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or Hate (上)

미카슈

낭만실조 by 바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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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소 민감한 소재를 사용하오니 열람 시 주의 부탁드립니다.






넓은 거실은 대체로 어두웠으나 창가로는 빛이 들었다. 


미카는 운동화를 벗지 않은 채 거실을 가로질러 창가 앞 개인용 소파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남자 옆으로 다가갔다. 창가로 내리쬐는 빛 탓에 얇은 발목 아래 그의 가죽 구두코가 살짝 빛났다. 


한쪽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손에 얼굴을 기댄 채 책을 읽는 그를 보며 미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가까이 다가가, 두꺼운 소파의 반대편 팔걸이에 구부정한 자세로 앉았다. 그는 미카가 온 걸 알면서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눈을 감은 미카 또한 구태여 말을 걸지 않았다.


희미한 오후의 햇살과 다소 어두운 저택의 거실에서 그들은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흰 교복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고등학생, 그리고 단정한 정장 차림을 한 그의 젊은 아버지는 묘한 분위기 속에서도 침묵을 지켰다. 


반대편 책장을 응시하던 미카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손을 들어 그의 정장 셔츠 목덜미 부근에 손가락을 살짝 걸었다. 마른 체형이라 그런지 목 뒤편을 만질 때면 아래로 내려가는 척추가 선명히 느껴졌다.


손을 움직여 그의 얼굴 바로 아래편을 훑던 미카는 이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만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려는 듯, 그는 여전히 책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얄쌍한 콧대와 내리깔은 속눈썹에 희미한 빛이 내려앉았다.


미카는 그의 어깨에 한쪽 손을 올린 채 귓바퀴를 입술 새로 가볍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들어 제 입을 살짝 막았다. 그는 저보다 열 살이나 연상이면서 이렇게나 요령이 없었다. 무시하는 척하면 되는 줄 안다. 


책은 너무나 간단히 그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미카의 손으로 책이 넘어가자, 그제야 그는 이쪽을 바라보았다. 단호해 보이기 위해 꾸며낸 듯한 그의 얼굴에— 미카는 책을 옆에 내려놓고는 미소를 띤 채 몸을 숙였다. 가벼운 저항 속에서 입술이 맞물렸다. 

깡마른 뺨을 쥐고 숨을 섞으며, 미카는 눈을 떠 저를 보지 않으려는 듯 질끈 감은 그의 눈을 바라보곤 조용히 속으로 읊조렸다.

비틀린 사랑이어도 상관없었다. 

손가락질을 받아도 좋았다. 

우리는 함께 있어야만 한다. 

Love 

or 

Hate

바질


Part 1 : 키다리 아저씨

이곳을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처음 보육원에 입소했을 때는 미카가 가장 어린 편에 속했다. 잘 먹지도 못해 몸집도 남들보다 눈에 띄게 작았고 목소리 또한 작아 존재감 따윈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해가 지나며 나이를 먹은 형과 누나들이 퇴소를 하거나 각자의 가정을 찾아 보육원을 나가, 어느새 미카는 제법 나이가 많은 쪽에 속하게 되었다.


미카가 보육원으로 돌아올 때면 언제나 눈에 띄던 아이들은 친절한 어른의 손을 잡고 일찍이 퇴소를 하고 있었다. 


카게히라 미카가 총 3번의 파양을 겪으며 알게 된 건, 어른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아이란 외모가 단정하고 성격이 밝으며 돈이 많이 들거나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아이들을 말한다는 것이었다. 


파양은 생각보다 큰 상처가 되었다. 아무리 보육원에는 부모 없는 아이들이 넘쳐나고 데려가 주는 쪽이 어른들이라지만, 미카의 파양 사유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명랑하며 순종적인 어린아이들을 데려가 빠르게 이상적인 자식으로 키워내고 싶어 하던 이들에게 미카처럼 작고 소심한 아이들은 결코 조건에 맞지 않았다. 오로지 외모가 예쁘장하여 눈이 간 미카를 입양했던 세 부부는 모두 비슷비슷한 이유로 입양 준비 기간 안에 그를 보육원으로 도로 돌려보냈다. 


- 너를 사랑해 줄 부모를 만나길 빈다.


정확히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파양 절차 속에서 누군가 미카에게 건넨 말이었다. 그 말은 처음엔 밤마다 미카의 마음을 쿡쿡 쑤시다, 이내는 파고들어 어린아이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감정들을 흘려냈다. 


사랑은 어려운 건가 보다. 

볼품없는 아이의 몸으로는 맞출 수 없는 조건들이 너무나 많다. 


어떤 형태의 사랑도 해 본 적이 없던 시절의 미카는 밤마다 베개에 머리를 묻고 숨죽여 울다가도 아침이 되면 보육원의 맏형 역할을 하며 애써 아이들을 챙겼다. 자그마치 열 살이 되기까지, 제 또래 아이들은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까지 미카는 그러한 일상을 보냈다.


어느 날, 기온은 낮아도 내리쬐는 햇살이 따뜻하던 11월이었다.


눈을 뜨자 창백한 햇빛이 창으로 들이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일어나기라도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잠시 묘한 기분이 휩싸여 있던 미카는 이내 눈을 살짝 비빈 뒤 차가운 세숫물로 세수를 했다. 


"형, 또 손님이 오셨대."


현재 보육원에서 가장 어린 남자아이 하나가 입을 오물거리며 말하자, 미카는 아이의 단추를 채워 주다 말고 잠시 멈칫하고는 그렇냐고 되물으며 살짝 웃었다. 이런 소식에도 기대하지 않게 된 지는 조금 되었다. 


열아홉 살까지 보육원에서 나가지 못한 아이들은 강제적으로 사회에 내던져진다. 곧 열 살 생일을 맞게 되는 미카는 벌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열네 살 즈음이 되면 제 나이대와 비슷한 아이들이 여럿 생기겠지만, 아무튼 지금 미카 나이대의 아이들은 보육원에 없었다. 


