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쥰히요] at the end.

좀비 아포칼립스 썰 기반


* 9,277자. 

* 쥰히요 <좀비 아포칼립스 썰> 기반 (두 번째 베드엔딩) 


이왕이면 끝은 아름다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끝이 무엇이건 간에. 

나 자신의 끝에 관해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글쎄. 역시 아름다운 맺음이 좋겠다. 아름다운 곳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 아름다운 마지막을. 

로맨티시스트는 싫다고 잘난 듯 말해왔었는데. 눈앞의 현실에서 눈을 돌린 채 지나친 감상에 빠져있는 건가? 나답지 않게. 

히요리는 눈을 떴다. 그리고 곧, 다시 감는다.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이 온몸을 감싼다. 자신의 호흡을 듣는다. 들이쉬고. 내쉬고. 다시 들이쉬길 반복하는 호흡엔 불안정한 떨림이 녹아 있다. 

다시 눈을 뜬다. 지독한 적막과 지독한 어둠에 사로잡힌 스스로를 본다. 저 자신의 손도, 애처롭게 끌어안은 너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이런 곳에선 현실이고 뭐고 보이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래. 이것은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현실을 더듬어 미래를 덧그리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엇이라도 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건 당연해. 오히려 현실을 냉철하게 보는 것에 가깝다. 그저 그렇게 덧그려낸 미래가 저 자신의 죽음이었을 뿐. 나의 죽음. 아름다운. 그리고 허망한. 

"나. 아무래도 지친 것 같네."

듣는 이는 아무도 없을 텐데도 일부러 소리내어 말해본다. 어떤 소리라도 듣고 싶다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그마저도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적막 속에선 지나치게 크게 울리는 것만 같다. 

그 순간, 울림에 반응이라도 하듯 맞잡은 손이 움찔, 한 차례 떨린다. 이상한 일이네. 너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지 꽤 오래 되었을 텐데. 

"너도 말이지. 듣고 있으면 제대로 반응을 좀 해주면 좋겠네."

이번엔 아무런 미동도 없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한 차례의 아주 우연한 움직임만으로 충분히 위안이 되었다. 너는 내게 그런 존재야. 여전히. 너는 주운 것이 쓸모 없어져도 버릴 생각을 않는다며 투덜댈지 모르겠지만. 

"내가 먼저 지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네. 자존심 상해라! 체력으론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쥰 군 주제에 날 이기기나 하고."

쥰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다. 그래도 너라면 어떤 말을 늘어놓았을지는 충분히 상상되었다. 그 정도는 쉽지. 우린 아주 오래도록 함께였었으니. 

그러게 잠도 제대로 안 자고 뭐 하는 짓이냐구요. 아무리 저라도 매일 밤 새우는 사람보다 뒤처지진 않는다구요? 이젠 시간 맞춰 자라고 잔소리까지 해야 하는 건가요? 어린애가 아니잖아요, 아기씨. 

투덜거리는 네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어쩐지 즐거워져 쿡쿡 웃었다. 네 목소리, 표정, 말투와 이어질 손길까지 모든 것이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기억력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본 것은 그 무엇도 잊지 못하는 저주받은 특기가 저주받은 세상 속에선 축복이 된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는 아이에겐 잔소리 듣고 싶지 않네."

손을 뻗어 쥰의 몸을 더듬어 올라가 뺨을 살며시 쓸어주었다. 다른 손은 여전히 맞잡은 손을 꼭 쥔 채로. 뺨은 푸석하기 짝이 없다. 그는 말랑하고 보드라운 피부는 아니었어도 항상 매끈하게 잘 관리된 살결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하지. 피부 관리는 필수라고 얼마나 잔소리했는데. 팩은커녕 로션 하나 바를 수 없는 상황이 야속하기만 하다. 하긴 뭐, 잘 먹지도 않는 녀석의 피부가 좋을 리 없지. 그건 아마 히요리 자신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쥰 군. 배가 고프면 언제든 먹어도 좋네. 내가 허락할 테니까."

뺨을 어루만지던 손끝은 그의 말라비틀어진 입술을 쓰다듬는다. 엄지 끝에 조금만 힘을 주어도 쥰은 순순히 입을 벌린다. 벌어진 입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여전히 유독 날카로운 그의 송곳니 끝을 매만진다. 

