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우타마] 끝나지 않은 이야기
에필로그
*** 사망 소재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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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멸망했다.
태양은 뜨거웠고 바람은 차가웠다. 조금씩, 조용히,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틈을 타 태양은 세계를 녹이고 바람은 세계를 얼렸다. 열과 냉의 사이에서 생명은 고요하게 죽었다. 끈덕지게 버틸 것 같던 인간의 멸은 반 년도 걸리지 않았다. 많은 좌절과 눈물 속에서, 영원하길 바랐던 모든 게 종말을 고했다. 걸음을 옮긴다. 다리가 푹푹 꺼졌다. 자신의 끝도 머지 않았음을 온 몸이 알린다. 쨍한 태양에 시야가 어지러웠다.
“소 쨩.”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기도 전, 모자가 머리를 눌렀다. 시선을 올려도 챙이 시야를 가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고는 시각보다 청각에 자신 있었다. 타마키의 목소리는 일상이란 착각이 들 정도로 평온했다. 변함 없었다.
“또 정신 팔았지. 그쪽 아니고 저쪽.”
“아, 미안해.”
“됐어. 당신은 갑자기 쓰러지지나 마.”
진절머리 난다는 듯 소리를 툭툭 뱉는다. 고개의 가로질, 양 손을 가벼이 마찰하며 털어내는 행동이 걱정의 형태임을 안다. 소고는 마른 웃음을 뱉었다. 고개를 끄덕인다.
“응. 언제나 고마워, 타마키 군.”
세계의 멸망은 사람의 종말을 고한다. 단순 죽음이 아니다. 사람이 무너지는 게 당연한 세계가 된다. 일상의 격변과 몰아치는 죽음이 정신을 갉아 먹는다. 세계의 끝에서 사람은 다양한 방식으로 종말을 맞았다. 그 가운데, 소고는 미치진 않았지만 제정신도 아닌 사람으로 살아 남았다. 무너지고 싶은 순간이 몇 번이고 찾아 왔지만 그러지 못했다. 소고는 모자를 고쳐 썼다. 시야에 타마키의 얼굴이 담긴다. 황량한 세계와 어울리지 않게도 미래가 담긴 눈이다. 저 눈이 있어서 소고는 무너지지 못했다.
소고와 타마키는 멸망한 세계를 돌아다녔다. 타마키는 그걸 여행이라 칭했다. 소고는 타마키를 따라 나온 것에 가까웠기에 타마키가 부르는 호칭을 따랐다. 어쩌다 나오게 됐더라. 소고는 가물가물한 의식을 잡고 회고했다.
둘은 모두가 사라진 숙소에서 살았다. 시선이 어디에 머물든 과거의 기억이 뇌리를 파고드는 감각은 괴로웠으나 이마저 없으면 견딜 수 없었다. 고통이 사람을 살린다던가. 어디선가 읽은 적 있는 문구가 딱 어울렸다.
타마키 군.
응.
타마키 군.
왜.
타마키 군.
닳겠어, 소 쨩.
고마워.
소고는 울지 못했다. 무겁게 음절을 뱉었다. 타마키 군. 네 글자를 토했다. 타마키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소고를 돌아 보았다. 무어가 고맙냐는 물음도 덧붙이지 않고 소고를 바라보기만 했다. 소고도 타마키를 바라보았다. 대화 없이 시선만이 마주할 때, 소고는 생각했다. 타마키가 있어서 소고가 살아 있다. 타마키마저 없었다면, 사라졌다면 아마 자신의 마지막 문장은 진즉 쓰여졌으리라 확신한다. 언제나 고마워. 항상 너에겐 도움을 받고 있어. 내뱉지 않은 말이 혀 끝을 맴돌았다. 타마키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감정의 연결이 느리게 이어진다. 타마키에게도 혀 끝을 맴돌던 말이 있던 모양이다. 이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응.
타마키의 심정 하나 읽을 수가 없어서 소고는 눈을 감았다. 괜히 말했나. 그러나 소고에겐 과거를 되돌아보고 후회할 기력조차 없었다. 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안다. 돌아오지 않는 세계와 같은 이치다. 며칠이 지나도 숨을 들이키며 살았다. 종말을 기다리며 멸망을 바라보았다. 소고는 정착을 택했다. 그러나 타마키는 달랐다. 타마키는 짐을 쌌다. 가득 찬 배낭을 보고 소고는 머리가 식었다. 다급하게 타마키의 손목을 잡았다. 타마키 군, 어디 가?
소 쨩, 우리 나가자.
나가다니. 어디로?
어디로든.
