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른] 쌍방구원은 정략결혼의 약혼식부터

[케이쿠로] 쌍방구원은 정략결혼의 약혼식부터 - 01

약혼식 이후의 첫만남은 엉망진창 오해덩어리?!

  • 로판au 케이쿠로를 한 번쯤 써보고 싶어서 써봤는데 AU 설정을 너무 끼얹은 건지 원작 향 5% 첨가 같음....

  • 다 쓰고 읽어보니까 케이토가 좀 느끼한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쿠로가 기가 많이 죽어있습니다 그러려니 해주세요(...)

  • 23.01.19 설정 추가로 인한 일부 내용 수정

  • 23.10.11 오탈자 수정

  • 23.11.03 오탈자 수정

  • 포타에 올렸던 내용을 이쪽으로 가져오며 핸드폰에서 읽기 편하게 서식을 수정하고 문장을 조금 추가했습니다.

  • 24.05.26 내용 일부 수정

  • 이 시리즈는 전개에 따라 제목의 커플링 표기가 바뀔 수 있습니다.

  • 쿠로랑 에이치가 여자입니다! 용납 안 되시는 분들은 뒤로 가기~


하스미 공작의 차남 케이토와 키류가의 장녀 쿠로의 약혼식이 열렸다. 하스미 공작의 본가에 있는 수국 정원이 약혼식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결혼식장처럼 화려하게 꾸며졌다. 특히나 수국 정원의 가운데에 있는 연꽃이 가득한 연못 근처는 하얀색을 중심으로 꾸며져 매우 아름다웠다. 

이 낭만적인 수국 정원에서 케이토와 쿠로는 가족과 사용인들의 박수를 받으며 정식으로 약혼자가 되었다. 양가 부모님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주선한 정략결혼을 위한 약혼식이지만 외관 만큼은 누가 봐도 훌륭했다. 그저 너무 서두른 탓에 두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서 서로를 처음 보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로맨틱하기 그지없었다.

하스미 공작 가문은 유메노사키 제국 건국에 크게 기여한 가문 중에 하나이자, 가족 구성원 거의 전원이 황국 기사단에 소속된 무가의 정점으로 칭송받는 기사 가문이다. 특히 가문을 이어받는 자는 대대로 황국 기사단의 단장을 실력으로 받아내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그렇기에 하스미 공작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당연히 무예도 뛰어나고 마법도 잘 쓸 것이라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런 세간의 상식과는 달리 이번 대의 차남은 유달리 평범한 사람이었다. 신체 능력은 평균보다 조금 위, 마법은 조금도 사용할 수 없는, 하스미 가문의 자제치고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키류가는 귀족들 사이에서 이름난 재단사 집안이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단사인 쿠로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었다. 쿠로의 아버지가 어떻게든 집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재단사가 아니었던 그는 아내의 일을 이어받지 못 하고 가게를 경쟁사에 팔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게 생활고에 시달리던 도중, 귀족의 전유물에 가까운 마법을 쿠로가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쿠로의 그 마법이 사실 먼 친척이 귀족이어서 발현되었다고 판명되어 쿠로가 귀족 취급을 받는 탓에 어디에서도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집안에 들어오는 돈이 삼 분의 일로 줄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성사된 정략결혼이었다. 쿠로는 크고 화려한 불의 마법을 쓸 줄 알며 신체 능력은 평균을 훌쩍 뛰어넘은 편이어서 하스미 공작가의 이미지와 꼭 맞았다. 평민 소녀로 자라서 예법 같은 건 모르겠지만 그런 건 가르치면 그만이고, 저 정도의 능력이라면 차남의 평범함을 능히 가릴 수 있을 거라 하스미 공작 부부는 판단했다.

한편, 키류가는 하스미 공작가의 지원으로 생활고를 덜다 못해 풍족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받은 귀족 지위에 껍데기라도 그럴듯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하스미 공작의 지원 덕분이었다. 그런 철저하게 가문만의 이익을 위한, 두 사람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정략결혼이었다. 

