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 Time

Space Time 01

김래빈은 그렇게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파도가 시원하게 부서진다, 타오를 듯이 내리쬐는 태양볕. 별가루 뿌린 도화지처럼 빛나는 백사장과 그 너머 수평선까지 또렷히 펼쳐진 맑고 푸른 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쓰다듬고는 지나쳐간다. 저 멀리서 들리는 갈매기 소리가 기운찬 선율로 울리는 것만 같다. 오늘도 샌디에이고의 날씨는 언제나 그랬듯이 최고였다!

소년은 가벼운 차림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옆구리에 단단히 낀 서프보드가 무겁지도 않은지 걸음은 가벼웠다. 모든 샌디에이고의 서퍼들이 그러하듯, 소년 역시 오늘 하루 내내 저 광활하고 거친 바다의 파도와 온몸으로 맞서며 보낼 생각이었다. 비록 그것이 무섭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소년은 커다란 파도 속을 헤치고 갈라 베어내는 그 짜릿한 감각을 잊지못했다. 그가 하는 행위가 어쩌면 삶과 죽음의 기로일지도 모른다지만, 소년은 그 언젠가 마주쳤던 자신의 키의 세 배는 될 법한 파도르 떠올리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 기억을 떠올렸더니 온 몸에 기분 좋을 정도의 긴장감이 맴돈다.

그가 서프 보드를 백사장에 꽂아넣고 몸을 풀 때였다. 무심코 돌린 시선에 영 이상한 것이 잡혔다. 소년은 미간을 살짝 모으고 허리를 살짝 숙여 그를 확인했다. 누군가 젖은 모래 위에 축 늘어져 있었으나, 잠든 사람이라기엔 자세가 이상했다. 초점을 맞추기 위해 눈을 더욱 가늘게 뜬 소년은 쨍한 볕에 눈을 비비고 나서야 걸음을 뗐다. 제아무리 토박이라고 한들 바닷가에서 아무 사람에게나 말 걸고 다니다간 큰일난다는 사실 쯤은 잘 알고 있던 탓이다.

다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큰일 따위 나지 않으리란 본능적인 확신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진짜 큰일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에게 날지도 모를 거라는 불안 때문인지도 몰랐고. 상대의 머리맡에 다다랐을 무렵 소년은 벅찬 숨을 몰아쉬며, 옆구리를 짚은 채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상대는 여전히 일어날 기미도 안 보였다.

조난? 아니면 근처에서 놀다가 바다에 빠졌나? 이유가 어찌되었건 이 사람은 의식이 없었다. 소년의 명석한 두뇌가 팽팽 돌았다. 우선 상대를 바다에서 떨어트려놔야 할 것 같았다. 소년의 오랜 취미로 높아진 통찰력에 따라 젖은 모래가 말하기를 이곳은 큰 파도가 치면 어김없이 바닷물에 쫄딱 젖을 부근이다. 의식 없는 사람이 물 맞으면 깨어날지도 모르겠지만, 되려 휩쓸릴 가능성도 고려해야 하니까. 소년은 힘껏 상대를 들쳐 안았다. 그리고 직후에야 위화감을 느끼고 만다.

상대의 옷이 거의 젖어 있지 않았다. 모래와 맞대고 있던 등 부근만 살짝 축축한 정도에다, 바다에서 밀려온 사람치고 옷이 멀끔하니 깨끗하다. 게다가 묘하게 탄내까지 나니, 반사적으로 총을 떠올렸던 소년은 이내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아무리 맡아도 화약 냄새는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상대가 쓴 고글. 햇빛을 받을 때마다 묘한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그건 누가 봐도 수경은 아니었다. 게다가 얼마나 짙게 코팅해놨는지 얼굴이 보이지도 않았다. 소년은 상대가 깨어났을 때 그를 무어라 지칭해야 감정 상하지 않을지 고심하며 가까운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주인이 질색은 하겠으나 그렇다고 또 쫓아낼 위인은 아니었다.

그늘 속 썬배드에 상대를 눕혔다. 머리카락을 살살 정리해주고는 다시 바닷가로 뛰어가 서프 보드를 가져왔다. 넉살 좋게 웃으며 식당 주인에게 허락을 받는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Hey~, 제이콥! 바다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는데 잠시 쓸게요, 괜찮죠?”

“오, 유진. 물론이지. 혹시 또 저기에서 멍청하게 다이빙하다 쓰러진 녀석을 주워 온 거냐?”

“아뇨, 바닷가에 쓰러져있었어요.”

“어떤 얼간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화창한 샌디에이고의 바다를 즐기지도 못하다니 안타깝군! 일어날 때까지 내가 보고 있을까?”

