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

대본 리딩과 동거의 끝까지 이주, 제작까지 남은 시간은 그보다 더 많았으나 스케줄이 테트리스처럼 쌓이는 삶을 사는 둘은 리딩부터 동작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길 원했다. 지금까지 받았던 대본과는 차원이 달랐던 것도 이유였다. 그동안 유키와 야마토가 자신의 이름으로 구현해왔던 캐릭터들이 단순하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지만, 이번에는 더 많은 작업이 필요할 뿐인 거다. 단순히 불러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고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탐닉하며 예술의 순간을 열고 안겨주어야만 했다. 연기와 음악의 경계에 몸 담고 있는 둘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 세계를 창조하고, 넓히고, 찢고, 의미를 만드는 건 단순히 인물이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느냐를 아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세운 한 가지 규칙, 이 주의 동거동안 대본 전부를 맞춰보고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 부분을 돕자. 안무와 노래 연습이 끝난 후, 오늘의 스케줄이 모두 끝난 후 유키와 야마토는 각자의 집이나 숙소가 아니라 자가용과 택시를 이용해 숲속 깊은 곳에서 웅장하게 자리한 고택에 몸을 의탁했다. 둘은 이 가택이 치바 살롱의 외관과 비슷하다 생각 했으나 누구도 그걸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소품이 아닌 그들의 옷, 쇼핑백, 화장품과 핸드폰 선 등 온갖 현대적 미감으로 도배 된 집은 시인의 집 따위가 절대 될 수 없었지만 장소가 한계를 정할 순 없었다. 야마토가 유카타를 정갈히 입고 있지 않아도, 유키토가 가죽 자켓을 입고 있지 않아도 그들은 다른 이들이 될 수 있다. 금방이라도 잠을 청할 수 있을 만한 편한 옷을 입고, 한껏 머리를 늘어뜨리거나 실내용 슬리퍼를 발 끝에서 건들거리는 채로 둘은 마주 위치한 와인색의 고풍스런 소파에 비스듬히 앉거나 누워 모방의 시간에 발을 딛인다.

 

“인터뷰 안 한다고.”

“네?”

“인터뷰 안 한다고요.”

“손님, 취하셨어요?”

“안 한다고 시발, 몇 번을 말 해야!”

“누구신데요.”

 

연이은 실패로 평단과 기자들에게 시달리던 시인은 평소 친하게 지냈던 소설가와 함께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퇴폐 클럽으로 향한다. 위로와 함께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소설가는 시인을 두고 자주 찾던 종업원과 함께 자리를 비운다. 넓고 시끄러운 클럽에 혼자 남겨져 술을 마시던 시인에게 한 남자가 접근한다. 비싼 정장을 입은 것도 아닌데, 이 클럽에 있는 사람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체격의 소유자였던 남자는 혼자 있던 시인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하지만 남자를 기자로 착각한 시인은 귀찮은 듯 손을 몇 번 휘젓다 급기야 욕설을 내지른다. 그러나 순수 문학 따위엔 그다지 관심 없었던 남자는 시인의 짜증을 듣고서 웃는 얼굴로 제법 타격 있는 말을 하고, 시인은 착각을 파악하고서야 남자를 보고서 얼굴이 빨개진다.

니카이도 야마토는 건너편 소파에 앉아,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서늘하게 바라보는 오리카사 유키토를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머쓱함에 얼굴을 붉히며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어 얼굴을 가렸다. 부끄러움과 머쓱함에 어쩔 줄 모르는 야마토의 시인은 마치 정말 술에 취한 거 마냥 호흡을 불규칙하게 조절하며 흉부를 크게 올리다 내렸다. 그러던 와중에도 유키의 푸른 눈은 야마토를 떠나지 않는다. 청년은 오고 가는 손님에게 관심이 없다.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 것에 실패해 선택한 자포자기 일에는 야망도 없다. 그는 수치심에 차마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야먀토의 시인을 보고 작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선, 고개를 살짝 한 쪽으로 기울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이 어깨를 스치고, 비행하는 해파리처럼 소파 벽에 달라 붙는다.

 

“안심하세요, 여기 카메라 들고 온 사람치고 멀쩡히 나간 사람 없었어요.”

“....아,”

“처음 뵙는 거 같네요, 혼자 오셨어요?”

