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과 노을의 2막

IDOLiSH7 - 이오리쿠 '더랍스터' AU

습한, by cosmos
2
0
0

영화 원작과 캐릭터에 일부 다른 설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나세 리쿠七瀬陸. 며칠 전에 호텔의 사냥 시간을 틈타 도망쳐 나온 '외톨이'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무리 앞에서 횡설수설하며 자신이 도망친 이유를 설명했으나 무리는 그의 말에 일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어차피 이유야 모든 사람들이 비슷하니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아서, 호텔에 들어가기 전 고민한 끝에 골랐던 동물이 막상 되려니 두려워서. 무리의 대장은 이즈미 이오리和泉一織에게 그를 맡겼다. 이즈미는 숲에서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람답게 지극히 교과서적으로 그를 대했다. 규칙, 원칙, 금기들이 그의 입에서 녹음된 파일처럼 줄줄이 흘러나왔다. 나나세는 그중 절반은 머릿속에 새겼고 절반은 새기지 못했다. 탈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정신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규칙과 원칙과 금기에서 도망쳐 나와 또 다른 규칙과 원칙과 금기를 마주해야 했을 충격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즈미가 이야기한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서로 사랑하지 말 것.

1장.

나나세와 이즈미는 팀이 되었다. 단순히 나이가 비슷했기 때문도, 다른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숲으로 왔지만 여전히 쫓기고 숨어 사는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웃음과 사근거림을 잃지 않은 나나세를 귀찮아했기 때문도, 이즈미에게 이른바 "짬처리"를 했기 때문도 전혀 맞지 않는 두 사람이 팀이 된 여러 가지 이유 중 몇 가지였다. 이즈미는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완벽하게 수행해야 하는 의무라고 생각하는 듯 묵묵히 나나세를 데리고 다녔다. 오래 뛸 수 없는 나나세를 데리고 사냥을 나온 사람들을 피해 최대한 오래 숨어있을 수 있는 곳에서 함께 몸을 웅크렸고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짝을 찾은 이들을 갈라놓기 위한 잔혹한 진실들도 서슴없이 내뱉었다. 나나세에게 규칙, 원칙, 금기들을 이야기했을 때처럼 목소리엔 고저가 없었고 표정 역시 단 한 번도 웃어본 적 없는 것처럼 차가운 그대로였다. 나나세는 불안해하다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이내 언성을 높이다가 폭력을 행사하는 한 쌍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이즈미는, 이즈미답게 그들을 바라보다가 호텔 관계자들이 소란을 듣고 찾아오기 전 그들에게서 시선과 발길을 떼지 못하는 나나세를 데리고 떠났다. 덕분에 나나세는 외톨이들이 호텔을 습격하고 숲으로 돌아갈 때마다 이즈미에게 일장 연설을 들었다. 

나나세는 이즈미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거짓으로 포장된 관계인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거짓이어도 상관 없잖아. 살고 싶을 수도 있잖아. 호텔에서도 어떻게든 시간 내에 짝을 찾기만 하면 된다고 했잖아. 왜 그들을 이간질하는 거야? 우리가 얘기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은 그대로 호텔에서 나가서 자유롭게 살 수도 있는 거잖아. 그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상대에게 화를 내게 만드는 거야?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더 이상 총을 피해서 숲을 뛰어다니거나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왜 그렇게 잔인하게 굴어야 해? 

나나세는 이 모든 말들을 삼키며 그저 미안하다는 대답을 내뱉었다. 가끔은 멋쩍은 미소와 함께 다음에는 잘해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면 이즈미는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체력을 잘 비축해두라는 말과 함께 돌아가곤 했다. 아마 이즈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나세의 다짐은 거짓말이라는 걸. 다음에도 그는 자기 뒤에 서서 한 마디도 못하고 균열하기 시작하는 관계를 초조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걸. 