약혼식을 한다고 여기저기 끌려다니고 꾸며지느라 쿠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약혼식장에서야 약혼자의 얼굴을 처음 볼 수 있었는데 그 외모를 처음 본 순간 쿠로는 현기증에 순간 휘청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쿠로는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자신의 약혼자라고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쿠로의 약혼자인 케이토는 마치 여름날의 태양 빛 아래 나뭇잎 같은 싱그럽고 선명한 초록빛의 머리카락과 노란빛이 섞여 새싹 같은 눈동자를 가진 슬쩍 봐도 엄청나게 잘생긴 사람이었다. 여기에 눈썹까지 오는 앞머리를 오대오로 탄 가르마에 조금 짧은 뒷머리와 지적인 안경까지 더해진, 정면에서 쳐다보기 부담스러울 정도의 미남은 키까지 크고 훤칠했다.

케이토의 눈에 비치는 쿠로는 화려한 사람이었다. 조금 어둡지만 선명한 붉은색 머리카락에 군데군데 검게 염색한 브릿지는 마치 불꽃 같았고, 진한 초록빛의 눈동자는 순도 높은 에메랄드 같았다. 앞머리를 한쪽만 길게 내리고 나머지는 다 뒤로 넘겨서 묶은 포니테일이 저렇게까지 화려할 일인지 몰라 케이토도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분위기 탓에 조금 긴장한 것인지 쿠로의 미간에는 제법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시원시원한 인상의 미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갖춰진 얼굴에 케이토는 이 정도니 그렇게까지 소문이 크게 돌았겠구나 싶어 숨이 막혔다. 심란해서 사진을 치워두었다가 실물을 갑자기 마주하니 약혼자가 이렇게까지 미인이어도 되나 싶어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아직 봄기운이 오기엔 살짝 이른 시기였기에 제법 추웠음에도 두사람은 한여름의 땡볕에 푹 익은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 탓에 해야만 해서 하는 청혼과 그 승낙이 둘 다 유달리 뻣뻣했다. 두 사람의 약혼을 축하한다며 형식적으로 그냥 쳐주는 박수 소리가 정작 두 사람의 귀에는 어쩐지 잘 들리지 않았다.

방 안에는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방금 약혼식을 올렸으니 뭔가 대화라도 하라고 한 방에 밀려들어 왔지만 둘 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케이토가 쿠로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권해서 둘 다 소파에 앉은 다음, 서로 할 말을 찾지 못해 서로 다른 허공을 보았다. 

어색해서 방 밖으로 나가고 싶은 와중에 쿠로는 발목과 발가락이 너무 아팠다. 가뜩이나 어중간한 남자보다 키가 큰 쿠로는 굽이 높은 구두를 신어볼 일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 신어본 하이힐이 너무나 적응이 안 됐다. 아프다고 무려 공작가의 저택 한가운데에서 구두를 벗을 수도 없어서 쿠로는 발목만 조심스레 매만지기만 했다. 

"... 발목이 아픈 건가?"

"구두가 익숙하지 않아서 발이... 그, 아픕니다."

"편하게 말해라, 일단 명목상 우리는 동등한 관계고."

그렇게 말한 케이토는 벌떡 일어나 방 밖의 사용인에게 다른 구두를 부탁하고는 그대로 문 근처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쿠로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불편했다. 며칠 내내 집에서 온종일 아빠가 케이토 공작 영식을 잘 꼬셔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지만 결과는 이 모양이었다. 

당연했다. 쿠로는 남자들을 힘으로 찍어눌러 동내 골목대장으로서 군림한 적은 있어도 남자들에게 매력 어필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쿠로에게 남자는 힘으로 휘어잡고 명령을 내리는 존재이지 애교 부리며 부탁하고 조르며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쿠로가 귀족 남성을 처음 대하는 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종종 이츠키 후작의 삼남, 슈와 만나서 대화도 하고 같이 놀기도 했었다. 특이하게도 재단사 일에 관심이 많았던 슈는 종종 쿠로의 집에 와서 자수 같은 것을 배워가기도 했다. 

조금 울보 기질이 있었던 슈에게 장난치고 놀기도 했지만 그건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시간이 있기에 용서되는 일이었다. 슈를 대하는 것처럼 공작 영식에게 장난을 걸거나 평소 마을 남자에게 하던 것처럼 공작 영식을 두들겨 팼다가는 일이 좀 커지는 게 아니었기에 이도 저도 못 하고 답지 않게 바닥만 보고 있었다.

