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you

[직젬] 운명이라면

격동하는 세계에서 흘러나온 것은

Nebula by 소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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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AU. 환생...?

서예경은 운명을 믿는다.

그를 아는 이들이 들었다면 입을 쩍 벌린 채 오렌지 주스를 줄줄 흘릴 말이지만, 놀랍게도 거짓 한 톨 없는 진실이었다. 그는 운명을 믿었고 개체 간의 이끌림 따위를 제법 심도 있게 신뢰했다. 비과학적이잖아. 아무개가 말했다. 네가 그런 걸 믿어? 진짜 의외다. 또 아무개가 말했다. 여러 문장이 날아다녔다. 너 그러다 사이비에 빠지는 거 아니냐는 비꼼 섞인 말, 그럴 수도 있지 왜 낭만을 낭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냐며 그를 열렬히 보호하는 말, 운명을 경험해본 적 있냐는 은근한 질문들. 서예경은 그 한가운데서 잔잔하게 미소했다. 제게 닿지 못하는 말을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리 예경이는 인기쟁이네. 유순한 눈을 강아지처럼 뜬 친구가 느물느물 한껏 놀리는 표정을 지었다. 서예경은 피식 웃으며 장난치지 말라고 응수했다. 가면처럼 걸고 있던 웃음이 가시고 그 자리를 대신한 짧은 웃음은 고상하기보단 장난기 있었다. 그는 친구의 손을 잡아 끌어 자신의 세계로 훌쩍 빠져들었다. 불가침의 세계, 하나뿐인 친구와 함께 하는 세계로.

운명. 그 우스운 말의 증거가 바로 여기 있었다. 서예경은 한새를 볼 때마다 말로 표현하기 벅찬 감정을 느꼈다. 감동이자 감격이고 동시에 깊은 애정과 신뢰.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느꼈다. 물고기가 물을 찾아가듯 그의 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 그의 슬픔에 함께 울었다.

이게 운명이 아니면 뭐야. 서예경은 경험적 근거로 확신했다. 전생의 내가 쌓아온 업과 복이 지금의 너를 만날 수 있게 한 거 아닐까? 그렇게 말하면 한새는 깔깔 웃으며 고개를 시원하게 젖혔다. 긴 곱슬머리가 바람에 마구잡으로 흩날리고 상체의 큰 움직임이 무척 자유로워 보였다. 서예경이 마치 그리운 양 그를 응시하고 있으면 한새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예경의 단발을 흐트러뜨렸다. 그게 뭐야. 그럼 전생의 나는 엄청나게 복이 많은 사람이었나 본데? 이 세상에서 너를 만났잖아!

사람이 있기에 충만한 삶이라는 것은 위태로우면서도 풍족하다. 서예경의 삶이 그러했다. 한새는 어릴 적부터 그의 곁을 지킨 친구였고 서예경은 한새의 곁에서 충만을 만끽하며 성장했다. 세상이 낙樂으로 가득했다. 떨어지는 것 하나 없이, 거창한 충돌 하나 없이 여유롭고 한가로운 나날이었다.

때문에 그 격돌은, 서예경이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충돌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새까만 눈, 새까만 머리. 아, 그 검은 머리카락에서 얼핏 하늘빛이 비쳐보이는 것은 그가 파란 하늘 아래 있기 때문이요, 그의 눈동자에 신록이 머무른 것 같다 느낀 건 돋아난 이파리의 빛이 반사되어 고였기 때문일 테다. 짧게 흔들린 머리카락 너머로 길게 흩날리는 터럭을 본 것은 바람이 만들어낸 착각일 것이고, 눈 마주친 순간 느껴진 거대한 격동은―.

죄책감. 고통. 후회. 잃어선 안 되는 것을 놓쳐버린 허무. 남겨버렸다는 서글픔.

울 것 같다. 서예경은 발등에 못 박힌 사람처럼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그를 응시했다. 누가 울 것 같은지는 알 수 없었다. 제 가슴이 풍랑을 맞이하듯 일렁이는데 저와 눈이 마주친 그 역시 결코 무감한 자의 얼굴은 아니었다. 속이 울렁였다. 뭐라도 토하고 싶은데, 목구멍에 치닫는 것이 위액인지, 피인지, 눈물인지 알 길이 없었다. 제 검은 단발머리가 바람을 따라 휘날렸다. 시야가 가려지는 것에 문득 서럽다가도 이만치밖에 가려지지 않는 것에 낯선 당혹감이 들었다. 평생을 살며 머리를 길게 길러본 적이 없는데 마치 비단처럼 길게 머리를 길렀던 때가 있었던 것만 같았다.

저는 무엇을 잃었는가. 무엇을 놓쳤는가. 그리하여 무엇을 홀로 남겼고 다시금 무얼 만났는가. 이것은 재회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처음 본 사람임이 분명한데도 그와 저는 이 순간, 분명 재회했다.

거대한 격동이 속을 뒤집는다. 파랑에 이끌려 치솟은 신음이 잇새로 가늘게 새어나왔다. 몸이 휘청였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아니었다면 홀로 흔들려 제법 우스운 꼴이 되었으리라. 서예경은 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몸의 중심을 잡았다. 강렬한 충격이 몸을 흔들었다. 중심을 잡을 수가 없어. 그는 비틀거리면서 한 발 내딛었다. '그'가 있는 방향이었다. 중심을 잡듯, 기회를 잡듯, 기억을 잡듯, 서예경은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얼굴은 확실히 타인의 것이었다. 낯설고 어색하다. 정말 재회인가? 그를 증명하듯 한순간에 뺨이 젖어들었다. 막을 수가 없었다. 북받쳐 올라오는 숨을 쏟아내며 서예경이 그를 응시했다.

세계가 흔들린다. 한새와 만난 뒤로 충만하기 짝이 없던 세계에 거대한 슬픔이 범람하여 금을 내었다. 깨진 금 사이로 새어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서예경은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그립고 서글프고 애틋하고 사랑하는. 서예경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무례한 행동임이 틀림없는데 그는 지적하지 않았다. 그러다 퍼뜩, 방어하려는 듯 왼발을 뒤로 끌었다.

서예경은 그의 얼굴을 읽었다. '이게 운명이라고?' 부정하는 게 아니었다. 서예경이 느낀 것을 그 역시 느꼈다. 운명이라면, 이것이 정말 운명이라면.

왜 이리 처절하게 슬프고 애틋한가. 우리의 운명은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리도 괴로운가.

서예경은 눈을 깜박여 눈물을 털어냈다. 그의 뺨을 쓸던 손을 내리고 핸드폰을 쥐었다. 다이얼을 열어 화면을 들이민 그가 성대를 울렸다. 감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조금 떨렸으나, 말을 전달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010으로 시작하는 11자리 숫자. 서예경은 확신했다. 나는 이것을 받을 자격이 있어.

"…서예경입니다. 번호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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