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검

신검 결혼장려 포스터촬영일

신검 정략혼썰 세계관

창작세계관 신검 정략혼썰 기반

보고싶은 거만 쓴거

순신은 평소와 달리 조용한 아침소리가 낯설었다.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확인했지만 아직 기상 알람도 울리지 않은 상태였다. 저절로 눈이 떠진 후 얼마나 지났을까.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오늘 평소보다 더 일찍 나가야 한다고 그랬던가.’

순신은 시계 옆에 떠 있는 날짜를 확인하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렸다. 5월 10일. 오늘은 결혼장려 포스터를 찍는 날이었다.

정부는 때 아니게 결혼 장려 제도를 크게 확충했다. 국력을 키우고 차별화를 없애겠다는 말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주변 국가에 뒤처지기가 싫어서다. 모국이 하는 정책들 중 맘에 드는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순신은 개중 결혼장려 프로젝트는 꽤 좋아했다. 비교적 최근에 바뀐 생각이긴 하지만.

출근할 준비를 하고 있자 곳곳에 보이는 준경의 물품들이 이제는 퍽 기꺼웠다. 제 것이 아닌 물건이 제 공간을 침범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던 과거의 자신을 생각하면 놀라울 만한 변화였다. 결혼은 커녕, 연애도 생각하지 않았던 자신이 이제는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다니. 순신은 이를 닦으면서도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러나 그 표정은 세면대 거울에 비춰진 제 모습을 보곤 곧 사라졌다.

‘사랑은 보답받고 싶어진다더니……. 인간은 참 간사하군.’

거울 속에 비치는 제 모습은 몇 개월 전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은 분명, 준경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었다. 제멋대로 밀어내다가 제멋대로 좋아하게 된 놈을 그도 썩 반기지는 않겠지. 제가 과거에 한 짓들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거울에 박치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오늘 일정이 틀어진다. 그렇게 둘 순 없었다.

순신은 면도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하곤 그 어느때보다 최상의 피부상태를 만들었다. 오늘은 준경과 순신, 두 사람이 정략혼이나마 공식적인 부부가 된 이후로 처음 함께하는 작업이었다. 준경에게 마음을 준 지금으로선 처음으로 공적인 장소에서의 스킨십이 허락된 상황인 것이다.

오늘 포스터 촬영을 위해 사전 준비도 빠삭하게 해 놓았다. 준경에 비하면 제가 촬영 경험은 더 많을 터. 오늘 촬영에서는 스무스하게 그를 유도해 믿음직한 남편의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누군가를 공략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그 마음이 이토록 진심이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순신은 정복을 마저 차려입고 제 시간에 집을 나섰다. 오늘은 근무 없이 촬영에 집중하는 날이었기에 직장을 향하는 걸음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가벼운 느낌이었다.

“좋은 아침……, 이 중령?”

“좋은 아침입니다, 여 소위.”

잠깐 말을 멈추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소위를 향해 순신은 빙긋 웃었다. 평소 같으면 중령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 마디 덧붙였겠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콧노래를 부르며 스쳐지나가는 그를 보고 여 소위는 바로 옆에 있던 부하 하나를 덥석 잡았다.

“지금 내가 그 레어하다는 정복 이 중령님을 본게 맞나?”

“예!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여 소위는 큰 눈을 껌뻑였다.

‘정복이라면 무슨 일이 따로 있나본데……?’

제 4여단 명물인 이순신의 정복이라니. 절대 놓칠 수 없는 뉴스거리였다.

여 소위가 자리를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단 전체에 정복을 입고 출근한 이순신의 소문이 퍼졌다.

순신은 곧장 촬영이 예약되어있는 세트장으로 향했다. 세트장에는 일찍부터 준비하느라 바쁜 스태프들과 컨셉을 상의하는 마케팅 부의 몇몇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순신은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준경은 보이지 않았다.