"제발. 먹어줬으면 좋겠어."

짐승이 으르렁대는 것 같은 목 울림이 작게 울린다. 너에게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리. 먹잇감을 감지하기라도 한 듯 턱을 움찔거리면서도 쥰은 끝내 제 입 안에 들이민 손가락을 물지 않는다. 

"진짜 미워 죽겠네. 왜 말을 안 들어?"

결국 쥰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울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울진 못했다. 네 앞에서만큼은 편하고 쉽게 잘 울었던 것 같은데. 울음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지친 걸까? 

송곳니를 더듬던 손은 힘없이 툭 아래로 추락했다. 그 와중에도 맞잡은 손은 놓지 않는다. 놓을 수 없었다. 

***

"죄송해요, 아기씨."

대뜸 사과부터 하던 그 순간, 히요리는 쥰이 무슨 상황에 부닥쳤고, 이어 무슨 말을 할지 알아버렸었다. 불행히도 눈치가 지나치게 빨랐던 탓이다. 그러나 믿고 싶지 않았으므로, 떨리는 눈동자를 다잡았다. 무슨 일이야, 쥰 군? 뻔뻔하게 되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아까 좀비한테 물려버려서,"

그러나 그 아이는 지나치게 솔직했고, 

"제발 제가 좀비가 되기 전에..."

지나치게 단순한데다,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토모에 히요리를 지나치게 소중히 대하는 탓에, 

"부탁합니다..."

눈치채버린 다음 말을 고스란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내뱉었다. 눈을 질끈 감고, 괴롭다는 듯이. 

아아. 이런. 그렇게 되어버렸구나. 결국엔. 가장 원하지 않던 전개였는데. 내가 옆에 있어 줄걸. 아직 햇병아리인 너는 내가 지켜주었어야 했는데. 왜 떨어져 있었지? 왜 그 순간 곁에 있지 못했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래 봬도 무척 여린 아이인데. 내가 옆에 있어 줬어야 했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옆에. 

그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사이, 히요리의 머릿속에선 수없이 많은 절망과 후회가 스쳐 지나갔다. 하마터면 울어버릴 뻔했다. 그러나 곧바로 떨리는 눈을 다잡고 웃는 것을 선택한다. 이 순간엔 그가 경애하는 토모에 히요리의 가장 밝은 모습을 뻔뻔하게 내비쳐야 했다. 토모에 히요리는 사자나미 쥰의 태양이었고, 그건 어떤 절망이 몰아닥쳐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와 같은 것이다. 

그래. 언제나 좋은 날인 것처럼 웃는 것. 그것이 좋은 히요리의 날. 

"하하! 그럴 필요는 없네! 역시 충성스럽구나, 쥰 군!"

"에?"

"너도 빨리 나랑 같은 좀비가 되었으면 좋겠네! 모두가 좀비가 되면, 아무도 외롭지 않아도 되겠지!"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물렸어요? 언제?"

"하하, 글쎄? 오래되었을지도 모르겠네.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이 되었다고. 좋은 히요리!"

"그게 웃으면서 할 소리냐고요!"

언제나 발랄하게 웃는 천진난만한 아기씨를 연기하는 것은 무척이나 쉽다. 너를 속이는 건 이렇게 간단한 일이다. 늘 그랬듯 밝게 웃으면 그만. 이걸로 네가 걱정을 덜어줬으면 했는데. 

"젠장.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아기씨까지 이렇게...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기랄..."

쥰은 진심으로 슬퍼하고, 절망했다. 그러게. 우리가 함께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우린 늘 한 몸처럼 붙어 다녔는데 왜 그 순간만큼은 함께이지 못했을까? 

가슴이 아팠다. 몸 한구석이 뻥 뚫려버린 것처럼. 다만 내색하진 못했다. 

****

그런 날이 있었다. 이미 너무나 오래전의 이야기다. 히요리는 좀비가 되어서도 끝까지 자신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대며 쥰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그대로 함께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버렸다. 

그는 정말 착실하게 히요리를 따랐다. 몸이 서서히 썩어들어가는 와중에도 제 아기씨를 보살피려 들었다. 이따금 그의 정신이 혼미해지는 때면 히요리를 보며 의아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보단 안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기씨는 증상이 크지 않은 편인가 봅니다. 다행이네요.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잘도 해댔다. 

