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자각몽

12시의 도밍게즈 1, 2부 스포일러

미필적 고의 by 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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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의 타이머, 로완 프린에 대해서.

돌아온 후에도 그는 그대로였다. 언제나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났다. 보통 사람보다 몇 배는 밥을 많이 먹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거나 해야 할 일을 했다. 늘 유쾌하게 올라가 있는 입꼬리나 요란한 웃음소리 따위도 똑같았다.

 

앰플 투여에 반항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아직 있을 곳을 찾지 못해서인지, 그리운 별의 바닷물이라서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별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니까, 의무잖아, 이 정도쯤은 다할 수 있지. 그런 말로 가볍게 넘어가곤 했으니.

다만 록스 포엘은 한 가지를 간파할 수 있었다.

로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고.

 

00

로완은 귀환 버스 안에서 잠들지 않았다. 태연하게 과자를 먹으면서 앞 유리를 보고 있었다.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포장지를 반만 벗겼는데, 아마도 옆에 앉은 록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였다. 록스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창가에 기댔다. TV에서 심야 뉴스가 흘러나와 귀를 간지럽혔다.

“해당 건물은 전소되어 복구가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일가족을 태운 자동차가…”

어린아이가 사망자에 포함되어 있다. 그 사실은 순식간에 바닷가의 잔상을 불러왔다. 하나로 묶은 연갈색 곱슬머리, 불안과 다정을 동시에 품고 있던 녹색 눈동자. 흰 상자가 바닥과 마찰하던 장면이 눈앞에서 재생됐다. 록스가 눈꺼풀을 꾹 눌렀다가 뗐다. 그리고 로완을 돌아봤다.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말간 낯을 보면 답답해질 것이 분명했지만, 그 덕에 체념이 빨라지기도 했으므로.

“…”

그러나 그때는 도움이 안 됐다. 록스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로완의 넋이 나가 있었다. 시선을 큼지막한 화면에 고정했으나 초점이 없었고, 손은 과자를 든 채 멈췄다. 꼭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 같았다. 록스가 입을 열었다.

“야.”

어깨를 흔들거나 툭 치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내뱉듯이 부르기만 했는데, 다행히 그의 파트너는 록스에게 적응한 지 오래라 곧장 반응했다.

“불렀어?”

“그래. 정신 좀 차리라고.”

“응.”

버스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타이머와 카운터 들이 속삭이는 소리조차 크게 들렸다. 그렇기에 로완은 간식을 마저 베어 물었고, 록스는 물고 늘어지는 대신 등받이에 파묻혀 잠드는 쪽을 택했다.

 

“록스.”

“일어나 있어.”

“언제 깬 거야?”

“…흔들려서 잠이 안 오던데.”

짜증을 담아 대꾸하며, 록스가 제 목덜미를 주물렀다. 등이 약간 배긴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얼마 없는 짐을 챙기고 나니 새벽녘이었다.

“그럼 아침에 보도록 하지.”

하인리히 장교가 가볍게 인사했다. 리슬러 부관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장교의 뒤를 따라갔다. 남은 구원자들은 그제야 소리 내어 떠들면서 걸음을 옮겼다. 로완이 물었다.

“안 가, 록스?”

“가야지.”

록스와 로완은 비뚤배뚤한 행렬의 맨 뒤를 차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열의 끝에 있는 페어로부터 3미터가량 떨어져 있었다. 느긋하게 숙소로 가면서 로완이 운을 뗐다.

“있잖아.”

“…또 뭐.”

“그 애는 사라져버린 거겠지?”

록스가 잠깐 생각했다.

“뉴스에 나온 사고를 말하는 거라면, 그럴 확률이 높겠지.”

“모래사장에 남은 발자국처럼 말이야.”

그 말에 록스는 자그마한 흔적을 떠올렸다. 그것은 파도에 휩쓸려 갔다. 불이고 물이고, 범람하는 것들은 늘 앗아서 없애기 마련이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로완이 기지개를 쭉 켰다.

“그냥.”

구하지 못했다는 게 아쉬워서. 생략된 말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었다. 록스가 한 발자국 뒤에서 말했다.

“넌 대체 왜 그렇게 의무에 충실하려는 거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알아서 내 몫까지 하면 나야 편하고. 그런 문장들이 덧붙었다.

로완이 그를 보며 웃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01

록스는 딱히 답을 바란 게 아니었다. 그래서 로완이 말해주든 그러지 않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아니, 한편으로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복잡한 속마음 따위를 알아봤자 자기만 불편해질 뿐이니까. 애초에 로완 프린에게 그렇게 번거로운 사고 과정이 있으리라 예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인간이지 않은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그러나 이 파트너는 항상 록스의 기대를 배반했다.

“귀찮다, 진짜….”

그나마 전보다 낫다고 느낄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이것이 로완의 의지로 록스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는 점.

요 며칠간, 로완은 종종 무의식중에 환각을 펼쳤다. 깨어있을 때는 온전히 능력을 컨트롤했으나, 수면 시에는 제어가 풀리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 하나, 로완과 록스는 생활 패턴이 꽤 겹치는 편이다. 특히 잠은 동시에 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슨 원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때 파장이 맞아들어 간 걸까? 록스는 자꾸 로완의 꿈에 말려들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잠시 후, 풍경이 낯설고 감각이 붕 떴다. 그것으로 꿈속이라는 걸 확신했다. 주위는 평범한 도시였다. 쇼윈도에 비친 록스의 모습은 평소와 달라지지 않았다. 도밍게즈의 제복 대신 셔츠와 바지 차림이라는 것 정도가 차이라면 차이일까. 우울한 낯을 짧게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몇 번인가 이런 공간에 들어와 본 적 있지만, 파훼법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똑같이 능력을 써서 찢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꿈이라는 특성 탓인지, 곧장 다른 장소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록스는 결국 포기하고 로완이 깰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저 멀리 고층 빌딩이 촘촘하게 늘어서 있었다. 근처는 노점상이나 옷 가게 따위로, 그가 있는 곳은 번화가의 골목인 듯했다. 인파가 많지도 적지도 않은 구역 말이다. 바람을 타고 길거리 음식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달짝지근한 향을 맡기만 해도 더부룩해졌다. 그는 자리를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정돈된 곳에서 대기하고 싶었다.

록스는 걸어가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곳의 구성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간판마다 쓰인 문구나 서체가 달랐다. 종류도 제각각이었고, 같은 업종끼리는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진 것이 실제 상점가의 배열과 유사했다. 게다가 지나가는 사람도 전부 개성이 있었다.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라면 다소 흐릿하게 둘 법도 한데, 얼굴의 생김새부터 머리나 옷 스타일까지 겹치는 것 없게 만들어졌다. 그 외에 건물의 노후도나 청결까지 세세하게 나누어 둔 것 같았다. 혀를 쯧 찼다. 쓸데없는 데 매번 공을 들여.

좁은 길을 빠져나가 대로변으로 나서자, 인구 밀도가 확 늘어났다. 바쁜 걸음이 수십 수만 개 그의 사위를 돌아다녔다. 매연이 섞여 호흡이 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록스는 불쾌함을 눌러 참고 고층 건물들을 살폈다. 조용하고 깨끗한 곳. 회사가 그럴 확률이 높았다.

“…저기 있네.”

한 회사원의 뒤를 쫓아 들어갔다. 점심을 밖에서 먹었는지, 입가에 미처 못 닦은 기름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그의 알 바는 아니었다. 회사원은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 시야에서 사라졌다. 록스는 아무런 방해 없이 로비로 향했고, 한쪽에서 프랜차이즈 카페를 발견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드시고 가시는 건가요?”

“네.”

“진동벨로 알려드릴게요.”

주머니 속에 지갑이 들어 있었다. 내용물도 기억하는 대로였다. 꿈이니 개연성을 따질 필요는 없었다. 록스는 봉급과 광고비 등이 입금되는 카드로 결제를 마쳤다. 자리에 앉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그는 음료를 받고 나서야 테이블을 정했다. 창가에 놓인 2인석 중,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밖은 여전히 환했다. 거리 전광판의 시계에 따르면 지금은 12시 45분이었다. 어쩌면 실제 시간과 딱 12시간 차이가 나는 걸지도 몰랐다. 로완 프린의 기상 시각은 4시. 3시간이 조금 넘게 남았다. 록스는 푹신한 카페 의자에 등을 대고 미끄러졌다. 뭘 해야 할까. 되도록 에너지를 절약하면서 생활하는 건 록스의 특기였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오락거리도 없이 몇 시간을 버틸 자신은 없었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카페에서 휴대전화도, 책도 보지 않고 아메리카노만 홀짝이는 사람은 사이코패스라고. 차라리 잠이라도 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꿈속이라서 그러지도 못했다. 록스의 정신은 또렷했다. 평소보다 더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쨌든 방법이 없다. 찾을 마음도 들지 않았다.

