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you

[도윤이안] 장마 전

구름이 몰려든다.

Nebula by 소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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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게 도윤이안.

*전에 풀었던 장마 도윤이안을 베이스로 합니다.

*장마, 장마 후로 이어집니다

"야야, 들었냐? 오늘 미친놈 전학 온다던데."

"미친놈? 어디서 왔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암튼 사고 쳐서 강전 왔다던데? 뭔 사고인지는 나도 모름."

"몇 반이야? 우리반이면 나 상종 안 함."

"지랄하네, 담임이 냅두겠냐? 엄마가 유명한 사람이라던데."

"엄마 아님. 내가 교무실 지나면서 들었는데 이모라더라."

소란스럽다. 이안은 모이자마자 삼삼오오 떠드는 일련의 무리에게 힐끗 시선을 주다 말았다. 낄낄거리는 가벼운 웃음소리와 일견 천박해보이는 손짓으로 이루어진 대화는 과연 듣기에도 거북했다. 이 모든 소음을 잘라내고 바이올린 소리만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의 탁월한 청각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끌어모아 그의 대뇌에 전달했다. 교실을 가로지르는 욕설 섞인 고성, 찢어지는 웃음소리, 복도를 내달리는 투박한 발소리와 책상을 두드리는 뭉툭한 충격음. 이안은 사소한 신경 퓨즈를 모조리 끊어놓는 느낌으로 책상 위의 악보에 시선을 꽂았다. 오선지 위를 유려하게 흘러가는 수십 개의 음표가 이안의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왼손이 움찔 떨렸다. 바이올린을 켜고 싶었다. 이안은 이번에도 조례가 끝나면 담임 선생님과 대화를 할 참이었다. 그에게 정규 수업시간에 음악실로 향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차이안이 어떤 소년인지 알기 때문에 어떤 선생님도 그에 우려 섞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덜컹이며 의자를 잡아 끄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교실 곳곳에서 공명했다. 이안은 여전히 악보를 보고 있었다. 앞문이 열리며 학생의 것이라기엔 다소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이어 조금 느린 것 같은 발소리까지. 와, 크다……. 작은 중얼거림을 끝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사위가 조용해진 교실 가운데서 담임 선생님이 가볍게 헛기침했다.

"오늘 전학 온 서도윤이다. 쭉 독일에서 지내다가 중학교 2학년 때 한국에 왔다고 한다. 독일 나이에 맞춰서 입학해서 너희보다 한 살 어려. 아직 한국어가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그건 너희들이 잘 맞춰주고. 음, 그래, 따로 궁금한 거 있냐?"

"쌤, 쟤 왜 전학 왔어요?"

당돌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 그 옆에 앉아 있던 애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며 키득였다. 질문한 학생이 웃음을 흘리며 아니, 고2면 전학 잘 안 오잖아요~, 하고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담임 선생님은 잠시 학생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까딱 손짓했다. 소문 빠른 걸 누가 모르는 줄 알고? 뻔히 아는 걸 질문한 너는 잠깐 나 좀 보자. 에이, 쌤, 한번만 봐줘요!

부정 없는 선생님의 반응에 몇몇 애들 사이로 다소 노골적이고 질 낮은 사인이 오간다. 교실 내의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기이하게 붕 뜬 것만 같은 공기가 불온하게 떠돌지만 이안은 여전히 악보만 응시하고 있었다. 은빛의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그 나이대의 청소년 답지 않은 평정을 유지했다. 악보에 꽂혀 내리깔린 눈동자가 가로로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익숙하게 들어온 것이 아닌 낯선 목소리가 들린 순간이었다.

