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른] 쌍방구원은 정략결혼의 약혼식부터

[케이쿠로] 쌍방구원은 정략결혼의 약혼식부터 - 06

피어나는 불안과 최악의 재회, 숙청의 씨앗

  • 매번 마음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이 엄청 느리지만 꾸준히 쓰고 있어요 느긋하게 기다려 주세요~

  • 24.07.07 내용 일부 수정

  • 이 글은 포타와 동시에 올라갑니다.

  • 이 시리즈는 전개에 따라 제목의 커플링 표기가 바뀔 수 있습니다.

  • 쿠로와 레이와 소마와 에이치가 여자입니다! 용납 할 수 없는 분들은 뒤로가기~


"이번이 첫 인사지, 키류 자작? 난 레이 사쿠마. 사쿠마 공작의 첫째 딸이지. 한 곡 같이 추지 않을래?"

"네?"

온 몸으로 분노를 뿜어내다 말고 이해 할 수 없는 말을 들은 쿠로는 화를 내던 것도 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드레스를 입은 영애분에게 춤을 신청받으니 그저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레이의 표정이 당당해서 더 당황스러웠다. 사교댄스는 남녀 파트가 완전히 나누어져 있어서 여자 둘이서 춘다는 생각을 쿠로는 해본 적도 없었다.

여기 오기 전에 소마랑 한번 연습은 했지만 사교 회장에서도 이러는지는 몰랐기에 일단 고개를 돌려보니 광장 쪽에 여여 조합이나 남남 조합으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그래서 불가능한 일이 아니란 건 알았으나 방법을 전혀 모르니 일단 거절하기로 하고 쿠로는 단단히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옷을 정리했다.

"실례지만 레이 공작 영애, 곧 시작될 세 번째 댄스 타임에 선약이 있어서, 그건 어려울 것 같군요."

"하하, 저 분위기라면 제때 올 수 있을지 의문인데? 게다가 두 번째 댄스 타임은 아직 반이나 남았다고?"

그렇게 말하며 가까이 얼굴을 붙인 레이는 쿠로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춤이 걱정되는 거라면, 신청한 쪽이 남자 파트를 맡는 게 예의니까. 그 소리에 쿠로는 케이토를 한 번 더 쳐다봤다. 그랬더니 아직도 황태자랑 바짝 붙어서 뭔갈 속삭이고 있길래 쿠로는 레이의 제안을 받아 들이기로 했다.

레이가 남자 파트를 맡아준다니 춤이 안 맞을 걱정도 없고, 케이토는 여기보다 급한 일이 있는 듯하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쿠로는 레이의 리드에 맞춰서 광장에서 같이 춤을 추었다. 그런데 춤이 시작되니 재미있는 것을 찾은 듯한 장난기 많아 보이던 표정이 날카롭고 냉정하게 확 바뀐 레이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순진무구한 타입으론 안 보이는데, 아까 말하는걸 보니 걱정되서. 케이토의 말을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아."

"?! 케이토를 제법 편하게 부르시네요, 레이 공작 영애."

"아, 당연하지. 어렸을 때 몇 번 같이 놀고 그랬거든. 그리고 키류 자작이 오기 전까지는 케이토 녀석이 끈질기게 약혼해달라고 달라붙기도 했고."

"... 케이토에게, 약혼을?"

"그래, 평소엔 저렇게 황태자한테 찰싹 달라붙어서 나는 신경도 안 쓰더니 황태자 저하가 부마로 딴사람을 툭 지명하니 앞날이 캄캄했나 보지 뭐."

"하, 저렇게 있는 일이 자주 있는 일이란 거지?"

거의 척추 반사급으로 툭 튀어나온 쿠로의 헛웃음에 오히려 레이가 놀랐다. 한동안 끈질기게 약혼을 신청하던 케이토가 갑자기 다른 사람과 약혼했다기에 와 봤더니, 갑작스러운 자작위 복귀로 논란이 많았던 쿠로가 케이토에게 딱 붙어 있는걸 보고 레이는 케이토가 생각하는걸 대강 눈치챘다.