청년은 익숙한 손길로 시인 옆의 의자를 끌고 착석한다. 한 손으로 긴 생머리를 넘기는 손길은 진심이 아닌 계산이다. 유키토의 청년은 이 일이 제법 괜찮다. 댄서 시절과는 달리 엄청난 노력과 애정이 필요하지도 않고, 말로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어도 얼굴을 믿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몇 번 웃어주면 앵간한 손님은 기분을 풀고 지폐를 몇 개 더 얹어준다. 그가 자신이던 시절에는 실력을 가리는 얼굴이 싫었는데 지금은 그 덕에 살고 있다. 청년은 시인의 나뭇빛 눈과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것과 함께 분노한 시인을 어영부영 응대한다. 혼자 있는 손님은 영업 그림에 좋지 않다. 유키는 마찬가지로 건너편의 야마토와 진득할 정도로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렸다. 야마토는 의자에 앉는 연기 대신 다리를 꼬며, 눈이 화살 촉이라도 된 거 마냥 제 눈을 과녁 삼아 시선을 조준한 자신의 대선배를 한 손에 담긴 대본을 쥔 채 바라보았다.

 

야마토는 가끔 유키가 내키지 않아도 몇 가지는 순순히 인정하며 살아야 했다. 하나, 과거가 어떻게 됐던 지금은 자신의 대선배라는 것. 하나, 찢어지게 밉지만 어쨌든 일단 아버지라는 인간이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것. 하나, 당신 같은 남자도 아버지에게 빌붙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법 폼 나는 남자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공을 천 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천재이며 성숙한 사람이란 것. 처음 본 날의 유키토와 지금의 유키토는 달랐다. 땀에 젖은 채 목 뒤에서 살랑거렸던 머리카락은 훨씬 길어져 허리에 머물렀고, 파트너를 위해 성공하겠다는 야망을 숨기고 있던 날카로운 도자기 같은 눈빛은 세월이 지날수록 깎이는 듯 보였지만 결국 장도가 됐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 그럴 노력에도 가치를 못 느끼는 것 뿐이지, 그는 정말로 마음만 먹으면 신인 하나 정도는 소리 소문 없이 매장할 수 있었다. 지금보다 더 어리고 젊었던 오리카사 유키토의 목소리는 여름 날 햇빛 아래서는 샤미센 같았는데 이제는 거문고 소리가 난다. 고목처럼 뻗어나간 콧날은 얼굴 중앙을 아름답게 긋다 강아지 콧볼마냥 동그랗고 맺어지며, 얇은 입술임에도 웃음이 빈약하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들지 않았다.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을 때면 살짝 안이 말려들어가는 생기있는 입술은 뭘 구태여 바르지 않아도 우아했고, 살랑거리는 옆머리 주위에서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키는 눈물점과 왼쪽에 뻗친 옅은 하늘 빛의 브릿지는 그야말로 오리카사 유키토라는 연예인의 심볼이라 해도 과언이 아녔다. 주인인 야마토가 인정 했다면 그의 시인 또한 유키의 아름다움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유키의 미를 의식 했다면, 그의 청년의 아름다움 위에서도 속수무책 없이 미끄러져야 할 것이다.

 

시인은 청년이 종업원이라는 걸 눈치챈 뒤, 그와의 시선을 피하고 변명을 중얼거린다. 청년은 손님의 변명이 낯설지 않다. 맞은 편 바텐더에게 같은 걸 달라는 사인을 하고선, 청년은 여전히 시인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을 건다. 시인은 그제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청년을 다시 바라본다. 어두운 클럽 안 눅진한 조명 속에서, 시인은 눈으로 더듬더듬 청년의 얼굴을 뜯어본다. 머리카락, 피부, 이마, 눈매, 코, 입술, 목소리. 짧은 순간이지만 그는 청년에게서 몇 문장을 느낀다. 시선을 시작으로 시인과 청년은 여러 대화를 하다, 급기야 직업 이야기를 하기에 이른다.

 

“시를 쓰고 있어.”

“시인?”

“그렇지.”

“흐음, 여기서 시인은 처음 봐요.”

 