 

바깥을 보다가, 득실거리는 인파에 기가 질려 시선을 돌린 것이 12시 59분. 체감상 그 5배는 지난 것 같았다. 커피가 담긴 머그잔에 손을 가져가던 록스가 동작을 뚝 멈췄다.

“…”

뭐야? 같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제 맞은편을 차지하고 앉은 남자를 노려봤다. 검게 일렁이는 눈빛에 남자가 졌다는 듯 웃었다.

“록스, 나 뚫리겠어.”

하얀 머리칼과 하얀 옷의 남자. 로완 프린이었다. 록스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염치도 없지.”

“화났어?”

“…”

록스는 로완의 말을 무시했다. 대신 굳었던 손가락을 움직였다.

“저번이랑 똑같은 걸 시켰네? 여긴 메뉴가 더 많은데.”

로완이 턱을 괴고 물었다. 록스가 식은 커피를 머금었다. 대답은 그 후에 돌아왔다.

“먹을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여전히?”

“그래.”

말하면서 록스의 주의가 창밖으로 쏠렸다. 12:59. 전광판의 글씨가 바뀌지 않았다. 꼭 로완이 나타나고부터 시간이 멈춘 것처럼. 행인들의 실루엣도 점토처럼 뭉개졌다.

“비위 상하게.”

그가 핀잔을 입 밖으로 냈다. 로완이 꿈의 주인이니, 그의 의지로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모르겠다는 양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짧은 침묵을 지나 록스가 말했다.

“풍경 말이야.”

“아, 사람이 너무 많다고?”

“…”

“곧 줄어들 거야. 점심시간이 끝나가잖아.”

물론 그랬다. 아까에 비하면 많이 한산해진 것을 록스도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 하, 됐다.”

일일이 짚어주기도 귀찮았다. 일부러 그랬대 봤자 록스의 주목을 받고 싶어서라는 같잖은 이유에 불과할 것이다. 대신 록스는 더 직접적이고 중요한 주제를 꺼냈다.

“왜 온 거야?”

꿈에 휘말리는 동안, 로완은 꿈에 등장하지 않았다. 아는 사람의 얼굴도 없었기에 록스는 늘 철저하게 혼자였다. 매번 자각이 들면 거울을 먼저 확인했다. 혹시 ‘역할’을 받아서, 저 자식의 거죽이라도 뒤집어썼을까 봐. 다만 그랬던 적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로완은 나타난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변이었다. 로완이 가볍게 웃었다.

“구하러 왔지.”

록스는 곧장 되물었다.

“누구를?”

로완은 테이블을 짚고 일어났다. 록스는 따라 하지 않았다. 로완이 록스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가 제 이마의 검은 보석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반짝임을.”

의문사에 맞는 답이 아니었다. 로완은 더 말할 것이 없다는 듯 미소를 지은 채로 카페에서 나가버렸다.

“…어이가 없어서.”

그 한마디가 마지막으로 로완의 귀에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회전문을 통과하던 그가 쿡 웃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록스는 한숨을 내쉬고 남은 커피를 전부 마셨다. 생각이 바뀌었다. 뭘 구하는지 봐야 다음에 또 이 난리를 칠 때 금방 빠져나올 수 있다. 텀을 두고 쫓아가서 적당히 엿보는 게 나을 듯했다. 트레이를 반납대에 올렸다. 직원이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아. 죄 없는 사람의 면전에 대고 말할 순 없어서, 목만 까닥였다.

 

밖으로 나갔다. 보도블록을 밟자마자 로완을 찾아냈다. 그는 횡단보도 왼편의 가드레일에 걸치듯 앉아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로완은 길 건너에서 록스와 마주 보고 있다는 거였다. 그의 다리가 아슬아슬하게 차도에 걸칠 듯 말 듯 했다.

“…하…….”

뭐 하는 거냐고 소리칠 기력도 없었다.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에 온통 먹힐 터였다. 어차피 위험한 곳에 달랑달랑 있는 건 로완 프린의 취미였다. 그렇지 않으면 옥상에서 떨어지기 직전까지 나아가 별을 관찰할 리 없었다. 로완이 록스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따라 나온 게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록스는 코웃음을 쳤다.

‘파란불에도 저게 이쪽으로 오지 않으면 내가 가야겠다.’

팔짱을 끼고 로완과 눈을 맞췄다. 라임색 눈동자가 답지 않게 잠깐 떨었다. 왜 저래, 뭐 잘못 먹었나? 그가 아는 로완 프린은 공포를 모르는 인간이었다. 생각도 없고. 인상이 찌푸려졌다.

자동차들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사람으로 보이는 뭉텅이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로완은 여전히 가드레일 위에서 록스를 보았다. 록스가 손가락으로 제 팔을 느리게 두드렸다. 톡, 톡, 톡. 25초가 지났다. 뭉텅이들은 모두 각자의 보도로 들어섰다. 그때 로완이 드디어 움직였다.

그가 훌쩍 뛰어내리는 순간, 불길한 엔진음이 울렸다. 로완의 왼편에 멈춰서 있던 차량이었다. 고장이라도 난 건지, 그것은 빠르게 발진했다. 조수석에 앉은 여자아이가 웅크리며 머리를 감싸고, 운전석의 여자가 당황한 얼굴로 핸들을 트는 것이 보였다. 방향은 물론 막아줄 것이 있는……

 

…가드레일 쪽이었다.

 

로완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양쪽으로 팔을 넓게 벌려 자신의 면적을 넓혔다. 차가 무자비하게 그를 쳤다. 로완은 마치 반으로 접힌 것처럼 깔렸다. 요란한 충격음과 사람들의 비명이 섞여 고막을 뒤흔들었다. 한편 이 세상은 현실적으로 건조했다. 사고가 났는데도 신호가 교체되었다. 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록스는 멍해졌다.

죽음을 목격한 것은 두 번째인가? 되짚을 틈도 없이 발을 뗐다. 빨간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성을 잃다시피 했다. 사방에서 경적이 쏟아졌다. 그러든 말든 록스는 꿋꿋하게 횡단보도의 흰 부분을 지나 로완 앞에 섰다.

아니,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직전에 환각을 펼쳐 쿠션을 만들었을 수도 있었다. 록스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로완을 확인했다. 다리뼈가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린 것은 우선 미뤄두었다. 로완의 옆구리를 집어 살짝 뒤집어봤다. 축축하게 묻어나오는 것 때문에 토기가 올라왔다. 그런 록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로완의 등에서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주를 모방한 공간의 파편도, 기이한 생명체의 촉수도 없었다. 부러져 튀어나온 척추뼈와 다 터져서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장기만이 록스의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록스가 손을 떼어냈다. 손바닥과 손가락이 온통 피로 범벅이었다. 비린내가 끼쳤고 록스는 헉, 숨을 들이마셨다. 마지막, 마지막이야. 젖은 것을 닦을 정신도 없이 로완의 목에 댔다. 맥을 짚어보았다.

 

조용했다. 모든 것이 차가운 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역설적인 부유감에 록스는 팔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그의 바짓자락을 약한 힘으로 붙잡았다.

아, 모녀였다. 그 안에 타고 있던 엄마와 여자아이. 그들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차에서 빠져나와 록스를 말렸다. 록스는 몸에서 힘을 쭉 뺐다.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전광판에 비친 1:00. 그게 끝이었다.

 

02

록스가 눈을 떴을 때, 로완은 이미 일어나 TV를 보고 있었다. GI 지수를 낮게 유지할 수 있는 곡물을 먹으라며 아나운서가 떠들었다. 로완은 그게 무슨 중대한 정보라도 되는 양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열불이 올랐다. 록스가 잠긴 목소리로 날카롭게 내뱉었다.

“뭐 하자는 거야?”

로완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갸웃거렸다.

“아침 건강 방송 보는데?”

“그거 물어봤겠냐고.”

“그럼?”

록스는 침대에 일어나 앉아서 앞머리를 정리했다. 문장이 쩍쩍 갈라져 단어밖에 남지 않았다.

“꿈.”

로완이 되물었다.

“꿈?”

“기억 안 나?”

