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쿠류] 파도

2024. 04. 21 제 6회 어나더 스테이지 배포

10plate by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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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 21 제 6회 어나더 스테이지 무료배포본

가쿠 x 류노스케 <파도>

1. 약속

: 류노스케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그의 바람을 이루어 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을 분홍빛으로 물들인 꽃잎이 꼭 비처럼 내리는 시기가 왔다. 야오토메 가쿠는 눈앞에서 속절없이 쏟아져 내리는 분홍색의 비를 보며 가만히 눈을 깜빡인다. 분명 작년에도, 그 전년에도 봤던 광경이다. 그의 모교는 그 지역에서도 유독 교정의 벚나무가 크고 꽃이 예쁘게 피는 걸로 유명했다. 그때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래, 아마 참 예쁘다. 그런 생각을 했겠지. 그런데 오늘은 차마 눈앞의 풍경이 예쁘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 젠장. 꼴사나워. 야오토메 가쿠는 얼굴을 팍 구기고는 자기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린다. 가뜩이나 오늘이 ‘마지막’인데 이런 한심하고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늦네.’

이제껏 약속 시간을 단 한 번도 어긴 적 없던 이가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저 멀리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는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쏜살같이 귀퉁이를 돌아 자신의 앞으로 곧장 달려오는 그를 보며 야오토메 가쿠는 살며시 미소 짓는다. 안 뛰어와도 되는데.

“미, 미안… 헉, 후으…….”

“괜찮으니까 일단 숨부터 쉬고.”

“……후우.”

겨우 숨을 고르고 허리를 바로 세운 그의 모습을 본 가쿠의 입이 절로 벌어진다. 뭐야, 이 거적때기는. 더 이상 옷이라고 부를 수가 없을 정도로 달린 단추란 단추는 죄다 뜯겨있는-심지어 와이셔츠 단추마저 뜯겨있다니-모습을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가쿠의 반응에 그가 멋쩍게 웃는다.

“미안, 이거 때문에 늦었어. 도망치느라고.”

“단추만 뜯긴 거 맞아?”

뭐 이상한 거 뜯긴 건 아니지? 가쿠의 말에 그가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단추 말고 뜯길 것도 있어? 그의 말에 가쿠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넥타이도 명찰도 없잖아. 아, 진짜다. 가쿠의 말에 재킷 주머니 위를 살펴본 그는 깔끔하게 뜯겨나간 명찰의 행방을 짐작해 보려다 포기했다.

어련할까. 명찰에 넥타이, 재킷뿐만 아니라 와이셔츠의 단추도 다 뜯겨 너덜너덜한 천 쪼가리를 겨우 걸치고 있는 남자는 누가 뭐래도 이 학교의 최고 인기 스타였으니 그가 이 학교를 졸업하기 전, 어떻게든 단추 하나라도 가져보려 득달같이 달려들었을 게 뻔하다. 가쿠는 그런 모습에 괜히 입술이 삐죽 나온 채로 물었다.

“내 거는.”

그러자 그는 마치 가쿠가 그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활짝 웃으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빼낸 것을 가쿠의 앞에 내민다.

“이건 가쿠 주고 싶어서.”

두 번째 단추는 지켰어! 가쿠는 그의, 츠나시 류노스케의 말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다른 것도 아닌 두 번째 단추를 주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순수하게 기뻐해야 하는데, 정말로 코앞까지 다가와 버린 이별의 때에 마냥 기뻐할 수가 없어서.

이럴 때만큼은 그와 1학년 차이가 난다는 것이 이렇게 분할 수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츠나시 류노스케를 포기할 것인가 묻는다면 절대로 NO. 사실 류노스케가 합격한 대학교도 고등학교에서 그렇게 멀지 않고, 집도 가까우니까 고작 그가 1년 먼저 졸업하는 걸로 그를 포기할 생각은 죽어도 없다. 다만, 그렇다 할지라도, 더 이상 같은 학교에 다니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당연한 거 아닌가. 더군다나 상대방이 고등학교에서도 3년 내내 교내 인기투표 1위에 빛나는 <상냥하고 다정한 츠나시(군/선배)>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가쿠?”

그가 먼저 대학교에 간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가 먼저 성인이 된다는 뜻이고, 대학교는 그런 성인들이 모이는 곳이고, 자신은 지금은 그저 한 살 어린 고등학교 후배일 뿐. 타이밍 좋게 또다시 우수수 쏟아지는 벚꽃 잎이 꼭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자신을 위해 필사적으로 두 번째 단추를 사수해 준 류노스케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가쿠는 기꺼이 그의 단추를 받는다.

당장 내일이 되더라도 가쿠는 뻔뻔하다면 뻔뻔하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류노스케에게 연락할 것이고 기꺼이 그를 만나러 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당장 한 층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던, 점심시간이 되면 같이 점심을 먹고, 함께 하교하던, 그 너무나도 당연했던 시간을 함께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이렇게도 비참하고 적적할 일인가.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를 좋아하니까. 야오토메 가쿠가 츠나시 류노스케를 좋아하니까. 일분일초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을 만큼. 그것을 알기에, 알고 있기에.