"누가 또 가게 될까?"


이름이 무어냐는 질문이나, 좋고 싫은 것에 관해 묻는 말에 주저 없이 야무지게 대답할 수 있으며 가르쳐 주지 않아도 오븐을 쓸 줄 알고, 혼자 시간 관리도 할 줄 아는 똑똑한 아이들이 나갈 것이다. 미카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나 구태여 대답해 주지 않은 채 낡은 목도리를 둘러 주었다.


"금방 나갈 수 있을 끼라, 이번에 못 나가도⋯⋯ 그리 실망치 마래이."

"난 괜찮아. 그래도 미카 형은 항상 나가고 싶어 했으니까, 꼭 나갔으면 좋겠다."


두 뺨에 사탕이라도 문 듯 젖살이 가득한 아이의 악의 없는 말에 미카는 잠시 먹먹한 기분이 들어 손을 놓았다. 저 또한 열 살 생일을 앞둔 어린아이였으나 제 키의 반도 안 되는 조그만 아이가 그리 말해 주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갈 수 있을 리 없어.

난 그다지 사랑스럽지도 않은걸. 


언제부터인가 보육원의 낡은 거울을 보고 있자면 단점만이 드러났다. 세 번의 파양을 겪으며 눈에 띄게 어두워진 얼굴이라던가, 짝짝이인 눈이라던가 하는. 결국 미카는 세수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울을 보지 않게 됐다. 반대로 다른 아이들의 외모에는 더더욱 신경을 많이 썼다. 그들이 하루라도 빨리 이 보육원을 벗어날 수 있게끔. 


"곧 오신대! 얼른 방 치워."


원장이 보육원의 시설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면, 손님들은 그때 보통 아이들을 눈여겨보고 이후에 데려가게 된다. 곧 손님이 오실 테니 방을 치우라는 말에— 미카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이들 사이를 지나쳐 복도로 나섰다. 밖은 좀 추운 모양이었다.


이 보육원을 나가고 싶다. 

아니,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다. 

파양당하는 게 두려웠다.

그러나 사랑받고 싶었다. 


새하얀 입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보육원의 휑한 마당에는 아무도 없어, 미카는 홀로 얕게 쌓인 눈밭을 걸었다. 햇빛이 다소 내리쬐는 탓에 눈밭에는 발이 푹푹 들어갔다. 


보육원의 건물을 올려다보며, 지금쯤이면 손님이 아이들을 고르고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미카는 아직 제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복합적인 감정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새로운 부모를 만나 그들의 영역에 들어갔다가 멋대로 추방당하는 과정들을 세 번이나 겪고 나니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견딜 수 없게 느껴지는 동시에, 보육원을 나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 미카의 안에는 자리했다.


벤치 위에 앉아 햇빛을 쬐던 미카는 눈을 감고 짙은 숨을 내뱉었다. 눈을 서서히 뜨자, 새하얀 겨울의 햇빛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을 인지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처음에는 빛이 너무 밝아 헛것을 본 건가 했으나,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니 점점 시야가 뚜렷해지며 앞에 서 있는 사람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미카는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입을 살짝 벌렸다. 


그는 매우 젊다 못해 어려 보이기까지 하는 곱상한 얼굴의 키 큰 남자였다. 미카는 그를 보자마자, 낡은 책에서 보았던 키다리 아저씨라는 인물을 떠올려냈다. 


긴 코트와 목폴라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벤치 앞에 서서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는 새하얀 조각상처럼 정교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미카는 이제껏 보육원에 저런 외양의 손님이 오는 걸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옅은 분홍색의 짧은 머리, 날렵한 콧대나 갸름한 얼굴— 새하얀 피부 따위보다 미카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보라색의 두 눈동자였다. 그의 두 눈은 모두 제비꽃을 닮은 아름다운 보라색을 띠고 있었는데, 미카는 새삼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나를⋯⋯

데려가 주면 좋겠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오자 남자의 코트 자락이 바람에 살짝 날리며 좋은 향기가 났다. 그는 제 나이에 비해 다소 조숙한 옷차림을 한 듯 보였다. 보육원에 온 사람들 중 저렇게 젊은 사람은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던 정적을 깬 건, 다름 아닌 미카의 재채기 소리였다.


제 앞에 선 키 큰 남자를 바라보느라 재채기가 나오기 직전까지 미카는 알지도 못했다. 차가운 바람에 얼얼해진 코에서 재채기가 튀어나오자 미카는 얻어맞기라도 한 듯 고개를 숙였다. 깜짝 놀란 탓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 버리면 안 되는데. 미카는 입을 가린 두 손을 떼지 않은 채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햇빛을 등지고 선 채 예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카는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저 사람이라면, 파양을 감수하고서라도 손을 잡아 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저는 건물 안에 있는 다른 사랑스러운 아이들에 비해 눈도 짝짝이인 데다 사교성도 떨어졌으며 어설픈 사투리 탓에 말조차 어눌했다. 첫인상을 좋게 남기지 않으면 저 아름다운 남자가 저를 굳이 데려갈 이유는 없다는 거였다. 더군다나 나이도 먹을 대로 먹어 다루기 쉽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자괴감에 젖어 눈을 감고 있던 미카는, 제 얼굴에 닿아 오는 부드러운 감촉에 저도 모르게 놀라 눈을 떴다. 


남자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무릎을 굽혀 제 눈높이 맞추어 준 그 남자가 어디선가 꺼낸 손수건으로 제 얼굴을 닦아 주는 걸 보며 미카는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보육원에 손님으로 온 것도, 제 얼굴을 닦아 주고 있는 것도. 그의 손길을 낯설어하던 미카는 이내 눈을 감고 가만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눈을 감은 탓에, 제가 남자의 손길에 의지하는 순간 미묘하게 바뀌던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 젊고 아름다운 남자는 결국 누구도 데려가지 않았다.