“Hmm…. 아뇨, 제가 구조했으니 제가 살펴볼게요. 이거 흔쾌히 대여해줘서 고마워요! 이 손님이 일어나면 이 사람 몫까지 음료수 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하하, 안 사도 된다! 너른 체구의 주인이 웃으며 도로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소년, 유진은 일단 혹시 모르니까 응급처치라도 할 겸 그는 우선 이렇게 더우니까 분명 땀을 흘렸을 테니 닦자는 생각으로 상대의 고글부터 끌어 내렸다. 음. 남자군, 몸이 말라서 긴가민가했었는데. 가볍게 유진이 상대에 대한 감상을 끊어내고는 그의 고글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 전에도 생각했지만 참 이상한 고글이다. 유진이 상대의 고글을 벗겨내며 생각한다. 참 낯선 물질로 만들어져 있네. 한순간의 감상이었다. 그러나 유진은 남의 물건에 전혀 관심이 있지도 않아 심드렁하게 근처에 배치된 탁자 위에 고글을 얹어두고, 자신의 짐가방을 뒤져보았다. 다행히도 늘 챙겨 다니는 것이라 그런지 수통과 스포츠타월이 잘 들어있었다. 역시 나는 준비성도 철저해, 멋져. 유진이 휘파람을 불며 장난스레 자신을 칭찬했다. 가방에서 꺼낸 스포츠 타월에 물을 적셔 상대의 얼굴을 꼼꼼히 닦고, 옷을 살짝 풀어 목께까지 닦아주는 손길이 섬세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상대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아서 유진은 옆에 의자를 끌고앉아 상대를 내려다본다.

“동양인인가?”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백지장처럼 희게 질려 창백하게도 보이는 피부, 눈을 감고 있어서 티는 잘 안나지만, 눈을 뜨면 참 날카롭게 생겼을 외모였다. 그리고 흰 피부에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오른쪽 뺨에 찍힌 점 하나. 유진은 괜히 자는 상대의 점을 꾹 눌렀다. 저기, 안 일어날 거야? 당연히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렇다면 유진은 이제 두 번째로 신경 쓰이는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는 감이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의 수 배로 민감하고 직감이 좋았다. 그것은 본능이라 해도 될 정도의 것이라, 유진은 괜스레 소름이 돋아오는 자기 목덜미를 쓸어 만지며, 바다로 시선을 옮긴다. 제 앞에 죽은 듯 잠들어있는 남자를 구조하려 안아 들었던 순간부터 그를 데려온 바다 쪽에서 시선이 느껴진 탓이다.

썬배드에 누워있는 상대는 일어날 기미가 없고, 저 시선도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유진은 바닷가에서 한가로이 하하호호 놀고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한 쪽 눈썹을 찡그렸다. 참으로 기이한 상황이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은 저 곳에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 같은게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이미 바다에 들어가 공놀이를 하거나, 바닷가를 걸으며 산책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저기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건가? 느껴지지 않나, 저 노골적인 시선이? 유진은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유진의 직감이 속삭였다, 어서 도망쳐야한다고.

유진은 멍하니 바다를 본다. 저 투명하고도 아름다운 찬란한 바다 그 아래에 정체 모를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당장 저것에서 도망쳐야겠다는 본능과, 저것에 다가가야 할 것 같다는 예감. 소년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이 그 곳에 있었다.

본디라면 소년, 유진 이그나시오 차는 미지의 것을 알아보지도 않고 도망치겠다고 생각하는 건 Nerdy 하다고 생각했다. 아, 영화 보면 오히려 도망치는 게 현명할 때도 있던데.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유진은 자신의 본능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다. 저 앞에 펼쳐진 것은 그저 아름다운 바다일 뿐이었으매. 그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바다 쪽을 바라보다가 결국 결심하고 썬배드 옆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Hey, 친구. 잘 자고 있으라고. 일어나면 음료수 값 받아낼 거니까.”

물론 일어나지 않는 상대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것도 그 다웠다. 유진이 장난스레 말하며 깨어나지 않는 남자의 고글을 그의 가슴께에 얹어둔 후, 호기롭게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 제이콥의 가게로 갈 때까지는 정말이지 가벼운 길이었는데, 도로 바다로 다가갈수록 찝찝할 정도의 습기, 태양볕이 거슬릴 정도의 따가움. 제가 알던 샌디에이고가 아닌 것 같은 기분. 그런 기분을 꿋꿋하게 무시하며 다가갈수록 무언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것은 바다와 겨우 십 미터 정도의 거리가 남았을 무렵이었다. 그제야 유진은 깨달은 것이다. 어라, 아까 여기 걷고 있던 커플 어디 갔지? 저기에서 공놀이를 하던 사람들은?

목 위로 힘줄이 불거졌다, 맥이 요동치는 것이 제 귓가에도 또렷하게 들려온다. 신체 반응보다 뒤늦게 목덜미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느껴지는 섬찟한 감각에 유진은 생각한다. 이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가 몸을 돌려 모래사장을 박차는 순간,

“[뛰어!]”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알고 있는 언어다.

다행히도 뜻은 전달됐다. 유진은 소리가 난 쪽으로 달리면서 오히려 자신의 쪽으로 달려오는 남자를 본다. 직전까지 일어나지도 못했으면서 고글을 목에 걸고 다급하게 뛰어오는 남자가 손을 뻗는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맞잡는 순간, 등 뒤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는 느낌이 든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려 하자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시야를 덮는다. 거친 숨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느껴졌다.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 상대의 손 새로 스며드는 새하얀 빛.