"서도윤입니다. 독일에서 왔고… 한국에 온 건 3년 전입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으레 들리는 음성들보다 깊다. 이안은 낯선 목소리로 교실의 공백을 채우는 소년을 응시했다. 부드러운 잿빛이 돌아 채도 낮은 갈색 머리카락, 멀리서 봐도 길어보이는 속눈썹이 지루하게 내리깔린 눈동자를 훌쩍 가리고, 그 아래의 다소 이질감 드는 회색 홍채가 요요히 빛났다. 눈치가 있다면 방금 이루어진 대화에서 제가 어떻게 평가되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무료한 기색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또래의 애들보다 확연히 큰 키와 보기 좋은 체구가 설핏 모델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어지간한 아이돌보다 예쁘장하고 보기 좋은 얼굴로 서도윤이 느릿하게 뇌까렸다.

"어지간한 게 아니면… 건드리지 마십시오.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반격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고쳐서 온 걸 안다니까― 알아서 잘, 해줄 거라 생각합니다. 서도윤이 말을 마쳤을 때, 교실은 전에 없는 싸늘한 고요로 가득했다. 이안은 한순간에 교실에 찬물을 끼얹은 전학생을 봤다가 다시 악보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건드리지 않으면 반격하지 않는다. 자극 없이 혼자 터지는 폭탄이 아닌 이상, 이안과는 관계 없을 일이었다.

*

서도윤은 교실에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다. 이안은 선생님들의 배려를 통해 정규 수업시간에 음악실을 이용할 권리를 얻었다지만―때문에 그가 교실에 돌아오는 건 다른 학급이 음악실을 이용할 때뿐이었다―, 서도윤은 꽤 자주 자리를 비웠다. 거의 교실에 돌아오지 않는 이안이 그것을 알고 있는 까닭은, 우연히 두 사람 다 교실에 있을 때 들어온 선생님께서 오늘은 도윤이가 있구나 따위의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안의 알 바가 아니었으나 동시에 서도윤에게도 별 의미를 갖지 않는 말인 게 분명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그는 창 밖으로 시선을 꽂은 채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침묵했다. 부러 무시한다기보단 처음부터 선생님의 말이 서도윤에게 닿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안은 아무래도 좋았기에 무안해하는 선생님을 앞에 두고서 책상 위에 악보를 펼쳤다.

교실에 들어왔을 때 이안은 악보를 습득하거나 비어있는 오선지 노트에 음표를 그려넣는 일을 했다. 교실에 있을 때의 서도윤은 항상 창 밖에 시선을 두고 넋을 놓았다. 두 사람은 어떠한 교집합도 없이 그렇게 떨어져 독립되어 있었지만, 학급의 모두가 두 사람이 닮은꼴이라고 은연 중에 생각했다. 교류 한 번 없었음에도 두 사람은 같은 부류로 묶였다. 물론, 이 역시 두 사람 모두 알지 못 했다.

*

차이안이 교실에 있지 않은 서도윤의 행선지를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음악실을 빠져나와 층계를 밟으려는 때, 눈부신 빛이 차이안의 망막을 때렸다. 순간적으로 시야를 점멸시키는 빛에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린 이안이 빛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짝 열린 미술실의 틈, 무언가가 반짝 빛을 튕겨냈다.

평상시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기엔 이안의 욕심이 너무나 거대했다. 그는 한순간이라도 바이올린 외의 것에 체력을 쏟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한정적이고 체력 역시 한계가 있었다. 무척 합리적인, 바이올린을 위한 삶이었다. 그런 그가 잠시나마 방향을 틀어 미술실로 향한 건 어쩌면 호기심, 또 어쩌면 불쾌감 탓일 것이다.

이안의 손이 문틈을 잡아 열었다. 가볍게 긁는 듯한 마찰음이 적막한 미술실의 소음으로 짧게 남았다 스러졌다. 찰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이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파르륵, 그가 든 얇은 파일 속 살짝 삐져나온 악보가 바람에 흔들리며 이안의 셔츠를 긁었다. 인지가 늦었다. 이안은 미술실을 책상을 모두 밀어버리고 바닥에 꿇어앉은 소년을 보았다. 순간적이나마 이 광경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부드러운 에어리애쉬 색의 머리카락이 창문 틀을 타고 넘어온 바람에 가볍게 흔들린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회색 눈동자는 바닥에 꽂혀 있었다. 잔흉터가 많은 손이 바닥을 단단히 짚고, 꿇어앉은 다리는 경건해보이기까지 했다. 깔끔히 벗어둔 슬리퍼는 한쪽 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채였다. 신을 배알하는 것처럼 정갈하게 굴지만, 서도윤 앞에 놓인 건 흔해빠진 유리였다.

