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모모] 까마귀가 들려주는 이야기

2024 기념일 세계관:: 뱀파이어, 단편

빠레빠레 by 리라
41
2
0

사진: Unsplash Ladin Parenteau.

유독 먹이가 잡히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오래 전부터 사람의 피를 먹는 흡혈귀라는 것이 살고 있는데 덕분에 덩치 큰 짐승도 몸을 사리기 일쑤였습니다. 자그마한 생쥐 떼도 굶주린 들개도 그것에 대해 떠들었습니다. 거대한 곰을 단숨에 찢길 정도로 강한 손톱, 날카로운 송곳니, 마주치기만 해도 몸이 굳어버리는 섬뜩한 눈동자. 인간의 피가 없으면 우리를 먹어버린다지. 우리는 맛이 없어서 산산조각이 날 테지. 모두가 두려워하며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기를 꺼려했습니다. 까마귀도 그러했습니다. 까마귀는 본래 아침 일찍 둥지를 나서 하루 동안 먹을 먹이를 구해 오곤 했는데 이따금 기어가는 지렁이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이면 까마귀는 날아올라 숲과 마을의 경계선에 있는 허름한 집을 찾아갑니다. 여기에는 멍청하고 순진한 인간이 살고 있는데 이 인간에게 다가가 불쌍한 척 울음소리를 내면 다른 인간과 달리 곳곳이 헤진 옷차림을 한 소년이 제 몫의 식량을 나누어 줍니다. 죽은 사체의 멀쩡한 부분을 잘라둔 고기나 딱딱한 빵, 조미료를 넣지도 익히거나 삶지도 않은 풀떼기. 다른 동물보다 조금 더 인간에 대해 아는 게 많은 까마귀는 이것이 사실은 인간에게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소년조차 모르는 사실을요. 그야 이 소년에게는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친구도 없으니까요.

소년이 물에 불린 빵을 건네며 말을 걸었습니다. 까마귀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소년의 말 상대 노릇을 해주고 있습니다. 부리에 빵을 물려주는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무언가에 겁먹은 듯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곤란해해서 숲속 깊은 곳에 있는 악마의… 흡혈귀 성으로 가게 됐어. 내가 그를 물리치지 못하면 모두가 곤란해할 거야. 그러니까…”

저런. 소년은 오늘 밤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까마귀는 동정을 담아 까악 하고 울었습니다. 울음소리의 의미도 모르고 소년이 배시시 웃어 보입니다. 멍청한 인간, 멍청한 어린것.

멍청한 소년이 도끼 손잡이를 꼭 쥔 채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둑한 밤 동안 저것이 죽어 사체가 된다면 하다못해 찾아서 먹어주어야지. 까마귀가 다음날을 기약합니다.

그러나, 까마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소년은 두 발 멀쩡히 숲을 빠져나와 다시 허름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옷깃과 소매 가득 피를 묻힌 소년이 어제와 같이 웃었습니다. 소년의 생사가 궁금하여 찾아온 까마귀를 상대로 어젯밤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어젯밤 소년은 숲에 있는 낡은 고성에 들어가 쓰러져 있는 흡혈귀를 발견하고 다가가 그대로 물려버렸다고 합니다. 소년이 놀라 비명을 지르고서야 소년에게서 떨어진 흡혈귀는 소년에게 정중히 사과하며 한동안 인간의 피를 전혀 먹지 못하여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고. 그런 흡혈귀를 가엽게 여긴 소년은 흡혈귀에게 피를 주고 숲에 대한 사정을 듣고 두 발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그 흡혈귀에게 내가 피를 주면, 마을 사람도 흡혈귀도 곤란해하지 않을 거야.”

소년은 그것이 자신의 행복인냥 환히 웃었습니다. 그런 소년을 위해 까마귀가 기꺼이 충고했습니다. 비록 소년에게 닿지 않을 충고이겠지만, 들으렴. 멍청한 인간아. 모두가 널 좋아하지 않는데 너만 모두를 좋아하는구나. 무시무시한 흡혈귀가 널 이용해 네 피를 모조리 먹어버릴 거야. 말 상대를 끝낸 까마귀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까마귀의 충고를 듣지 못한 멍청한 인간은 꿀 냄새를 맡은 곰처럼 꽃을 찾은 벌처럼 몇 번이고 깊은 숲속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성과 집을 오가는 멍청한 인간의 처음에는 새하얗기만 하던 얼굴색이 갈수록 먹음직스럽게 보여 까마귀는 호기심이 앞서 오늘도 성에서 돌아와 허름한 집으로 들어간 멍청한 인간을 쫓았습니다. 멍청한 인간이 기다렸다는 듯 까마귀에게 빵을 주었습니다. 딱딱하지 않고 새하얀, 부드러운 빵이었습니다. 아무도 저것에게 빵을 주지 않을 텐데. 까마귀가 놀라 멍청한 인간을 보았습니다. 멍청한 인간이 말하기를 이 빵은 성에 사는 흡혈귀의 것이랍니다. 안색이 좋지 않아 보여 인간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고. 그는 참 착한 흡혈귀라고. 어쩐지 먹음직스러워 보이더니 무시무시한 흡혈귀는 이 먹을 구석 없는 인간을 살찌운 다음 먹을 생각이었나 봅니다. 그런데도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이란. 역시 이 인간은 멍청하다며 까마귀는 인간이 건넨 빵을 배부르게 먹고 집을 떠났습니다.

