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모모

[유키모모] 순응

❄️🍑 by r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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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니터 안의 세계만큼은 유일하게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공간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손에 쥔 게임패드를 조작해 남아있던 적을 쓰러뜨렸다. 『Win』. 모니터 한가운데에서 금색으로 빛나는 글자를 확인하고 나서야 긴장이 풀려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 아래로 이번 게임에 대한 리포트가 떴지만, 별 감흥 없이 꾹꾹 버튼을 눌렀다. 중요한 건 이다음이었다.

승급전, 2승 2패.

좋든 싫든 다음 매칭에 모든 게 걸려 있었다. 모모는 시간을 확인하고, 망설임 없이 매칭 버튼을 눌렀다.

VR 대응 액션 FPS 게임 『Period』. 5년 전에 서비스를 시작한 온라인 게임으로, 출시 초기부터 많은 기대를 받은 게임이었다. BNO 사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프로젝트로, 기후변화와 식량 부족으로 인해 국가 체계가 붕괴한 세계에서 플레이어는 총 4개의 진영 중 하나에 속해 생존을 위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는 스토리 라인이었다. 어디까지나 배경 설정일 뿐이고,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크게 의미 없는 이야기였지만.

YUKI : 안녕, 모모.

MOMO : 안녕……

광장에 캐릭터를 가만히 세워놓고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던 와중에, 방금 접속한 유키가 귓속말을 보내왔다. 한 손으로 스틱만 조작해 화면을 돌리면, 이내 닉네임이 노란색으로 강조된 유키의 캐릭터가 눈에 들어왔다. 게임 내에서 친구를 맺은 플레이어일 경우, 광장에서 알아보기 쉽게 해놓은 시스템이었다.

타자도 치지 않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유키의 캐릭터가 뒤늦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동작을 취했다. ……저거 찾느라 그렇게 오래 걸린 거야? 게임 플레이 자체는 그럭저럭 익숙해진 것 같던데, 이런 건 자주 쓰는 기능이 아니라 그런가. 모모는 마시던 캔을 내려놓고 똑같이 인사를 했다. 유키가 왔으니 이제 다시 게임에 집중해야 하니까.

YUKI : 어라

YUKI : 모모

YUKI : 어제 승급전 직전까지 점수 올리지 않았어?

MOMO : 응……

YUKI : 그런데 왜 점수가……

어쩐지 가만히 있는다 싶었는데, 그새 프로필 확인하고 있었구나. 죽상이 되어서는 게임패드를 조작해 유키의 캐릭터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타게팅이 되어있어서 그런지 제 캐릭터가 움직일 때마다 고개를 돌리는 유키의 캐릭터가 귀여워 보이다가도, 채팅창을 확인하면 절로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야 점수가 떨어질 이유 같은 거 하나밖에 없잖아…….

YUKI : 먼저 하고 있었어?

MOMO : 유키가 오기 전에 승급해서 자랑하려고 했는데……

YUKI : 졌구나

MOMO : 네, 졌습니다……

입을 삐죽이며 그대로 유키에게 파티 초대를 보냈다. 이 얘기, 더 하고 싶지는 않은걸. 유키도 그런 모모의 의중을 눈치챈 듯 별말 없이 초대를 승낙했다. 모모는 그대로 경쟁전 매칭을 돌려놓고 남은 에너지 드링크를 비웠다. 캔을 내려놓은 순간, 타이밍 좋게 매칭이 완료되었다는 팝업창이 나와 준비 완료 버튼을 눌렀다.