아, 저걸 그냥 유리하고 할 수는 없지. 이안은 미술실 바닥을 완전히 뒤덮은 거대한 유리의 흐름을 보며 생각했다. 색색이 다른 유리가 뾰족한 부분 없이 마감처리 되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유리에 제자리라고 할 만한 게 무엇 있겠냐마는, 이 강렬한 흐름을 본다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유리가 제자리에 놓여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안은 서도윤의 앞에 펼쳐진 유리들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한 발 늦게, 유리의 커팅이 모두 같다는 것을 인지했다. 유리는 자로 잰 것처럼 규격화되어 있었다. 가로 6cm, 세로 4cm의 직사각형. 같은 색상의 유리가 없다는 것은 감으로 알았다. 유리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있지 않다는 것 역시, 자세히 들여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유리 사이의 공백이 큰 것이 없잖아 있음에도 이안은 공백을 느낄 수 없었다. 규칙없이 놓인 유리에서 흐름을 읽을 수 있다니. 이안의 시선이 서도윤에게로 옮겨갔다. 서도윤은 여전히 유리만을 내려다보았다.

단순한 배치였다. 제대로 모양 갖춰 커팅한 것도 아니고, 조화를 보기 위한 유리의 나열에 불과했다. 이안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소름이 목덜미를 타고 짧게 돋았다가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재능, 재능, 예체능 계열에 몸담은 사람치고 그 말을 안 들은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타인의 재능이 이렇게나 확실하게 와 닿은 것은 단언컨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안은 흥미를 담은 눈으로 전학생, 이라 불렸던 소년을 쳐다보았다.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안의 입술이 정확히 그의 이름을 호명했다.

"서도윤."

침묵이 얇게 깨졌다가 다시 돌아온다. 서도윤은 한 박자 늦게 움찔하더니 고개를 들어 이안을 응시했다. 눈이 정확히 맞닿았다. 차이안은 서도윤의 눈을 처음으로 제대로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묘하게 번들거리는 회색빛, 소용돌이 치는 맹렬한 충동이 머무르는 눈동자, 과초점되어 사냥 직전의 짐승을 연상케 하는 이질감. 순간, 서도윤이 느릿하게 눈매를 휘었다. 제대로 된 웃음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어딘가 어색하고 기묘한 움직임이었으나 차이안은 이것이 서도윤의 눈웃음이라고 기민하게 알아챘다. 자신의 몸이 일순간 긴장했다는 것 역시 그쯤 눈치 챘다. 이안은 제 품의 악보를 꽉 움켜쥐고 기이한 눈웃음을 그리는 서도윤을 마주봤다. 서도윤이 공기를 베어무는 것처럼 나직하게 속삭였다.

"Hast du mich gerufen? Junge Geiger."

*

서도윤은 이안에게 자주 찾아갔다. 이안 역시 서도윤을 내치지 않았다. 이안이 바이올린을 켜는 동안 서도윤은 형용하기 힘든 집중력으로 이안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그에게서는 숨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면 움직임 역시 거의 없다시피 했다. 서도윤에게서는 소음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이안으로 하여금 서도윤의 침범을 허락하게끔 해주었다. 서도윤은 좋은 청중이었으며 또한 좋은 감상을 들려주는 관객이기도 했다. 한국어에 완전히 능숙해지진 않았다고 한 그는 한국어도, 독어도 아닌 것으로 이안에게 제 감상을 전했다. 산란하는 빛과 단단한 감촉이 주는 감상은, 스테인드글라스를 잘 모르는 차이안에게도 확고하게 전해졌다.