“꿈 같은 거 안 꿨어. 그랬더라도 잊어버렸겠지.”

“하아.”

진짜 짜증 난다. 록스가 중얼거리면서 욕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로완 프린의 제복 입은 등허리를 냉큼 걷어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얏. 아프지도 않으면서 괜히 피우는 엄살이 뒤따랐다.

그들은 나갈 준비를 마치고도 항상 시간이 남았다. 별 볼 일 없는 예능을 배경음악 삼아 록스가 일과표를 정리했다. 피곤함을 이유로 누워 있기에 그는 자유를 빼앗긴 지 오래되었다. 로완이 해야 할 일을 대체로 기억해두긴 하지만, 저 파트너는 신용이 너무 없었다. 정확도를 수치로 나타낸다면 85%쯤. 늘 십오 퍼센트의 불확실성이 존재했다. 쟤한테 맡길 바에는 내가 하고 말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록스의 버릇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로완은 조용히 TV 프로그램을 봤다. 식당에서 받아온 라즈베리 쿠키 박스가 벌써 다섯 개째 열렸다. 가성비 한번 끝내주네. 록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종이를 품에 꽂아넣었다.

“아침 먹게 그건 닫아놔.”

“응.”

빳빳한 종이가 희미한 마찰음을 냈다. 말은 참 잘 듣는다.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로완이 비교적 순순해진 건 언제부터였지? 많이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었다. 그는 꾸준히 개 같은-그러니까, 숨겨진 의미 없이- 사람이었으므로. 도밍게즈의 축제. 세상이 멸망하고, 자신의 의의를 찾은 때부터. 더는 경멸에 기대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진상을 깨달은 지금은? 자기 의지가 아니었다곤 하나, 로완은 의무를 내버렸다. 별의 곁에 다다르고자 하던 것이 무색하게 그것을 불사르고 떠나왔다. 수많은 이들이 절규하고 로완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원망하다 결국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잿더미가 된 건물처럼. 모래사장 위의 발자국처럼. 기억에 남지 않은 꿈처럼…….

“록스?”

짧은 부름이 록스의 상념을 깨뜨렸다. 로완이 겉옷을 걸치고 현관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멍하게 서 있던 록스는 곧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 가.”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하얀 옷자락이 벌써 저 너머에서 팔랑거렸다. 록스는 느릿하게 군화를 신고 바닥에 탁 부딪쳐 고정했다. 애쉬가 퇴근하기 전에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침 메뉴는 다음과 같았다.

 

가볍게 먹고 싶은 사람을 위한 시리얼 3종 세트.

여러 타입의 토스트와 그 위에 얹는 아이스크림 스쿱.

옥수수 알갱이가 둥둥 떠 있는 크림 수프, 빠네와 함께 먹도록 배치된 머쉬룸 수프, 미역국.

딸기와 망고가 잘게 썰려 들어간 샐러드와 귤 드레싱.

메인으로는 토마토 스파게티와 알리오 올리오, 쌀밥(국에 말아 먹는 것을 권장한다고 쓰여 있었다).

커스터드 브륄레 푸딩과 슈가 파우더가 뿌려진 브라우니, 오렌지 마들렌, 과일 맛 마카롱 디저트.

 

물론 로완 프린은 모든 메뉴를 3번 이상 먹어치웠다.

록스는 이제 경악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샐러드를 가져왔다. 드레싱은 조금만 뿌렸다.

“오늘 오후에 자유 시간이 있던데, 뭐 할래?”

푸딩을 떠먹으면서 로완이 물었다. 록스는 채소를 포크로 쿡 찍으면서 답했다.

“본관 들렀다 올 거야.”

“나도 갈래!”

“안 돼. 싫어.”

“힝.”

그 사이에 푸딩이 자취를 감췄다. 빈 접시를 반납하고 온 로완이 또 치근댔다.

“숙소로 돌아오고 나면?”

“잘 건데.”

“왜?”

“누구 때문에 제대로 잔 느낌이 안 들어서.”

대꾸하면서 마지막 치커리를 곤죽으로 만들어 삼켰다. 로완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록스의 자리를 정돈했다.

“가자!”

“…그래.”

군인은 훈련에 충실해야 했다. 어느 날이든 예외는 없다.

 

 

03

록스가 본관에 들어서자, 프런트 직원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쳐다봤다. 그건 그랬다. 파트너를 동행하지도 않고 오다니. 정기 검진을 제외하면 결코 없는 일이었다. 직원의 얼굴에 긴장이 떠오른 것을 본 록스는 피로를 느꼈다.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애쉬 불러주세요.”

“아, 애쉬요? 지금 훈련실에 있을 텐데. 잠시만요.”

그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통화 연결음이 꽤 커서 록스의 귀에도 들렸다. 네, 록스가 찾아서요. 로비에 있어요. 그렇게 전한 직원은 앉아서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록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십 분이나 남았으면 그냥 제가 올라갈게요.”

“그, 그럴래요? 훈련실 번호 적어줄까요?”

“네.”

작은 쪽지가 록스의 손에 쥐어졌다. 그는 묵례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얼마 안 지나서 띵, 하고 도착 알림음이 들렸다. 흰색의 무기질적인 복도가 펼쳐졌다. 이제는 질릴 정도로 눈에 익어버린 풍경이었다.

“록스? 무슨 일이야?”

훈련실 안에서 애쉬가 그를 맞이했다. 흰 가운은 구깃구깃했고, 눈 밑 그늘이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며칠째 야근하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록스가 슬쩍 미간을 좁히면서 대답했다.

“물어볼 게 있어.”

“오, 드문 일이네. 뭔데?”

“꿈에 능력을 쓰는 건 대체 어떤 경우야?”

애쉬가 잠깐 생각했다.

“환각으로 꿈의 내용을 조종한다는 거지?”

“주위 사람도 끌고 들어가.”

“…네가?”

“그러겠어?”

“로완이 그런다는 건 더 의외인걸.”

“성가셔 죽겠으니까 해결 방법 좀 찾게 해줘.”

그때 훈련실 안에서 다른 페어가 나왔다. 그들은 빠르게 인사하고 떠났다. 애쉬가 배웅하던 손을 거둬들여 곧장 컴퓨터 키보드 위에 올려놓았다.

“어디 보자, 제어 연습 때는 한 번도 실수한 적 없어. 파동이 불안정해진 적도 없고. 실패 기록도 한두 번을 제외하면 남아있지 않네.”

“그래서?”

“즉, 그건 완전히 무의식중에 하는 일이란 거야.”

“그 정도는 통계를 안 봐도 알아.”

퉁명스러운 말에 애쉬가 록스를 쥐어박았다. 정확히는 쥐어박는 시늉이었지만.

“이제 말대꾸도 한단 말이지. 하여튼 그럼,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잖아?”

“…”

“왜 그러는지 로완이 직접 말해주지 않는 이상, 내용을 통해 판단해야 해.”

“규칙을 발견하려면 당분간은 그냥 견뎌야 하고?”

“그래.”

“환장하겠네….”

애쉬는 흠, 하고 턱을 매만졌다.

“로완 성격이면 알려줬을 법도 한데. 물어는 봤어?”

“어. 기억도 못 하더라.”

“아이고.”

심리 치료라도 추천해줄까? 애쉬가 걱정했다. 로완의 심층이 어떤지는 둘째 쳐도, 록스가 이런 상황에 노출되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록스는 늘 평균 이상으로 멘탈이 위태로웠다. 다만 의외로 그는 한숨과 함께 됐어, 라고 말했다.

“차라리 일이나 줄여 줘.”

“건의해볼게.”

“응.”

용무를 끝낸 록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애쉬가 내어준 녹차는 세 모금도 채 마시지 않았다. 물론, 능숙한 연구원은 남은 녹차를 자기 텀블러에 부어서 낭비를 막았다.

“실마리 잡으면 또 와. 같이 고민해줄 테니까.”

“…”

고맙다는 말은 따로 하지 않았다. 애쉬는 어린애를 보는 듯한 얼굴로 팔을 흔들며 보내주었다.

 

숙소에 로완 프린은 없었다. 보나 마나 DOT를 들쑤시면서 여가를 보내는 중일 것이다. 록스는 잘됐다고 생각했다. 꽉꽉 갖춰 입었던 제복을 벗어 걸어놓았다. 곧장 침대로 파고들었다. 싱글 베드를 하나 더 추가하거나 지금 것을 사이즈업 해주겠다는 제안이 있었지만, 록스와 로완은 거절했다. 로완은 딱히 필요 없다고 했고 록스는 저것과 같은 침대를 쓸 리 없지 않냐고 쏘아붙였다. 따라서 록스가 파묻힌 공간은 사람 한 명이 딱 들어갈 정도의 아늑한 크기였다. 이불로 몸을 감싸자 잠이 쏟아졌다.

