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하지

: 도헌영

: oc by 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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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새벽 공기가 맑았어.

하늘이 아주 파랄 거야. 세계가 무너지는 날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나는 그 말에 가방에 짐을 싸는 것을 멈추고 옆을 돌아보았다. 낡은 화장실, 창백한 조명. 모눈 벽 세면대 위 벽거울 속에는 혼자서 말하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 정상인이라면 상종조차 하지 않을 미친놈. 안면과 목 부위를 덮은 붉고 찐득한 천 조각. 그 아래 갈라진 살은 아물기는커녕 고약하게 곪아 끔찍한 냄새가 났다. 창백하게 물든 낯은 곧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손톱은 깨지고 입술이 거칠게 튿겼다. 피부를 덮은 천조각들은 온갖 액체에 오염된 흔적과 체취가 역력했다.

그는 무력했다. 다 해져가는 노란 파카는 몸에 맞지 않았고, 운동화는 너덜거렸다. 빌어 입은 옷은 무거웠다. 무엇이 올라가 있는지는 몰랐다. 구제 옷에는 귀신이 들린다던가, 그런 괴담을 믿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게 올라가는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런 것들 있잖아. 빈틈을 메우는 건 결국 걸러낼 수 없을 만큼 진득하게 달라붙는 것들 뿐이다. 날실에 죄책감을 얹는다. 씨실에 지겨우리만치 서러운 외로움을 가닥 꼬아 날실에 얽었다. 베틀이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철커덕, 철커덕. 발판을 밟고 한 번 그들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른 구석을 발견하면 거침없이 후벼 댔다. 손톱 아래나, 겨드랑이 사이 같은. 채 굳은살이 얹혀지지 않은 아주 부드럽고 무른 자리를. 슬그머니 무방비해지는 시간이면 피부를 젖히고 감각 신경 말단을 갈기갈기 찢어댔다. 그런 날이면 헌영은 덮쳐오는 우울에 지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마른 눈가를 간신히 덮고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몸을 둥글게 말고 간신히 숨을 쉬었다. 이산화탄소가 섞인 뜨거운 호흡이 눈가를 간지럽히고 부족한 공기에 내장근육이 수축했다.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으려 했다. 무뎌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래서 수없이 뒤척이는 얇은 밤을 새운 것이다. 꺽꺽거리는 감정을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전혀 개의치 않는다. 손이 파리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방 속에는 가지런히 접힌 담요와 찌그러진 생수 두 병, 녹아서 달라붙었을 다이제 몇 개와 달착지근하게 녹은 사탕 두 세개, 학교 벽면에서 찾았던 비상용 손전등(잘 뜯어지지 않아서 고생했다)과 지도가 그려진 팜플렛을 넣었다. 아, 펜, 그리고 수첩 대용으로 쓰는 학습 플래너도. 표지에는 계원고등학교. 3학년... 도헌영. 바람에 페이지가 넘어갔다. D-340. 아, 일순 떫은 침음이 흘렀다. 자O스토리 영어 영역 3회, 수능O강 국어영역 문학 15강, 16강. 마O텅 수학 영역 기출 모의고사 14회… 총 십삼시간 사십 이 분 오 초. 그 모든 활자 위를 따라 걸었다. 천천히 덧그리는 손이 굼뜨게 움직였다. 간결하게 적힌 글씨가 손상이라도 입을까. 대체 졸업은 언제 하는데? 못 한다고 했잖아. 나는, 아주 얇은 공기를 한 겹 두른 채 그 페이지를 하염없이 어루만졌다. 이래도 그 때를 되살릴 수는 없구나. 메인 목이 따끔거렸다.

이제 그만 가야지. 해가 시리게 떠오른다. 아침이었다. 밤새 엉망으로 떡진 머리가 목가를 간질였다. 위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부끄러웠다. 적당히 씻을 곳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어. 그리 중얼거리는 건 엉망으로 갈라진 목소리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에 말이 얼어 툭 대지로 떨어졌다. 듣는 사람 없는 말은 그렇게 버려지는 법이다. 

