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쿠류] 바다에 안겨

센티넬버스 AU | 센티넬 가쿠 x 가이드 류노스케

10plate by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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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지 못한 의식이 깊은 바다 속을 헤맨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와중에도 가라앉는 감각이 신기하게도 두렵지만은 않다. 오히려 이제는 익숙해진 기분이다. 온 몸을 감싸 안아주는 이 깊은 바다는 퍽 그 주인의 성질을 닮았다. 그 탓에 계속 이 바다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지만 애석하게도 점점 의식이 깨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좀 더, 조금만 더. 마치 5분만 더 자겠다며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오기를 부려보지만 반짝, 켜지는 전구마냥 야오토메 가쿠는 눈을 뜬다. 자신의 방이 아님에도 이제는 낯설지 않은 방, 코끝을 간지럽히는 익숙한 향기. 가쿠는 살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는 이 방의 주인이 고른 숨을 내쉬며 자고 있었다.

‘……또, 사고 쳤네.’

빌어먹을 야오토메 가쿠. 가쿠는 스스로를 욕하며 한숨을 삼킨다. 지난 밤, 의식이 없는 사이 빌어먹을 몸뚱이가 멋대로 몇 번째인지 세는 것도 포기한 ‘사고’를 저질러준 덕분에 컨디션은 최상이다. 머리를 두 쪽 낼 것 같은 두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숨을 들이켜고 내쉬는 아주 기본적인 행위마저 굉장히 상쾌하게 느껴지는 중이니 말 다했다. 가쿠는 슬쩍 몸을 모로 뉘이고는 옆에 누워 자고 있는 청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곤히 자고 있는 얼굴에서 얼핏 느껴지는 피로감에 불쑥 고개를 든 양심이 쿡쿡 쑤신다.

‘……너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야.’

가쿠는 청년이 깨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가 잠에서 깰 때까지 옆자리를 차지하기에는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그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고의 피해자이고, 범인은 변명할 여지도 없이 자신이다. 아무리 그가 자신을 담당해주고 있는 ‘가이드’라고 할지라도.

대충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하나씩 주워 입은 가쿠는 그새 그의 어깨 아래로 내려온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고는 아주 잠시, 그를 바라보며 망설인다. 하지만 망설임은 아주 잠시일 뿐 가쿠는 살며시 허리를 숙이고는 그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남긴다.

“잘 자, 류.”

그러고는 방을 떠나기까지 야오토메 가쿠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가, 류노스케가 가이드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센티넬이 아니었더라면. 말도 안 되는 가정이다. 자신이 센티넬이 아니고 그가 가이드가 아니라면 그를 만날 수나 있었을까. 아니, 적어도, 그가 ‘자신만의’ 가이드였더라면― 이 방을 떠나지 않아도 됐을까.

 


 

처음 센티넬로 각성한 것은 가쿠가 8살 때의 일이었다. 가이드인 아버지와 센티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태어나기는 평범한 아이로 태어났으나 열 살도 되지 않아 센티넬로 각성하였고, 그 어린 나이 때부터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각성자 관리 센터에서 센티넬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한 번 센티넬로 각성한 이상 지속적인 관리와 관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기까지는 2년이 걸렸다.

보통 성인이 되지 않은 센티넬의 폭주 위험 가능성은 굉장히 낮은 편이다. 신체의 성장에 맞추어 능력 또한 그에 맞게 성장하거나 혹은 태생적인 한계에 부딪혀 그 자리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가쿠는 문자 그대로 보통과는 다른 특이 케이스로 신체의 성장보다 센티넬의 능력이 지나치게 강하게 성장하여 열 살 때 처음으로 ‘폭주’라는 것을 경험하였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덕분에 가쿠는 그 날 이후로 단 하루도 멀쩡히 지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제 딴에는 걱정을 한 것이겠지만 영 이상한 쪽으로만 손을 쓰는 바람에 틈만 나면 으르렁거리기 바빴고, 이제껏 수많은 가이드를 만나보았지만 단 한명도 가쿠의 가이드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지나치게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도리어 발목을 잡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돕지 못했고, 착각 혹은 두려움 탓에 쉬이 다가오는 사람도 없어 인간관계도 퍽 좁았다.

