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쥰이바]그 농부는 모르는 척을 한다.

CP : 쥰이바

키워드 : 일상, 힐링, 판타지, 현대, 농사

*퇴고없음


무더운 더위가 내라쬐는 5월 중순. 쥰이 수건을 목에 걸친 뒤 헤진 밀짚모자를 뒤집어썼다. 투박한 셔츠와 바지, 그리고 파란색 장화까지 신으니 쥰의 모습은 영락없이 <농부>의 모습이었다. 솔로 아이돌 JUN으로 활동하던 쥰은 모종의 사건으로 은퇴를 선언, 아이돌 활동을 하며 벌었던 자금으로 시골에서 귀농 생활을 시작했다. 이제 1년 차 새싹 농부지만 쥰은 작금의 삶에 만족했다. 농부의 삶은 아이돌과 썩 다른 듯 다르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하는 것이 안무 연습이 아닌 농작물 관리로 변했고, 점심 시간 식사를 하며 가사를 외우던 것은 이제 농산물 관련 책자를 보는 것으로 바꼈다. 저녁까지 밭을 살펴보고 시간이 나면 논두렁에 들린다. 사료를 뿌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쓰라진 벼를 세우러 나가거나 고추 지지대가 부러지진 않았다 살펴보는 것이 쥰의 일상이 되었다. 작년까진 초보 농부라 욕심만 앞서서 이것저것 손을 벌리다 고생 했기에 올해엔 목표를 단촐하게 잡았다.

"고추농사랑 벼농사까진 하겠지만, 고구마는 역시 보내주는 게 좋겠지..."

고추모종을 한참 뚫어지게 보았다. 시장에서 사온 품종 좋다는 고추모종은 50개였는데 귀농용으로 산 트럭이 아니었기에 쥰의 K3 조수석엔 흙부스러기로 가득했다. 뒷좌석엔 비료와 고추 지지대, 그리고 트렁크엔 벼 모종이 실렸다. 쥰의 차는 겉으론 보기엔 일반 승용차였으나 내부를 살펴보면 ... 아까 쥰의 옷차림과 마찬가지로 <농부>의 자차였다. 쥰이 피식 웃으며 고추 모종을 그늘에 치워두었다. 벼는 손수 심기엔 양이 많았고, 시골도 요즘 시대엔 농기계를 많이 이용하였다. 다행히 마을 이장님이 소유한 이앙기가 있어 벼 모종을 전달해두었다. 아마 내일 중으로 논에 벼 모종이 다 심길 터, 자신이 해야하는 일은 어제 경운기로 흙을 한 번 뒤집은 밭에 검은 색 비닐을 뒤집어 씌운 뒤 모종삽으로 구멍을 내고 어제 산 고추 모종을 심어야한다. 50개를 심는 건 간단하다. 100개가 넘어가는 순간부터 지옥이지만.

"... 작년엔 정말 욕심이 과했단 말이지."

젊음이란 치기로 250개의 고추모종을 샀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직업 농부면 모를까 혼자인 초보농부인 쥰은 하하... 힘없는 미소로 검은색 비닐을 쭈욱 당겨서 흙고랑 한쪽을 덮었다. 처음부터 아이돌 활동이 끝나면 귀농을 할 생각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쥰은 그저 열중하고 싶었다. 몸 쓰는 것은 처음부터 그럭저럭 잘했고, 남에게 의존적인 성격은 아니었기에 타지에서 홀로 농사를 하는 것에 거부감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어디까지 홀로 해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비록 첫 시작이었던 작년엔 그 욕심이 과했으나 그럼에도 얻은 수확을 보았을땐 어찌나 가슴이 뛰던지. 마치 무대를 끝낸 뒤의 열기가 떠올랐을 정도였다. 물론 그 뒤 무리해서 한참을 몸살로 앓아누웠지만 금방 털고 일어났다.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손을 부지런히 놀렸더니 이미 밭 고랑에 비닐을 씌우는 일은 전부 끝이 났다. 비닐을 씌우며 양옆으로 흙을 덮어 단단히 고랑에 비닐을 고정시켜뒀다. 삽을 옆에 치워두고 모종삽을 들었다. 삽으로 가운데 부분의 비닐을 주먹 크기로 자르고 흙을 퍼낸 뒤 고추 모종 하나를 심는다. 이때 뿌리가 너무 깊게 들어가지고, 그렇다고 얕게 들어가지도 않게 넣고 퍼낸 흙으로 다시 덮어준다. 미리 준비한 물뿌리개로 물을 뿌려주고 한 걸음 옆으로 이동해서 다시 아까 했던 일을 반복한다. 그렇게 모종을 전부 소진할때까지 반복하면 오늘의 일은 끝이다. 간단한 반복 노동이지만 여름의 초입, 그늘이 아닌 양지 아래에서 일을 하니 땀이 송글송글 이마에 맺혔다. 쥰은 팔토시로 이마를 닦으려다 목에 걸어둔 수건이 생각났다. 아참, 수건을 가져와놓고 팔토시에 이마를 닦을 뻔 했네. 그리 중얼거리며 수건을 덥썩 잡으려다 흙이 잔뜩 묻은 목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하하, 결국 이렇게 되네라며 수건이 아닌 팔토시로 이마를 닦았다. 10시에 시작한 일이었는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흙이 잔뜩 묻긴 했으나 별 수 없어 그 상태로 주머니의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6시였다.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건 딱 시간을 확인한 그때였다.

