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과 잔념
: 강사라
사랑해.
우리 알아. 알아버렸어. 둥글게 휘는 눈꼬리 사이로 음습하게 바닥을 기는 이성이 연명하고 있어 원시적 본능만 간신히 숨 쉬고 호흡할 수밖에. 속절없이 헤어 나오지 못해 갇혀버린 말로잖아. 이 모든 것은 미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미쳤다고 하겠지.
세계는 예언되었다. 누설되어서는 아니 될 천기. 세계가 한사코 감추던 묵시록을 읽어낸 그것은 아이였고, 작고, 미성숙하고… 무학력자, 비과학적, 미성년자. 또한 말간 볼 붉히고 총기로 눈 빛내며 숨 쉬어 별과 하늘을 호흡하는. 어찌 되었건 그 소식 꽃잎 사이로 숨켜두어 세 송이 전했건만, 불행히도 그 말을 믿기에는 이 사회는 건조하고 맹목적 냉소라.
그래서 세상은 멸망했습니다.
..나는 멸망 뒤에서야 겨우 눈을 떴고요.
전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까. 폐허가 된 건물과 도로 사이에서 나 홀로 되어보았자 아무런 기쁨 없어요. 이 몸 하나 살겠다고 팔아버린 개평 사기꾼인 줄 아나요? 내 발이 방금 콘크리트 조각에 걸려 균형을 잃었습니다. 건물 꼭대기를 뭉텅 무언가가 베어 물고 뱉어버린 부분인가 봅니다. 우당탕탕, 무릎은 힘없이 꺾이고 균형 하나 잡지 못하고 쓸데없이 나뒹굴어 버렸어요. 팔은 통제를 잃고 나뒹굴고 아직 채 어른도 되지 못한 육체는 여린 살갗 찢어진 채 새빨갛고 찐득거리는 액체를 머금는데, 흰 단화가 아스팔트 횡단보도 바닥에 구겨져 벗겨지고 머리카락은 올 단위로 빠져나와 목과 얼굴에 달라붙어요. 그러나 도시를 울리는 소리는 단지 그것밖에 없습니다. 내가 고통에 겨워 비명 삼키는 소리. 온통 적막. 적막. 적막… 오, 하늘이여.
하늘에는 이렇게 별이 많은데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북극성과 북두칠성, 저것은 직녀성과 견우성. 금성과 목성. 그리고 내 머리 속에 있는 것은 온전한데 도저히 눈으로 읽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을 읽을 수 없어요. 나 문득 쓰러져 무릎 꿇은 채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본다는 행위 하나가 없어진 탓입니다. 오래도록 살아온 삶의 일부 사라진 자리는 쓰라려 웅얼대는 소리 하나 삼키고 철썩 다시금 물러갔습니다. 부서진 경첩, 아무리 손에 핏줄기 선 두 개 터져라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아요. 눈은 하늘 담는 거울, 하늘 여는 문 잃은 나는 이제 범인으로 전락하고야 말았어요. 미칠 듯한 공허에 아릴 듯이 주려오는 것은 찢어진 영혼의 결합부 날과 생으로 야만으로 거칠게 뜯겨나간 일부의 봉제선. 그래서 결국 그날을 곱씹어 결국 떼어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날은 날이 아주 좋았습니다. 하늘에는 구름이 파란 만큼 선명한 노을이 물들고, 농밀하게 점점 떨어지는 석양 미처 남은 빛 뿌리며 산 너머로 전락한다면 비로소 밤과 별이 오고야 말며, 나의 하늘. 내가 사랑하는 하늘. 그것을 잠자코 읽노라면 나 이 세상을 훤히 알 수 있었습니다. 내 정신은 이곳에 갇혀 있으나 비록 저 건너가는 다른 것보다 너른 세상에 발 딛고 서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이게 좋았습니다. 다른 이들의 많은 것을 엿보고 알 수 있었어요. 예를 들자면... 저 적선하듯 내게 옷을 던져주는 저 자는 이곳으로 오기 전 어떤 젊은 청년을 말로 홀려 헛제사를 약속받았다는 점이요, 그가 모시는 신은 한낱 늙어버리고 말라버려 힘조차 없는 어떤 할멈임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에서 나오는 우열은 기꺼이 삼켜버리자 중독이 서서히 사지 말단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것의 이름은 오만과 자만이요, 결국 인간을 본질적으로 돌이켜버리고 마는, 고대로부터 별이 이 지구를 살피는 동안 무수히 반복된 독의 역사였으며 무반성적이고 무지한 자들의 눈조차 가려버리는 함정이나 다름없었어요.