보육원에서는 아이가 입양되어 시설을 나가면 그 아이의 침대를 정리하곤 하는데, 어떤 침대도 짐이 빠지거나 정리되지 않았다. 미카는 그와의 짧은 만남이 정말 꿈인가 싶어 가끔 허공을 응시하며 얼굴을 닦아 주던 감각을 더듬었다. 


향수인지 체취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에게선 좋은 향이 났다. 눈밭에 서 있는데도 놀라울 만큼 새하얬고, 팔다리가 길어 무척 장신인 편이었으나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미카는 그를 생각하면 어쩐지 가슴 한켠이 이상해졌다.


"미카 형!"


남자아이 하나가 급히 제게로 뛰어오는 걸 본 미카는 장난감을 정리하다 말고 그쪽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하도 몸집이 작아 뛰어오는데도 속도가 제법 느려, 미카는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아이가 이쪽을 향해 오기까지 기다렸다.


"원장님이, 형 보고⋯⋯."

"괘안나? 숨이라도 고르고 말하래이."

"가장 좋은 옷 입고 기다리래. 손님이 오실 거래."


숨이 차 헐떡거리는 아이의 말을 들은 미카의 눈이 커졌다. 


"내, 내 보고 그러라 하신 기가?"

"응, 미카 형을 보러 오는 거래. 그러니까⋯⋯."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낯선 향수 냄새가 돌연 코끝을 스치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잘 준비해서, 이번에는 꼭 나가야 돼."


소식을 전해 준 아이의 눈을 본 미카는 고마운 마음에 서랍을 열어 사탕 하나를 쥐여주었다. 가장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으면서도 긴장이 되어 손에서 땀이 나, 몇 번이고 손을 씻어야 했다. 겨울철이라 받아 놓은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미카."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원장은 풍채가 좋았고, 일주일의 반 정도는 취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쩐지 옷매무새도 단정하고 깔끔하게 꾸민 걸 보니 제법 부자 손님이 오신 듯했다. 미카는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널 보러 온 손님이 계신단다. 어서 나가렴."


제 등을 떠미는 손길은 그다지 부드럽지 못했으나, 미카는 마른침을 삼키고 복도를 걸어 나갔다. 


저를 원장실이나 응접실로 데려갈 것만 같던 그는 예상외로 보육원 밖으로 향했다. 미카는 괜스레 이상한 기분이 들어 입술을 오물거리곤 뒤를 따랐으나 겨울바람에 저도 모르게 작게 재채기를 했다. 


해는 밝고, 세상은 눈으로 가득 둘러싸여 새하얀 빛을 띠었다. 미카는 눈을 몇 번 깜빡여 밝은 빛과 새하얀 세상에 적응했다. 그러자, 저만치에 서 있는 키 큰 남자의 형상이 보였다.


그였다.

미카의 심장이 박동했다.


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옆얼굴은 미카의 기억 속에 있던 것과 그대로였다. 원장이 어서 가 보라며 채근하는 목소리에도 미카는 잠시 우뚝 서서 그를 바라보기만 하다, 느린 걸음으로 대문의 계단을 내려갔다.


눈이 와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없는 탓에 보육원 마당은 무척 휑했다. 미카는 오직 남자 하나만을 보고 걸었다. 걸음은 빨라졌다가,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느려졌다. 사박사박 눈 밟는 소리에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저를 향해 다가오는 미카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 다다르자, 발을 멈추었다.

밟힌 눈에서 사박 소리가 났다.


제 낡은 신발 앞에 있는 그의 구두는 윤이 났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좋은 구두였다. 고개를 들자, 그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카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영원히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던 그는, 바람이 살랑 불자 무릎을 굽혀 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미카는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내려오자 저도 모르게 놀라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미카의 행동 하나하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예쁜 얼굴이다. 미카는 오묘한 색의 아름다운 보라색 눈을 바라보며 등 뒤로 모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다소 피곤해 보이기는 하나, 아무튼 미카는 그가 무척 예쁘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곤, 손에 끼고 있던 가죽 장갑을 벗었다. 미카는 뭐라도 말할 것 같던 그가 돌연 장갑을 벗자 묘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그를 지켜보았다. 

장갑 새로 나온 손가락은 길고 하얬다. 뼈마디가 다 보일 정도로 마른 손이었다. 


왼쪽 뺨에 닿아 온 따스한 감촉에 놀란 미카는 저도 모르게 왼쪽 눈을 살짝 감았다. 제 뺨을 감싼 손은 예상외로 따뜻했다. 차가운 인상과는 반대되는 따뜻한 손에 미카는 돌연 얼굴을 붉혔다. 


"이름을⋯⋯."


그가 입을 열었다. 


"말해 줄 수 있나."


제법 낮은 미성의 목소리였다. 미카는 입을 열었다 닫길 반복하며 제가 생각해도 조금 답답하게 굴기를 반복했으나 그는 기다려 주었다. 미카는 목소리를 쥐어짜 겨우겨우 카게히라 미카라고 중얼거리고는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뺨에서 손이 떨어졌다. 그 손은 부드럽게 내려가, 제 조그마한 손을 쥐었다. 이렇게 보니 제 손의 두 배가량 컸다. 미카는 제 손이 이렇게나 작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이 사람도 무척이나 젊어 보이는데, 어찌 되었든 저보다는 확실히 어른이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둘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차가운 바람 탓에 둘 다 뺨이 아주 조금 붉었다. 미카는 어느새 코끝까지 빨개져 있었다. 마주 잡은 손은 따뜻했다. 미카는 손가락을 조금 움직여 그의 손을 쥐었다. 


미카가 제 손을 쥐는 순간, 그가 말했다. 


"난 너를 데려갈 생각이야."


바라던 말이었는데도 미카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또한 그저 진지한 얼굴로 저를 마주 보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말투나 표정은 한없이 무뚝뚝했으나 마주 잡은 손만큼은 무척 다정하게 느껴졌다. 미카는 마른침을 삼켰다.


