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의 신혼부부 실종사건
20240419 커미션 완성작: 당근 라페 샌드위치 1만 5천
* 유혈 및 신체 훼손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전문 공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한겨울의 신혼부부 실종사건
공백 포함 15534자
가로등이 멀어 어두운 건물 뒤편에서 문이 소리 없이 열린다. 나오는 것은 색 옅은 단발머리를 한 여성으로 보이는 형체다. 그는 문을 열었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문을 닫은 다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앞만 보며 걸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달칵, 스페이스 바 누르는 소리와 함께 그가 그대로 멈추었다. 화면 속 형체는 막 화면 오른쪽으로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그는 땅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마치 미끄러지는 것처럼 이동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힘으로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또한 녹화 화면에서도 확인될 정도로 짙은 연기가 흩어지지 않고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영상은 일반적인 사람 키의 두 배 이상 위의 높이에서 찍혔기는 했으나, 요즈음의 식별 프로그램으로는 화면 속 형체의 신원을 정확히 판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그램을 돌리지 않더라도 특유의 머리 모양과 입고 있는 옷 때문에 화면 속 형체의 신원은 금방 확인되었다. 아오사카 토우미, 여성, 38세. 그리고 이것이 확인된 아오사카 토우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골치 아프네요. 내부자 증언을 더 확보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것보다는 아오사카 토우미의 신변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이잖아요, 뭐. 당신도 아쉽다고는 생각하죠?”
“…아무래도 확실한 증언이 있었다면 수색영장 정도는 쉽게 나왔을 거니까요.”
“자기 차가 있는 주차장 반대쪽으로 가는 모습이 마지막이라니. 이 건물 찔러보는 건 물 건너갔고. 흠, 할 수 있는 건 실종팀에게 사건 넘기는 게 다려나요.”
그 외에는 해당 건물의 숨겨진 공간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는 두루뭉술한 신고 전화를 받은 경찰팀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식장 장식으로는 생화를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죠? 그렇게 하면 군데군데 비어 보일 텐데요.”
“겨울에 꽃으로 잔뜩 장식하려면 돈이 어머어마하게 들 겁니다.“
“하아? 겨울에 식 올릴 생각이었습니까?”
“네, 문제 있습니까?”
“눈 많이 와버리면 하객 수도 줄 거고.”
“전 부를 사람 별로 없습니다.”
“나와 하는 첫 결혼인데, 그렇게 서류 작업 진행하듯이 호로록 해버릴 겁니까?”
“절차는 무시하고 있는 게 없는데, 뭐가 문제죠? …장단만 맞추라고요, 증든믄.”
미즈모토 히요리가 피팅룸 직원의 눈치를 보며 복화술에 가깝게 입 모양만으로 문장의 마지막을 마무리했다. 마지막 단어는 잇새로 뭉개져 나오느라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의 이를 악물게 만든 것은 복화술 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짜증이었다.
“진짜로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전 진짜로 하고 싶은데요?”
장난치는 것처럼 또는 놀리는 것처럼 가볍게 말하고 있었으나, 식장 장식 샘플용 앨범을 넘겨보는 카즈아키 히라의 손속 또한 심상치 않았다. 그 두꺼운 종이를 보지도 않고 빠르게 홱홱 넘기기만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종이에 짜증이 마구 묻어날 것만 같았다.
“뭐가 문제냐고요, 또.”
히요리의 물음에도 히라는 평소에는 그렇게 쉬웠던 눈길 하나 없이 보는 둥 마는 둥 여전히 앨범이나 홱홱 넘겨 대었다. 히요리가 직원의 눈치를 한 번 더 봤다. 다행히 직원은 앞으로 둘이 피팅해 볼 턱시도의 주름을 다듬느라 바빠 보였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히요리의 그 시선을 무슨 의미로 해석한 것인지 직원이 티 하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객을 안심시키려는 듯한 말을 꺼냈다.
“아, 요즘은 겨울에도 식 올리시는 경우가 많아서요. 오히려 적당히 눈 내리면 분위기도 좋다는 평이 많아요. 사진 찍을 때도 덜 덥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아닌 척 대화 내용을 귀담아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결혼식의 세부 사항을 정하는 과정에서 불화가 생긴 예비 신혼부부를 잘 다독이려는 시도가 깃든 말이었다. 히요리가 볼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목소리 톤을 가다듬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한숨이 나오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하아……. 그럼 생화 장식을 넣죠.”