“아니, 이걸로는 모자라.”

“어?”

“류노스케.”

“어어? 갑자기?”

불쑥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간 가쿠가 단숨에 류노스케의 멱살을 잡아 그의 상체를 자신의 앞으로 바짝 끌어당긴다. 갑작스러운 가쿠의 행동에 속절없이 끌려간 류노스케는 이윽고 자기 입술에 닿은 생소한 감촉에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거칠고 갑작스럽게 다가왔던 때와는 다르게 느릿느릿 부드럽고 천천히 떨어져 나가는 입술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류노스케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처음 보는 얼굴을 하는 가쿠를 보며 순간적으로 뒷목이 화끈거림을 느꼈다.

“네 건 오늘 내가 가져갈 테니까 내년에, 류가 내 걸 가져가 줬으면 좋겠어.”

류노스케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그의 바람을 이루어 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2. 영원

: 우리 그냥 계속 같이 살까?

 

 

제법 늦은 시간, 느릿느릿 방에서 나온 류노스케는 크게 하품하고는 계단을 내려와 주방 냉장고 문을 연다. 늦은 새벽까지 이어진 촬영 탓에 냉장고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썬더 드라이 두 캔과 달걀 세 알이 전부다. 처참한 냉장고 속을 보니 이제야 실감이 난다. 이 집에 더 이상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일어나자마자 빈속에 맥주를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라 조용히 냉장고의 문을 닫은 류노스케는 문득 고개를 들어 크게 한 번 거실을 훑어본다.

‘커도 너무 크네, 쓸데없이.’

막 도쿄로 올라와 집을 구할 당시에만 해도 ‘있어 보여야 한다’라는 소스케의 말에 덜컥 분수에도 안 맞는 이 집을 계약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 아마. 류노스케는 무기력하게 거실에 놓인 소파 위로 몸을 던지듯 누웠다.

‘……외롭네.’

언제까지고 두 사람과 함께 지낼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가슴으로는 아직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제 더 이상 함께 살 이유는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먼저 동거 생활을 그만하자고 말한 것은 텐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미성년자도 아니었거니와, 최근 쿠죠 타카마사가 완전히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더 이상 류에게 어리광 부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도 내 앞가림은 혼자 할 줄 알아야지.”

씁쓸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지만 류노스케는 텐의 결정을 존중했다. 텐이 류노스케의 집을 떠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가쿠도 그의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가쿠는 남아있어도 상관없지 않냐는 텐의 물음에 그 또한 마찬가지로 더 이상 류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유가 어찌 됐든 두 사람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에 류노스케는 자신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무엇보다 두 사람의 결정을 존중했다. 마침 곧 다가오는 여름, 집 계약이 끝날 예정이라 천천히 두 사람에게 의견을 물으려 했던 류노스케에게도 어쩌면 동거 생활의 끝이 새로운 계기가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으니.

‘폐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집으로 돌아갈 때 혼자라면 절대 사지 않았을 도넛 가게의 선물 상자를 들고 가면 어느새 다음 날 감쪽같이 비워져 있다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냉장고는 꽉꽉 채워져 있다던가. 어쩌면 한껏 어리광을 부리고 폐를 끼친 것은 두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몰려들었다.

머릿속에서 점점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늘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류노스케는 아주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 뜬다. 새벽 4시까지 이어졌던 촬영의 피로가 아직도 남아있는 모양이다. 방으로 돌아가 제대로 침대에 누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류노스케는 완전히 눈을 감았다.

 

 

야오토메 가쿠. 인기 아이돌 그룹 TRIGGER의 리더이자, 안기고 싶은 남자 1위에 랭크인 한 전적이 있는 최고로 인기 있는 남자라 자부할 수 있는 이의 이름. 그런 야오토메 가쿠가 10분이 넘도록 남의 집 문 앞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고 하면 그 누가 믿을까. 에이, 설마. 그 야오토메 가쿠가? 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혹여 복도에 수상한 남자가 있다며 신고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뒤늦게 걱정이 된 가쿠는 아까부터 몇 번이나 켜봤다 끄기를 반복했던 래빗챗 화면을 다시금 켜본다.

[류, 몸은 괜찮아? 오늘 새벽에 촬영 끝났다며]

[밥은 챙겨 먹은 거야?]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직 자고 있어?]

여전히 답장이 없는 래빗챗에 가쿠는 이내 고민하고 있던 것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이제는 자기 집이 아니게 된, 남의 집 현관문을 마음대로 열고 들어가도 되는가에 대한 고민의 결론을.