"나를 선택해."


예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오자, 미카는 진심으로 놀란 듯 토끼 같은 눈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강제로 데려가지 않을 테니."


선택.


단 한 번이라도 주어진 적이 있었던가. 카게히라 미카의 짧은 인생에서 그가 직접 선택해 본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애초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는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미카는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저보다 아래에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몸을 반 넘게 굽혔는데도 눈높이가 비슷했다. 무척 기뻐야 하는 순간인데도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카는 추위 탓이라고 생각하기로 하며, 코를 한 번 훌쩍였다.


제 손가락 사이에 들어와 있는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더 이상의 말은 오가지 않았다. 손을 놓은 그는 미카가 저를 향해 팔을 뻗자, 두 팔로 미카를 안아 들어 보육원 건물 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어깨와 목을 끌어안은 미카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사람의 온기에 기대었다. 









짐을 챙겨 나오는 길에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몇몇 아이들은 정말 가는 거냐며 울기도 했고, 조금 큰 아이들은 미카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처음 입양을 갈 때가 생각난 탓에, 미카는 복잡한 감정으로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인사를 했다. 


짐은 간소했다. 애초에 가진 게 몇 없었다. 헝겊으로 만든 인형 하나와 싸구려 사탕 몇 알이 전부여서 아주 작은 손가방이면 충분했다. 깨끗하게 비워진 침대를 보며 미카는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기를 바랐다.


원장은 그 젊은 청년이 얼마나 부자인지 쉴 새 없이 이야기하며 네가 얼마나 운 좋은 아인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다. 그는 또한, 장차 네 아버지가 될 그 청년에게 이 보육원이 얼마나 좋은 시설이었는지에 꼭 이야기하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그는 보육원 대문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카가 작은 가방을 들고 조그만 걸음으로 허둥지둥 나오자, 급할 것 없다며 딱 잘라 말하곤 미카가 제 속도로 저한테 오기까지를 기다려 주었다.


가방을 건네받은 그는 익숙하게 미카를 안아 들었다. 미카는 그가 과연 제가 열 살이나 된다는 걸 들은 건 맞는지 잠시 의문을 가졌다. 아무리 제가 키가 작고 몸집이 왜소하다 한들 이렇게 안길 나이는 이미 지났는데. 


그러나, 그런 말 따윈 하지 않은 채 그의 코트 자락을 작게 쥐었다. 그의 어깨에 뺨을 묻었다. 보육원 밖을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살갗에 와닿았다. 


작별이다. 


그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고 점차 멀어지는 보육원 건물을 보고 있자니 시야에서 새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저를 감싸 주고 있는 팔에 의지해, 더 이상 건물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쪽을 바라보았다. 몇 번은 그가 저를 곁눈질한 것도 같았다. 


기차역으로 가는 길, 미카는 용기 내 내려서 걷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미카가 말을 하자 짧게 놀란 듯하더니 이내 그를 내려주었다. 미카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많은 인파 속에서 그를 놓쳐버리지 않을 수 있게, 더욱 힘을 주어 잡았다.


그는 기차역으로 바로 가지 않고 옷 가게에 들어가 미카를 위한 옷을 몇 벌 장만해 주었다. 가는 길이 추우니 임시방편이라고 말한 그가 건넨 옷은 무척 따뜻해 보였다. 털목도리는 그가 직접 매어 주었다. 어쩐지 그는 옷을 다루는 게 매우 능숙한 듯 보였다. 


이 사람을 뭐라 부르면 좋을까.


어떤 아이를 좋아하려나. 보통의 어른들처럼 명랑한 아이를 좋아할지, 또는 조용하고 모범적인 아이를 좋아할지는 모르는 일이었으나 미카는 그를 위해서라면 평생을 연기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나는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을 것만 같다.


Part 2 : 굿나잇 키스

방이 생겼다. 


부자라는 말이 거짓이 아닌 모양인지, 남자는 미카를 주택가 한복판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저택 같은 집으로 데려갔다. 미카는 거의 보육원보다 크다고 느껴지는 저택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감상을 했다. 


이츠키 슈.


남자의 이름이었다. 미카는 이제 곧 저도 그의 성을 받게 되나 했으나, 그는 그런 서류상 절차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네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었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이런 커다란 집은 두 사람이 살아도 무척 텅 빈 느낌이 드는데, 이제껏 혼자 살아왔으려나 싶었다. 미카는 이제 제 양아버지가 된 젊다 못해 어린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무엇이든 야무지게 해낼 것 같던 그는 의외로 서투른 부분들이 많았다. 일단, 그는 어린아이를 다룰 줄 몰랐다. 열 살이면 벌써 학교에 다닐 나이이건만 마치 미카를 네다섯 살 아기 대하듯 했다. 그런데도 미카는 굳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순순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화장실에는 미카가 발을 딛고 올라갈 받침대가 생겼고, 슈의 흰색 칫솔 옆에는 미카가 쓰는 알록달록한 작은 칫솔이 꽂혔다. 화장실뿐만 아니라 서재나 부엌에도 발 받침대가 생겼다. 


가장 먼저 아침에 일어나면 미카는 눈을 비비며 서재 한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잠을 깨었다. 그러고 있자면 얇은 파자마를 입은 슈가 들어와 익숙하게 부스스한 미카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미카는 그의 손이 제게 닿을 때면 묘하게 좋은 기분을 느꼈다. 아직은 정의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외견만큼은 봐줄 만하구나."


그는 간혹 거울 앞에서 제 머리를 빗겨 주며 그렇게 말하곤 했다.


예쁘다는 말일까? 보육원에서도 두 눈의 색이 다른 것만을 빼면 원장은 언제나 제 외모를 들먹이며 마치 장사를 하듯 손님들에게 소개하곤 했다. 그러나 미카는 파양을 겪어 가며 단 한 번도 저 자신의 외모를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보다는 거울에 비친 저 남자가 훨씬 예뻤다. 두 눈의 색도 아름다운 보라색이고,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 정교한 조각상처럼 생겼으니까.