그런데 쿠로가 케이토 뒤에 숨어서 거의 말을 안 하질 않나, 뭐 하나 있을 때마다 일일이 케이토에게 보고하질 않나, 혼자 있으니 몰려온 사람들 질문 공세에 케이토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쩔쩔매고 있질 않나, 완전히 이용당하는 게 아닌가 걱정되어 말을 붙였더니 툭 튀어나온 반응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처음 레이가 본 쿠로의 표정은 주변 사람 하나하나의 반응을 신경 쓰는 만큼, 어딘가 겁을 먹은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레이의 눈앞에 있는 쿠로의 표정은 겁을 먹기는 커녕 레이를 당당히 마주 보며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탐색하는 듯했다.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었지만, 아무래도 이쪽이 쿠로의 원래 성격인 듯했다.

레이는 케이토가 제대로 바보짓 하는 게 선명히 보여서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런 사람한테 사정 설명도 안 해주고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하다니, 자충수도 정도가 있지. 레이는 지루했던 건 맞아도 이런 사건을 바란 건 아니라서 짜증이 났었지만, 쿠로의 반응을 보니 생각보다 재밌어 질 것 같아서 자연스레 웃음이 났다.

"뭐 그렇지. 근데 별로 충격받은 얼굴은 아니다?"

"거짓말인 건 알고 있었으니까. 알면서 그럴듯하게 맞춰준 거야. 나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하하,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 같네. 안 믿으면 내가 받은 케이토의 편지들을 보내줄 생각이었는데. 내가 키류 자작을 많이 얕본 모양이네."

"권력다툼을 귀족들만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게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

"그래, 그 정도면 걱정할 필요 자체가 없겠네. 케이토 한테는 적당히 잘 말해둬라. 우리가 친한걸 알면 케이토가 쓸데없는 짓을 더 벌릴지 모르니."

"그래, 더 대화 할 일이 없기를 빌어."

"이쪽도."

말은 아무렇지 않게 했지만, 쿠로는 레이가 하는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당당히 저리 말하니 진짜인 거 같기도 했고, 잘 상상이 안 가서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쿠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로 했다. 분위기상 여기서 기 싸움에 밀리면 나중에 꽤 힘들어질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던 탓이었다.

게다가 지금 쿠로는 이런 것보다는 소마가 해 준 조언이 영 이상한 곳에 도움이 된 게 더 신경 쓰였다. 빙글빙글 도는 안무가 많고, 자리 이동이 빈번하다 보니,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엿듣는 건 불가능하고, 엿듣기 위해서 따라 오는건 티가 바로 나므로, 댄스 타임에 케이토랑 둘만 있다는 듯이 즐기고 오라는 조언이 케이토의 뒷담을 편히 듣는데 쓰인 게 영 찜찜했다.

그런 복잡한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쯤, 두 번째 댄스 타임이 끝났다. 레이와 쿠로가 멈춘 자리는 뷔페의 고기 요리 부분 앞이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며 인사하고 가는 레이에게 형식적으로만 답한 쿠로는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물 한잔을 받아 한 번에 들이켰다. 그 사이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케이토가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왔다.

"쿠로, 약속대로 세 번째 댄스 타임을 함께하러 왔다."

"... 그래 물론이지, 케이토."

서로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케이토와 쿠로는 손을 맞잡고 광장으로 향했다. 세 번째 댄스 타임의 노래는 둘의 분위기랑 안 맞을 정도로 발랄하고 빠른 탬포의 곡이었다. 통상적으로 이런 곡은 잘 안 나오는 편이라 다들 당황한 사이, 이게 흔한 일이 아닌지 잘 모르는 쿠로만 덤덤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런 쿠로의 모습에 불안이 조금 가신 케이토가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춤을 이끌었다. 그렇게 둘이서 춤을 추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도 노래에 맞춰서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광장을 돌았다. 적당히 분위기가 올라온 것을 확인한 케이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쿠로, 꽤 빠른 템포인데도 잘 따라오는군. 따로 배운 건가?"

"응? 아, 사교댄스? 어... 뭐, 조금."

"호오, 약혼식 이전부터 알고 있던 걸까?"

케이토의 그 물음에 쿠로는 살짝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솔직하게 답을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레이의 말처럼 케이토가 여기저기 추파를 던지고 다니는 바람둥이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럼에도 레이의 말 처럼 케이토를 온전히 믿고 의지할 마음은 더 들지 않았다.

만약 레이와 말을 하기 전이라면 솔직하게 답을 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 슈랑 같이 배운 것이라고. 아직 쿠로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시절, 이츠키 후작의 막내, 슈 이츠키는 종종 쿠로의 집에 몰래 놀러 오곤 했었다. 쿠로의 어머니가 만드는 옷이 좋다며 자기도 그런 옷을 만들고 싶다고 대뜸 찾아온 귀족 도련님을 쿠로의 가족들은 쫓아내기는 커녕 비위를 맞춰 주어야 했었다.

