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일그램의 히어로
이십일그램의 우울
미도리×치아키
소설 / 190428 발행
긴 잠에서 막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들이마신 숨이 폐를 가득 채웠다. 나는 풍선이 날아가지 않도록 손에 쥔 채 느리게 바람을 빼내는 것처럼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아주 많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양의 공기가 어쩐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산소를 연료를 하는 인형처럼, 가득 들이마신 공기가 폐를 거친 다음에야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붉게 물든 햇볕이 익숙하지 않은 풍경의 하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째 기운이 없었다.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깨어날 즈음이면 으레 들리던 목소리였다.
“타, 카미네?”
모리사와 선배였다. 그 부름에 무어라고 대답할 셈이었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모리사와 선배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눈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고, 내 눈이 제 시야를 확보하기 전에 모리사와 선배는 허둥대며 몸을 돌렸다.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라! 타카미네! 어머님을 모셔올 테니까!”
그렇게 외친 선배는 호들갑을 떨며 뛰어나갔다.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탓에 무거운 몸을 뒤척였다. 잘 움직여지지 않아 흐릿한 시야에 비치는 낯선 방을 눈으로만 둘러보았다.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는 풍경은 굳어버린 머리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공간의 것이었다. 병원의 1인실이었다.
금방 엄마가 왔다. 의사일 것이 분명한 사람을 대동하고 있었고, 그는 조심스럽게 나를 다뤘다. 그동안 모리사와 선배는 먼발치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몸은 아주 바빴고 그 날은 여러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 탓에 모리사와 선배는 나의 상황을 조금 살피다 돌아갔다. 제대로 말도 섞지 못한 채 보내는 것이 조금 미안하게 느껴졌다. 나는 돌아서는 모리사와 선배의 모습을 눈으로만 전송했다. 오늘의 검사가 언제 끝날 것인지 알 수 없었느니 붙잡기도 애매했다.
잠긴 목소리로 꼭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하면 실제로 긴 잠에서 깨어난 게 맞다는, 묘하게 불친절한 대답만 돌아왔다.
큰 상처도 없고 문제가 될 만한 것은 기운이 없다 뿐이라 대단한 일은 아니겠거니 했는데 대단한 일이었던 것도 맞는 모양이었다. 가족 모두가 죽음을 각오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말이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는데 머리를 부딪친 탓인지 며칠을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오컬트적인 비유에는 대답할 말이 없어 대충 수긍했다.
모리사와 선배는 그 다음날 또 다시 병문안을 왔다. 온다고 해도 유성대 멤버들을 모아 함께 올 줄 알았는데 모리사와 선배 혼자 찾아온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다른 멤버들에게 다른 일정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만 잠시 했다.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람답게 그는 병문안 선물을 이것저것 들고 왔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굳이 입 밖으로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건 모리사와 선배 나름의 성의다. 엄마는 모리사와 선배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병문안 선물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모리사와 선배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하하하하!”
안도의 한숨이라고 생각한 것은 어이없게도 호쾌한 웃음의 시작이었다. 모리사와 선배는 묘하게 쑥스러워하는 기색으로, 하지만 무얼 떨쳐낸 것처럼 개운한 얼굴을 하고 내게 사과했다.
“그때는 미안했다. 네가 완전히 포기한 거라고 생각했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구나.”
하지만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할 지 알 수가 없어 가만히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어색한 침묵이 나와 선배 사이를 지나갔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면 모리사와 선배가 고개를 갸울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타카미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여?”
내가 그렇게 물으면 선배가 되물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렇게 물어도…….”
무엇도 해결할 수 없는 답답한 문답이었다. 나는 투정부리듯 대답했지만 모리사와 선배는 내게 설명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렇군. 그렇구나.”
그저 혼자서 무얼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선배가 나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아무 일도 아니다! 무사히 깨어나서 다행이구나!”
거짓말이다. 아무 일도 아닐 리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에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게 짓궂은 장난이 아닐 것이야 뻔했다. 모리사와 치아키라는 사람은 그렇게 가볍게 농담을 지껄일 위인은 못 되었다.
모리사와 군은 신기한 사람 같다고, 검진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엄마가 말했다. 모리사와 선배는 이상할 정도로 우리 부모님과 친했다. 물론 그 사람과 친한 어른이 비단 우리 부모님 뿐만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엄마의 그 말은 새삼스러웠다. 나는 엄마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딱히 궁금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내가 쓰러져있는 동안 자주 왔다고 했다. 첫 방문은 다른 친구들보다는 늦었던 모양이다. 나를 묵묵하게 한참 바라보고 있던 선배는 돌아가는 길에 엄마에게 인사를 했다고 한다.
