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이바] 관찰일지 시리즈(3부작)

[나기이바] 포식자

욕구불만 이바라


* 6,211자. 

* <관찰일지>에서 이어짐
* 욕구불만 이바라.. 이걸 쓰려는 게 아니었는디..? 


“요청하신 서류……. 여기에 둘게요……?”

“…….”

“…저기, 부소장?”

“…아. 네. 아아. 아! 이거, 미안합니다. 조금 생각을 하고 있어서……. 네, 이리 주세요.”

“…괜찮은 거 맞아요?”

“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신경 쓰실 일이 아니니 걱정 마시고 가보세요.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머뭇거리던 직원이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설 때까지 이바라는 웃는 낯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웃고는 있지만 쏘아보았다는 것에 가까운 눈빛이었으니, 사실상 쫓아낸 것이나 다름없다. 직원이 나가고 혼자가 된 뒤에야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괜찮냐고? 젠장. 전혀 괜찮지 않다. 최근 자신이 몹시 여유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주변에서 살살 눈치를 볼 정도로 겉에 드러나고 있다는 것도. 이게 무슨 추태인지……. 

평정을 찾아야 한다. 부소장에 프로듀서, 에덴과 아담이라는 두 유닛의 멤버라는 모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선. 어깨가 무거운 입장이니 긴장을 놓는 것도,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알고 있는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제 감정 하나 컨트롤하지 못하는 건 사에구사 이바라에겐 드문 일이다. 

‘미치겠네…….’

미치겠네. 미치겠군. 미치겠어. 미치겠다. 어미만 달라진 같은 말을 속으로 쉼 없이 되뇐다. 펜 끝으로 죄 없는 책상이나 노트 위를 툭툭 쳐대면서. 잔뜩 구겨진 얼굴을 도무지 가릴 여력도 없어 이바라는 결국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제기랄. 자신의 감정이 이 지경으로 뒤흔들리는 원인을, 이바라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원인을 안다면 그것을 제거하면 해결될 일일 터.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말처럼 쉽지 않다. 원인을 제거하겠다고 나섰다가 더 큰 폭풍에 휩쓸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치겠네. 대체 어쩌라는 거야? 

“…아. 이바라. 여기 있었네.”

“…네에……. 각하. 무슨 일입니까?”

때마침 원인 제공자가 사무실에 들어선다. 란 나기사.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한 그 얼굴을 원망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며 몸을 일으켰다. 물론, 그는 그 정도론 꿈쩍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해도. 난 이바라가 찾고 있다기에 왔을 뿐이라서.”

“…아. 그랬죠. 다음 아담의 로케이션 일정이 나왔습니다. 촬영에 관한 자료가 많다보니 유선으로 안내하는 것보단 직접 드리는 것이 빠를 것 같아서요.”

“…응. 고마워. 꼼꼼하게 읽어볼게.”

나기사는 건네받은 서류를 찬찬히 훑는다. 서류의 문장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던 시선이 어느 순간 이바라에게 닿는다. 이바라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의 시선을 받았다. 그는 태연함을 넘어 즐거워 보이는 눈을 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괜찮아?”

“당신 눈엔 괜찮아 보입니까, 이게?”

“…뭐어. 아닌 것 같아서 물어본 거지만.”

즐겁다는 듯 웃는다. 그것이 이바라의 성질을 몹시 돋구는 일인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그는 개의치 않는 모양이다. 이바라의 미간이 더 구겨져 들어갔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난 기다리고 있으니까.”

“필요…없어요.”

평온한 미소가 걸려있는 입꼬리를 노려본다. 여전히 태연한, 그래서 이바라의 속을 박박 긁어대는 그가 이바라를 향해 손을 뻗는다. 무심코 한발 물러났으나, 나기사는 그마저도 이미 계산에 있었다는 듯 너무나 손쉽게 이바라의 뺨을 쥐었다. 안경 안쪽으로 파고든 엄지 끝이 이바라의 눈가를 천천히 쓸며 관자놀이를 어루만진다. 이바라는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채. 

“…너무 그렇게 눈에 힘을 주면 금방 피로해질걸.”

“…….”

“…내가 미워?”

“예. 몹시 거슬리는군요.”

“…그렇군. 하지만 싫지는 않지?”

“하?”

평온하고 태연하고 정돈된, 그래서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그래서 지금은 더더욱 속을 뒤틀리게 만드는 그의 얼굴이 다가온다. 이마를 맞대었다. 이상하리만큼 긴장된 몸은 그 느리고 노골적인 움직임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바라가 말했잖아.”

한층 더 작아진 속삭임이 귓가에 스며든다. 숨결이 간지럽게만 느껴져 이바라는 저도 모르게 작게 몸을 떨었다. 퍽 사랑스럽다는 듯 제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소름이 돋는다. 