저택에 부르면 언제든 가야 했고, 집으로 찾아오면 언제든 대접해 주어야 했었다. 쿠로의 어머니가 그렇게 이래저래 불려 다니면서 자연스레 슈와 쿠로가 얼굴을 보는 일이 많아졌고, 동갑내기인 둘은 자연스레 친해졌다. 부모님 몰래 둘이서 놀러 나가기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었다.

그런 와중, 사교회를 위해 춤을 연습해야 하는데 연습 상대가 다 어른이라 자세가 안 나온다는 이유로 쿠로는 슈의 연습 시간에 어머니만큼 여러 번 슈의 저택에 불려가곤 했다. 그리고 거의 생초보 둘이서 서로의 발을 밟아가며 슈의 가정교사의 지시대로 연습한 사교댄스였다.

이정도로 슈가 쿠로를 찾으니 쿠로를 슈의 전속 메이드로 데려오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슈가 그건 또 싫다고 고집을 부려서 쿠로는 늘 숨어서 후작가를 드나들어야 했다. 슈의 고집을 말릴 수 없었던 이츠키 후작 부부는 적어도 쿠로가 저택에 드나들던 것을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틀어막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케이토에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쿠로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황태자랑 잘 붙어있던 건 다른 영애 영식들도 그리 말했으니 레이의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나 쿠로가 오기 전까지 레이에게 약혼을 신청한 건 사실일까. 다른 영애 영식들이 별 말 없었으니 몰래 한 걸까, 거짓말일까. 아니면 명색이 약혼자라고 말을 안 한 걸까.

자신에게 약혼을 신청한 진짜 이유를 케이토에게 굳이 캐묻지 않았지만, 밝힐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 중인 쿠로는 케이토의 눈을 다시 바라보았다. 상점가에 옷감을 사러 갔던 그날 흩어졌던 걱정이 다시 몰려왔다. 케이토에게 버려지면 쿠로가 있을 곳은 없었다. 심지어 도망갈 곳은 아까 자신의 손으로 틀어막고 왔다.

"아는 언니들에게 배웠어. 저쪽에 사교회를 위해서 움직이는 웨이터나 요리사, 오케스트라 단원들, 그 외 여러 시중드는 사람들. 저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

"...?! 누구?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 거지, 쿠로?"

"형제자매가 많은 집에 일찍 태어나면, 나가서 돈을 벌기 위해 귀족 집안에 사용인으로 들어가는 게 대부분이야."

"...?"

"종종 사교회를 위한 춤을 연습하면서 나이가 비슷한 사용인에게 상대역을 시키는 경우가 있더라고. 어른이랑 하면 자세가 안 나와서 힘들대. 그래서 춤을 아는 언니들이 있었어."

"그렇군. 어릴 때 하는 연습은 사용인들과 하는 일이 종종 있지. 그래서 춤을 아는 사용인들도 꽤 있고. 후후, 독특한 인맥이군."

"뭐, 어머니도 종종 불려가니까 그 사교회라는게 궁금해서 물어보니 가르쳐 줬어."

"그래, 이제야 앞뒤가 맞는군. 그런데 쿠로, 사용인이 될 생각이 있었던 건가?"

"뭐, 조금은. 권유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우리 집을 이을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거절했었어. 근데 이런 방식으로 사교회에 올 줄은 몰랐네."

"하긴, 그건 그렇겠군."

"그럼 다음은 내 차례. 황태자 저하랑 무슨 이야길 한 거야? 제법 심각한 이야기 같던걸?"

"으응?"

별일 아니었다고 안심하고 있던 찰나에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케이토는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빨리 확인을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질문이 올 줄 몰랐던 케이토는 제법 난감했다. 에이치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사실대로 말 할 수도 없고, 심각한 이야기 같다는데 가벼운 일상 이야기로 얼버무릴 수도 없었다.

심지어 케이토는 지나치게 당황한 나머지 가뜩이나 빠른 템포의 곡에서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그 탓에 그만 화려하고 눈에 띄게 휘청거렸다. 케이토가 이렇게 놀란 모습에 쿠로는 더 놀랐다. 가볍게 화제를 돌릴 생각이었는데 저렇게 당황해서 허둥거리고 있으니 황당하기까지 했다.

