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못죽

[큰문] 장마 上

맞짝사랑

2차 by 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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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걸러 하루 오는 비. 박문대는 이 비가 부디 아침이 되기 전에는 멈춰주길 바랐다.

냉장고를 열자 찬 기운이 훅 얼굴로 불어온다. 일요일 저녁의 잿빛 하늘을 가만히 응시하며 그는 김빠진 캔 음료를 땄다.

 

탁. 빈 캔이 책상에 세게 부딪혔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힘을 지나치게 줘 버렸다.

“아 깜짝이야. 문대문대 화났어?”

옆에서 곧장 질문이 날아온다. 시원하게 풀어헤친 교복 셔츠 안 검은 티셔츠. 그 무지 티셔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힘 조절 실패한 거야.”

“난 또 화난 줄. 근데 6모 어땠어?”

“그냥 전이랑 같았는데.”

수학은 조금 더 올랐고 한국사는···어이없는 실수를 했지, 하고 박문대는 생각했다.

“아 진짜? 난 국어 완전 망했는데. 아니 독서가···”

박문대는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이세진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난 이런 애를 왜 좋아하는 거지?’

“···뭐야. 나 뭐 잘못했어?”

정신을 차려보니 이세진의 입꼬리가 멋쩍음과 약간의 황당함으로 부자연스럽게 말려 올라가 있다. 박문대는 뒤늦게 말을 돌렸다.

“이것 좀 버리고 온다.”

그는 손안에서 캔을 구기며 생각한다. 정말이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쓰레기통 속으로 가볍게 던져진 캔과 달리 마음은 그리 쉽게 주인을 떠나지 않는다.

“근데 이건 뭐야?”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긴 손가락이 필기가 빼곡한 줄 노트 구석의 정체 모를 낙서로 향했다.

“흐음······음···개구리? 눈이 엄청 크네.”

‘곰이다.’

누굴 생각하며 그렸는지는 목 깊숙이 삼킨 채 박문대는 별거 아니라며 그림 위에 지우개를 벅벅 문질렀다. 지우개 가루 아래 남아있는 연필 자국은 한동안 이세진의 시선을 붙들었다.

4시 44분. 비는 여전히 퍼붓고 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신발 속을 침범한 비가 기어이 양말을 젖게 만든다. 박문대는 지금,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다음 주 월요일 생윤 수행, 화요일은 화작이랑 사문, 목요일에도······.’

“무슨 수행평가가 끝이 없냐.”

작은 불평은 빗방울과 함께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2주 뒤, 시험 기간에 들어간 반은 비교적 조용하다.

문제집 한편으로 곱게 접힌 쪽지가 날아와 샤프와 볼펜 소리 사이 이질적인 음을 만들어냈다.

-매점 ㄱ?

박문대는 슬쩍 앞을 보았다. 두 자리 옆, 반쯤 몸을 돌리고 꽃받침을 한 채 장난스레 웃고 있는 이세진과 그로부터 네 자리 앞, 비어있는 교탁.

-지금?

빠르게 휘갈겨 대충 두 번 직사각형 모양으로 접은 유선 노트 조각을 튕기듯 건넸다.

돌아온 답변은,

-응.

‘흠···.’

짧은 고민 뒤 몇 자를 다시 썼다.

-그러든가.

쪽지를 펼쳐보자마자 의외였기라도 한 듯 이세진의 눈이 커진다.

교실의 나무 문은 크게 삐걱이지 않고 제법 부드럽게 열렸다. 이세진은 늘 그렇듯 박문대를 먼저 내보냈다.

박문대는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쉬는 시간까지 앞으로 약 15분.

‘어디 보자. 왕복 4층 거리. 매점 가서 뭘 사는 것까지 고려하면···쉬는 시간 시작까지 적당히 여유 있겠네.’

그렇게 익숙한 듯 발을 내디디다 문득 멈칫한 순간, 이미 발은 허공을 밟고 있었다.