곧 깨어날 겁니다.
확신을 주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다. 엄마는 단순한 인사치레였을 거라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 인사치레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두 만약을 생각하는 것이다. 아주 만약, 내가 깨어나지 않을 때를.
그렇기에 모리사와 선배의 확신을 주는 목소리가 더욱 고맙게 느껴졌단다. 엄마는 아주 사소한 이야기를 하듯 가볍게 말하고 웃었지만, 그 순간의 기분이 어떠했을지는 왠지 상상이 갔다.
전해듣는 나 역시 그랬다. 그 말이 고마웠다. 엄마에게 힘을 준 그 말이. 나를 믿어준 그 말이. 그리고, 나를 구해줄 것이라 믿게 만들어버리는 그 말이. 그 순간 어째 심장이 마구 두근대었다. 이상하게,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검진의 결과는 금방 나왔다. 한동안은 더 입원해 있어야 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보이지만 경과를 지켜봐야 한단다. 그야, 학교에 가는 것보다는 쉬는 편이 낫다.
이야기를 들은 순간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저 침대에 누워있기가 지루한 것도 분명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학교의 분위기가 그리웠던 것은 아니다. 그저 이렇게 느긋하게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더 좋아질지, 그렇다면 그러잖아도 뒤처지는 나는 얼마나 더 뒤처지게 되는건지 뒤늦게 걱정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반 친구들이 찾아와 학교에서 배부된 자료 따위를 건네주기는 했다. 하지만 원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혼자 보는 걸로 제대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주변에 달리 도움을 구할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반에서 가장 친한 테토라 군은 공부로 도움을 받기에는 영 믿음이 가지 않았고. 그 다음으로 모리사와 선배를 떠올렸다. 그 사람도 그렇게 뛰어나게 잘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 관두었다.
모리사와 선배에게 부탁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그 직후였다. 여전히 병원에 있는 나를 위해 학교의 유인물을 가지고 시노 군이 병문안을 와주었다. 시노 군은 드물게 내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반 친구였다. 그의 사려깊은 태도와 부드러운 배려는 거의 치유에 가까운 수준이다. 이번에도 시노 군은 내게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과외 말이다.
“으, 도와줘서 고마워. 시노 군.”
“원래도 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다보니 익숙하거든요. 재미있기도 하고요.”
나는 시노 군이 내미는 유인물을 받아들고 떨떠름하게 감사인사를 했을 뿐이다. 물론 시노 군이 찾아와준 건 너무나 고마웠지만, 혼자 이해할 자신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나의 태도를 불쾌하게 느낄 법 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시노 군은 오히려 내가 막막해하는 것을 먼저 눈치채고 혹시 공부를 도와줘도 괜찮겠냐고 내게 물어 온 것이다. 나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은커녕 오히려 대환영이었고 우리는 곧장 베드 테이블을 책상 삼아 공부를 시작했다.
“병원에 있는 건 어때요?”
수업 시간의 노트 정리를 따라 적는 나를 보며 시노 군이 물었다. 노트 정리에 집중했던 나는 더듬더듬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으응……. 편하긴 하지만 왠지 불안해서, 얼른 돌아가고 싶어.”
“역시 타카미네 군은 성실하네요.”
그 말에 벙쪘다. 시노 군은 좋은 사람이니까 다른 사람의 좋은 면만 보고 좋은 말만 한다. 나는 뺨을 긁적이며 변명하듯 대답했다.
“성실한 건 아니지만……. 나, 수업을 제대로 들어도 따라가기 힘들어하는 편이구. 유성대도 테토라 군이나 센고쿠 군은 나랑 달리 잘 따라가는 편이니까, 나 혼자 뒤처질 걸 생각하면 걱정이 되네.”
그 말에 시노 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아, 유성대는 쉬고 있다고 들었어요. 모리사와 선배가 몸살이 났다고 했던가…….”
“그 사람이?”
의외의 소식에 깜짝 놀랐다. 그렇구나. 그 사람, 몸이 좋지 않았구나. 그리 먼 과거도 아닌 병문안을 떠올린다. 과외를 부탁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라면 분명 아팠던 적 따윈 없었던 것처럼 나를 도와주었을 테니 말이다.
“앗, 타카미네 군은 모리사와 선배와 친하죠?”