“[눈 감아. 맨눈으로 보고 있으면 다쳐.]”

물론 유진은 눈을 감으라는 말만 알아들었고, 상대의 목소리가 절박했기에 순순히 눈을 감았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눈가에 닿은 체온이 유난히도 뜨거운 기분이 들었다.

 

* * *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영어인가? 알 수 없는 목소리는 경쾌하기도 하고, 웃음이 어려있어 듣기 좋았다. Hey, buddy. 장난스러운 목소리는 이내 사라졌으나 그것이 남긴 감상은 가벼우면서도 다정하다. 가족이 모두 돌아가신 후로 그 누구도 자신에게 그러한 감정을 내비쳐준 적이 없었기에, 저도 모르게 마치 길을 잃다 이정표를 발견한 기분으로 그 소리의 흔적을 쫓아 손을 뻗는다. 문득, 눈앞이 새하얗게 번뜩인 기분이 들었다.

“헉…!”

급하게 숨을 갈구하듯 들이켜자, 가장 먼저 눈이 부신다는 감각에 김래빈은 미간을 살포시 구기며 눈을 찡그렸다. 쨍하니 내리쬐는 볕이 제 머리 위로 드리워진 파라솔 그늘 새로 비춰든다.

이곳은 김래빈이 보기에 진실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타오를 듯이 내리쬐는 태양볕, 사방에서 들려오는 기운찬 바닷새 소리. 물이 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그러다가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의 소리가 생생하고 시원하게 들려온다. 손을 늘어트려 바닥에 대어보자 까슬거리기 보다는 보드러운 모래의 감촉이 선명했다.

김래빈은 그제야 제대로 눈을 뜨고 주변을 살핀다. 제가 아는 바다가 아닌 낯선 바다의 풍경에 그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분명 자신은 균열로 빨려 들어왔을 텐데, 여긴 어디지? 우선 확실한 것은 균열 내의 세계는 아닌듯했다. 그야 균열 내부에 저렇게 이상적인 멋진 해변이 펼쳐져 있을 리는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이동된 것인가?

우선 김래빈은 자신의 상태부터 살폈다. 머리에 쓰고 있었던 고글은 누군가의 배려인지, 자신의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앞에 보이는 건 아름다운 바다와 제가 누워있는 의자 -아무리 봐도 그냥 의자는 아닌 것 같았지만 명칭을 몰랐다.- 옆의 식당이다. 누가 봐도 한국은 아닌듯해 보이는 환경이었다. 자고로 한국 바닷가라면 이미 횟집과 조개구이집이 해변 앞에 줄줄이 끝도 없이 늘어져 있어야 했으므로.

우선 빠르게 상태를 살핀 그는 자신이 누워있던 의자에서 내려와 바로 옆의 식당을 살피듯 다가갔다. 식당의 열린 문으로 안을 살짝 들여다보니, 정면에 보이는 전자시계가 날짜와 시간을 함께 알리고 있다. 시계 또한 영어로 표기되어 있었지만, 이 공간의 날짜와 시각을 알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20XX년 8월 X일, 오전 10시 55분.’

어? 무심코 습관적으로 시계를 확인한 김래빈은 얼빠진 소리를 내버렸다. 20XX년이라니, 이미 십여 년도 더 전의 연도지 않나. 거기에다 저 유난히 푸르던 여름의 날짜는 김래빈이 아주 잘 알고 있는 날짜다, 아니 알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 해도 저 날짜를 모를 리가 없었다. 8월 X일.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날로, 매년 전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추모 소식이 들려오는 날짜였다. 그러고 보니…, 그 사건의 위치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섬뜩한 가설이 머릿속을 날카롭게 스친다. 뇌를 꿰뚫어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생각이 생소하고 낯설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는 가정. 그러나 지금 그 가설이 아니라면 제 눈앞의 날짜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생각한 것은 정말, 정말 말도 안 되는 전제였지만 그 가설을 부정하려면 전제부터 부정해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저도 모르게 다짜고짜 식당 문을 열고 되지도 않는 영어로 크게 물었다. 제게 있던 영어 울렁증과 외국인 공포증이 일시적으로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어색한 낯선 언어의 나열이 더듬더듬 입 밖으로 튀어 나간다, 어설픈 영어가 식당 특유의 왁자지껄한 분위기 새로 다급히 쏟아진다. 혹시 여기는 샌디에이고입니까? 하고.

식당 안에서 벽에 달린 TV에 시선을 주고 있던 풍만한 풍채를 지닌 멋들어진 수염의 백인 남성이 저를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여기는 샌디에이고가 맞았다. 맙소사. 김래빈은 땡쓰! 그렇게 소리치며 식당 문을 박찼다. 식당에서 나오기 직전, 풍성한 체형의 남자는 저 멀리 바닷가로 향하는 남자를 가리키며 외쳤다. ‘고마워’, ‘당신을 돕다.’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그것뿐이었으나, 김래빈은 저도 모르게 그가 가리킨 사람을 향해 달렸다. 김래빈은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라는 본능이 경고하는 것을 무시한다. 평소에는 전혀 반응하지도 않던 직감이 외쳤다.