…파란색은 빼고요. 히요리가 지난 칠석의 일을 떠올리며 덧붙였다.
“됐습니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그럼. 정말 신혼부부 행세라도 하고 싶은 겁니까?”
“그런데요?”
“도대체가 당신이란 사람은…!”
빽 소리를 지르기 전에 히요리가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했다. 히요리가 다시 볼 안쪽을 살짝 물어 잇자국을 냈다. 나쁜 버릇임을 알고 있는데도 이런 상황에서라면 반사적으로 볼 안쪽을 깨물게 됐다. 아까 깨문 그대로 모양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몇 시간은 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자국. 이 상태로라면 올해가 다 지나갈 때까지도 스트레스와, 어쩌면 히라와 함께 남아 있을 터였다.
“차를 더 가져올게요. 원하시는 다과 있으세요?”
예비 신혼부부가 서로 말도 없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지자, 직원은 신혼부부끼리 대화할 시간을 따로 마련해주고 싶은 듯했다. 여전히 티 한 점 없는 미소와 함께 아주 전문적인 대응이었다. “됐습니다.”하는 히요리의 말과 고개를 젓는 히라의 대답을 끝으로 피팅룸에는 무겁고 짙은 적막만이 깔렸다.
“…….”
“…….”
히요리와 히라는 넓은 소파 가운데서 거의 엉덩이를 맞대고 앉아있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켰다.
사실 이렇게까지 다투고 고집부릴 정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히요리가 말했던 것처럼 장단만 맞추면 됐다. 당연하다. 히라와 히요리는 불타는 건물 옥상에서 올렸던 단둘만의 결혼식의 연장선이 아니라 수사 과정의 하나로 이 결혼식 드레스 및 턱시도 대여 업체에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히요리는 그가 적당히 고르는 옵션에 번번이 트집을 잡는 히라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 정말로 결혼하고 싶은 겁니까? 그렇게 물을 수도 없었다. 무슨 대답이 돌아오든지 간에 원하지 않았다. 그때의 혼인 서약은 세상과 히라의 목숨을 담보로 한 거래였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히요리였다. 히요리는 서약 전에 그 사실을 히라에게 고지했고, 히라는 당황해했지만 그 사실을 이해 못 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신랑 중 한 명이 스스로 주례사를 읊고 입을 맞출 때 다른 한 명은 기절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 거래가 으레 그렇듯이 사심은 전혀 들어가지 않았으며 오로지 세상을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결혼식이었다고, 히요리는 착각하고 있었다. 어느 누가 그런 건조한 결혼식을 올린 사람과 꿈속에서 결혼한 상대를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쓴다는 말인가?
히요리가 어떤 착각을 하고 있든지 간에 히라의 입장은 히요리와 달랐다. 그가 기절한 사이에 히요리가 거의 혼자 진행했다고는 해도 그와 히요리는 이미 결혼한 사이였다. 그러니 아무리 수사의 일환이라지만 이 기회에 진지하게 식장이며 연미복 디자인을 고려해 보아도 되는 것 아니겠는가? 누구 말마따나 결혼식은 품이 몹시 들어가는 일이었으므로 일찍 알아봐 두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게 굴던 사람이 왜 이럴 때만 헐렁하게 구는지 짜증이 났다. 아무리 수사가 먼저라고는 해도, 세상을 구한 전적이 있는데 이 정도 이득은 봐도 되는 게 아닌가?
그러므로 히요리의 입장에서는 히라의 태도가 단순히 수사를 훼방 놓기 위함으로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 두꺼운 앨범을 보지도 않고 다 넘겼는지 히라가 커피 테이블 위에 앨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유리로 이루어진 연약한 커피 테이블에 앨범이 놓이는 둔탁한 소리가 침묵을 갈라놓았다. 안경을 잠시 벗어두고 미간을 꾹 누르며 히요리가 먼저 침묵을 깼다.
“…결혼 같은 건 “한 번 재미로 해 보고 안 맞는다 싶으면 이혼 처리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했던 걸 벌써 까먹은 겁니까?”