고민에 빠져버린 나를 본 시노 군이 안절부절 못하며 그렇게 말했다. 게다가 이어지는 것은 사과였다. 하여튼 마음씀씀이가 상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불안한 이야기를 해버려서 죄송해요. 타카미네 군도 아직 안정이 필요한데……. 테토라 군도 타카미네 군을 걱정해서 말하지 않았던 것일텐데, 제 생각이 짧았어요.”
“아니야, 시노 군.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뭣보다 선배와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고. 그런 말을 덧붙이는 것도 어쩐지 구차하게 느껴져 일부러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 화제를 마무리짓고 싶어한다고 느낀 건지, 시노 군도 별 말 없이 따라주었다. 시노 군은 남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섬세한 사람이다.
우리는 짧은 수업을 시작했다. 시노 군은 좋은 선생님이었다. 부드러운 어조와 다정한 목소리는 생각 외의 흡입력이 있었고 그의 설명은 명쾌했다. 그런데도 나는 집중하지 못했다. 선배를 걱정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게 간만의 공부였던 탓이다.
“그러면 문제도 한 번 풀어볼까요?”
그 말에 나는 가볍게 턱을 괴고 문제를 바라보았다. 시노 군이 알려준 설명은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병문안을 왔던 모리사와 선배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픈 것이라고는 상정도 못할 만큼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연습도 포기했을 정도라면 분명 조금 아픈 것은 아니겠지. 그런데도 아프지 않은 척을 했고 병문안까지 왔다. 또 그렇게 제 몸은 신경도 쓰지 않고.
이토록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시노 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일부러 나의 공부를 도와주기 위해 시간을 내주었다. 나는 샤프펜슬을 고쳐 쥐고 모리사와 선배에 대한 생각을 떨어내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시노 군이 쓴웃음이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이어지는 것은 공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미안해요, 역시 신경쓰이는 거죠?”
“으, 시노 군이 미안할 일이…….”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의 패배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어지는 것은 솔직하기 짝이 없는 토로였다.
“하아. 진짜 신경쓰여. 그 사람, 바로 며칠 전에도 여기 왔었단 말야.”
내 말에 시노 군은 고개를 갸울이며 고민했다.
“으음. 그럼 고맙다고 전하면 되는 게 아닐까요?”
“그치만…… 그걸로는 뭔가 수지가 안 맞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야 그랬다. 그 사람은 버티기 힘들 정도로 아픈 몸을 이끌고 나를 찾아와준 거다. 그건 겨우 고맙다는 말로 퉁칠 수 있는 다정함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노 군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시노 군의 얼굴은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다. 여전히 다정한 시선으로 나와 가만히 눈을 맞추며 시노 군은 나의 말을 부정했다. 귓가에 닿는 것은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고맙다는 말이면 충분할 거예요. 애초에 모리사와 선배는 타카미네 군이 무언가를 돌려줄 거라고 생각하고 병문안을 올 사람은 아니잖아요?”
왠지 시노 군이 나보다 모리사와 선배를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홀린 것처럼 그 말에 동의했다.
“그건, 그래.”
“타카미네 군, 저도요. 저도 무얼 바라고 타카미네 군을 돕겠다고 한 게 아니었어요. 그래서 타카미네 군이 제게 고맙다고 말해주는 걸로 충분히 기뻤으니까요.”
시노 군은 정말 다정한 사람이다. 그 말에 왠지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자책하듯 말했다.
“나, 시노 군이 편하게 느껴지나봐. 이런 이야기도 털어놓게 되는 걸 보면…….”
그 말에 시노 군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후후, 타카미네 군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에요.”
“응, 고마워. 시노 군, 혹시 이 부분 다시 한 번 설명해줄 수 있을까?”
“얼마든지요!”
시노 군의 흔쾌한 대답과 함께 나는 샤프 펜슬을 다시 고쳐쥐었다. 얼른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 모리사와 선배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다시 등교하기로 한 다음에도 며칠 정도는 제대로 출석도 못했다. 병원에 먼저 들렀다 느지막이 등교를 하게 된 탓이었다. 지각을 했으니 웬만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가고 싶었는데, 학교에 돌아왔을 때가 하필 점심 시간이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왁자지껄한 복도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때, 알고 있는 목소리가 나의 발목을 붙들었다.
“아. 모리사와네 1학년.”
“흐잇…….”
복도에는 많은 1학년이 있었고 모리사와 선배와 관련된 1학년은 비단 나 뿐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나를 지칭하는 것임은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도망칠 수는 없었다.