저 사람을 잡아!

김래빈이 기억하기로, 자신이 지금 위치한 곳의 시간이 정말로 ‘그날’이라면. 그것도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라면. 지금 당장 도망쳐야 했다. 가능한 한 멀리, 적어도 가능하다면 다른 주까지! 캘리포니아에서 멀리 떨어져야만 했다.

하지만 어찌하여 자신은 오히려 본능이 경고하는 것을 무시하며 해변으로 달리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여간에 오늘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일어나는구나. 언제나 사용하던 능력이 만들어낸 균열에 삼켜졌더니, 과거의 한 곳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실제로 겪고 있으니 영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지금 제 시야에 들어찬 저 사람을 잡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 탓에 머릿속을 울리는 적색경보를 무시하며 다리에 온 힘을 쏟아 달리던 그는 문득, 어린 시절 할머님과 함께 TV를 시청하던 때를 추억한다. 지금 떠올리기엔 부적절한 추억이었으나, 정제되고 깔끔하게 정리된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감각에 김래빈은 자연스레 오래된 필름을 상영하듯 옛 기억을 되짚는다. 저도 모르게 떠올린 그것은 그가 가진 가장 오래된 기억, 유일하게 날짜와 시각까지 기억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담은 과거의 편린.

 

김래빈이 네 살 때의 일이다. 십사 년 전, 8월. 그날의 김래빈은 오전 일을 가지 않으신 할머님의 곁에서 아침을 먹으며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기로 당시 시각은 오전 7시 39분, 툇마루 맞은편 담벼락 위의 고양이가 애옭하고 울었다. 김래빈과 조모는 툇마루에 상을 펴놓고 앉아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당시 한창 인기가 드높던 교양 있는 아침 드라마 방영 시간을 기다리던 김래빈과 그의 조모는 드라마를 시청하기 전에 뉴스 채널을 틀어두고는 했다. 그날도 언제나처럼 뉴스 채널을 틀어둔 할머님 덕에 온갖 소식을 어설프게 접하던 그가 막 아침 반찬으로 나온 마지막 소시지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을 무렵, 굳은 표정의 아나운서가 다급하게 속보입니다. 하고 외치던 것을 김래빈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한순간에 일그러진 아나운서의 표정, 그리고 뒤를 이어 화면에 비친 대참극. 원래 도시가 있어야 했을 구역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 거대한 구역에 서서히 물이 들어차는 모습이란. 에구머니나. 세상이 말세야. 조모님이 그 속보를 들으며 했던 말까지 기억난다. 그랬다, 속보기는 해도 이미 샌디에이고에서 일어난 일이 아침 뉴스로 방영되었을 뿐이었으니. 물론 첫 보도인 만큼 그 소식이 과하게 자극적이기도 했다. 그런 과한 소식을 접한 4살의 김래빈이 현재까지 그것을 기억하는 건 영,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큰 충격이었다. 멀리서 찍어도 선명히 보인 균열로 인해 일어난 대참사가, 카메라가 비추는 통곡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간이란 자고로 충격적인 기억은 두고두고 기억하는 생물이나, 만약 본인도 몰랐을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그것은 마치 각인과도 같다. …어쩌면 그렇게 각인처럼 새겨진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도 아니고.

중요한 건 추억을 떠올린 덕에 제가 기억해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유추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간 제 능력에 의구심을 품고 균열에 관련된 책은 물론 논문까지 구해 읽어온 보람이 있었다.

김래빈이 그간의 기록을 열람하여 몇 번이고 읽어 새기다시피 기억한 날은, 세계에서 최초이자 최대 사망자를 일으켜 낸 균열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발생했던 날이다. 그것이 그곳에 생성되었는지도 아무도 모르게 소리소문없이 생겨난 그 기이한 균열에 휩쓸린 사람만 해도 수백 명이 넘었다. 사실 그렇게 끝났다면 그 사건은 그저 다수 시민의 실종으로 처리되었을 터지만, 그 당시에 균열이라는 것에 개념조차 없을 시기의 사람들은 그것이 그 누구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했다.

재앙은 그렇게 예고 없이 세계를 뒤흔들 파란으로 덮쳐왔다.

알 수 없을 자리에 생성된 것만으로도 수백 명을 집어삼킨 것으로 추정되는 그 최초의 균열은 현지 시각으로 오후 3시경, 한창 여름 휴가철, 그것도 사람이 가장 붐빌 시기의 샌디에이고 라호이야 해변에서 자가 폭발을 일으켰다. 당연히 폭발이 일어난 샌디에이고는 물론, 캘리포니아주의 대다수 도시마저도 그것에 휘말려 깡그리 사라졌다. 캘리포니아주 80%가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이 폭발한 여파에 깡그리 휩쓸려 버린 것이다.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다분히 재앙이라 선포될 만도 했다. 그 사건은 두세 번의 균열이 더 등장한 후에야 재조명될 수 있었다. 균열의 등장으로 인해 수사 범위가 늘어난 덕에 당시의 연구원들은 그 재앙의 원인이 균열이었을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해냈다.

