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모모] 밴드 if. 上
모모가 다리를 다친 시간 선까지 리바레(밴드)가 이어졌다면, 시공의 뒤틀림을 크게 신경 쓰지 말고 봐주세요.
※ 시공의 뒤틀림을 크게 신경 쓰지 말고 봐주세요.
※ 후편은, 내킬 때 이을 예정
내가 두 사람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돈이 많아서 두 사람을 후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학생의 신분으로는 사회에서 발 편히 펼 자리도 없고 밴드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 않다. 그래도 돕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가지도 않던 도서관을 드나들며 음악 관련 책과 잡지를 보고 라디오나 음악 방송으로 공부하면서 부모님을 설득했다. 모아둔 알바비의 대부분을 털어 마련한 악기는 방 안을 크게 잡아먹은 만큼 어떠한 업적을 이루어낸 것만 같아 뿌듯했다. 부풀어오른 가슴을 그대로 가지고 당차게 옮긴 발은 스태프가 드나드는 문앞에서 한 번 멈추었다가 리바레의 대기실에서 다시 한 번 멈추었다. 스태프로 몇 번이나 드나든 곳인데 처음 찾았을 때 만큼이나 들어가기 어려웠다. 티셔츠 끄트머리를 매만지다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떼기를 반복하는데 안쪽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오는터라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 쪽에서 윤기가 나는 은발과 쪽색이 두드러지는 흑발의 두 사람이 날선 공기 속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어 앞도 뒤도 모른채 무작정 사이로 끼어들어 주머니에 있던 꼬깃한 종이를 펴들었다.
“저, 밴드에 가입하고 싶어서 오, 왔습니다!!!”
“모모군이!?”
“모모군이?”
놀란 목소리가 완벽하게 겹쳤다. 과연 끈끈한 인연만큼이나 호흡이 척척맞는 둘이다. 서로를 노려보던 두 쌍이 모모의 얼굴과 종이를 번갈아보아 모모는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아까 전보다 훨 작은 목소리로 긍정했다. 금방까지 솟아난 용기는 둘의 미모 앞에 불씨까지 다 날아가버린지 오래. 모모가 엉성하지만 힘있는 손으로 허리춤에 끼워두었던 드럼 스틱을 꼭 쥐어 둘에게 보여주었다.
“드럼으로 가능할까요!”
“설마 모모군이 밴드를 같이 해줄 줄은 몰랐는데…… 모모군 이녀석 때문에 또 멤버를 찾아야 해서 곤란했으니까 대환영인데 괜찮겠어? 팬의 시선으로는 멋져보였더라도 같은 멤버로 유키는 엄청 귀찮고 성가신데 예민하기까지한 팀원인데.”
“너 말이 너무 심하지 않아?”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그, 게. 오히려 저 같은 초짜가 두 분과 음악을 같이 한다니 원래라면 당치도 않은 일이고… 분명 많은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밴드. 하고 싶어요.”
둘을 관객석에서 올려다본지 약 2년. 라이브하우스에서 종종 도우미로 불려 스태프로 조금 더 교류라고 부를 만한 대화를 나누게 된지는 약 수개월. 오래된 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둘은 모모에게 아주 값진 인연이다. 모든 시간을 쏟아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축구의 길이 끊긴 모모에게 찾아 온 새로운 활력소. 목적. 만남은 우연이라도 일개의 팬이 이렇게 둘에게 인식받고 대화를 주고받을 사이로 발전 한 것을 감히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운명을 만들어 준 것이 둘이고, 유키다. 유키가 그 날 내민 티켓, 유키가 몇날며칠을 전전긍긍하여 만든 음악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아니, 기쁘게 내어주었다.
“반 말대로, 아무리 모모군이라도 음악에 방해가 되면 책 할거고 욕도 할 거야. 괜찮겠어?”
“본인 앞에서 당당히 할 소리는 아닌데.”
“많이, 많이 연습할게요.”
“......그래. 그럼, 해보자.”
유키가 손을 뻗어 꾸깃꾸깃한 밴드 입부 희망서를 받아 반에게 떠밀었다. 반은 테이블에 굴러다니던 빨간 펜을 집어 자신의 이름을 모모의 이름 아래에 적었다.
“사실 이런 서류받는 일은 잘 없는데 나쁘지 않네. 하려는 의지도 보이고. 잘 부탁해. 모모군.”
“스틱을 가지고 있는 거면, 드럼도 산 거지? 나중에 여기로 가져와.”
“네!”