한편 이 상황이 불편한 건 케이토도 매한가지였다. 케이토의 형은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평균 이상의 신체 능력을 타고났고, 풍부한 마력으로 넓은 범위 마법을 사용하는 게 가능해서 선대들처럼 가문이 아닌 능력으로 차기 기사단장으로 인정받은 탄탄한 출세 가도를 걷고 있었다. 

가문의 이미지상 그런 형의 공적을 가리지 않는 선에서 강한 전투 실력을 자랑해야 하는데 케이토는 하필이면 책략가 타입이었던 탓에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그런 케이토가 완전히 집에서 내쳐지지 않은 것은 무려 황태자가 케이토를 곁에 두고 총애하기 때문이었다.

현 황제의 유일한 딸인 황태자 에이치 텐쇼인은 약한 몸을 타고 나서 병치레가 잦았다. 그런 에이치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고 가끔은 놀림거리가 되어가며 얻어낸 총애가 케이토의 유일한 무기였다. 케이토에게는 에이치의 부마가 되어 황궁에 들어가 버리는 게 허구한 날 무시당하고 사는 지금의 상황을 뒤집어버릴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에이치가 난데없이 웬 광대 와타루 히비키를 부마로 지정하는 바람에 미래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져 버렸다. 그 때문에 갑자기 성사되어버린 이 약혼이 케이토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뒤가 구린 이유도 있었던 탓에 더 그랬다.

그렇게 서로 어색하게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메이드들이 편한 구두 몇 개를 가지고 왔다. 구두들이 도착하자마자 케이토는 쿠로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쿠로의 발을 잡아 자신의 허벅지에 올리고 구두를 벗겨주었다. 케이토에게는 귀족 영식으로서 당연히 몸에 밴 예절이었지만 쿠로에게는 들은 적도 본적도 없는 행동이었다.

결국 쿠로는 케이토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워서 그만 케이토의 양어깨를 잡고 발을 옆으로 뺐다. 황당하다는 듯이 케이토가 쿠로를 올려다보았다. 쿠로도 쿠로 나름대로 약혼남이라고는 하지만 오늘 처음 본 잘생긴 남자가 구두를 벗겨주려는 이 상황 자체 전부가 황당했다.

"구두 정도는 혼자서 갈아 신을 수 있어."

"그렇다고 발을 치우면 어쩌라는 거냐."

"알아서 신을게 알아서."

그렇게 말하며 쿠로는 손을 팔랑거리며 케이토를 물리고 메이드들이 가져온 구두 중 하나를 낚아채 든 다음 반대 손으로 구두를 벗었다. 발톱 근처에서 피만 안 났으면 새 구두를 바닥에 두고 '알아서' 신었을 것이다. 하지만 새끼발가락 쪽이 새빨간 것을 보고 메이드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다른 메이드가 급히 소리를 지른 메이드를 데리고 약을 가져오겠다며 방 바깥으로 나갔다. 

혹시나 해서 반대쪽도 벗었더니, 그쪽의 발도 피가 나고 있어서 쿠로는 한숨만 나왔다. 곧 집사 한 명이 구급상자를 들고 들어와 치료해 주고 쿠로는 편한 구두를 신고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게 더 지옥 같은 예절교육의 시작이었다.

케이토와 약혼을 맺기 일주일 전, 쿠로의 가족들은 하스미 공작에게 작은 저택을 받아 이사를 했다. 그리고 사용인 몇 명을 받았는데, 그 대부분이 쿠로의 예절교육 담당이었다. 이들은 때를 가리지 않고 행동 하나하나 지적하며 쿠로에게 공작가의 며느리 같은 언동을 강요했다. 

약혼식 이후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때 다리를 옆으로 뺀 대다가 손을 팔랑거린 게 케이토의 심기를 크게 거슬러서 화가 많이 났을 것이라 했다. 케이토가 나름 놀래켜서 미안하다며 사과 선물을 보내주었지만, 그 내용물이 제법 괴랄 했던 탓에 사용인들은 역시 화가 난 게 분명하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결국 약혼식 이후에 잔소리 양이 더 늘어나 버렸다. 하지만 공작가에서 예절교육을 열심히 시키면 시켰지 그만하라고 하지는 않을게 뻔했기에, 쿠로는 어디다가 따지지도 못하고 자기 손으로 부른 업보에 한숨을 쉬며 말을 들을 때도 있었고 땡땡이를 칠 때도 있었다.