그것마저도 트레이서의 등장 덕에 간신히 그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 잔존했던 균열의 파동을 관측한 덕에 알아낸 사실이지만, 사건 발발 당시에 판정내리기엔 그것이 최초의 사태였던 탓에 아무것도 알 수 없었기도 했던 탓에 인정받았다 했다.

지금-김래빈이 살던 공간-까지도 그 사건을 일으켜낸 균열에 관한 어떠한 정보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에 그것의 명칭은 ‘ZERO’가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균열이자 그것으로 인해 돌아온 사람이 없다’라는 의미에서. ZERO가 최초이자 최악의 균열로 명명되는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제로, 최초의 균열. 그것의 형태라도 알 수 있다면 도망칠 때 좋을 텐데. 기억이 흐릿함을 느끼며 회상을 끝마치자마자 그는 짧게 고개를 털어냈다. 정신 차려, 김래빈. 스스로에게 매정히 속삭인 후에야 시야에 다시 들어찬 것은 화창하고 맑은 하늘, 지평선 너머로 아득하게 펼쳐진 푸르고 아름다운 바다와 별가루를 뿌린 듯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는 새하얀 모래사장. 그리고 그것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바다로 다가가는 이름 모를 남자.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지만, 폐부를 누군가가 가시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숨이 가빠지는 소리가 자신의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밭은 숨을 내뱉으면서도 김래빈은 그럼에도 달린다.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제가 가는 방향이 옳은 길이 아님을 안다, 둔하디 둔한 김래빈의 본능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도망치자, 도망쳐서 살아남자. 여태까지 살아남았듯이. 그러나 자신을 옳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어낸 알 수 없는 예감이 속삭여온다. 그것은 마치 이전, 자신을 설득했던 무형의 목소리를 닮았다. 네가 바라는 것은 저기에 있을 것이라고. 너는 그것만으로도 저 위험에 뛰어들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그건 어쩌면 태양의 목소리를 닮았다고 김래빈은 생각한다.

머리가 어지럽다, 가뜩이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기운이 없어 얼마 달리지 못했는데도 몸이 무거웠지만 그 와중에도 김래빈의 머리는 착실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상하다. 내가 그동안 이렇게 충동적으로 판단 내린 적이 있던가? 아니, 없다. 김래빈은 평소 본인이 이렇게 다분히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임을 알았다. 마치 소용돌이레 휘말린 것처럼 제 의지는 본능과 충동에 잡아먹혀 방향키를 잃어버린 듯 하다. 키를 잃어버린 김래빈은 이제 자신이 의존할 것은 제가 알고 있는 지식 뿐임을 안다. 그는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자신의 머릿속 기억의 도서관을 헤집었다. 온갖 잡다한 기억으로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기억을 정리하면서 결국, 마침내 김래빈은 바닷가의 모래를 밟는다.

둔한 본능이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적색 경보를 울려온다.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김래빈은 떨리는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떨림을 멈춰낸다. 겁쟁이같으니. 고작 이정도도 무서워,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는게 우스웠다. 김래빈은 헛웃음을 흘리며 온몸을 살짝 털어내고, 식은 땀을 손으로 훔쳐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밭은 숨이 이어졌고, 직전보다 속도가 떨어졌지만 김래빈은 여전히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제야 그는 떠올려낸다. 기억 속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찾아봤던 기록에 쓰여있던 사항이다. 붉은 줄로 별표까지 처져 있던 ZERO의 특이 사항란에 적혀있던 활자가 머릿속을 빠르게 치고 지나간다.

 

- 특이사항 : 해당 사건의 원인을 균열, ZERO라 쳤을 때 사건 발생 당시 균열 입구가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되며, 그 탓에 많은 이들이 입구를 보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ZERO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 입구가 보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데 불안한 지금처럼. 다급히 정면을 보면, 해변에는 오로지 한 사람밖에 없다. 자신이 쫓아가던 남자, 그 사람 뿐이다. 김래빈은 그게야 이 상황이 이상한 것임을 깨닫는다. 김래빈이 역사 시간에 배웠기로, 과거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샌디에이고는 미국에서 여덟 번째로 큰 도시며,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네 번째로 인구수가 많은 도시라 하였다.

역사 점수로 검증된 김래빈의 지능이 틀릴 리가 없었으니, 김래빈은 지금의 날짜를 떠올린다. 8월. 바다하면 여름 아니던가? 그것은 샌디에이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수기에 이렇게 사람이 없다니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 맞았다. 지금 김래빈의 눈에 보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므로, 김래빈은 확신한다.

이미 이 해변 어딘가에 ZERO는 존재해 있다.