“…”

“…어나, 일어나, 록스.”

로완은 그를 흔들지도, 큰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타인의 음성이 들린 시점에서 이미 깼다. 록스가 가물가물 정신을 차리면서 물었다.

“몇 신데.”

“7시.”

“…혼자 먹고 와.”

로완 프린이 그를 깨우는 이유는 무조건 둘 중 하나였다. 아침이 됐거나, 밥때가 됐거나. 전생에 끼니 못 챙겨 죽은 귀신이 붙었을지도 모른다. 록스가 손을 휘저었다. 축객령을 받은 로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챙겨 올까?”

“…입맛 없어.”

“간식만 받아둘게.”

“알아서 해.”

그 대답을 끝으로, 드물게도 록스는 거듭 잠에 빠져들었다.

 

 

04

“…최악이야.”

눈을 뜨자 웬 교실 안이었다. 록스는 늘 그렇듯 제 모습을 먼저 확인했다. 타원형 거울 안에 하복을 입은 소년이 비쳤다. 이번에도 옷 외에는 변한 것이 없었다. 흰 반소매 셔츠가 바람에 약하게 펄럭였다. 고개를 돌렸다. 창문이 전부 열려 있었다. 높이로 봐서는 2층 같았다. 새어 들어오는 공기가 실제 계절과 맞지 않게도 후덥지근했다.

록스가 천천히 발을 뗐다. 왜인지 자기 자리를 알 수 있었다. 맨 뒤쪽에서 하나 앞, 창가였다. 록스의 뒷자리는 비어 있다는 정보도 뇌리를 스쳤다. 꿈이 부여하는 설정이란 대체로 이런 식일 것이다. 그는 소리 없이 의자를 빼고 앉았다.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내 올려놓기 무섭게 귓가에 소란이 몰아쳤다. 방금까지 없었던 동급생들이 나타나 떠든 탓이었다. 분리되었던 공간이 합쳐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말소리가 한데 뭉쳐 정확히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드문드문 공통적인 단어가 들렸다. 록스는 가까운 쪽에 귀를 기울였다.

“너 어떡하려고 그래? 일주일 남았잖아!”

“조용히 해, 오늘부터 벼락치기 할 거야.”

“또 ■■에게 1등을 빼앗기면 큰일 날걸.”

“그건 그런데…”

다그치는 학생 A와 덤덤한 학생 B. 록스가 둘을 훑어봤다. 그러나 록스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 그들은 계속 떠들었다.

“이제는 너무 피곤해서… 솔직히 말하자면 다 때려치우고 온종일 자고 싶어.”

“학원도 그만뒀다며.”

“…응.”

“정신 차려. 네 성적이 안 나오면 나까지 같이 혼난단 말이야.”

그 말에 B가 얼굴을 확 구겼다. 그가 쏘아붙였다.

“너는 내가 되어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말이나 할 수 있겠지.”

“…”

“…그냥 미뤄졌으면 좋겠다. 시험 친다고 생각하면 진짜 죽고 싶어져.”

A가 등 뒤로 손톱을 뜯으면서 서둘러 말했다.

“벌써 그러지 마. 나, 내가 같이 밤샘해줄게.”

“그래….”

“알겠지? 오늘은 끝나고 같이 가는 거야.”

“알았다니까.”

대화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종이 쳤다. DOT에서 수업을 알리는 소리와 똑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로완 프린이 기억하고 있는 종소리는 하나뿐일 테니까. 록스는 책을 펼쳤다. 몇 번 넘겨보지 않아 가운데가 둥글게 올라왔다. 그 위에 푹 엎드렸다. 고개를 아래로 향했더니 인쇄된 글씨가 큼지막하게 보였다.

“…?”

상체를 도로 들어올렸다. 그때 교사가 들어왔다. 교사는 록스 쪽을 흘긋 보며 뭐라고 한마디부터 하려다가, 문제를 발견하지 못해서 곧 수업을 시작했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맞아들어 간 듯했다. 기실 혼난다고 해도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남의 꿈에서 망신을 당하면 기분이 잡치고, 시간도 낭비될 터다.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록스는 열어놓은 교재를 응시했다. 외국어 지문을 보고 화자가 앉은 객석을 고르는 문제였다. 장소 표기 때문에 사이즈가 컸다. 왼쪽 페이지는 그림이, 오른쪽 페이지의 2/3는 설명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밑의 여백에서 연녹색 볼펜으로 적어놓은 낙서를 발견했다.

누구의 필체인지 고민할 것도 없었다. 끝을 말듯이 적는 습관을 지닌 사람은 록스가 아는 한 로완뿐이었다. 한숨을 내쉬면서 읽었다.

어디에서 보고 싶어?

1. 무대

2. 특등석

3. 일반 객석

 

“…”

록스는 세 개의 선택지를 노려봤다. 고르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첫째, 극을 보러 와서 무대에 올라가는 멍청이는 없다. 둘째, 특등석은 배우와 너무 가까워서 부담스럽다. 셋째, 일반 객석은 음향이 미친 듯이 울려댄다. 어느 것도 택하기 싫었다.

하지만 진행의 열쇠를 들고 있는 게 로완 프린이라면. 록스가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기 전까지 버틸 것이 뻔했다. 이렇게 사람 열 받게 하기도 쉽지 않다고, 록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샤프로 아무 곳에나 체크 표시를 넣었다.

힘 조절에 실패했는지 뚝, 샤프심이 부러졌다. 록스가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확인했다. 체크는 왼쪽으로 삐쳐 있었는데, 그 끝에서 흑연 가루가 번져 숫자를 덮었다. 2. 이것도 답한 것으로 칠지 확신할 수 없어서, 그 위에 한 번 더 자국을 남겼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았다. 1시 45분이었다. 칠판의 시간표가 5분 후에 수업이 끝난다고 알려주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끝나다니. 시간 감각이 꼬인 걸까? 어쨌든 쉬는 시간에는 나갈 수 있으리라. 샤프를 내려두는데, 뒤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작은 쪽지였다. 정성스럽게 모양을 만들어서 접기까지 했다. 록스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종이를 펼쳤다.

[접수.]

옆에는 작은 하트 마크. 마찬가지로 연녹색 잉크를 사용했다. 속이 터져서 돌아보려는 순간, 종료종이 울렸다. A가 180도 돌려 앉아선 제 뒤의 책상에 팔을 걸쳤다. 록스의 시선이 끌려갔다. 자리 주인, B는 신경도 쓰지 않고 문제를 풀었다. A가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면서 말했다.

“나 연습 가야 하는데. 배웅도 안 해줄 거야?”

“어차피 이따 오잖아.”

“그래도.”

“…다녀와.”

“응, 시험공부 열심히 해.”

A는 얄밉게도 꼭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러니까 미움받는 거겠지, 록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비슷한 방식으로 막무가내인 파트너-절대 죽어도 친구라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다-를 곁에 두고 있었기에 동질감이 살짝 들었다. 그 탓에 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예체능 계열로 보이는 A가 떠난 후에, 그 의자를 차지한 거였다. 그처럼 편하게 다리를 벌리진 않았다. 록스의 자세는 좁은 면적에 조심스레 걸터앉은 모양에 가까웠다. B는 아직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록스가 입을 열었다.

“저기.”

그제야 B가 화들짝 놀라며 반응했다. 그는 하마터면 필기구를 내던질 뻔했다. 록스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책상에 손바닥을 붙였다가 떼어냈다.

“무, 슨 일이야?”

목소리가 떨렸다. 록스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의 뚱한 태도 때문에 호의를 잃는 자들은 많았지만,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록스의 예민함은 천성적인 기질에 가까워서, 이해를 요구할지언정 타인을 긴장하게 하지는 않았다. 압박을 주더라도 그건 록스 개인이 아니라 ‘구원자’라는 이름표의 영향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했고, 평소보다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일주일밖에 안 남았다며.”

“아, 기말고사 말하는 거구나.”

“역시.”

“그건 왜…?”

충동적인 행동이라,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록스는 툭 내뱉었다.

“그걸로 다투는 것 같길래.”

“…그런 거 아니야.”

“일상적인 대화라고?”

“비슷해. 좀… 나랑 쟤랑, 가정사가 복잡하거든.”