Period에는 크게 두 가지의 게임 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실시간 랭킹에 반영되는 경쟁전, 또 하나는 랭킹과 무관하게 즐길 수 있는 일반전. 당연히 오래 게임을 즐긴 유저의 대다수는 일반전보다는 경쟁전을 선호했고, 모모 또한 그런 유저 중 한 명이었다. 유키는 게임을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같이 플레이하는 모모를 따라 자연스럽게 경쟁전을 하게 됐고.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듀오일 때의 이야기고, 드물게 유키 혼자 접속해 있을 때는 일반전만 하는 모양이었다. 유키의 플레이 스타일 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매칭된 모든 플레이어의 로딩이 완료되면, 폐건물에 서있는 모모의 캐릭터와 함께 모니터 외곽에 맵 정보와 현재 상황이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폐쇄된 개발 지구』, 맵 이름을 확인한 모모는 눈살을 찌푸리며 키보드를 두들겼다.

MOMO : 아, 이 맵 스나이퍼한테는 불리한 곳인데……

YUKI : 어쩔 수 없지

YUKI : 보조 위주로 할게

MOMO : 응, 일단 최대한 높은 곳으로 가자.

YUKI : 엄폐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잠시 유키의 움직임이 멈춘다 싶더니, 옆에 떠다니던 네모난 가이드 로봇이 빛을 내는 것과 함께 지도 UI가 나타났다. 캐릭터의 무기에 따라 가이드 로봇의 성능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유키의 경우는 맵 내의 지형지물 탐지였다. 게임 내에서는 이런 식으로 가본 적 없는 위치까지 지도를 보여주는 식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맵의 형태가 정해져 있는 일반적인 게임이라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겠지만, 모든 지형지물이 맵 컨셉에 맞춰 랜덤하게 생성되는 데다 최초 시작 지점까지 무작위로 정해지는 게임의 특성상 초반에 우위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접근전이 까다로운 스나이퍼 무기를 장비해야 했기에 솔로에서는 사용하기 까다로웠지만, 듀오 이상의 파티 플레이에서는 스나이퍼가 필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YUKI : 음……

MOMO : 엄폐물은 없는 것 같네……

YUKI : 그러게

MOMO : 일단 움직이자! 가는 길에 보급품도 찾아보고.

YUKI : 응

YUKI : 근처에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

무작위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가까운 위치로 배치되는 데다 고지를 선점하는 게 유리한 FPS의 특성상 초반 교전을 피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나마 가능성 있는 상황이라면, 다른 팀들이 서로 교전하다가 자멸하는 정도였다.

유키의 서포트 로봇을 앞세워 폐건물을 빠져나오면, 주변은 대부분 앙상한 철골이 높게 솟아 있었다. ……엄폐물만 존재했어도 스나이퍼가 빛을 발했을 텐데. 물론 그것도 저 엄폐물 하나 없는 철골을 무사히 올라갔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모모가 소총을 들고 주변을 경계하면, 유키도 권총을 꺼내 철골 위로 올라갔다. 여전히 이런 조작은 익숙하지 않은지 철골 앞에서 한참 헛손질하다가 올라가긴 했지만. 이렇게 눈에 띄게 행동하는데도 총격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모모는 캐릭터를 조작해 단숨에 철골 위로 뛰어 올랐다.

YUKI : 역시 모모

YUKI : 멋있네

MOMO : 이건 유키가 서투른 거니까? 올라가는 것도 슬슬 익숙해질 때가 됐는데.

YUKI : 그치만 높잖아

YUKI : 떨어질 것 같아

MOMO : 어쩔 수 없는걸. 스나이퍼는 높은 곳에 자리 잡아야 유리하니까……

YUKI : 그렇지……

유키의 캐릭터가 철골 위를 위태롭게 걷다가, 다시금 손을 허우적대며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포인트를 붙잡았다. 자동으로 멋진 동작을 하며 위쪽에 착지하는 유키의 캐릭터를 확인하고, 모모는 별 감흥 없이 컨트롤러를 움직여 주변을 경계했다.

위치를 맞추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쉽게 올라갈 수 있는데도 유키는 매번 허공에 헛손질했다. 얘기를 들어보면 유키는 이게 제대로 해보는 첫 게임이라고 하니 조작법이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도 납득이 가고, 고작 이런 일로 화를 낼 정도였다면 유키와 듀오를 하진 않았을 테니 모모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렇지만 한시라도 빨리 위로 올라가야 하는 상황일 때는 조급해져서.