정말로 황태자 저하랑 뭔가 있는 걸까?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쿠로는 제대로 불안에 불이 붙어 어쩔 줄 몰랐다. 그렇게 허둥대는 쿠로를 보고 반대로 진정한 케이토는 평소 받은 교육 덕에 순식간에 표정을 정돈해 내고 다시 정박으로 쿠로를 이끌며 바로 사과했다.

"쿠로, 실례했다. 드문 실수를 했군. 다치진 않았나?"

"어? 어어, 잠시 휘청거린 게 다니까. 괜찮아."

말은 괜찮다고 하는데 그리 안심한 표정이 아닌지라 케이토는 우선 쿠로를 달래기로 했다. 댄스 타임 도중에 발을 헛디뎌서 휘청거리다니, 최소 삼 년은 갈 놀림거리가 생긴 게 쿠로의 마음에 안 드는 것이라 넘겨짚은 케이토는 필사적이었다. 아까 에이치랑 대화하느라 쿠로가 귀족들에게 그 가짜 약혼이유를 말한 것을 몰랐던 케이토는 아직 불안했다. 쿠로가 억지로 웃는 게 눈에 보였다.

"쿠로, 많이 화났나? 쿠로의 첫 사교회인데 발을 헛디디기나 하고, 정말 미안하다."

"아니, 다친 것도 아니고 이 정도로 뭘."

"그리 억지로 웃지 말고,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을 말해다오. 이번 건은 명백한 내 잘못이니 쿠로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뭐든 해주마."

"으응..."

"정말로 뭐든 해 주겠다. 우선, 알고 싶은 건 에이치 저하와 한 대화 내용이 맞나?"

"어, 응."

"사실, 에이치 저하의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으신 거 같다. 아까 첫 번째 댄스 타임에도 중간에 그만두셨고. 이 사교회, 중간에 중지가 될 수도 있다."

"?! 중지?"

어정쩡하게 웃는 쿠로의 얼굴이 깜짝 놀란 얼굴로 바뀌는 것을 보고 나서야 케이토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일단 성공적으로 대화의 주재를 바꾼 듯했다. 사실 케이토와 에이치 사이에는 원체 늘 있는 이야기 이다 보니 가볍게 넘어갔지만, 다른 사람이 보면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그래. 에이치 저하 성격상 끝까지 하려 들겠지만, 주치의들의 판단에 따라 도중에 끝날지도 모른다."

"에이치 저하 몸이 많이 안 좋으셔?"

"아마도. 요 며칠 괜찮은 듯 했지만 또 뭐가 문제인지."

"몸 약하신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중간에 그만두고 가셔야 할 정도인 건 몰랐는데."

"그래, 대중들 앞에서는 강한 척 해도 연설이 끝나면 식이 남아도 먼저 일어나 가버리니 몸 약한 건 다들 알고 있지. 싫을 만큼."

그렇게 말하며 에이치가 있는 쪽으로 눈을 돌린 케이토의 표정은 복잡했다. 걱정, 불안, 초조함에 안타까움까지 뒤섞인 애절한 표정에 쿠로의 눈이 갈 곳을 잃었다. 다른 영애 영식들과 심지어 레이도 케이토가 에이치 저하랑 붙어있던 일은 흔한 일이라 했다. 다른 예절 교육 담당 사용인이나 소마도 케이토가 에이치 저하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던 사람이라 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에이치 저하가 가장 신뢰하던 사람이 케이토라 말했다. 막상 그 에이치 저하가 부마로 지정한 건 케이토가 아닌 와타루고, 케이토와 약혼한 사람은 쿠로 자신이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에 쿠로의 스텝이 점점 느려졌다. 케이토와 자신이 약혼한 건 황태자가 부마를 지정한 이후.

시기상 그럴 수 밖에 없었지만 어쩐지 그럴듯한 상황에 쿠로는 케이토와 마주 보고 있기 힘들어졌다. 일단은 케이토의 어깨에 있는 견장을 보면서 진정하려 했지만, 반 박자 늦어진 스텝 탓에 케이토와 쿠로의 발이 툭 닿았다. 그제야 동작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쿠로가 급하게 다시 정박자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케이토가 놀란 눈으로 쿠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고서야 쿠로는 약혼자 앞에서 잡생각을 너무 길게 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게다가 오늘 내내 케이토랑은 춤의 합이 영 맞지 않았다. 춤이 계속 어긋나면 잔소리가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법 긴장한 쿠로에게 케이토의 상냥한 말이 와 닿았다. 