쥰은 제법 오래 버텼다. 그러나 하나둘 스위치가 내려가듯 몸의 기능이 꺼졌다. 의식이 흐려지고, 쥰 답지 않은 과격한 폭력성을 보일 때도 있었다. 때가 왔네. 내 끝은 아름다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겠어. 사랑하는 아이에게 먹히는 결말. 마침내 하나가 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편이지. 

마침내 쥰이 더는 히요리를 아기씨라고 부르지 못하고, 짐승의 울음처럼 의미 없는 소리만을 반복하기 시작했을 때, 히요리는 차분하고 어쩌면 평온하기까지 한 얼굴로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의 송곳니가 쉽게 파고들 수 있도록 상의를 끌러 어깨를 내어 보이며 그를 끌어안는다. 오래 걸렸구나. 이제 나도 네 곁으로 갈게. 숭고한 각오와 함께 그의 고개를 손수 제 목덜미로 인도한다. 

히요리는 그렇게 쥰을 끌어안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귓가엔 전보다 격해진 짐승의 울음만이 들려올 뿐. 각오했던 어깨를 파고드는 통증도, 온몸이 뜯겨나가는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히요리는 눈을 뜨고, 품에 안긴 그를 바라보았다. 잔뜩 굶주린 짐승처럼 오로지 허기만이 남은 주제에 괴로운 듯 온몸을 바르작거리면서도 저는 털끝 하나 건드리질 않는 그의 모습을. 

습관처럼 저를 챙기려 들던 쥰의 모습을 떠올린다. 입으론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사랑과 염려를 가득 담아내고 있던 석양같이 노란 눈. 아아. 그런가? 맨몸으로 서로를 안을 때면 입질하듯 살 여기저기를 깨물던 그를 매일같이 혼내며 간신히 못된 버릇을 고쳐놨었는데. 어느새 그게 네 몸에 배어 있던 걸까? 본능처럼.

그제야 히요리는 온몸과 마음을 다해 울었다. 어린아이처럼 소리내어 우는 와중에도 그는 식사를 허락받지 못한 동물처럼 괴로운 듯한 목울음을 내었다. 

***

죽지도 못한 채 죽어있는 너를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히요리는 스스로가 이젠 버티기 힘들 정도로 지쳐있음을 알았다. 다가오는 것은 사람과 좀비를 가리지 않고 공격성을 보이는 주제에 바로 옆에 있는 이 만큼은 물어뜯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 덕분에 누구에게도 공격받지 않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젠 아마도 한계다. 차라리 쥰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면 피곤하지 않고 좋았을 텐데. 그런 바보 같은 생각도 해봤다. 몇 번이고. 

이젠 슬슬 끝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그가 지켜준 덕에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은 다행이다. 히요리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온통 뜯기고 부서진 것만이 즐비한 폐허.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이곳은 아무래도 석양이 지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어디가 좋을까? 아름답고, 이왕이면 추억이 깃든 데다 우리에게 어울릴만한 장소. 가만히 행복했던 시절을 되짚어본다. 장소는 쉽게 떠올랐다. 

"일어나, 쥰 군. 오랜만의 데이트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맞잡은 손을 당긴다. 쥰은 영문도 모르고 몸을 일으킨다. 히요리가 걸음을 옮기는 곳을 따라 비척비척 아무런 말도 없이 걷는다. 이건 예전과 비슷한가? 히요리가 신이 나서 앞장서면 투덜거리는 쥰이 뒤따르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아무래도 그때와는 다르다. 어딜 가냐느니, 사라지지 말라느니, 그만 좀 사라느니 연신 귀찮게 따라붙던 그 아이의 잔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별게 다 추억이 되는군. 지금 잔소리하면 들어줄 생각이 있는데. 

히요리는 흘끔 따라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느리게 걷는 그는 잔소리는커녕 얼굴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못된 아이. 버릇을 잘못 들였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은 도시를 차분히 걸었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기 시작한 이래로 도시는 모든 기능이 마비되었다. 죽음이 내려앉은 거리는 분명 익숙한 길일 텐데도 방향을 잡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차분히 기억을 더듬다 보면 바라는 곳에 당도할 수 있다. 

