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라페 샌드위치

삼거리 이자카야에서 만나요

20240520 연성교환작: 당근 라페 샌드위치 7천자

삼거리 이자카야에서 만나요

그런데 당사자가 좋다고 하면 괜찮은 거 아닌가요?

 공백 포함 7631자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어….”

“으억, 네?”

“아…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오늘 퇴근하고 일정 있으세요?”

“오늘… 이요? 일단 오늘은 없는데요.”

“그럼…… 오늘 저녁 같이 하실래요?”

“저녁요? 좋아요.”

“감사합니다…. 좋아하시는 메뉴, 있으신가요?”

“저 다 잘 먹어요. 아, 요 앞 삼거리에 새로 생긴 이자카야도 좋을 것 같은데요. 생맥이 맛있대요, 거기가.”

“퇴근 후에 삼거리에서 뵐까요.”

“그래요. 제 번호… 없으시겠구나. 지금 드릴 테니까 연락해 주세요. 아마 제가 먼저 끝날 것 같긴 한데.”

“네, 그, 그럼… 이따….”

“이따 봐요. 아이고, 자, 건널목을 건널 땐 손을 들고 건너야지요~.”

나쁠 것 없는 대화였다. 5월답게 날씨는 끝내주게 화창했고, 사토라 네무는 드디어 붉은 머리의 유치원 선생님에게 말을 걸어 보았으며, 가볍게 저녁 약속을 잡았고, 스무스하게 연락처까지 교환했다. 그의 이름이 치나미 레온인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한자를 쓰는 줄은 몰랐다. ‘0’을 뜻하는 떨어질 령에 동산 원을 쓰는구나. 네무는 스마트폰 연락처에 저장된 치나미 레온의 이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얼마나 오래 보고 있었는지 건널목 보행자 신호가 다 끝나고서도 보행자용 깃발을 앞으로 펴놓고 있어서 지나가는 자동차에 부딪힐 뻔했다. 네무는 그래도 좋다고 미소 짓는 동시에 티 나는 웃음을 참느라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문제가 있다면 사토라 네무는 방금 치나미 레온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는 점이다. 레온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지만.

왜냐하면 두근거림을 필사적으로 감추느라 죽을힘을 다하던 사토라 네무가 약속을 잡으면서 ‘데이트’라는 단어를 빼먹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또 사토라 네무가 치나미 레온과 데이트를 할 수 있다면 이자카야라는 최악의 데이트 장소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사랑에 빠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토라 네무와 치나미 레온은 지난달 바로 이 건널목에서 처음 만났다. 레온이 일하는 유치원의 등·하원 시간에 맞추어 네무가 노란색 조끼를 입고 노란색 보행자용 깃발을 들고 건널목에 서 있을 때, 등·하원을 지도하느라 유치원생들과 함께 손을 들고 건널목을 건너오는 레온과 마주친 것도 만났다고 할 수 있다면.

도심 외곽의 주택 단지는 한적한 데다가 아이들도 많아서 네무와 레온에게는 최적의 직장이었다. 이곳에서는 이렇다 할 사건 하나 일어나지 않아서 파출소에 걸려 오는 전화라고는 할머니를 찾아달라거나 잃어버린 지갑을 주웠다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평화와 안정을 사랑하는 네무에게는 이만한 근무지도 없었다. 순경의 주요 업무는 치안을 정비하는 것이지만,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언제나 순경이 크게 할 일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네무는 평화로움으로부터 기인하는 무료함을 즐겼다. 유동 인구가 많지 않은 주택 단지에서는 언제나 아는 얼굴들 그리고 평화로운 일상뿐이었다.

네무는 사교적인 편은 아니었으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의 인사까지 무시할 정도로 못된 사람은 아니었다. 올려다보기에는 큰 키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그에게 인사하는 아이들은 늘 붉은 머리의 유치원 선생이 지도하는 튤립 반 아이들이었다. 노란 조끼를 입고 노란 깃발을 든 채 한 달 동안 매일 건널목에서 마주치다 보니 어느새 반가움이 가슴에 고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네무는 깨닫고 있었다. 심장은 단순한 반가움으로 이렇게 간지럽게 콩닥콩닥 뛰지 않는다는 것을.