결국 모든 문제는 균열이 무엇인가? 에서부터 시작한다고 김래빈은 생각했다. 물론 그는 당연히 트레이서로서의 기초 교육을 받았기에 설명할 수 있긴 했지만…. 김래빈은 차분히 머리를 굴린다, 균열이란 다른 차원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균열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생성되는가? 어찌하여 생성될 때 수많은 자연과 생명을 삼키는가? 당연히 답이 나왔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인류는 다가올 위협에 대비하며 연구를 진행해왔지만, 인류의 안전보다는 이득에 치중한 것이 컸던 탓이라. 그나마 자신은 트레이서와 균열, 능력에 대해 파고들었기 때문에 스스로 연구해온 지식이 있어, 일반인보다는 균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논문으로 이루어진 것들은 사실상 고등학생인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웠기에, 제 나름대로 그것들을 재해석하여 정리한 내용들을 떠올려본다. 직접 겪어본 일들도 충분히 있었고.

핵이란 결국 에너지의 결정체다. 자신이 직접 겪어보기로, 균열이 만들어내는 공간은 분명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는 가설이 입증된다. 물론 그것이 실재하는 공간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실재라면 균열이 핵을 기점으로 만들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핵을 기점으로 만들어지고, 핵이 부서지면 망가져버리는 균열의 행태는 어쩌면 종양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김래빈 생각했다. 우주에 붙어 그 우주의 영양분을 토대로 자신을 키워내는 것. 이 말을 해봤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믿어주진 않았었다. 또한 김래빈은 균열 내부의 공간을 결국 어느 우주의 일부분을 통째로 잘라 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물론 전문적인 판단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만들어진 어떠한 ‘우주’의 ‘일부분’이라면 서포터 트레이서들이 능력을 사용하여 밖과 균열 안을 이동할 수 있단 점에서 가설 하나를 세울 수 있지 않은가. …지금 생각할 일은 아니었지만.

결론은 핵은 무엇을 양분 삼아 만들어지는가? 그 답을 김래빈은 어쩐지 확신할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항은 아니지만.

 

입 안에서 단내가 감돌았다, 목이 쩍쩍 갈라지는 감각에 마른침을 삼킨다. 가쁘게 호흡하던 김래빈이 고개를 들자, 이미 보이지 않는 재앙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김래빈은 균열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저 남자의 바로 앞에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을 여는 순간, 막 몸을 돌려 제 쪽으로 뛰려는 남자의 시선과 자신의 시선이 겹쳤다. 타오를 듯한 안광에 시선이 홀린 듯이 빨려 들어간다.

“뛰어!”

균열이 지금 자신의 앞에 있다는 게 확실시되는 감각에 김래빈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지만 부정하던 진실을 인정하기로 한다. 저 앞에서 보이지 않는 아가리를 흉포하게 꺼내놓고 있는 것은 분명 미래에 ZERO라고 불릴 최초의 재앙이고, 최악의 균열이라 평가될 것이다.

바로 앞에서 소름 끼치는 감각과 파동이 자신을 감싸온다. 김래빈은 각성자가 되며 처음으로 느끼는 감각이었지만, 어찌하여 대부분 각성자가 그리도 험한 말을 쏟아내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뒤흔드는 충격과 함께 거부하고 싶은 벌레가 타고 올라오는 것 같은 감각이 김래빈을 휩쓸어온다. 그의 예민한 신경에 관측되는 파동. 깜빡, 깜빡. 분명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문득 무언가가 눈을 감았다 뜨는 것을 느낀 기분이 든다. 괜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봐서는 안 된 것과 눈을 마주한 감각이 선명하다. 마치 그 짧은 시간 영겁의 시간을 겪었다가 그 기억을 잃어버린 것처럼.

그는 빠르게 생각을 가다듬는다, 다른 사고를 할 시간이 없었다. 김래빈은 단 한 번도 균열 생성 때 균열 근처에 있어 본 적은 없었지만, 균열 생성 때 민간인이 균열에 휩쓸리면 무조건 죽어버리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감각은 이렇게나 선명한데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민간인이 아무것도 모른 채 휘말려 죽을 일이 현저하게 늘어날 것이다. 기하급수적으로. 실제로 그렇게 되었으니 저것이 가히 그 누구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의미의 이름을 지녔던 것이 아닌가.

 

민간인과 각성자가 다른 이유는 그것에서부터 기인한다. 균열에 민감한가, 민감하지 않은가. 민간인은 코앞에 균열이 생성되어도 알아채지 못하지만, 모든 각성자는 본능적으로 균열의 갈라짐을 감지하는 탓이다. 그건 본능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대부분의 각성자는 자신의 우주에 이물질이 생기는 감각을 본능적으로 혐오한다. 김래빈은 비록 그 대부분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혐오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김래빈은 이물질이 생기는 감각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을 침범하려는 것에서 기인하는 불쾌감을 느끼니까.

 

자신이 있는 쪽으로 뛰어오는 남자를 보며 김래빈은 모든 잡생각을 털어 내버렸다. 김래빈은 휩쓸린 민간인과 건물 같은 것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안다. 균열에 휩쓸린 것들은 전부 생성 중인 균열에 먹혀 핵이 되거나, 생성 직후인 균열 내부에 표류하거나, 균열에서 탄생한 것들의 먹잇감이 되었으니 어느 쪽이건 좋은 결말은 아님을 안다.