뒷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 가쿠가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졌는데 거실은커녕 어느 곳에서도 불빛이라고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류! 집에 있어?”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기까지 이어지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류노스케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연락에 답장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새벽 늦게까지 촬영을 계속한 탓에 혹여 몸이 상한 것은 아닌가. 그 탓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좋지 않은 건가.

“류!”

뛰어들 듯 거실로 들어온 가쿠는 어렴풋하게 소파에 누워있는 류노스케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류노스케를 보며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가쿠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 위에 손을 얹어본다. 불덩이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열을 띄고 있다. 가쿠는 서둘러 류노스케의 어깨를 흔들어 본다. 의식을 찾지 못할 정도라면 당장에라도 병원에 데려가야 했으므로.

“류, 괜찮은 거야? 정신 좀 차려봐.”

“으…….”

“류.”

“……가, 쿠……?”

“정신이 좀 들어?”

어렵디어렵게 눈을 뜬 류노스케는 흐릿한 시야로 넘실거리는 은빛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이제는 아주 꿈까지 꾸네. 가쿠는 겨우 눈을 뜨더니만 갑자기 헤실거리며 웃는 류노스케의 반응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이, 류?”

“가쿠는 역시…… 멋있구나…….”

“뭐?”

“외롭다고 하니까…… 꿈속에서라도 와준 거야? 기쁘네…….”

생각지도 못한 류노스케의 말에 가쿠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조심스럽게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그의 앞머리를 넘겨주듯 빗겨 주었다. 이건 정말 생각도 못 했는데.

“외로웠어?”

“……조금.”

“왜.”

“혼자 살기엔 이 집…… 너무 크지 않아?”

“……그러네.”

여전히 반쯤은 감긴 눈으로 앞을 보고 있던 류노스케의 눈이 점점 감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가쿠는 그의 몸을 소파 위에 반듯하게 눕혀주었다. 꿈에서 깨기 싫은데. 제법 보기 귀한 류노스케의 투정에 무심코 웃음이 터질 뻔한 가쿠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그에게 말한다.

“옆에 있을게.”

가쿠의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된 모양인지 류노스케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류노스케가 완전히 잠에 든 것을 확인한 가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방에서 이불부터 가지고 내려왔다. 류노스케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준 가쿠는 거실 냉장고의 문을 열어본다. 아니나 다를까 텅 비어있는 냉장고 안을 보자마자 혀부터 찬다. 류노스케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가쿠는 서둘러 집 밖으로 향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묘한 냄새와 어쩐지 은근하게 느껴지는 포근한 온기에 닫혀있던 류노스케의 눈이 부드럽게 열린다. 아, 깜빡 잠이 들었네. 겨우 상체를 일으킨 류노스케는 어깨에서부터 툭, 하고 떨어지는 이불을 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침대 이불이 왜 여기에? 이윽고 그런 류노스케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 줄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깼어?”

“어? 가쿠?”

“너 오늘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었지.”

“어…….”

가쿠의 말에 대신 대답이라도 해주겠다는 듯이 요란하게 울리는 배꼽시계에 류노스케가 멋쩍게 웃는다. 그런 류노스케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은 가쿠가 어서 와서 저녁을 먹자며 그를 불렀다. 그러고 보니 꿈에 가쿠가 나왔던 것 같기도 한데. 혹시 나 아직 꿈속인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류노스케는 제법 화려하게 차려진 식탁 위를 보며 놀라워했다.

“이게 다 뭐야?”

“냉장고가 텅 비어있길래 이것저것 샀는데, 너무 많이 샀더라고.”

“가쿠는 자주 그런다니까.”

그래서 덕분에 냉장고가 늘 가득 차 있었지. 류노스케는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앉는다. 가쿠의 말마따나 집에 돌아와서 잠만 자느라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뱃속이 아우성을 친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세 사람이 같이 살 적 집에 있을 때 주로 요리를 한 사람은 류노스케였지만, 가쿠도 종종 식사를 차려주기도 했다. 틈틈이 할아버지를 도와 소바 가게의 종업원 일을 하며 어깨너머로 배운 가쿠의 요리 실력은 아주 좋은 편이다. 제법 오래간만에 먹어보는 그의 요리에 류노스케의 젓가락질이 소리 없이 빨라졌다.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한다.”

“응.”

“밥 다 먹고 여전히 열 있으면 약 먹고.”

“약?”

“그래, 아까 이마가 좀 뜨겁더라. 몸이 안 좋으면 안 좋다고 말했어야지. 래빗챗을 보내도 계속 답장이 없어서 걱정했다고.”

“우와, 전혀 몰랐어…….”

“그래서 와본 거야.”

가쿠의 말에 류노스케는 뒤늦게 핸드폰을 방에 완전히 내버려 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새벽 촬영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오늘은 완전히 오프이긴 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연예계 아닌가. 그런 류노스케의 표정을 알아차린 가쿠가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인다.