미카는 몇 번 당신이 훨씬 예쁘다고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나눌 법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무엇보다, 미카는 당장 슈를 부를 호칭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라고 부를 순 없었다. 슈는 너무나 젊고 아름다웠으며 그를 보고 있자면 미카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서류상으로는 양아버지라 해도 자기 자신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의 영역 안에 들어온 게 기쁘다. 아침마다 식사를 준비해 주고, 하루 내내 나를 보살펴 주는 게 좋다. 미카는 지금의 평화로운 일상이 가슴이 벅찰 정도로 행복했으나, 여전히 그를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잡는 거다."


펜이나 포크, 나이프를 잡는 법을 배웠다. 미카는 작은 손으로 열심히 따라 해 보려고 애를 썼으나 잘 안될 때면 괜스레 슈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내지 않고 다시 한번 가르쳐 주었다. 


아이들의 정서에 좋은 필독서라며 가져다준 책은 뭔가 내용을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으나, 미카는 그가 가져다준 것이니만큼 꾸역꾸역 불을 키고 읽었다. 그러고 있으면 그가 우유 한 컵을 가져다주곤 했다.


키가 크면 좋겠다.

언젠가는 저 사람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아무리 어린아이들과 땅딸막한 원장만 있는 보육원에서 자랐다지만 슈가 키가 큰 편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미카는 그보다 더 크거나, 적어도 그의 키 정도는 따라잡고 싶었다. 그래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우유도 매일 열심히 마셨다.


학교를 다니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백화점에 갈 거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미카는 화들짝 놀라 굳어 버렸다. 아직 정확한 돈의 개념이 잡히지 않아 어느 정도가 싸고 비싼 건지 구분할 수 없는데 같이 가자고 하니 제가 비싼 걸 골라 버리기라도 할까 괜히 걱정이 된 탓이었다.


돈에 연연할 것 같지 않긴 하지만⋯⋯.


옆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만연한 서재에서 둘은 나란히 앉아 서로 다른 책을 읽고 있었다. 그의 몸에 기대어 간단한 책을 읽던 미카는 괜히 양말을 신은 발을 소파 위에 올리곤 쭈그려 앉았다. 


"모르는 단어가 있나?"


미카는 흠칫 놀라 그를 고양이 눈을 한 채로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남의 시선에 놀랍도록 익숙한 사람이었다. 미카가 멀리서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말을 걸곤 했으니까. 미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책을 내려놓은 뒤 그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스킨십이 익숙하지 않은지 그는 미카가 가까이 오면 잠시 굳었다가도 어색한 몸짓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미카는 그가 그러는 게 의아하면서도 좋았다. 열 살인 저를 다소 유아처럼 대해 주는 것도 상관없었다. 


밖에 나갈 때면 그에게 안기거나 손을 꼭 잡았다. 미카는 그에게 안기는 것도 좋았으나 역시 손을 잡는 게 훨씬 더 좋았다. 처음 봤을 때 슈는 양쪽 손에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미카가 온 이후로는 손을 잡아야 하기 때문인지 더는 끼지 않았다. 


연말의 거리에는 눈이 내렸다. 미카는 최대한 그와 부자 관계처럼 보이고 싶어 표정을 풀려 애를 쓰며 손을 잡고 척척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한 번씩 뒤돌아보며 서로 전혀 닮지 않은 젊은 아버지와 조그만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제가 물건을 골라야 된다는 걱정은 가히 쓸모없었다는 사실은 얼마 안 가 드러났다. 미카는 슈가 옷 가게에 들어가 몇 벌을 고른 뒤 갈아입으라고 하면 작은 모델이라도 된 듯 입고 나오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제법 깐깐한 편인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다음 옷으로 넘겨 버렸다.


"내가 손을 봐 줄 테지만, 이게 그나마 낫군."


나은 건가?


미카는 여자아이가 입을 법해 보이는 프릴 셔츠를 보곤 조금 당황했으나 혹여 그가 볼라 티도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의 옷들은 바지나, 니트라던가 하는 평상복이었다. 


엄청 값져 보이는데. 미카는 옷 가게나 가방 가게 안에서도 눈을 굴리며 가격표를 훑었으나, 어느 정도가 싸고 비싼 건지 구분할 줄 몰라 결국은 포기하곤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가방을 살 때도 무척 꼼꼼하게 가게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옷과 가방, 신발 등을 살펴보며 가게 주인과 분주히 이야기하는 슈를 바라보던 미카는 어느 순간 무언갈 느끼고는 고개를 홱 돌려 백화점의 복도를 바라보았다. 가게 밖에 사람 몇몇이 수군대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접힌 휴대폰을 들어, 돌연 사진을 찍는다. 셔터 소리는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미카는 화들짝 놀라 그들을 커다란 눈으로 응시하기만 했다.


그들은 미카가 슈의 일행이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이쪽 또한 묘한 눈길로 흘긋거리고 있었다. 사람이 많아 보이자 돌연 긴장된 탓인지 미카의 손에서 땀이 흘렀다. 안절부절못하며 양쪽을 바라보던 미카는, 이내 겁에 질려 옷 가게를 가로지르곤 그에게로 다가갔다.


"카게히라?"


제 옷자락을 붙잡은 미카를 슈가 내려다보았다. 의아해하는 눈치였으나 미카의 표정을 확인한 그는 무슨 일이 있냐며 손을 붙잡아 주었다. 미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눈과 입을 꾹 닫고 다리 가까이에 붙은 채 옷자락만을 쥐고 있는 제가 심상치 않았는지, 슈는 잠시 침묵하다 주위를 둘러보곤 옷 가게 밖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리 와, 카게히라."


