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nounce
아이돌리쉬 세븐 반유키
성인물 원본은 이쪽입니다. 여전히 약간의 묘사가 남아있습니다.
꿈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아닌 제 손으로 포기한 것이라고. 손편지 하나 들고 보금자리를 떠났던 그날, 슬픈 노래를 마음껏 불렀던 그날, 손에서 놓아버린 줄로만 알았던 그것은 형태를 바꿔 지금 여기에 있다.
'반, 날 위해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어?'
비틀거리며 돌아온 유키가 그렇게 물었던 날을 선명히 기억한다. 진동하는 술 냄새에 얼굴을 찌푸렸었지. 반리의 시선이 그윽해지며 과거를 향했다.
추운 겨울날의 일이었다. 입술이 얼어 뭉개지는 발음에 반리의 표정도 함께 구겨졌다. 붉어진 귀가 추위 때문이었다면 조금은 봐주었겠으나 흐느적거리는 몸만큼이나 흐물거리는 말투는 누가 봐도 주정뱅이의 그것이었다. 하여튼 잠시 눈을 떼면 금세 이 사달이 난다. 반리는 술에 취한 유키가 혹시나 무슨 일을 저지를까 작업하던 곡의 세이브 버튼을 몇 번이나 연타했다. 하아, 이제 막 뭔가 잡히려고 했는데. 반리가 유키를 노려보았다.
라이브 하우스에서 그럭저럭 친해진 밴드가 부르는 술자리에 유키를 혼자 보낸 것이 문제였다. 떠오르는 악상이 있어 오늘은 작곡에 전념한다고 틀어박혔는데 어째 수고가 더 들게 생겼다. 역시 빠지는 게 아니었나. 아니지, 나이를 먹어 어엿하게 성년인 유키가 혼자 술을 마시든 밖을 나돌든 그것이 반리의 책임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 나이에도 자신이 없으면 자제를 못 하는 유키가 나쁘다.
유키는 붙임성 있게 술잔을 나누는 성격은 못되었으나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멍해진다는 게 문제였다. 주량에 맞춰 끊을 줄도 알아야 하는데 유키의 기준은 통계가 아닌 기분에 달려있었다. 취한 모습을 보아하니 오늘은 조금 더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나 보다. 결국 반리는 못 이기는 척 잠시 어울려 주기로 했다.
"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하는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유키의 겉옷을 벗겨주며 그는 되물었다. 대답은 아주 느릿하게 돌아왔다.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코트가 풀썩 발치에 떨어질 때까지도 유키는 눈을 꿈뻑이기만 했다. 유키의 피부에 묻은 찬 공기가 눈꼬리에 맺혀 주륵 흘러내렸다.
"반은 나 때문에 진학도 포기하고, 하고 싶은 일도 포기하고..."
유키가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러나 반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어이, 유키. 서서 자지 말고 일어나. 어깨를 흔들어 보니 역시나 유키는 밀려오는 잠에 취했을 뿐이었다. 반리는 유키를 따라 푸욱 고개를 숙였다.
"그거 네가 생각한 거 아니지. 그런 기특한 고민을 유키가 할 리 없잖아."
오리카사 유키토가 누구인가. 저를 대신해 성난 주먹을 얼굴로 받아낸 친구에게도 '불쌍하네.' 한마디 했던 인간, 그중에서도 말종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뭐, 상관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유키의 대답 따위 듣지 않아도 뻔했다. 아마 이번 술자리의 안주는 나였겠지. 유키와 오오가미 반리의 관계가 그랬다. 바늘과 실과 같아서 따로 떨어져 술자리에 나가면 안줏거리로라도 함께하게 되는 사이였다. 유키가 없는 자리에서는 반리를 향한 건방진 연하의 이야기가 쏟아졌고,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는 분명 유키의 연상 노릇을 하는 제 얘기가 식탁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으레 취한 유키에게 에둘러 마운트를 취하려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오오가미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반리도 힘들 텐데… 따위의 말로 그를 방패 삼았다. 오늘은 죄책감을 자극해 보려는 패턴이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나를 위해서'라니, 이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야.