지나치게 가깝다. 이대로 집어삼켜지는 게 아닐까?

“…이바라는 사랑이… 거슬리고 방해된다고.”

“좋을 대로 해석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그래? 이건 그저 내 오해인 걸까?”

그의 웃음이 더욱 깊어진다. 몸까지 숙여가며 이바라와 이마와 눈을 맞추던 나기사는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고개를 움직여 이바라의 귓가에 입술을 댄다.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좇는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포식자의 송곳니를 눈앞에 둔 채 온몸이 얼어버린 먹잇감이 된 것처럼. 

이대로 집어삼켜지는 게 아닐까? 

“…그럼 왜 밀어내지도 못하는 거지?”

“……!”

정곡을 찌르는 그 말에 퍼뜩 놀란 이바라가 그제야 나기사를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손목을 낚아채는 커다란 손에 막혀 그마저도 불발이다. 작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바람처럼 스며들어 온다. 뺨과 손목을 붙들리고 포식자의 송곳니 바로 앞에 허연 목을 드러낸 이바라는 이번에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숨 막혀. 숨이 막힌다. 감히 숨을 쉴 수 없다. 이대로 집어삼켜지는 게 아닐까? 정말로. 이번에야말로. 

“…귀여운 이바라.”

“…윽…….”

“…응. 사랑해. 아직 난 기다리고 있어.”

나기사의 입술이 닿는다. 이바라의 입술 위로. 찍어 누르는 듯 깊이. 이바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먹힌다. 먹혀버리고 말 거다. 이번에야말로. 

그러나 나기사는 너무도 쉽게 이바라를 놓아준 채 뒤로 물러난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더운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막힌 숨이 터졌다. 이바라는 그제야 자신이 여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으로 제 목을 더듬었다. 이번엔 제 목을 조르는 손길이 전혀 없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나기사는 어느새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서류를 집어 든 채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선다. 바보같이 바라만 보다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원망을 내뱉었다. 계산이라곤 전혀 되지 않은, 충동적인 행위다. 

“당신은 뭐가 그렇게 여유로운 건데?!”

그는 이 갑작스러운 억지에도 쉽게 붙들려 준다. 조용한 발걸음이 멈췄다. 

“기다리는 게 힘들다느니 어쩌니 잘난 듯이 겁박할 땐 언제고……! 사람을 갖고 노는 게 그렇게 즐겁습니까?!”

“…음……. 뭐 어느 정도는 즐기는 것도 맞긴 하지만. 그래도 이쪽은 이쪽 나름대로 괴로운 것도 사실이야.”

돌아보는 그의 눈빛은 교활하다. 

“…내가 참지 못하고… 먹어버렸으면 좋겠어?”

이바라는 입술을 물었다. 저 맥락도 없는 도발에 어째선지 아무런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나기사는 이바라를 돌아보며 천천히 도리질 친다. 고개가 움직일 때마다 같은 리듬으로 살랑거리는 머리칼이 시선을 뒤흔들었다. 

“…그건 안되지. 그야 나도 바라는 바긴 하지만,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나도 나를 전부 보여줬으니까, 이바라도 그래 줬으면 좋겠어.”

“후회…할 거예요.”

“…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

“…이건 꼼꼼하게 읽어볼게. 자료 고마워, 이바라.”

이번에야말로 나기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가분하게 사무실을 나섰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는다. 뭘 긴장하고 있는 거지? 뭘 바보같이 휘둘리고 있는 거야? 놀리지 말라고,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휘휘 내저으며 무시하면 될 일이 아니던가. 

냉정해져야 했다. 나기사가 갑작스레 뒤흔들고 간 이후 이바라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슬아슬하게 현재를 유지하고 있던 끈을 그가 잘라냈다. 이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회피할 수는 없다. 나기사가 포기하게 만들거나, 이바라가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다. 

“아……. 으, 젠장…….”

무너져 내리듯 자리에 앉는다. 최근 일을 닥치는 대로 끌어와 처리한 덕분에 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바라의 눈은 계속 제 업무 책상과 태블릿 따위를 어수선하게 맴돌았다. 그러나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짜증으로 덮어둔 초조함이 고개를 쳐들고 이바라를 삼킨다.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 안절부절못하는 손.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선. 자꾸만 배배 꼬이는 몸. 쿵쾅거리는 심장.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 밭아지는 호흡. 요 며칠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초조함의 원인을, 격동하는 감정의 원인을 이바라는 잘 알고 있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외면하려 애썼다. 저 자신의 추잡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뭘… 흥분하고 있는 거야…….”