“이순신 중령님! 일찍 오셨네요. 아직 촬영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았는데…….”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은 이번 촬영의 조연출인 박대금이었다. 순신은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해보이곤 주변을 마저 훑었다.

“아직…….”

“아, 척준경 중사님은 아직 안 오셨습니다. 촬영 전에 긴급 일정이 있다고 연락은 주셨는데, 아마 촬영시간 전까지는 오실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셔서요.”

“……혹시 어디 계시는 지 압니까?”

“동건물 3층 어디라고 들었는데 자세히는 모르겠네요. 모시러 가시게요?”

조연출이 묘한 눈빛으로 이순신을 살펴봤지만 순신은 눈치채지 못했다. 동건물 3층이면 그리 멀지는 않으니 굳이 마중갈 필요까진 없었다. 국가 프로젝트인 만큼 윗선에서도 쓸데없는 압력을 넣진 않을테니 늦지도 않을 거였고.

그러나 어쩐지 순신은 그를 찾으러 가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조연출이 누군가를 불렀다.

“중령님 짐은 대기실에 옮겨두겠습니다. 간단한 자료도 있는데 가져가시겠어요?”

“돌아와서 보……, 아니, 가져가겠습니다.”

순신은 들고 온 짐을 조연출이 부른 스태프에게 맡기고, 건네받은 유인물을 들고 동건물로 향했다. 어쩐지 새색시를 마중가는 새신랑이 된 것 같은 기분에 가슴 한켠이 간질간질했다. 이미 결혼도 했는데 대체 왜 이렇게 쑥쓰러운 것일까. 순신은 들뜨는 마음을 누르기 위해 안쪽 볼을 짓씹으며 걸음을 옮겼다.

평소에도 귀티나는 미남으로 유명한 이순신이었으나 근무복이 아닌 정복을 입은 모습은 더더욱 빛이 났다. 그저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복도를 런웨이로 만드는 남자가 등장하니 시선이 모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우아한 정복까지 갖춰입자 어느 나라의 왕자라고 해도 믿을 만한 존재감이 뿜어져나왔다.

“오늘 눈 호강하는 날이네. 뭔 날이래?”

“오늘 촬영 있으시답니다.”

사무실 안팎으로 이순신에게 몰리는 시선이 점점 더 늘어갔다. 본래 시선을 끌고다니는 것이 익숙한 터라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지만. 그러던 도중, 3층 어느 곳에서 준경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닫고 걸음을 빨리한 순신은 막 문을 닫고 나오는 준경과 마주쳤다. 정복 모자를 손에 든 채 제 쪽으로 몸을 돌리는 준경 또한 단정하게 정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순신은 그 순간 제게 몰렸던 모든 이목을 다 차단해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다.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제게 비춰지는 준경의 정복차림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다듬었지만 모자를 벗느라 살짝 흐트러진 머리와 신경써서 면도한 얼굴. 모자를 들고 있는 손에는 흰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심지어, 순신은 저 흰 장갑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준경이 실수로 같이 세탁해버린 제 장갑에서도 나는 특유의 섬유유연제 향. 같은 집에 살고 가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제 물건에도 배어버린 그 향.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순신은 한손으로 제 코와 입을 가렸다. 숨을 들이키면 제 장갑에서도 그와 같은 향이 날 것이다.

순신이 숨도 차마 들이키지 못하는 상태로 서 있자, 준경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중령님……? 혹시 절 데리러 오신 겁니까.”

“아, 예. 그렇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어쩐지 떨떠름한 듯한 준경의 대답에 순신이 급하게 덧붙였다.

“오늘 촬영 컨셉에 대해 상의하고 싶어서 미리 찾아왔습니다. 가는 길에 잠깐 이야기 나누시죠.”

“좋습니다.”