“정말로 급한 일이었다면 나보다 먼저 아네사기가 찾아왔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건… 그렇지, 응. 그러네.”

“있잖아, 류.”

그렇게 말문을 열었지만 한참을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가쿠를 보며 류노스케를 괜히 그의 말을 종용하지 않았다. 가쿠가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을 보니 아주 중요한 일이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우리 그냥 계속 같이 살까?”

“어…….”

“싫어?”

생각지도 못한 가쿠의 물음에 류노스케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다. 방금, 가쿠가 뭐라고 했지? 류노스케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다시금 가쿠에게 묻는다. 뭐라고? 같이 살자고. 와, 잘못 들은 게 아니네.

“나는 당연히 싫지 않지! 오히려 좋은걸. 함께 살면……. 그냥 갑자기 가쿠가 그런 말을 하니까 조금 놀랐던 것뿐이야. 그보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어봐도 돼?”

“또 언젠가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 누구누구 씨가 래빗챗에 답도 없이 소파에 죽은 듯이 누워있을지도 모른다니까 걱정돼서.”

“……미안합니다.”

“농담이야. 너도 피곤했을 테니까. 하지만 걱정됐다는 건 진심이니까.”

류노스케가 잠든 사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가쿠도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했다. 만약 그가 이 집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류노스케의 상태를 더 빨리 알아차렸을 것이고, 혹 그에게 답장이 오진 않았을까, 래빗챗 화면을 수시로 켜고 끄기를 반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래빗챗을 남기는 것보다 그의 방문을 두드리는 것이 훨씬 빨랐을 테니까. 무엇보다도 그의 집 현관문 앞에서 10분이 넘도록 수상한 사람처럼 마냥 서성이지도 않았으리라. 분명 열쇠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쉽게 그 문을 예전처럼 열지 못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제 더 이상 그 집은 자기 집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가쿠는 그 사실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불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류만 괜찮다면 나 다시 여기서 살아도 될까? 물론 집세는 나도 낼 거고. 이제처럼 집안일도 나눠서 할 거고.”

“가쿠…….”

“무엇보다 재미없더라고. 집에서 혼자 맥주 마시는 거.”

가쿠의 말에 웃음을 터트린 류는 마침 냉장고에 캔맥주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두 개를 꺼내온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그래.”

“그리고…….”

“응?”

“어서와, 가쿠.”

덧붙이는 류노스케의 말에 가쿠가 살며시 웃으며 대답한다.

“다녀왔어, 류.”


3. 너랑 나 사이?

: 너랑 나 사이에 이런 것쯤이야 사양할 필요는 없잖아.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에 눈이 따갑다고 느껴지는 것도 잠시, 츠나시 류노스케는 익숙하게 자신에게 기대어 있는 여성의 허리에 팔을 감는다. 그런 류노스케의 행동에 상대방도 더욱 적극적으로 그의 가슴에 더 가까이 기대 목에 팔을 두르면서도 당당하게 정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환호하듯 더욱더 요란스러운 빛과 소리가 촬영장을 가득 메웠다.

“좋아요, 그대로 두 사람 마주 보고! 츠나시 씨가 조금 더 강하게 휘어 안는 느낌으로.”

“아, 네! 실례할게요.”

“그럼요, 괜찮아요.”

그렇게 한 치의 어색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촬영을 이어가던 츠나시 류노스케를 한 발짝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야오토메 가쿠가 남몰래 속으로 웃는다. 류 녀석, 엄청나게 노력 중이네. 다른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가쿠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순진한 남자가.

이제까지 자극적이거나 어른의 매력을 과시하는 컨셉의 촬영을 계속해 왔음에도 류노스케는 여전히 상대 여성 파트너와 함께하는 촬영을 어색해했다. 그럼에도 막상 결과물은 감탄만 나올 정도로 훌륭하게 뽑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츠나시 류노스케라는 남자는 자신을 스스로 촌뜨기 남자라고 자칭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천상 연예인이다.

“오케이, 일단 개인 컷은 여기까지.”

“감사합니다.”

“야오토메 씨는 벌써 준비됐지?”

“물론입니다.”

그 사이 몇 개 자잘한 소품들이 바뀌어,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촬영장으로 향하던 가쿠를 보며 그곳을 빠져나오던 류노스케가 주먹을 앞으로 내밀자, 가쿠도 마찬가지로 주먹을 내밀어 가볍게 부딪친다.

“수고해, 가쿠.”

“그래, 쉬고 있어.”

먼저 도착한 상대방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가쿠는 감독의 지시에 따라 차례차례 그와 포즈를 맞춰가며 익숙하게 촬영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TRIGGER의 양 날개라고 불리는 두 남자, 야오토메 가쿠와 츠나시 류노스케의 화보 촬영일이다. 컨셉은 이제까지 과장 보태 밥 먹듯 해왔던 섹시하고 어른스러운 매력의 남성미를 과시하는 컨셉이다. 이 정도로 많이 해왔으면 팬들에게도 진부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사전 설문조사에서 과반이 넘는 득표를 자랑하는 명실공히 두 사람에게 가장 기대치가 높은 컨셉이기도 했다.