…남들 눈에는 우리가 그렇게 비치고 있는 거겠지, 분명. 반리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유키는 트러블메이커, 그 곁의 나는 유키가 친 사건사고를 수습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뭐든 양보하기 일쑤. 그러나 사실만으로는 진실을 찾아낼 수 없듯이 그들은 헛다리를 짚은 채 그를 위하는 척 잘난 체를 하고 있었다. 반리는 그런 오해를 바로잡아 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지만, 무시하려 해도 유키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로부터 왁자지껄한 그들의 과장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힐긋 유키를 흘겨본 반리는 조심스레 벗기고 있던 스웨터를 단숨에 들춰올렸다. 유키는 그저 몽롱한 머리로 들은 걸 읊을 뿐이겠지만 괘씸하기는 마찬가지라 봐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역시나 추위에 약한 유키는 갑자기 맨몸으로 맞이한 싸늘한 공기에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얄쌍한 그의 눈이 배로 커져 있었다. 반! 그가 외쳤다. 뭐하는 짓이야! 그러나 반리를 끄떡도 하지 않았다.
"무슨 짓이냐니, 너야말로 아까 했던 짓 다시 해봐."
어서. 반리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항의를 시작한 지 두 마디 만에 입을 다문 유키가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 불리해지니까 모르는 척한다. 보기 좋게 오똑한 콧날 위로 음영이 드리우자 반리는 이제 그만 쉬게 해주자며 딸깍 불을 껐다. 열린 문틈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불빛을 의지해 발을 내딛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 안… 누군가 불을 붙인 것처럼 유키의 목소리에 스며든 술기운은 휘발되어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 때문에 하고 싶었던 일, 포기한 적 있어?"
가사지를 채워넣듯 말을 골라봤지만, 결국은 그 잡배들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유키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으나 내리깐 속눈썹에 빛이 아롱거렸다. 이윽고 반리가 얼굴을 마주보기 위해 뒤를 돌자 조명을 등진 그의 그림자가 유키의 발밑에 깔렸고 유키의 낯에는 숨 막히는 적막이 깔렸다. 그는, 반리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원래가 오리카사 유키토는 감정에 해체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관심이 없었고 그리하여 섬세함을 엄마 뱃속에 놓고 태어났냐는 말도 심심찮게 들었다. 그때마다 유키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그렇네.'라고 대강 답하며 대화를 끝맺었다. 바로 그런 점이었다. 음악으로는 천 가지 감정을 표현하면서 그 외에는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오오가미 반리는 다르다. 유키에게 반리는 어느 쪽인가 하면 전자에 한참 가까웠다.
같이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반이 처음이야. 그렇게 말한 순간부터 유키에게 반리는 늘 알고 싶은 사람이었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멎지 않는 것처럼 들이켰지만, 유키의 오아시스는 원체 바다 같이 넓고 깊은 사람인지라 그 나름의 노력이 티도 나지 않았다. 영영 마르지 않을 거라 안심하면 좋을 텐데 유키는 소금물에 더욱 목이 타들어 갔다. 반에 대해 남김없이 알고 싶어. 그러나 여전히, 가끔, 혹은 종종, 유키는 반리의 저 얼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반리와 유키를 조금 겪어본 사람들도 오해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반리보다 유키를 어렵게 여긴다는 점이다. 친해지기 쉬운지를 묻는다면 그들의 생각은 옳았다. 그러나 기분이 어떤지 파악하는 건 단언컨대 유키 쪽이 난이도가 낮았다. 기분이 나쁘면 나쁜 대로 티를 내는 유키와 달리 반리는 리바레의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처세술도 나날이 능숙해졌다. YES와 NO를 말할 때까지의 정확한 거리감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유키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오오가미 반리는 초심자가 도전하기에는 허들이 높은 사람이었다.
"하려던 게 있으면…… 리바레랑 같이 해도 좋아."