곳곳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공과 사를 나누는 것이냐, 소문대로 정략혼이라 연애감정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등등. 순신은 그런 수군거림에 억울하기까지 했다. 마음 가는 대로 하려면 상대에게 속을 까뒤집어 보여줘도 모자랄 판인데 심지어 보통 사내커플도 아니었으니까. 두 사람 다 하나의 가문을 짊어지고 있는 장남이었다. 계산하지 않은 행동은 보이지 않게끔 키워진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그게 장애물이 되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순신은 안그래도 어려운 관계를 더 어렵게 만들어버린 지난 과거의 자신을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속으로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준경의 곁에서 웃어보여야 했다. 그것이 우리가 짊어진 무게였다.

준경은 스튜디오로 가는 내내 진중한 표정으로 순신의 브리핑을 들었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흠 하고 탄성을 내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촬영에 진지하게 임하는 태도를 보였다. 촬영장에 도착해서도 일관적인 태도였다. 순신은 준경의 그런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졌다.

‘오늘 촬영을 빌미로 그에게 닿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밖에 안 하고 있었던가.’

비록 정략혼이고, 서로에게 애정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결혼이 아니기는 하나 오늘 촬영의 주제는 결혼 장려 포스터였다. 이 사업의 운영을 위해 맺어지게 된 거나 다름없는 당사자들이었다.

이 결혼을 멀쩡히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촬영이었다. 순신은 함께 하는 준경의 평판을 위해서라도 연출가의 지시에 따라 가장 완벽한 결과물을 내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촬영은 전체적으로 행복하고 기쁜 모습, 상대가 있기 때문에 더 만족스러운 하루하루. 이런 느낌으로 진행할 거예요. 아까 컨셉설명은 읽어보셨다고 했으니까 문제 없으면 바로 촬영 시작하죠.”

“처음은 정복 입은 채로 가겠습니다~ 선전 포스터 느낌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와 함께 하시죠~ 이런 느낌 보여주시면 됩니다!”

조명이 켜지고 가장 기본적인 정복 차림의 군인 부부 사진을 몇 장 찍는 듯했다. 포즈는 정해진 것이 몇 개 있었기에 준경과 사전 합의도 해둔 상태였다.

“두 분, 조금만 더 붙을게요~!”

그러나 일반적인 커플을 기반으로 한 포즈나 분위기를 정략혼으로 맺어진 두 남자가 소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촬영 자체가 익숙한 순신 조차도 감을 잡기 어려웠으니 준경은 오죽했을까.

순신은 준경의 곁으로 몸을 조금 더 기울였다. 촬영이 어색한 준경을 위해 제가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없을지 고민을 계속했다.

준경과 몸이 살짝 붙은 채로, 순신이 작게 속삭였다.

“카메라는 지금 불 들어온 곳. 저기서 찍습니다. 카메라 보라고 하기 전까지는 그냥 시선 편하게 두시면 될 겁니다.”

“어디를 봐도 어색하기만 합니다만…….”

“그럴 땐 저를 보시면 됩니다.”

순신은 촬영 중에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온통 낯선 것들이 가득한 이 곳에서 수많은 시선 끝에 서 있는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것 또한. 그래서 조금이나마 익숙한 것에, 자신에게 시선을 두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시선을 맞춰오는 준경을 보곤 제 말을 급히 후회했다. 심장이 지나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분위기를 만들기는 커녕,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것조차 이렇게 떨리는데 무슨 조언이란 말이야.’

혼신의 힘을 다한 포커페이스를 가장한 순신이 다시 시선을 맞추자 준경이 씩 웃어보였다.

“믿음직하네요.”

순신은 제 심장박동이 도무지 진정하지 못하는 것을 깨달았다. 별말 아닌데도 불구하고 준경이 제게 하는 말이라는 것이, 이 상황에 흑심밖에 없는 저를 순수히 믿어준다는 것이 너무 고맙기도 하면서 동시에 배덕한 기분에 휩싸였다. 조금이라도 이 상황을 타파할 만한 것이 필요했다. 그러지 않으면 포커페이스가 무너질 것만 같았다.

“……다음엔 이 포즈를 해볼까요.”