먹음직스럽게 변해가는 인간에게 주목한 것은 비단 까마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먹이가 풍족해진 허름한 집을 곧잘 드나들게 된 까마귀는 때때로 허름한 집을 노려보며 숙덕이는 마을 인간 여럿을 보았습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상처 하나 없이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들고 숲을 나와 집에 들어가는 멍청한 인간을 보고 저들끼리 속닥속닥. 한 번은 집으로 돌이 날아와 놀라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둥지로 돌아와 깃을 고르는데 둥지를 올린 나무에 구멍을 뚫어 지내는 쥐 가족이 종알거렸습니다. 허름한 집에 사는 인간이 곧 죽을지도 몰라! 여전히 수다스러운 녀석들. 까마귀는 멍청한 인간이 잡아먹히는 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잠에 들었습니다. 적어도 오늘 밤은 고요히 지나가면 좋을 텐데. 하늘은 까마귀의 바람은 영 들어주지 않을 모양입니다.

까마귀는 주변을 가득 채운 열기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나무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인간 여럿이 활활 타오르는 불과 뾰족한 날붙이와 두꺼운 나무 방망이 따위를 들고 숲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밤은 소란스럽겠구나. 까마귀가 둥지를 포기하고 날아올라 자리를 피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허름한 집에 사는 멍청한 인간에게 먹이를 나누어 받았던 다른 동물도 자리를 피하겠지요. 오로지 달만이 멍청한 인간의 마지막을 지켜봐 줄 것입니다.

허공에서 타오르는 숲을 보았습니다. 달빛에 지지 않을 만큼 크게 번진 불길 사이로 갖가지 비명이 들려옵니다. 이렇게 숲이 밝아지면 어쩌면 달도 그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까마귀는 변덕을 부리기로 했습니다. 방향을 틀어 멍청한 인간의 집으로 향합니다. 숲 가까이에 있는 집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인간들이 좋아하는 반짝이는 물건 하나, 부드러운 천자락 하나 없는 방은 집주인이 도망갔음을 알립니다. 까마귀가 종종걸음으로 불길이 이는 숲 근처까지 가보자 피투성이가 된 멍청한 인간이 있었습니다. 머리, 팔, 몸통. 멀쩡한 곳이라고는 없습니다. 멍청한 인간은 이대로 죽어버리겠지요. 까마귀가 동정하여 까악. 울음소리를 내자 불길 사이로 무언가가 나타났습니다. 불길에서 나타났음에도 새하얀 그것은 힘없이 걸어와 인간을 감싸 안고는 아주 약한 생물처럼 잘게 떨었습니다. 설마 멍청한 인간에게 친구라는 것이 있었던 걸까요. 그것은 피로 얼룩진 인간의 얼굴을 정성껏 닦아내며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가지 마, 날 두고 가지 마.”

인간의 언어를 하는 그것이 입을 벌려 인간을 먹었습니다. 그제서야 까마귀는 저것이 성에 사는 흡혈귀임을 깨달았습니다. 까마귀는 자신도 잡아먹힐지도 몰라 무서워하며 서둘러 숲을 벗어났습니다. 멍청한 인간, 결국은 저렇게 먹혀버리는구나. 결국 저것은 마지막까지 혼자였구나. 까마귀가 멍청한 인간을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까마귀는 새로운 둥지를 만들기 위해 바쁜 일과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이전에 살던 숲은 불로 인해 먹을 것도 풀도 나무도 다 타버리고 말았으니까요. 숲에 인접해 있던 마을도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며 마을에 사는 개와 친한 여우가 숲에 살던 동물에게 소문내었습니다. 인간은 매번 그렇지요. 자기 잘못은 없는 것처럼 모두 남 탓으로 돌려버리고는 성만 내는 것들. 까마귀가 그들을 한심하게 보며 나뭇가지를 날랐습니다. 새롭게 만드는 둥지는 전보다 더 멋지게 만들고 싶었던 까마귀가 주변을 여기저기 둘러보다 그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그것도 까마귀를 보았겠지요. 그것은 천자락을 나풀거리며 다가와 몸을 굽혀 시선을 맞추었습니다. 그러고는 까마귀에게 부드러운 천을 건냅니다.

“미안해.”

까마귀에게 낯익은 목소리였습니다. 이어 저편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역시 까마귀에게는 낯익은 목소리가.

“…모모, 모모!”

“아! 죄송해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모모가 벌떡 일어나 사과하자, 무시무시했던 괴물이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답합니다.

“많이 부르면 익숙해질 거야. 그렇지?”

“네. ……유키.”

“응?”

“유키.”

“응. 모모. 손을 맞잡을까.”

유키와 모모는 서로의 손을 잡고 떠났습니다. 까마귀에게는 부드러운 천만이 남았습니다. 까마귀는 둥지로 천을 가져가 나뭇가지로 엉킨 자리 위에 올리고 돌멩이 몇 알을 주워 와 날아가지 않게 눌렀습니다. 이번 둥지는 참 근사하구나. 까마귀가 기분 좋게 날아올라 기꺼이 부리를 열어 울음소리를 내었습니다. 무시무시한 괴물도 멍청한 인간도 아니게 된 둘에게 닿으라고 큰소리로. 여전히 전해지지 않을 감사를 담아 까악하고.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