가끔은 기분전환 하는 게 작곡에 도움이 된다고, 반도 그랬잖아. 그러니까 나도 같이… 유키는 말을 잇다 말았다. 아직도 반리에게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유키, 잘 들어. 역광이 아닌 자신에게는 유키의 표정이 잘만 보였다. 어째서 그렇게 불안해 보이는 얼굴을 하는 거야. 훅 불면 사그라들 것 같은 촛불처럼 위태롭다. 그 얼굴 앞에서 반리는 하고 싶은 말들을 요령껏 엮어 하나로 만드는 대신,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버렸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너와 만든 리바레를 이어나가는 거야."
아마 밴드원이 하고자 했던 말은 이게 아니었을 것이다. 진로를 접었다는 무거운 이야기 말고, 유키가 갑자기 우겨서 잡은 라이브 일정 탓에 동창회에 가지 못했다던가, 식당이나 영화관에 가도 까탈스러운 유키의 취향에 맞추느라 제 취향은 뒷전이었다던가… 그런 일은 곧잘 있었으니 그 수준에 그치는 얘기였을 테다. 그러나 유키는 아주 깊이 받아들였다. 사고가 극단적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반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유키는 언제나 그 자신과 반리의 소망이 같기를 바랐다. 향하는 방향은 물론 목표 지점과 그곳으로 향하는 수단, 동기 모두. 그런데 사실은 하고 싶었던 일을 포기한 끝에 이 자리에 있다니, 그런 건… 유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완벽하게 맞물렸던 모든 것들의 첫 단추가 오류라면 원래대로 되돌렸을 때 하나라도 겹쳐지는 게 있을까. 그런 생각을 담뿍 했다는 게 평소보다 짙은 술 냄새에서 전해져왔다. 그래서 반리는 구태여 말했다.
"내가 리바레를 포기하는 일은 없어."
"반, 그럼 나는?"
응? 기다렸다는 듯 치고들어오는 물음에 반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걸 꼭 말해야 아나. 그러나 유키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한 발짝 다가왔고, 이대로라면 유키가 지쳐 떨어져나갈 때까지 서 있어야 한다는 걸 아는 반리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이만큼 해왔는데 이제 와서 포기하지는 않아. 막상 내뱉고 나니 잠겨버린 목으로 잔뜩 힘을 준 듯한 목소리만 확인한 반리는 무언가 대단한 결심을 하고 장엄한 맹세를 한 기분에 휩싸여 당장 문을 닫고 나가고 싶어졌다. 이어진 유키의 말만 아니었다면.
"반, 나를 위해서 나까지 포기하지는 마."
나를 위한 일이라며 나를 포기하지는 마. 나를 위해서라도 나를 포기하지는 마. 그 애절한 부름에 남은 세 걸음을 단숨에 좁힌 건 반리였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반리는 유키의 목덜미에 팔을 감아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여전히 문밖에 버려진 것처럼 떨고 있는 유키를, 아직은 이 겨울에 혼자 둘 수 없었다.
"오늘은 네가 침대에서 자. 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까."
취했으니까 이불 덮고 푹 자라고. 이제 그만 잘 준비를 하라며 등을 두드렸지만 유키는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싫어. 같이 자. 허, 반리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애냐…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유키가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밀쳐내려면 얼마든지 떼어내 매트리스에 던져놓을 수 있었지만 오늘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신 뒤척이면 바닥으로 쫓아낼 거야. 결국 씻고 온 반리는 유키가 먼저 누운 침대에 몸을 뉘었다.
"반, 자?"
"응, 자."
"거짓말."
"얼른 자라고 했잖아."
“술이 깨서 잠이 안 와.”
눈 감고 있어. 그러면 잠 와. 그렇게 말하면서도 반리는 등을 굴려 반대로 돌아누웠다. 아까 조용히 꿈지럭거리던 기척이 난다 했더니 유키는 한참 전에 제 쪽을 보고 누운 모양이었다. 어둠 속에서 색소가 옅은 눈동자와 시선이 맞았다. 둘 중 누군가의 눈이 감기기 전까지 무한하게 생겨버린 시간에 반리는 아까 물어보려다 말았던 얘기까지 꺼내올 수밖에 없었다. 유키, 아까 했던 얘기 말인데.