군인에게는 아주 익숙한 경례포즈. 이거라면 잠깐 시선도 떨어질테니 마음을 재정비할 여유가 주어질 테였다. 순신은 필사적으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촬영에 몰입하기 위해 애썼다.

“아~ 완벽합니다! 다음엔 서로 등을 마주댄 포즈 부탁드립니다!”

경례 포즈는 아니나 다를까 오케이가 빠르게 났다. 다음 포즈를 연출가의 지시에 따라 취하자 조연출의 손이 파닥였다.

“중사님, 조금 더 중령님께 기대는 듯한 느낌으로요!”

미묘한 거리에서 느껴지던 체온이 등뒤에 직접 와 닿았다. 두꺼운 재질의 정복이 아니었으면 이성의 파라미터가 터졌을 뻔했다. 키는 순신보다 조금 작지만 넓고 단단한 등이 마주 닿는게 느껴졌다. 그게 오랫동안 홀로 갈고닦은 결과라는 것을 순신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저보다 더 많은 전장을 헤치고 살아남아온 그 등을 감히 저 따위가 지지할 수 있을까. 제게 말하지 않은 많은 비밀들이, 준경의 역사가. 과연 제가 마주대어도 되는 가치였을까.

“조금만 더 푹 기대주세요! 중령님도요!”

순신이 혼자 어떤 고뇌를 하든 촬영은 이어져야만 했다. 조연출의 지시는 계속되었고 제게 묵직하게 기대져오는 등을 가볍게 마주 밀며 순신은 발끝이 저릿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 공표되어지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와의 스킨쉽이 보여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순신은 처음 고백을 앞둔 소년처럼 부끄러워졌다.

“……촬영이란 거, 쉽지 않네요.”

“그렇……죠. 이번엔 손이라도 잡아 보시겠습니까?”

테이블에 턱을 괴고 서로를 바라보는 포즈를 취한 상태에서 준경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순신은 겨우 대답하는 꼴을 숨기기 위해 부러 과장된 액션을 취했다. 어떻게든 이 촬영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싶은 마음과 조금이라도 준경에게 믿음직하고 리드하는 남편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삐걱이는 순신을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순신에게 잡힌 손을 주춤거리다 완전히 내어준 준경이 작게 속삭였다.

“리드하시는게 익숙하신 듯합니다.”

“……예?”

“촬영, 자주 해보셨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본 것도 있고.”

“제가 찍은 포스터들 말입니까? 보셨습니까?”

“아무래도 안 보기는 어렵죠.”

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신은 제 바람이 그에게 들킨 것 같아 귀끝이 뜨거워졌다.

조명이 펑펑 터지는 가운데 준경이 조그맣게 덧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중령님 잘생긴 거야 여기서 보통 유명한게 아니잖습니까.”

순신은 순간 준경의 손을 쥐고있던 손아귀의 힘을 꾹 주다 급히 풀어냈다.

그래, 이건 보편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중사님이 제가 잘생겼다고 얘기한 게 아니다.

그러나 무심하게도 심장은 그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듯 시끄럽게 쿵쾅댔다. 오늘 귀를 가릴 수 있도록 머리를 내리고 온 상태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새빨개진 귀로 인해 다 들통났을 테니까.

“그렇… 크흠, 습니까.”

가까스로 대답하자 준경 또한 예, 하고 짧게 대답했다.

다행이었다. 중사님이, 준경이 자신에게 잘생겼다고 직접적으로 칭찬했더라면 촬영을 잠깐 쉬어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이도 일이 그렇게까진 안 번질 것 같았다.

“중사님도 정복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자주 못 보는게 아쉬울 정도로요.”

“중령님만 하겠습니까. 여기 있는 누구라도 중령님한테는 반할겁니다. 그렇게되면 제가 조금 곤란하겠지만요.”

무난한 대답을 골라 답하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신을 비웃듯, 준경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타임아웃. 순신은 손을 번쩍 들었다. 지금 흐름을 끊지 않으면 정말로, 정말로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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