유키에게 깊은 의미를 지닌 인물은 얼마 없다. 그를 아주 가까이서 보는 게 아니라면 진정 유키의 마음 속에 들어 앉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찾기 어려울 거다. 물론 그의 소중한 인간이 되는 건 거의 제로섬 게임에 가까웠다. 그의 맞은 편에 앉아 대본을 읽고 있는 남자 또한 유키에게 깊은 의미를 가지진 못할 것이다. 오리카사 유키토에게 니카이도 야마토는 은인의 아들이자 약간 성가셨던 후배였다. 재능을 인정하는 것과는 상관 없이, 아마 야마토는 제법 긴 시간동안 유키에게 그런 이미지로 남을 거다. 야밤에 제 목을 조르고 기억해내지 못하는 도련님을 보았을 땐 별 다른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그게 놀라지 않았단 의미는 아녔다. 본인은 치바 시즈오와 다른 존재라는 걸 인정 받으면 좋아했지만, 유키가 볼 때 그는 야마토 군 본인에게 너무할 정도로 치바의 아들이었다. 노래에 대한 재능도 인정했지만, 그보다는 배우로서의 재능이 거대한 남자이다. 피가 내린 축복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동료와 예술의 길을 택한 야마토를 인정하고, 갈등 속에서 동료에게 손을 내미는 방법을 야마토에게 가르쳐 준 것은 유키 자신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야마토를 보면 어린 고목이 떠올랐다. 니카이도 야마토는 아름다운 사람은 아니다. 올라간 채 흰 자 위를 떠도는 삼백안을 보면 상냥한 성격과는 달리 사나워 보이기까지 하며, 흰 피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미남의 부드러운 눈웃음 따위와도 거리가 한참 먼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유키는 야마토의 껍데기를 느낄 수 있었다. 무심히 귀 옆에서 살랑거리고 있는, 소나무 잎을 그대로 옮겨온 듯 진한 초록 빛의 곧은 머리카락과 작지 않은 키에 남성미가 느껴지는 골격, 희지 않고 살짝 어둡지만 핏줄이 울긋불긋하게 지나가는 손을 보고 있자면 아직 설익은 고전미가 그려졌다. 저대로만 자란다면 지금보다 노래에 담아낼 수 있는 것도 많아질 거다. 다소 사나운 외모와는 다르게 아이돌리쉬 세븐의 귀엽고 청춘스러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도, 또 언제 사랑스러운 노래를 불렀냐는 듯 잔혹한 이를 연기할 줄 아는 것도 그가 껍데기에서부터 천부적인 모방꾼이라는 증거이다. 그는 무서울 정도로 인물에게서 자신을 끌어 오고 자신 자체로 만들 줄 알았다. 그는 ‘솔직한 자신’ 빼고는 무엇이든 어렵지 않게 표현했다.

 

유키가 청년을 뒤로하고 그의 후배를 뜯어보고 있을 때, 야마토의 시인은 얼굴 빛을 되찾으며 자아를 잡았다. 그는 길다란 손가락으로 안경 콧대를 만져 한 번 올리더니, 이내 두 손으로 다시 대본을 고쳐 잡고서는 유키를 바라보며, 회고라도 하는 듯 덤덤한 척 하지만 막막함과 부끄러움을 숨길 수 없는 투로 대사를 읊었다. 몰락은 현재이지만 동시에 시인의 현재가 아니다. 그의 인생은 금빛이나 샴페인이나 박수로 가득해야 할 건데, 이런 식의 조롱과 외면은 결코 그의 인생이 아니다. 하지만 굴욕은 지금 그 자체이다. 클럽에서 처음 본 사람한테는 죽어도 구겨지고 싶지 않은 게 시인의 인생이다. 한 번 재능의 좌절을 겪은 청년은 그와의 대화에서 난항을 읽는다. 자신은 그런 걸 겪지 않았다는 듯, 한 손으로 위스키가 담긴 유리잔을 살살 흔들다 상냥한 외면을 위해 개를 한 번 옆으로 돌린 뒤 그는 지극히 순수하고 입맛에 맞춰진 대답을 상냥하게 뱉는다. 하지만 시인은 거기서부터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원래 유행이라는 게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거잖아요.”

“아니야, 이번엔 뭔가 달라. 다른 거 같아.”

“유행이 아니면 뭘까요? 역병 같은 거?”

“역병? 무식도 역병이라면 역병이지. 이젠 사람들이 시를 지나칠 정도로 안 읽어. 당장 우리 아버지 시대만 하더라도 사람들한테 낭만이나 품위라는 게 있었다고. 근데 요즘 사람들은 이상한 노래에 게걸스러운 춤이나 추고 있어.”

 

이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노래를 만들고, 게걸스럽지는 않지만 어쨌든 춤을 만드는 주역 둘이서 나눌 대사는 아녔지만 야마토는 착실히 이 시시한 시인의 넋두리를 사회에 대한 역겨움과 기막힘으로 표현했고 유키는 이 뒤떨어지고 별 볼 일 없는 예술가를 서늘하게 식은 전 무용수의 눈을 하고선 바라보았다. 청년의 눈으로도, 유키의 눈으로도 피가 차가워질 수 밖에 없던 대사다. 필시 야마토도 홀로 소파에 앉아 대본을 읽는 도중 찌질하다고 반쯤 감탄하며 눈살을 지푸렸을 거다. 예술의 의미가 어떻게 됐던 평가하는 건 대중의 몫이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을 그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비난할 순 없다. 유키와 야마토는 몇 초간 정적에 휩싸이다 잠시 공기를 깨고선 기막힌다는 웃음을 터뜨렸다.