이즈미는 그런 나나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거짓으로 시작된 관계는 금세 들통나기 마련입니다. 쌍방합의하에 호텔을 속이기 위해서 연기를 하는 거라면 상관 없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다른 한쪽의 마음을 이용하는 거니까요. 계획된 거짓말이라면 저희가 가서 진실을 이야기했을 때 그런 반응을 보이진 않았겠죠. 거짓된 관계를 깨트리면 결론적으로 저희가 보는 이득이 많습니다. 호텔 관계자에게 들통나 다시 혼자로 돌아간 사람들 중 불안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요.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세 개입니다. 시간 안에 다시 '진실된 관계'를 맺거나 주어진 시간이 다 되어서 동물이 되거나. 전자는 확률적으로 희박하죠. 후자는 모두가 두려워하고요. 마지막 선택지는, 우리와 함께하게 되는 것. 전쟁에서처럼 압도적인 도구와 기술이 양쪽에게 없는 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소위 말하는 어느 쪽 머릿수가 더 많느냐죠. 원시적이게도요.

2장.

나나세에겐 지병이 있었다. 뛰거나 놀라는 등, 호흡이 흐트러지면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심한 경우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다. 호텔에서는 대형병원에 준하는 의료시설과 의료진들이 상시로 투숙객들의 건강 상태와 지병을 관리하고 거의 모든 질병에 대한 대응이 준비되어 있다. 병 때문에 죽을 일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 병이 '결함'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선택받지 못하게 될 뿐. 숲에서의 상황은 다른 모든 것과 그렇듯 정반대였다. 병은 결함이 되지 않는다. 보편의 사회에서 정의한 소수성이 어떤 집단에서 대다수를 차지할 때 그것을 소수이자 결함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그건 새로운 보편에 가까웠다. 그러나 반대로 병 때문에 죽을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곳이 이곳, 숲이었다. 나나세의 발작을 막고 막힌 기도를 트기 위해서는 흡입기와 약이 필요했고 이는 구급 박스에 들어갈 만한 평범한 것들이 아니었다. 대장과 나나세, 이즈미는 나나세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종종 도시로 내려갔다. 숲에서 위장과 기동력을 위해 입는 편하고 짙은 색의 옷이 아닌, 깔끔하고 몸에 딱 맞는,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바닥을 구를 일이 없는, 총이 아닌 펜과 노트를 쥐는 사람들이 입는 옷이었다. 생명줄을 담보로 한 이 짧은 연극에서 대장은 나나세와 이즈미의 보호자가, 거짓된 관계로 묶여있던 연인들의 사이를 갈라놓던 나나세와 이즈미는 그들과 달리 계획된 거짓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의심의 여지 없는 연인이 되었다.

맞잡는 손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이따금 맞물리는 입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킨십이 짙어지면 미미하게 달아오르는 목덜미와 귀 끝까지도 관객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을 덧붙여 부재한 서사를 만들어내며 좋아했다. 서로에게 부끄럼을 타는 비극적인 어린 연인이란 옛날부터 진부할 정도로 계속되었지만 실패하지 않는 소재였다. 어색하던 부분들을 보완해나가며 몇 회차를 거듭한 끝에 이즈미와 나나세는 대장마저도 속을 정도로 맡은 배역에 점차 능숙해져 갔다. 허벅지 위에 가볍게 올라온 손을 자연스레 맞잡고 허리를 감싸 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뺨이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호칭도 연인답게 바뀌었다. 이즈미에서 이오리로. 하지만 나나세의 이름을 부르려 할 때마다 이즈미의 연기가 미세하기 흔들리는 것이 보였기에 나나세 씨는 여전히 나나세 씨였다. 이즈미의 성격과 둘의 나이 차로 미루어보아 어색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병을 앓아 주기적인 진료와 처방이 필요한 나나세와 그런 나나세의 결함을 알고도 그의 곁에 있기를 선택하고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는 이즈미. 관객들은 그들의 사랑 이야기에 눈물을 훔치며 박수갈채를 보냈고 티켓값으로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기꺼이 내놓았다. 박수, 인사. 커튼콜이 끝나고 막이 내리면 둘은 비운의 연인에서 온전한 타인으로 돌아온다. 배역을 위한 의상은 옷걸이에 걸려 다음 무대를 기다리고 다시 흙바닥을 구르고 총을 쥐어야 하는 지독한 삶 한가운데에 툭 떨어진다. 무사히 숲으로 돌아온 뒤 이번엔 진짜 들키는 줄 알았어, 갑자기 그런 걸 물어봐서 깜짝 놀랐다니까, 따위의 궁금하지도 않을 이야기들을 늘어놓던 나나세는 언제부터인가 말이 없어졌다. 대장은 그런 그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는지 구태여 무슨 일이 있냐고 묻지 않았다. 나나세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받아온 약과 도구들을 가지고 다니기 좋도록 작은 가방에 나누어 남는 이즈미 역시 점차 말수가 없어지는 그를 지켜만 볼 뿐 먼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이즈미는 필요 이상의 호감을 보인다는 오해를 굳이 사고 싶지 않았다. 