“몸은 괜찮은 거?”
세나 선배였다. 이 사람이 왜 1학년 교실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으니 굳이 알은체를 할 이유가 없는데, 세나 선배는 자연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세나 선배는 교내에서도 유명인사였다. 그 나이츠의 멤버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탓에 몇몇 1학년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네, 네?”
그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세나 선배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몸. 괜찮냐고 물었어.”
짧은 대답은 더 이상 물음의 형태조차 아니다. 작은 몸에서 흘러넘치는 위압감이 너무 거대하다. 나는 어깨를 바싹 움츠린 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힉, 괘,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저기. 나한테 뭐 죄 지었어?”
이 사람에게 지은 죄는 없지만 이 사람 앞에 서면 내 존재 자체가 죄가 된 기분이 든다……. 내가 서둘러 부정하려 한 순간 세나 선배는 넌더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죄가 아주 없지는 않지.”
“네? 아, 그…… 무슨…….”
내가 멍청하게 되물으면 세나 선배는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는 것이 진심으로 내게 화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세나 선배는 생각 외로 상식적이고,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다. 이어지는 건 나에 대한 영문 모를 분노가 아니라, 세나 선배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였다.
“신경쓰지 마. 단순한 화풀이야. 네가 없는 동안 내가 모리사와 뒤치다꺼리를 하는 바람에 말야.”
“네?”
귀에 익숙하지만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러고보면 모리사와 선배와 같은 반이던가. 문득 이 남자가 나의 상태에 대해 물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세나 선배도 모리사와 선배를 통해 내 상황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 자식 귀찮게 멀쩡한 척 하고 있으니까.”
세나 선배는 정말 질렸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러고보면 시노 군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었다. 분명, 아팠다고 했다. 그런데도 멀쩡한 척을 하며 돌아다녔겠지. 크게 신경쓰는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그 화제를 곱씹었다.
“그러고보면 모리사와 선배, 아팠었다고…….”
“흐응. 타카미네 너, 의외로 소문에 빠르네? 하지만 그 녀석은 그 전에도 좀 이상했어.”
세나 선배는 자연스럽게 창가에 등을 기대었다. 어째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나도 자연스럽게 복도의 가장자리에 멈춰섰다. 세나 선배는 몇 번인가 내 병문안을 왔다고 했다. 몇 번인가 합동 무대를 하기는 했지만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 의외이기는 했다. 당연하지만 세나 선배가 병문안을 왔던 건 온전히 나를 위하는 일은 아니었다.
내 사고 이후 모리사와 선배는 한동안 혼자 다녔다고 했다. 왠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 했더니 세나 선배는 그렇게 상상도 가지 않는 꼴을 직접 눈으로 봤을 때의 위화감은 어떻겠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그 관계가 아무리 짧았다고 해도 나보다는 더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다. 할 말이 없어져 입을 다물면 세나 선배가 팔짱을 고쳐끼며 말했다.
“뭐, 나라도 유우 군이 사고에 휘말린다면 아마 제 정신으로는 못 견디겠지. 모리사와도 그랬을 거야.”
“유……?”
유우 군? 그 이름을 향한 의문을 소리내어 표현하려다 참았다. 어쩐지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든 탓이었다.
“그랬는데, 어느날부터 갑자기 멀쩡한 척 나한테 치대는 거야.”
“……멀쩡한 척이요? 멀쩡해진 게 아니라?”
“척이지.”
내 물음을 끊어내듯 세나 선배가 딱 잘라 말했다.
“그렇게 골몰하던 걸 어떻게 한 순간에 끊을 수 있겠어?”
세나 선배가 아무리 섬세하다고 해도 결국엔 타인이다. 그것도 나와는 관계 없는. 같은 반의 모리사와 선배가 아니었다면 내가 입원한 것조차 몰랐을 것이 분명한 타인이란 말이다. 그런데도 그런 세나 선배조차 쉽게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모리사와 선배는 내게, 타카미네 미도리에게 얽매여 있었던 걸까. 그 시기의 모리사와 선배를 떠올린 것일까, 세나 선배는 혀를 차고 말을 이었다.
“인간의 감정이란 건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싹둑 잘라낼 수는 없는 거라고.”
진저리를 친 선배는 저를 가다듬는 것처럼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하여튼 그래서, 모리사와를 끌고 억지로 네 병문안을 갔었다는 이야기.”
“네?”
그 결론은 이상했다. 세나 선배의 말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웃는 낯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되물었다.