 

“와, 제 대사지만 말도 못 할 정도로 찌질했어요”

“그 자체야. 시대가 변해도 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중심은 없었던 거지.”

“아직도 이런 사람 얼마나 될 거라 생각해요?”

“글쎄? 어림 잡아 한 트럭.”

 

야마토와 유키는 둘만 있을 때 말이 많아지는 편이 아녔다. 개인들부터가 수다스런 사람이 아닐 분더러, 둘 사이에 아직 미묘한 불편함이 남아 있는 게 주 이유였다. 모모와 미츠키가 주도하거나 사이에 끼지 않는다면 둘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는 제법 간단했다. 예의상 하는 안부, 용건이 있으면 간단히 하고 긴 이야기더라도 심각한 사안이 아니면 금방 끝나는 편.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해질 정도로 유키를 불편해 했던 처음 보다는 야먀토의 분위기가 풀어졌고, 그의 발화점과 마음 깊은 곳에서 숨겨진 아이를 본 유키는 전화를 독촉했던 날 이후 묘하게 풀어졌다. 짧은 대화와 함께 살짝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넓은 저택에서 벌레 기어다니는 거처럼 살살 퍼졌다. 유키의 긴 머리는 아무리 묶어도 금속이나 장식 같은 것에 닿을 때 흩어지는 듯 아주 작은 소리가 났고, 야마토의 바지 자락은 소파 천에 스쳐 사브작거렸다. 야마토의 도발적인 질문과 폭탄 같은 유키의 답 이후 둘은 다시 작게 피식거리더니 다시금 대본에 눈을 두기 시작했다.

이후 대본 리딩은 쉬는 시간도 없이 착실하게 진행 됐다. 목이 탈 법도 한데 둘 모두 대본에 몰입 했는지 물을 찾을 시도도 없이 오르 내리는 대사와 감정, 초침 소리에 자신들을 그저 흘려 보냈다. 시인은 묘하게 도발적이라 건방지면서도, 어둠 아래에 있음에도 금방이라도 묘사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종업원에게 계속 두 눈을 박았고, 청년은 이 시시하고 따분하고 이제야 첫 실패를 맛본, 골려주고 싶지만 동시에 힘을 못 쓰는 시인과 예술을 건드려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무대에 맞는 셋팅이 없어도, 터치가 오고가지 않아도 목소리와 호흡만으로도 계획대로 스텝이 맞춰지는 걸 느낀 그들은 8시를 가르켰던 시계가 12시를 향해 갈 즈음에야 기지개를 한 번 켜고선 서로 수고했다는 예의의 인사를 건네었다. 방은 달라도 한 집에서 자야한다는 게 평소와 극히 다른 점이긴 하지만, 굳이 방을 합칠 생각까진 죽어도 없었다. 죽어도 없는 건 야마토만 그렇다고 하는 게 맞겠다. 뒤늦게 목이 탔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작게 돌린 그를 보고, 오리카사 유키토는 다소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이 작품 수락한 이유가 뭐야?”

“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하필 상대가 나라서 더 싫었다며. 근데도 수락했던 이유가 궁금했던 거야.”

의도치 않게 티가 나는 것과 당사자가 말을 직접 듣는 건 다르다. 야마토는 언짢다는 투 하나 없이 무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곤란한 말을 하는 유키를 보며 잠시 눈을 굴리며 당황하다 오히려 자신이 어이 없다는 듯 뻔번하게 굴기 시작했다.

“아니, 찾아와서 그런 말까지 하며 권유한 사람이 할 말이라고는 생각 안 되는데요?”

“야마토 군을 고작 권유 하나 받았다고 죽기 보다 싫은 걸 수락할 사람으로는 생각 안 했으니까 물어본 거야.”

“...책임이 본인에게도 있다는 의미로 받아 들여도 되는 건가요?”

“음, 책임을 지게 만들고 싶은 일이었다면.”