그렇게 모모는 리바레의 고정 멤버가 되었다. 밴드 악기는 커녕, 멜로디언 하나 제대로 연주해본 적 없는 생초짜가, 한창 물 오르고 있는 인기 밴드로.
*
잘 될리가 없었다. 매일같이 된통 깨지고 있다!
존경하는 반의 말로는 실력이나 센스가 전혀 없는 건 아닌데 경험이나 전달력이 너무 없다고 한다. 드럼은 분명 ‘음’을 연주하는 게 아니라 곡의 박자와 리듬감을 전하는 역할이라지만, 그래도 역시 하나의 ‘음’이고, 박자란 곡의 중심이기에 타이밍과 표현력이 중요했다. 이런 류의 감각은 경험에서 오는 것이라 모모는 매 연습마다 유키의 화통소리를 들어야 했다. 세게 두드리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드럼을 잡은 거라면 큰 오산이야. 그런 얕은 생각으로 악기를 다루려는 거라면 그만두지 그래? 드럼의 소리가 흐리고 불투명하면 다른 연주가 아무리 좋아도 음악이 초점을 잃어. 이제까지 내 연주를 어떻게 들어 온 거야? 모모, 너 할 생각이 있기는 해? 치켜올라간 눈초리가 마치 금방 숫돌로 정돈한 날붙이와 같아 모모는 늘 연습할 때마다 가슴이 쿵쾅쿵쾅거렸다. 긴장 때문에 그랬고, 불안해서 그랬고, 설레어서 그랬다.
유키는 역시 그 누구보다 매순간 순간을 모두 음악에 쏟아붓는 사람이었다. 관객석에서 올려다 볼 때 그러했듯, 무대를 함께 꾸리는 스태프의 입장에서 대기실에서 기타를 조율하거나 연습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아왔듯. 그런 유키와 반과 하는 연습은 불길 속에서의 극기훈련과 같았다. 아직 초짜인데 어쩔 수 없잖아요!? 같은 발언은 해선 안되었고, 하고 싶지 않았다. 해내고 싶었으니까. 초짜라는 타이틀에 가두어 둘의 진보를 늦추는 게 유일한 공포여서, 차라리 혼나는 게 백 배, 천 배 더 나았다.
존경하는 유키에게 쓴소리를 듣는 것은 분명 가슴이 찔끔찔끔 아파오고 절로 눈물이 맺히는 슬픈 일이지만, 애초에 상하관계가 분명하고 경쟁을 부추기는 필드 안에서 살아 온 모모다. 유키보다 심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제와 마음 꺾일리가 없다. 그래서 모모는 부지런하게 연습에서 혼난 부분을 밤낮으로 연습해 고쳐오기를 반복했다.
“필인은 구간이 바뀔 때나 드럼 테크닉을 보여주기 위해 중간중간에 보여주는 것으로 분위기를 한 층 더 고조시켜주고 웅장한 소리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일종의 애드립입니다. 으음… 저번에 봤던 영상이 이건가. 그치만, 유키씨랑 반씨의 노래에 함부로 애드립을 넣는 건 좀…”
“괜찮지 않아?”
“히악!?”
“왁!”
꼬부랑 글씨로 정리한 드러머의 기술을 정리한 노트를 곱씹던 중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도쿄에서 1시간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가마쿠라에 위치한 라이브하우스는 도심보다는 이용객이 적은 덕에 가게 매출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는 리바레에게 주로 장소 제공, 악기 보관 등 많은 편의를 봐주고 있다. 반 씨가 드물게 싹싹하고 호감 사기 좋은 타입의 밴드맨인 덕도 있고. 아무튼 본가나 대학에서 다소 떨어진 거리에 있는 탓에 모모는 연습이 있을 때면 연습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가마쿠라로 건너 와 먼저 연습하거나 드러머의 자세, 기술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중 반이 평소보다 이르게 도착해 A4 사이즈의 노트를 붙잡고 달달 암기하는 고시생처럼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말을 걸어온 것이고.
“미안, 미안. 모모군이 빨리 연습실에 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오고 있었구나. 지금 읽고 있던 건 필인(Fill in)이잖아. 분위기 돋구는 데 제격이고 무엇보다 음악을 신나게 해주니까. 해보는 게 어때?”
“그건… 유키 씨와 반 씨가 기껏 머리를 모아 힘들게 만든 음악인데 제가 멋대로 상의도 없이 소리를 집어넣을 수는 없어요!”