“왜? 이상해?”
“아뇨…….”
그건 세나 선배가 무섭다든지 껄끄러워서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다. 세나 선배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의 대답이 의외인 것 같은 표정이다. 그야, 대답한 나에게도 그 대답은 의외였다.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세나 선배의 행동은 어쩐지 납득이 갔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언제나 멀쩡한 척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억눌러왔을 수많은 감정과 지쳐버린 마음을 눈치채버렸다면, 그걸 모른 척 할 수는 없었겠지. 세나 선배는 예민하지만 상냥한 사람이다. 아니, 세나 이즈미 본인이 예민하기에 그만큼 다른 이에게 더욱 상냥할 수 있는 것일 테다.
우리는 가만히 서로의 시선을 마주했다. 짧은 침묵 끝에 세나 선배가 픽 웃었다.
“그럼 잘됐네. 너도 아주 멀쩡한 건 아니겠지만 신경써주라고.”
그렇게 말한 세나 선배는 홱 몸을 돌렸고 그보다 조금 늦게 종이 쳤다. 3학년 교실로 돌아가는 작은 등을 바라보다,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서둘러 교실을 향했다.
수업을 듣는 내내 계속, 세나 선배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모리사와 선배를 만나야했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곧장 3학년 교실로 찾아갔다. 막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서는 모두가 녹색의 넥타이를 메고 있다. 살짝 위축되어 어깨를 움츠렸지만 그 정도로 붉은 넥타이는 가려지지 않는다.
모리사와 선배가 무슨 반이었더라. 긴장한 탓인지 잘 기억나지 않아 교실 근처를 소심하게 기웃거리기만 할 때였다.
“모리사와 찾아?”
“흐잇……!”
깜짝 놀라 돌아보면 세나 선배가 있었다. 그렇게 무섭던 사람인데 지금은 오히려 반갑다. 모리사와 선배의 행방을 찾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에.”
“흐응. 말 잘 듣네.”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것이 제법 흡족해보였다. 그 덕분인지 세나 선배는 점심 때에 비해 좀 더 호의적인 태도로 말을 이었다.
“아쉽지만 모리사와는 교실에 없어. 마지막 시간에 보건실에 갔거든.”
보건실. 그 단어에 눈 앞이 까마득해졌다.
“그 사람 아직 아픈 거예요?”
다급하게 내뱉는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떨렸다. 세나 선배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 그렇게 걱정할 정도로 아파보이지는 않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뭐, 긴장이 풀려서 감기 기운이라도 도는 거겠지.”
세나 선배가 덧붙인 말은 그 정도였지만 그건 확실히 나를 달래는 위로였다. 세나 선배는 나를 보건실로 떠밀었다. 얼른 가지 않으면 집에 가버리는 게 아니겠냐는 말에 나는 순순히 모리사와 선배가 있을 보건실로 향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리사와 선배는 이미 보건실에 없었다. 사가미 선생님만이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반겨주기에, 모리사와 선배의 행방을 물었다.
“뭐어? 모리사와는 당연히 수업 종 치자마자 보냈지. 아픈 녀석을 굳이 남겨두기도 그렇잖냐.”
당연한 말이었다. 시계를 보니 제법 시간이 흘렀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건 사가미 선생님도 마찬가지인듯 제 뒷머리를 벅벅 긁고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교정은 이제 막 하교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로 왁자지껄했다.
“모리사와 말이다. 한동안 보건실 신세를 졌거든. 그때마다 항상 혼자서 돌아가기에 오늘도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말하는 사가미 선생님의 목소리가 약간 씁쓸하게 느껴졌다. 어떤 감정을 덜어내듯 어깨를 으쓱인 선생님은 창 밖의 정경에서 시선을 거두고 나를 바라보았다.
“뭐, 잘됐네. 슬슬 네가 보은할 차례도 됐지.”
“네?”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화들짝 놀라 되묻고 말았다. 아니, 모리사와 선배가 나를 계속해서 신경쓰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가미 선생님의 말은 단순히 모리사와 선배의 마음에 보답하라는 뜻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그 이상 캐묻지 않아도 사가미 선생님은 느리게 말을 이었다.
“모리사와 녀석, 수업 중에 쓰러지는 바람에 반 친구들한테 끌려온 적이 있는데.”
수업 중에 쓰러지다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상황은 심각했던 것 같다. 사가미 선생님은 오후 느지막이 깨어난 모리사와 치아키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보건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당연히 사가미 선생님은 그걸 멈춰세웠고, 사가미 선생님을 돌아보는 모리사와 치아키는.