며칠 뒤, 케이토에게서 초대장이 도착했다. 내일 하스미 공작가의 저택에서 티타임을 갖자는 이야기였다. 예절교육 담당 사용인들은 이 티타임이 케이토 공작 영식을 돌아보게 할 찬스라며 그들만 들떠서 준비를 시작했다. 자기들끼리만 신난 사용인들이 차랑 간식들을 먹는 예법이라며 네 시간째 잔소리를 해대니까 결국 쿠로는 화장실을 간답시고 도망쳐서 저택 구석의 나무 위에 올라가 가지에 걸터앉았다. 

이런 짓을 하면 아버지께 엄청 혼난다는 걸 알면서도 답답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일전의 그 일로 꽤 심기를 거슬렀으니 어떻게든 만회해야 하는 건 알지만 아무래도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쿠로는 동생을 인질로 잡은 인질범을 응징하기 위해 숨기고 있던 불의 마법을 모두의 앞에서 사용해 버렸다. 귀족의 사생아 취급을 받을 거라 예상해서 숨기고 있었지만 동생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 그렇게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을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쿠로는 무려 황궁의 기밀문서를 들고 도망가던 스파이를 때려잡은 영웅이 되었다.

심지어 쿠로의 먼 친척이 사실은 자작이라는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다는 사실이 황궁의 재판장에서 발표되었다. 그렇게 스파이를 때려잡은 공으로 자작위를 받아버린 쿠로는 황궁 외의 일터에 취직해서 일을 할 수 없는 완전한 귀족이 되었다. 

그래서 만약 약혼이 없던 일이 되면 생활고에 시달리는 그 시절로 돌아가는 데다가 아버지는 돈 관련으로는 믿을 구석이 없고, 쿠로는 귀족 지위 탓에 취직 따위 불가능하고, 여동생은 일하기엔 지나치게 어린 상황이라 물러설 곳 따위 없었다. 쿠로 눈에 케이토는 귀족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다는 공작가의 자재였고, 정면에서 쳐다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생긴 사람이었다. 

어쩌다 이 약혼이 성사된 건지 영문을 모를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라서 가볍게 약혼을 취소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이 자꾸 들어 쿠로는 너무 두려웠다. 아버지가 들들 볶아대는 것도 있었지만, 현재 상황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여동생 앞에서는 억지로라도 행복한 척하고 싶었다.

그러고 있으니 차라리 슈 후작 영식이었으면 상황이 좀 나았을까? 그런 생각이 쿠로의 머리를 스쳤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있었던 '그' 사건만 아니었어도 아직 슈랑 친하게 지냈을 것이다. 나름 쿠로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귀족의 격식 같은 게 몸에 맞기는커녕 모든 게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슈는 어느 정도 융통성 있게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의문의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굳이 뭘 해야 한다면 만난 지 얼마 안 된 케이토보다는 슈가 마음이 편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아까 그 사용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다. 어떻게 드레스를 입고 나무를 또 탈 생각을 한 거냐, 부터 시작해서 자꾸 이렇게 도망 다니니 다음에는 화장실 안까지 따라와 감시하겠다는 경고까지 시끄러웠다. 잠깐의 땡땡이도 끝이었다. 

티타임 약속의 날. 쿠로는 오늘 도착한 드레스와 구두에 장신구들로 치장한 체 케이토가 보낸 마차를 타고 하스미 공작가로 향했다. 멀미로 머리가 어질어질한 와중에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살짝 어두운 붉은빛인 쿠로의 머리색과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새파란 드레스에 어디서 구한 건지 감도 안 오는 주황색 구두에 밋밋한 은 머리 장식까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이게 보내온 옷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것을 골라서 입은 것이었다. 공작 영식이 보낸 옷이니 반드시 이 중에 골라야 하고 수선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 사용인들이 서라운드로 잔소리를 해대서 나름 열심히 고른 게 이 모양 이었다. 어지간히 미움받고 있구나 싶어서 쿠로는 멀미 때문에 올라오는 토기를 억누르는 게 힘들었다.

한편 케이토는 케이토대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약혼식 직후 방에서 뭘 어떻게 했길래 키류 자작을 화나게 한 거냐고 어머니께 한바탕 설교를 들었다. 두 사람의 약혼은 사실 황태자의 비밀 지시가 있어서 더 급하게 밀어붙여진 건데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듯 보여 하스미 공작가 전체가 제법 예민해져 있었다.