히요리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지난 칠석에 누군가가 했던 말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것 참, 그렇게 말씀하셔서 이번엔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데 왜 그러십니까?”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지금 우린 잠입수사를 하러 와 있는데요.”
“겸사겸사 예행연습도 해 보는 거죠? “공수를 들여”야 하는 일이니까요?”
“뭐라고요?”
히요리가 목소리를 높이며 히라 쪽으로 돌아앉았다.
“당신은 사건 현장일지도 모르는 업체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겁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결혼식’인데?”
“사건 현장이라. 흐음……. 그렇습니까?”
대답을 들은 히라가 잠시 고민하더니 눈꼬리까지 잔뜩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와 동시에 히요리는 자신이 잘못 대답했음을 알아차렸다. 뭔지는 몰라도 다 이해한다는 듯한 히라의 미소에 히요리는 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럼에도 더 따질 수는 없었다. 직원이 연분홍색 마카롱 접시와 김이 오르는 잔 세 개가 놓인 은색 트레이를 들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아까보다는 한결 편해진 분위기를 알아차린 직원이 아까와는 다른 미소를 지으며 커피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저, 그런데…….”
마지막으로 자기 앞에 잔을 내려놓은 직원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예비 신혼부부의 다툼에서 누구 하나의 편을 들 때보다도 더욱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겨울에 결혼하시려는 이유라도 있으세요?”
히라와 히요리가 시선을 교환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수사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협조하지 않던 히라도 이번에는 직원의 말투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히요리는 시름을 조금 덜어놓았지만, 완전히 방심하지는 않았다. 시선은 직원에게 고정했어도 신경은 온통 히라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히라의 무릎 위에 손을 하나 얹어놓는 형태로 나타났는데, 히라는 모른 척 그 위에 자기 손을 올려놓았다. 직원이 아직 앞에 있었으므로 히요리는 평소와 같이 퍼뜩 놀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놀라기에는 이런 것에 꽤 익숙해지기도 했다.
“왜죠? 아까는 겨울에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하셨잖습니까.”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히라가 물었다. 직원이 방을 떠나기 전에는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던 히라가 꽤 부드럽게 나오니 직원도 안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아…….”
우물쭈물하는 직원을 맞은편 소파에 앉은 히라와 히요리가 기다려 주었다. 직원은 손을 소파에 짚어가며 앉은 모양을 가다듬더니 둘 쪽으로 몸을 숙이며 비밀스레 속삭였다.
“여기 직원으로서 이런 말씀 드리기는 조심스럽지만… 여기서 특히 겨울에 피팅하시는 분들께 계속 이상한 일이 일어나거든요…. 소문내지는 말아주세요.”
그러고는 멋쩍다는 듯이 웃으며 트레이를 히라와 히요리 쪽으로 밀어주었다. 뜨거운 녹차에서 나오는 김이 둘 쪽으로 훅 꺾였다가 다시 일직선으로 피어올랐다. 히요리는 직원을 안심시키기 위해 잔을 들어 입술을 살짝 축였다. 반면 히라는 잔에는 손도 대지 않았지만, 아까까지의 불화는 신기루였다는 것처럼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히요리에게 더 가까이 붙어 앉았다.
다음으로는 히요리가 히라에게서 질문의 주도권을 매끄럽게 이어받았다. 구체적인 탐문에 들어가서부터는 히요리가 주도권을 잡는 것이 더 나았다. 히라는 그 옆에서 때때로 분위기가 어그러지려는 조짐이 보일 때마다 나서서 보조하는 것이 둘의 버릇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이상한 일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걱정 마세요, 말씀해 주셔도 여기서 잡은 예약은 취소하지 않을 테니까요.”
덧붙는 히라의 말에 조금이나마 안심한 듯 직원이 다소 편안해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오사카… 씨라고.”