부스럭, 부스럭.

모종삽과 큰삽을 차 트렁크에 싣고 있으니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짐승인가 싶어 절로 솜털이 쭈뼛섰지만 한편으론 물러날 수 없었다. 쥰은 방금 자신이 하루를 투자해 심은 고추모종을 떠올렸다. 멧돼지가 짓밟기엔 너무 소중한 고추모종이 눈앞에 아른거리니, 살짝 이성의 끈을 놓고 큰 삽을 들었다. 제발 멧돼지만 아니어라, 차라리 고라니라면!

부스럭

아까까진 어디에서 나는지 몰랐던 소리가 이젠 지척에서 들렸다. 쥰은 침을 꿀꺽 삼키곤 소리가 나던 쪽으로 장화신은 발을 내밀었다. 흙밭의 장점은 신발소리가 잘나지 않는단 점이다. 야생동물을 만나면 원래 피해야하지만 이렇게 조우해야한다면! 쥰은 기선제압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큰 소리, 그리고 큰 움직임으로 쫓아내면 되겠지!라며 상완이두근과 대흉근에 힘을 잔뜩 준 채로 눈앞의 풀숲을 삽으로 크게 헤쳤다. 파사삭, 소리와 함께 쥰의 시야에 들어온 건 멧돼지가 아니었다.

"아, 아 ... "

"?"

앓는 소리를 내며 주변을 손으로 마구 훑는 어린아이가 그 자리에 있었다. 몸이 아픈지 잔뜩 웅크린 채로 팔만 휘적이는 아이는 주변의 모든 걸 움켜쥐려는 듯 팔을 천천히 휘적거렸는데, 그 때문인지 팔과 손엔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로 지내는 이 동네는 쥰 자신을 제외한 가장 젊은 청년이 쉰 살이 넘은 마을의 '젊은' 이장뿐인데 누구의 아이지?

"괜, 괜찮아요?"

바른 청년이란 모토를 앞세워 활동하던 JUN답게 어린아이에게도 높임말이 튀어나갔다. 아이는 쥰의 말 소리에 퍼득, 정신이 들었는지 꾹 감았던 눈을 떴다. 입만 뻐끔거리다가 다시 앓는 소리를 내던 아이는 이내 지쳤는지, 아니면 몹시 피곤했는지 웅크린 상태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깜짝 놀란 쥰이 아이를 들어 안았지만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안아든 아이는 몹시 가볍고, 놀라울 정도로 뜨거웠다. 쥰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어린아이는 익숙하지 않았다. 누구의 아이인지는 모르겠으나 두고갈 순 없었기에 아이를 조수석에 앉혔다. 들고 있던 삽은 어디로 던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해가 진 도로를 쏜살같이 달렸다. 시골의 도로는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었고, 숨막힐 정도로 조용했다. 쥰은 운전하던 중간중간 옆을 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는 자신의 체격보다 훨씬 큰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이 정말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종갓집 자제인가?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주변에 어른이 없었다. 이 도련님(옷차림때문에 도련님이 가장 먼저 떠올라서 쥰은 아이를 도련님이라 부르기로 홀로 마음 먹었다.)은 가출이라도 한 건가? 



아이를 안은 쥰이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곤 차로 돌아왔다. 저녁이라 다른 시에 있는 종합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는데, 다행히 사람이 없어 바로 진료가 가능했다. 의사가 말하길, 아이는 몸살이니 크게 걱정하지 말고 푹 쉬게 하면 된다고 했다. 주사와 약을 처방 받았는데 주사의 경우 바로 맞고나니 아이의 표정이 한결 편해보였다. 쥰은 이름도 모르는 이 아이가, 아니 도련님이 어쩌다 그 풀숲에 누워있게 되었을까.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이내 차 조수석에 다시 눕혔다. 경찰서에 들려 실종신고를 접수하긴 했으나 당장 아이를 보호할 곳이 없어 돌아온 곳은 자신의 집이었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가졌던 만큼 재산이 작진 않았다. 귀농을 염두하긴 했으나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싶진 않았기에 나름 갖출 것을 다 갖춘 곳으로 집을 구했다 보니 사자나미 쥰의 집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잘 지어진 집'이었다. 그말은 즉슨, 아이 하나가 더 들어온다고 좁아질 집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도련님'이 입고 있는 옷은 품이 컸기에, 옷을 벗긴 뒤 자신의 가장 작은 티셔츠를 입혔다.

"어라 ..."