쿠로가 케이토의 에스코트를 거절한 이유를 아무도 정확히 몰랐다. 그래서 다들 그저 쿠로가 케이토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혹시라도 이 약혼을 없던 일로 할까 봐 케이토를 압박했다. 그래서 케이토는 일단 쿠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닌, 쿠로가 갖고 싶어 할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마구잡이로 선물로 보냈다.

사실 쿠로의 아버지가 케이토와 딸의 혼약을 받아들인 것은 단순히 케이토 공작가가 기사 가문 중에 가장 유명하고 돈이 많은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쿠로 앞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혼담이 와 있었다. 당연했다. 쿠로의 마법은 귀족들 사이에서 유달리 자랑거리가 되는 두 마법 중 하나인 불의 마법이었다. 

겨울이 편해지는 건 예삿일에 전쟁 시에는 어마어마한 활약이 가능하고 다재다능하기로 유명한 불의 마법은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거기에 모종의 이유로 황태자가 나서서 쿠로에게 귀족의 직위를 내리자, 거리낄 것이 없어진 다른 귀족들이 서로 자신의 가문에 불의 마법을 유전 받기 위해서 쿠로는 엄청난 인기인이 되어 있었다.

눈에 띌 정도로 강한 신체 능력도, 화려한 마법도 쓰지 못하는 케이토는 항상 보좌역이었다. 하스미 공작가의 수치까지는 아니었지만 눈에 안 띌 정도라면 아예 숨겨버리려 드는 부모님 앞에서 케이토가 할 수 있는 일은 에이치 황자 저하의 일을 완벽하게 보좌하는 모습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그게 지금은 에이치 황자 저하가 아닌 키류 자작으로 바뀌었지만,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방으로 돌아온 케이토는 책상에 앉아 미간을 짚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에스코트를 거절하던 쿠로의 얼굴이 케이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전해 듣기로는 표정이나 분위기는 좀 딱딱해도 상냥하고 자기 사람을 잘 챙기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본 모습은 그냥 불만은 많지만 말은 안 하는 사람이자, 자신을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다. 케이토는 쿠로가 자신과의 약혼을 깨지 않게 잘 리드해야 했지만 영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래서 케이토는 며칠 내내 사과 선물이라며 쿠로에게 옷가지와 장신구를 줄줄이 보냈다. 직접 갔다가 쿠로가 더 크게 거절했다가는 집안에서 무슨 소리를 더 들을지 몰랐고, 뭐가 되었든 선물 받는 건 누구나 다 좋아하니까 키류 자작도 좋아하지 않을까? 그런 적당한 기분으로 한 짓이었다.

하지만 케이토가 간과한 게 있었다. 첫째로 쿠로는 드레스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재봉 솜씨가 좋았고, 둘째로 케이토가 주문을 넣은 양복점은 드레스를 사는 영애가 거의 없을 정도로 남성용 옷 위주로 돌아가는 양복점이라는 점이었다. 셋째로 장신구류는 취향을 엄청나게 타기 때문에 갖고 싶어 하는 게 아닌 이상은 선물용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도 저도 아닌 며칠을 보내고 있던 도중, 메이드가 들어와 황태자 저하가 급히 부른다는 연락을 전했다. 그 소식에 깜짝 놀란 케이토가 급하게 말을 타고 가보니 에이치 황태자 저하가 드물게도 내빈실에서 케이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태자 저하가 건강히 내빈실까지 올 기력이 있다는 것은 좋았지만, 그렇게 급하게 부른 이유가 그저 약혼을 축하하는 티타임을 가지고 싶다는 영문 모를 이유였기에 케이토의 속이 쓰려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단 격식을 갖춰 인사하고는 모든 사용인을 물렸다.

"하아... 구제 불능이군, 에이치. 급한 일이라기에 서둘렀더니 이게 뭐 하자는 거냐."

"후후. 친우의 약혼을 축하하는 게 급한 일이 아니면 뭐가 급한 일인 걸까? 나름 케이토가 느긋하게 약혼자와 시간을 보낸 다음에 보고하러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영원히 와주지 않을 것 같아서 살짝 장난을 쳐 보았어. 서류상이 아닌 실제로 만난 그녀는 어때? 평균을 뛰어넘은 신체 능력, 평민임에도 발휘되는 마법. 케이토가 갖고 싶었던 것들의 결정체인 그녀이니, 실제로 보았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무언가의 감정이 싹텄겠지. 진부한 이야기일지라도 굳이 케이토의 입으로 듣고 싶네, 그녀와 약혼하게 된 기분은 어때?"