아는 이름이 나오자 히라와 히요리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해당 결혼식 드레스 및 턱시도 대여 업체를 겨울에 이용한 예비 신혼부부 몇이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식장 직원도 아니고 대여 업체 직원이 실종 소식을 알게 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기이하게도 실종사건들은 모두 몇 년을 두고 겨울 동안만 발생했으므로 이 업체와 실종된 부부들 사이에 연관성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아오사카 토우미는 달랐다. 이 업체에서 8년 정도 일한 아오사카는 겨울과 예비 신혼부부의 실종 사이의 연관성을 의심하고 찾아냈다. 소문은 직원들 사이에서 빠르게 돌았다. 이틀 만에 매니저의 귀에도 들어갈 정도로.
“엄청나게 싸우셨어요. 매니저님 입장에서는 당연하겠지만…….”
눈앞의 직원이 말을 흐렸다. 말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결국 한숨과 함께 털어놓았다.
“화가 엄청 나셨는지… 아오사카 선배를 죽여버리겠다는 말까지 하시더라고요….”
주체를 명확히 하지 않은 문장이었지만 동시에 명확했다.
“저만 들은 것 같아서요. 선배도 엄청 화를 내며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정말 나오지 않아서 다들 걱정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경찰도 왔다 갔다고 하던데, 저는 잘 모르겠네요.”
“아오사카 씨가 뭐라고 신고하겠다고 하던가요?”
“그, 이 건물에 드레스를 보관해 놓는 지하실이 있는데 거기서 뭔가를 발견했다는 것 같아요. 아, 내 정신 좀 봐. 아무리 그래도 손님들께 이런 말까진 하면 안 됐었죠…. 예약 취소하셔도 이해합니다.”
“아뇨, 저흰 예약 취소 안 할 겁니다. 이대로 진행해 주세요.”
히라의 말에 직원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내 불평하던 히라의 말이었다. 직원이 여전히 놀란 눈으로 이번에는 히요리를 바라보았다. 히요리는 그런 직원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히라를 한 번 올려다보더니 작게 한숨 쉬었다.
“턱시도 지금 바로 입어볼 수 있죠?”
히라가 히요리의 허리를 감싸며 히요리와 동시에 일어나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것은 남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정말 예비 신혼부부로서 즐겨 보겠다는 마음도 있었고. 히요리는 잠입하기에 적당한 정보를 캐내었으니 이제 이 정도는 어울려 줘도 괜찮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히요리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때마침 입안까지 배달된 마카롱에 기분이 살짝 누그러지기도 했다.
“당신은 평소에도 시커먼 옷밖에 입질 않으니, ‘우리’ 결혼식에서는 좀 흰색을 입자고요.”
“당신은요.”
히요리가 순순히 피팅룸 안쪽으로 이끌려 가며 물었다.
“저는 뭐든 잘 어울리지만, 아, 농담입니다. 당신이 흰색을 입으면 검은색을 입어 볼까 하고. 그래야 한 쌍 같잖아요?”
◉
히라는 이전에 봤던 화면 속 장소에 나와 있었다. 영상을 통해 이미 CCTV의 위치를 알고 있었으므로 촬영되지 않는 곳에 자리 잡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이곳이 아오사카 토우미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이자 낮에 직원이 말했던 지하실로 통하는 유일한 입구였다.
CCTV 녹화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던 벽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일지 말지 고민하던 차에 막 히요리가 도착했다.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히라가 손바닥 안에서 굴리던 담배를 담뱃갑 안에 넣으며 말했다. 기실 약속 시간에 딱 맞추어 도착한 것임은 히라도 히요리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의 히요리라면 약속 시간 10분 전에 도착해 있는 것을 미덕으로 삼으므로 히라는 히요리가 늦은 것으로 쳤다. 그러므로 앞선 질책은 자정이 넘은 시각, 잠입 직전의 긴장된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한 단순한 농담이었다. 하지만 히요리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허, 감찰관님도 농담이라는 걸 하는 모양입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말을 잇는 히요리의 표정은 정말로 불쾌해 보였다. 동시에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익숙하게 보아온 검은 장갑을 빈틈없이 착용한 두 손을 히요리는 좀처럼 가만히 두지를 못했다. 히라가 그 꼴을 힐끗 보았다가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아아, 알겠다. 감찰관님도 무서움을 느끼는 겁니까? 공포영화 같은 거 못 봐요?”