결국 그것이 그가 무의식적으로 제 쪽으로 뛰어오는 남자를 향해 손을 뻗은 이유이리라. 저 균열에 휩쓸리면 이 사람은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알아서. 허황된 욕심이지만 그는 제 눈앞에서 누군가가 균열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의 핵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허나 그를 돕는다면 필연적으로 제 목숨도 함께 위험해지는 것을 아주 잘 알지 않는가. 자신은 과연 생판 모를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내 목숨 하나 보전하고자 눈앞에서 누군가가 죽어가는 것을 방치할 수 있는가?

김래빈은 타고난 성정과 유년기를 기반으로 올곧게 자라, 타인의 생과 제 생을 저울질하여 한쪽을 버릴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제 목숨을 헛되이 버리는 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고지식한 그는 빠르게 새로운 길을 찾아내어 스스로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함이다, 그는 자신이 납득만 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믿었으니. 자신의 행동을 방해하는 것은 스스로가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는 그것이 자신의 목숨까지 판 위에 던져가면서 타인의 목숨을 지키고 싶다는 이유여도 스스로만 납득할 수 있으면 되었다.

김래빈은 그렇게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생각해봐, 김래빈. 제 쪽으로 달려오는 남자를 보며 추측하건대, 아까 식당의 외국인이 말했던 것을 떠올려봐. 아무래도 그가 나를 도운 것 같잖아. 그렇다면 나도 그를 도와야 하지 않아?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죽고 싶지 않은 걸. 이건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꼴이잖아. 그렇다면 너는 은혜를 갚지 않을 예정이야? 그런 비인간적인 행위는 할머님이 싫어할 거야.

그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반론과 설득이 이어졌는가. 마침내 김래빈은 이것은 죽으려고 하는 행위가 아니라 저를 도와준 이를 위해 함께 균열에 들어가는 것이라 정의내렸다. 스스로가 사지로 뛰어드는 기분이나 어떤가.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위해, 나올 방법이라도 있는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낫지 않는가. 그것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스스로를 설득하기에는 가장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납득한 것이 가장 중요했을 뿐이다.

문득 내뻗은 손을 맞잡는 온기가 느껴지는 감각에 김래빈은 다급하게 고글을 썼다. 고글을 쓰는 것은 어느 순간 몸에 배버린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눈을 굴려 다급히 상황을 살피니 바로 눈앞에서 보이지 않던 균열이 폭발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 근처를 삼키기 위해 자신을 팽창시키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 감각이 선명하게 몸에 닿는 것이 어쩐지 간지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형의 감각이 자신과 남자를 온통 둘러싼 것 같다고 여기며 김래빈이 남자의 손을 꽉 잡았을 무렵이었다. 혹시 균열의 팽창을 느낀 걸까? 제 앞에 서 있던 이가 놀라 고개를 돌리려는 것에 김래빈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손을 들어 그의 눈을 가렸다.

눈 감아. 맨눈으로 보고 있으면 다쳐. 그리 말한 후에야 김래빈은 이곳이 한국이 아님을 상기했다. 남자가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짧게 고민하며 초조하게 그를 바라볼 무렵 그의 눈을 덮은 손바닥이 간지럽다. 상대 속눈썹의 감촉이었다. 다행히도 말을 통한 것 같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느낌으로 보건대 상대는 분명 눈을 감아주었다! 김래빈은 그제야 저를 도와준 사람의 시각은 지켜내었다고 생각하며 빠르게 몸을 굳혔다. 잠시 안도해 풀려있던 몸이 긴장으로 감각을 되살리는 것을 느끼며 주변을 살펴보다 그 와중에도 시답잖은 생각한다. 고글을 쓰는 습관이 들어 다행이지, 저 눈이 멀 것만 같은 빛을 고글 없이 봤다면 눈에 큰 상처를 입었을 터다.

보랏빛 렌즈 너머로 보이지도 않던 것이 점점 팽창하는 모습이 바다 표면 위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저러니까 누구도 균열이 있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바다 수면에서나 비쳐 꾸물거리는 균열의 모습이 마치 성스러운 장면을 보는 것과도 같았지만, 그것은 지옥으로의 초대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제야 제가 하려던 행위를 시작했다. 모습을 숨기고 있던 아귀가 게걸스레 입을 열어 음식을 탐하는 모양새다. 균열의 아가리가 벌려지고, 인위적인 흡입력에 하나도 남김없이 균열로 빨려 들어간다.