축약해서 표현하자면, 꼭 몇 년 전에 유행한 사회 풍자 소설에 나올 것 같은 관계지. B가 어색하게 웃었다. 눈가에 미처 가리지 못한 우울감이 묻어 있었다. 로완의 꿈에 나오는 인물은 왜 하나같이 벗겨진 부분이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록스는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B를 뜯어보았다. 피로와 스트레스로 눈꺼풀이 붉게 부어 있었고, 피부는 거칠었으며, 표정 근육을 제대로 쓰지 못해 양쪽 입꼬리의 높이가 달랐다. 록스는 이런 얼굴이 익숙했다. 감정을 갈무리할 틈도 없이 억지로 일으켜 세워진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굳이 콕 집어도 된다. 이건 DOT에 처음 끌려왔을 때의 록스를 닮았다. 검사실의 거울로 매일 보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순식간에 기분이 나빠졌다. 그가 비웃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지.”

“…응?”

“안타까워….”

자기 자신에게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혹여라도 연민에 빠져 구제불능이 될까 봐 속으로 되뇌지조차 못했다. 죽음을 택하는 포엘의 운명에서, 유일하게 벗어난 존재. 섬세함과 괴로움은 고스란히 품고 태어났으나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록스를 지옥에서 끌어올려 단상에 세웠다. 죽상 앞에서 박수를 마구 쳐댔다. 이것이 수감자와 무엇이 다른가? 록스는 여전히 그 질문에 부정의 근거를 내놓을 수 없었다.

B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례하다고 느낀 것 같았다. 마침내 경직되었던 손끝이 풀리고, B의 손에서 펜이 굴러떨어졌다. 록스는 그것을 받으려 들지 않았다. 데구루루, 플라스틱 케이스가 굴러가는 소리만이 그들의 귀에 울렸다.

“제발 널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잖아.”

“…”

“나도 마찬가지야.”

말을 마친 록스가 일어서서 교실 밖으로 나갔다. B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 개 같은 꿈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건데.”

복도는 교복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환각을 섬세하게 구성하는 버릇은 변함없었다. 심지어는 체취까지 구분되어 있었다. 축구를 마친 남학생들이 지나갈 때는 멀리서도 땀 냄새가 났다. 화장에 공들인 여학생들 옆을 스치자 인공적인 단내와 향수 여러 종류를 맡았다. 록스는 코를 꽉 틀어막고 싶은 걸 참았다. 걸음을 서둘러서 현관으로 나왔다. 돌계단의 맨 위에 서자, 그제야 바람이 주위를 맴돌고 뺨을 간지럽혔다. 겨우 숨이 트였다.

그때, 운동장에 서 있던 누군가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폭풍전야를 가르고 마침내 나타난 천둥처럼 요란했다. 록스가 이 감각을 겪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질끈, 시선을 피하려 하자 뒤에서 손길이 뻗어왔다. 그것은 록스의 퇴로를 차단하고 팔을 붙잡았다. 이어 또 다른 손길이 몸을 타고 올라와 록스의 뺨을 쥐었다. 그게 수술 기구처럼 록스의 눈을 벌렸다. 감으려 해도 금속만큼 차가운 손가락에 막혀 그러지 못했다. 이물감과 선득함에 그가 몸부림을 쳤다. 비명은 계속되었다. 여러 사람의 것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환호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

록스의 문장은 쿵, 하는 무거운 충돌음에 잘려나갔다.

누군가 투신했다.

정체를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글씨체와 마찬가지였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아스팔트 위에 흩어졌다. 머리에서 배어 나온 피가 땅을 적시고 흰옷을 더럽혔다. 록스는 주변이 점점 아수라장이 되어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지켜보아야만 했다. 눈에서 액체가 흘러나와 시야를 가렸다. 점차 입으로 흘러들었다. 어떤 때는 짰고 어떤 때는 비렸다. 살면서 피눈물을 체감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록스는 결국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그제야 그를 고정했던 손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록스는 얼굴을 문질러 닦을 생각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있었다. 식은땀이 소름 끼치게 등을 타고 흘렀다. 딱 4차선 도로, 건널목만큼의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로완이 그를 바라보았다. 록스가 입을 틀어막았다. 속이 울렁거려 더 버티기 힘들었다. 로완이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제 앞머리를 정리하려 했다. 구급차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틈으로, 록스는 읽어내고 말았다.

‘미안해.’

작지만 또박또박한 입 모양을.

 

 

05

록스는 그 투신 이후에도 꿈속에 머물렀다. 아무래도 깨어나는 조건이 그의 죽음은 아닌 듯했다. 다만 로완이 죽었기에 세계가 크게 일그러졌고, 록스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집 주소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교실로 돌아갔다. 책상에 엎드려서 시간을 보냈다. 모두가 하교하고 해가 졌다. 문단속이 끝난 교실에는 불도 켜지지 않았다. 깜깜했다. 한참을 시체처럼 그러고 있다가, 조금 뒤척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B의 자리를 보았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된 우등생의 책상이었다. 부스스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갔다. 가방을 챙기기 직전까지 풀고 있던 문제집이 눈에 띄었다. 록스는 그것을 빼서 펼쳤다. 연필 자국이 없는 페이지가 나올 때까지 넘겼다. 어렴풋이 보았던 쪽수가 나타났다. 39번까지 답이 적혔고, 마지막 40번은 손대지 않았다. 대신 꾹꾹 눌러 쓴 혼잣말이 하나.

[다행이다. 시간이 생겼어.]

록스는 그대로 책을 덮어버렸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의 휴대전화였다. 건조한 메시지가 와 있었다.

 

[Web발신]

본 고교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학생들의 심신 안정을 위해, 한 달간 휴교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말고사의 경우 날짜를 미뤄 시행됩니다.

학교에의 연락은 각 담임 교사를 통해 주십시오. 2:00

 

그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의 로완이 죽음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 그러자 잠에서 벗어났다.

 

 

“…”

“…뭔.”

로완이 그의 옆에서 자고 있었다. 정확히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침대에 엎드린 모양새였다. 긴 앞머리가 얼굴로 내려와 눈가를 가렸다. 그 모습이 꿈속과 겹쳐져 역했다. 록스는 입을 막고 남은 손으로 로완의 어깨를 거세게 밀었다. 로완은 밀리는 대신, 잠결에 조금 굴러서 비켰다. 록스가 침대에서 빠져나와 욕실로 향했다. 소리 없이 목구멍을 헤집는 정도는 익숙했다.

입안을 헹구고, 사용한 칫솔을 도로 걸어 놓은 다음, 샤워까지 마쳤다. 악몽 때문에 척척해진 잠옷은 나오면서 세탁물 통에 처박았다. 그때까지도 로완은 이불에 걸쳐진 그대로였다. 록스를 반기는 건 귀찮은 질문이 아니라, 어젯밤 로완이 받아둔 버터 쿠키 다섯 박스였다. 식당 디저트 중에선 그나마 덜 느끼하고 덜 단 것이긴 했다. 그래도 록스의 입맛에는 안 맞을 터였다. 그는 그것들을 탁자 한구석에 대충 몰아두었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았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냉수를 들이켰다. 찌릿한 고통이 정수리까지 휘감고 떨어져 나갔다. 그제야 정신이 좀 차려졌다. 새벽 2시 30분이었다. 그것을 확인하려고 주위를 둘러본 결과, 록스는 방의 상태를 알아챘다. 곳곳에 공간이 파여서 인분이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로완의 등에서 솟아나곤 했던 징그러운 생명체들이 뚫린 구멍 너머로 이쪽을 호시탐탐 노렸다. 끈적이는 괴물과 눈이 마주친 록스는 도망 욕구를 애써 삼켜야 했다.

“이렇게 능력을 써대는데 이상을 감지 못 했다고.”

DOT에는 무능한 놈들만 있는 게 분명했다. 아, 애쉬는 제외해야 하지만. 어쨌든 록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로완에게 다가갔다. 침대에 걸터앉아 발로 그의 옆구리를 툭툭 찼다.

“야, 일어나. 소파로 가서 자.”

널 옮겨줄 힘은 없어. 덧붙이면서 계속 건드렸다. 로완은 외부 자극이 느껴지긴 하는지 몇 번 얼굴을 찌푸렸다. 이내 침대에서 미끄러졌다. 즉, 옆으로 쓰러졌다. 록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으니, 살아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일어나지 않지? 로완의 자는 얼굴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던 록스로서는 당황스러웠다. 자신처럼 쉽게 깨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둔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록스의 머릿속에는 이대로 4시까지 기다린다는 선택지만 남았다.