그러나 이어지는 히라의 농담에도 히요리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히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의 히요리는 정말로 이상했다.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표정은 가실 줄 몰랐고, 겨울이기는 해도 오늘은 따뜻한 편인데 추운지 자꾸 팔을 쓸어올리고 있었다. 목 폴라에 장갑까지 히요리는 절대로 춥게 입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덥게 입고 다니는 사람이면 몰라도.
“춥습니까?”
“……아닙니다. 아오사카 토우미가 나온 곳은 여기입니까?”
“흠, 일단은요.”
영 이상한 태도였지만 히라는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표정이 창백해지는 게 몸이 안 좋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실랑이하는 것보다는 얼른 정보를 수집하고 파하는 것이 히요리에게 더 이로울 터였다. 히라가 문고리를 가리고 있던 몸을 세웠다.
“자물쇠가 걸려 있군요.”
그 말에 히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히요리의 손에서 자물쇠를 낚아챘다.
“열쇠도 없는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문장 하나를 끝마치기도 전에 히라가 자물쇠를 열었다. 좋은 쪽 일은 아니었지만 히요리는 때때로 이런 히라의 손놀림에 도움을 받았다.
자물쇠는 새것인지 아주 맑은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고리는 아주 오래되고 낡아서 뻑뻑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그것을 잘 달래어 돌려 여니 그 안으로부터 훅 끼쳐오는 서늘한 냄새가 있었다. 히라가 소매로 코를 막았다. 히요리는 뒤로 물러났다. 참옥한 사건 현장의 쇠 비린내를 맡은 것이 아닌데도 딱 그런 종류의 불쾌함이 느껴졌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히요리가 간신히 숨을 뱉어내자 짙은 입김이 훅 튀어나왔다. 이 아래에 무언가 정말 끔찍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긴장감을 공유하며 말없이 계단을 내려오자 지하 특유의 서늘한 공기와 함께 희고 검은 옷의 물결이 히라와 히요리를 반겼다. 수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흰색 드레스가 사람의 키보다 살짝 높은 곳에 겹겹이 걸려 있는 모습은 공간이 실제보다 더 커 보이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다. 분명 예비 신혼부부의 처음을 함께 할 옷들인데도 입어주는 사람 없이 걸려만 있는 것을 보니, 서 있는 곳이 드레스 보관실이 아니라 막 정육된 고기가 높게 걸려 있는 냉장실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지하인 것을 감안해도 이상할 정도로 서늘한 공기 또한 그런 착각을 부추겼다.
생각보다 넓은 크기에 히라가 살짝 압도당해 있자 히요리가 먼저 발을 내딛었다. 히라는 순간 흰 안개가 히요리를 감싸고 있다고 느꼈다. 현실과 생각의 괴리에 히라가 멈칫하는 사이 히요리는 미끄러지듯 걸어가 흰 드레스의 물결에 가닿았다.
짙을 정도로 많은 흰색의 드레스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던 히요리가 뒤를 돈다. 그가 입을 살짝 열자 짙은 입김이 흘러나온다. 그가 히라를 돌아보며 희미하지만 분명 사랑스러워 웃는 것 같을 때.
히라가 뒤늦게 눈을 깜빡이자 히요리는 벌써 흰 드레스의 물결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저기요? 감찰관님?”
