 낯선 풍경. 길을 잃은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들어와 본 적 없는— 그 숲.

 

 “미카!”

  숲의 중간쯤 왔을 때, 미카에게는 너무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있는 줄도 몰랐던, 작은 강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강 위 작은 나룻배 안에서 베넷 아저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저씨?”

  “군말 말고 타라! 어서. 그렇게 뛰어서는 동 틀 때까지 못 갈 거다.”

  미카는 급히 아가씨부터 강가에 데려와 배에 태웠다. 옅은 안개가 낀 강의 끝은 너무 멀어 까마득해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강이 있었던가? 미카는 오랜만에 보는 아저씨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인석아, 그럼 내 얼굴도 안 보고 떠날 생각이었더냐?” 

  긴 노를 빠르게 저으며 그가 웃어 보였다. 미카는 가슴이 울리는 듯한 기분에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슈는 마드네를 안은 채 배의 끝에 앉아서 둘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강은 수도의 평민가 근처의 하천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다만 거기부터는 배를 타면 상업 허가증을 떼어야 할지도 몰라, 베넷 아저씨와는 갈라져야 했다. 그래도 슈가 계속 뛰느라 고생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미카는 슈를 보고는 다시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처음 아저씨에게 이 얘기를 했을 때, 미카는 그가 반대할 줄 알았다. 차라리 저와 같이 고향으로 가자고 설득할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미카를 바라보다 이내 부엌으로 가 무언가를 부스럭거리더니 미카에게 다시 와 건넸다. 

  빵과 작은 먹을거리들. 미카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미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카는— 암녹색 눈 안에서 자신을 보았다. 가엾고 불쌍하던 과거의 아이는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미카는 그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숲의 풍경이 점점 사라져 가자 물길의 속도도 느려져 서서히 주위가 보였다. 미카는 슈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는 마드네를 품에 안은 채 그에게 계속 괜찮다는 답을 하며 주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양쪽 강가 앞 집 두 채에 연결된 빨랫줄과, 작은 배, 그리고 화분. 슬슬 평민가에 근접하는 모양이었다. 미카는 배 끝으로 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축제 분위기라 그런지, 사람은 얼마 없었다. 

  “슬슬 내려야겠구나. 가는 길은 정확히 알지?”

  

  그의 얼굴을 보자 목이 메어 미카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베넷 아저씨는 그런 그를 보더니 웃었다. 미카, 내가 너를 데려온 이유를 알더냐? 이제는 제법 눈높이가 가까워진 그를, 미카는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두 색이 다른 눈과 암녹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닿았다. 약간은 비릿한 냇물의 냄새도, 시내의 공기도 전부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쪼그만 게 어찌나 사랑받고 싶다는 눈을 하고 있던지.” 

  베넷 아저씨는 웃었다. 알고 있었다. 그가 약속한 일 년은 이미 지났고, 미카는 이미 베넷 아저씨의 기억 속 그의 친아들보다 훨씬 커 버린 지 오래라는 것을. 그럼에도 베넷 아저씨는 미카를 도로 길바닥이나 고아원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어렸던 미카가 그릇을 깨뜨려도, 옷에 얼룩을 묻혀도, 밥을 얼마 먹지 못해도 아저씨는 언제나 괜찮다고 얘기해 주었다. 차차 배우면 된다고— 시간은 많다고 말버릇처럼 이야기해 주었다. 

  미카는 배에서 내리고 가기 전에 아저씨를 꽉 끌어안았다. 익숙한 향기와 체온, 촉감, 심장 소리. 어린 미카를 달래던 그의 느리고 일정한 심장의 소리를 기억하기 위해, 미카는 눈을 감고 한참을 귀기울였다.

  “⋯⋯ 아저씨.”

  “무탈하거라, 미카.” 

  누구도 버리지 않고, 버림받지 않는 작별의 순간. 

  미카는 아저씨가 자신을 힘주어 끌어안는 걸 느꼈다. 마지막 순간에는 조금 운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떨어졌을 때 미카는 옅은 미소를 입에 담고 있었다. 

  그가 기억할 마지막 순간의 제가 부디 행복해 보이길 바라며, 아들처럼 키운 아이의 미래가 무탈하길 기도할 때 조금은 마음이 가볍길 바라며. 

  아저씨는 슈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지 않았다. 미카의 옆에서 어색하게 그를 바라보고만 있던 그녀의 머리 위에, 아주 가볍게 손을 얹었을 뿐. 미카는 흠칫 놀랐지만 슈의 표정은— 그의 무례함을 질책하지 않았다. 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카는 아저씨와 아가씨가 무언가 같은 걸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그런 생각을 했다.

  배를 댄 곳에서 멈춰 서 미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는 아저씨를 미카는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슈는 그런 미카를 바라보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오히려 미카가 놓고 오는 것이 더 많아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미카도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더 깊게 넣어 잡았다. 

  “두 명입니다.” 

  망토로 얼굴을 가렸는데도 남자는 이름만 확인할 뿐, 딱히 신분 확인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별 탈 없이 배에 오른 미카는 아가씨의 허리를 잡고 그녀도 갑판으로 올렸다. 

  배가 출발하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희미하게 푸른빛으로 밝아지려 하는 하늘을, 미카와 슈는 함께 바라보았다. 마드네의 눈 안에 새로운 풍경이 비추어졌다. 미카는 하늘에서 눈을 떼고, 슈를 응시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슈도 시선을 돌려 미카를 마주보았다. 

  바람에 날린 슈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려, 미카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짭짤한 바다의 향기. 미카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슈는 그런 그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주 웃었다. 

  그녀는 훨씬 자유로워 보였다. 인형들과 티타임을 가질 때, 댄스 홀에서 춤을 출 때, 화장대 앞에서 홀로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미카는 그 모습이 좋아, 그녀의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려 거리를 좁히다 한순간 그녀의 손에 입이 막혔다. 

  “⋯⋯ 불출해.” 

  “에?”

  시도때도 없이 입맞춰도 좋다고 한 적 없어. 바닷바람에 날린 머리칼 사이로— 조금은 붉어진 얼굴의 슈가 보였다. 

  전혀 그럴 생각 없었는데? 아니, 애초에 그런 의도로 얼굴을 들이밀은 게⋯⋯ 미카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제, 제가 어떻게 아가씨한테 그러겠습니꺼. 급히 해명하는 말이 자신이 보기에도 무척 의심스러워 보여, 손에 저절로 땀이 찼다. 

  “나는 이제 네가 모시는 아가씨가 아닌데,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생각이지.” 

  아가씨가 아닌 아가씨? 미카는 약간 벙찐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후작가가 주는 모든 혜택을 버리고 저와 함께 숲을 가로질러 뛰어온 아가씨는 이제 그저 평범하고— 아니, 조금 더 아름다운 보통의 여자일 뿐이었다.

  “내한테 아가씨는 평생 아가씨일 낍니더.” 

  미카가 사람 좋게 웃었다. 슈는 그런 미카를 보더니 입술 끝을 끌어당겨 웃었다. 그녀가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웃는 건 처음 본 것 같아, 미카는 파도 소리에 제 심장 박동 소리가 묻히길 바라며 숨을 죽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느 보라색의 꽃을 담은 눈동자가 제 앞에서 깊게 빛났다. 미카는 그 안에서 그녀의 세계를 보았다. 

  서로에게 서로밖에 남지 않은 한 쌍의 남녀가 춤을 추고 있었다. 

  5월이 수백 번 지나도 멈추지 않을, 

  더는 외롭지 않을 영원한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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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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