“지금도 좋은데… 뭔가 더 없을까?”

“뭐가 부족하신가요?”

“아니, 두 사람은 부족하지 않아. 아주 좋게 잘하고 있어. 다만 지금까지 많이 찍어온 컨셉이잖아? 뭔가 새로운 요소가 될 만한 게 없으려나, 싶어서. 사실 촬영 전부터 계속 스태프들이랑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고민했는데 딱 이거다! 싶은 걸 발견하지 못했거든.”

“다른 모델분이랑 같이 촬영해 보는 건 어떠세요, 감독님.”

“딱히 야오토메 씨를 밤의 제왕처럼 찍고 싶진 않은데.”

“하하, 그건 감사한 말씀이네요.”

“그럼… 츠나시 씨랑 같이 찍는 건요?”

“응?”

“야오토메 씨 분명 남성 팬들도 많이 있지 않나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인기 있는 남자, TRIGGER의 센터! 이런 느낌이면 어떠실지. 그런데 저희가 따로 남성 모델을 섭외한 건 아니니까 츠나시 씨와 함께하는 건… 너무 도전적인가요?”

“……츠나시 씨한테 입힐 만한 흰색 셔츠 있어?”

“없어도 당장 구해올게요!”

앗 하는 사이에 무언가가 후루룩 지나간 것 같은 얼떨떨한 느낌도 잠시, 아까 입었던 짙은 푸른색 벨벳 셔츠가 아닌, 가쿠와 함께 촬영하는 파트너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흰색 와이셔츠를 걸친 류노스케가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류한테도 큰 사이즈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대단하잖아, 저 사람. 가쿠가 감탄한 것도 잠시, 마치 류노스케가 이 촬영에 함께하는 것을 누군가가 바랐던 것처럼 모든 상황이 찰떡같이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감독은 류노스케에게 급하게 추가된 촬영의 설명을 덧붙인다. 주 포커스는 가쿠와 현재 촬영을 함께하는 파트너인 두 사람으로 잡되, 류노스케는 신체 일부분이 겨우 나올 정도의 촬영만 진행하게 된다는 설명을. 분명 류노스케도 이 기획의 주 모델로 섭외가 된 만큼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통보가-심지어 본인이 주인공도 아닌 기획이-불만스러울 법도 한데, 그는 전혀 그런 기색 없이 가쿠를 돕기 위해서라면 자신은 뭐든 도와줄 수 있다며 순순히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가쿠 남성 팬 분들한테 인기 많으니까.”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네가 우리 중에 제일 남자 팬이 많거든.”

“그런가?”

실없는 대화도 잠시, 소파에 반쯤 몸을 기대고 누운 가쿠의 위로 상대 모델이 몸을 겹쳐 올라앉고 마지막으로 류노스케가 소파 뒤에 서서 가쿠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둔 채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자연스럽게 조금씩 다른 포즈를 취하는 가쿠와는 다르게, 류노스케는 막상 이다음에는 어디에 손을 올려두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무리 촬영이라지만 가쿠랑 이렇게까지 붙어본 적은 처음일뿐더러, 무엇보다 지금 촬영에 임하는 자신의 상황을 구태여 말하자면 ‘야오토메 가쿠를 열망하는 어떤 남자’니까… 솔직히 이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던 찰나 촬영 감독의 지시가 들어온다.

손을 좀 더 아래로, 야오토메의 어깨와 목을 끌어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인 류노스케는 조금 더 허리를 숙여 완전히 가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면서도 하필 가쿠의 셔츠 칼라가 잠김 없이 완전히 오픈된 탓에 여기서 좀만 더 내려가면 손가락이 그의 맨 가슴에 닿을 것만 같아 조마조마하다. 아무리 팀 동료라지만 대뜸 타인의 손이 닿으면 안 되는 곳이지 않나, 싶은 류노스케는 어느 틈엔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가쿠와 딱 눈이 마주쳤다.

“…미, 미안.”

“왜 사과를 하는 거야?”

“가, 가슴에 닿아서 불편했을까 봐.”

“뭐가, 네 손이?”

류노스케의 대답에 한 순간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가쿠가 먼저 류노스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아예 그의 손바닥이 자기 가슴에 완전히 닿도록 눌러주었다.

“너랑 나 사이에 이런 것쯤이야 사양할 필요 없잖아, 류.”

그보다 왜 불편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이해를 못 하겠네. 가쿠의 말에 류노스케가 멋쩍은 듯 웃어 보인다. 갑작스러운 가쿠의 행동에 당황한 것도 사실이지만 가쿠가 먼저 자신에게 허락의 뜻을 내비쳐 준 것 같아 한결 부담이 줄어든 것 같다.