몸을 굽힌 그가 코트 자락을 넘기자 목폴라를 입은 몸이 드러났다. 미카는 찰나 동안 주저하다 바로 그에게 가 안겼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 왔다. 슈는 잔뜩 긴장한 듯한 미카의 등을 느린 박자로 토닥여 주었다.


그러나 슈의 심장 박동도 이전과는 달랐다.


이런 어리광도 받아 주는구나. 미카는 그의 상체를 꽉 끌어안고 코트 자락 안에 감싸인 채 그런 생각을 했다. 그의 몸은 저와 비슷할 만큼 살이 없어 무척 마른 편이었다. 그러나 코트 안쪽은 따스했으며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여학생들이 몰려서 아이가 놀랐나 보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


가게 주인 또한 의아하다는 듯 가게 밖의 인파를 바라보았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수였으나 그들의 태도가 이상했던 탓이었다. 미카와 슈는 침묵을 유지했다. 


다시 거리로 나오자, 사람들은 저마다 갈 길이 바쁜지 더는 이쪽을 향해 눈길을 던지지 않았다. 미카는 그제야 마음이 편해져 다시 슈의 손을 쥐고 길을 걸었다. 아까는 왜 그랬던 건진 모르나, 낯선 사람들의 질 낮은 호기심에 긴장해 버렸던 것 같았다. 


연말을 맞아 온갖 알록달록한 빛으로 반짝이는 거리가 예뻐, 미카는 그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거리를 구경했다. 아직은 알지 못하는 언어로 쓰인 문장들이나 가게 간판이 많았다. 


저건⋯⋯.


미카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황금빛의 불빛으로 가득한 가게의 유리창 너머에 진열된 상품에 눈이 팔린 탓이었다. 조그만 걸음으로 바삐 종종거리던 미카가 멈추자, 슈 또한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미카의 시선을 좇았다.


옅은 초록색의 니트를 껴입은 테디베어였다.


척 봐도 무척 복슬복슬하고 푹신해 보였다. 크기가 거의 미카의 몸집의 반은 넘는 듯했다. 미카는 태어나서 저렇게 큰 인형을 본 적이 없어 넋을 놓고 테디베어를 바라보았다. 마치 저를 부르는 듯 보였다. 


"갖고 싶은 게냐."


위에서 들려 온 목소리에 다시 흠칫 놀라, 미카는 서둘러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해도 좋아."


아니야!


미카가 강한 부정의 표시로 고개를 미친 듯이 젓자, 그는 다소 당황한 듯 심난하게 굴지 말라고 딱 잘라 말했다. 


저를 꾸짖으면서도 슈의 눈길은 이젠 테디베어를 향해 있었다. 미카는 그런 그를 보곤 안절부절못하다, 잡았던 손을 놓고는 이내 안아 달라는 듯 두 팔을 뻗었다. 

열 살치곤 몸집이 작다 한들 이런 번화가에서 안기기는 조금 민망했으나, 이것 말고는 그의 시선을 돌릴 다른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이런 곳에서도 어리광이냐며 타이르는 듯 중얼거린 그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저를 안아 들었다. 미카는 그의 목덜미를 더욱 꽉 붙들었다. 목 부근에 뺨을 부비자, 슈는 손을 들어 미카의 머리 뒤쪽을 쓰다듬어 주었다. 


미카를 안은 슈의 발걸음은 시내의 광장으로 향했다. 미카는 여전히 그의 목덜미를 꽉 끌어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저길 봐."


무뚝뚝한 듯 다정하고 낮은 목소리에, 서서히 눈을 뜬다.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눈에 들어왔다. 미카는 아까의 그 테디베어도 잊어버린 채 조그만 입을 벌리곤 크리스마스트리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금색의 불빛들이 이곳저곳에서 순서대로 깜빡이며 연말의 밤을 밝혔다.


트리를 보던 눈은, 이내 저를 안고 있는 젊은 남자를 향했다. 그 또한 트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대체로 조용했다. 미카는 그가 이런 시끄러운 곳을 그다지 좋아할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오로지 단 한 명을 위해 나와 준 것이다.


뺨에 닿아 오는 공기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 기온이 내려간 게 아니라 미카의 뺨이 붉게 물든 거였다. 아직 제가 왜소한 어린아이라는 것에 감사하고 싶었다. 이렇게 어깨에 뺨을 부비고 끌어안아도 그저 어린아이의 어리광으로 끝나는 것이 다행이었다. 


"이만 갈까."


사람들이 더욱 몰리기 시작하자, 슈가 고개를 돌려 저를 보고 있던 미카와 눈을 마주쳤다. 미카는 그를 보고 있던 걸 들킨 기분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는 길에도,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다.

미카의 크리스마스이브는 슈 한 명이면 충분했다. 













- 자기 싫어요! 잠들지 않을 거예요.

- 꼬마야, 그렇게 떼를 부리면 못써.


열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각, 아까 샀던 잠옷을 입은 미카는 소파에 쭈그리고 앉아 TV 화면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슈는 전자기기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듯 보였으나, 하루에 20분 정도는 허용해 주었다. 미카 또한 TV 프로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으나 밤에 슈가 씻고 나오기 전까지의 정적이 싫어서 틀고 있곤 했다. 지금 또한 그랬다.


-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망토 할아버지가 와서 선물 보따리에 나쁜 아이들을 모두 넣어 데려가 버린단다.


미카는 긴장한 탓에 침을 삼키곤 동그란 눈으로 TV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들었다. 씻고 나온 슈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만지며 들어와 TV를 끌 때도, 제 손을 잡고 방까지 데려다줄 때에도 망토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슈를 바라보자, 그는 몇 번 미카를 토닥여 주고는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이마에 작게 키스해 주었다. 그 순간에는 망토 할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굿나잇 키스는 언제나 간질거리고 기분이 좋았다. 


슈가 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은 달빛으로 가득 찼다. 미카는 이불을 덮은 채 눈을 꼭 감고 자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다 보니 정적과 함께 시계 초침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려 왔다.