"쿠로, 잠시 쉴까? 표정이 좋지 않다."

"응? 그래도 돼?"

"안될 건 없다, 쿠로. 여기서 잠시 빠지자."

그렇게 광장을 빠져나왔지만, 사교 회장인 만큼 따로 앉을 곳이 없어서 쿠로는 장식용으로 세워진 기둥에 기대 섰다. 그리고 목이 마르다며 일부러 케이토에게 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케이토는 제법 당황스럽고 꺼림칙한 얼굴이었지만 우선 알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 덕에 잠시 혼자 있게 된 쿠로는 바로 억지웃음을 지우고 미간을 손으로 눌렀다.

처음 약혼자를 결정했다며 아버지께 통보 아닌 통보를 받았을 때, 너무 최악의 가정을 한 게 원인이지 않을까. 그 탓에 첫 티파티 때 케이토를 보고 지나치게 안심해버린 걸까. 겨우 일주일 본 사람의 뭘 보고 그렇게 들뜬 건지. 그래, 이유가 있으니까 약혼을 신청하고 저렇게 잘해주는 거겠지. 그래, 그게 다 순수한 호의 일리가.

단상위에 앉아있는 에이치 황태자랑 자신이 닮은 점이라고는 긴 머리 여자라는 점 뿐이었다. 사교회가 시작하기 전에 옆에 있는 케이토가 당황하는 것도 모를 정도로 에이치를 빤히 관찰했지만, 정말 그게 다였다. 하지만 상점가에 떠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바람피우는 남자는 이상한 거에 꽂혀서 바람을 피운다고 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까 와타루를 있는 힘껏 노려본 이유도 납득이 되었다. 아마 에이치 황태자가 대뜸 다른 사람을 부마로 삼으니 겉으로 보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하겠다고 적당히 구해온 거겠지. 왜 굳이 자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케이토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표정이 어두워 질 때마다 유달리 쩔쩔매고, 매번 좀 과한 듯한 친절과 걱정을 퍼부어대는 것이겠지. 나름 정리된 생각에 쿠로는 예절이고 나발이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 가정을 확인할 곳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복잡한 머릿속이 조금 정리되서 편해졌다.

쿠로는 어떻게든 심호흡을 하며 진정하려 했다. 케이토가 돌아왔을 때에도 표정이 어두우면 이번에야 말로 성가시고 귀찮은 녀석 취급을 받을 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 다 제쳐놓고 굳이 자신을 고른 정확한 이유를 몰랐기에 더 불안한 쿠로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형편없는 리드에 지친 모양이군."

"슈?!"

부드러운 저음에 놀라 쿠로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슈 이츠키 후작 영식이 있었다. 계속 먼발치에서 눈이 마주친 듯 마주치지 않은 듯 약 올리는 것처럼 가까이 오지 않고 맴돌던 그 슈 이츠키 후작 영식이 쿠로의 눈앞에서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무려 오 년만의 재회였다. 길면 긴 시간이고, 짧다면 짧은 그 오 년 동안 만나지 못한 탓에 기억 속 사람과 눈앞의 사람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허구한 날 쿠로가 챙겨주어야 했던 떼쟁이 울보가 안 본 지 오 년 만에 날카로운 분위기의 미남자가 되어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분홍빛의 폭신폭신한 머리칼이나 자수정 빛의 시선을 끌어당기던 눈동자가 변하지는 않았다. 아니, 이쪽도 안 본 사이 조금은 더 깊이 있는 매력을 내뿜고 있었다. 불만은 가득하지만 티 내지 않으려 하는 표정도 그대로인 듯하면서 어딘가 달랐다.

쿠로보다 머리 하나 이상 작던 키는 뭘 먹은 건지 쿠로와 정면에서 눈을 마주 볼 수 있을 만큼 컸고, 많이 왜소한 편이었던 덩치는 여전히 선이 가늘어도 충분히 다부지게 자라있었다. 그런 슈를 먼 곳에서 알아볼 수 있었던 건 변하지 않은 헤어스타일과 여전히 버건디와 풍성한 레이스를 좋아하는 듯 입고 온 양복이 자기소개를 해 준 덕분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까이서 보니 변한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서 쿠로는 슈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게다가 뭔가 말을 걸었으니 대답을 해야 하는데, 슈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쿠로는 입만 벙긋거렸다. 그 모습에 슈가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코웃음을 쳤다.