그치만,
소고는 시선을 굴렸다. 먼지 앉은 소파, 넓은 거실, 많은 방이 눈에 들어온다. 타마키가 소고의 어깨를 잡았다. 손 끝에 담긴 감정이 간절했다. 소 쨩. 울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단단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까슬한 목소리에 숨이 가득 담겼다. 끝에 가서는 목이 멘 듯 갈라졌다.
우리는 살아야 하잖아.
울 것만 같은데 울지 않는다. 눈에 물기가 묻었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지.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수긍하듯 읊었다. 산다니 무슨 말이야. 어떻게 살아?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면 돼? 타마키 군, 이 세계는 생명을 죽이는 세계가 되었어. 빛나던 생명이 어떻게 죽어 갔는지 우리는 봐왔잖아. 그런데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내뱉을 수 없는 말이 목을 간질여서 소고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숨과 함께 말했다.
그러자. 살자.
“오, 생각보다 깔끔하구.”
소고를 잡념에서 끄집어낸다. 타마키는 배낭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태양과 바람은 생명을 휩쓸었기에 무생물은 여전히 작동했다. 카메라나 지도, 사람이 남긴 기록은 훼손 없이 멀쩡했다.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데 전파는 터지는 상황이 기이하다고 타마키가 말했다. 소고도 긍정했으나, 덕분에 거주지 확보는 어렵지 않았다. 이건 둘에게만 한정된 조건이 아닐 텐데도 멸망한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사람 한 명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면 우리는 최후의 인류일까? 분위기를 망칠 말인 걸 알아 내뱉지 않았다. 타마키에게 전하지 않는 말만 쌓여간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하지만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닐 거야.
“우오, 과자도 많다. 소 쨩! 고추도 있어.”
“원래 살던 사람도 소 쨩이랑 비슷했나 봐.”
담담하게 읊는 말에 소고가 몸을 움찔였다. 사람 없는 자택에 들어선 게 아니라, 사람이 죽은 자택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회로가 꼬였다. 타마키가 시선을 흘겨 소고를 보았다. 한숨을 뱉는다. 요즘들어 한숨이 늘지 않았나. 소고는 스스로를 어쩔 줄 몰라하는 시간조차 타마키를 지켜보았다. 타마키가 소고를 향해 걸어왔다. 양 볼을 잡았다.
“타마키 군?”
“당신은 생각같은 거 안 하는 편이 낫다니까.”
소고는 타마키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차가운가. 따뜻한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계속 생각을 하게 되는 걸 어떡해. 타마키 군, 너무 과한 거 아냐?”
“그러니까 그 생각을 하지 말라니까. 뭐가 과한데?”
“도착하기 전에도 그랬잖아. 쓰러지지나 말라고. 나 지금까지 쓰러진 적 없거든?”
“그때 제정신이었어? 소우 쨩. 그때 당신 얼굴을 직접 봤어야 해. 당장 정신 놓을 것 같던 꼴이었어.”
“당장 쓰러질 것 같은 꼴이 뭔데?!”
“눈은 멍하고 몸은 축축 늘어지고!”
“안 그랬어.”
“그랬어! 그리고 나 이러는 거 당신보다 덜하거든?! 당신이 나보고 과하다고 말하는 거 엄! 청! 웃기는 말인 거 알아?!”
“...내가?”
안 그랬다고 주장할 때부터 기세가 꺾인 소고가 머뭇거렸다. 타마키는 허리를 숙여 소고와 시선을 맞췄다. 배려보다는 가까이 오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 행동이었다.
“뭐만 하면 고맙다 하고, 조금만 멀리 가려고 하면 바로 붙잡고, 말은 하지도 않으면서 불안하게 쳐다만 보고, 당신은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반사적으로 타마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고의 볼에 얹어진 손에 힘이 담긴다. 타마키는 손을 빼려 했으나, 위를 덮은 소고가 놓지 않았다. 꽉 잡았다. 온도조차 분간되지 않으면서 잡은 손은 놓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미안해.”
타마키가 이를 물었다. 열었다가, 닫는다. 많이 본 행동이다. 이번엔 무슨 말이 혀 끝에 머무른 걸까. 소고가 타마키에게 전하지 않는 말이 늘어날 수록 타마키도 소고에게 전하지 않는 말이 늘어난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닌가? 이걸 선택한 건 나의 몫 아니었나.
“당신은.”
타마키가 힘으로 소고의 손을 떼어냈다.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낫다니까!”
걷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감정을 이기지 못한 행동이 바닥과 마찰한다. 타마키가 내려놓았던 배낭을 들었다.
“자, 잠깐만, 타마키군.”