정신을 차린 히라가 달려가 드레스를 마구 헤집었다. 얼굴을 스치는 흰색의 천 자락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희고 하늘거리는 천이 겹겹이 걸려 있으면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기도 한다는 것을 히라는 처음 알았다. 당연했다. 그가 여성용 드레스를 얼굴 가까이 문지를 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히요리보다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튼 결혼식 드레스는 접해본 적 없었으니 없는 것으로 쳤다. 어차피 히요리와 함께 하는 한 앞으로도 드레스와 가까워질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감찰관님? 감찰관님! 미즈모토 씨? …히요리.”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죄다 불러 보아도 히요리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이름 중에서도 이름 세 음절만은 히라에게 몹시 어색한 기분을 불러일으켰으므로, 사람을 찾는 것 같지 않게 음량이 줄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유치한 애칭으로는 불러 보았어도 아무것도 덧대지 않은 순수한 이름만 불러 본 적은 없었다. 뜻밖이라고 해야 할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진 히라가 흰 천을 헤치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대답은커녕 인기척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넓은 곳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제자리로 돌아오고 난 후에야 히라의 걸음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최신 유행의 드레스와 턱시도가 보관된 이런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나무문이었다. 히라가 눈을 깜빡이기 직전까지 히요리가 서 있던 곳이었다. 특이하게도 맨홀 덮개처럼 원형인 문 표면에는 한 방향으로 당겨 열 수 있도록 하는 손잡이와 살면서 처음 보는 문자가 잔뜩이었다. 살피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히요리가 사라질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을 터였다. 히라는 망설임 없이 문을 당겨 열었다. 문 아래로는 벽에 박힌 사다리를 삼켜 버린 어둠이 짙었다. 이거야 원, 정말 귀신이라도 나오려는 모양인데요. 그러나 들어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히라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끝 모를 어둠 속으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다가 마침내 바닥에 발이 닿았다. 어렴풋한 빛이 있는 입구를 올려다보니 2층 정도를 내려온 것 같았다. 이 정도 깊이면 쉽게 발각되지 않을 만했다.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탁 불이 켜졌다. 빠른 속도로 돌아보는 동시에 품 안의 총을 꺼내 겨눈 곳에는 웬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켜졌다고는 해도 불은 밝지 않아서 얼굴을 가늠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아오사카, 토우미 씨?”
“아? 네, 네에. 맞답니다. 어서, 오세요.”
히라가 아오사카의 얼굴로 향한 총구가 흔들리지 않게 조심하며 총을 고쳐 잡았다.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로브를 걸치고 있는 아오사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푹 숙인 얼굴은 창백하고 초점 잃은 눈동자는 바닥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몸은 양옆으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팔은 조금이라도 드는 것이 버거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오사카가 움직일 때마다 지독한 냄새가 훅 끼쳐 들었다. 피 냄새, 그리고 시체 냄새였다. 실종된 사람을 발견했는데도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히라가 아오사카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는지를 가늠해 보았다. 이런 냄새를 풍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만 움직이고 말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여기를 지나간 사람이 또 있었나요?”
이상하게도 말이 통하는 시체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히라가 부드럽게 물었다.
“아아, 그… 안경 쓴 경찰관님. 말하는 거죠?”
아오사카가 고개를 들며 눈동자를 이상한 방향으로 뒤룩 굴렸다. 히라가 보기에는 오른쪽이었다. 따라서 시선을 옮기니 찢긴 흰 천으로 만든 발로 가려진 입구가 보였다. 그러나 아오사카가 그 앞에 딱 붙어 있었다. 이미 시체가 되어버린 아오사카의 상태를 확인한 히라가 초조해져 물었다.
“맞습니다. 딱딱해 보이는 안경을 썼어요. 보셨나요?”
“안 돼요, 쫓아가면. 저랑 똑같이… 아아. 하나라도 살아야… 그걸 더 원할 거예요, 분명.”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아오사카가 불현듯 힘이 풀린 듯 서 있던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히라는 그때를 틈타 오른쪽 숨겨진 공간으로 몸을 던졌다.
“안, 된다니까요…….”
아오사카의 차가운 손이 히라의 종아리를 깊게 감쌌다. 끔찍할 정도로 차가운 손에 목 안쪽에서 숨이 막혀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히라가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라도 떨어뜨리기 전에 아오사카가 먼저 떨어져 나갔다. 거기에 아오사카의 자의는 없었다. 퍼석하게 마르고 굳은 손이 팔꿈치 아래까지만 분리되어 히라를 따라왔다.
“헉. 으악…!”
이쯤 되니 히라의 얼굴도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히라가 히요리를 찾아 그리고 아오사카를 피해 발을 헤치고 구르듯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아오사카의 팔이 떨쳐 나갔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러나 심장이 더 이상 빠를 수 없는 속도로 뛰고 있었다. 도끼를 든 살인마에게 쫓길 때도 히라는 이 정도로 놀라지 않았다….
거칠어진 숨을 쉬며 히라가 몸을 낮춘 채 바깥 복도를 경계했다. 방금까지 히라가 있던 곳에서 다리를 질질 끄는 듯한 걸음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하지만 이곳으로는 들어오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지는 몰라도 아오사카는 히라를 더는 쫓지 않았다. 그럼에도 총을 품에 갈무리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래서 발견이 늦어졌다.