“가쿠는, 역시 멋있어.”

분명 여러 사람이 자주 해주는 말인데도, 류노스케에게서 듣는 그 말이 이상하게 낯간지러운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가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뒤로 이어지는 촬영은 생각 이상으로 수월했다. 한결 긴장이 풀린 류노스케가 먼저 가쿠의 얼굴에 손을 얹거나 기꺼이 자기 허리에 팔을 두르게 하는 등 점점 더 과감해지자 이에 질세라 가쿠도 사양할 필요 없이 마음껏 포즈를 취했다.

이윽고 마지막 한 컷. 소파에 앉은 류노스케의 다리 사이로 가쿠가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 그의 어깨에 류노스케의 다리를 걸치는 식의 구도로 촬영이 진행되었다. 가쿠의 어깨 위에 두 다리를 모두 얹는 것만큼은 봐달라며 한쪽 다리를 그에게 내준 류노스케는 다시금 몰려드는 민망함과 황당함에 슬쩍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두었다. 그러자 순간 자기 허벅지를 콱, 쥐는 가쿠의 행동에, 제자리에서 펄쩍 뛴 류노스케가 필사적으로 입술을 꽉 깨문다.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는 것에 불만을 표출하듯 가쿠의 눈매가 길게 가늘어지더니 살며시 류노스케의 허벅지에 얼굴을 기댄다.

“다른 곳을 보면 안 되지. 류는 지금 나를 원해줘야 하잖아?”

“……가쿠, 솔직히 말해봐. 나 놀리는데 재미들인 거지.”

“조금.”

거짓말을 해서 무엇 하나. 순순히 본심을 실토한 가쿠가 류노스케를 향해 도발적으로 말한다.

“그러니 이번엔 네가 날 놀라게 해 봐. 류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안 될 거 같은데. 말끝을 흐리던 류노스케가 이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감독에게 다른 포즈로 바꿔 봐도 되는지를 묻자 흔쾌히 허락이 떨어진다. 가쿠, 일어나봐. 류노스케의 말에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난 가쿠는 이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기 위해 그를 향해 몸을 돌린 순간, 동시에 순식간에 강한 힘으로 자기 팔을 잡아당기는 류노스케 탓에 중심을 잃고 그대로 소파 위로 쓰러진다. 가쿠가 완전히 부딪치기 전, 그보다 먼저 그의 허리를 감싸 아주 정중하게 가쿠를 소파 위에 눕힌 류노스케가 팔을 빼내고는 슬쩍 가쿠의 위로 올라타 앉고서 천천히 그의 가슴 위로 자기 손을 내려놓는다. 찰칵 소리와 함께 터진 플래시는 덤이었다.

“좀 놀랐어?”

“……잡아먹히는 줄 알았는데.”

“하하, 뭐야 그게.”

“두 사람 다 지금 너무 좋은데 이쪽 좀 봐줄래? 그래, 그렇지. 카메라를 향해 도발적으로!”

 

 

처음 기획과는 다르게 류노스케가 가쿠의 위에 올라탄 채로 찍은 마지막 사진이 화보의 표지로 정해졌다는 소식과 함께 완성된 결과물을 아네사기를 통해 받게 된 가쿠의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변한다. 그 사진을 본 순간 촬영 당시가 떠오른 탓이다. 바짝 긴장한 류노스케의 부담감을 덜어주고 싶었던 것도, 그 김에 살짝 놀려주고 싶어서 자꾸만 장난을 친 것도 자신이 먼저 시작한 것은 틀림없다. 마지막에 어디 한번 자기를 놀라게 해보라고 유치한 도발을 건넨 것도 다, 자신이 먼저 시작한 일이다.

‘……큰일 났네.’

그러니 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촬영이 끝나도 한참 끝난 지금까지 느끼는 것도 오롯이 야오토메 가쿠, 자신의 몫이다.

‘류 녀석.’

그러니까 남자 팬이 많은 거라고.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같은 팀 멤버를 떠올리며 생각하기에는 약간은 불손한 생각을 하며 가쿠는 핸드폰으로 잡지의 표지를 찍어 그대로 류노스케에게 래빗챗을 보낸다.

[제법이잖아, 류]

그보다 이거, 세상에 내보내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을 뒤늦게 하며.


취중잡담(醉中雜談) somesing(@oneyessing)

: 저거 이미 취했네…….

 

 

친밀한 이들과의 술자리는 즐겁다. 좋아하는 술을 한두 잔 따르며 담소와 웃음을 주고받으면 자연스레 어깨에서 힘이 풀리며 한 꺼풀, 쓸데없는 짐을 내려놓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언제고 긍정적인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소중한 일상의 일부였다.

그리고 류노스케에게 있어서 가장 편한 술자리라 하면 역시 가쿠와 마주 앉아 단둘이 잔을 기울이는 날이었다. 최근 친해진 야마토나 미츠키와의 자리도 즐겁지만, 수년을 같은 그룹으로서 동고동락해 온 상대이기에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했기에.

