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이거 좀 괜찮은데. 시향지의 향이 마음에 든 샘플용 향수를 가볍게 손목 안쪽에 뿌려 보았다. 독하지 않고, 적당히 청량하면서도 부드러운 향이었다. 2월도 막바지. 지금 뿌리고 다니기엔 너무 시원한 향이 아닌가 싶지만 그것은 선물을 받은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주는 내 마음에 들면 됐지. 가끔 훔쳐 써도 괜찮을 것이다. 나는 만족스레 향을 맡고는 두터운 코트에도 그것을 한 번 뿌렸다. 저기요. 내 목소리에 근처에 있던 직원이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이걸로 하시겠어요? 하고 묻길래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열된 선반 아래의 서랍에서 완제품을 꺼낸 직원을 따라 카운터로 가 계산을 하려는데, 눈치 빠른 직원이 이미 선물용 포장지를 꺼내 들고 있었다. 뭐, 누가 맡아도 여성용이 아닌 향수이긴 하지만 내가 뿌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내 취향은 아니지만. 포장하실거죠?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리고 싶진 않았지만, 이미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어서 난 그저 네, 하는 대답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남자친구분 선물인가 봐요. 향수라니, 좋겠다.”
남자친구는 얼어 죽을. 목 끝까지 그런 말이 나올 뻔했지만 나는 사회인의 미소를 지으며 하하 웃어보였다. 남자친구가 아니라, 피를 나눈 혈육의 생일 선물이지만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이의 사람에게 그런 시시콜콜한 것 까지 알려주며 오해를 풀 필요는 없었다. 계산을 마친 카드와 함께 정성스레 포장한 뒤 쇼핑백에 넣은 향수를 받아 든 나는 서둘러 백화점을 나섰다. 봄이 오려면 멀었는지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얼른 집에 가야지.
“누나.”
눈 때문에 얼어 있는 바닥을 조심하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생이라는 놈 마저 야야 거리는 이 시점에, 나에게 누나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아서 나는 목소리만 듣고도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서 걸음을 멈췄다.
“모로?”
“어디 갔다 와요?”
역시나, 돌아보니 모로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추위에도, 얼어버린 바닥에도 아랑곳 않고 등을 꼿꼿이 편 채 우아한 걸음걸이로 나에게 다가온 모로는 두 걸음쯤 떨어진 곳에 멈춰서서 내 얼굴을 살폈다. 뭐, 어릴 적부터 내 몸이 약해서 이렇게 살펴보는게 일상이긴 한데… 가만히 나를 살피던 모로가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더니 내가 손에 쥔 쇼핑백을 확인하고는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의문이 생겼지만, 밖이 추웠기에 일단 가면서 이야기할 심산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같은 방향이기도 하고 모로도 동의하겠지 하고 움직였지만 굳은 것 처럼 움직이지 않는 모로를 보던 나는 다시 뒷걸음질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가자. 모로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밖으로 드러나 있었음에도 손바닥 아래로 전해지는 열기가 뜨겁다.
내 재촉에도 움직이지 않고 묵묵하게 나를 내려다보던 모로가 갑작스레 제 쪽으로 나를 끌어당기고는 그대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섯 살이라는 나이차를 떠나, 허물없이 알고 지낸 것도 벌써 15년도 넘은 사이지만, 모로가 사춘기가 되고 나서부터 이런 식의 스킨십은 한 번도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고개를 숙여 내 머리카락의 냄새까지 맡고 있었기에 더더욱.
“누구예요?”
평소보다 더욱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으르렁대는 것 같기도 하고 기운이 빠진 것 같기도 한 묘한 목소리.
“응? 뭐가?”
앞 뒤를 다 잘라먹은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어서 되묻지 모로는 나에게서 몸을 뗀 채 똑바로 나를 보고 섰다. 물론, 내가 한참이나 작았기에 약간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춘 채로.
“다른 남자 냄새 나.”
여유롭게 웃고 있는 평소와 달리 날카롭게 뜬 눈과 마주치자, 말꼬리가 짧아져 있는 것을 지적할 틈도 없었다.
“짜증나게.”
독점욕 강한 맹수 같은 모습에 나는 무심코 숨을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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