타마키가 떠날 리 없음을 알면서도 소고는 한 달음에 타마키에게 향했다. 세계가 엇나가는 만큼 우리마저 엇나가는 것만 같았다. 타마키는 배낭을 열었다. 짐을 바닥에 나열한다. 그 짐이 생각지도 못한 것이라 소고는 탄성을 뱉었다.
“어?”
“소 쨩.”
타마키가 소고를 바라보았다. 황량한 세계와 어울리지 않게도 미래가 담긴 눈이다. 오오사카 소고가 사랑해 마지않는 시선으로 오오사카 소고를 바라본다.
“우리 노래하자.”
세계가 멸망하기 전 소고가 만들던 곡의 USB, 헤드셋, 데모 CD. 종말 이후에 꺼내지도 못한 흔적이 소고의 눈 앞에 펼쳐졌다. 타마키가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말하려고 했어. 당신이 좀 괜찮아지면 말 꺼내보려 했는데.”
“음악이 있어야 당신이 기운을 차릴 것 같아서.”
“봐, 소 쨩. 기록은 여전하잖아. 아직 끝나지 않았어. 끝나더라도 당신의 음악은 세계에 남을 거야.”
“그리고 있지. 이건 멸망이 아닐 수도 있어. 어쩌면 새로운… 뭐… 그런 게 생겨서, 당신의 노래가 발굴될 수도 있고, 이 집 주인의 취향이 소 쨩이랑 비슷했던 것처럼 그 존재도 소 쨩이랑 취향이 맞을 수도 있고…… 아니, 아니지. 소 쨩의 노래는 좋으니까 취향 맞는 사람이 아니어도 좋게 들을 거구! 사람? 존재? 어쨌든!”
권유의 형태를 가졌던 문장이 점차 부탁으로 변질된다. 말을 이어갈 수록 고개를 숙이던 타마키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종 잡을 수 없는 행동의 연속이다. 타마키는 항상 그랬다. 직관적이고 읽기 쉬워 보이지만 담아낸 게 많았다. 알았다고 생각하면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휩쓴다.
“무엇보다, 당신은 노래를 좋아하잖아.”
항상,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애정을 줬다.
“나만 좋아하지 말고 노래를 다시 시작해 줘.”
타마키가 조심스레 소고의 손을 잡았다. 세계는 멸망했다. 생명의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생명이 살지 않는 세계는 고요하고 황폐했다. 손에 닿는 체온도 여전히 구분되지 않았다. 따뜻한가, 차가운가. 인지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소고는 생각했다. 이 온도는 따뜻하다고 정의하고 싶다.
“나만 의지하지 마. 안 어울려. 당신은 욕심쟁이잖아.”
세계의 멸망은 사람의 종말을 고한다. 일상의 격변 속에서 소고는 애정을 잃었다. 영원하길 바랐던 모든 게 끝맺었다. 살아 남기 급급하던 시절에는 노래하지 못했고, 모든 게 무의미하다 느끼게 되었을 땐 자신이 바뀌었다. 허무를 배경으로 변한 자신은 사랑할 수 없었다. 낡은 자기혐오가 소고를 갉아 먹었다. 모든 게, 전부, 남김 없이, 하나도, 추잡함에 숨을 고르면 저를 끌어안는 생명이 있다. 갑작스러운 손님에게 집중을 돌린다. 요츠바 타마키. 격변이 생명을 뒤흔든 와중 타마키만이 빛바래지 않았다. 소고는 타마키에게 존재를 의탁하길 택했다. 그러면 나도 여전하다 착각할 수 있었다.
“타마키 군.”
“그만 불러. 대답이나 해.”
어떡하지. 타마키 군, 나 내가 너무 한심해. 타마키는 전부 알면서 소고에게 여전함을 선물했다. 소고가 타마키를 이용해 자신을 변호하면 이용 당해준다. 소고가 타마키에게 의지해 자신이 여전하다는 착각을 하면, 타마키는 착각이 진실이 되게끔 이끌었다.
“응.”
그래서 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뜨거우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떨렸다.
“하겠다는 거지?”
숨을 들이켜 화색하는 소리, 안도하는 목소리가 닿는다. 소고는 침음을 삼켰다.
“응.”
목소리에 물기가 묻었다. 울 것만 같은데 울지 않았다. 타마키는 활짝 웃었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예전에 만든 데모를 듣고 바로 작업에 들어가려 했으나 잃어버린 애정은 컸다. 떨어뜨린 시간이나 자기 확신은 당장 주워 담을 수 없다. 무슨 생각으로, 목적으로 만들던 노래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역시 이제와서 다시 하기엔 늦었다. 들을 사람도 없을 텐데, 몇 번이고 생각하면 타마키가 머리를 눌렀다. 매번 어떻게 알아 차리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항상 같은 말을 들려준다.