그런 가쿠의 인생에 ‘쿠죠 텐’이라는 이름을 가진 센티넬은, 가쿠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낌 사람이었다. 그 또한 가쿠 못지않게 특이한 케이스로, 쿠죠 텐은 센티넬이자 동시에 가이드인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텐이 가이드를 할 수 있는 센티넬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뿐,-심지어 그것이 누구인지는 철저히 함구했다.-게다가 한 사람의 몸에 센티넬과 가이드의 능력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센티넬의 능력을 사용할 때 다른 센티넬보다 두 배에 가까운 피로감을 얻는다고 했다. 쉽게 말하자면 이 쪽도 폭주하기가 아주 쉽다는 뜻이다. 그 누가 감히 센터장의 아들과 존재 자체로 특수한 센티넬에게 대놓고 그렇게 말을 하겠냐마는, 가쿠는, 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계륵이지, 계륵. 가쿠도 동의하는 바였다.

‘특별 관리’를 받고 있는 센티넬은 외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센터장에 있다고 해서 제멋대로 할 수 있었느냐 하면 그야말로 어불성설. 가쿠의 부친이자 각성자 관리 센터의 센터장인 야오토메 소스케는 유독 아들에게 더욱 더 엄했다. 그 탓에 가쿠는 틈만 나면 부친과 말다툼을 하느라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던 때도 있었으니… 야오토메 부자의 사이가 지독히도 나쁘다는 것은 퍽 유명했다.

그러니 그것은 일종의 반항 심리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해야 할까. 마찬가지로 특별 관리를 받는 텐을 데리고 무작정 센터 밖으로 나간 것은. 처음에는 가쿠의 제안을 거절한 텐도 가쿠를 혼자 보내는 것보다는 함께 가는 것이 낫다는 판단 하에 그와 동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센터 밖으로 나가서 무엇을 했느냐 하면, 첫 번째로 밥을 먹었고-가쿠의 추천 메뉴로 정했다. 소바로.-두 번째로는 도넛과 파르페를 먹었다.-텐이 먹고 싶어 했다.-그 뒤로 딱히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녔고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샀다. 정말이지, 남들이라면 너무나도 평범하게 보냈을 하루를, 가쿠와 텐은 무척 특별하게 보냈다. 카페에 들르고 싶다는 텐의 말에 야외테이블을 몇 개 둔 길거리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시답잖은 말들을 주고받을 때만 해도 그랬다. 정말이지 즐겁고 특별한 하루였다고.

갑작스럽게 두 사람을 덮친 폭발음과 사람들의 비명이 없었더라면, 말이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센티넬이 벌인 짓이라는 걸. 센터에 속한 센티넬은 각종 범죄를 일으키고 다니는 센티넬을 제압하고 일반 시민의 안전을 지켜야만 하는 의무를 진다. 가쿠와 텐도 마찬가지로 센티넬에 의한 범죄를 목격했다면 그 즉시 범죄자를 제압 및 구속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 '일반적인 센티넬'이었을 때 해당하는 이야기다. ‘특별 관리’를 받는 센티넬은 그 기본적인 의무보다도 센터장의 허가 없이는 함부로 그 능력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우선해야만 한다. 어쩐다. 어떡해야 하지? 센터로 신고가 들어갔을 테니 금방 센터에서 센티넬들을 파견할 것이다. 가쿠는 센터장의 허락 없이 텐을 데리고 무단으로 센터 밖으로 나왔으니, 가장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에 의한 결정이라면 지금 바로 여기서 벗어나 센터로 돌아가야만 한다. 분명 그렇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쿠.”

텐이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텐의 의견이 맞다.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가쿠와 텐은 일반인들의 안전을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더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

“텐.”

“아니, 그게 뭐든, 하지 마.”

“내가 뭐라고 할 줄 알고?”

“나한테 그런 거 시키지 말라고. 난 너 못 죽여.”

“이거 봐, 실컷 냉정한 척 해도 여린 녀석이라니까.”

“……넌 진짜 짜증나는 남자야.”

“그런 얼굴로 말해봤자 별로 진심처럼 안 느껴지거든.”