“에에~ 음, 그럼 내 곡에만 해보면? 난 곡을 만든 당사자인데 내가 허락했잖아. 모모군이 내 곡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면 좋겠어. 어때?”
“윽. 그… 제가요?”
“응. 상의가 없는 게 문제라면 나랑 상의를 하면 그만이지. 오늘은 연습이 끝나고 잠시 더 나랑 연습해볼까? 시간 괜찮아?”
“헉. 네, 네! 가족한테 연락할게요!”
모모가 허둥지둥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바쁘게 액정을 두드렸다. 자판치는 속도가 놀랄만큼 경쾌하고 재빠르다. 이런 걸 보면 역시 소질이 있다니까. 반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 모모가 꽉 쥐고 있던 노트를 훔쳐 보았다. 팔을 안으로 굽혀봐도 도저히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글씨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담긴 정성이 보인다. 연습 시간에 쓰는 모습은 보지 못했으니까 분명 혼자 있는 시간이나 집에 돌아가서 조사하고 연습에서 꾸중들었던 내용을 하나하나 손으로 써내렸겠지. 노력하는 손과 발은 아름답다더니 딱 그짝이다.
“유키한테는 비밀로 연습할까?”
“어…”
“나랑하는 비밀인데 좋지 않아?”
“좋아요!!!”
“뭐가 좋은데?”
타이밍이 나쁜건지 딱 맞는 타이밍인지 모르게 유키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 시간보다 빠르게 온 걸 보면 곡 만들기는 순조로운 모양이다.
사람이 모였으니 연습은 바로 시작되었다. 수 차례의 의논 끝에 키보드는 유키가 녹음한 파일을 재생하기로 한 만큼 인원은 늘 셋으로 고정한 상태다. 그만큼 두 사람 분량으로 분배되었을 화가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지만, 모모는 스네어나 페달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한이 있어도 바깥으로 뛰쳐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모모의 눈물에 강아지의 꼬리라도 밟아버린 것처럼 잔뜩 굳어 말문이 막혔던 유키도 이제는 점차 익숙해져 잠깐 움찔거리기만 할뿐 쏘아붙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나가떨어지면 후회할 게 눈에 보이는 데도.
모모는 처음에 비해 놀랄 만큼 발전했다. 힘으로만 내려치는 탓에 둔탁하던 스트로크도 이제는 손목의 스냅을 살려 깔끔한 스트로크를 만들어 내고 있다. 리듬이 빨라지면 원곡에 맞지 않는 엇박자를 내는 버릇도, 흥에 올라 페달을 세게 밟아버리는 버릇도 사그라들어 음악에 맞추어 강약을 조절한다. 드러머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삼박자의 신호와 함께 기타가 선두를 치고 심벌을 가볍게 튕기는 소리, 스네어와 베이스 드럼의 규칙적인 템포가 박자를 알린다. 단순히 박자에 맞춰 치면 그만일 뿐인 연주가 아니라 음악에 맞는 유연한 연주. 그러면서도 투명한 음을 내는 힘있는 소리. 밴드에서 가장 많은 주장을 하는 소리가 기타라면 가장 많은 말을 하는 소리는 드럼이다. 라이브 하우스에 정적을 가져다 주지 않게 하는 게 역할인 만큼 소리가 비어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다른 음을 헤칠 만큼 시끄러워서도 강해서도 안 된다. 너무 정석적인 연주이지만, 실수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반이 마무리로 피크로 현을 길게 뜯어 크고 긴 소리를 내었다. 동시에 심벌이 큰 소리를 내고 스네어를 더블 스트로크. 잔음을 손으로 잡아냄과 동시에 재생되던 키보드가 끊겨 앰플의 잔진동만 남는다.
“이번 연주─”
“모모의 소리가 전혀 없어.”
“네?”
날선 목소리에 굽어있던 등이 반듯하게 세워졌다. 소리나 여운에 먹혀 있던 눈도 또렷함을 되찾고 드럼보다 무대의 끄트머리에 가깝게 있는 기타의 한 쪽, 유키를 보았다. 유키는 화가 났다기 보다는 어쩐지… 불쾌해보였다.
“실수는 없었어. 실수가 없었을 뿐인 알맹이 없는 연주였다고. 그게 녹음한 파일을 그대로 트는 것과 뭐가 달라?”
“알맹이가 없는 연주…”
“너랑 같이 연주를 하고 있는데. 네가 전혀 없어. 그럴거면 뭐하러 같이 무대에 서는데? 멤버가 문제라면 모모의 드럼을 녹음해서 우리 둘만 무대에 올라가면 그만이야.”