간만에 그런 가쿠와 둘이서 술을 마실 기회가 생겼다. 소소한 잡담과 함께 안주가 들어가고 술이 넘어갔다.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르며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연스레 자신의 잔을 채우려는 류노스케의 손을 턱 붙잡는 손이 있었다. 희고 긴 손가락에서 시선을 들자 미간을 찌푸린 가쿠의 얼굴이 보였다.

“적당히 마셔. 그러다 또 몸 못 가누면 고생하는 건 나라고.”

걱정 가득한 타박에 류노스케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 정도로 취했을 때는 가쿠 자신이 책임지고 데려가는 걸 너무 당연하게 전제로 하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마냥 해맑은 류노스케의 반응이 영 못마땅했는지, 가쿠는 툴툴거리는 소리부터 냈다.

“웃음이 나오냐? 지금 너만 한 장정 데리고 돌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니까 그러는 거다, 너.”

“아니, 그야 무리하지 않고 맨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좋겠지만……. 그렇게 말해도, 가쿠는 나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기진 않잖아.”

류노스케는 안다. 일전 단체로 가진 술자리에서, 돕겠다는 목소리를 한사코 거절하고 끝까지 혼자 류노스케를 짊어지고 돌아온 것 역시 가쿠였음을. 취했을 때는 자주 필름이 끊기곤 하는데, 웬일인지 그날 끝까지 혼자서 자신을 데리고 귀가하던 가쿠만은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단 1초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이 돌아왔다.

“당연하지.”

자연히 또 류노스케의 웃음보가 터졌다. 안타깝게도 가쿠가 ‘저거 이미 취했네…….’ 하고 걱정하는 목소리는 그에게 잘 들리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말하는 가쿠도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지만…….

“가쿠의 그런 면을 정말 좋아해.”

쾅!

큰 소리가 나서 보니, 가쿠가 있는 힘껏 말아 쥔 주먹을 잘게 떨고 있었다. 짧게 욕설을 중얼거린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평생 소중히 할게…….”

“응!”

망설임 없는 맑은 대답에 또 가쿠가 뜻 모를 소리를 몇 번 뇌까렸다. 그런 가쿠를 보며 류노스케는 또 웃었다.

류노스케의 필름이 절묘하게 끊긴 덕에, 가쿠만이 떠안고 갈 기억이 된 대화였다.


밤안개 푼수대공(@GAKUcrow8)

: 바다는 언제나 츠나시 류노스케에게 소중했다.

 

몰아치던 스케줄을 쳐내고 겨우 숨을 돌릴 땐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며칠 전부터 빡빡히 짜인 일정이라 어지간한 체력을 지닌 이들이라도 자주 가는 카페의 구석에 들어가자마자 몸을 구겨 넣어 앉기 바빴다. 신경이 느슨해질 즈음 불리는 주문 번호에 가쿠는 손을 들어 막 일어서려는 류노스케를 말렸다.

“넌 쉬고있어. 내가 갈게.”

“아. 미안, 고마워.”

트레이 위로 놓인 머그 안에서 새카만 수면이 찰랑였다. 씁쓸한 향을 풍기는 커피 두 잔만큼 답지 않게 지쳐 보이는 류노스케의 눈빛이 낯설었다. 주문을 넣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오늘은 평소 즐기던 차를 마다할 정도로 피곤한 모양이었다.

“뜨거워. 조심해서 마셔.”

“응. 고마워, 가쿠.”

한 박자 늦게 감사 인사를 더 보탠 류노스케는 양손으로 머그잔을 감싸 쥐어 들었다. 느긋한 목 넘김을 따라 이따금 팔랑이는 눈꺼풀이 금방이라도 감길 기세라 가쿠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가쿠?”

이마를 짚어보느라 가려진 시야 사이로 금빛 눈이 동그랗게 뜨인 채 시선을 맞춰왔다. 다행히 적당히 온기를 담은 체온을 봐선 건강 문제는 아닌 듯했다. 기분 쪽이라면 알콜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테지만. 가쿠는 쉬운 방법을 두고 좀 더 머리를 굴리고픈 충동이 들었다.

“바다… 갈까? 내가 운전할게. 한 바퀴 돌고 오는 거 어때?”

“아… 피곤할 텐데, 괜찮겠어?”

충동을 못 이겨 불쑥 건넨 한마디는 효과가 꽤 좋아서 배려심으로도 채 숨기지 못한 류노스케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문제없어. 내가 가고 싶은 거야.”

류노스케가 스스로를 꺾을까 싶어 가쿠는 서둘러 쐐기를 박았다. 도심 속에선 바다를 보러 가는 일조차 여의찮은 법이었다.

그리고 바다는 언제나 츠나시 류노스케에게 소중했다.

