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you

[도윤이안] 5년 기록

우리 5년이나 봤네요, 그쵸?

Nebula by 소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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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이안...인데 이안이 안 나옴.

*전부터 보고 싶었던 장면만 짧게 썼습니다.

그는 정각에 맞춰 방문한다. 일찍 오지 않고, 지각하지도 않는다. 놀라울 정도로 시각을 정확히 지키는 태도는 그의 강박적이고 책임감 있는, 그러나 상대를 완벽히 배려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런 그를 대하기 쉬운가 하면 결코 아니었다. 특히 초반에는 더더욱 난감해서 이 상담이 1년을 채 못 채우리라 생각했다. 그쪽에서 나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거나, 혹은 그냥 종결될 것이라고.

거의 소리없이 문이 열렸다. 규모가 큰 병원이지만 저런 문고리 소리까지 통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손기술이 좋은 것인지 그는 조용하게 상담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정각이다.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느린 발걸음으로 걸어오며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눈을 맞추며 인사하지 않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 로스 씨. 거의 2주만인가? 저번 상담 내용 기억하는지 물어보려 하는데 나부터가 제대로 기억할 수 있나 모르겠네요. 어제 먹은 저녁도 가물가물한데."

맞은편 자리를 권하며 능청을 떨자 로스 씨가 익숙하게 의자를 잡아빼 앉았다. 조금 나른해 보이는 얼굴은 2주 전과 마찬가지였다. 등받이에 느긋이 등을 기대고 다리 위에 깍지 낀 손을 가지런히 내려놓는 자세 역시 여태 봐온 5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로스 씨는 지난 상담일지 파일에 시선을 잠깐 두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다소 서늘해보이는 그의 표정이 가볍게 풀리더니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잊을 리가 없죠. 제겐 더없이 강렬한 주제니까요."

"그 주제로 몇 달을 말하고 있는 건 알죠? 로스 씨를 오래 만났지만 긍정적인 주제로 이렇게 오래 이야기 한 건 처음이라 얼마나 더 갈지 설레네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라면 5년은 더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엷게 비치는 웃음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일이네요. 로스 씨가 즐거움이 희미하게 묻어나는 눈으로 긍정했다. 상상도 못했기에 더 좋은 일이죠.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나요? 저번에 '나비'의 솜씨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비슷해요. 저번주에 '나비'를 보러 갔거든요. 당일 전까지 '나비'가 조금 바빠서 좀처럼 함께 있기가 힘들었는데… 감각이 열린다는 느낌은 언제 받아도 황홀해요. '나비'의 폭풍에 휘말려있다가 정신을 차린 순간이 실망스러울 정도로요."

회상하는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천장을 더듬던 눈이 돌연 뚝 떨어져 내게 와닿았다. 그의 눈이 주는 기묘한 이질감에 적응한 지 오래라 그가 눈을 맞춰준다는 사실에 조용히 기뻐했다. 그는 자신이 그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느리게 단어를 골라 설명했다. 중간중간 자세한 설명 없이 뭉텅뭉텅 잘려나갔으나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나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좀 더 들을 수 있으리라. 나는 잘린 문장의 정체를 묻기보다 그가 말하는 '실망스럽다'는 표현에 집중했다. 가볍게 메모하며 되묻자 그가 잠시 침묵했다. 말하기 껄끄러운 것도,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모르는 기색도 아니었다. 적확한 단어를 끄집어내려 애쓰는 그 모습은 '나비'를 이야기할 때 자주 보였다.

로스 씨와의 상담에서 가장 잘 잡아야 하는 부분은 그의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감정변화가 잦지 않고 무던한 사람이었으나 그것은 그의 자기방어 방식 중 하나였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걱정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큰 '자극'이나 다름없었다. 그 중 긍정적인 감정이야 심각하게 이어지지 않는다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매우 끔찍한 상황을 야기하기 십상이라 상담할 때도 늘 주의해야 했다. 그의 감정결을 더듬는 것이 자극이 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대화를 이어나간다. 상담 초기에는 이것이 견디기 어렵게 힘겨워서 로스 씨와의 한 시간이 일주일 같이 무거웠다.

이렇게 변한 게 기적이나 다름없지. 로스 씨의 옛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은 꿈 같이 느껴졌다. 길몽이라서 더 믿기지 않는 꿈처럼.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가 성격장애를 앓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폭력적이고, 충동적이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않는 모습이 인상 깊었기 때문일 테다. 만년필 치우세요. 내가 그쪽을 찌를 수도 있거든요. 그 말 때문에 더 그리 느꼈던가? 내가 그 생각을 철회한 것은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로스 씨가 가진 깊은 내면 중 한 조각을 들었을 때. 그는 PTSD를 심각하게 겪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머리가 열리는 줄 알았다. 그는 외상 사건에 괴로워하면서도 그 상황을 재현하려 애썼고, 즉각적으로 고통스러워했다. '자극'이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트리거였으며 이는 매우 급작스럽고 예고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는 모든 '자극' 자체를 꺼렸다. 그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않는 이유 역시 '자극' 때문이었다. 타인의 슬픔, 괴로움 따위에 공감해 함께 느낀다면 그것은 그에게 고스란히 '자극'으로 돌아오니까.

"'나비'가 서 있는 곳은 언제나 먼데도 '나비'는 정확히 저를 찾아내요. 제가 폭풍에 휩쓸렸다는 걸 확인하고 감상을 듣곤 하니까요. 먼 거리에서도 눈이 정확히 마주치면, 음… 태풍의 눈에 있다고 느껴요. '나비'가 보는 시각을 공유하는 것 마냥 머리끝까지 저릿해지죠."

그런 그를 알기에 근 몇 달 간 꾸준히 들려오는 '나비'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로스 씨는 '나비'의 감정에 망설임없이 뛰어들었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는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자극' 속을 헤엄친다. 그러면서도 '나비'에게 단 한 번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본인조차 그러하리라 확신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비'의 연약한 날개는 그의 '폭발' 한 번에 갈기갈기 찢어질지도 모르는데, '나비'를 무척 소중히 여기면서도 망설임없이 '나비'의 감각을 공유하고…….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펜을 굴렸다. 흔하디 흔한 사인펜의 검은 잉크가 죽죽 그어졌다.

"음, 시간이 다 됐네. 로스 씨, 오늘은 어떠셨나요?"

"그 순간 느꼈던 감정을 정리해서 좋았습니다. '나비'와 대화하면서 어느 정도 표현하긴 하지만, '나비'와 있을 때는 이렇게 차분하게 있지 못 하니까요."

"하하."

"이런 감정이 쌓여서 분류하기 힘들어지기 전에 명확히 할 수 있어 만족스러웠습니다. 다음 주, 는 제가 일정이 있고……."

"네, 저번주에 함께 말씀하셨죠."

"그 다음주에 봬요. 감사합니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엔 다시 냉막한 기운이 서렸지만 나는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좋은 일이지. 좋은 일이야. 이번에도 어김없이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닫히는 문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근래, 그와의 5년 중 가장 급격한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데도 걱정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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