쥰 군. 그거 말해줄까? 난 기억력만큼은 자신이 있어서 말이지. 사실은 길 같은 거 잃을 줄 몰라. 걱정하고 화내는 네가 웃겨서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었지만. 

한참을 걸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지만 별수 없었다. 애초에 차가 있고 운전을 할 수 있었다 해도 도로 곳곳이 파괴된 이상 차도 제대로 달릴 수 없을 터였다. 길 위에서 쥰과 히요리는 몇 번의 밤과 아침을 맞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히요리는 쥰에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쥰은 묻지 않는다. 그저 말없이, 지친 기색도 없이 꼭 맞잡은 손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익숙한 바다다. 이곳만은 기억하는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기억보다 더 아름다워졌는지도 모른다. 쌓인 피로가 바닷바람에 조금이나마 쓸려가는 기분을 느끼며, 히요리는 신발을 벗었다. 맨발에 감겨드는 모래알은 퍽 오랜만이다. 

"쥰 군, 기억하지? 내가 인어공주가 됐던 곳이네!"

함께 휴가를 보냈던 곳. 모래사장을 뛰어다니기도 하고, 서로에게 물을 뿌려대며 심술을 부리기도 하고, 밤바다를 구경하다가 처음 보는 아이에게 인어공주라는 별명을 받기도 했던 곳. 석양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곳이었으므로, 이곳이야말로 해가 지기엔 최고의 장소다. 히요리는 오랜만에 아주 뿌듯한 웃음을 온 얼굴에 걸었다. 여기야! 역시 내가 고른 곳은 틀리는 법이 없네! 

그 순간 발끝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본다. 커다란 유리 조각이 어느새 발을 할퀴어 놓았다. 발바닥에선 붉은 선혈이 철철 흘러 하얀 모래알을 적신다. 완벽하군. 좋은 걸 발견했어. 히요리는 붉어진 유리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분홍색 조개껍데기를 주웠던 기억이 있다. 

아직 태양이 찬란히 빛난다. 시간은 충분하다. 히요리는 쥰을 끌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발로 해변 여기저기를 걸었다. 마침내 가장 보드라운 모래가 깔린, 이따금 몰려오는 파도가 발끝을 적시곤 하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잡은 손을 잡아당기면, 쥰은 역시 순순히 히요리의 곁에 앉았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래도 좋다. 히요리는 멋대로 그의 품을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여전히 손은 꼭 붙잡은 채로. 

"해달라고 해봤자 또 말을 듣지 않을 거지? 어쩔 수 없는 아이네."

유리 조각을 높이 들어 살폈다. 날카로운 끝이 햇빛을 받아 무시무시하게 빛난다. 살을 뚫기엔 충분하지만, 목숨을 단 번에 끊어내기엔 부족할 거다. 아프겠네. 아픈 건 싫은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히요리는 유리 조각의 끝을 제 몸 여기저기에 갖다 대어 보았다. 어디가 좋을까? 가장 아름답고 고통스럽지 않게 죽을 수 있으려면. 

"으..."

"안 돼! 얌전히 있으라고 했네! 아, 정말. 난 이렇게 버릇없는 아이로 널 키운 기억이 없는데."

목의 정중앙에 유리 조각을 가져간 순간 쥰이 온몸을 바르작거리며 목울음을 울었다. 이제까지 얌전하게 굴어놓고, 왜 또 중요한 순간에 말을 듣지 않는지 모르겠다. 호되게 타박하니 효과가 있기라도 하듯 그는 다시 얌전해졌으나, 기이한 목울음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목은 싫다 이건가? 하긴. 여긴 안 되겠네. 너랑 오래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쥰 군. 인어공주의 결말을 알아?"

대답이 없다. 모르는 모양이지? 바보 같기는. 친절하게 알려주기로 했다. 히요리는 유리 조각을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제 배에 찔러 넣었다. 구토 같은 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사랑을 이루어내지 못한 인어공주는 스스로를... 칼로 찔러 목숨을 끊거든."

붉은 선혈은 순식간에 옷을 적신다. 히요리는 마구 떨리기 시작하는 몸을 애써 가누며 고개를 들었다. 태양은 저 멀리서 파도와 가장 가까운 곳을 향해 내려앉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왕자의 행복을 빌었다는 이야기가 있네."