아슬아슬하게 발치를 빗맞힌 상대방의 총탄에 결국 모모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MOMO : 유키는 먼저 올라가고 있어

YUKI : 모모?

YUKI : 잠깐

유키가 무언가를 더 말하기도 전에, 모모의 캐릭터가 그대로 철골 구조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물론 유키처럼 발을 헛디뎌서 그런 게 아니라, 근접전을 주특기로 하는 모모의 장비로는 철골 구조물 위에서는 제대로 싸우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쏟아지는 총탄 세례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엄폐물에 숨은 모모의 캐릭터가 그대로 적과 교전을 시작했다. 아무리 모모라도 2:1은 불리할 텐데……. 그런 생각에 유키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금 철골 위를 조심스레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모모에게 불리한 상황이더라도, 여기서 유키가 내려가면 모모는 짐 덩이를 하나 얹고 싸우는 꼴이었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난전에서 유키가 도움이 될 리 없었다.

다행히 모모가 시선을 끈 덕분에 유키는 한결 수월하게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다행히 아직 모모가 상대와 교전 중인 모양이었다. 두 명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버티다니, 역시 대단하네. 변수라고는 몸을 숨길만한 엄폐물밖에 없는 위치였으니 여기까지 시간을 끈 건 순수한 모모의 피지컬일 터였다. 모모가 이만큼 해줬으니 나도 열심히 해야지. 유키는 모모에게 채팅을 하기보다, 그대로 위치를 잡고 총을 들었다.

──탕.

스나이퍼를 경계하지 않는 상대를 맞추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YUKI : 한 명 잡았어

MOMO : 유키! 벌써 자리 잡았어?

YUKI : 응

YUKI : 덕분에

유키가 그대로 남은 적을 쏘려고 했지만, 방금 전의 저격으로 위치를 파악한 적이 사각으로 숨었다. 어쩔 수 없이 적이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으면, 모모가 적이 숨어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게 먼저였다. 스나이퍼의 위치에 정신이 팔려있는 적을 모모가 해치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화면 오른쪽에 적의 사망을 알리는 UI가 표시되면, 유키와 모모는 어느 쪽이 먼저랄 것 없이 미소 짓고 있었다.

MOMO : 오늘도 재밌었다~

YUKI : 그러게

YUKI : 모모는 더 할 거야?

모모는 기지개를 켜며 방 한구석에 걸려있는 시계를 살폈다. 벌써 12시 정각이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유키는 다음 날 출근해야 한다며 이 시간에는 게임을 종료하는 편이지만, 모모가 게임을 종료하는 시간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내키면 유키 없이도 몇 시간이고 혼자 경쟁전을 하거나, 드물게 그럴 기분이 아니면 유키보다 먼저 게임을 종료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은 그 정도까진 아니라 끝까지 하긴 했지만…….

MOMO : 오늘은 나도 끌래

MOMO : 매칭 운 안 좋은 것 같으니까……

물론 유키와 했던 판은 연전연승이었지만, 유키 없이 더 해봐야 못 이길 것 같았다. 승급전도 결국 실패했으니까. 이번에는 정말 자신 있었는데…….

모모가 캐릭터를 조작해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침울한 동작을 하면, 유키의 캐릭터가 위로해 주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YUKI : 승급전 진 거 마음에 두고 있어?

MOMO : 그야 당연하지! 그거 올리려면 며칠을 고생해야 하는데……

YUKI : 나야 모모랑 등급 맞출 수 있어서 좋은데

MOMO : 좋지 않아!!!

YUKI : 농담이야, 농담

YUKI : 복구 도와주려면 나도 힘내야겠네

YUKI : 그럼 내일 보자

MOMO : 응, 잘 자!