‘싫단 말이야.’

아무리 록스가 남에게 매정한 편이라곤 하나, 기본적으로 그는 잘 배웠다. 불편함은 어떻게 참을 수야 있었다. 그런데 쓰러진 사람을, 그것도 바닥에 방치해두는 건 영 마음이 안 좋았다. 상대가 신경을 안 쓴다는 걸 알아도 그랬다. 사람이라도 부를까, 생각했지만 새벽 2시 반에 출근하는 미친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있더라도 야간 근무자였다.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 창백한 몰골일 게 명약관화했다. 짜증스럽게 이마를 뒤로 쓸었다.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눌리면서 시야를 넓게 열었다. 록스는 눈을 깜박였다.

꿈에서 끄집어낼 방법이 있을 것이다. 특히 환상을 펼치는 중이라면 한층 가능성이 컸다. 록스는 방 여기저기 생겨난 구멍을 관찰했다. 별이 반짝이는 우주나 정체 모를 괴생명체가 대부분이었지만, 평범한 거리 풍경도 가끔 스쳐 지나갔다. 공간은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고 계속 변화했다. 록스가 주의를 집중했다.

“…찾았다.”

흰 코트 자락이 록스의 눈동자에 담겼다. 록스는 곧장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고체도, 액체도 아닌 기묘한 감촉이 피부에 닿았다. 능력을 발동하자, 몸이 끌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완전히 먹히기 직전, 그가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멀미할 것 같아.

 

06

이곳은 록스에게도 익숙했다. 형의 부탁으로 종종 클래식 공연을 챙겨본 덕분이었다. 록스의 눈앞에 놓인 건물은 수도에서 가장 많은 음악 행사가 열리기로 유명한 다목적 홀이었다. 생중계 방송이 마련된다고 하면, 다들 이 홀이겠거니 예상하곤 했다.

“추워….”

도로의 볼록거울에 자신을 비춰 봤다. 록스 포엘의 얼굴에 낯선 옷이 입혀졌다. 검은 목폴라와 빳빳한 청바지, 그 위에 걸친 갈색 코트. 허리에 끈을 둘러 고정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되어 있었다. 얇은 장갑과 목도리도 갖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살을 에는 추위가 록스를 위협해댔다.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내려 가뜩이나 차가워진 코끝을 더 식혔다.

록스는 입김을 내뱉으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홀 안에 틀어진 히터를 노릴 생각이었다. 가는 길엔 도금으로 반짝반짝하게 관리한 외벽이 눈에 띄었다. 어찌나 깨끗하게 유지했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쳐 보일 정도였다. 물론, 그건 록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곧장 유리로 된 현관문을 밀고 실내로 들어섰다.

“록스! 와 줬구나!”

앉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중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록스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형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손을 크게 휘저으면서. DOT에 입대한 후로는 편지로밖에 안부를 주고받지 못했는데, 갑자기 만나니 끔찍하게 어색했다. 꿈속의 형은 6년 전의 얼굴과 그간 보내왔던 사진이 콜라주처럼 적당히 혼재된 모습이었다. 키는 록스보다 컸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형이 록스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우리 오케스트라 단원을 꼭 보여주고 싶었거든. 독주회를 하게 됐다고 무척 들떠 있었어.”

“…내 자리, 비워 놨어?”

“물론이지! 2층 1열이야.”

그가 표를 내밀었다. 록스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지인제 티켓이라곤 하지만 일반적으로 구매하는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형이 록스에게 슬쩍 손짓했다. 귀를 대보라는 뜻이었다. 록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가까이 갔다.

“이건 기밀인데, 1부에는 다른 사람이 나올 거야. 사정이 좀 있어서.”

속삭임을 듣고 록스의 동공이 확장됐다.

“나한테 말해줘도 돼?”

“관계자니까. 그리고 넌 잘 놀라잖아, 미리 경고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

“그렇게까지 심약하진 않아….”

“그래? 많이 컸네.”

너털웃음이 귓가에서 멀어졌다. 형이 그를 따뜻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록스는 간질간질한 기분과 함께 피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가 서둘러 말했다.

“초대, …고마워. 잘 볼게.”

“뭘. 끝나고 시간 괜찮으면 밥이나 먹자.”

답할 틈도 없었다. 록스의 형은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인사하고 성큼성큼 멀어졌다. 답답하게 눌려있던 호흡이 조금 돌아왔다. 록스가 등을 돌렸다. 안내 데스크에서 팸플릿을 뽑았다.

「■■ 오케스트라 - 클로이 독주회」

록스는 약간의 위화감을 읽었다. 오케스트라의 명칭은 이전의 꿈처럼 모호했는데, 독주자의 이름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록스는 이 단어를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발음하는 법도 알았다. 팸플릿을 펼쳐 사진을 찾아보았다. 클로이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기껏해야 중학교는 졸업했을까 싶은, 앳된 얼굴. 빛나는 녹색 눈동자가 카메라를 비스듬히 응시했다. 양쪽 귓불에 박아 넣은 흑수정은 허리까지 늘어진 백발 사이에서 유독 화사하게 보였다.

닮았다. 그건 어쩔 수 없이 드는 감상이었다. 더 쳐다보고 있기 거북해졌다. 록스는 팸플릿을 접고, 거기서 또 반을 접어 꾸깃꾸깃하게 만든 다음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3시 공연의 입장을 시작한다는 방송이 홀 전체에 울렸다.

 

그의 자리는 2층에서도 오른쪽 벽에 마련된 곳이었다. 피아노에 가려질 걱정 없이 연주자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록스가 그렇게 남을 양파 껍질 핥듯 낱낱이 살피는 인간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뒤쪽에 앉은 관객들이 서로 소곤거렸다.

“정말, 취소하지 않고 진행했네요….”

“그러게요. 하지만 그 어린것을 진심으로 해치려 들진 않겠죠.”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요. 열등감이라는 건 무서우니까.”

록스는 잠깐 생각했다. 테러 예고라도 있었나. 그렇다면, 로완 프린은 1층에 있을지도 몰랐다. 염산이나 화염병 등은 던지는 데도, 막는 데도 가까이 있는 편이 낫다.

이십 분 후, 회장이 암전되고 무대 위로 불이 들어왔다. 천장 곳곳에 매달아 둔 유리 장식이 조명을 반사해 흩뿌렸다. 사람들은 기대로 가득 찬 박수갈채를 보냈다. 곧 피아노 앞에 반주자가 앉고, 연주자가 나와 중앙에 섰다.

“…어라?”

누군가가 무심코 의문을 입 밖에 냈다. 그것을 시작으로 장내가 약하게 술렁였다. 록스는 미간을 깊게 눌렀다. 두통이 도졌다. 저건 진짜로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다.

샹들리에 아래 선 것은, 놀랍게도, 로완 프린이었다. 흰 정장을 입고, 그에게는 조금 작아 보이는 바이올린을 들고 있었다. 어깨에 악기를 두는 자세는 그럴듯했으나, 분위기 때문에 도저히 연주자로 보이지 않았다. 클로이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 부조화 속에서도 공연은 시작되었다. 부드러운 피아노가 먼저 퍼졌다. 록스는 반주자가 상당히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여유로운 로완과는 대비를 이뤘다. 전주가 관객의 소란을 잠재우자, 로완이 활을 올렸다. 높은 첫 음이 주의를 모았다. 예정된 곡이 흐르기 시작했다. 선명한 소리가 회장을 채웠다. 그는 자신의 연주에서 기교를 빼되, 틀리는 곳도 없게 했다. 성정과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연주였다. 적어도 사람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크게 야유를 쏟을 만한 실력은 아니었다. 록스는 허리를 굽혀 무릎에 턱을 괸 채로 그를 지켜봤다. 악기를 연주할 줄도 알았구나. 지금껏 몰랐다. 로완이 가끔 콧노래를 흥얼댔지만, 관련된 이야기는 한 번도 나눈 적이 없었다. 예술 따위 DOT에서는 하등 쓸모없는 분야였다.

연주에 점점 힘이 실렸다. 첫 곡의 클라이맥스로 가고 있었다. 로완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웃었다. 활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아래로, 길게. 위치를 바꾼 음이 고조를 알렸다.

록스가 상체를 일으켰다.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이곳에 그는 스스로 왔다. 휘말리거나 끌려 온 것이 아니라, 제 의지로 뛰어들어서 도착했다. 그렇기에 시간을 셀 수 있었다. 오감이 벼려졌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었다.