 

 텐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말할지 바로 알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제껏 가이드를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가쿠에 비해 텐은 타인의 가이드를 아주 조금이라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다. 혹여 야오토메 가쿠가 폭주한다면, 쿠죠 텐이 막아줄 터. 설령 지금 자신의 선택이,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는다고 할지라도. 가쿠는 자신의 선택에 조금의 후회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야오토메 가쿠는 그 날, 어쩌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냈다. 도시 한복판에서 테러를 일으킨 센티넬은 아니나 다를까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파견된 센티넬이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두 손 놓고 기다려야만 했다면 대규모 참사가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센티넬이라고 해서 센터에서 그저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신 가쿠는 다른 센티넬보다 월등히 더 많은 시간을 체력 훈련과 대인 전투 훈련에 투자했다. 그 덕에 범죄자를 제압하는데 있어 솔직히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가쿠는 폭주의 전조를 보였다. 텐이 무어라 외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울컥, 하고 속에서부터 단번에 솟구친 피를 토해냈고 누군가가 계속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고 있는 것 같은 고통에 두 다리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전격계 능력을 가지고 있는 가쿠의 주변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벼락이 꽂힌다.

센티넬이 완전한 폭주를 하고 나면, 그 땐, 어떻게 되더라. 죽는 건 당연하고. 그러나 야오토메 가쿠는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할 수 없었다. 딱히 누군가를 살리고 그 대신 죽음을 맞이하는 정의의 사도 같은 인생의 결말을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이렇게 살 바에는, 뭐,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솔직히 사실이고.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빌어먹을 아버지, 좋은 말 한 번 못해봤는데.’

“정신 차려, 이 바보야!”

“……!”

“뭘 웃고 있는 거야. 정신 똑바로 차려!”

“멍, 청아, 빨리 떨어져……!”

“시끄러워!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할 수 있잖아, 할 수 있다고!”

가쿠는 그제야 텐이 자신에게 가이드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손바닥이 새카맣게 타버리면서까지, 이 세상에 단 한 명의 센티넬만 가이드를 할 수 있다 말했던 그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가쿠의 폭주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가쿠는 힘겹게 팔을 들어 텐의 어깨를 밀쳐냈다.

“……가.”

“야오토메 가쿠!”

이제, 진짜, 무리. 점차 흐려지는 의식에 가쿠는 자신의 몸이 앞으로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바닥에 부딪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 정도의 아픔은 느끼지도 못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간 순간 가쿠는 뒤늦게 누군가의 팔이 자신의 몸을 단단히 받쳐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으…….”

“괜찮아.”

처음 들어보는 낯선 목소리가 부드럽게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낯선 감각이었다. 머리를 차라리 깨부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를 괴롭히던 두통이 마법처럼 말끔하게 사라진다.

“……많이 아팠겠다. 아, 너도 이리 와줄래?”

가쿠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보는 가이드는 너무나도 평온해서―

“둘 다 이제 괜찮아.”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가쿠는 정말로 그의 말처럼 되리라는 것을 느꼈다.


 

츠나시 류노스케. 그 날, 가쿠의 목숨을 살린 장본인이자 그 날 이후로 소스케에 의해 센터로 들어오게 된 가이드의 이름이다. 그는 그 날 원래 타려고 했던 지하철을 놓치는 바람에 도보로 이동하고 있던 중 우연히 폭발 현장에 휘말리게 된 것이라 말하며 싱겁게 웃어보였다.

이렇게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가, 이 센터에 존재하는 모든 센티넬의 가이드를 맡아도 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가이드 능력을 가지고 있다니, 세 번을 들었지만 도무지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지금은 좀 어때? 괜찮아?”

“그건 우리가 해야 할 말이야.”

양 팔에 붕대를 칭칭 두르고서는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가이드는 센티넬과 다르게 신체 자체는 평범한 일반인이나 다름없던 탓에 아무리 대단한 가이드라고 해도 그 날 벼락이 내리치던 곳으로 망설임도 없이 뛰어든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 덕에 가쿠를 안아주던 양 쪽 팔에 심한 상처를 입은 류노스케는 회복계 능력을 가진 센티넬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원래라면 치료를 받은 그 순간 단숨에 나았을 부상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이드의 능력으로 그마저도 효과를 반감시켜버리는 바람에 회복 속도가 무척이나 더디다는 것이 문제지만.