푸르던 바닷물과 백사장의 아름다운 모래. 저 멀리 배치해둔 파라솔이나 의자 따위의 여름휴가용 물품들이 어디선가 날아와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 아래 수면에 비친 모습으로는 아귀의 모습이 저렇게나 선명함에도 수면 위 시야엔 저 기이한 것이 보이지도 않는다. 요동치는 바다를 보고 있자니, 저 멀리 자신이 깨어났던 쪽의 식당 입간판 또한 날아와 균열의 입구에 박혔다가 금세 사라지고 만다.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균열의 흡입력이 강했다. 그제야 김래빈은 각성을 인정받은 이후 최초로 제가 각성자라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일반인이었다면 이 흡입력에 진즉 빨려 들어가 생명을 허무하게 잃었을 테니. 두 다리를 굳건하게 모래사장에 박아넣듯 버티고 서며 문득 이상한 점을 느낀다. 저만치 거리 있는 곳에서까지 물건을 빨아들이고 있는 인력을 자신이 붙잡아둔 일반인도 버틴다는 것이. 그러나 깊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각성자라고 해도, 최종 등급은 D로 취급되는 C급 각성자지 않은가. 애초에 신체적 능력이 그리 좋지도 않았으니, 잠시라도 한눈팔면 자신도 저것의 먹이가 될 터였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문득 차오르는 것은 기이한 충족감. 드디어 ‘바라던 것’을 얻은 느낌. 한없이 밀려나 있던 초침이 제 자리로 찾아가는 감각…, 하지만 그것의 감각을 되새길 시간도 없이 그 감각은 몰려오는 거센 파도에 쓸리듯 사라지고 만다. 무엇이 있었는지 모를 하나의 조각조차 남김없이 깡그리 쓸려간 빈자리를 새긴 것은 낯선 이의 움직임이다.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래, 우선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은 이 남자와 안전하게 균열에 삼켜지는 것이었다. 그 하나만을 도로 깨우치고 양다리에 힘을 주고 얼마나 버텼을까, 억겁이 흐르는 것만 같은 시간 끝에 제로가 마침내 게걸스럽게 먹던 것을 그만두고 제 내부에 세계를 구성시키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진즉 세계는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더 공간을 넓히기 위해 한번 더 식사를 했다거나, 욕심 탓에 한 것이겠지만…. 김래빈은 저것이 한 번 더 식사한 것은 욕심 때문이라 여겼다. 이미 안에 끌려들어 간 모든 사람은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건 도발이다. 어쩌면 유혹이다. 김래빈의 머리가 차게 식었다. 그래, 이미 해변에 남자 혼자 있었을 때부터, 저것은 하나둘 사람을 잡아먹었던 것이고 그 시간에 내부에 공간을 생성했을 것이다. 부족하니까 더 먹고 싶어서, 흡입한 것이다. 참으로 지겹고 지독하지 않은가. 살아있지도 않은 것이 본능을 추구하는 것이 다른 생을 빼앗아 먹는 것이라는 게.

마침내 그것이 스스로를 팽창시키면서 드러난 허공을 갈라놓은 것만 같은 입구는 새하얀 빛으로 빛났다. 수축하는 입구 새로 그 안의 내부가 엿보였다. 빨려 들어간 이 ‘우주’의 것들이 잘게 분해되어 균열 내부 어딘가로 쓸려가는 것을 보며 김래빈은 긴박한 상황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했다. 균열 생성에 휘말리면 균열 내부가 생성되는 것을 볼 수 있구나. 그는 속으로 짤막한 감상을 남겼다. 결국 균열은 균열이니, 사실 그리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미 균열은 생성이 완료되었으니, 이제 다른 먹이를 먹기 위해 주변의 생명체를 먹어 치울 것이다. 그것만이 이어질 진실임을 알았으므로.

균열이란 것은 살아있지도 않으면서 살아있는 유기체의 생을 따라 하고는 한다. 참으로 징그럽기 그지없다. 허나 유기체가 그것에 대하여 어떠한 감상을 가진들, 이미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불과 10m도 안 되는 위치에 있던 새하얗던 균열이 흐려지더니 시야가 서서히 반전된다.

김래빈은 자신을 삼키려 드는 인력에 저항 없이 눈을 꾹 감고, 잡고 있는 이의 손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사실상 없애버린 균열. 그러한 균열 내부에 자신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 저 성급한 것이 아가리를 벌리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분명 생명체가 아니었으나, 김래빈은 때로 균열에게서 어떠한 것을 느끼고는 했다. 가령 눈이 마주친 감각이나, 이렇게 자아를 가지고 무언가를 ‘삼키려’하는 의지 같은 것들. 단단히 모래사장에 박아두다시피 했던 몸이 붕 뜨는 감각이 느껴진다. 함께 그것을 버텨내던 남자가 영어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김래빈은 그저 그의 눈을 가린 손만을 내렸을 뿐이다. 이제 더 이상 그의 눈을 보호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두 사람은 그제야 제대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정확히는 김래빈만. 이름 모를 남자는 눈에 얹어진 손이 사라지자마자 자신을 마주하며 눈을 둥그렇게만 떴을 뿐이다. 당혹스럽겠지, 당연히 그럴 터였다.

무언가를 상대에게 설명하기에는 더 이상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이 없었다.

찰나에 세계가 뒤집힌다, 더는 거부할 수도 없는 강제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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