빠르게 돌린 시선 아래엔 오늘따라 유독 많아 보이는 계단들이 그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순간, 길고 단단한 무언가가 삽시간에 박문대의 배를 감았다.

“야, 괜찮아?! 내가 다 놀랐네. 걸으면서 폰 보지 말라니까.”

“···어, 고맙다.”

‘그대로 X지는 줄 알았네.’

이세진은 금세 팔을 풀곤 평소의 능글맞은 얼굴로 되돌아왔다.

“손이라도 잡아줄까?”

박문대는 히죽이는 이세진을 무시하곤 그를 앞서 마저 계단을 내려갔다.

‘아··· 진짜.’

팔이 닿았던 아랫배에서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툭, 툭, 슬리퍼가 계단에 부딪히는 박자에 맞춰 심장이 뛰었다.

“같이 가.”

박문대의 뒤통수를 향해 작게 외치며 이세진은 멋쩍게 왼손을 쥐었다 폈다.

매점 안은 습하다. 낡은 선풍기가 탈탈 돌아간다.

비 냄새를 따라 고갤 돌려 보면 철문 밖의 녹음이 더 짙푸르게 번져 있다. 울타리 밖 무성한 수풀들이 당장이라도 그들이 있는 곳까지 뒤덮어 버릴 것만 같아 박문대는 눈앞의 빨갛고 작은 과자 봉지로 시선을 돌렸다.

“항상 그것만 먹네?”

먼저 계산을 끝낸 이세진은 동그란 과자를 우물우물 씹는다.

‘가격 대비 양이 그나마 많은 편이니까.’

박문대는 꽤 질긴 봉지를 이로 뜯고 얇은 과자를 와그작 깨물었다.

“그냥, 이게 제일 괜찮더라.”

 

바스락대는 소리가 정적 속 간간이 흐른다. 입안 가득 씹히는 삼각김밥은 퍽퍽했다.

박문대는 식탁 의자에 앉아 생각한다.

‘내가 언제부터 걜 좋아하게 됐더라···.’

새 학기 마니또에서 이세진을 뽑고 그 애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던 때?

수학여행에서 처음으로 본 사복 차림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때?

시험을 앞두고 혼자 구석에서 울고 있던 그 애를 다독였을 때?

박문대는 곧 생각을 멈췄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부였다. 그 모든 순간, 그는 이세진을 좋아하고 있었다.

한 입 남은 삼각김밥을 내려놓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버거운 일이었다.

창문을 열어놓으니 선선한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것이 왜인지 꼭 오래전 받아왔던 손길 같아서, 박문대는 드물게도 이제 막 어스름이 내린 저녁에 단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지금 있는 곳이 꿈속이란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런 휘황찬란한 꽃밭에 와본 적이 있어야지. 그나저나···자각몽을 꾸는 건 드문데.’

그때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찾았다.

“문대문대!”

아니나 다를까 이세진이 하얀 이를 전부 드러낸 채 긴 팔을 위아래로 크게 휘젓고 있었다.

박문대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저 웃음이 자길 향한 것이라는 사실이 못내 만족스러웠다.

“이것 봐라. 이건 --꽃. 이건 --꽃, 그리고 여기!”

이세진은 곰 인형을 꽃술 위에 얹어놓은 것 같은 꽃을 똑 떼어다 제 얼굴 앞에 대고 히죽였다. 손안에 들어올 만큼 작았던 곰 인형 꽃은 어느새 얼굴보다 조금 커다란 진짜 곰 인형이 되어 있었다.

“멜론 먹을래?”

인형의 배에서 뜬금없이 나온 실한 멜론을 박문대는 일단 받아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세진은 별의별 꽃이 다 자라는 꽃밭을 이젠 아예 조그만 아이 크기가 되어 걸어다니는 곰 인형과 함께 탐색했다.

맑은 듯 희뿌연 듯한 하늘 위에는 태양이 없는데도 날카로운 빛이 쏘아져 오고 있었다. 박문대는 손까지 맞잡은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꿈이라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이건 꿈일 뿐이니까.’