평화로운 주택 단지는 그만큼 아이들이 자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서 다른 도시에 비해 유치원 수가 많았다. 덕분에 레온은 큰 어려움 없이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노란 튤립 모양 주머니가 달린 분홍색 앞치마를 입고 아이들과 장난감 블록을 쌓거나 간식 노래를 부르는 일은 놀랍도록 레온의 적성에 맞았다. 흉터 따위는 큰 장해물이 되지 못했다. 입가의 흉터가 무섭다며 빼앵 울어버리는 신입생도 레온의 다정다감한 태도에 몇 주 이내로 레온 선생님을 좋아하게 됐다. 기존 원생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인기 만점이었다.

근무 중인 교사 중 체력이 가장 좋다는 이유만으로 한 달 전부터 갑자기 원생들의 등·하원 지도를 맡게 되었지만, 직장에 대한 레온의 만족도는 높은 편이었다. 건널목 앞에서 유치원생들을 통제하는 것은 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기는 했어도, 집 앞 골목에서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하며 꾸벅 인사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고되었던 마음도 사르르 녹았다.

그런 레온에게 문제가 있다면 한 달 전부터 유치원 근처 건널목을 통제하는 순경 하나가 신경 쓰인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 순경의 키가 어림잡아도 190에 가까울 정도로, 보기 드물게 커서 그런 것이겠지. 시원시원하게 뻗은 팔다리와 아이들을 몹시 조심스레 대하는 태도의 조합이 재미있어서 그런 것이겠지. 이제 한 달 됐지만 앞으로도 계속 튤립 반 아이들과 건널목에서 마주쳐야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겠지. 그러나 그 어떤 이유를 붙여도 정확히 설명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정확한 이유를 찾기 위한다는 명목 아래 레온의 신경만 더 그 사람에게로 쏠렸다.

이 기묘한 신경 쏠림과 이유 모를 안절부절못함을 참지 못하고 레온이 먼저 말을 붙여버린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은 서로의 이름과 간단한 안부와 목례 정도는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아무리 평화로운 주택가에서 근무한다지만, 어떻게 순경이 되고 순경 일을 하나 싶을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보고 이제는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는데도 더 신경이 쓰였다. 자기를 볼 때마다 반가운 듯 웃는 그 순경의 표정보다는 차라리 손을 들고 씩씩하게 길을 건너는 튤립 반 아이들이 더 야무져 보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 레온은 한 달 동안 꼬박 신경 쓰이게 하던 키 큰 순경님에게서 저녁 약속 제안을 받은 참이었다. 레온은 기쁘게 승낙했다. 흔쾌히 번호도 교환했고 이름 네 글자도 어떻게 쓰는지 알게 되었다. 동료 유치원 선생님 말고도 퇴근 후 같이 놀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둘 사이 커뮤니케이션이 한참은 잘못된 줄도 모르고.

아니, 사실은 레온의 들뜬 정도를 생각하면 새로 친구가 생긴 사람보다는 데이트 신청을 받은 사람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인지를 못 하고 있다는 점이 정말 큰일이라면 큰일이었다.

 

레온이 유치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튤립 반 친구까지 모두 잘 통솔해서 유치원 대문을 막 넘어섰을 즈음, 네무는 누가 보아도 기뻐서 얼굴 근육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파출소로 귀환했다. 노란색 조끼에 노란색 보행자용 깃발을 돌돌 말아서 품에 소중히 들고 있는 네무는 극악무도한 톤 그로의 노란색 조끼에도 불구하고 정말 행복해 보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파출소 안의 모두가 시선을 교환했을 정도였다. ‘아, 쟤 드디어 데이트 신청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지난 한 달 동안 혼자 마음 앓다가 갑자기 헤실거리기 시작하는 사람을 보면 괜히 콕 찔러보고 놀려 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라서, 시선을 교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는 총대를 매야 했다.

“드디어 데이트 가는 건가요?”

라고 물어볼 총대를.

‘데이트’라는 단어에 반응한 네무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란색 조끼를 벗자 안 그래도 밝았던 낯빛이 등 뒤에 광배가 나타난 것처럼 몹시도 살아났다.

“오늘?”

네무가 더 밝게 웃으며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십니까?”

연애 이야기를 좋아하는 막내 순경이 가림막 끄트머리에서 머리를 불쑥 내밀고 물었다. 네무 못지않게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파출소가 관리하는 지역은 지나치게 평화로웠기 때문에 파출소 순경의 연애 이야기마저 화제가 되고는 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이야기가 아니면 화제가 될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런 노골적인 관심에도 네무는 불쾌한 기색 없이 정직하게 답했다.