안에서 치솟는 무언가를 틀어막으려는 것처럼 이바라는 온몸을 있는 대로 웅크렸다. 그러나 아래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기분 나쁜 열감은 도통 막을 수가 없다. 스스로를 포박하듯 다리 사이에 손목을 짓이기듯 잡아 누른 채 눈을 질끈 감는다. 진정해. 진정해, 제발. 진정해라. 머리를 차분히 가라앉히려 애쓴다. 그러나 진정하려 애쓸수록 머릿속엔 그때의 기억이, 감각이 선명하게 새겨진다. 

이바라는 저도 모르게 한 손을 빼내어 제 목을 더듬었다. 선명해진다. 목을 조르는 손아귀의 힘. 그리고 눈앞에서 제 온몸을 핥아내듯 번득이던 적갈색의 눈. 짜증 나리만큼 여유롭게 호선을 그리던 입꼬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빚어 만든, 신의 조형물과도 같은 그가 자아내는 아우라. 이바라가 자진해서 떠받들고자 했던, 자신이 완성하려 했던 신의 모습. 그 모든 것들이 이성적인 사고를 좀먹는다. 

숨이 막힌다. 크게 한숨을 토했다. 온몸의 기능이 마비되어 버린 것 같다. 잡아먹힐지도 모른다고? 이미 먹혀버렸는지도 모른다. 

젠장. 젠장, 젠장. 끝도 없이 욕설을 중얼거린다. 자신의 말 같지도 않은 신체 반응에 넌더리가 난다. 상대에 대한 배려라곤 전혀 없이 포악하기 짝이 없는 그의 행위에 자신은 왜 욕정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목이 졸리고 모욕당해 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미쳤군. 욕구불만인가? 

그저 제때 욕구를 분출하지 못해 몸이 제멋대로 날뛰는 거라면 대강 자극이나 주고 빼면 그만일 테지만, 애석하게도 그럴만한 환경조차 되지 못한다. 늘 사람에게 둘러싸인 채 일을 마치고 나면 돌아갈 곳은 또한 타인이 셋이나 있는 기숙사 방. 간혹 지금처럼 홀로 있을 기회가 생겨봐야 언제든, 누구든 오갈 수 있는 데다 곳곳에 CCTV까지 있는 공용 공간. 게다가…….

“…완전… 미친 새끼 아냐……?”

저 스스로 무릎 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충성할 테니 힘을 달라 빌었던, 갖은 공을 들여 빚어놓았던 그를 상대로 이딴 욕정이라니. 이바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저 자신을 향해 욕설을 뱉었다. 역겹기 짝이 없다. 할 수만 있다면 토악질하고 싶었다. 사에구사 이바라를 향해. 이딴 것 하나 스스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나, 나는? 이바라는 저 자신을 욕하고, 욕하고, 또 욕한다. 

단순한 욕구불만이라기엔 머릿속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떠나질 않는다. 란 나기사. 란 나기사. 빌어먹을 란 나기사. 그가 제 목을 조르며 끊어놓았던 이성의 끈. 그 탓에 날뛰기 시작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외면하고 진정시키려, 이바라는 평소보다 몇 배로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에 매달리다 보면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나기사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시선을 피해 보려 부단히 애써보았으나, 애석하게도 멤버로서, 프로듀서로서, 부소장으로서 그를 보필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 탓에 번번이 실패로 끝이 났다. 

그리고 그는 또 한 번, 가까스로 쌓아 올린 이바라의 이성을 부숴놓고야 말았다. 아주 보란 듯이. 덕분에 이쪽은 한계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기사를 피할 수는 없다. 도망치려 할수록 그는 천천히 허기를 기다리며 먹잇감을 갖고 노는 맹수처럼 제 모든 걸 망가뜨려 놓을 것이다. 퍽 즐거워하면서. 

그렇다면 좋아. 원하는 대로 해주지. 포식자의 배 속으로 기어들어 가야지. 온몸에 독을 품고서. 이빨이 제 몸을 찢고 들어오는 순간 혈관과 함께 독주머니가 터질 것이다. 순식간에 퍼지는 독을 그는 막아낼 수 없으리라. 마침내 그의 숨통을 쥐게 되는 건 내가 될 것이다. 홀로 망가지지는 않으리라. 추잡하게 더러워진 채 함께 지옥에 떨어지는 거다. 

고개를 들었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더미를 집어 든다. 아담의 지방 로케이션 자료. 마침 때가 좋다. 그를 위해 훌륭한 식탁을 차려놓기로 한다. 원래 나기사의 식단 관리는 이바라의 일이니까. 배불리 먹고 식욕을 채운 끝에 독에 취한 채 마침내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길 바란다. 추잡하게 굴러보자고. 이 고고하기 짝이 없는 인간아. 

이바라는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물어뜯었다. 작은 통증과 함께 옅은 피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초조함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 <피식자>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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