“이세진.”

“응?”

하얀 셔츠가 펄럭이고 짧은 갈색 머리가 밝게 빛났다. 이세진은 평소처럼 가벼운 미소를 띠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좋아해.”

일순간 모든 바람이 그의 답을 기다리듯 멈췄고, 몇 초 후 그는 반짝이는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

눈을 뜨자마자 뒤에서 산만한 빗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박문대는 허겁지겁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바닥은 이미 물로 흥건했다. 재빨리 걸레를 가져와 박박 닦았다.

걸레를 문지르는 동안에도 꿈의 여운은 사라지지 않고 머리카락에, 눈꺼풀에, 입술에 붙어있었다. 비몽사몽한 상태가 아른한 느낌을 심화시켰다.

걸레를 대충 널어놓고 다시 침대에 눕자 꿈의 잔상은 한층 강해졌다. 옆얼굴을 감싸는 보드라운 베개가 그를 더욱 부추기는 것만 같아 결국 충동적으로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

꿈속의 답변을 듣기는커녕 질문조차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래도.

-자냐.

예상외로 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

-아직. 문대문대 잠 안 와?ㅋㅋ

스르륵 입꼬리가 올라갔다.

잡담은 그 후로 몇십 분간 더 이어졌다. 아마 대화 중 잠들어 버린 것 같은데,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꿈도 더 꿨다. 이 또한 내용이 선명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막 잠에서 깼을 때 기분이 어딘가 수상쩍게 좋은 것을 보아 꽤 괜찮은 꿈을 꿨나 보다, 하고 지레짐작했다.

폭우가 쏟아져 내리던 새벽과 달리 창밖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화창했다.

슬프게도 오래간만의 개운한 기상은 얼마 가지 못했다. 박문대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휴대전화 화면을 재빨리 켰다.

이곳저곳에 널린 웅덩이 위에서 찰박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종이 칠 때 문을 세게 밀어젖히며 아슬아슬하게 교실 안에 양발을 디뎠다.

박문대는 아이들의 시선이 쏠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가방을 자리에 턱 내려놓았다. 뛰어오느라 바지 밑단이 많이 젖었다.

“오···문대문대야, 얼굴 먼저 부쳐줄까 바지 먼저 부쳐줄까?”

어느새 옆에 온 이세진이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농담을 던진다.

“얼굴.”

박문대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확 얼굴을 들이밀어 놓고는 흠칫 굳었다. 정신없이 뛰면서 말 그대로 정신이 없어지기라도 한 걸까.

슬쩍 위를 보니 이세진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망할···.’

어색함에 고개가 돌아가려던 때, 이세진이 한 손으로 박문대의 앞머리를 들춰 그 아래 이마에 부채로 바람을 불어넣었다.

‘···!’

박문대는 펄럭이는 부채에 가려져 언뜻언뜻 보이는 이세진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던 자신의 착각이었을까, 떠오르려는 희망을 잡아 누르며 생각한다.

 

이틀 뒤, 이세진은 학교에 오지 않았다.

화면 속 짧은 대화에는 그 원인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감기라.’

학생 하나가 부족한 교실은 이전과 다름없이 시끌벅적하다. 주인 없는 깔끔한 나무 책상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그의 빈자리를 일깨워 주는 듯하다. 바로 옆 창밖은 오늘도 빗소리로 부산스럽다.

 냉한 기운이 얼굴을 사정없이 때린다. 박문대는 저녁거리를 고르기 위해 양손에 편의점 삼각김밥과 일반 김밥을 하나씩 잡고 둘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박문대?”

마스크를 쓴 이세진이 옆의 음료 코너에서 눈이 커진 채 인사를 하다 마른기침을 뱉었다.

“여기서 다 보네. 사복 입은 거 오랜, 콜록, 만이다.”

이세진은 바로 앞에 놓인 바나나 우유를 집어들었다.