"내 기분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에 말해둔 그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될 예정이니 걱정하지 마라. 원래 이런걸 조율하는 게 내 일이지 않나."

"내가 원한 대답은 아니네. 지금은 계획을 걱정하기 보다는 일단 약혼식까지 한 사이이니, 대외적으로 내세울 이야기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첫 만남이라던가, 약혼을 하게 된 계기 같은 그런 시답잖은 가십거리 말이야. 정략결혼뿐인 고위 귀족의 사랑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귀족은 없겠지만 준비해 두지 않으면 사교장에서 겉돌게 될 거야. 케이토가 원체 공작 부부에게 휘둘리는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대충 그쪽으로 유추하겠지만, 우선 대비는 해야 하지 않겠어? 실제 이유는 말을 할 수 없으니까. 게다가 살아남을 길이 인맥뿐인 케이토에게 사교장에서 내쳐지는 건 타격이 클 텐데?"

"... 분하지만 일리 있군. 일주일 안으로 준비해오마. 그 영애가 이런 종류의 사정을 이해해 줄 것 같지는 않지만, 설득하는 게 내 일이니 어떻게든 그럴듯한 이야길 준비해 오겠다."

"후후. 오래 알고 지내온 친우의 사랑 이야기라니, 기대되는걸. 될 수 있는 한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케이토. 나는 꽤 참을성이 없는 편이라는 걸 알고 있을 거라 믿어. 갖고 싶은 물건은 무조건 내 손안에 들어와야 하고, 듣고 싶은 이야기는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야 해. 물론 나 말고도 너희의 이야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많을 거야. 부디 나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멋진 이야기를 기대할게. 아, 다음 만남은 제대로 초대장을 보내서 정식으로 황궁에 부를 테니 오늘의 장난은 용서해 주길 바라, 케이토."

그렇게 황궁을 나와 저택으로 돌아간 케이토는 바로 쿠로를 티타임 핑계로 초대했다. 뭔가 만나서 대화라도 해야지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질 테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여기에는 일주일 안이라고 대답했더니 무려 닷새 뒤에 큰 사교회를 연다는 황태자의 초대장을 보고 속이 쓰려 온 것도 한몫했다. 

그리고 그 티타임 당일, 케이토는 시작부터 표정 관리가 안 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약혼식 날도 마차를 타고 와서 속이 안 좋다고 식이 십 분 정도 미뤄졌었다. 그렇다고 마차 안에서 토한 건 아니었으니 조금 표정이 안 좋은 정도는 가볍게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저 복장은 도대체 뭘까?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복장을 보니 약혼을 깨 먹고 싶어서 작정한 것 같았다.

"오늘 초대에 응해주어 기쁘다, 키류 자작. 그리고... 꽤 개성적인 복장이군."

"보내준 옷과 장신구로 우윽, 후우, 꾸민 거다. 마음에 드나?"

"보내준 옷...? 내가?"

"그럼 달리 누가 있, 겠냐?"

기분이 안 좋은 건지 멀미 기운을 억누르는 건지 원래 표정이 저런 건지 한껏 힘이 들어간 얼굴이 마치 '그렇게 티 낼 정도로 별로이면 왜 보낸 거냐?'라고 항의하는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변명을 하기 뭐 했던 케이토는 대충 얼버무린 다음 모른 체하며 팔짱을 끼게끔 슬쩍 팔을 내주고 천천히 차를 마실 저택 뒤쪽의 정원으로 향했다. 

약혼을 할 때 온 곳이지만 제대로 둘러보는 건 처음인 색색의 수국이 만발한 잘 손질된 정원과 꽤 넓은 연못의 연꽃들을 보고 있으니 쿠로의 멀미 기운은 많이 가라앉았다. 화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지만. 아무튼 하얀 야외 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향이 좋은 홍차와 같이 먹을 치즈케이크를 받고 사용인들을 물렸다.

