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0

츠무기와 이오리는 이미 야마토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지나칠 정도로 빨랐다. 평소라면 츠무기가 설명하는 작품의 감독과 내용을 다 듣고 난 이후 ‘어떤가요.’라는 그녀의 말이 다 덧붙여지고 나서야 No를 말하지만, 이번엔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중간에 끊어버린 채 얼굴을 잔뜩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가히 신기록이었다. 천하의 야마토가 여성의 말을 끊어버릴 정도인 거다. 이오리는 야마토의 극명한 사인을 보고 중간에 말을 끊을 거까진 없지 않냐며 성을 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츠무기와 이오리 둘 모두 야마토가 이 정도까지 No를 외치고 싫어한다면 그의 의사를 존중해줄 법한 인간적인 이들이었지만, 이번에는 편히 넘어가기 어려웠다. 츠무기의 두 손에 고이 들려 있는 아이보리 색 표지 아래에 금박으로 박혀 반짝거리는 네 글자가 원인이었다. 네 글자의 주인공은 현재 일본 영화계의 괴물로 불리는 여성 감독으로, 새파랗게 어린 20세부터 가히 천부적인 재능으로 천천히 업계를 씹어 먹더니 기어코 30세를 맞은 이해 칸은 물론이고 베니스에서도 승기를 거머쥐고서 오랜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인물이었다. 이미 예술영화로서 정점을 찍은 그녀가 대중과 보다 손쉽게 맞닿을 수 있는 시도로 써 내려간 이 시나리오에 선택된 것이 바로 대배우 치바의 아들이자 현재 일본 인기 아이돌 멤버 니카이도 야마토, 역시 일본을 주름잡는 인기 베테랑 아이돌이자 배우인 유키였다. 명망 있는 문학 가문에서 태어나 성공 가도를 달렸지만 연이은 실패로 슬럼프에 시달리고 있던 20대 중반의 시인, 춤을 추다 부상으로 반쯤 생을 포기하고 퇴폐 클럽에서 일하다 우연한 계기로 젊은 시인을 만난 비슷한 나이의 청년. 설녀의 아들처럼 아름답지만, 도발적인 청년은 뮤즈로서 시인에게 고통과 쾌락으로 이뤄진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시인은 완전히 다른 작품 세계로 들어가 옛날의 명예를 되찾는다. 그녀는 시인 역에 니카이도 야마토를, 청년 역에 오리카사 유키토를 선택했다.

이 젊은 감독은 얼마나 간절한지, 둘의 매니저인 타카나시 츠무기와 오카자키 린토에게 직접 시나리오를 전달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고 연기할 수 있는 배우이면서도, 현재 일본의 젊은 대중 층에 아주 친밀하게 닿을 수 있는 20대 남성 스타는 야마토와 유키 둘 뿐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말이다. 타카나시 츠무기는 감독의 간절한 부탁과는 별개로, 이 작품이 야마토 개인과 아이돌리쉬 세븐에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라 판단했다. 순수 예술계와 거리가 있는 세계지만, 그런 세계와 한 번 다리를 잘 잇는다면 뮤비 제작이나 다른 활동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게 틀림없었다. 오히려 타카나시 프로덕션만이 가진 유니크한 인맥으로 더 넓은 시장을 노릴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츠무기는 이 기회를 쉽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츠무기와 함께 아이돌리쉬 세븐을 프로덕션 하는 이오리도 마찬가지였다. 야마토는 지금까지의 작품들로 보건데, 자신은 대중들에게 그런 이미지로 잘 먹히지 않을 거라는 말부터 시작해 아무리 연기라고는 해도 남성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카메라 앞에서 성관계 흉내를 낼 수 없다는 것까지 다양한 거부의 이유를 제시했다. 니카이도 야마토의 말이 맞았다. 상대가 여성이었다면 자신이 밑으로 가는 다소 민망한 _본인 안에서 남성의 역할이 확고한 야마토의 말에 의하면._상황이더라도 한 번 쯤은 재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M 포지션이기까지 한데다 상대는 남자, 그것도 그냥 남성이 아닌 깍듯한 선배이자 아버지의 깍듯한 후배인 Re:vale의 유키였다. 그는 이 순간 찢겨 죽더라도 이 각본만은 거절하고 싶었다.

 

유키라고 해도 상황은 비슷했다. 본인도 일본의 인기 아이돌이자 호시카게의 굳건한 젊은 인재라지만, 일본 영화계의 강력한 별로 자리 잡고 초신성이 될 감독의 간곡한 부탁은 쉬이 거절하기 어려웠다. 영화와 드라마의 인맥 모두가 그녀의 눈과 비위에 들기를 바라고 있는 지금, 혹여라도 이 젊은 감독의 심기를 거절로써 건드린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잠복기 긴 바이러스처럼 후폭풍이 불 수도 있을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유키 또한 자신의 상대역으로 언급된 니카이도 야마토가 영 거북했다. 그를 대하는 게 힘든 건 아녔다. 다만 다소 버릇없었던 사랑스러운 후배이자 은인의 아들을 사적 자리에서 보는 것과 카메라 앞에서 진득한 대사를 나누고 헐벗은 채 애정행각을 흉내 내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다. 만약 상대가 그가 아닌 다른 남성이었다면 조금의 엄두를 내 볼 순 있었겠으나, 어쨌든 상대는 은인의 아들이었다.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자신이 위라는 것뿐. 모모는 인상을 찌푸린 채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심각하게 고민을 이어가는 동료이자 그의 영원한 스타에게 웃음과 함께 같은 남자라 몰입이 힘들긴 하겠지만, 유키의 연기력은 시나리오의 세계를 훌륭하게 그려낼 수 있고 야마토도 촬영이 시작되면 착실히 다른 인물이 되는 사람이기에 충돌할 자아 같은 건 막상 장면이 시작되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로를 건네었다. 오카자키 린토는 유키가 호시카게의 젊은 연예인으로서 하고 있는 고민과 그의 무게를 아는 매니저로서 정말 거북하다면 어떻게든 수습해 볼 테니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속으로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유키를 비롯한 모모와 린토, 셋 모두 똑같은 고민과 걱정으로 드물게 긴 시간을 한 공간에서 보냈지만, 새벽 2시라는 늦었지만 어려운 결정치고는 제법 이른 시간에 결단을 내렸다. 어렵고 큰 결단인 만큼 유키는 그 젊은 감독에게 최대한을 얻어갈 속셈이었다.