무언가 잘못된다면, 바로 지금이다.

신경 줄을 팽팽하게 당겼다. 그는 꼭 로완의 열성적인 팬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대에 집중했다. 그리고 결국 작은 마찰음을 듣는 데 성공했다.

…끼익, 샹들리에가 흔들리고 있었다. 바이올린의 또렷한 반향에 숨어, 때를 노리고 있었다. 천장과의 접촉면은 어두워서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위태로운 것은 확실했다. 곡이 속도를 올리고 날카롭게 변해갈수록, 샹들리에도 크게 흔들렸고 헐거워졌다. 기다리다 못해 록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로완도 그를 올려다봤다. 악기를 고정하느라 완전히 고개를 들지는 못했다. 왼손은 줄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활을 움직이면서. 그는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마침내 삐걱대던 샹들리에가 그대로 추락할 때까지도. 그는 환희에 찬 얼굴로 연주를 마쳤다.

또다시 로완이 벌인 모든 일이 록스를 괴롭혔다. 오감을 통해 밀려드는 모든 정보가 버거웠다. 휘핑기를 돌리고 난 크림처럼 으깨진 실루엣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회장이 순식간에 엉망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고 서로를 밀치거나 넘어뜨리면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제정신을 잃은 반주자가 계속해서 피아노를 쳤다. 소음이 기이하게 뒤섞였다. 아, 주먹을 너무 세게 쥐었다. 손톱이 파고든 부분에 붉은 피가 맺혔다.

록스는 난간을 붙잡고 내려다보았다. 무대 뒤에서 스태프들이 급히 나왔다. 누군가는 긴급통화를 걸고 누군가는 반주자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그리 분주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심장을 옥죄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새하얀 머리카락의 여자아이가 하나.

 

말리는 어른들을 뿌리치고 엎어지듯 무대로 뛰어 올라왔다.

새하얀 드레스는 정성스레 부풀린 것이 무색하게도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 속의 여린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마구 요동쳤다. 굳은살이 촘촘하게 박인 손끝은 무엇도 붙잡지 못했다. 초록색 동공이 확장과 축소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눈물을 뱉어냈다. 코랄색 립스틱이 번졌다. 클로이가 외쳤다.

“오빠…!”

절규와 동시에 클로이는 무너져 내렸다. 무릎에 힘이 빠져나간 듯했다. 로완의 얼굴을 찾으려 샹들리에 밑을 더듬어 보았으나, 예전의 록스처럼 손이 피범벅으로 변하기만 했다. 스태프들이 따라와서 클로이를 억지로 떼어냈다. 여자아이가 계속 울부짖었다. 로완의 이름과 애칭, 가족 사이에서만 나올 수 있는 호명이 몇 번이나 따갑게 로완의 시체에 부딪혔다. 그래도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거짓말, 거짓말쟁이….”

클로이가 허망한 목소리로 로완을 원망했다. 록스는 한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면서 동감했다. 정말 그 말대로다. 가족이, 그것도 그를 아끼는 가족이 물러나 주었다. 아주 교묘하게 거짓을 덧발랐을 터였다. 무엇이 날아와도 피할 수 있다느니, 너보다 튼튼해서 괜찮다느니. 그런 변명을 일삼았겠지.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번지르르하게 떠드는 건 로완의 특기였다. 록스가 비틀거리면서 몇 걸음 물러났다. 허벅지가 붉은 천으로 된 의자에 닿았다. 그는 푹 꺼지듯이 앉았다.

…그래도 이것으로 로완의 목적이 분명해졌다. 이 반복에서 벗어나는 방법 또한.

클로이의 얼굴이 점차 흐려지면서, 록스는 꿈에서 빠져나왔다.

 

07

몇 번 겪으면서 익숙해진 것일까. 아니면 꿈 특유의 비현실성으로 흐려지는 걸까? 록스는 처음 로완의 죽음을 목도했을 때보다 충격이 덜한 것을 감지했다. 바닥에서 눈을 비비는 로완이 보였다. 록스는 곧장 다가가서 멱살을 잡아 올렸다.

“어어…“

로완은 얼떨떨한 얼굴로 록스를 위해 일어섰다. 그러자 눈높이가 어긋났다. 록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지쳤어.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

이번에는 로완도 짐작 가는 것이 있는 눈치였다. 다만 방법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

“연구원들한테 가서 물어볼까?”

그러고 보면 애쉬가 그랬었다. 같이 고민해주겠다고. 그의 두뇌와 DOT 장비 이용권 같은 장점을 버려둘 이유가 없었다. 록스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능력이나 거둬. 알레르기로 재채기가 나올 것 같다고.”

“알았어.”

찢어진 공간들이 차례차례 봉합되었다. 그 광경은 꼭 바느질하는 것 같기도 했다. 모든 균열이 잠기고, 반짝이는 나비 날개 가루가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록스가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로완이 눈을 깜박였다.

“씻고 올게.”

“어.”

로완은 셔츠를 벗으면서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미친놈아, 들어가서 해. 핀잔이 따라붙었지만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가 아예 바지 단추까지 풀다 말고 돌아봤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찝찝한 걸 어떡해~“

록스는 눈을 꾹 감고 훠이훠이 손짓했다.

“됐으니까 빨리 들어가.”

“으응.”

옷자락이 몇 번 스친 후에, 문이 탁 닫혔다. 록스가 눈을 떴다. 거실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허리를 젖혔다. 침대에 던져지듯이 뒤로 넘어갔다. 나쁜 꿈을 꾸고 몸으로도 반응한다, 라. 로완 프린이 점점 인간적으로 굴고 있었다. 퍽 불쾌했다.

 

새벽의 DOT에는 널브러진 인간들밖에 없었다. 그들은 본관에 들어서자마자 고카페인 음료를 쪽 빨고 있던 애쉬와 마주쳤다. 그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이런 시간에.”

록스는 짧게 축약했다.

“실마리.”

“아아.”

로완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런데 애쉬, 일하고 있던 거 아니야?”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만… 거의 끝나가서 괜찮아. 너희 봐주고 숙직실에서 자지 뭐.”

“친절하네.”

로완이 싱긋 웃었다. 어느새 애쉬는 다 마신 음료 캔을 구겨서 버렸다. 록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봤다. 카페인을 저렇게 때려 붓고도 잠이 오나? …오니까 저렇게 때려 붓는 거겠지. 상념이 스치는 동안 로완과 애쉬가 훈련실로 들어갔다. 하얀 머리통이 문 뒤에서 쏙 나와 재촉했다.

“록스, 빨리 와.”

“가고 있어.”

성실한 연구원은 서랍에서 파장을 감지하기 위한 패드를 꺼냈다. 로완이 그 옆에서 기웃거리다가 가벼운 손길에 앉혀졌다. 록스도 그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패드가 붙는 동안, 그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애쉬와 공유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저 배은망덕한 파트너에게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낱낱이 고하는 일이기도 했다. 로완은 의외로 록스가 말하는 동안 한 번도 끼어들지 않았다. 반응이랄 것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쪽이 맞겠다. 그나마 클로이의 이름이 나왔을 때 조금 놀란 듯 동공을 떤 게 전부였다. 록스는 묘하게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쯤 들었으면 스스로 털어놓을 게 있어야 하지 않은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로완이 시선을 내리고 드물게 말을 골랐다.

“그건… 내가 꾸었던 꿈과는 전혀 다르네.”

“뭐?”

록스와 애쉬가 동시에 되물었다. 로완은 기억을 더듬으면서 대답했다.

“배경은 같아. 시간대가 다를 뿐이지.”

“능력으로 재현할 수 있겠어?”

애쉬의 질문에 로완은 긍정을 표했다.

“내가 꿈속에서 깨어있을 수만 있다면.”

컴퓨터에 무언가 입력하는 소리가 들렸다. 애쉬가 이런저런 가설을 넣어 보고 있었다. 그때 록스가 툭 내뱉었다.

“애쉬. 수면제보다는 내가 더 나을걸. 이거 방금 일어났다고.”

“아, 그럴래? 내켜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하기 싫어. 오늘 지나고도 이러면 각방 쓸 거야.”

물론 DOT 서관은 증축을 거치지 않았다. 따로 방을 쓰려면 록스가 로완을 옥상으로 내쫓는 수밖에 없었다. 애쉬는 곤란한 얼굴로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건 봐줬으면 좋겠네…. 일단 오케이. 안에 들어가.”