울고 있었단다. 어울리지 않게도 펑펑 울고 있기에 당황해서 많이 아프냐고 물었더니 타카미네에게, 그러니까 내게 가야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사가미 선생님도 경황이 없었겠지. 펑펑 울고 있는 남자 고등학생을 눈 앞에 둔 사가미 선생님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악몽이라도 꾼 거겠지.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는 법이니까.”
맞는 말이었다. 선배는 그 날 악몽을 꾼 게 분명했다. 그 악몽이 어떤 내용이었든 지금에 와서는 아무 상관 없다. 나는 제대로 깨어났고 선배와 마주할 수 있다. 그러니까 괜찮았다. 그리고, 모리사와 선배 또한 괜찮을 것이다.
검진에서는 드디어 다음달에 예약을 잡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병원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바로 모리사와 선배에게 라인을 했다. 오늘부터 유성대의 연습에 참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건 나로서는 굉장히 성실한 자세였는데, 모리사와 선배는 읽기만 하고 답장이 없었다. 평소의 텐션이라면 분명 기뻐하며 환영해줄 것이라고 기대했기에 내심 풀이 죽었다.
그 다음날까지도 이야기가 없기에 조금 고민을 했다. 테토라 군에게 연습에 참여하고 싶다고 어필을 하려다 이내 관두었다. 그 정도까지 열정이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무시당한 것이라면 그걸 빌미로 더 쉬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고. 나는 그렇게 내 서운함을 애써 모른 척 하기로 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난 뒤 모리사와 선배가 우리 반으로 찾아왔다. 어떤 속셈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연습실의 위치를 모르는 나를 데리러 온 것일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테토라 군도 있다. 굳이 모리사와 선배가 나서서 나를 데리러 올 이유가 없다. 모리사와 선배는 나를 데리고 나섰다. 우리는 함께 천천히 걸었고 선배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몸은 괜찮은 건가?”
“……그럭저럭이요.”
“무리하면 안 된다. 내내 누워있었으니 아마 근육도 많이 줄었겠지. 한동안은 가벼운 스트레칭 위주로 하고 연습은 다음주부터 함께하는 걸로 하자.”
“의외네요. 선배라면…….”
선배라면 얼른 농구부 연습에도 참가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을 하려던 순간 그렇게 의외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전부 삼켰다. 원래 멤버의 체력 관리에는 철저한 사람이다. 본인에게는 그렇게 철저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그 다음은 대충 얼버무렸다. 모리사와 선배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희미하게 웃기만 했을 뿐,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나는 조금 민망해져 그런 선배를 떠밀어 연습실로 향했다.
역시 간만에 몸을 움직이는 건 힘들었다. 나는 중간부터는 아예 뒤로 빠져 앉아있었다. 참관이라는 명목이었다. 제대로 본 연습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스트레칭과 간단한 스탭만 연습했을 뿐인데도 진이 빠졌다. 선배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연습에 참여하게 했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나는 무릎을 모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연습을 마친 다음에는 모리사와 선배와 함께 하교를 했다. 모리사와 선배의 제안이었다. 평소라면 거절했을까. 분명 거절했겠지.
하지만 어쩐지 굉장히 그리운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길다면 긴 시간이 흘렀다. 몸이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면, 뭐든지 그리울 시기였다.
우리는 느리게 걸었다. 모리사와 선배는 보폭이 큰 사람답게 앞설 법도 한데 그런 일도 없이 나와 맞추어 걸었다. 모리사와 선배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고 그러면 원래 말주변이 없는 나도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거면 왜 함께 하교하자고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조금 안달을 하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주 와줬다고 들었어요.”
무척이나 나다운 서두였다. 그러니까, 문장의 구성요소가 한없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설명을 덧붙이려고 하는 와중에 모리사와 선배가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하, 후배가 쓰러졌는데 당연한 일이지!”
이 눈치빠른 남자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전부 알고 있는 모양이라 나도 편하게 이야기를 했다.
“엄마가 고맙다고 하더라구요.”
그러고도 그 다음에는 조금 머뭇대었다. 저도 모르게 걸음이 멈췄다. 처음으로 선배의 걸음이 앞선 순간 모리사와 선배는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보았다. 괜히, 멈췄다고 생각했다. 이건 좀 과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천천히 목을 울렸다.
“그……. 나도 같은 마음이에여. 고마워여.”
