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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스호프] 용과 비밀기지

❄️🍑 by r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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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책에서나 나올 법한 새하얀 용.

그것은 아이의 머리 위를 넘어, 저편으로 사라졌다.

분홍색 눈동자에 선명한 잔상을 남긴 채로.


“다녀왔어요, 호프.”

“어서 와, 커스!”

문이 열리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현관으로 뛰어가, 그대로 커스의 품에 뛰어들듯 안겼다. 상냥한 커스는 난감한 표정을 하면서도 언제나처럼 제대로 끌어안아 줘서, 해가 떨어진 탓에 서늘함을 머금고 있는 커스의 체온이 제 체온과 만나 따뜻해지는 이 순간은 늘 기분 좋았다.

내 체온이 차가워지기 전에, 커스는 끌어안은 손을 풀더니 내 어깨를 잡아 살짝 밀어냈다. 계속 이렇게 껴안아서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서운해하는 내 표정을 본 건지, 커스가 미소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싫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요? 제 몸이 차서, 호프의 체온이 식을까 걱정이에요.”

“그치만, 커스도 차가우니까 따뜻하게 해주고 싶은데…….”

“마음은 고맙지만, 그러다가 호프가 아프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요. 씻고 나오면 금방 따뜻해질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응, 알겠어.”

커스의 말에 얌전히 수긍했다. 커스를 따뜻하게 해주다가 아픈 건 괜찮지만, 커스를 곤란하게 만드는 건 본의가 아니었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표시로 제 이마에 가볍게 입술 도장을 찍은 커스가 옷에 묻은 모래 먼지를 털어내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결국 커스를 제 몸으로 따뜻하게 해주는 계획은 포기하고, 커스가 외출복을 정리하는 동안 목욕물을 따뜻하게 데우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다행히 나도 바깥에서 커스를 기다리다가,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집에 돌아와 씻었던지라. 물을 받아놓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에, 미지근하던 물은 금방 제 체온보다 따뜻해졌다.

물 온도를 확인하고 욕실 밖으로 나오면, 가벼운 실내복을 입은 커스가 그 사이에 주방에 들어가 있었다. 뭘 하고 있나 확인해 보려고 다가가면, 커스가 손에 쥐고 있던 머그잔을 내 앞에 내밀었다. 커스가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때면 매번 타 주는, 며칠 전에 다 떨어졌다던 달큰한 꽃차의 향이었다. 아직 김이 날 정도로 뜨거워서, 컵에 손을 데이지 않도록 조심스레 받아서 들었다.

“호프, 제가 씻는 동안 얌전히 기다릴 수 있죠?”

“응! 난 괜찮으니까, 얼른 씻으러 들어가.”

커스도 참, 걱정이 많다니까. 나도 이젠 예전 같은 철부지가 아닌데. ……물론 아직 식사를 준비하면서 그릇을 깨뜨린다거나, 옷을 갈아입다가 넘어지는 일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보다 더 어릴 적에는 날 걱정하느라 커스가 다른 일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하니까. 그 시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커스가 걱정을 뒤로하고 욕실로 들어가면, 소파에 앉아 꽃차를 마셨다. 입안에 퍼지는 달짝지근한 맛과 따뜻한 온기에 오늘 하루의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를 들으며 얌전히 커스를 기다리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아까 보았던 것이 떠올랐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하얗고 커다란 생명체. 동화에서 나오는 용의 형상을 한 그것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금까지 이 근방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명체였다. 아직은 어린애 취급을 당하는 나이긴 하지만, 매일 온 마을을 돌아다니는 만큼 확신할 수 있었다.

혹시 다른 별에서 온 걸까. 처음 봤을 때 호기심이 일었지만, 쫓아갔다간 커스가 걱정할 게 분명했기에 포기하고 집에 돌아온 거였다. 애초에 커스가 언제 올지 몰라 기다리고 있던 차에 발견했던 거기도 하고, 그 속도라면 벌써 멀리에 있는 다른 마을로 넘어갔을 터였다.

커스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타이밍 좋게 욕실 문이 열리며 커스가 바깥으로 나왔다. 욕실로 들어갔을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젖어있는 머리카락을 보면 막 목욕을 끝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나직이 숨을 내쉰 커스가, 내가 소파에 앉아 있는 걸 보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호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나요?”

“응! 커스야말로, 이제 몸 따뜻해졌어?”

“네, 덕분에 편하게 씻을 수 있었어요.”

옆에 앉은 커스가 이젠 품에 안겨도 된다고 이야기하듯 손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커스의 무릎 위에 앉으면, 커스가 그대로 나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맞다! 커스, 나 엄청 신기한 거 봤어.”

“뭔가요?”