이게 아닌가? 바지는 반바지를 입히니 얼추 맞아보였다. 물론 허리는 좀 커보여서 고무줄을 당겨 리본을 묶긴 했지만 아까보단 행색이 괜찮아보였다. 물에 적신 수건으로 도련님의 얼굴을 닦아준 뒤 부엌으로 가, 죽을 끓였다. 아이의 입맛이 어떨지 몰라 무난한 야채죽을 끓였다. 냄새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까의 주사가 괜찮았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쥰의 다리 옆으로 도련님이 서있었다.

"당신, 자신을 어떻게 찾은거죠?"

도련님은 과연 도련님이었다. 독특한 말투를 구사하는 도련님은 그리 말하곤 곧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가 거실 테이블에 올려진 머리끈을 들었다. 단발을 조금 넘을 것 같던 머리카락을 슥슥 묶은 도련님이 다시 쥰의 다리 옆에 찰싹 붙어선 고개를 올려봤다.

"자신의 이름은 이바라입니다. 선대로부터 이 땅의 수호를 명받은 지고하고 지체높은 용의 일족입니다."

이 도련님의 설정은 그런건가? 쥰이 하하 웃으며 죽을 그릇에 떴다. 아이돌로 활동한 기간이 적지 않은 만큼 쥰은 <설정>에 익숙했다. 이 도련님은 그런 설정으로 집에서 떠받들어졌구나~라며 납득한 쥰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도련님, 아니 이바라는 뚱한 표정으로 쥰을 노려보았다.

"제 말, 확실하게 듣고 있는 겁니까? 그러니까 ... 당신. 이름도 못들었습니다만?"

나이에 맞지 않은 말투로 퉁명스럽게 묻는 이바라를 보던 쥰이 아차 싶어 입을 뗐다.

"아,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사자나미 쥰입니다. 이바라, 어쩌다 거기에 있었던 건가요? 주변에 보호자가 없어서 깜짝 놀라서 일단  제 집으로 데려왔지만요. 이건 죽인데 먹을 수 있죠?"

내밀어진 그릇을 한참동안 쏘아보던 이바락 두 손을 뻗어 잡았다. 그 모습에 또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아랫입술을 꾹 깨물어 참았다. 이 도련님은 자신이 그런 사람좋은 웃음을 내보일때마다 괜히 경계하니 참아야했다.

"... 이건 고맙습니다. 원래 그 주변을 순찰하고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만, 질 나쁜 장난에 휘말려서 곤혹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쥰, 당신이 도와준겁니다. 그리고 자신은 보호자가 필요없습니다만? ... 자신은 이미 성인 개체입니다, 보호자가 존재할리 없잖습니까. 쥰의 연령은 어떻게 됩니까?"

"? ... 뭐 말하기 싫다면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요. 나의 연령은 스물 일곱입니다 이바라. 하하, 형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리 불러도 괜찮아요."

"웃기는 소리. 쥰. 내가 성인 개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나이는 백이 넘습니다. 동료 개체중 가장 어리지만, 적어도 당신에게 형이라 부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 죽, 맛있네요."

따박따박 제 할말을 뱉더니 숟가락을 챙겨 테이블에 앉은 이바라가 야무지게 죽을 떠먹었다. 맛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지 이후론 말 없이 죽 그릇에 얼굴을 박을 기세로 퍼먹었지만. 쥰은 자신의 뒷목을 주무르며 이바라의 정수리를 보았다. 와 저러다, 그릇에 얼굴을 박겠는데... 같은 생각을 하며 싱크대를 정리했다. 자존심 강하고 남에게 기대는 걸 싫어하는 저 도련님은 다루기 어려워보였지만 생각외로 칭찬에 그리 인색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도, 맛있다는 말도. 쥰은 괜스레 기분이 좋아서 냄비를 닦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때였다. 싱크대 앞에 달린 작은 창문 유리로 반사된 이바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라? 자신이 구한 건 꼬마였는데? 창에 비친 건 영락없는 성인 남성이었다. 물론 유리 창에 비친 모습은 거리가 멀어, 그리 선명하진 않았지만 놀란 쥰이 퍼득 고개를 돌려 등 뒤의 테이블에 앉아 죽 그릇을 비운 이바라를 보았다. 식사에 만족했는지 뚱한 표정이 사라진 이바라가 만족스러운 듯 혀로 입술을 핥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자신이 구한 꼬마 도련님의 모습이 맞았다.

"?"

쥰이 다시 고개를 바로했다. 역시 창에 비친 것은 성인 남성이었다. 맙소사. 쥰은 얌전히 냄비를 씻은 뒤 걸었다. 쥰은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이 농부는 모르는 척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당장 내일 해야하는 일을 떠올렸다. 고추대를 지지할 막대를 꽂은 뒤 줄로 묶어야한다. 그러니까 지금은...

"모르는 척 하는 겁니까? 쥰. 자주 오겠습니다. 당신이 마음에 드니까요. 또 뵙겠습니다 쥰,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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