감사인사는 아무래도 익숙하지가 않았다. 나는 시노 군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운, 정제된 말을 할 줄은 모른다. 그러니까 이게 내 진심이고 최선이었다.
그래, 최선이었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했다. 최선은 역시 과하다. 완전히 부담스러운 후배가 됐다.
모리사와 선배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 시선을 마주하는 게 무척이나 멋없게 느껴져 나는 시선을 떨어트린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쓰러진 사이에 선배도 많이 아팠다고 들었어여. 아마 내 일이 겹친 탓도 있었겠죠. 마음 쓰게 해서 미안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선배의 소문을 전해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모리사와 치아키의 이야기를 했다. 그저 잠들어있었던 나조차도 그의 상황을 상정할 수 있을 만큼의 이야기를 해줬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반 친구나 면식만 있을 뿐인 선배, 그리고 보건실의 선생님까지도. 왜 그렇게들 모리사와 선배의 이야기를 해줬는지 알고 있다. 이 사람이 나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슬퍼하고 아파했기 때문이다. 그의 몸과 마음이 나의 말로 인해 보상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겨우 한 마디면 되는 말로 그를 위로하라고, 모두가 나의 등을 떠미는 것이다.
그들로부터 얻은 수많은 말들이 내 안에 뭉쳐있었다. 마치 모두에게서 힘을 얻은 히어로처럼. 그런 쑥스러운 비유를 생각하고 나니 어째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아 입술을 꾹 물었다. 더 많은 사과와, 더 많은 감사와, 쑥스러워 전하지 못했던 그런 것들을 모리사와 선배와 함께 풀어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어울리지 않게 떠들어버렸다. 그리고, 떠들 셈이었다.
“아니다! 나보다 네가 더 고생이었지!”
그랬는데,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에는 모든 말들이 전부 멎어버렸다. 나는 모리사와 선배를 바라보며 천천히 목을 울렸다.
“모리사와 선배.”
나의 당황은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담담한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모리사와 선배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왜 울고 있는 거예여.”
“어, 어라?”
모리사와 선배 본인도 제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 같다. 선배가 깜짝 놀란 것처럼 눈을 깜박이면, 그 순간 깊은 눈꺼풀 가득 고여있던 눈물이 방울져 후드득 떨어졌다.
“하하! 이상하구나! 감격스러운 마음 탓인가……. 하하, 하……. 읏…….”
선배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를 위로해야 했을까. 아마 위로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로 어른스러운 인간은 못 되었다.
그저 내가 깨어난 뒤의 길지 않게 이어져 온 날들을 떠올렸다. 모든 순간의 선배들을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위화감들이 곳곳에 자리해 있었다. 모리사와 치아키의 눈물은 그 위화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는 팔을 뻗어 선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선배의 몸이 움츠러들듯 굳었다. 저항이 있었다면 놀란 맘에 손을 떼었을까. 이상하게도 저항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선배를 몰아붙이듯 속삭였다.
“그때라고 했던 건 언제예요? 내가 포기한 줄 알았다고 했죠. 혹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요? 잠들어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내가 상상하는 것들이 전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았다. 하지만 한 번 시작된 생각은 급류를 타고 결론에 이른다. 모리사와 치아키의 시선은 바닥으로 떨어진 채다. 깊은 눈꺼풀 가득 고인 눈물은 몇 번이다 흘러넘친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입술을 깨문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억지로 듣고 있는 사람이 지을 표정은 아니었다. 모리사와 선배가 사실을 이야기해주길 바란다. 나에게 비밀을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비밀을 만들더라도 그게 모리사와 치아키의 짐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까, 나와 관련된 어떤 무거운 비밀을 지고 있다면 모리사와 치아키 혼자 짊어지지 않고 내게 풀어놔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모리사와 치아키를 몰아붙였다.
“모리사와 선배는.”
꾹꾹 눌러담듯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지금까지와 같은 물음이었다. 그런데도 이 다음을 말하기까지의 시간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섞였다.
“의식이 없던 나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여기서 무슨 말이 돌아와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말해줘요. 믿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타카미네는 분명 믿어줄 거다.”
모리사와 선배의 대답은 내 생각과 달리 곧바로 돌아왔다. 그새 잠긴 것 같은 목소리로 모리사와 선배가 말했다.
“그때도 넌, 나를 믿어줬으니까.”
선배에게서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느껴졌다. 선배는 눈물을 훔치고 똑바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곧은 눈동자에는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믿음을 갖고 만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에야 비로소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유령을 볼 수 있다.”