“엄청나게 커다랗고 새하얀 용!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머리 위로 슝 하고 날아갔어. 이 근방에서는 처음 보는 거였는데, 커스는 뭔지 알고 있어?”

“……글쎄요.”

평소에는 웃으며 내가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해 주는 커스인데, 잘 모르겠다는 듯 난감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신선하기만 했다. ……커스도 모르는 게 있었구나. 그야 누구나 모르는 건 있겠지만, 커스는 다르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옛날부터 내가 모르는 건 뭐든 알려줬었는걸.

커스가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내 손을 잡더니, 손가락으로 손등을 쓸어내렸다. 어쩐지 간지러운 감각에 몸을 움츠린 채로 커스의 품에 기댔다.

“그나저나 호프, 또 늦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요?”

“오늘은 어두워지기 전에 들어왔는데…….”

“그래도 걱정되니까,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아 주세요.”

“그럼 커스가 일찍 돌아오면 되잖아.”

커스가 너무 늦으니까 걱정돼서 기다리는 건데. 커스도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나가는 것뿐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에테르노의 밤은 아무런 준비 없이 바깥에서 지샐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전신이 타버릴 것 같던 낮과는 정반대로 살이 아릴 듯한 추위 또한, 에테르노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거둬갔다는 건 아직 어린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칭얼거림에도 커스는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미소 지었다.

“중요한 일이라고는 해도, 너를 혼자 둬서 미안해요.”

“그 정도는 괜찮은데……. 이제 나도 어린애 아닌걸.”

“그래도, 밖에서 기다릴 정도로 걱정하고 있는 거잖아요?”

이어지는 커스의 말에, 대꾸할 말이 없어서 입을 삐죽였다. 그야 걱정하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혹시라도 해가 떨어지고 한참이 지나서도 커스가 바깥에서 추위에 떨고 있으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아서.

커스가 슬쩍 내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내밀었다가, 툭 튀어나온 입술을 보고는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이게 다 커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안 돌아와서 그런 건데…….

“그래도 이제 당분간은 멀리 다녀올 일은 없으니까요.”

“정말?!”

뜻밖의 기쁜 소식에 활짝 웃으며 뒤를 돌아보면,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띤 커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종종 멀리까지 다녀와야 한다며 나를 혼자 두는 커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늘 괜찮다고 얘기는 하지만, 역시 같이 있는 게 제일 좋았다. 오늘도, 커스랑 같이 있었으면 용이 날아가는 모습을 같이 볼 수 있었을 텐데…….

“커스, 그럼 내일 같이 용 보러 가자!”

“……네?”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활짝 웃으며 커스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른 아침부터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절로 눈이 뜨였다. 커스……. 어젯밤에 바로 옆에서 잠들었던 온기를 찾아 손을 뻗으면, 아니나 다를까 차게 식은 침대 시트만이 잡혀 꾸물거리다가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커스, 뭐 하고 있는 거지……. 하품을 하며 침실을 나서면, 주방에 있는 커스와 눈이 마주쳤다.

“호프, 벌써 일어났나요?”

“……응, 커스가 없길래…….”

“더 자도 괜찮은데. 아니면 잠 깰 겸 차라도 한 잔 마실래요?”

“……차, 마실래…….”

반쯤 감은 눈으로 소파에 앉아 있으면 커스가 차를 내왔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나를 배려한, 녹은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미지근한 차였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면 입안에서 퍼지는 상쾌한 향에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조금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커스가 뭘 하고 있었나 하는 궁금증이었다.

“커스, 아침부터 뭐 하는 거야?”

“오랜만에 호프와 함께 외출하는 거니, 간단하게 도시락이라도 만들까 싶어서요.”

“도시락……?”

“네, 그렇게 대단한 건 없지만요.”

그 말에 다시금 주방으로 시선을 돌리면, 한동안 쓰지 않아 찬장 구석에 있던 바구니가 바깥으로 나와 있는 게 보였다. 내가 혼자서도 잘 수 있게 되면서부터 커스가 멀리까지 나갔다 오는 일이 많아졌다 보니, 자연스럽게 같이 나들이를 가는 시간도 줄어들어서. 커스도 바쁘니까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쌓여있던 먼지까지 말끔히 닦여있는 걸 보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다 된 거 아니지? 나도 도와줄게!”

“괜찮겠어요? 조금만 더 하면 되니까, 호프는 쉬고 있어도 되는데요.”

“응, 괜찮아. 차 마시니까 잠도 깼고, 나도 커스랑 같이 도시락 싸고 싶어.”

심부름만 했었던 예전과는 달리, 이젠 간단한 요리도 할 줄 알았으니 커스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터였다. 커스는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듯 수긍했다.