이러한 오만 어느샌가 내면에서 감정을 잡아 삼키며 탐욕스레 장성한 그것을 알아차리는 이 얼마 없었습니다. 마주하기만 한다면 두 살배기 아이조차 절 훤히 꿰뚫어 보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담 안의 강사라. 그 이름 석 자를 아는 자는 몇 없었으니까요! 나조차 그것을 인지하면서도 방치했습니다. 그것이 주는 도취와 흥분, 그리고 말단의 쾌감은 젖어들기에 충분했어요. 이제야 털어내는 회고입니다. 들을 수 있는 자도 없으면서요, 엉망진창으로 벌어진 상처를 봉합할 생각도 않은 채 버려진 도시를 활보하는 그림자, 입 안에서는 침이 말라붙고 기도가 뜨겁게 부어올라서 폐가 저 지하 아래로 떨어지다가 끌려오기를 반복해요. 끝내 만들어지지 못한 언어로 끊임없이 속죄합니다. 내 오만을 간절히 빌어요. 잘못을 반성할 수 있는 것은 미성년자의 특권 아닌가요? 그러나 도대체 왜 나는 반성하고 다시 재정립하여 돌이킬 수 없나요. 침묵에 대한 그 오랜 찬사를 이행할 수가 없나요. 아무도 없는 세계에 반복해서 외쳐보았자 정작 대상은 온 데 간 데도 없을 텐데도요.
하지만 역시 나는 아직 방관에 대해 침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결코 당위성과 별들이 정한 운명 따위에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휩쓸려 버리는 것을 바라만 볼 수 없어요. 내가 알고 또 무언가 세계를 이루던 인간종이 사라지는 것 그 대단위의 흐름 가운데 무력하게 서자면 그리고 하늘에 말하건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결국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무언가였다고요. 내게 그것을 보여준 건 조그만 별들이었는데, 하늘을 가리우던 안대를 벗겨내어 내게 보여준 것은 그대들이었고 이렇게 될 줄을 몰랐나요? 내가 이 세계에 가진 것은 부채와 의무 따위 뿐이로소.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썩어가는 흙과 하늘에서는 정체된 답답함이 들어요. 보도블록과 아스팔트를 들고 일어나는 대자연은 인공적인 건축물을 완전히 삼켜버립니다. 물들은 초록이 세상의 초록을 읽어요. 그 속에서 경도되어버린 인간 하나는 매우 보잘것없을 겁니다. 방어도 공격도 하지 못해요,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은 얼마나 바닥을 기게요. 살은 물러서 날카로운 것에 쉽게도 갈라지겠죠. 세계에 남은 인간 하나는 보잘것없고 한심하여 도태되어 버릴 것입니다. 한 줄기 이는 바람에도 사람 하나는 순수하게 비관했습니다.
담쟁이 넝쿨 뒤덮이고 푸른 풀 덮인 건물 안쪽은 바람이 시원하게 들락거립니다. 거실에 따사로운 볕을 투과시켜주었을 유리창은 잔해도 남지 않고 뚫려 버린 지 오래. 식물의 포자는 쉽게도 날아들었겠죠. 발밑에서 마른 풀과 이끼가 버석거리며 밟혀들었습니다. 가운데 와중에는 작은 자갈과 돌먼지도 섞여 흙먼지가 엉망진창으로 가라앉았어요. 이곳은 한때 아늑한 보금자리였겠죠. 누군가가 생활을 이어 나갔을, 아니 그래. 더 이상 나는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도 정보를 얻을 수 없죠. 그 소실된 감각에 신경은 첨예하게 갉아 먹혔습니다. 지금도 예민하게 곤두선 피부 너머 느껴지는 꿉꿉한 습기가 무거웠어요. 아, 무언가라도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안쪽에서 느껴지는 단면, 거대하고 광막함을 흘리는 공허는 사정없이 아려서, 어떻게라도 채워야 한다는 강박은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움직이는 생명체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다행입니다. 움직이는 무언가 살점 씹을 것이 있었다면 그대로 달려들어 갈기갈기 물어뜯는 야만적이고 비위생적인 짓을 저질렀을지도요. 나는 집 안을 헤매며 냉장고나 식재료 따위를 찾아다녔어요. 마치 걷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말끔해. 분명 과거였다면 이 한 몸 곧바로 서로 끌려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부서지고 망가진 집 안을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말끔해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데, 내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곳은 다른 이도 그렇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헛웃음이 나 천장을 문득 바라보았어요. 쩍 갈라진 금이 위태로웠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위기의식 들지 않아요. 차라리 죽어버리면 편할까요? 빈 속을 움켜쥐고 그나마 말끔해보이는 소파에 눕기로 합니다. 푹신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아주 납작하고 딱딱하고 불편했어요. 미세하게 박힌 돌조각들이 피부를 눅진하게 저몄습니다. 불편한 먼지가 기관지로 들어오는 기분이 들어요.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에 대응하기에는 지쳤어요. 휴식이 필요합니다. 부족한 에너지를 충전해야 했는데 실패했으니까, 쏟아지는 졸음에 속절없이 눈을 감습니다. 저물어가는 저녁, 주황색으로 물든 저녁놀. 황혼에 젖은 이곳. 그곳이 내가 마지막으로 보는 전부입니다.