유키가 접속을 종료한 걸 확인하고, 모모도 곧바로 게임을 껐다. 늦게까지 게임을 하는 일이 많다 보니 이런 시간에 졸리진 않아서, 기껏 일찍 게임을 끈 게 무색하게 눕지도 않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게 된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RabbitTube라도 볼까…….”

RabbitTube에서 게임 방송을 하는 사람 중에는 Period를 플레이하는 사람도 있었다. 5년이나 된 게임인 만큼, 방송하는 유저는 초보자보다 랭킹 상위권 유저가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남들이 게임을 하는 걸 보는 취미는 없지만, 가끔 쓸만한 테크닉을 얻는 경우도 있으니까…….

생방송 탭으로 들어간 모모는 방송 내용을 훑어봤다. 대부분 랭킹 상위권에서 한 번쯤 본 이름들이었다.

‘아, 이 닉네임.’

ZERO──현재 Period의 랭킹 1위. 모모와 비슷한 근접전 위주의 올라운더에, 솔로로 활동하는 유저였다. 극도로 노출을 꺼려 방송도 자주 하지 않았기에, 시작한 지 몇 분 되지도 않은 상태였는데도 시청자 수가 꽤 많았다. ……역시 유명인은 다르구나. 대충 훑어봐도 지금 하는 Period 방송 중에서 제일 시청자 수가 많아 보였다.

마침 게임도 끈 참이라 심심했던 모모도 ZERO의 방송을 틀었다. 랭킹 1위 유저에게 흥미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비슷한 포지션이니만큼 플레이를 보면 도움이 될 만한 테크닉을 얻을 수도 있었으니까. 실제로 상위권 유저의 플레이 영상이 올라오면 하나하나 분석해서 올리는 사람도 꽤 있었다. 문제라면 대부분이 이런 테크닉을 쓸 수 있다니 대단하다며 추켜세우기만 할 뿐, 실용적인 내용은 별로 없다는 점이지만. 그럴 바에는 직접 눈으로 보고 파악하는 게 낫지. 모모도 랭킹 상위권 유저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잔뼈가 굵은 유저였기에 잔기술이나 게임 시스템의 허점은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만, 확실히 대단하네. 부동의 1위라는 평가가 이해되긴 해.’

무엇보다 대단한 건 ZERO의 반사신경이었다. 등 뒤에서 이루어진 기습에도 곧바로 시야를 전환해 정확하게 상대를 맞췄다. 보통은 선공 당하면 당황하기 마련인데, 총탄의 궤도로 상대방의 위치를 파악하고 조준점을 겨냥하기까지 시간 낭비가 거의 없었다. ……이건 테크닉의 영역을 넘어섰잖아. 이런 게 재능이라는 건가.

더 이상 방송을 볼 마음이 들지 않아 그대로 휴대전화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대로 자리에 누우면, 고등학생 때 찍었던 축구부 사진으로 만든 액자가 벽에 걸려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정말, 지금 뭐 하는 거야…….”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모모는, 그대로 액자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등을 돌렸다. 전부 치기 어린 시절의 자만이었다. 이대로만 하면 전국대회도 꿈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도, 노력하면 국가대표가 되어 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전부.

모모가 노리던 최고의 위치는 노력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리고 모모에게는 그만한 재능이 없었다. 그뿐인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시작했었는데…….’

결국 게임도 다를 바 없었다. 바라는 곳은 손을 뻗어도 도무지 닿지 않았고,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아무리 잘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모모가 원하는 플레이를 하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모모도 예전과 다르게 마냥 어리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은 진즉에 받아들였고, 지금은 단순히 재미있어서 게임을 하는 거였지만…….

“……잠이나 자자.”

한숨을 내쉰 모모가 그대로 팔을 들어 올려 눈을 가렸다. 과거의 편린이 무겁게 심장을 짓눌렀다.

오늘은 역시, 운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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