자야 해. 


미카는 침대에서 연신 끙끙거렸다. 무서운 것에 대해 한 번 생각하고 나니 이제껏 들어 왔던 크고 작은 괴담들이나 악몽들이 줄줄이 떠오른 탓이었다. 침대는 푹신하고 편했으나 저 한 명이 눕기에는 너무 컸다.


- 미카 형, 발을 드러내고 자면 침대 아래 괴물이 끌고 들어가 버린대.


평소라면 웃고 넘겼을 이야기들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정적 속에서 자꾸만 어떠한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미카는 제 심장 소리가 점차 커지고, 귀 주위에서 피가 도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자 결국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는 생각보다 높았다.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끼익 여니, 달빛으로 가득한 복도가 보였다. 미카는 저도 모르게 긴장된 마음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무슨 얼굴을 할까.


이제껏 저를 너무 따뜻하게 대해 주어, 괘씸하게 구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발걸음을 한 번씩 멈추었다. 새삼 겁이 나는 탓이었다. 그러나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갈 엄두는 나지 않아, 다시 그의 방으로 발을 떼었다.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잡은 뒤 슬쩍 당기자 방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커다란 방 안에, 혼자 눕기에는 다소 커 보이는 침대가 있었다. 미카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빠, 하고 부르려던 입은 얼마 안 가 다물어졌다. 

아직은 그렇게 부를 수 없다.

미카는 숨을 잔뜩 죽인 채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다섯 걸음 정도 걷자,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그가 보였다. 미카는 침대 끝에 두 손을 올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고 있는 그를 관찰했다. 

평온해 보였다. 내리깔린 속눈썹은 길고, 높은 콧대 위론 달빛이 비추어져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새하얬다. 또다시 이상한 기분이 욱신거리며 흘러나와, 미카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부르고 싶다. 

주어진 선택지는 아빠, 또는 아버지 뿐. 

그러나 미카는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을 '아버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제가 한 번도 부모가 있어 본 적이 없어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지만, 그를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버지에게 이런 감정을 느낄 사람이 어디 있어. 코 묻은 어린아이라도 그 정돈 알 수 있다.

미카가 침대 위에 앉자 작게 끼익 소리가 났다. 그 작은 소리에, 슈가 눈을 떴다.

"⋯⋯ 카게히라?"

잠이 덜 깬 듯 잠긴 목소리에, 미카는 그가 깰 줄 몰랐던 듯 놀란 고양이 같은 얼굴을 했다. 그는 옷소매로 눈을 살짝 비비곤 이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가 또렷해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게냐."

미카는 고개를 저었다. 

"악몽⋯⋯."

그의 앞에서 목소리를 내어 말하는 건 거의 처음인 듯했다. 그게 악몽을 꾸었다는 거짓말인 건 다소 유감이었으나, 아무튼. 

악몽을 꾸었다는 말에 슈의 표정에 작은 변화가 일었다. 미카는 제가 지금 너무 커 보이는 건 아닐까 괜히 걱정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미카가 다가오자, 얼마 안 가 이불을 들추어 미카가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 방— 그리고 이 이불에서는 그의 향이 났다.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어 그의 팔 사이에 안기자 슈는 악몽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며 미카를 안아 주었다. 잠들었기 때문일까, 그의 체온은 평소보다 높았다.

기분이 이상해. 뭔가⋯⋯.

저를 토닥이던 손길은 얼마 안 가 멈추었고, 작은 숨소리도 일정해졌다. 미카는 그의 목덜미에 묻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었다. 

이렇게 보니 이 사람도 어린 태가 났다. 미카는 그의 나이를 정확히는 몰랐으나, 기껏해야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얼굴을 천천히 감상하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입술을 오물거렸다. 엄두가 나지 않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으나, 미카는 이내 입을 열었다.

"아빠⋯⋯."

아주 작게 중얼거려 보았다.

그는 깨지 않은 채 여전히 눈을 감고 평온하게 잠에 빠져 있었다. 미카는 아빠라는 말을 뱉은 제 혀가 간지러워진 기분이 들어 괜히 입술을 손으로 만졌다. 소리 내 불러 봐도, 여전히 '아빠'라고 불렀을 때 그가 떠오르진 않았다.

손을 뻗어 그의 입술 앞에 펼쳐 보았다. 매일 밤 제게 굿나잇 키스를 하고 무뚝뚝한 듯 다정한 말을 건네는 입술을 굳게 다물려 있었으나 어쩐지 이상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잠든 척하는 건 아니겠지. 

그의 눈앞에서 작은 손을 휘휘 흔들어 보아도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내일 아침 제 품에 안겨 자는 미카를 보고 놀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슈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한 미카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 마른침을 삼켰다. 

살짝만, 아주 살짝만 해 보는 거다.

고개를 들어 몸을 일으킨 미카는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죽이려 애쓰며 그의 얼굴 가까이로 다가갔다. 슈는 얼굴 위에 그림자가 졌는데도 일어나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깊게 잠들어 있었다.

예쁜 사람은 잘 때도 예쁘구나.

평온해 보이는 표정이 좋았다. 미카는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그도 잠들어 있을 땐 말랑한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도 했다. 조숙한 옷차림을 하고 조금은 특이한 말들을 뱉어도 그 또한 무척 젊다 못해 어린 편이었으니까. 

지금 그와 나의 모습은 무척 이상해 보일 것이다. 그의 얼굴과 제 얼굴 사이의 간격이 한 뼘조차 채 안 된다는 걸 깨달은 미카는 그제야 조금 긴장된 탓인지, 침대를 받친 손으로 주먹을 쥐며 숨을 죽였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깨기라도 한다면 재앙일 게 분명했다.

굿나잇 키스를 꼭 이마나 뺨에다 하라는 법은 없지 않나. 그런 말로 애써 제 행동을 정당화한 미카는 눈을 감고 아주 살포시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그가 깰까 봐 긴장한 탓에 거의 느낌도 안 날 정도로, 아주 가볍게. 