“미안, 류.”

“미안할 거 없다니까.”

가쿠는 물끄러미 류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목숨을 구해준 사실에는 몇 번이나 감사인사를 해도 부족하다. 상처를 입힌 것도 미안한 일이지만 이는 언젠가 반드시 낫는다. 그러나 그 날, 류노스케가 아무도 해주지 못한 자신의 가이드를 해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원래 준비하고 있던 호텔 주방의 셰프 자리를 포기해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가이드는 반드시 센터에 상주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허나 그는 순전히 야오토메 가쿠라는 센티넬의 가이드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으로 인해 억지로 이곳에 묶이게 된 것이다.

“내가 호텔 면접을 포기한 것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센터장님이 월급도 부족하지 않게 챙겨주신다고 했으니까 정말 괜찮아. 이제 내가 두 사람의 가이드이기도 하니까 앞으로는 그 쪽에 집중하도록 하자. 앞으로 잘 부탁해. 두 사람 다.”

“응, 잘 부탁해.”

“……그래.”


첫 번째 사고는, 가쿠가 현장으로 출동하기 시작한 날 이후로 딱 닷새째에 일어났다. 류노스케라는 어마어마한 가이드도 있겠다, 이제 더 이상 가쿠가 계륵마냥 센터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이유가 전혀 없어진 셈이니 처음에는 가쿠도 나쁘게 표현하자면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쏘다녔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은 더없이 출중했고 실전에서의 상황 판단도 빠르게 할 줄 아는 그는 또 한 명의 계륵이라 불렸던 텐과 함께 현장을 휘젓고 다녔다. 티격태격하는 것 같이 보여도 워낙 합이 잘 맞았던 탓에 어지간한 범죄 현장은 가쿠와 텐, 두 명의 센티넬만으로도 상황 종료가 될 정도였으니 그 활약이 실로 대단했다.

그리고 문제의 사고가 일어난 밤, 가쿠는 분명 그날 밤 자신의 방에서 잠든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가쿠는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의 방이 아닌 류노스케의 방, 그것도 침대 위에 그와 함께 나란히 누워있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광경에 온 몸의 털을 쭈뼛 세우고는 벌떡 몸을 일으킨 가쿠는 그 탓에 스르륵 흘러내린 이불 아래 가려져있던 류노스케의 몸을 보자마자 비명을 안 지를 수가 없었다. 비명만 지르면 다행이게. 절대 침대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말, “이거 내가 그런 거야?” 까지 해버렸단다. 안 그래도 미안한 마음에 마냥 잘해주고 싶고 잘 보이고 싶은 상대에게 최저 최악의 남자가 되다니, 불행도 그런 불행이 없다.

그 때마저도, 류노스케는 괜찮다고 말했다. 아니, 내가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게 괜찮으면 안 되지, 라는 말을 가쿠는 겨우겨우 삼켜냈다. 왜냐, 야오토메 가쿠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으니까. 가쿠는 그 날 류노스케의 침대 위에서 1시간을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기계마냥 그에게 사과를 했다. 솔직히 이게 사과를 해서 될 일인가 하면,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마저도 류노스케가 가이드 행위의 일종이라는 말을 했을 때에는 정말, 머리에 벼락이 친 것 같았다.