"반응을 보니 이 드레스를 보고 고른 건 아닌 것 같고, 이거 재고 처리한 거야? 아니 약혼한 게 그렇게 싫으면 말로 해, 말로. 아니면 옷이 아니라 자객을 보내던가. 거의 이주일이 다되도록 사용인들 시켜서 예절교육인지 뭔지 아침부터 밤까지 들들 볶아놓고 뭐 하자는 거야?"

"오해다, 키류 자작. 일단 치수 맞춰 보낸 맞춤 드레스이긴 하다. 다음부터는 다른 양복점에 주문을 넣으마. 그리고 예절교육은 내가 시킨 건 아니지만, 정 못 버티겠다면 내가 주의를 주겠다. 너무 화내지 마라."

"... 왜 사과하는 건데?"

"이번 건은 내가 잘못한 게 맞으니 사과하는 게 맞다. 본의 아니게 힘들게 한 것 같군. 영 이상한 물건이라도 내가 보낸 건 맞으니 사용인들이 쓰라고 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 다음부터는 신경 써서 보내마. 마음에 안 드는 물건은 버려도 좋다."

케이토의 대답을 들은 쿠로는 조금 당황하는가 싶더니 욱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열받아서 그대로 따지고 나니 뒤늦게 약혼이 걱정된 모양이었다. 사실 약혼이 깨질까 봐 걱정해야 하는 건 케이토 쪽인데 쿠로가 쩔쩔매고 있으니 케이토는 꽤 당황스러웠다. 

거기다가 원래 성격 자체는 꽤 다혈질인 게 눈에 보이는데 자신에게 선택권이 많다는 걸 모르는 건지, 이런 걸 케이토가 좋아할 것이라 생각한 건지 연기인지 아닌지 모르게 엄청 기가 죽어서 뻣뻣하게 얼어붙어 있는 게 케이토의 눈에 엄청나게 거슬렸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므로 그냥 이야기를 돌려버리기로 했다.

"키류 자작, 이번에 드레스 관련으로 무례를 범했으니 만회할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좋아하는 색 같은 걸 알려준다면 다음엔 잘 참고해서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주문해 주마."

"... 우리 집은 대대로 양복점을 해서, 나도 드레스 정도는 원단만 있으면 원하는 대로 만들어 입을 수 있어. 그, 미안하지만 안 보내도 된다."

"호오, 그러고 보니 재단사 일을 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거 같군. 그럼, 말을 바꾸지, 새 원단을 사러 가지 않겠나, 쿠로?"

"그래도 돼? 좋아. 좋긴 한데, 그걸 지금 가자는 이야기일까?"

"내일 가자는 이야기다만."

"그럼 기쁘게? 받을게. 받겠습니다?"

"편하게 말해도 된다, 키류 자작."

갑자기 확 밝아진 표정을 보니 쿠로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생활고로 취미활동 하나 제대로 못 했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이런 것도 하고 싶고 저런 것도 하고 싶었다고 쿠로가 신나서 조잘거리는 게 아까 얼어있던 것보다 훨씬 나았다. 

원래는 저렇게 말이 많은 영애였구나, 싶어진 케이토는 지금의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 그저 열심히 쿠로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아까의 이상한 분위기는 어디로 간 건지 어느새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저 원단을 사러 가기로 한 약속이 액세서리도 사고 간식거리도 사고 밥도 먹는 꽤 큰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럼 저녁을 먹을 식당을 예약해두마. 시푸드와 스테이크 중 어느 쪽을 좋아하지?"

"예약? 을 할 정도로 비싼 곳에서 먹는 거야?"

"식당은 원래 다 예약을 하고 가는 곳이지 않나? 그리고 경비 같은 것은 걱정하지 마라 키류 자작에게 쓰는 돈은 아깝지 않다."

"어, 음 일단 뭐 살지 목록을 적어둘게.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래, 잊어먹고 못 사는 물건이 없으면 안 되지. 참고로 시푸드와 스테이크 중 어느 쪽이 취향이지?"

"둘 중에서는 스테이크가 좋아."

"그렇군. 반드시 키류 자작의 입에 맞는 식당으로 예약을 해 두겠다."

"그, 키류 자작이라고 부르는 거 그만해주면 좋겠는데."

"응?"

