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모모

[형폭] 여긴 병원이 아니야

❄️🍑 by r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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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현관문을 열었다. 주변에는 벌써 짙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도대체가,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사람을 부려 먹다니……. 아니지, 이건 다 그 녀석 때문이었다. 오늘 때아닌 야근을 하게 된 것도 며칠 전에 발생한 폭탄 테러의 뒤처리를 하느라 그런 거였으니까.

피곤함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감각에, 유키토는 정장 재킷을 벗으며 침실로 향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면, 얼른 누워서 자고 싶다는 바람은 이루어질 일이 요원해 보였지만.

“도대체가…….”

침대 위에는 검은 형체가 웅크리고 있었다. 현관문이 잠겨있는 상태에서 집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지금 저기에 굴러다니고 있는 게 누구인지는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도대체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유키토는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뻔뻔하게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불법침입자를 내동댕이칠 요량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침대에 누워있는 녀석의 상태를 살펴보면, 그런 생각도 자연스럽게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다쳤잖아. 웅크리고 있는 몸에서 배어 나온 피로 침대 시트가 흠뻑 젖어 있었다. 아무리 싫은 녀석이라지만 집안에서 시체를 치우는 건 본의가 아니었기에, 유키토는 급하게 구급상자를 꺼내왔다. 상처 부위를 보기 위해 웅크린 몸을 살짝 굴리면, 식은땀에 푹 젖은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급한 대로 입고 있던 옷을 가위로 잘라내면 드러나는 상처 부위에 눈살을 찌푸렸다. 자상인가……. 그나마 깊게 베이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거즈를 가져다 대고 상처를 누르면, 침대에 누워있던 몸이 움찔거리며 튀어 올랐다. 누가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던 녀석은, 그제야 앓는 소리를 내며 흐릿한 눈으로 유키토를 바라보았다.

“……형사님, 왔어……?”

“말하지 마, 상처 벌어져.”

“매정하긴…….”

툴툴대는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유키토는 상처를 눌러 지혈했다. 출혈이 잦아들면 식염수를 뿌리고 드레싱을 하는 모양새가 능숙하기만 했다. 형사쯤 되면 응급 처치를 해야 할 일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익히고 있던 지식이었지만, 설마 직장 동료도 아닌 녀석을 돌봐야 할 일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심지어 일반인도 아닌 폭탄 테러리스트를…….

묵묵히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붕대까지 깔끔하게 두른 유키토가 잠시 욕실로 들어가더니, 식은땀에 흠뻑 젖은 녀석의 얼굴 위에 차가운 물에 적신 수건을 올렸다.

“알아서 닦아.”

“……너무하네. 환자, 상대로…….”

“여긴 병원이 아니야.”

피곤했었는데, 녀석을 치료해 준다고 움직이느라 잠이 다 달아나 버린 유키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잠시 침실에서 나왔다. 커피라도 마셔야지……. 저 녀석을 돌려보내기 전까지는 자기 그른 것 같으니까. 사실 커피보단 담배가 간절했지만, 다 죽어가는 놈을 옆에 두고 담배를 피웠다가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를 일이었다.

원두를 커피추출기에 넣어 커피를 내리면서, 겸사겸사 환자를 위해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따랐다. 진통제가 필요하면 여기가 아니라 병원을 갔겠지. 애초에 저런 상처에 쓸만한 진통제가 집에 있을 리 없었다.

유키토가 커피를 한 잔 따라서 침실로 돌아갔을 무렵에는 조금 기운을 차린 건지, 식은땀 범벅이었던 녀석의 얼굴이 말끔하게 닦여 있었다. 겨우 그게 한계였던 건지, 아직 드러난 몸 곳곳에 땀을 흘린 흔적이 역력했지만. 유키토는 미지근한 물이 담긴 컵을 침대 바로 옆의 협탁에 올려놓았다.

“이거 마시고 일어나 봐. 시트 갈아야 해.”

“형사님, 나 아픈데…….”

“퍽이나. 환자 취급 받고 싶으면 다른 데 알아봐.”

“너무하네.”

오밤중에 야근한 사람 침대 빼앗고 있는 녀석이 더 너무하다고 생각하는데. 유키토는 커피를 홀짝이며 옆의 의자를 가져와 걸터앉았다. 그나마 커피가 들어가니 머리가 좀 돌아가는 것 같았다. 투덜거리던 녀석도 이게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한 거라는 건 알고 있는 건지, 얌전히 침대 머리에 기대 물을 홀짝였다.

“응급 처치, 능숙하네.”

“알고 찾아온 거 아니야?”

“딱히? 그냥……생각나는 게 여기뿐이었어.”

마른 입술을 축이던 녀석의 대답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렇게 애매모호한 대답도 늘 있는 일이었기에 유키토는 침묵하는 쪽을 선택했다. 생각나는 게 여기뿐이라니, 무슨 숨겨둔 애인 집도 아니고.

이렇게 무방비한 몰골로 제집에 찾아오면 줄 수 있는 건 콩밥밖에 없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제대로 된 응급 처치도 하지 않은 상태로 여기까지 온 인내심만큼은 칭찬할만했다. 실제로 수갑을 채우지 않고 응급 처치를 해준 데다가 물까지 내주는 친절을 발휘하고 있으니, 그 선택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치료하면서 수갑을 채울지 고민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저런 상처로는 다사다난한 취조부터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녀석이 살아서 죗값을 치렀으면 했지, 무의미하게 죽는 걸 바라는 건 아니었기에 유키토는 눈을 감았다. 그것이 어떤 어리석은 결말로 이어지건 유키토 스스로 감내할 몫이었다.