“삼거리에 새로 생긴 이자카야요.”

그리고 그 순간 파출소 전체가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해졌다. 복작복작 들뜨기 시작했던 따뜻한 분위기는 말 그대로 누가 얼음물을 쏟아부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파출소를 지배한 단 하나의 생각은 이랬다.

대체 누가 첫 데이트로 이자카야에 가는가?

“이, 이상해요? 레온 씨가 먼저 가자고 한 곳인데요….”

그러니까 대체 누가 상대방이 제안했다고 냅다 첫 데이트로 이자카야에 가냐고요.

즐거운 듯 시선을 교환하며 놀릴 준비를 하던 동료 순경들의 표정이 차게 가라앉고 공허한 시선만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마구 교환되고 있어도 네무는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다. 사실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닐지도 몰랐다. 이자카야가 통상적으로는 첫 데이트 장소로 부적절하다고는 해도 서로 좋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이자카야는 첫 데이트 장소로는 ‘부적절’한 수준이 아니라 ‘최악’의 선택 수준이라는 것에 파출소의 전원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 최악의 선택을 그 레온 씨라는 사람이 먼저 제안했다고? 총대를 매고 네무에게 가장 먼저 질문했던 순경이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늘 끝까지 자신이 총대를 매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사람도 뭔가 이상하네. 보통 데이트 가자는 사람한테 이자카야 가자고 하나?”

레온 씨는 이상하지 않다고 항변하려던 네무가 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얼음물을 쏟아부은 수준이 아니라 냉동실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얼굴까지 창백해졌다. 건널목 앞에서의 대화를 떠올리고 난 다음에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깜빡하고 데이트인 걸 말 안 했다.”

아아. 전원 탄식을 뱉었다. 그러나 그들이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오늘 약속이 ‘데이트’라는 것을 까먹고 말하지 않은 네무가 책임지고 혼자서 데이트 나가고 첫 데이트로 이자카야 가는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네무를 제외한 다른 순경들은 금방 모두 관심을 잃고 힘을 내라는 듯 안쓰러운 시선을 한 번씩 보내준 다음, 다시 일거리 없고 무료한 책상에 앉아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네무는 한 손에는 예쁘게 만 노란 깃발을, 다른 손에는 노란 조끼를 들고서 멍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도 관심 주지 않았다. 사실은 이 저녁 약속이 데이트였음을 약속 장소에 나가서 레온에게 어떻게 설명할지를 고민하는 네무보다는, 그래서 결국 데이트였다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저녁 약속에 나가서 바보처럼 굴다 온 네무가 훨씬 재미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네무는 깃발과 조끼를 계속 손에 들고 있었기는 해도 곧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하루 종일 멍한 태도였으나 그래도 해야 하는 것은 다 했다. 근처 편의점 CCTV를 확인해서 길 잃은 할아버지 한 분을 집에 모셔다드리고 분실물로 들어온 지갑에 들어있는 신분증을 보고 주인을 찾아주었다. 그러다 보니 무료한 일상일지라도 퇴근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말았다.

네무가 시계를 봤다가 책상에 앉기를 반복하는 것을 본 동료 순경이 네무의 등을 떠밀었다. 평소보다 30분 정도 이른 퇴근이었다. 약속에 안 나갈 수는 없었다. 레온하고 단둘이 만나는 첫 약속이었기 때문에. 네무는 비척비척 멍하게 집에 들러서 나름 멋을 부려서 옷도 갈아입고 나왔다. 전날부터 깔끔하게 다림질한 흰 셔츠와 네무의 머리색과 똑같이 어두운색으로 무난한 재킷이었다. 한쪽만 데이트라고 생각하기는 해도 레온에게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어떻게 삼거리에서 레온과 만났는지 모를 정신으로 네무는 어떻게든 레온과 만났고, 20여 분을 기다려서 이자카야에 자리를 잡았으며, 레온에게 대충 다 좋다고 말하며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좁고 시끄러운 이자카야 구석에 레온과 지나치게 가까이 앉아 있었다는 뜻이었다. 늘 보던 튤립 앞치마를 벗고 밝은색의 맨투맨을 입은 레온은 엄청 귀여웠다. 네무는 혼자 설레서 또 정신을 놓을 뻔했지만, 다행히도 때맞추어 나온 얼음 생맥주 두 잔 중 하나를 양손으로 끌어안듯 가져오면서 정신을 차렸다. 새로운 충격 요법이었다. 오늘 파출소 안을 조용하게 만들었던 것과 비슷하지만 다른.