케이토가 당황하는 모습을 본 쿠로는 괜히 말을 한 건가 싶어졌다. 하지만 자작이라는 지위는 처음 받을 때부터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쿠로는 자작 지위를 받는 그 순간의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쿠로에게 자작위를 내리는 그 순간 주변 사람들이 쿠로를 맛있는 먹잇감처럼 바라보며 소름 끼치게 웃고 있던 그 순간을. 

심지어 이 이후로는 사람들이 아부하듯이 키류 자작, 키류 자작하고 말을 걸었기에 될 수 있으면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름 큰맘 먹고 내질렀지만, 케이토의 당황한 듯한 반응에 쿠로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쿠로가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케이토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따져 묻기는커녕, 일어나서 우아하게 다가와 쿠로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이 아직이었군. 어째 내 이름을 한 번도 안 불러준다 싶었더니 이런 큰 실례를 범했을 줄이야. 나는 하스미 공작의 차남, 케이토 하스미라고 한다. 부디 '케이토'라고 불러주길 바란다."

"엇, 어, 쿠로 키류라고 한다. '쿠로'라고 불러줘."

"그래, 쿠로.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오늘의 티타임 시간이 다 된 듯하다. 마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마. 자, 이쪽으로."

"벌써?! 아직 치즈케이크 손도 못 댔는데."

"먹고 싶다면 포장해 두었으니 저택으로 돌아가서 먹도록 해라. 멀미 기운이 있으니 못 먹을 거라 생각해 미리 마차에 실어두라 했다."

"오우, 고마워."

"마차를 타는 게 많이 힘든가?"

"몇 번 안 타봐서 모르겠는데 좀 많이 흔들리고 답답하고 조금 토기도 올라오고 그래."

"말을 탈 때도?"

"말은 안 타봐서 모르겠어."

"그렇군. 멀미 기운 때문에 이동이 힘들어 보여 마음이 아프군. 멀미 기운을 누를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바로 알리마."

"고마워."

말도 많고 대화하는 것도 좋아하는 쿠로는 가는 길이 어색하지 않도록 계속 말을 걸어주는 케이토가 고마웠다. 갑자기 성사된 약혼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느낄 정도로. 사실은 생활고 탓에 지나치게 서두르느라 약혼식 날까지 얼굴도 못 보고 약혼한 데다가 저택에 사용인까지 받으니, 돈 받고 팔려 가는 게 맞긴 하지만 정말로 팔려 간다는 느낌이 들어서 쿠로는 얼굴도 모르는 케이토가 정말 싫었었다. 

게다가 처음 이 드레스를 받았을 때에는 이쪽에서 거절 의사를 넣어달라고 시위하는 것 같았기에 없던 자존심까지 상했는데, 이렇게 사과하고 신경 써주고 챙겨주는 걸 보니 조금은 마음이 풀렸다. 햇빛 아래 반짝이는 얼굴과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 덕에 자연스레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대화하며 조금 걸으니 타고 온 마차가 보였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오늘은 여러모로 실례가 많았다. 내가 저지른 무례를 관대하게 넘어가 준 쿠로의 마음씨에 감사를 올리지. 내일 점심 식사가 끝났을 무렵, 자택으로 데리러 가겠다. 쿠로, 내일 다시 만나는 것을 기대하고 있으마."

"오우, 내일 또 만나자."

쿠로의 말이 끝나자마자 케이토가 쿠로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그 탓에 쿠로가 깜짝 놀랐지만, 케이토는 그저 살짝 웃어줄 뿐이었다. 그렇게 배웅을 한 다음, 쿠로가 지옥 같은 멀미를 또 견디는 동안 케이토는 바쁘게 움직였다. 케이토가 오늘 본 쿠로는 요령 같은 게 부족해서 뭘 해도 삐걱거리는 사람이라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진작 만나서 이렇게 대화 한 번 만 했어도 헛도는 일이 없었을 거라 생각하니 괜히 케이토의 걸음이 빨라졌다. 쿠로에게 전속 메이드 하나를 보내주고 식당에 예약전화를 넣고 내일 쿠로가 갖고 싶다고 산 물건들을 저택까지 옮길 수레도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케이토는 상점가의 가게 배치도를 펴 들고 쿠로랑 어디를 가면 좋을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며칠 내내 이래저래 받은 스트레스는 이미 다 날아가고 없었다. 케이토는 의무감이 아닌 해주고 싶어서 이것저것 생각하는 자신이 낯설지만 어쩐지 나쁘지 않았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추가태그
#로판au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