저 앞 단상에 놓인 거대한 촛대만이 이 방의 유일한 광원이었다. 히라가 빛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앞, 단상으로 향하는 짧은 돌계단 위에 누군가가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누워 있었다. 히요리였다. 몸 위에는 낮에 봐 두었던 흰색의 결혼식용 턱시도가 팔다리 모양에 맞춰서 놓여 있었다.
“히요리!”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운 법이었다. 아까는 그렇게 낯설고 어색했던 이름 세 음절이 쉽게도 나왔으나 히라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보다는 히요리를 찾았다는 사실 자체에 더 신경이 쏠렸다.
다가가 목덜미를 짚으니 아직 맥이 뛰었다. 히라가 잠시나마 안심할 뻔했지만, 히요리의 호흡은 시체보다 더 차갑고 얕았다. 게다가 목덜미를 짚은 손끝이 긴장으로 인한 땀치고는 과하게 축축했다. 뒤늦게 훅 풍기는 피 냄새에 히라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히요리의 키 두 배만 한 지름의 원 모양으로 읽을 수 없는 문자가 잔뜩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자는 히요리의 목덜미로부터 흘러내리는 피로 새겨졌다.
히라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히요리는 실혈사할 정도로 깊게 베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의 상처로부터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실혈사까지는 시간문제였다. 히라는 일단 꿇어앉은 무릎 위에 히요리의 머리를 올려놓았다. 지혈은 급한 대로 히요리가 입을 수도 있던 턱시도 넥타이를 빌렸다. 그리고 히라는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이마에서 떼어내며 직감했다. 저 입술에 입을 맞추어야 히요리가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방금까지 시체와 대화하던 비현실적인 일을 겪었으니 덩달아 이상해지기라도 한 모양이라고, 히라가 생각했다. 그러나 경험상 이런 터무니없는 직감은 대개 들어맞았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숨이 모자란 히요리가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입술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촉에 기겁하며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영 엉뚱한 짓을 해서라도 히라는 히요리를 살리고 싶었다. 히요리가 그랬듯이.
자연스럽게 칠석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불타는 빌딩 아래로 뛰어내리기 이전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 누구보다 끝내주는 결혼식을 올렸다는 자각은 있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히요리 혼자 주례사를 읊었다고 했다. 그러니 이 순간 다시금 주례사를 읊어 그때의 아쉬움을 채우고 싶었다. 한 벌뿐이지만 마침 결혼식 예복도 있었다. 히라가 피로 젖어 번들거리는 넥타이를 히요리의 목에 꾸욱 눌렀다.
“신랑, 카즈아키 히라와 미즈모토 히요리는, 일생의 동반으로서 서로를 깊이 존중하고, 이해하며.”
그러나 이해할 수 없어도 일생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히라는 알고 있었다.
“또한 고락을 함께하는 동료로서, 모든 고난 앞에서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때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목숨이 예물이었는데. 지금은 당신의 목숨이 예물이네요. 하하.”
히라가 자기도 모르게 기가 막힌다는 듯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러나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이 걸려 있지 않다면 오히려 이쪽이 더 자존심이 상했다. 가지고 싶은 것은 가지지 못한 적 없는 삶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히라는 가지고 싶은 것만큼 가진 것을 내어놓아야 하는 삶을 살았다. 그를 가르쳤던 사람들은 그것을 거래라고 불렀다. 그들의 가르침대로 거래하며 살면 뒷맛이 조금 더럽기는 해도 부족하지 않게 살 수 있었다. 단 하나, 이 감찰관님의 마음을 제외하고는.
가질 수 없는 것이 탐이 나 괜히 툭 건드려보는 일이 잦았음은 히라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요리가 히라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던 때가 있었으므로 지금은 히라가 웃음 뒤에 숨지 않아야 할 차례였다.
히라가 고개를 숙여 히요리의 입술 위로 맹세의 키스를 했다. 정확히 무엇을 맹세했는지는 히라만이 아는 키스였다.
살짝 건조하고 차가운 입술과 살짝 닿았다 떨어지자 입안이 무척 썼다. 피의 맛인 것 같았다. 히라가 고개를 들고 히요리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의식이 없는 사람을 눕혀 두고 일방적으로 키스를 이어가는 파렴치한은 아니었다.