뜻밖의 만남에 기분이 좋아진 것도 잠시, 박문대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어, 나도 널 여기서 마주칠 줄 몰랐긴 한데, 감기 걸렸다는 사람이 왜 찬 걸 마셔?”

“응? 아아. 아니~ 이게 적당히 먹고 싶어야 말이지. 가족들한텐 그냥 잠깐 주변 산책 좀 한다고 하고 나온 거야. 비밀로 해 주라.”

이세진은 능글맞게 윙크하며 검지로 입을 가렸다.

박문대는 시원찮아 하면서도 넘어가 준 건지 넘어가 버린 건지 이세진을 끝까지 말리지 못했다.

의자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밀려났다.

“앉아.”

이세진이 의자를 탁탁 치며 반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그거 가지고 괜찮겠어?”

박문대는 한 줄짜리 김밥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넌 저녁이나 먹고 그거 마시는 거냐?”

“나야 집에서 우리 여사님이 든든하게 해 주셨지.”

이세진이 바나나 우유를 쪼록 빨아들인다.

“학교는 언제쯤 올 거야?”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오래는 못 빠지지. 내일까지만 쉬려고.”

“약은 먹고 있냐.”

“당연하지.”

나 없이 잘 지냈냐는 이세진의 물음과 겨우 하루였다는 박문대의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두 사람은 이후 말없이 저녁과 후식을 먹고 헤어졌다.

이세진은 그의 말대로 이틀 뒤 다시 등교했고, 일주일쯤 뒤에는 멀쩡한 모습으로 복도를 뛰어다녔다. 그리고, 어느새 중간고사가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시간 한번 더럽게 빨리 가네.’

책에 파묻혀 죽기 직전인 박문대가 한탄과 함께 긴 한숨을 내뱉었다.

물론 그건 비단 박문대만이 아니라 전국의 고등학생이 느낄 만한 고통이었지만 어찌 됐든 그는 잠시 학교 도서관을 벗어나기로 했다.

길고 좁은 복도를 지나 정문 쪽에서 옆으로 틀어 다시 복도. 쭉 걸어가다 계단을 서너 칸 올라가면 유리문이 하나 있다.

박문대는 문 옆 벤치에 앉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흙과 풀 냄새가 섞인 비 냄새. 어디선가 스테인리스 같은 것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맑게 통통거리는 것이 꼭 어린아이의 발걸음 같아 박문대는 잠시 부슬비의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을 땐 머릿속이 한결 정리되어 있었다. 입구의 에어컨 바람에 머리칼이 가볍게 날렸다.

의자를 꺼내려던 찰나 필기구 옆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물방울이 맺혀있는 차가운 캔 음료.

살짝 젖은 포스트잇에는 ‘화이팅!’이라는 짧고도 간결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박문대는 캔을 집어 들고 조심스레 포스트잇을 떼어내 손바닥 안에 두었다. 억눌러지지 않는 기쁨이 음료수와 함께 뱃속을 가득 채웠다.

‘···화이팅.’

어딘가에서 자신의 응원이 닿았을까 가슴을 졸이고 있을 상대를 위해 그는 속으로 작게 속삭였다.

 

칠판에 적힌 D-X는 점점 다가오는 시험을 알리는 경보음과도 같았다. 수행평가에 시달리지 않는 건 좋았지만 하루 종일 자습만 하는 건 그것대로 사람을 지치게 했다.

‘하······.’

7교시가 끝나갈 때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거나, 전자기기를 들여다보거나, 축 늘어져 있었다. 박문대는 그중 마지막에 속했다.

지잉.

손에 쥔 휴대전화에서 나지막한 진동음이 울렸다.

-오늘 저녁에 시간 돼?

-되면 만나자. 할 말 있어.

그답지 않게 진지한 말투였다.

박문대는 짧은 수락의 답을 보내고 그대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설렘. 불안. 두 가지 감정이 저울 위에서 출렁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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