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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CK-ZERO

작게 소란이 일었다. 위험한 짓을 할 만한 이는 없었지만 모로는 일단 그들을 진정시키며 치즈펠의 옆에 앉아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 뿐만 아니라, 본당 안 모든 이의 시선이 ‘손님’을 향해 있었다. 그들은 모로와 달리 손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아니, 말 뿐이면 다행이었다. 정부 건물의 지하 깊은 곳에 갇혀 잠들어 있던 여자. 그를 빼내기 위해 유심회의 절반을 잃었다. 킹과 그의 측근 이외의 정부 사람들에게도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였다.

도대체 왜, 조직의 대부분을 희생해야 했는지 이해 못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모로 또한 손에 쥐고 있는 카드의 가치를 알 수가 없었다. 흐름을 읽고 그에 따른 계획을 세우는 그로서도 드문 일이었다. 그랬기에 모로는 일단 교섭을 제시했다. 넘기는 조건은 정부의 해체. 터무니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도해 볼만한 가치는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정부의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이가 그렇게 엄중하게 보호받으며 잠들어 있을 리가 없었다.

본당 한 가운데에, 모로와 마주 앉은 그는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동자를 굴려 분위기를 살피던 이와 모로의 눈이 마주쳤다. 물건을 품평하듯 냉정하게 자신을 가늠하는 시선에도 결코 주눅드는 일은 없었다. 주위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등을 꼿꼿이 한 채 모로의 시선을 맞추기 위해 살짝 턱을 치켜든다. 조금 거만하기까지 한 태도에 질린 것인지 조직원들은 서로 불만스러운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 협력해주면 된다는 소리?”

“그래준다면 고맙겠군. 이대로 교섭이 끝나는 것이,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좋겠지.”

“…주로 어떤 것?”

‘인질’로서 협력해달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까. 되도록이면 자신에 대한 처우가 너그럽기를 바라는 인질이라기 보다는 대등한 눈높이에서 협상을 취하려는 그 태도에 모로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누구의 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대접을 잘못한 그 자신의 태도가 제일 문제였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자리에서 확실히 역할을 숙지 시킬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역시 머리카락. 두번째는 손톱. 그 다음은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여지껏 평정을 가장하며 부드럽게 미소까지 짓고 있던 이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물론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간을 찡그린 채 숨기지 않고 불쾌한 표정을 드러내는 그와 대조적으로 모로는 산뜻하게 웃었다. 후, 짧게 숨을 고른 그가 다시금 제안했다.

“그냥, 처음부터 날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건?”

“재미있는 제안이지만, 안되겠네. 거래는 일단 결과를 보여야 하니까.”

포기해. 모로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웃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였음에도 밀비는 안심할 수 없게 하는 예리함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둔한 이가 아니었다. 인질이 되어 교섭의 재료가 된다. 그러는 와중에 상처를 입게 될 것이라고 태연한 얼굴로 말하는 남자를 보며 밀비는 솔직히 질려 있었지만, 납득하고 물러나는 일은 없었다. 밀비의 얼굴에서 그 의중을 읽어낸 것인지 모로 또한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모양인데. 치즈펠, 설명은 제대로 했겠지?”

“대충 말해두긴 했는데…”

웃으며 대답하는 치즈펠의 말꼬리가 흐려진다. 상황에 대한 이해가 되었다고 해도, 인질로 잡혀온 이가 순순히 협력해줄 리가 없었다. 말을 대신해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치즈펠의 행동에 모로도 과연,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밀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 얼굴이, 나중에라도 얼굴에 상처는 내고 싶지 않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들게 한다.

“...나는 협력할 수 없어. 돌려보내 줘.”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당당한 인질의 요구에 모로는 화를 내는 것 대신 고개를 저어 대답했다. 교섭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한,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교섭의 가치가 없는 인질이라고 판단된다면 죽일 생각이다. 어찌되었든 정부에 관련되어 있는 인간을 쉽게 놓아줄 수는 없는데다 밀비를 데려오기 위해 유심회가 치뤘던 희생이 너무 컸다. 밀비의 탓은 아니었지만, 곱게 돌려주기엔 그에게 쌓인 원한이 많았다.

“인질이 미쳐버리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니, 부디 조심...”

순식간이었다. 한쪽 무릎을 세워 앉으며 자세를 바꾼 밀비가 그대로 손을 치켜 올린 채 모로를 향해 내리치려 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깨닫기도 전에 옆에서 불쑥 나타난 손이 밀비의 손목을 잡아채 움직임을 저지했다. 치즈펠이었다. 보스를 향해 적의를 드러낸 것에 조직원들이 분개했지만 치즈펠은 미소 짓고 있었다.

“진정해요. 뭐, 우리도 일단 예의란건 차렸으니까.”

예의? 코웃음을 친 밀비가 손에 있던 것을 떨구자, 치즈펠은 힘을 주어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 주었다. 어떻게 밀비가 저것을 손에 넣었는지,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책임은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본당 바닥을 구르는 나이프를 보며 모로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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