차를 다 마시고 커스와 함께 바구니에 음식을 가득 채우면 슬슬 나가기로 약속했던 시간이었다. 아직 막 해가 나는 시간이었지만,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가야 했기에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도착하는 편이 좋았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물을 넉넉하게 챙겨 들고 오랜만에 커스와 함께 집을 나섰다.

오늘 커스와 함께 가기로 한 곳은 어제 용을 봤던 장소였다. 어제저녁에 그 근처를 날아다니고 있었으니, 잘하면 용이 아직도 근방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어제 커스에게도 이야기했더니 생물체는 기본적으로 익숙한 환경을 선호하기에 좋은 생각인 것 같다며 칭찬한 만큼, 커스와 같이 용을 보는 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커스와 시답잖은 잡담을 하며 걷고 있으면, 멀찍이서 목적지인 나무 한 그루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긴…….”

“커스는 처음 보지? 여기, 친구들이랑 같이 만든 비밀 기지야!”

뿌듯한 표정으로 커스에게 보란 듯이 팔을 크게 벌렸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는 커다란 나무 위에 얼기설기 엮은 나무판자를 매달아 올라갈 수 있게 해놓은 것뿐이었지만, 근방에 제대로 된 놀이터라고 할만한 곳이 없었던 만큼 다 같이 모여 놀기에는 딱 좋은 공간이었다.

별다른 약속을 하지 않아도 이곳으로 오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지치면 판자 위로 올라가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가끔은 아무도 없어서 혼자 멍하니 판자 위에 앉아 있을 때도 있었다.

느릿하게 주변을 둘러본 커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이런 곳에서 놀고 있었군요.”

“응!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니까? 어른들한테는 알려주지 않기로 약속했거든.”

“그런데 절 데려와도 괜찮은 건가요?”

“커스는 특별히야!”

커스한테 알려줄 수 없는 비밀 같은 거 없는걸. 내가 먼저 능숙하게 나무를 타고 판자 위로 올라가면, 커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뒤를 따라 올라왔다. 커스와 함께 만든 음식이 든 바구니를 뒤에 놔두고 나란히 앉으면 푸르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야. 늘 커스가 늦게 돌아올 때면 혼자 여기에 앉아서 기다리곤 했었는데, 지금은 바로 옆에 커스가 있으니까. 커스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면, 옆에서 나직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곳이네요.”

“그치?”

“조금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요.”

“튼튼하게 만들었으니까 괜찮아! 친구들이랑 다 같이 올라와도 멀쩡한걸.”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따가운 햇살을 피하고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으면, 커스도 따라서 후드를 벗었다. 바람 같은 건 거의 불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였지만 나무 그늘 덕분에 그리 덥게 느껴지지 않았다.

“호프, 용은 여기에서 기다리다가 본 건가요?”

“응, 어제저녁에! 해가 질 시간이라 집에 가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엄청나게 커다란 그림자가 져서.”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태양을 가리는 거대한 그림자. 피부를 간지럽히는 미지근한 바람.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드높은 창공을 가로지르는 고고한 순백. 그 모습은 순간을 앗아가 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잔상을 떠올리다가, 커스와 눈이 마주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하늘은 용은커녕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맥이 빠지는 느낌이라, 그대로 판자 위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하아, 한참 걸어왔더니 배고파졌어…….”

“그러면 조금 이르지만 도시락을 먹을까요?”

“좋아!”

커스가 바구니로 손을 뻗어 챙겨온 음식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독 두툼한 샌드위치를 하나 집었다. 커스를 도와주면서 직접 내 손으로 만든 샌드위치였다. 모양새는 이래도, 맛있는 햄이랑 야채를 잔뜩 넣어서 맛있을 게 분명했다.

커스가 식사 준비를 끝내고 나면, 손에 쥐고 있던 샌드위치를 커스에게 건넸다. 샌드위치를 쌀 때부터 커스한테 줄 거라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니까.

“이거, 아까 내가 싼 샌드위치! 꼭 커스가 먹어야 해.”

“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 나네요.”

“나, 그때는 샌드위치 못 만들었는데?”

“후후, 그랬었죠.”

……커스는 가끔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한다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었던지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샌드위치로 손을 뻗었다. 커스가 만든 샌드위치는 내가 만든 것과 달리 예쁘게 생겨서 맛있을 것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고는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물면 역시나 맛있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도시락을 다 먹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하늘은 평화롭기만 했다. 오늘은 안 오나 봐. 그 말을 하면서도 커스와 같이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는 즐거움이 훨씬 컸다. 느릿하게 해가 지평선을 넘어갈 즈음까지, 분홍색 눈동자는 선명하게 지금 이 순간을 아로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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