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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아직도냐. 옷깃 사이로 늦겨울의 바람이 파고들자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어 떨려오는 턱을 진정시켰다. 추운 날씨에 움츠러들 법도 하지만 남자는 꼿꼿이 허리를 펴고 섰다. 커피라도 사올걸. 마침 가까운 카페 건물이 보였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슬슬, 사람들이 나올 시간인데다 휴대폰과 다른 짐을 들고 있는 모로에게 테이크 아웃 커피잔을 들 손은 남아있지 않았다.

때맞춰 시간이 된 모양인지 사람들이 슬슬 건물 현관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나온 이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기념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계단에 선 채 건물을 배경삼아 찍는 이들도 있어서 모로는 혹여 프레임 안에 걸리지 않기 위해 두어 발자국 물러나 나오는 사람들을 천천히 살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남들보다 작아 종종 사람들 틈에 묻혀버리는 그 사람을 놓칠 터였다.

“아, 모로?”

갑작스레 불린 이름과 코트 위로 와 닿는 가벼운 손길. 남들 앞에선 어지간해서 놀라는 일이 없는 그라고 해도 찾고 있던 이가 등 뒤에서 나타난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다고 해서 큰 소리를 지르거나 호호들갑 떠는 것은 아니어서 상대는 모로가 놀란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삐딱하게 학사모를 쓴 이는 모로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진짜 아무도 없잖아. 가족들이 오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의심한 것은 아니지만, 유난히도 휑한 그 주변을 보며 모로는 자신이 오지 않았을 상황을 무심코 떠올린다. 신경 쓰지 않는 척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왔을 것이다. 모로가 쯧하고 혀를 차며 자신이 들고 온 것을 내밀었다. 커피도 못 마시게 한 귀찮은 짐덩이였지만 가지고 온 보람이 있었다.

“졸업, 축하해요.”

불쑥 내밀어진 꽃다발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졸업식에 꽃을 주고 받는 행위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건만 비슷한 나잇대의 남녀가 주고받는 꽃다발의 의미는 조금 다른 것이어서 모두 흥미거리를 찾은 양 이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시선집중에 치즈펠은 당황한 얼굴로 모로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혼자일 것이라고 무심결에 말하긴 했지만 결코 이런 것을 받아 내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다.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너, 네가 찼던 여자한테 이렇게 잘해줘도 돼? 사실은 어장 관리라던가, 그런 거 아냐?”

괜스레 삐딱한 말투가 나간다. 그가 아는 모로는, 어장관리 같은 피곤한 짓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눈을 가늘게 뜬 치즈펠이 꽃다발을 쳐다보았다. 마음이 담겨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의미한 것을 받기도 싫었다. 자기 자신도 뭐 이러냐, 하고 한숨이 날 만큼 복잡한 마음이었지만 모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뭐. 그래서 싫어요?”

천연덕스레 대답한 모로는 다시금 꽃다발을 들고 있던 손을 거두어 높이 들어 올렸다. 훤칠하게 키가 큰데다가 그보다 30cm는 작을 치즈펠이 꽃다발을 빼앗는 것은 무리였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주세요. 자포자기한 치즈펠이 얌전히 손을 내밀자 모로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성격 나쁜 놈. 꽃다발을 받아 들자마자 터져 나오는 투덜거림에 모로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쳤다.

“알고도 좋아했으면서.”

“잘도 써먹지, 그거!”

발끈해서 소리쳤지만 모로가 직접적으로 ‘고백’에 관한 말을 내뱉는 것은 처음이었다. 치즈펠이 모로를 좋아해 고백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당사자 두 명 뿐. 겉으로는 아무래도 좋은 듯 무신경해 보이지만 괜한 소문에 휘말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 주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좋아했었지.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라는게 문제지만. 새삼 빨갛게 물드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치즈펠은 고개를 숙여 품에 안은 꽃다발에 코를 묻었다. 꽃에는 별 관심이 없는 그로서는 이름 모를 꽃이었지만, 좋은 냄새가 났다. 보고 있지 않아도 머리 위로 모로의 시선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선배 좋아하니까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이한 어조였지만 치즈펠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게 만들기엔 충분한 말이었다. 여기서 호들갑을 떨며 반응했다가는, 졸업식 날 마지막 놀림감이 되기 딱 좋았기에 치즈펠은 애써 덤덤한 척 활짝 웃었다.

“아. 그래. 알아, 알아.”

졸업식에 와 준 것은 기쁘지만, 치즈펠은 더 이상 이 화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대학 캠퍼스와 그 인연은 끝이었다. 모로 또한, 새 학기가 시작되면 새 생활을 시작하고 다른 이들을 만날 터. 그런 모로의 모습을 보기 위해 학교에 얽혀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이고 하니 밥 한 끼 먹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졸업할 때 까지만 기다려줘요.”

…뭐? 의미심장한 답변에 치즈펠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의식한 뒤로 줄곧 피하고 있던 눈이 마주쳤지만 피할 수 없었다. 드물게도, 모로가 눈을 휘며 웃고 있었다.

“그 땐, 꽃 말고 다른 거 줄게.”

평소 틱틱 대면서도 꼬박꼬박 붙이던 존대가 사라져 있었지만, 거기에 태클을 걸 정신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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