그리고 히요리는 정말로 눈을 떴다. 다만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고 답지 않게 멍한 눈이었다. 히라는 잠시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
“……당신.”
히라는 히요리가 무언가를 말하게 두지 않았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히라는 히요리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머리가 핑 도는 기분에 히요리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일단 나갑시다. 밖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요.”
◉
흰 천을 걷고 복도로 나가자 걸어 다니는 시체의 수가 늘어있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히라와 히요리를 따라올 뿐 아오사카가 그랬던 것처럼은 접촉하려고 하지 않았다. 히라는 히요리 몰래 시체들의 얼굴을 살폈다. 아오사카는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얼굴 모를 실종자들이 둘씩 짝을 지어 붙어 있던 모습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히라의 부축을 받고 계단을 겨우 올라온 히요리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흰 입김은 더 이상 새어 나오지 않았다. 추위도 가신 상태였다. 그러나 피를 흘렸으니 체온이 떨어졌을 터였다. 히라가 안 그래도 창백한 히요리의 낯을 유심히 뜯어 보았다.
“내가… 왜 저기 누워있던 겁니까?”
“저도 모르죠? 전 단독행동으로 사라진 당신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처럼 자고 있는 걸 깨워준 죄밖에 없는데요?”
난데없는 공주님 취급에 히요리가 반사적으로 히라를 홱 돌아보았다. 당연하게도 목이 화끈거리며 아파져 왔기 때문에 상처 위를 꾹 눌러야 했다. 히라가 아이구, 유난을 떨며 히요리 가까이 붙어 휘청거리는 상체를 받아 주었다. 손끝에 닿는 히요리의 허리는 아직도 차가웠다.
하늘은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가장 어두울 때는 해가 뜨기 직전이라고 했다. 가로등의 빛은 있으나 마나 할 정도로 어두운 건물의 뒤편에서, 히라와 히요리는 이상할 정도로 서로가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평소보다 가까이 서 있다는 것으로는 이유가 부족했다. 검은색 색종이에 상대의 사진을 잘라 오려 붙인 것 같은 시야로 서로를 바라 보고 있자니 몹시 이상했다.
이 이상한 기분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하며 히요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딘가 흐물흐물해진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그런 목소리가 더 자연스러웠다.
“키스…… 했죠?”
히라가 펄쩍 뛰었다.
“깨어 있는데 안 일어나고 뭐 했습니까?!”
“몸은 안 움직였는데… 큼. 기억은 납니다.”
“목 아프면 말하지 마세요. 지금 구급차 부를 테니까.”
그러나 히라가 핸드폰을 꺼내 드는 일은 없었다. 히요리가 그럴 새도 없이 히라의 어깨에 손을 얹고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어라? 하는 사이 히라는 히요리를 품 깊숙이 끌어안은 모양새가 되어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미끄러지듯 입안으로 들어오는 히요리를 반사적으로 받아내며 히라가 허리에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화답하듯 어깨를 붙잡은 히요리의 손이 등 뒤로 흘러내렸다. 그런 와중에 히라는 아까보다는 따뜻해졌다는 태평한 생각이나 했다. 아까 그렇게 입안을 짓씹더니 볼 안쪽이 오돌토돌해졌다는 생각도.
“…….”
볼 일을 다 본 히요리가 히라의 옷깃을 멱살 잡듯 잡아 떨어뜨려 놓았다. 먼저 입을 맞춘 주제에 여전히 긴가민가한 얼굴이었다. 어딘가 꼬질꼬질해지고 흐트러진 잿빛 머리카락에서 히요리의 시선이 영 떨어지지를 않았다.
“……감찰관님 키스는 여전히 잘 못하시네요.”
적합한 반응은 아니었다. 히요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히라는 정말 멱살을 잡힌 꼴이 되었다. 그럼에도 히라의 입가에는 히죽 웃음이 샜다. 이번에는 고개를 틀어 입술을 맞부딪히며 히라가 눈을 감았다. 아직 일출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도 해가 뜨고 있는 것처럼 각막 안쪽이 노랗게 밝았다. 히요리는 그것을 살아남은 것에 대한 안도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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