"사교회 매너가 저따위인 녀석과 약혼을 했다고 했다 들었을 때 설마설마 했더니, 너 자신도 그리 매너가 좋지 못하군.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을 할 시간이 있다면 머리에 교양을 채우는 걸 추천하지."

"뭐라고?"

"파혼했다는 소식을 기다리겠다, 키류 자작."

오랜만에 만나서 처음으로 한 대화가 이것이었다. 여전히 정갈한 단어로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데는 도가 튼 슈였다. 한순간이었지만 슈를 멋있다고 생각한 제 머리통을 뜯어버리고 싶어진 쿠로는 있는 힘껏 슈를 노려보았다. 단단히 틀어쥔 주먹이 분노로 떨리고 있었지만, 쿠로는 주먹을 휘두르기는 커녕 차렷 자세로 뻣뻣이 서 있기만 했다.

어린시절부터 밴 버릇이었다. 단 둘이 있을 땐 짜증 나는 소릴 하면 쥐어박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랬다가는 원인제공을 슈가 했었어도 쿠로만 엄하게 혼나서 붙은 버릇이었다. 이 버릇 탓에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와중에 놀랍게도 할 말은 겨우 그게 다였는지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줘서 '키류 자작'이라 불러준 슈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가버렸다. 그 뒤통수에 대고 속으로 욕을 하고 있자, 쿠로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머리 끝까지 화난 이 상황에 갑자기 끼어든 방해에 슈를 노려보던 그 기세로 뒤돌아보니 케이토가 물잔을 들고 있었다.

"?! 케이토?"

"... 그래, 쿠로, 부탁했던 물이다."

"으응, 고마워. 잘 마실게."

케이토와 쿠로는 서로서로 어색한 표정으로 물잔을 주고받았다. 케이토와 눈이 마주친 순간 쿠로의 표정은 풀렸지만, 그런데도 케이토는 놀래서 심장이 유달리 큰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자연스레 케이토의 눈은 아까까지 쿠로와 대화하고 있던 슈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사뿐사뿐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그 뒤태에 별다른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한 케이토는 쿠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 물었다. 그 질문에 쿠로는 물을 마시려다 말고 슈의 행동을 떠올리며 컵을 내렸다.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는 말과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 머릿속 깊은 곳에서부터 부글부글 분노가 끓어오르는 쿠로의 표정에 케이토는 긴장했다.

"몰라, 찾아와서 짜증 나는 말 한가득 내뱉고 갔어. 내가 저 녀석한테 뭐 민폐 끼친 거라도 있어?"

"내가 아는 바로는 없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갔길래 그러나?"

"아니, 귀족들의 뭔 예의 같은 거, 잘 모르는 거 나도 아는데, 나도 답답할 정도로 잘 아는데, 그렇다고 머리에 교양이나 채워 넣으라고 말하는 건 심하지 않아???"

"?! 그런 말을 대놓고 하고 갔나?"

"대놓고 하고 갔으니까 그렇지. 애초에 난 별 말도 안 했는데 갑자기 와서 쫑알쫑알 시끄럽게."

"... 그런가, 알겠다. 많이 기분 나빴겠군. 내가 '처리'해두마, 너무 마음 쓰지 마라."

"... 뭐를?"

"다시는 쿠로에게 그런 험한 말을 하지 못하게 해야지. 내가 따로 손써두마, 쿠로는 신경 쓰지 마라."

케이토의 말과 표정은 상냥했지만, 어쩐지 불길한 느낌에 쿠로는 마른침을 삼켰다. 왠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뭘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려 쿠로가 케이토를 부른 순간, 갑자기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끊겼다. 연주가 중단되어 순간 조용해지자, 사교 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약속한 것 처럼 단상위를 쳐다봤다.

에이치 황태자 저하가 부축을 받으며 단상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황실 근위대 단장이 급히 단상에 올라가 박수를 두 번 치고 긴급 공지를 했다. '황태자 저하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하여 오늘 사교회는 여기서 종료합니다. 다들 근위대의 안내에 따라 움직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 소리에 다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괜한 헛기침을 했다.

당황한 쿠로와 달리, 케이토는 익숙하게 쿠로를 마차가 올 곳으로 안내했다. 한순간에 어수선해진 분위기에 일단 쿠로는 궁금한 것은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케이토와 근위대를 따라 이동했다. 올 때 황태자의 마차를 타고 왔기에 갈 때도 같은 마차로 근위대가 안내해 주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사교회가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