정적이 흘렀다.

슈는 깨지 않았다. 미카의 조그마한 입술이 그의 입술 위에 포개진 순간에도 눈을 감은 채 편안한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열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작은 체구의 아이가 잠들어 있는 장신의 남자에게 입을 맞추는 장면은 다소 묘해 보였다. 

황급히 입술을 뗀 미카는 머리에 피가 쏠리는 걸 느끼며 몸을 뒤로 빼곤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뛰었다. 얼굴이 귀까지 빨개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가 몰래 입을 맞춘 것조차 모르는 그는 세상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미카는 방금까지 제가 닿아 있었던 그의 맑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몸 어딘가가 간지럽고, 머릿속이 새빨갛게 달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를 깨워서 저를 달래 달라고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그의 품속으로 파고든 미카는 여전히 눈을 크게 뜨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닿았던 입술이 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러자 슈는 잠도 채 깨지 못한 채 무의식중에 팔을 들어 미카를 감싸고 손으로 토닥여 주었다. 

"카게히라?"

이른 아침, 세수를 마치고 부엌으로 들어온 조그만 아이를 본 슈가 의아함에 그에게 물었다.

"잠을 설친 게냐."

화들짝 놀란 미카는 아니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으나, 미카의 얼굴을 살핀 그는 예리하게 그가 잠을 잘 자지 못하였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인 듯한 표정을 했다.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재차 깨달은 미카가 어리광을 부리듯 두 팔을 뻗자, 그는 못 말리겠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곤 한쪽 팔로 미카를 가볍게 안아 들어 식탁에 앉혔다. 

어젯밤의 일은 정말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 미카는 식탁에 앉아 차가운 식기를 든 채 그를 연신 힐긋거렸다.

"오후에 낮잠 시간을 주마. 지금은 졸지 말고 먹도록 해."

슈는 요리도 잘하는 모양인지, 아침 점심 저녁으로 매번 아이에게 필요한 영양소가 잘 갖추어진 식사를 제공해 주었다. 미카가 많은 양을 먹지 못한다는 걸 하루 만에 알아차려 준 덕에 양 조절 또한 완벽했다. 

음식을 입에 넣는 그는 권태로워 보였다. 다소 인위적인, 또는 형식적인 절차처럼 그는 식사를 했다. 찻잔에 담긴 뜨거운 커피를 마실 때를 제외하고는 저만큼 음식을 즐기는 모습 따윈 보여 주지 않았다.

파자마 새로 드러난 얇은 손목이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걸 본 미카는 새삼 어젯밤 그의 입술이 주던 묘한 감촉이 떠올라 이유 없이 몸이 가려워진 탓에 입술을 꾹 물었다. 슈는 그런 사소한 변화조차 놓치지 않고 다시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미카가 접시에 있는 걸 아무거나 찍어 급히 삼키다 사레가 들리자, 그는 답지 않게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따라 주었다. 두 손으로 컵을 잡고 물을 마신 미카의 입을 닦아 주며 슈는 고상하지 못한 행동이라며 타박을 했다.

라디오에서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맞아 캐럴을 틀어주었다. 그러나 슈는 크리스마스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모양인지, 식기구를 정리하고 나서는 라디오를 꺼 버렸다. 미카는 다소 아쉬운 듯 라디오를 바라보다 이내 슈의 옷자락을 잡고 거실로 나갔다. 

저건⋯⋯.

미카는 입을 벌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넓은 거실 한가운데에 커다란 트리가 세워져 있었다. 미카는 뺨까지 붉히며 마음이 설레는데도 홀로 뛰어가지 않고 슈의 옷자락을 끌며 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슈는 그를 보며 어쩔 수 없는 아이—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기꺼이 발걸음을 옮겨 주었다.  

설렌 마음에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기뻐하는 미카를 보며 슈는 다소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트리 주변을 살피기 위해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 슬리퍼가 벗겨지자, 슈가 무릎을 굽혀 다시 신겨 주었다. 

제 발목을 쥔 그를 내려다보며 오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미카는 돌연 고개를 돌려 제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선물 상자를 발견하곤 헙 소리를 냈다.

"이건⋯⋯."

"선물이니, 열어 봐도 좋아."

슈는 처음 보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오만하고 의기양양해 보이는 옅은 미소를 본 미카는 다시금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곤 선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쁘게 포장된 리본은 끝을 당기자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풀어졌다. 손이 서투른 미카가 힘을 쓰지 않아도 열릴 수 있게끔, 리본이 풀어지자 상자는 면이 네 갈래로 나누어지며 열렸다. 미카는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치고는 상자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봤던 그⋯⋯.

저를 부르는 듯했던 다정하고 포근한 얼굴의 테디베어가 크리스마스트리를 등진 채 미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트리를 둘러싼 작은 조명들이 반짝이며 신비한 빛을 더하자, 미카는 놀라고 감동한 탓에 먹먹한 기분으로 제 젊은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미카의 반응이 마음에 든 듯 작게 웃고 있었다. 

미카가 달려가 슈의 목을 끌어안았을 땐, 그는 마치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슈에게 뺨을 부비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미카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은 이전처럼 다정했다. 미카는 울음이 나올 만큼 기뻤던 탓에 그의 잠옷 자락을 조그만 손으로 꼭 쥐었다. 

따스하고 서투른 크리스마스. 

테디베어를 끌어안은 미카를 무릎 위에 올린 슈는 미카가 인형 이곳저곳을 만지며 놀자, 인형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매혹적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 또한 어릴 적에 인형 같은 것들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미카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의 어릴 적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밖에서는 적은 양의 눈이 내렸다. 창문은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거실 안에는 따뜻한 온기가 돌았고,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는 빛을 냈다. 열 살이 되어서야 첫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는 기쁨에 젖어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이런 크리스마스가 계속되길, 카게히라 미카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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