내가 들을 거야. 듣고 싶어.
마법의 말이다. 고작 두 문장이 뭐라고 잡념이 사라진다. 그러나 추진력을 얻지는 못했다. 잡념도 없이 음악만 듣다가 시간이 지나간다. 타마키는 나무라지 않았다.
둘은 여전히 멸망한 세계를 돌아다녔다. 여행이 아닌 산책이다. 사람이 죽은 자택을 거주지로 삼아 주변을 돌아다녔다. 생명 하나 보이지 않는 세계는 황폐하다. 소고가 아득함을 느끼면 타마키가 손을 잡았다. 살다보니 체온을 알 수 있게 됐다. 생각한 만큼 따뜻하지 않았다. 딱 한 사람의 체온. 그게 타마키의 온도였다. 잠에 이르지 못하는 밤의 연속이었지만 타마키의 온도가 닿아올 때면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옆에 사람이 존재한다는, 자신을 떠나지 않을 존재가 있다는 안정감은 달콤했다. 노래를 시작하자 했지만 곡은 만들지 못했다. 타마키만을 의지하지 말라 하였지만 어려웠다. 그래도 살아 있다. 그러니 천천히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다 보면 새로운 날이 시작됐다.
아침은 항상 밝아오지만 소고는 날짜를 헤아리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고, 내일과 같은 어제다. 일어나면 타마키가 평소처럼 인사해준다. 곡 작업을 진행하지만 진전은 없다. 무력감을 느끼면 타마키가 손을 잡아준다. 그것에 안심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다 잠에 든다. 세상에 무조건은 없다. 세상조차 멸망한 마당에 늘 같은 게 존재하리란 믿음은 허상이다. 타마키와 함께라면 허상마저 함께하고 싶었다.
“타마키 군?”
타마키는 늘 소고를 기다렸다. 소고가 침대에서 일어날 기세가 보이지 않으면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소고가 타마키를 혼자 남기지 못하는 것처럼 타마키도 소고를 홀로 두지 못했다. 잘 잤어? 소고가 잠을 설쳤다는 걸 알면서도 타마키는 질문했고 소고는 늘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잠든 밤, 일어나니 타마키가 없었다. 닿아오는 온도 없이 혼자 존재한다. 소고는 처음으로 저택을 거리낌 없이 뒤졌다. 옛 주인의 흔적과 타마키의 흔적이 함께 존재했다. 타마키 군! 외쳐도 공허하다. 자신의 목소리조차 되돌아오지 않는다. 세계에 홀로 남겨졌다는 막막함이 소고를 짓눌렀다. 방문을 열었다. 서랍을 열었다. 안까지 뒤적인다. 이런 곳에 있을 리 없음을 알면서 파헤친다. 타마키 군은 은근히 장난기가 있으니까, 되도않는 희망을 갖고 어설픈 손을 놀린다. 우당탕탕. 내용물이 죄다 떨어졌다. 깜짝 놀라선 무슨 일이냐고 소리치는 목소리도 없다.
조용하다.
그제야 소고는 현관을 보았다. 홀로 남았다는 걸 감당하고 싶지 않아 외면하던 진실을 마주한다. 타마키의 신발이 보이지 않는다. 소고의 신발만이 자리를 지켰다. 조금만 생각하면 외출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여유 없는 사람의 사고는 정상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동시에 어떤 행동이든 할 수 있게 만든다. 소고는 신발을 구겨 신었다. 현관을 연다. 멸망한 세계가 보였다. 세계를 향해 대책 없이 뛰었다. 하염없이 타마키를 기다리는 것보다 세계에 뛰어드는 것이 더 쉬웠다. 쓸데 없이 높은 건물은 시야를 방해한다. 관리되지 않아 녹슨 건물에 매캐한 냄새가 났다. 기억하는 그대로의 멸망한 세계다. 학습된 무력감이 소고를 둘렀다. 세계가 막막했다. 그러나 정착을 택할 순 없었다. 소고는 방황을 택했다.
타마키는 많은 것 버리고 포기한 소고가 놓지 못한 유일이었으나, 타마키는 유일로 남고자 하지 않기에 소고는 정착할 수 없다.
처음으로 세계에 홀로 서서 세계를 바라보니 깨닫는 게 있다.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고 보니 지낼 장소를 정할 때, 타마키 군 오래 고민했지. 홀린듯 걸음을 옮긴다. 여행할 때에 소고의 시선은 바닥과 타마키에게만 머물렀기에 이제야 깨닫는다. 타마키는 숙소조차 그냥 정하지 않았다. 제로 아레나. 익숙하고도 낯선 길을 넘어서 스테이지의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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