 

 

눈이라도 조금 붙이라고 켜둔 히터가 무색하게 텅텅 빈 심야의 도로를 타고 두 사람은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늘은 안개가 꼈네.”

차에서 내려 멀리 바다를 내다보던 류노스케는 간단한 감상을 남겼다. 나직한 어조에 실린 것이 아쉬움도 원망도 아닌 담백한 기쁨이란 건 누구보다 잘 알아채는 가쿠였으나 어쩐지 잘못 내린 커피를 들이민 마냥 멋쩍은 느낌이 들었다.

“아아, 벌써 짙어졌군.”

괜히 목에 두른 머플러를 잡아채던 가쿠는 시선을 느끼곤 류노스케를 돌아보았다.

“왜?”

“으음…. 가쿠는 추위를 엄청나게 탈 거 같은데 의외로 무던하단 말이지.”

아직 옅게 열이 남은 테이크 아웃 잔을 쥔 류노스케가 가쿠를 향해 웃었다. 축축하게 내려앉는 해무가 가로등 빛에 빛나며 류노스케의 뒤에서 일렁거렸다. 언젠가 촬영차 찾아간 따스한 남쪽 바다에서 피어났던 것과는 다르게 이곳의 안개는 잘금잘금 사람을 삼키듯 다가왔다. 그 바다 앞에선 언제나 에너지로 가득 차 빛나던 류노스케마저도 녹아들까 싶었으나 한편으로, 가쿠는 고요한 이 도시의 풍경을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선호해온 자신을 깨달았다. 너를 얽매고 뭍으로 끌어내 말리는 도시를 마음에 두는 일이 기껍다 솔직하게 말하여도 츠나시 류노스케는 작은 불호조차 내놓지 않을 이였다. 가쿠는 목까지 차오르는 속내를 겨우 삼켰다. 직전 들어온 이야기의 주제 덕분에 다른 말을 늘어놓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다.

“허술해 보이는 하드웨어는 그 녀석에게 물려받은 탓이다. 내실은 내가 다시 쌓았지만 아무래도 생김새까지 해결할 순 없었어.”

“아아, 또 그렇게 짓궂은 말 만하고.”

“사실일 뿐이지.”

야오토메가 물려준 것이 비단 외양뿐이겠는가. 자신도 결국 그의 자식이기에 탁한 마음의 농도조차 닮아있는지에 관한 생각을 흩어버린 가쿠는 간신히 자기 목에 매달려 있는 머플러를 잡아채며 난처한 듯 웃는 류노스케를 손짓으로 불렀다. 커다란 신체가 온순하게 굽혀오는 모습이 은연중에 마음에 들었다. 머플러를 넓게 펼쳐 머리 위로 씌우자 순한 눈빛에 의문이 더해졌다. 가쿠는 평소처럼 함께 온더록스를 부어 넣으러 가지 않은 자신의 선택에 긍정했다. 알콜은 브레이크를 날려버리기 쉽다. 크게 힘주지 않아도 부드럽게 뒷 목을 쓸어내린 손을 따라 류노스케의 얼굴이 다가왔다.

“류, 술도 바다도 부족하겠지만 오늘은 이걸로 충전해. 다음 스케줄도 생각해야 하니까.”

맞닿은 입술 위로 속삭이던 가쿠는 고개를 기울여 깊이 입을 맞추어 류노스케의 대답을 머금었다. 도시가 빼앗아 가는 것이 있다면 자신이 채워주면 그만인 것을.

미미하게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팔남님의 가쿠류 배포본 발간을 축하드려요★★★ <(*^▽^*)/

푼수대공 드림


셋째여자 (@sadnanagirl)


망토 (@rabbit_Frau)


후기

안녕하세요, 팔남입니다! 이렇게 어나스테에 가쿠류 회지를 낼 수 있게 되어 영광이네요. 무사히 마감을 해냈다는 것도 기쁘구요. 짱~!

국내 첫 가쿠류 회지는 아니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그동안 국내에 나온 가쿠류 회지들을 제가 다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 너무 가슴 아프네요. 진짜) 그래도 이렇게 가쿠류 회지 역사에 한 권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뿌듯합니다.

아니 근데. 축전 진짜. 최고. 아닌가요?! 이 사람들이 다 가쿠류 개인지를 내야 하는데? 진심으로? 나 너무 감동이야… 배포본에 이렇게 대단한 분들의 축전을 실을 수 있다니… 팔남 인생 헛살지 않았다. 잘 살았다. 다시 한번 축전을 주신 모든 지인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재밌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혹시 책을 읽고 감상을 남겨주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트위터 @8910_i7 으로 찾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요는 아니에요. 그럴 생각이 있으시다면! 부디! 라는 뜻.

감사합니다. 또 다른 곳에서 가쿠류 회지로 찾아뵙게 되면 좋겠네요. 8월에 나올 가쿠류 듀엣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팔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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