“야.”
“무대에 오를 정도는 됐다고 생각해. 다만, 이런 연주라면 계속 같이 하고 싶지 않아.”
“......”
“왜, 이번엔 고쳐 보겠다고 안 해?”
“고쳐… 볼게요.”
“뭐가 문제인지는 알아?”
“그게……”
모모는 의외로 울지 않았다. 이번에도 눈물샘이 터지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뒤돌아 보았을 때 모모는 단지 곤란해보였다. 그 뿐이다. 슬프다거나, 속상하다거나, 분하다거나 그런 부류는 일절 없이 유키를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유키도 그걸 보았는지 성을 내다가 결국 자기가 먼저 기타를 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연습을 할 만큼 하고 화내고 나가는 것만큼은 음악에 진심이라 다행이면서 음악에 진심이라 이 사달이 난 터라 한숨만 나온다.
“아, 죄송해요.”
“아니. 모모군이 사과할 일이 아닌 걸. 오히려 오늘은 실수도 없었고 소리도 깔끔했어. 노력한 보람이 있네.”
“네, 감사합니다.”
애써 웃는 모습에는 팬이었을 때의 활기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요 근래의 모모는 실력을 높이는 것에만 집중해 문제집이나 시한 폭탄을 해제하는 도면을 보듯 유키나 반이 만든 노래를 노려보았다. 과연, 속이 상할 만도 하지. 그렇다고 영문도 모른 채 알을 깨고 나와 바둥바둥 열심히 노력하는 병아리한테 쏘아 붙일 일도 아니지만. 기특하고 안쓰러워 머리를 쓰다듬어 보자 복슬복슬한 감촉이 포메라니안이나 말티즈같은 강아지라도 쓰다듬는 기분이 들었다.
“음…… 모모군. 유키도 갔겠다. 아까 말한 연습, 바로 할까?”
“아, 네!”
“모모군이 내 노래를 더 돋보이게 꾸며줘. 모모군이라면 할 수 있을 테니까.”
“더 돋보이게요?”
“응. 글씨가 잘 보이게 형광펜으로 테두리를 치거나 줄을 긋는 것처럼.”
표현을 안 하려고 할 뿐이지 모모는 본래 감정을 전달하는 게 능한 아이다. 그걸 모모가 먼저 증명해 보였기에 안달이 나는 거다. 그런 반도 모모가 담긴 연주가 듣고 싶어서 이렇게 꼬시듯 그를 부추기고 있다. 기껏 셋이서 연주하는데 나와 유키만이 담긴 음악이라니 얼마나 섭섭한가. 기반부터가 음악인이 아닌 모모에게는 생소해도 이건 일종의 프라이드 문제였다. 작곡은 물론 작곡자가 혼신을 다해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그건 연주자도 자신의 혼을 담아 그 곡을 연주해주기 바라서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음악이 완성되니까.
“마음껏 날뛰어줘.”
*
필드의 바깥까지 전해져 오는 열기가 거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열기 속에서 그보다 더 많은 열을 내면서 잔디밭을 가로질렀는데 이제는 그어진 사각의 틀 바깥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걸로 만족해야 하는 현실이 온도로 하여금 존재감을 확실히 하는 게 끔찍했다. 기억도 안 나는 시절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발에 닿았던 인생이다. 그 길이 맥없이 끊겨 발에 상처만 남았을 때에도 여전히 내게 길은 남아 새로운 길을 골라야 했다.
억울하다고 주저 앉아 엉엉 울고 싶은데 친구와 가족, 친척이 위로하며 말했다. 누구한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그게 너에게도 찾아 왔을 뿐이라고. 넌 분명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무책임한 말인데 그게 어설픈 상냥함임을 알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모두가 크고 작은 불행을 맞이하는 가운데 나는 이제 겨우 한 번 큰 불행이 찾아왔을 뿐이라고 깨달아 버려서. 그래도 속상한 마음을 스스로 풀어내지 못해 주변에 폐를 끼쳤다. 그게 더 마음을 아프게 해서 결국 바깥으로 도망치듯 나와 정처없이 걸음을 옮겼다. 산 정상에 올라보기도 하고 자전거 하나로 타지에 가보기도 하고. 그러다 발 디딘 곳은 바다와 맞닿아 있었다. 전철에서 내리기만 해도 소금기 묻은 냄새가 코를 스치는 비교적 한적한 곳. 역에서 나와 목적지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다 불쑥 눈 앞으로 종이가 내밀어졌다.