야마토는 유키가 결단을 내린 뒤 감독에게 수락 의사를 전한 날에서 일주일이 더 지나고서야 그야말로 울며 겨자 먹기로 일을 받았다. 니카이도 야마토는 정말이지 이런 작품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를 이 절망에 내던진 젊은 감독의 예술 세계는, 사실 야마토가 보기에도 가히 경이롭고 탐닉 적이고 천재적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사실은 부정해도 감독의 재능과 인맥만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일본을 넘어 전 세계가 주목하는 예술가의 작품에 들어가 능력을 보여주고, 강력한 인맥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면 본인뿐만 아니라 그룹과 다른 동료들에게도 큰 힘이 될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온갖 리비도가 역류하는 시나리오에서의 상대가 유키라면 말이 달랐다. 그는 일주일 동안 거의 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 츠무기와 감독에게서 여러 가지 조건을 듣고 방에서 거의 오열하며 전화로 수락 의사를 전했다. 이런 정신 나간 짓이라도, 파격적인 대우와 조건을 뒤로하고 거절하기는 영 쉽지 않았다. 자신의 그룹과 동료들을 더 빛나게 해주고 싶다는 니카이도 야마토의 꿈은 아직 굳건했고, 젊은 감독은 자신의 파워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야마토를 원하고 양보할 줄 알았다. 여러 좋은 조건과 함께 결단의 획을 긋게 해준 건 다름 아닌 상대 역 유키 본인이었다. 유키는 어느 날 복도에서 마주친 야마토를 불러세우고 자기 뜻을 극명하고 건조하게 전달했다. 하나, 나 또한 너처럼 좋게만 수락한 게 아니다. 둘, 감독이 우리에게 제시한 조건은 어디 가서도 얻지 못할 기회일 거다. 그리고 셋, 프로로서 임하자.

“우린 배우로서 이 작품에 들어가는 거야, 캐릭터에게 몸을 빌려주고 끝내자. 어차피 모든 배역은 카메라가 꺼지면 네 의사와는 상관없이 작별해야 하는 거고, 나 또한 그럴 거야. 아마추어 같이 굴지 말고 프로처럼 끝내자. 난 도련님에게 계속 끈적거리는 시선 받을 생각 따위 없는데, 야마토 군도 똑같지 않겠어?”

상대방 열받게 만드는 것에 최적화된 유키의 말이 평소보다 몇 배나 황당하고 분노스러웠지만, 사실 유키의 말은 내용만으로는 틀린 게 거의 없었다. 야마토는 인정과 함께 외모는 인정하지만, 성적으로 다가갈 생각 따위는 죽었다 태어나도 없을 거라고 선을 그었다. 선을 긋지 않았다면 밤새 이불을 찼을지도 모른다.

다만 배려가 많았던 만큼 감독 쪽에서의 오더도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주의 시간 동안만 동거해달라는 것. 간사하게도 두 사람이 계약서에 사인을 끝내고 나서야 제시한 사항이었기에 야마토와 유키에게는 거부권이 없었다. 물론 법무팀을 통해 계약서를 무효로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러기에도 너무 민망한 건이었다. 동거에 대한 감독의 의도는 대강 이러했다. 야마토는 유키의 모든 것을 매력으로 탐닉하고 캐릭터가 그것에서 새로운 예술을 느낄 수 있게 유키와 함께 살며 쾌락의 눈으로 그를 바라볼 것. 유키는 젊고 패기 넘쳤지만 시들어가는 콧대 높은 시인의 목줄을 잡고 이끌어 갈 수 있을 정도로 야마토와 함께 살며, 시인이 좋아하는 청년의 요소를 발견하고 그를 휘두를 줄 알 것. 야마토는 감독의 진지한 설명을 들으면서 올라오는 토를 간신히 참아냈고, 유키는 5초 정도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둘은 계약서에 사인하기에 앞서 하루 날을 잡고 감독의 대표작을 함께 감상 했기에, 요구 사항을 어떻게 다룰지는 조금이나마 감정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난 이후 야마토와 유키는 아무리 껄끄럽더라도 그녀의 작품 스타일에 필요한 일임을 인정하고 프로로서 주어진 일을 해야 했다. 감독은 자국 예술영화 시장의 변화를 위해 많은 걸 감수했고, 그의 일환으로 야마토와 유키에게 주 촬영장이 될 전통풍 대저택을 미리 제공했다. 앞으로 이주, 유키와 야마토는 한 공간에서 함께 살며 역할에게 몸을 내주기 위해 천천히 서로를 탐닉해야 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