"그러는 너야말로 날 위해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어?"
"넓고 쾌적한 침대."
즉답이었다. 고민도 없이 대답한 게 고작 이거라니, 조금은 귀엽게 봐주려고 했더니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찬다. 그러게 혼자 자라고 했잖아.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운 반리가 베개를 집어던지자 유키는 얼굴로 받아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분명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겠지. 뻔뻔한 낯짝을 가리고 있는 베개를 노려보기를 한참, 설마 그대로 잠든 건가 싶어질 쯤 유키가 베개를 가슴께로 끌어내렸다. 코를 덮은 베개에 대고 유키가 먹먹하게 중얼거렸지만, 불을 끈 방에서는 뭐든 또렷하게 들렸다.
"...아마 전부."
뭐야, 그 무책임한 발언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대답에 반리가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어차피 또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막 던진 거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힘이 빠져 잠이나 자자 싶었던 그는 팔을 뻗어 유키에게서 베개를 되찾아 오려 했다. 유키, 이제 돌려줘. 손으로 더듬거리며 유키의 품 안에 낀 베개를 빼내려 하자 아니나 다를까, 유키는 더더욱 양팔에 힘을 주었다. 아예 몸까지 웅크리려는 양에 힘을 주어 베개를 잡아당기자 훅, 무방비한 유키와 눈이 마주쳤다. 유키는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음악만 빼고…"
아. 갑자기 가능할지도… 라고 생각해버린 건 뭘까. 유키는 음악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구는 남자였다. 이렇게나 시린 얼굴을 하고서 사막에 핀 선인장처럼 가뭄에 내린 단비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 말인 즉슨, 음악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전부 있으나 마나 한 것들. 유키에게 있어 별다른 무게를 갖지 못한다는 뜻이다.
응… 단 두 마디에 설득당한 반리는 가지런히 베개를 정리해 정자로 누웠다. 덮는 이불은 턱 밑까지 당겨서.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있지, 반. 여전히 자신을 향해 옆으로 누워있는 유키가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이왕이면 버리기보다는 반에게 주고 싶어."
유키에게 있어 음악을 뺀 나머지의 총합은 음악이 홀로 가지는 의미에 채 미치지 못했다. 그런 먼짓덩어리를 준다고 기뻐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반리는 걷잡을 수 없이 폐에 공기가 들어차는 기분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크게 숨을 내쉬어 전부 털어내고 싶건만 차마 그러지 못한 건…
"...네가 갖고 있는 게 뭐가 있는데. 기타랑 집안일에는 도움이 안 되는 몸뿐이잖아."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반리는 꾸욱 눈을 감았다. 괜히 더 이상한 기분이 들기 전에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더는 말 걸지 말라는 의미로 홱 이불을 끌어당기곤 가만히 눈을 감았지만 평정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르륵. 잠에 들려고 마음을 먹자마자 이불을 뺏긴 그는 전신을 덮친 한기에 짜증을 내려다 찬 공기를 잔뜩 집어먹었다. 옆에 누워있어야 할 유키가 유연한 고양이처럼 허벅지에 올라타 있었다.
"그 몸을 좋아하는 주제에. 봐, 얼굴도."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는 유키는 열받을 정도로 폼이 났다. 어두운 방안에서 하얀 달처럼 매끈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 보는 유키의 얼굴에는 방금까지의 불안이 씻은 듯 사라져있었다. 실컷 남의 속은 다 뒤집어 놓고서.
"이제 와서 새삼 네 얼굴에는 설레지 않으니까."
"그래도 키스하고 싶지?"
이 자식… 반리가 떫은 반응을 보여도 유키는 뭐가 그리 좋은지 풋하고 웃었다.
"반, 쓸데없는 자존심은 포기해."