이안 역시 서도윤의 공간에 자주 발을 디뎠다. 서도윤은 이안이 저를 가만히 지켜보든, 돌아다니든, 혹은 악보를 꺼내 다른 일을 하든 일절 신경쓰지 않았다. 제대로 된 첫 조우의 기묘하게 들뜬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서도윤은 무덤덤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했다. 잘그락, 잘각, 유리 소리가 적막을 메울 때면 무어라 말하기 힘든 괴이한 평화감이 찾아왔다. 서도윤은 이곳에서 직접 유리를 커팅하지 않았지만 항상 바쁘게 유리를 배열했다. 간혹 거대한 종이를 펼쳐 복잡한 도안을 그리기도 했고, 배열해놓은 유리들을 내려다보며 멍청하게 넋을 놓고 있을 때도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시간에 익숙해졌다. 서로의 존재에도 적응했다. 서로의 영역에 점차 범위를 넓혀 일상적인 대화도 오갔다. 등교하여 반에 도착했을 때 상대방이 왔는지 간간이 살폈고, 미술실이나 음악실에 가기 위해 움직이는 시간이 겹친다면 함께 움직였다. 계단을 밟아누르며 하는 대화의 대부분은 서도윤이 주도했다. 오늘은 뭐 연주할 거야. 미술실은 올 거야?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데, 올 거면 늦지 않게 와. 이안은 적당히 대꾸했다. 아주 상냥하고 친절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서도윤은 그것만으로도 심히 만족스러워 했다. 언젠가 이안이 그에 대해 물었을 때도 별 걸 다 물어본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답이 돌아왔잖아. 그러니 됐어. 아니면 내가 네 다정을 바라길 원해?"

그에 이안은 침묵했다. 서도윤 역시 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닌 듯 시선을 돌렸다.

2학년 1학기가 시작된 지 3개월. 이안은 서도윤이 '서도윤'이라는 이름을 낯설어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다른 때에 서도윤이라고 부르면 당연하다는 듯 응답하는 주제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만질 때 그리 부르면 반응이 느렸다. 한 박자 늦게, 움찔하더니, 눈을 맞춘다. Hast du mich gerufen? Junge Geiger. 차이안은 그 문장을 기억했다. 날 불렀어? 어린 바이올리니스트. 그에 대해 물었을 때, 서도윤은 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확연히 짙어진 눈으로 느리게 혀를 굴려 말했다. 이안, 나는 네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 기억해.

서도윤은 기묘하다. 차이안은 서도윤이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경험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진실을 다 말하는 것도 아니다. 서도윤은 적당한 때에 침묵하고, 화제를 돌리고, 능숙하게 굴었다. 이안은 캐묻지 않았다. 캐묻는다면 서도윤이 진실을 말할 것을 알면서도 굳이 묻지 않았다. 이유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저…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적당히 포장해 덮었다. 미묘한 관계선이 일렁이며 그어진다. 두 사람 사이를 단절하는 것이 아닌, 연결하는 관계선이었다. 당장에라도 끊어질 법한 선이 대화를 따라 흔들렸다. 금방 터질 것 같다가도 차르르 가라앉았다.

이걸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정착지 없이 붕 떠오른 관계가 부평초처럼 떠다녔다. 두 사람 다 그것을 억지로 부여잡지 않았다.

여름날을 따라 미묘하게 들끓던 관계를 앞두고, 방학이 찾아들었다. 갑작스럽게 공간이 단절된다. 두 사람은 연락처를 공유하지 않았다. 교류 한 가닥 없는 방학이 지난하게 이어졌다.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한 달 간의 방학 끝에, 2학기가 시작되었다. 뜨거운 여름 볕이 강렬하게 공기를 태웠다. 서도윤이 이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안은 서도윤을 보지 않았다. 서도윤의 눈매가 기묘하게 휘었다. 첫만남의 그날처럼, 이질적인 빛을 머금은 회안이 이안을 향했다.

8월 말의 2학기 초, 일기예보에서 장마를 예고할 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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