연극의 환상통. 미숙한 배우가 역할에 너무 깊게 빠져들 때, 연극과 현실이 주는 괴리감이 불러일으키는 부작용이다. 혹자는 메소드 연기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라거나 능숙한 메소드 연기를 해내는 배우와 배역과 본인을 분리하기 힘들어하는 미숙한 배우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연극의 환상통은 미숙한 배우로 하여금 본인이 메소드 연기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이즈미는 나나세의 말수가 적어진 이유가 이 환상통을 겪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본인이 더 조심해야 하고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나나세가 조금이라도 숲의 규칙을 어길 기미를 보인다면 곧바로 경고해야 한다고, 날카로운 말을 내뱉어야 할 때마다 잘못은 본인이 했음에도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그 표정에 적당히 넘어가지 말고 제대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분명,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즈미는 나나세가 무대 위에서처럼, 자신을 이오리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나나세가 호칭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예의 지어 보이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정정할 때면 이유 모를 불편함은 크기가 배가 되었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컨트롤할 새도 없이. 숲의 규칙과 원칙과 금기도 호텔의 부조리함과 거짓의 유통기한까지도 아는 이즈미는 연극의 환상통을 앓는 이가 나나세가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3장.

호텔에서 쏟아져 나왔던 절박한 사냥개 떼가 물러가고 숲에는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다친 사람과 다치지 않은 사람, 새로 합류한 사람과 사라진 사람을 분리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 일련의 행동들이 모두의 몸에 익어 있었다. 이오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몸으로 뛰어다닌 나나세를 챙긴 뒤 적당히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팔로 끌어안으면 빠듯하게 들어찰 큰 나무에 등을 기댄 나나세는 한참 동안 기침을 터트리며 불안정한 숨을 몰아쉬었고 이제 이런 일들에마저 익숙해진 이오리는 약이나 도구를 써야 할 정도인지 아닌지를 구분해낼 수 있었기에 기침이 잦아들 때까지 그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다.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나나세는 잔기침을 몇 번 뱉고 숨을 크게 고르더니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이오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이오리는 잔기침까지 모두 멎은 뒤에야 나나세와 조금 떨어진 옆 나무에 기대 앉았다. 팔을 뻗었을 때 손끝에 어깨가 스치는 거리. 이오리와 나나세의 거리는 늘 이 정도였다.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 말 듯 한. 나나세는 고개를 돌려 뒤늦게 숨을 고르고 소지품을 점검하는 이오리를 바라보다가 울창한 숲에서 끝도 모르고 고개와 팔을 뻗을 수 있을 때까지 뻗은 나무의 끝을 올려다봤다. 빽빽한 그늘 사이로 햇살이 드문드문 구멍을 내어 숲을 밝히고 있었다. 나나세는 다시금 숨을 크게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갈라져 있었고 이오리는 표정을 살짝 구겼으나 나나세의 이야기를 자르는 대신 물을 건넸다. 