그렇게 먼저 입을 맞춘 건 유키였다. 제자리를 찾아가듯 입술이 맞닿고 숨을 쉬는 타이밍에 혀가 얽힌다. 유키와의 숨을 나눈지 벌써 몇 년인데 수분을 머금은 체온을 마주하면 질리지도 않고 감각이 고양됐다. 제 위로 몸을 겹친 유키의 뒷목을 꾸욱 눌러 더욱 깊숙이 파고든 반리는 흘러드는 타액을 주저않고 받아마셨다. 목울대가 울렁이자 고개를 돌려가며 입술을 맞물리는 탓에 축축해진 턱 부근을 유키가 핥아올렸다.
"유키…"
낮게 깔린 음성에 유키의 몸이 움찔거리며 다시금 키스를 졸라댔다. 한 살 어린 연하의 혀 놀림은 어딘가 서툰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떠나… 유키 그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원하고 있는데 그걸 찾아내지 못해 심술을 부린다. 제 입안을 샅샅이 훑으며 애정을 갈구하는 유키가 난해한 가사를 읊듯 혀를 굴렸다. 그게 못내 사랑스러워져 반리는 유키의 허리를 끌어안고 자리를 뒤집었다. 있지, 유키…
"텅 빈 걸 주지 말고 네 안에 수많은 걸 채워서, 그때 내게 줘."
으응… 유키가 신음인지 뭔지 모르게 대답하자 반리는 천천히 그의 마른 가슴팍에서 내려와 곁에 나란히 누웠다. 반… 숨을 고르던 유키가 무언가 말을 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반… 반!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반리는 고개를 돌려 이름을 부른 상대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의 머리카락이 한참 늘어나 땀에 젖은 채 목덜미에 들러붙어 있었다. 유키… 잠꼬대처럼 화답하자 유키는 눈썹을 늘어트렸다.
"반, 나랑 있는데 다른 생각이나 하고."
이불을 슬쩍 걷어 그가 남긴 흔적을 보여주며 불평하는 유키의 쇄골에서부터 다시 눈가로 시선을 옮겼다. 5년간 조금씩 변해왔지만 유키는 여전히 올곧은 눈 그대로였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반리는 지난날의 선택에 작은 확신을 더해나갔다. 결코 깨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약속의 파편은 이제 제 안에 녹아 있었다.
'내가 리바레를 포기하는 일은 없어.'
'반, 나를 위해서 나까지 포기하지는 마.'
반리는 보란 듯이 그 약속을 전부 없던 일로 만들었다. 유키가 유키답게 노래할 수 있도록, 유키를 위해 리바레를 포기했다. 다름 아닌 그가 손에 쥔 극히 적은 것들 중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마저 던져버리려 했기에.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주더라도 음악만큼은 손에서 놓지 않겠다는 약속을 먼저 어긴 것은 유키였다. 사실은 그런 유키의 안쪽이 텅 비어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에 반리는 빈손으로 떠날 수 있었다. 유키, 그가 힘을 주어 이름을 불렀다.
"지금도 내게 네 전부를 줄 수 있어?"
두서없는 이야기에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반응을 전제로 했던 질문이었다. 그러나 유키는 금세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반, 그때 했던 얘기 말인데…"
이제는 얼굴을 베개로 가리지 않은 유키가 고개를 떨구자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변덕스럽게 그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반리는 대답을 기다렸다.
"미안, 지금은 포기할 없는 게 너무 많이 생겼어. 그래서…"
거기서 유키는 말을 끝맺었지만 반리는 후련하게 웃어 보였다. 서툰 말솜씨나 소리 없는 표정만으로도 그들은 서로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불과 함께 반리의 손을 잡아 침대 안쪽으로 끌어당긴 유키가 어색하게 웃으며 농담을 쳤다.
"그래도 여전히 침대는 반쪽을 내어줄 수 있으니까."
푸흡.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때처럼 역정을 내는 대신 반리는 유키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잘 생각했다며 시원스레 웃어 보였다.
"그래, 그거면 됐어."
말해두는데 그렇다고 대답했으면 지금 당장 박차고 나갈 생각이었으니까. 여전히 엄격하네. 그럼 다시 5년이 걸려서라도 찾아내야지. 두런두런 말소리는 한참이나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몇 번이고 함께 지새웠던 밤의 끝을 다시 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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