“괜찮으세요?”

넋이 어딘가 나가 있는 네무의 생맥주잔에 혼자 짠, 부딪힌 다음 레온이 물었다. 오늘 마실 기분 아니라면 안 마셔도 돼요. 아이들에게 그러는 것처럼 다정하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무는 순간 마음 안쪽에서 울컥 치밀어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괜찮아요.”

누가 봐도 안 괜찮은 목소리로 대답한 다음, 네무는 생맥주를 들이켰다. 그러나 멋있게 생맥주를 쭈욱 들이키려는 행동은 얼어서 슬러시처럼 밀도가 높아져 버린 거품에 막혀버렸다. 네무는 다시 기분이 안 좋아졌다. 왜 이렇게 레온 앞에서는 바보처럼 엉성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지 몰랐다.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레온 씨는….”

“어, 이름 부르네? 그럼 나도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아까 삼거리에서 만났을 때부터 들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레온에게 네무는 무력하게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미안, 조금 신나서. 그래서 하려던 말은 뭐였어, 형?”

물 흐르듯 말까지 놓은 레온이 자세를 고쳐잡으며 다시 물었다. 이상하게도 아까보다 더 가까워졌다. 아직 주문한 안주가 나오지 않은 테이블은 휑했다, 네무는 기본 안주로 나온 풋콩 꼬투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레온은… 첫 데이트로 이자카야 오는 거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응? 그건 상대에 따라 다르지 않아?”

턱을 괴고 네무 쪽으로 잔뜩 기대어 앉은 레온이 답했다. 레온은 풀이 죽어서 콩만 내려다보는 네무의 얼굴을 보면서, 아침에 약속을 잡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엄청 좋아 보였던 네무가 왜 이렇게 가라앉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파출소에서 무슨 일이 었었던 걸까? 하지만 레온이 알기로는 네무가 일하는 파출소는 이렇다 할 큰 사건이 접수되지 않아서 심심하기까지 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유가 어떻든 간에, 감추고 싶어 하는 것 같기는 했어도 삼거리에서 만났을 때부터 계속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던 상대를 앞에 두고 후루룩 요비스테까지 하고 나서야 레온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혼자만 신이 났나 싶어서 머쓱해졌다. 그런데 그쪽이 먼저 이름 불렀잖아요, “레온 씨”라고. 고작 그 세 음절에 이상할 정도로 흥분한 것도 사실이라서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레온은 생각했다.

“레온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나야 뭐… 괜찮지? 난 이자카야 좋아해.”

“그래?”

너무나도 극적인 표정 변화에 레온이 눈을 깜빡였다. 아, 이 형 취했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로 활짝 미소 짓는 얼굴은 레온이 보아 왔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밝았다. 어느 정도냐면 머리 뒤로 광배가 떠오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저도 괜찮아요. 레온이 괜찮다면 뭐든.”

그렇게 말한 네무는 “건배해요.” 하더니 시원하게 잔을 부딪쳤다. 잔에 한가득 쌓여 있던 얼음 거품이 와르르 쏟아졌다. 노란 액체 밑으로 흰 얼음이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면서 레온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방금 그 말로 네무가 자신의 마음을 툭 건드린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위에 쌓여 있던 묘하게 들뜬 기분이 와르르 쏟아져서 그 밑에 있던 마음이 드러났다. 아침부터, 정확히는 한 달 전부터 네무를 볼 때마다 묘하게 간질간질거렸던 기분, 갑자기 저녁 약속을 잡던 오늘 아침, 이상하게 긴장한 것 같았던 네무의 얼굴, 간단한 저녁 약속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빳빳했던 셔츠 깃, 그리고 이자카야 좋아한다는 말에 갑자기 밝아진 네무의 표정까지.

“이거…….”

첫 데이트로 이자카야에 온 사람치고는 무척이나 밝게 웃는 네무의 얼굴을 보며 레온이 할 말을 찾으며 어버버거렸다.

“데이트였어?”

그 모든 것을 마침내 깨닫고 만 레온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 이 형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이 형도 나 좋아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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