"이오, 아니지. 또 실수할 뻔했네. 미안. 이즈미는 형이 있어?"

"있습니다. 오래 사귀던 사람과 몇 년 전에 결혼했어요. 형이랑 연락을 주고받았을 때까지 행복해 보였고 두 사람 모두 건강엔 문제가 없으니 호텔로 갈 일도 없고, 안심이라 다행이죠."

"그렇구나. 다행이다. 나도 형이 있어. 쿠죠 텐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이즈미는 아이돌 같은 거엔 관심이 없어 보이니까 모를 수도 있겠다. 엄청 유명한 아이돌이었어, 형은. 무대에서 누구보다 빛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팬들을 사랑했어. 무대 위에서 지구가 끝날 때까지 영원히 빛날 별 같았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고 많은 사랑을 하는데도 팬이랑 반려자는 다르다고 형은 호텔에 가야만 했어. 웃기지? 형은 나랑 같이 호텔에 들어온 이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방 밖으로 나오지조차 않았고 당연히 식사도 거르고 사냥도 가지 않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는지 호텔에서는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도 형을 데려가 버렸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물이 되는 걸 두려워하잖아. 그런데, 이오리. 형의 마지막 표정은 오히려 기뻐 보였어. '이제 마음껏 노래 부를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 형을 보면서 형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난 막상 뭐가 무서운지도 모르고 무서워서 도망쳤는데 말이야."

숲에는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이따금 잔잔한 바람이 바스락거리는 낙엽 위를 밟고 지나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나나세 씨."

나나세는 눈물이 고인 눈을 소매로 꾹꾹 눌러 닦고는 웃으며 이오리를 바라봤다.

"미안, 이런 이야기는 재미도 없을 텐데 괜히 시간만 뺏었네. 더 이상 이오리한테 짐을 더 늘리고 싶진 않은데, 짐이 된 건 아니지? 만약에 그렇다 하더라도 날 두고 가진 말아줘. 나 이오리를 좋아하니까."

다시 적막이었다. 이번엔 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까지 쿵, 쿵 울려대는 심장 박동 소리 뿐이었다. 이오리는 한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었던 가방을 제대로 메며 자리에서 다소 급한 기색으로 일어섰다. 

"이제 이동할 시간이니 일어나세요. 그리고 나나세 씨. 숲에서 무리를 이루지 않는 건 죽는 거나 마찬가지라 당신을 혼자 둘 리는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그런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자제해주시죠."

무리는 총과 무수한 발자국이 망가트린 곳을 떠나 안전한 곳을 찾으러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각자의 어깨에는 삶에 대한 의지, 그리고 그와 같은 무게의 불안과 절망이 얹혀있었다. 이오리의 어깨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무거웠다. 나나세의 짐을 나눠 가졌고 나나세의 이야기가 더해졌고 그런 나나세에 대한 감정도 물을 먹은 솜처럼 점점 더 무게를 더해갔다.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을 고쳐매고 이오리는 나나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호텔이 없어서 숲을 헤맬 필요도 없는 오늘이었다면, 나나세는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그는 지병이라는 핸디캡을 가지고도 그가 원하는 대로 가수가 될 수 있었을까. 그늘이 지지 않은 곳으로 햇빛이 팔을 쭉 뻗어 나나세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화사한 태양 아래의 나나세를 본 이오리는 한동안 그에게서 부재했던 것이 움트는 것을 느꼈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나나세 씨를 보고 싶다. 

이오리는 고민 끝에 이 감정에 감히 욕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4장.