“어, 라이브 티켓?”
“1,500엔. 또, 뭐랬지. 드링크료가 500엔 붙어.”
“아. 그런가요? 어, 음. 언제 하는데요?”
리바레라고만 적힌 밋밋한 티켓을 보다 고개를 들어올리자 엄청난 미모가 눈 앞에 있었다. 겨울처럼 차가운 색이지만 어딘가 부드럽게 느껴지는 부드러운 머리칼에 해안가를 걸으면서 보았던 바다보다 맑은 색의 눈. 잡티하나 없는 피부에는 유독 인상적으로 비춰지는 눈물점 하나만 콕 찍어 있어 미모가 훨씬 돋보였다. 그러니까, 종합적인 미인이었다. 목소리도 미성. 살짝 훑은 전신은 비율까지 완벽했다. 모델인가? 아니, 알바생인가 티켓을 팔고 있는 것 같고. 저 얼굴이면 아무나 다 사갈 텐데.
“저기요…”
“응?”
“이걸 저한테 주셔도 되는 거예요? 저 말고도 어, 라이브?를 보고 싶은 사람이 많을 텐데.”
“반이 내 할당량이라고 떠넘겼어. 너무하지 않아? 그래도 그게 마지막이니까 너만 사면 난 다시 연습하러 갈 수 있어.”
그러니까 사라는 건가? 티켓을 파는 입장인데 상당히 태도가 거만한 사람이다. 자기 할 말만 하는 것도 그렇고. 머뭇거리고 있자 시선이 느껴진다. 거절하면 네가 감히 뭔데, 같은 발언이 나오는 걸까.
“......노래는 좋아. 장담해. 열심히 만들었으니까.”
미간을 팍 구기면서도 목소리에는 노래에 대한 자신감이 꽉 들어차있다.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워서 쥐어진 티켓이 구겨지지 않을 만큼만 주먹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노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는 가진 미모 이상으로 반짝임을 발했다.
“갈래요.”
“그래. 장소는 거기 적혀 있고 2시간 후야.”
“네.”
“1,500엔.”
“잠시만요.”
바짓주머니에 있던 단지갑을 꺼내 1,000엔짜리 지폐랑 500엔 동전을 꺼내주었다. 돈을 다 받은 그는 볼 일 다 보았다는 듯 인사도 없이 길을 가버렸다. 연습을 하고 싶어 했으니까 곧장 라이브 하우스로 갔으려나. 모모가 조심했어도 조금 구겨져버린 티켓의 뒷면에서 장소를 찾아 휴대전화에 있는 지도에 그대로 입력했다. 그가 속한 ‘Re:vale’는 밴드인 모양이다.
*
그 날 눈을 따갑게 하던 조명 빛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협소한 회장을 반도 채우지 못한 공간은 공연자가 공연을 시작함에 따라 열기로 가득해졌다. 소리를 지르는 것도 잔뜩 뛰고 박수친 탓에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낼 생각조차 못한 채 이 순간을 생생히 간직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눈을 부릅뜨고 귀를 활짝 열었다. 삼각형의 플라스틱 조각과 손가락 두 어 개가 은색 현을 누르고 튕기며 생겨나는 소리가 그것이 어울려 나는 화음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몇 번의 낮밤이 지나고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 날의 노래에는 두 사람이 여실히 담겨 있었다. 그걸 혹여 비틀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사실은 죄송하다. 황송하다. 즐겁다.
리듬에 맞춰 페달을 밟으면 큼직한 크기만큼 낮고 크게 울리는 진동이 심벌의 높은 소리를 단단히 받쳐준다. 기타를 도우면서 동시에 드럼으로 외쳤다. 이 사람의 노래, 둘의 연주를 봐줘! 더 더 많이 봐줘! 드럼에는 입이 달리지 않았고 나는 회장을 빽빽히 채울 만큼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는 힘들지만, 그럼에도 드럼으로 나는 노래할 수 있다. 노래하면 전할 수 있어. 유키 씨가 그렇게 말했고, 반 씨가 마음껏 노래 해달라고 했다.
그럼 어떡해. 노래할 수밖에 없잖아!
끼이이잉ㅡㅡㅡㅡㅡ
심벌의 가장자리를 세차게 내려침과 동시에 기타의 현이 길게 울렸다. 평소 이상으로 스틱을 휘두르고 평소 이상으로 몰두한 탓에 달아오른 숨을 고르기 바빴는데 한 뼘 떨어진 곳에서 무시무시한 시선이 뺨을 찌르고 세 뼘 떨어진 곳에서 어마어마한 함성이 들려왔다. 이제까지 들어왔던 소리 중에서 가장 우렁차다. 반 씨도 숨을 고르고 있었는지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 곧 마이크를 잡았다.