“CCTV는 꺼줘. 기록할 필요 없잖아.”

“마이크만 남겨둘게.”

바닷속 풍경을 비추는 스크린이 두 명을 맞이했다. 탁, 뒤에서 문이 닫혔다. 록스는 방어적인 자세 그대로 로완을 쳐다보았다.

“해.”

로완이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대답도 없이 주위에 반짝임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쩌억 하고 공간이 갈라지는 소리는 상처가 벌어질 때의 비린내와도 닮아 있었다. 역한 향에 표정을 굳히면서, 록스가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 로완의 콧등에서 5mm 정도 떨어진 곳에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얼굴을 덮을 듯 말 듯 애매한 위치에 놓이자, 금세 록스의 환각이 덧씌워졌다. 무의식으로부터, 두려움으로부터 분리하는 가림막이었다. 로완은 눈을 감았다. 록스는 같은 순간 시야가 암전되는 것을 느꼈다. 꼭,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록스.”

익숙한 부름이 들렸다. 등 뒤에서였다. 언제 어떻게 눈을 떴는지도 모르게, 록스는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목소리를 따라 뒤를 돌았다. 아까 본 것과 다름없는 로완이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록스가 바람 빠지듯이 말했다.

“네가 내려와. 올라갈 기운 없어.”

로완은 돌무덤 위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균일하지 않은 경사였다. 돌의 크기는 제각각이었고, 다듬어진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쌓아올린 것보다 무너진 것에 가까워 보였다. 회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묘 꼭대기에 새하얀 존재가 있으니 이질적이었다. 날카롭게 부는 모래바람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휘날렸다. 록스는 그때 자신도 몇십 분 전에 고른 옷-제복이 아니라 평범한 외출복이었다-을 입고 있으며, 가진 색들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완이 훌쩍 뛰어내렸다. 그가 흥미로워했다.

“이게 자각몽이라는 거구나.”

“꼭 처음 경험하는 사람처럼 말하네.”

“실제로 그런걸.”

“…”

록스는 비아냥거리려다가 말았다. 물고 늘어져봤자 피곤해지는 건 자기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서였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이게 네가 꾸던 꿈이라고?”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응.”

주위는 온통 폐허였다. 하늘이 어두운 색으로 물들었다. 그 아래 멀쩡한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건물이란 건물은 모조리 산산이 조각났고,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같이 생명을 느낄 수 있는 존재는 바닥을 기어 다녔다. 어쩌다 높이 있을 때는 이미 정체도 알 수 없는 괴물의 입에 물려 있었다. 먼 곳에서 흐릿한 비명이 들려왔다. 구름 사이가 기괴하게 번쩍거리더니, 벼락이 쏟아져 사람들의 두개골을 가르고 죽은 몸을 잘라 각기 다른 괴수에게 먹였다. 끈적한 오수가 시체의 손톱을 녹였다.

그런데도 로완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리에 우뚝 서서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가 해명했다.

“무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네 꿈이잖아.”

“하지만…“

그의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여긴 지구인걸.”

내가 구할 수 없었던. 짤막한 말이 덧붙었다. 록스는 하, 코웃음을 쳤다. 그 한마디로 모든 아귀가 맞아들어 갔다. 그는 한 가지 명료한 전제를 내놓는 데 성공했다.

 

로완 프린은 본능적으로 멸시를 사랑한다.

그건 스스로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구원하지 못하는 구원자로서!

 

록스는 생각했다.

‘뭐 이딴 마조히스트가 다 있어?’

현실에서 도피하고 영영 외면하려는 버릇도 좋은 건 아니었다. 록스도 남에게 뭐라 할 처지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자신을 적극적으로 갉아먹진 않았다. 제 내면은 혼자 끌어안고 있기에도 부족한 양이었다. 얼마나 멘탈이 복에 겨웠으면 이렇게 기만적인 소망을 가질 수 있을까. 어이가 없었다.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또, 답지 않은 짓을 했다. 록스가 입을 열었다.

“네 죽음 따위가 누군가에게 구원을 줄 것 같아?”

로완이 조용히 록스를 바라보았다.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 꿈의 엔딩을 알겠어. 너, 결국 이 꼭대기에서 먹히겠지. 뼛가루 한 줌 남기지 않은 채로.”

“네가 겪은 내 환각들이 그랬듯이.”

“그래, 무언가를…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

“하지만 그건 그냥 졸렬한 괴롭힘일 뿐이야.”

록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며칠간 시달린 분을 몽땅 쏟아내려는 듯했다. 혹은 들쑤셔진 과거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로완은 잠자코 들었다.

“…남겨진 사람의 기분은 생각해 본 적 없지? 목격한 사람도. 네게는 그저 ‘기억하며 살아가 줄 존재‘에 불과하니까.”

“죽지 않았잖아.”

“죽는 것만 못 해. 육체와는 달라. 너는 지금껏 계속 사람들을 지옥에 밀어넣고 있던 거라고.”

시선이 따가웠다. 로완이 동공을 환하게 열고 질문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 않았다.

“네 트라우마처럼?”

록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답은 하지 않았으나, 로완은 충분히 알아챈 기색을 내비쳤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먼저 깨뜨린 쪽은 로완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말했다.

“그럼 내 ‘형벌’은 뭐로 정해야 할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록스는 즉답했다.

“왜 나한테 물어? 네 죄책감인데. DOT에 상담을 들어줄 어른이라면 많잖아, 특히 너한테는.”

“같이 생각해주겠다는 말은 절대 안 하는구나.”

그렇게 대꾸하는 얼굴은 전보다 풀어져 있었다. 록스가 차갑게 받았다.

“당연하지. 그냥, 나 모르게… 알아서 해결해. 더 끌어들이지 마.”

마침내 로완이 웃었다.

“알았어.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돼?”

“…뭔데.”

“슬슬 제물이 될 시간이거든. 눈을 감아줬으면 좋겠어.”

나직한 음성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록스는 무슨 속셈이냐는 눈으로 쳐다봤다. 로완은 어깨만 으쓱했다.

“너도 그런 광경을 보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그건 그렇지….”

“얼른.”

“하, 진짜.”

성화에 못 이긴 록스가 눈꺼풀을 내렸다. 처음 꿈에 들어올 때처럼 시야가 깜깜했다. 온갖 징그러운 것들이 바위를 타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것은 가볍게 걸었고, 어떤 것은 배를 미끄러뜨렸으며, 어떤 것은 쿵, 쿵, 하고 울려댔다. 자동으로 공포가 엄습했다.

“야, 그냥…”

눈 뜨면 안 돼? 뒷말은 무언가에 틀어막혔다. 구긴 종이처럼 빳빳한 감촉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손수건 계열의 텁텁한 느낌도 없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종류였다.

“…?!”

로완의 손이 록스의 눈가를 꾹 덮고 있어서 뜰 수가 없었다. 곧 섬뜩한 파열음이 고막을 스쳤고, 닿았던 온기는 전부 거둬졌다. 록스는 이마에 이물감을 느꼈다. 단단한 것, 이를테면 보석이라도 박힌 감각이었다. 다만 그것은 깜박, 하고 초점이 리셋됨과 동시에 사라졌다.

08

“…”

그들은 DOT의 훈련실로 돌아와 있었다. 스피커에서 애쉬가 외쳤다.

“둘 다 괜찮아? 들어갈 필요 없는 거 맞지?”

그들은 곧바로 답했다.

“이제 끝났어. 나갈 거야.”

“록스가 내 위에서 비켜 주면 말이야아.”

“넘어진 것 가지고 난리는.”

바닥으로 지탱하려면 꼴사납게 한 번 구르는 수밖에 없는 자세였다. 록스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로완의 배를 짚어서 일어났다. 로완은 손도 쓰지 않고 훌쩍 몸을 세웠다. 뒤를 따라오는 그에게 록스가 못 박듯이 선언했다.

“내가 말한 거 기억해. 아니면 진짜로 내쫓을 거니까.”

로완이 눈매를 접어 가며 웃었다.

“응!”

말꼬리에 하트가 붙을 것 같은 말투였다.

록스는 진저리를 내면서 훈련실 문을 열었다. 그 등에 파도 그림자가 졌다. 로완은 다시 한번, 12구역 바닷가에 찍힌 발자국을 떠올렸다. 자신이 생을 불어넣었던 꿈속의 여자아이가 겹쳐 보였다.

 

‘아직은 지워질 때가 아니야.’

적어도 그들의 대리자가 되기 전에는.

 

 

적어도 복수하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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