무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또 그만큼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했다. 이오리 덕분에 나나세는 몇 번의 발작을 제외하고는 신기하리만치 무사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저녁, 늘 그렇듯이 각자 하나씩 가지고 있는 헤드폰에서 머리를 울리는 일렉트로닉 음악이 흘러나왔다. 모두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 부를 가사도, 음정도 없이 기계적인 비트들에 맞춰 혼자서 춤을 췄다. 이오리는 공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쓰러진 나무 위에 앉은 채 춤을 추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는 지금껏 한 번도 춤을 춘 적이 없었다. 유일하게 해방될 수 있는 시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친 듯이 몸짓하는 사람들을 지켜만 봐왔다. 이오리의 시선 끝에 있는 나나세는 타성에 젖은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봐도 행복한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무대를 뜨겁게 비추는 조명도, 멋진 의상이나 정해진 춤도 없었으나 이오리는 그를 보며 무대 위의 나나세를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이오리는 나나세가 노래하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의 노래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거짓으로 치장한 연극 무대가 아닌 화려하고 커다란 무대에 마이크를 들고 선 그는 분명 누구보다 아름다울 것이라고 확신했다. 반짝이는 별이 된 나나세를 보고 싶다는 건 이젠 욕심이라고 정의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엉켜버렸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나나세를 눈으로 좇던 이오리의 옆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먼저 지친 나나세가 털썩 몸을 앉혔다. 덥지 않은 날씨인데도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이 그가 얼마나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오리는 짙은 어둠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음에도 나나세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쏟아져나오는 에너지와 아드레날린, 도파민 따위의 몸의 화학반응들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러한 종류의 감정은 쉽게 전염됐다. 음악을 들으면서도 발조차 까딱이지 않았던 이오리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화학반응이 일어났다. 한 시간 내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 것처럼 손에서 땀이 배어났다. 나나세는 헤드폰을 빼고 숨을 고른 뒤 이오리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낼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오리는 나나세에게 입을 맞췄다.

숲은 고요했다. 귀가 아프도록 울려대는 소리들 마저도 바로 옆에 나란히 앉은 이에게조차 전해지지 않았다. 길게 쓰러진 나무는 연극 무대가 아니었다. 입맞춤은 관객들의 호응과 대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비극의 서막은 늘 혀가 아리도록 달콤했다.

5장.

무리의 규칙 중 하나, 키스를 한 이들은 '레드키스' 처벌을 받는다. 둘의 미묘한 기류를 일찍이 눈치챈 대장에게 들킨 이상 처벌은 피할 수 없었다. 입술을 도려내고 다시 키스를 해야 하는, 본인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한 잔인한 처벌을 앞두고도 이오리의 신경은 '나나세의 입술을 도려낸다'는 것에 온통 쏠려있었다. 나나세 씨는 호텔에서도 숲에서도 벗어나 언젠가 무대 위에 서야 하는데. 입술이 없다면 그의 날개를 무자비하게 뜯어내 늪에 던져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이오리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돌아갔다. 그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대장이 봤다면 나나세는 당황에 굳어있기만 했고, 자기 자신이 독단적으로 한 행동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테였다. 지독하게 똑똑한 청년은 이 사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두려움이나 긴장은 단 한 순간도 비치지 않는 얼굴로 대장을 찾아갔다. 부디 대장이 자기가 내놓은 패들을 모조리 테이블에서 쓸어버리지 않길 바라며 머릿속으로 정리한 카드를 한 장씩 조심스럽게 꺼냈다. 