“형사님, 나 배고파.”

“……이런 것까지 감내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물 마셨으면 됐잖아. 뭘 더 바라?”

누구 좋으라고 범죄자 놈을 치료까지 해주는 것도 모자라 밥까지 해다 바쳐야 하냐고. 유키토는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커피를 홀짝였다. 헛소리에도 정도가 있었다.

“내가 배고파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겠다고 하면?”

“집에서 시체 치우고 싶지 않으니까 현관까지 기어서라도 나가.”

“야박하네…….”

한 컵 가득 채운 물을 반쯤 마셨을까, 녀석이 제자리에 컵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겠다는 얘기가 순 거짓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움직일 만한 상태는 아닐 텐데. 녀석의 얼굴만 본다면 벌써 상처가 아물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시선을 내리면 바로 상체에 두른 붕대가 눈에 들어왔지만.

멋대로 옷장을 뒤적이더니 와이셔츠 하나를 꺼내 입는 녀석의 태연한 행동에 기가 찼지만, 제 손으로 잘라낸 옷을 다시 입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붕대만 감은 맨몸으로 바깥을 활보하라고 할 수도 없고.

“이것도 나중에 갖다줘야 해?”

“마음대로 해.”

“흐응. 내가 무슨 일에 쓸 줄 알고?”

“……클리닝 깨끗하게 맡겨서 가져와.”

이 변태 자식……. 상대하고 있으면 두통이 밀려오는 감각에, 유키토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커피를 마셨다. 입만 열면 사람 속을 긁는 재주가 있는 녀석이라, 상대하지 않는 게 제일 좋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다. 저 입을 꿰매버릴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녀석은 약간 긴 기장의 와이셔츠 소매만 적당히 접고는 만족스레 방문을 나섰다.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역시 통증을 아예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닌지 흔드는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럼 안녕, 형사님.”

“다신 오지 마.”

쿵. 문이 닫히고 나면 유키토의 눈이 자연스레 피에 물든 침대 시트로 향했다. ……이거 매트리스는 멀쩡하겠지. 뒤처리할 생각에 벌써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극적으로 연쇄폭탄테러리스트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었다던가, 녀석의 증언을 기초로 테러 집단을 소탕하기 시작했다던가. 개중에서 유키토에게 최악의 사건을 꼽자면, 사법 거래를 통해 보호관찰 처분을 받은 녀석――스노하라 모모세가 제집에 반강제로 살게 된 일이었다. 듣기로는 모모세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다던가. 아무리 담당 형사라고는 해도 일개 경시―본래 경부였지만, 모모세를 잡은 공로로 특진했다―에게 거부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연유로, 불청객은 아직도 정당하게 유키토의 집에 눌러앉아 있었다. 편하게 쉴 수 있는 개인적인 공간에 타인이 비집고 들어왔다는 사실은 여전히 불쾌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귀가할 때 집에 불이 켜져 있다는 사실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다녀왔어.”

“형사님! 나 이것 좀 해줘.”

“……다쳤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귀가하면, 거실에서 뛰어온 모모세가 인사도 없이 곧바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도대체 집에 혼자 있는 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건지, 왼손 검지손가락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응. 사과 먹고 싶었는데 껍질 자르는 거 어렵더라…….”

“나 올 때까지 기다리지.”

“그때 먹고 싶었단 말이야.”

입을 삐죽이는 모모세의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때는 짜증 나기만 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애처럼 보이는지. 유키토는 모모세의 머리를 가볍게 손으로 헤집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구급상자를 꺼냈다.

모모세와 함께 살면서 알게 된 점이 몇 가지인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요령이 그리 좋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생활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해야 하나. 혼자 놔두면 밥도 해 먹질 못하고, 청소와 빨래도 제대로 할 줄을 몰랐다. 그나마 기계랑은 친숙한 모양인지 로봇청소기와 세탁기 사용 방법을 알려주니 금방 익히긴 했지만.

이번에도 익숙하지 않은 과도를 눈대중으로 쓰다가 손가락을 베였겠지. 안 봐도 뻔한 상황에, 유키토는 익숙하게 식염수와 소독약을 꺼냈다.

“외출 풀렸잖아? 기다리지 말고 병원 가지 그랬어.”

“손가락 베인 거로?”

“이것도 방치하면 위험하다고.”

“형사님도 잘하면서.”

“여긴 병원이 아니거든?”

모모세의 상처에 식염수를 뿌려 씻어내고, 소독약을 바르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설득력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칼에 베인 상처를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유키토는 모모세의 손가락에 반창고까지 꼼꼼하게 붙였다.

“다 됐다.”

“으, 따끔따끔해.”

“소독 되는 거니까 참아.”

고작 손가락 베인 상처로 울상이 되어서는 눈을 찌푸리는 모습을 보면, 예전에 배를 칼에 찔리고도 멀쩡해 보였던 녀석과 과연 동일인이 맞는지 의심이 가긴 하지만. 어느 쪽이 좋은 건지 판단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모습이 훨씬 더 사람답게 보이긴 했다.

약품을 정리해 구급상자를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은 유키토는, 그제야 정장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았다. 원래는 집에 들어오면 바로 밥 먹고 쉴 요량이었지만…….

“사과 깎아 줄까?”

“응! 먹을래.”

“알겠어, 금방 해줄게.”

“토끼 모양으로 깎아줘.”

“그래.”

병원 흉내는 역시 내키지 않았지만, 메마른 일상에 토끼 사과를 깎는 일과가 추가되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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