헌영은 모자와 장갑을 고쳐 쓰고 가방을 들어올렸다. 무게중심이 갑작스레 쏠리며 걸음이 휘청거렸다. 장난하자는 거야? 웃기지도 않았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이 날카로웠다. 피부가 얇게 저며졌다. 상피 점막 아래까지 바람이 파고들었다. 그래서 피부가 한 겹씩 나풀 나풀 떨어지면 헌영의 이성도 조금씩 얇아졌다. 내가 방금 배 쪽으로 발을 내밀었는데 그건 뒤쪽이야. 그래서 다시 앞쪽으로 내밀려고 했더니 세상이 45도로 기울어졌어. 앞이 사실 오른쪽인데 나는 뒤라고 인지를 하고 있었던 거지. 아니 이게 아니라, 오른쪽은 사실 전방이야, 우리는 좌측을 앞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다시 설명해 줄게. 동쪽이 앞쪽이니까 너는 왼쪽이 뒤일 수밖에 없어. 인체의 신경 회로가 미로처럼 얽혀버렸어. 삼 곱하기 삼은 구. 사인 공식과 코사인을 이용하여 삼각형의 길이를 구하세요. 여기서 해당 각은 예각이고 간신히 오른쪽으로 허리를 내밀고 땅과 가까워졌을 때 반대로 허리를 세우면 사십일과 십칠분의 일 그러면 해당 표본평균은…. 그래서 겉옷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다 빠지고 더러워진 털이 볼의 표면을 스쳤다. 여전히 추웠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그것에 안도한다. 다행이야. 

이곳은 혹독했다. 호의를 베풀어 줄 사람도, 보답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서러웠다. 헌영은 결국 열 아홉살이었다. 아무렇게나 내팽겨쳐져서는 홀로 일어섰지만, 그래도 옆에 누가 있었으면 했다. 겨울이라서. 겨울이라서 그래. 의미 없는 말이 입가를 적셨다. 온기를 나눌 누군가가 없어서 이 겨울은 시렸다. 덥고 습했던 그 여름날이 거짓말 같았다. 불편한 교복이 식은땀에 젖어 축축했던 그때가. 채도 높은 파란이 우리를 적셨을 때가. 한순간에 뒤집어져버린 계절은 비현실적이었고, 그래서 헌영은 남는 눈물을 조금 흘렸다. 자기 연민은 아니었다. 저를 불쌍히 여길 만큼 나약하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그리웠다. 사람이 보고싶었다. 믿음직했던 급우들과, 그리고 후배들이. 이미 졸업한 선배들이 보고 싶었다. 여기는 너무 춥고 삭막해. 내 앞으로 와서 숨 쉬어 줘. 말을 걸어줘. 돕게 해줘. 그럼으로써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해줘. 그래서 헌영은 조금 많이 울었다. 보고 싶어. 목놓아서 불러 보았다. 튿기운 입술은 찢어져서 짭쪼름한 맛이 났다. 그렇게 차가운 겨울 끝을 울며 걸었다.

헌영에게 지금은 여전히 어색했다. 식량도, 이동도 여력 안에서 혼자 되어 해야 했다. 도움을 청할 구석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뒤에 없었으며 단지 저 하나를 건사해야만 했다. 그 홀로됨이 너무나 낯설다. 그래서 과거 저를 움직이게 하던 동력은 책임감이었음을 통감하는 것이다.

사람은 어떨 때 살아있음을 느끼는가? 헌영은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 때야말로 스스로를 느꼈다. 나를 무언가로 살아있게 만드는 감각은 유의미한 필요조건이었고 사회에서는 배려와 다정? 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건 도덕이야. 하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잖아요. 불특정다수를 돕는 것은 무수한 변수가 적용되어야 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너와... 도울 능력이 있는 나. 그 모든 변수가 조율되어 내가 너를 돕자, 비로소 세계가 움직여 인연을 맺었다. 톱니가 우연히 맞물렸다가 떠나는 찰나, 그 찰나에 헌영은 살아있었다.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고, 인연을 맺으며 비로소 이 세상에 발 딛고 일어서 있었다. 그 감각은 지독하리만치 황홀했고 포근한 파스텔 색상의 속삭임처럼 가라앉았다. 좋다. 그래서 헌영은 타인을 돕기를 멈추지 않았다. 무수한 손해에도 굴하지 않았고, 또 기대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단지 사람됨은 비합리의 증명이라서.

나는 사람이야. 사람으로 나서 사람으로 죽고 싶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아니라. 불신과 잔인한 선고가 가득찬 현실이 아니라.

아, 괴물처럼 보이는 후배들을 도저히 후배라고 볼 수가 없어 뒷걸음친 때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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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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