대장이 이오리의 협상에 오케이를 한 것은 지금껏 무리에 도움이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오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대장은 카드 한 장을 채 내려놓기 전에 이미 입술을 도려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협상에 응한 것은 다시 말하자면 이오리를 향한 마지막 배려였다. 이 역시도 잘 알고 있는 이오리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며칠 뒤, 호텔에서 목숨을 하루라도 더 부지해보고자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사냥꾼과 사냥감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총성이 숲의 고요를 깨고 낙엽이 내려앉은 바닥이 발자국으로 어지럽혀졌다. 저녁이 오기 전, 이오리는 그날 이후로 말을 섞지 않은 나나세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나나세 씨의 파트너가 바뀔 겁니다. 오늘 저녁부턴 제가 아니라 그 사람을 따라가세요. 저보다 무리에 더 오래 있었고 더 오래 살아남았으니 만약 전면전으로 맞붙었을 때에도 본인에 나나세 씨까지 두 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니 그 편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오리는 나나세의 약과 물품 따위를 따로 넣어 다니던 작은 가방을 나나세에게 건넸다. 나나세가 무언가를 묻기 위해 이오리를 부르며 팔을 뻗었으나 이오리는 그대로 등을 돌려 묵묵히 걸어갔다. 돌아보고 싶었다. 나나세의 눈에서 한 번 더 그를 상상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오리는 리스크를 감당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엄연한 규칙 위반이었고 대장은 이미 최대한의 아량을 베풀었다. 거기에 더해 그의 머릿속에서 연산된 철저한 계산과 계획이 만약 여기에서 나나세를 돌아보고 그의 표정을 마주한다면 다시는 걸음을 옮길 수 없을 것이라고, 대장과의 협상이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며 그때는 나나세 역시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해주고 있었기에 이오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충분히 멀어져서 나나세의 붉은 빛 머리칼이 지기 시작하는 단풍과 노을에 섞여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멀리에서 총성이 들렸다. 다시금 뒤섞이는 발걸음 소리가 아스라이 먼 곳에 있다. 이오리는 무리의 발이 잘 닿지 않고 이동 경로와 멀리 떨어져 있는 우거진 숲속을 헤매며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174cm보다 조금 여유 있는 세로 길이, 어깨너비보다 조금 여유 있는 가로 길이의 땅을 팔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 하늘에 붉은 기가 차갑게 식고 그 자리를 짙은 쪽빛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총성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한바탕 사냥 시간도 이미 끝난 모양이었다. 가까스로 찾아낸 곳에 이미 무언가가 묻혀있지 않길 바라며 이오리는 지고 온 삽으로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무릎 높이 정도로 땅을 파자 등이 땀으로 젖어 흥건했다. 이오리는 지고 있던 배낭을 구덩이 위에 올려두고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크기가 우스울 만큼 딱 맞았다. 스스로의 손으로 짠 투박한 관에 누운 이오리는 하늘을 바라봤다. 짙은 쪽빛 하늘에 별들이 무수했다. 크기가 큰 것부터 작은 것, 밝은 것부터 깜빡깜빡 점멸하는 것. 이따금 길게 꼬리를 늘리며 유성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이오리는 기억이 나지 않는 시간까지 모두 포함해 지금이 가장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나세 씨가 아무도 잡으러 오지 못하는 높은 곳에서 빛나는 별이 되기를,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 없으니 그런 나나세 씨를 한 번이라도 볼 수 있게 되기를. 이오리는 지금껏 빌어본 적 없는 염원을 담아 태양만큼 밝게 빛나는 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높은 산의 꼭대기에서 발을 디딘 채로 닿으려고 해도 먼 별이, 땅 아래에 누운 지금은 더욱 멀어져 잡힐 리 만무함에도 꼭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스칠 것 같았다. 멀리에서 낙엽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것보다 가볍고 소리의 수가 훨씬 많았다. 서늘해진 바람이 들개떼를 유인한다. 낙오된 목숨을 물어뜯어 하루라도 더 생존하기 위해 달리는 발걸음, 맹렬히 짖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이오리는 팔을 접고 손을 모은 채 몸 위에 올려두고 눈을 감았다. 직전까지 바라본 별의 잔상이 밤하늘만큼 새카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언젠가 당신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과 함께 춤을 출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거짓으로 범벅된 관계이든 연기뿐인 배역이든 어떻게든 살아남아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나나세 씨,

이 들판은 당신이 침대로 삼기에 너무 추우니까요.


마지막 문장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머큐쇼의 대사 This field-bed is too cold for me to sleep.를 인용 및 변형했습니다. 

🎵
IDOLiSH7 - Mallow Blue
Ólafur Arnalds - Only The Winds
Beethoven - String Quartet Op. 18 No.1 II Adagio affettuoso ed appassionato (The Lobster Soundtrack)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