“최고의 연주였어! 모두도 그렇지?”
“ㅡㅡㅡ!!!”
“아하, 아하하! 고마워! 신곡을 이렇게 근사하게 선보이게 될 줄은 몰랐어. 아니, 예상은 했는데 훨씬 대단해. 들어줘서 고마워! 3인조 밴드 ‘Re:vale’였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반, 너…”
“워, 워. 대기실로 가자. 다음 순번한테 바톤 터치는 해야지.”
대기실 문이 닫히자마자 유키가 반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워낙 몸이 길쭉하고 뼈대가 얇아 연약하게 보여도 기타와 기자재를 들고 나를 만큼은 힘을 갖추고 있다. 무대에서 대차게 뽑아낸 성취감이나 에너지, 열기를 끝에서 모두 화로 승화시킨 시선이 파랗게 이글거린다.
마지막에 피로한 반이 만든 음악을 연주한 무대가 너무 좋아서 화가 나는 거다. 화를 내는 상대(파트너)를 앞에 두고도 반은 입꼬리가 씰룩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야 완전 좋았으니까!
유키의 입에 만족스러울 때까지 지지고 볶아 끌어올린 실력이다. 애초에 타고 난 것인지 센스는 좋았고 남은 건 경험과 표현하고자 하는 각오 뿐이었는데 경험이 어느 정도 충당되고 표현할 각오를 심어본 결과가 금방의 무대다. 어쩔 수 없이 다소 비어버리는 간주 구간을 채우는 드럼의 필인(Fill in). 즉슨 드러머의 독무대나 다름 없는 구간에서 모모는 존재감을 죽이지 않고 ‘음악’에 맞는 선에서 의지를 표현했다. 더 많이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쇠로 만든 판과 강하게 덧댄 천과 막대의 마찰 속에서 확실히 모습을 보였다.
무대는 최고였다. 마지막 곡은 반이 혼자 만든 곡이었다. 유키는 간간히 듣고 이것보단 반음 높이는 게 좋지 않아? 따위의 말밖에 던지지 않은, 유키의 색이 없는 반의 음악. 그걸 표현한 모모의 음악. 기타로 하여금 둘의 음악에 관여하기는 했어도 유키를 만족시키기에는 이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본디 유키는 연주 이상으로 음악을 만들어 내는 작업에 더욱 열중 하는 사람인데 이번 최고의 무대에 자신의 색을 만족스럽게 넣지 못했다는 게 분했다.
“내 음악에서는 널 표현할 수 없는데 반의 음악으로는 된다는 거야?”
유키의 기세에 밀려 옆에서 분위기를 살피고 있던 모모가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모모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해봐도 유키에게는 무대에서의 연주만이 모모의 답이다. 반의 곡에서는 ‘모모’를 드러낼 수 있어도 유키의 곡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저번에 비밀로 한 게 이거야? 모모랑 연습했어?”
“어.”
“......나가.”
“뭐?”
“나가라고! 네 곡으로 모모랑 연습해서 만족 했을 거 아니야! 연습할 거니까 나가!”
“야, 야. 오늘은 공연날이라 여기선 연습 못해.”
유키가 쥐고 있던 반의 손목을 놓고 모모의 손을 잡았다. 힉,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깡그리 무시한 채 어딘가 애처로운 시선으로 모모를 본다.
“도쿄에 괜찮은 연습실 알아?”
“아, 아아. 네. 드럼 연습 하려고 가는 곳이 있긴… 한데…”
“그래? 거기로 가자.”
그렇게 모모를 데리고 나가 버렸다. 황소떼가 목초를 휩쓸고 가버린 것처럼 삭막해진 대기실에 남은 반이 어깨를 축 내리며 닿지 않을 사과를 모모에게 전했다. 어쩌다 유키에게 잡혀서는. 아니, 스스로 잡히려 온 모모군도 모모군이지만.
[7디페/샘플] 유키모모 - 모모의 황금비
CP: 유키모모 AGE: 전연령가 TYPE: 소설
[유키모모] 밴드 if. 下
모모가 다리를 다친 시간선까지 리바레(밴드)가 이어졌다면, 시공의 뒤틀림을 크게 신경 쓰지 말고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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