그는 여전히 말이 없다. 목울음조차 멎어버렸다. 동공이 텅 비어버린 노란 눈동자만이 히요리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은 아무것도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제 품에서 꺼져가는 불씨조차도. 

"동화 같은 결말이네. 난 무척 마음에 들어. 난 역시 인어공주보단 인어왕자 쪽일테지만."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렸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죽음이란 건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오는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왕이면 눈을 감기 전에 노을을 보고 싶다. 감기려는 눈을 애써 밀어 떴다. 그 와중에도 히요리는 쉼 없이 말을 이어갔다. 인어공주 이야기. 그날 바다에서의 데이트 같은 것들에 대해서. 그에게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비록 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태양은 빠르게 저물어간다. 붉은 선혈을 닮은 빛이 온 하늘을 비춘다. 히요리 주변의 모래밭 역시 하늘과 같은 빛을 띠었다. 석양이 진다. 하늘에서도, 땅 위에서도. 

타들어 가는 듯 강렬한 석양이 빠르게 물러나며 어둠이 몰려온다. 히요리의 눈도 점점 버티기 힘들 정도로 무거워졌다. 때가 다가오고 있다. 볼품없이 앓는 소리를 내지 않아 다행이다. 이건 귀족으로서의 긍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품 있을 것. 허황한 고집이지만 모든 것을 잃어가는 지금은 무엇 하나라도 더 지키고 싶다. 

아무런 말도 없이, 마치 정말로 죽어버린 것처럼 얌전히 고개만 숙이고 있는 쥰을 바라본다. 심하게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쓸었다. 손끝에 묻은 핏물이 쥰의 뺨을 더럽힌다. 그제야 그는 마치 아직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눈동자를 움직였다. 천천히 히요리의 눈과 마주친다. 역시 네가 나빠. 날 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지만..."

입에선 꼴사납게도 쉰 목소리가 난다. 목을 가다듬어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아 포기했다. 어차피 더는 목소리를 낼 기력도 없었다. 잠시 이곳에서 얻었던 별명을 되뇌어본다. 웃음이 나왔다. 

"네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 아쉽네."

속살거리듯 작아진 목소리는 파도에 부서지듯 허공으로 사그라들었다. 

쥰의 뺨을 연신 쓰다듬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진다. 꺼져가는 목소리로도 쉼 없이 이어지던 말도 잠잠해졌다. 그러나 그리움이 담긴 시선은 여전히 쥰을 향해 있었다. 마침내 바다 깊숙한 곳으로, 마치 파도에 잠식되듯이 태양은 사라지고 어둠이 온 세상을 뒤덮을 때까지도 줄곧. 텅 비어버린 동공은 쥰과 비슷한 빛을 띠었다. 너와 하나 되겠다는 바람을 이루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점점 더 깊숙한 곳까지 밀려오는 파도는 어느새 둘의 발과 다리까지 적시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미동도 없던 쥰이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눈치챌 수 없을 만큼의 작은 움직임이어서, 이것이 그의 의지로 인한 움직임인지, 아니면 그저 바람에 쓸려버린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텅 빈 눈은 붉게 물든 백사장을 향한다. 히요리의 배부터 다리, 발끝의 저 아래까지 붉게 퍼진 선혈은 파도에 번지며 아름답게 나풀거렸다. 바다를 자유로이 헤엄치려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짐승의 울음밖에 낼 수 없는 그는 제 손 마디마디에 옭아맨 손을 좀처럼 놓지를 않았다. 

그저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처럼, 그는 더 움직이지 않는다. 아주 작은 빛조차 사라지고 마침내 파도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깊은 어둠에 둘러싸일 때까지도. 

해는 뜨고, 사라지는 것을 반복한다. 몇 번이고 빛과 어둠이 바다에 번갈아 내려앉을 때까지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반짝이는 모래사장 위로, 태양은 마치 모든 볼품없는 것들을 말려 없애기라도 할 것처럼 강렬하게 내리쬔다. 오가는 파도는 모든 것을 부수고, 바다로 끌고 들어간다. 마침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변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까지. 

-end.


  • ..+ 4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