류는, 이것도, 가이드로 쳐주는 건가? 그 자리에서 다른 녀석들과도 이런 걸 하냐고 묻지 않은 것만은 천만 다행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야오토메 가쿠는 그런 것을 물을 자격이 없었으며 만에 하나라도 류가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마음을 차마 다 정리할 틈도 없이 연이어 터진 두 번째, 세 번째 사고에 가쿠는 훈련실의 더미를 18체나 가루로 만들었다. 첫 번째는 그래, 진짜 실수라고 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세 번째까지 왔다면 그건 절대로 실수라고 할 수 없다. 가쿠는 그 즉시 의무실에 종합검진을 의뢰했다. 이 모든 일이 잠에 빠져들고 나서 벌어지는 일이라 몽유병의 가능성도 고려해서 검진을 진행하였으나 야오토메 가쿠, 몽유병 없음 판정. 검사 결과 사지 멀쩡함. 과할 정도로 튼튼함. 정신 감정 결과 이상 없음. 처음에는 류노스케도 별말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점점 가쿠가 그를 피하는 횟수가 늘어가자 눈에 띄게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류노스케의 성격 상 무언가 일이 잘못되면 그 원인을 바깥에서 찾는 게 아닌 자신에게서부터 찾기 시작할 게 분명하니 그 전에 이 짓을 그만두긴 해야함이 분명한데. 문제는, 뭐가 어찌됐든 자신의 존재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자각해가고 있는 이 감정이, 지나칠 정도로 일방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야오토메 가쿠는 앞으로 어떻게 하기로 했는가. 필사적으로 츠나시 류노스케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센티넬이라는 입장 상 아예 그를 만나지 않을 수는 없으니 딱 최소한의, 필요한 정도로만 가이드를 받고 그 이후에는 류노스케의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텐은 덤이었다.

이미 야오토메 가쿠는 츠나시 류노스케에게 평생이 지나도 갚을 수 없는 빚이 있다. 억지로 이곳에 묶어둔 걸로 모자라 제 감정으로, 제 욕심으로 이 이상을 원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 자체에 스스로에게 견딜 수 없어질 때가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잠에 빠진 이후 무의식적으로 류노스케를 찾는 것이, 너무나도 센티넬의 본능에 의한 행동이란 점에서 더더욱 류노스케를 볼 면목이 없어지는 것이다. 결론을 내리기까지 헛발질도 많이 하긴 했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정의내릴 수 있다. 가쿠는 그저 센티넬이기 때문에 류노스케라는 가이드를 찾고 싶은 게 아니다. 류노스케와의 행위가 단순히 가이드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 못마땅하다.

꼴사납다. 천하의 야오토메 가쿠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조건 행동으로 보여줘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 야오토메 가쿠가. 이러니 텐한테 놀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됐다, 잠이나 자자. 일찍 침대에 눕기 위해 준비를 하던 가쿠를 일으킨 것은 가볍게, 그러나 정중하게 울린 노크소리였다.

“가쿠, 자?”

“……류?”

“아직 안 자면,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침대에서부터 방 문 앞에 도착하기까지 야오토메 가쿠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신이 멀쩡한 상태로 밤에 류노스케와 한 방에 있는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새삼 목이 타는 것만 같다. 정작 할 말이 있다며 방 안으로 들어온 류노스케가 고집스럽게 침묵을 고수하고 있어서 그럴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너를 피한 건, 너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머리를 팽팽 굴리고 있던 가쿠는 불쑥 눈앞으로 다가온 류노스케를 보며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류…?”

“내가, 뭐 실수한 게 있을까?”

“…….”

“내가 싫어진 거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치만, 가쿠가, 밤에도 오지 않으니까…….”

“뭐?”

“이제 난 필요 없는 걸까? 하고…….”

갑작스러운 류노스케의 말에 가쿠의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싫어져? 필요가 없어?

“웃기지마, 그 반대라고!”

“뭐?”

“……아…….”

그러니까, 왜 이 녀석 앞에서는 이렇게 한심해지는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가쿠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양 팔로 쥐어 싸는 가쿠를 보며 류노스케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가쿠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갠다. 아마도 자신에게 두통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거겠지. 봐, 류. 너는 이럴 때마저도 나를 더 신경 쓰잖아.

“류노스케.”

“……어?”

“나는 네가 필요해. 내가 널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 내가 센티넬이라서가 아니라, 야오토메 가쿠에게 츠나시 류노스케가 필요해.”

자연스럽게 류노스케의 팔을 잡아 이끈 가쿠는 그대로 그의 몸을 자신의 다리 위에 앉히고는 있는 힘껏 양팔로 끌어안았다.

“네가 다른 녀석들 가이드 해주는 것도 솔직히 싫어. 가이드를 못 받는 센티넬이 얼마나 괴로운지 아니까 참아주는 거야. 그보다 넌 위기감을 가질 필요가 있어. 가이드해주겠다고 몸까지 허락해? 그것도 밤에 제정신이 아닌 채로 찾아온 남자를?”