선배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사이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선배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의 어깨로부터 손을 떨어내고 한 걸음 물러섰다.
“자, 잠깐만요. 죄송해요. 어떡하지. 벌써 못 믿겠어.”
내가 그렇게 말하며 손사래를 치자 선배가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던 주제에 전환이 빠르다. 모리사와 선배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결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여전히 포기가 빠르구나. 그때도 너는 그렇게 말했지.”
그렇게 말한 모리사와 선배는 몸을 돌려 느린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나직한 목소리가 내가 모르는 과거를 이야기했다.
나의 사고 소식을 들은 선배는 유령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에도 간혹 보았던 것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해 놀라는 바람에 들켜버렸다고 웃으며 말하기에 조금 질렸다.
어디까지가 사실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이야기가 이어지기만 기다렸다. 내가 고개조차 끄덕이지 못하고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면 모리사와 선배는 그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나는 유령이 되어 선배의 앞에 나타났고, 선배는 여러가지 이유로 나를 계속 제 곁에 두려 했다고 말했다. 선배는 공생이라는 표현을 썼다. 선배도 다른 유령에게 쫓기고 있었으니 서로 도왔다는 거다. 나는 아예 몸이 없었고 생사도 불분명했지만 모리사와 선배는 일단 살아있기는 했으니 더 급한 쪽은 유령인 나였을 것을, 내내 저의 걱정만 했다며 모리사와 선배가 웃었다.
그리고 유령인 나와 지내며 선배의 몸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고 했다. 타카미네 미도리의 유령은 그걸 제 탓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모리사와 치아키로부터 떠나갔단다. 내가 가지게 될지도 모르는 죄책감을 걱정한 것일까, 모리사와 선배는 그 인과를 명확하게 긍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이야기가 아니었고 모리사와 선배의 얼굴에 서린 그리움 역시 나를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리사와 선배의 그리움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내게 남지 않은 나의 기억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전부, 다른 사람이 했다면 농담이라고 나를 놀릴 셈이냐고 할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모리사와 선배가 상대가 되고 보니 어째 그럴 수가 없다. 나는 얼마나, 이 사람을 믿고 있는 걸까. 이 지어낸 것만 같은 이야기의 현실성조차 따질 수 없을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여기까지다.”
모리사와 선배가 그렇게 말한 것은 우리가 상가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춘 나는 모리사와 선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 뭔가 숨기고 있지 않아요?”
“음? 무얼 말이냐?”
모리사와 치아키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내게 그 때의 기억이 없다고 해서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내 말에 모리사와 선배는 어떤 말을 삼키는 것처럼 시선을 피했다. 나는 머뭇거리는 선배를 향해 직접적으로 물었다.
“내가 그 유령을 쫓아내는 역할을 해줬다면, 지금의 당신은 괜찮은 건가요?”
그 말에 모리사와 선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예상한 적 없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탓일까, 이어지는 말은 모리사와 선배의 것치고는 그렇게 유창한 변명은 아니었다.
“하, 하하! 그건 타카미네를 붙잡아두려는 명목이었을 뿐! 나는 괜찮다! 어렸을 때는 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익숙해져있다!”
그래서였다. 그 말의 위화감은 나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고 나는 모리사와 선배의 말을 되뇌이듯 중얼거렸다.
“……익숙하다고.”
“으, 음…….”
모리사와 선배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니 금방 제 말에 섞이고 만 실수를 깨달았을 테다. 뻔히 들켰으니 희미한 신음 뒤에 더해지는 변명은 없었다. 나는 선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의 나는 어때요? 유령이 다가오지 못하나요?”
“……그렇다.”
솔직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선배의 소매 끝을 꾹 잡아당겼다. 그 소심한 인력에 모리사와 선배는 고개를 숙여 내 손을 확인했다. 그리고 퍼뜩 고개를 든 얼굴에는 당황이 섞인다. 눈이 마주치면 내가 먼저 말했다.
“그럼 정해졌네요. 나랑 같이 있어요.”
“뭐, 뭣.”
모리사와 선배는 나를 도와줬다. 그게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라도, 모리사와 선배는 그게 나이기 때문에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 역시 선배를 돕고 싶다. 그게 어울리지 않는 어프로치라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지금은 내가 유령이 아니니까, 선배에게는 오히려 더 나을 것 아녜요.”
“타, 타카미네…….”
내게 없는 나의 기억에게 모리사와 선배를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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