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조, 한여름밤의 꿈
혁명 캐릭터 2차
울렁이다 못해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누군가 억지로 머리 뚜껑을 열고 뇌수까지 국자로 휘젓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면서 엎어진 바닥에 무릎 한쪽 올리는 것도 겨우 성공한 잠뜰은 문득 감은 눈꺼풀 사이로 빛 알갱이가 반짝거리는 윤슬처럼 비집고 들어와 퍼지는 걸 지켜보다 의문에 잠겼다. 마지막 기억은 분명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잠들려 눈을 감은 건데 그새 저도 몰랐던 몽유병이 생겨 바깥으로 기어 나온 걸까. 그러지 않고는 온 근육이 굳어버린 듯 뻐근한 감각과 두통, 동이 트면서 떠오르는 햇빛이 눈에 쏟아질 때의 부심을 설명하기 힘든 탓에 평소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거나 아예 상황 자체를 벗어나 사실을 확인했을 잠뜰은 아파도 가시지 않는 몽롱함으로 그만 저에게 몽유병이 생겼나보다고 가장 먼저 떠오른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당장을 납득한 채 겨우 뜬 눈동자 속에 박히는 풍경을 찡그리며 바라봤다.
…몽유병이 아니라 자각몽이었나보다. 찌푸리던 얼굴에 콧잔등까지 주름 잡아가며 그렇게 중얼거린 말이 소리도 없이 허공을 부유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구름이 꼭대기에 달려 모든 것이 높은 청명한 하늘 아래, 은은하게 빛나며 흔들릴 때마다 딸랑이는 소리를 내는 꽃과 바람 부는 숲을 누군가 도려내 박제한 듯 계속해서 사부작거리고 움직이는 수풀과 나무, 눈에 익은 꽃 여러 송이가 동화 속 요정 가루를 뒤집어쓰고 등불이 된 요정 꽃마냥 밝은 빛을 내면서 살랑이는 비현실을 보면 누구든 ‘아, 내가 꿈을 꾸나보다.’하고 그대로 자리에 누워 다시 눈을 감으리라. 기실 잠뜰 역시 누구든에서 벗어나는 독특한 인간은 아니므로 자기가 꿈을 꾸는 거란 생각이 들자마자 그대로 눈을 감았더란다. 아마 뒤이어 들린 어떠한 소리만 아니라면 고통 속에 몰려오는 잠을 낚아채 무의식의 저편으로 흘러갔을 터다.
잠뜰아.
그건 소리보다 본질적인 감각에 가까웠다. 아니, 어쩌면 실체가 없는 추상인데 감각의 일부로 느껴진 무언가일지도. 피부를 간지럽게 타고 흐르는 진동에 소름이 돋았어도 돋은 줄도 모르고, 무겁게 앉은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엎어진 자리에서 몸을 뒤집어 어떻게든 앉은 그가 소리 들린 어드메로 고개를 돌리면 빛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인영 하나가 거기에 있다.
사람의 기억은 기본적으로 오감을 토대로 구성되나 그중 대부분은 눈으로 본 장면을 중심으로 뻗어나간다. 하늘에 뜬 눈부신 동그라미를 보면 해나 달을 머릿속에 덧그리고 그걸 봤다고 표현하듯, 선명히 보지 않아도 기억 속 유사한 생김새를 끄집어내 덮어씌우고 그걸 봤다고 여기며 그때 함께 느낀 촉감이나 냄새 따위를 맡았다고 착각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잠뜰은 저가 일어나 앉은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선 희뿌연 인영이 누군지 제대로 보지 못한 동시에 그게 누군지 똑똑히 ‘보았다’고 생각했다. 잠뜰아.
오래도록 잊기 힘든 순간. 어떤 기억은 충격이 되어 해가 지나도 그날의 색채를 통째로 도려내 눌러낸 듯 잊히지 않는 법이다. 철없는 어린 시절 친구의 배신으로 뒷덜미를 잡힌 순간이나 아버지를 잃을 당시 맡았던 탄내와 무수한 흙먼지, 재회의 충격과 대장의 죽음, 그리고 매캐한 그을음과 불러도 들지 않던 고개까지. 그런 식으로 조각난 단편은 박물관에 들어간 초상보다 오래도록 낫지 않을 흉에 가깝다. 시간이 지나면서 벌어진 살점 위로 딱지가 앉았다 떨어지고 새로 돋아난 살 덕에 색이 옅어진들 몇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아서, 무심코 본 순간부터 그때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알만한 사람만 알 정도로 사적이라는 점이 그러했다. 잠뜰아? 수더분한 분위기와 단아한 모양새, 무슨 일이 생겨도 침착하게 부르던 목소리. 죽은 자는 오로지 산 자의 기억에 길거나 짧은 줄글로 살 수 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나 모양새가 난데없이 기억 속 그것과 똑 닮았으니, 그건 생을 이어가는 자가 가진 상흔이 튀어나왔다 할 수 있으리라.
내가 이번에는 무얼 잘못한 거냐. 저번에 싸운 건 화해한 걸로 기억하는데. 대답하지 않아도 혼자 주절거리는 말이 과거를 닮은 고로 이건 지나치게 선명한 꿈이거나 환상인 게 뻔했지만 자기 상태를 그 정도는 아니라고 일축한 잠뜰은 전자라 여기기로 한 모양이다. 안개로 가려진 아침 녘 봉우리처럼 희뿌옇던 인영이 가까워질수록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 하늘색 머리나 마른 듯 보여도 다부진 어깨, 테두리에 들어간 파란 박음질만 아니면 상복처럼 보였을 하얗고 검은 옷과 구두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양새며 모든 것을 말이다. 아니면 무슨 속상한 일이라도 있던 게야? 나도, 너도 친우라곤 서로가 전부니 새어나갈 일도 없다. 속 시원하게 말해봐.
성공으로 끝나 이제는 국민의 영웅이 된 전 혁명 단원과 마지막 남은 망국의 왕자이자 죽었으니 이젠 역사로서 박제된 왕이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는 사실도 구설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적어도 동화에서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기에 이토록 허물없이 말을 건다는 구절은 없었다. 그렇다고 기적을 믿기에는 많은 일이 지났으므로 다섯 발짝 앞까지 다가온 것이 저를 잡아먹으려 드는 건 아닌지,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고 이상한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따위의 의심을 얼굴에 덕지덕지 붙였으면서, 제깟 게 그래서 어쩔 거냐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꿈에서 깰 마음이 잔잔하게 깔린 것이 또 우습다.
“너 라더야?”
“그럼 나 말고 다른 라더도 있나.”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들어주려 했더니 헛소리 하는 걸 보면 괜찮나보다고 말하면서 내민 손을 미심쩍다는 눈으로 노려보던 잠뜰은 물웅덩이 때리려는 고양이처럼 차마 닿진 못하고 허공에서 움찔거리기만 하던 제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나아가는 어떠한 환상을 가만히 바라본다. 항상 소개 받기만 했으니 이번에는 소개할 준비를 톡톡히 했다며 신난 목소리가 흩어지는 바람을 타고 아스라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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