“저기, 가쿠.”

“왜.”

“가쿠가 생각하는 것만큼 난 좋은 사람이 아니야.”

“뭐?”

“……가쿠니까, 허락한 거지.”

순식간에 가쿠가 몸을 돌려 내동댕이치듯 류노스케의 몸을 침대 위로 밀어붙였다. 우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자신이 생각해도 멋없는 목소리를 냈다는 생각을 하며 가쿠를 올려다 본 류노스케는 순간 마주친 가쿠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너, 지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거 맞아?”

“…응, 알아.”

“류, 난 네 생각보다 멋대가리 없는 남자야.”

“그런가?”

“진짜로 네가 다른 센티넬 가이드 해주는 것도 못 견딜걸.”

“잘 설득해보자, 너희 아버지.”

“―하.”

짧게 코웃음을 터트린 가쿠는 그대로 단숨에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던진다.

“네 입에서 더 이상 내가 싫다는 말이 나와도 못 놔줘.”

“하하, 로맨티스트네. 가쿠는.”

“웃을 때야?”

“아닐지도.”

가쿠와 마찬가지로 티셔츠를 벗어낸 류노스케가 실없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웃지 마, 난 여유 없어. 그 말에 류노스케가 먼저 가쿠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보면, 야오토메 가쿠가 ‘제정신인 채로’ 츠나시 류노스케를 안는 건 처음일까. 한심하기 그지없는 생각이었지만 가쿠는 지난날들의 자신들에게 질투라는 것을 느꼈다. 이 표정도, 목소리도 전부 다, 이미 그들은 알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제멋대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조심스레 쓸어 넘겨주자 반듯하고 동그란 이마가 드러난다. 가쿠는 천천히 류노스케의 이마에서부터 콧등, 입술을 거쳐 가슴까지 입을 맞추었다. 마치 경건한 의식을 치루는 것처럼. 그러자 류노스케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가쿠의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왜 그래?”

“한심한 남자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쿠가?”

대답 없는 가쿠를 보며 류노스케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전혀.”

겉치레가 아닌 진심이 듬뿍 담긴 말에 가쿠는 작게 한숨을 쉰다. 이거 봐. 정말이지, 당해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야오토메 가쿠는 생각한다. 이런 너이기에, 나는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찰랑거리는 바닷물이 발목을 기분 좋게 두드린다. 가쿠는 빤히 그 광경을 바라보다 이내 성큼성큼 바다를 향해 걸었다. 다리, 배, 가슴을 지나 이윽고 머리끝까지 완전히 잠기자 가쿠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더욱 더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완전히 몸을 맡긴 채 너른 바다의 품에 안겨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가쿠는 여전히 자신이 바다에게 안겨있음을 알아차린다.

“잘 잤어?”

가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그래서?”

“응?”

“류는 왜 가쿠를 좋아하는 건데?”

오랜만에 셋이서 한 테이블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노라니, 먼저 식사를 마친 텐이 꺼낸 말에 당황한 가쿠가 사래에 걸려 거하게 기침을 시작하자 류노스케가 서둘러 가쿠에게 물 잔을 쥐어주었다.

“야, 텐! 넌 뭘 그런 걸…….”

“가쿠는 알아? 류가 왜 가쿠를 좋아하는지.”

“그걸 당사자한테 묻는다는 게 어이가 없다.”

“그래서 아냐고.”

“……몰라.”

그러자 두 쌍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쏜살같이 류노스케를 향한다. 두 사람의 시선에 류노스케는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굴렸다. 역시 아무리 류노스케라고 해도 본인을 눈앞에 두고 말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리라. 그러나 그는 곧, 표정만큼은 여전히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난 날…….”

“…….”

“…….”

“가쿠가 누군가를 구하는 모습이 멋있었어…….”

“그거 첫눈에 반했다는 뜻?”

“어, 어……? 어어?!”

“흐응.”

“……그만 쳐다 봐, 텐.”

“빨개질 얼굴은 있네.”

“시끄러워.”

칠칠치 못하게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은 내버려둔 채, 텐은 가쿠의 앞에 놓여 있던 마카롱을 집어먹었다. 이 정도는 내가 먹어도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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