유키는 야마토의 말에 별 타격이 없다는 듯 한 번 어깨를 작게 으쓱거리며 말 했다. 그에게 있어 충분히 과장한 행동이다. 그가 쉽게 이런 액션을 취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야마토는 기분 탓인지 약간 밑으로 내려간 거 같은 안경 코를 손가락으로 한 번 잡고 올린 뒤 다소 열 받은 어투로 대답했다. 그는 나름 건조하게 대답 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 도련님을 한 두 번 본 게 아닌 오리카사 유키토는 익숙한 감정을 아무런 상처 없이 받아낸다. 관심이 없는 건 그를 상처 입히지 못 한다.

 

“유키 씨 말도 이유가 되긴 했지만, 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한 거예요. 순수 예술 쪽 성향은 대중가요랑 엮이기 싫어하잖아요. 있으나 없으나 별 상관은 없지만, 저렇게까지 손 내밀어 주니 조건이 아주 곤란하긴 해도 뒤도 안 보고 거절할 수가 없잖아요. 보아하니 이 감독, 호시카게와 츠쿠모 가릴 거 없이 이름 난 촬영감독 전화번호를 다 가지고 있는 거 같더라고요. ..... ...그, 싫다고 말한 건 죄송하네요, 들으셨는지 몰라서.”

 “상관 없어. 뭐, 언젠가 있을 영상 연출에 좋은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을 거다, 라는 거지?”

“어떻게 쓸 건가는 회사에 달려 있지, 전 연줄만 가져오는 거 뿐이에요. 제가 가져오는 게 그림이 제일 나을 수도 있으니까.”

“이 작품 촬영 감독, 조명 잘 쓰는 거 알고 있었구나? 예쁠 거야, 하늘에서 진짜 무지개가 뜬 거처럼 아름답게 찍어주겠지.”

“미팅 때 짧게 이야기 해봤는데, 그 사람 리바레에게 관심 많아요. 그러고 보니, 화보 이야기도 잠깐 하던데.”

“아아, 그 건은 모모에게서 들었어. 미팅 때 한 이야기를 어제 전달 하다니. 양반은 못 되는 인간이야.”

어느새 차가운 물통을 손에 들고 컵에 물을 따르던 야마토는 유키의 말을 유심히 들으며 ‘누구라도 당신을 찍는다고 하면 양반이 못 될 건데.’ 라고 생각했다. 순간 나기의 화보를 찍으며 잘게 손을 떨던 여성 작가가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기도 했지만, 역시 그는 생각한 걸 전부 내뱉지 않는다. 슬리퍼는 소파에 내팽겨쳤는지, 맨발로 마룻 바닥을 걸어 유키에게로 향한 야마토는 찬 물이 담긴 컵 하나는 제 손에, 하나는 유키에게로 건네며 아까보다는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 하는 목소리 뿐만 아니라, 안경 너머의 눈도 졸음을 못 이기는지 조금 처진 듯 했다.

“내일도 양반 못 되는 사람들 상대하셔야 하잖아요, 이만 들어가세요.”

“네가 날 상대하기 지쳐서 돌려보내는 건 아니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이제 보기 껄끄럽다고 파칭코로 보낼 수도 없잖아.”

철저한 농담이었지만 야마토는 그와 과거의 자신에 대한 경악에 물들어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오리카사 유키토의 농담은 늘 누군가를 빙판 길에서 미끄러뜨렸다. 이 까마득한 도련님이 민망함에 젖어 입을 뻐끔거리고 있을 때, 그는 물을 홀짝임과 동시에 몰려오는 피로를 목 뒤에서부터 느끼며 냉정할 정도로 자신의 방을 향해 돌아서서 작별인사를 건네었다.

“잘 자, 알람 못 들어 늦잠 자는 타입이라면 너그럽게 한 번 정도는 깨워줄게.”

“누가 안 깨워도 잘 일어나요!”

낡은 고택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외침에도 유키는 야마토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고 어두운 복도 속으로 사라졌다. 넓은 거실에 혼자 남은 야마토는 여전히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채 낭패감이 가득한 얼굴로 샹들리에 밑에 서있었지만, 이내 그도 신경질적으로 물을 마셔버린 채 잠을 청하러 반대편 계단으로 몸을 돌렸다. 내일 아침이면 둘은 자신의 하루를 보낼 거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다시 소파 위에 마주 앉을 거다. 야마토는 무심하게 계단을 오르며 머리 속으로 내일 일정을 정리하던 도중 처음 보았던 어린 유키토의 땀에 젖은 뒷머리를 떠올렸다. 잠시 걸음을 멈칫했지만 재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왜 갑자기 그때의 유키가 생각났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착실하게 내일 해를 위한 발을 움직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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