속삭입니다.
이 풍경이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라면 좋겠어요.
비웃고 약 올리듯 다시 눈을 떴습니다. 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바닥에는 남아있어야 할 발자국 위로 새하얗게 먼지가 다시 얇게 앉아 있었습니다. 소파에 얼굴 묻으면 텁텁한 먼지들이 얼굴 위를 마구 문지릅니다. 콜록, 절로 나는 기침을 삼키며 졸린 눈을 깜박였습니다. 어느새 상처들은 피가 멈추고 대충 아물어 있어요. 저 하늘의 환한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아침의 여명입니다. 황혼이 전복되고 그 부스러기가 하늘에 남아 있는데, 온통 하늘을 본다면 채 흐려지지 않는 황혼의 눈들뿐. 그것들은 언젠가 강사라의 말이었고, 승리패이자 원천이었던 일부였으나 자랑스레 여기던 능력이 부서지고 남은 것은 봉쇄와 구속, 격리.
인간에게 두 발로 걷는 것이 당위적 명제이듯, 강사라가 별에게 사랑받고 속삭이는 운명으로 나 현실의 시간선을 인지할 때 거대한 시간의 흐름에 불순물 끼듯 깔아뭉개지는 것 또한 당연했습니다. 거시적이고 고차원적인 인지가 차원의 중력에 고꾸라지고 전락하고 말자, 그 몰락을 명료하게 훑었다면 필시 인간 최후에는 끔찍하리만치 비참한 몰골의 죄수밖에 남지 않았을걸요. 무수한 가정으로 말미암아 과거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면 그것이 죄수와 무엇이 다릅니까. 고상한 긍지 따위도, 고결한 명예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좋아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한 보통의 것입니다. 결국 낙제점의 성적표를 가슴에 새긴 채, 이 이유 모를 상황의 해결 방도를 찾아야만 해요. 좌절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듯 어느새 태양이 강렬하게 낮과 함께 떠올랐습니다.
놀라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곳에서는 섭취의 형태를 띄어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아도 움직일 수 있었어요. 단지, 그저… 오랜 굶주림과 허기가 정신을 갈기갈기 난도질할 뿐. 하늘과 대지가 뒤섞이고 상식의 귀퉁이를 갉아먹으며 내 길지 않은 역사가 부서지는 가운데, 그런데도 단단하게 걸음 딛을 수 있는 것은 명백한 책임이자 자존심의 일말입니다. 강사라, 그 이름을 결코 아귀도의 물살에 흘려보내지 않겠다고요. 눈 감으면 손끝 피부가 서걱이는 철 표면에 달라붙습니다. 사고가 활자의 형태를 잃고 마구 무너져내렸습니다. 손가락으로 캔의 손잡이를 움켜쥐었습니다. 손등에는 푸른 핏줄이 돋고 피가 쏠려 살이 붉게 익기 시작합니다. 끄드득 뻐걱이는 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뚜껑이 일부 틈을 보이고서야 말아요.
손가락으로 그 속을 푹 찌르면 수월하게 푹 갈라지며 손에 들러붙는 기름. 무언가의 살이었던 것은 살구색으로 익고 미끌거리는 기름에 재워 오래도록 방치되고서야 겨우 깨어납니다. 덩어리진 살에서는 무른 탁색의 기름이 뚝 떨어졌어요. 손가락과 손톱 사이를 비집어 벌리고 자리를 잡고서야 마는 살점들과 굳은 기름. 거칠게 거피 뜯겨나간 입술이 달싹이는데, 머리의 이성이 흘러가지 못하고 고여버렸어. 무의식적으로 그 손가락을 핥아대자면 형용할 수 없는 불쾌감. 이것은 경종이다. 그러나 드디어 이 허기를 채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혹은 탈피감에 비상구를 발견한 그 무언가의 마지막 탈력처럼. 강사라는 손가락을 웅키고 걸신들린 것처럼 입으로 가져가기 바빴습니다. 옷깃 위로 툭 떨어지는 살점 부스러기. 하관이 기름으로 범벅되어 목선을 타고 흘러내리던 옷깃이 축축하고 찝찝하게 젖어들었어요. 말라 있던 입에 기름이 돌고 그것을 꾸준히 자신의 몸 안쪽으로 흡입하여 몸 한구석을 채우는 행위. 이건 몹시도 야만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라 나는 구차하게도 아직 삶을 구걸하고 싶나 봅니다.
나는 아직…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던 세계였습니다.
너.
나.
우리.
고독한 표류의 여정을 열어젖히는 가장 원초적인 호명을 계속하기로 해요. 서로에게 닿기를 서슴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니 내 이름을 계속 불러주시겠어요,
만일 이름을 잊게 되더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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