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열백호]엄중 경고!

짝사랑을 자각한 양호열이 스스로에게 하는 경고. #호열백호_한주전력 #얼마나_231021

*대사 “알아, 네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사용.

“다시 한번 경고한다.”

양호열이 사납게 인상을 구겼다. 2학년 끝 무렵에 해동중을 장악하고 3학년이 된 양키의 기백은 상대가 누구든 벌벌 떨며 도망가게 만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상대는 도망가지 않고 맞서듯 똑같이 인상을 구겼다. 당연한 일이었다.

호열은 지금 거울 속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또 그렇게 웃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말랑말랑한 뺨을 잡고 죽죽 늘렸다. 요즘 호열은 요놈의 얼굴 근육 때문에 곤욕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양손으로 뺨을 꾸우욱 눌렀다. 입술이 붕어처럼 튀어나왔지만 헤실헤실 바보처럼 풀어지는 것보다야 나았다.

“자꾸 이러면, 어? 다른 녀석들이 알아차릴지 모른다고!”

하도 같이 다니다 보니 이제는 백호군단으로 불리는 녀석들은 바보긴 해도 눈치가 없진 않았다. 김대남은 특히 요주의 인물이었고 이용팔도 제법 눈썰미가 매서웠다. 노구식은 다른 두 녀석보단 못하긴 하는데 그래도 강백호보다는 눈치가 있었다.

강백호보다는…….

“하아아아…….”

호열은 이름만 떠올려도 두근거리는 심장에 가슴을 퍽퍽 두들겼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첫사랑의 난도가 너무 높았다. 2년 넘게 같이 다니며 별꼴을 다 본 녀석에게 반해버리다니!

약간 분하다는 감정까지 든 그는 거울을 보며 다시 스스로에게 엄중히 경고했다.

“오늘은 정말 안 웃는 거야. 웃어도 입꼬리만 살짝 올리라고. 알았어? 바보 같은 웃음은 집어치워!”

사실 호열도 자신이 백호를 보며 어떻게 웃는지 알지 못했다. 웃다가 갑자기 거울을 볼 수는 없으니까. 그것도 백호랑 같이 있는데 어떻게 한눈을 팔겠는가.

문제는 백호를 제외한 다른 세 녀석은 그를 똑똑히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며칠 전 점심시간이 끝나고 호열만 따로 슬쩍 불러낸 대남은 이렇게 말했다.

‘너 백호한테 바보가 옮은 거 아니냐? 걔랑 있을 때 얼마나 바보 같은 표정인지 모르지?’

당연히 몰랐다. 백호 보느라 바빴으니까! 그 말을 듣고 며칠 동안 호열은 자기 상태를 점검해 봤다. 짝사랑을 깨닫게 된 지는 반년 정도 지났으니 그런 마음은 꽁꽁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백호만 보면 저항 없이 활짝 웃어버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이렇게 스스로에게 엄중 경고를 날리고 있는 것이다.

“좋았어. 오늘은 느낌이 괜찮은걸?”

호열은 여전히 와락 인상을 쓴 채로 집에서 나왔다. 집 근처 담벼락엔 새 학기 기념으로 어렵게 장만한 중고 스쿠터가 주차되어 있었다.

스쿠터의 핑크색을 보자 호열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핑크색 스쿠터… 백호가 잡지에서 보고 엄청 크게 웃었었지. 그래서 골랐는데 이거 보고 놀란 얼굴이 진짜 귀여웠…….’

“핫!”

방심했다! 호열은 하마터면 백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웃을뻔한 자신의 뺨을 챱챱 때렸다.

“정신 차려!”

그는 다시 엄격하고 근엄하고 불량한 표정을 한껏 지으며 스쿠터에 올랐다. 백호에게 첫날 등교는 스쿠터 타고 함께 하자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호열은 운전하는 내내 심각하고 슬픈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비록 싱그러운 봄이 시작되는 4월 초는 아침부터 따사로운 햇빛을 내리고 있었지만. 어딘가에서 날아온 벚꽃 향이 스치는 바람에도 선명하게 느껴져 가슴이 간질간질했지만. 학기 첫날부터 짝사랑하는 상대를 스쿠터 뒤에 태우고 등교하러 가는 중이지만!

아무튼 집 식탁에 널브러져 있던 조간신문 1면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었는지 떠올리며 표정을 다잡았다.

‘어, 백호다.’

저 멀리 빨간 머리가 보인다. 집중해서 운전하다 보니 약속한 시각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백호는 이미 집 앞에 나와 있었다. 스쿠터 소리를 들었는지 이쪽을 바라본 백호가 긴 팔을 번쩍 들며 활짝 웃었다.

“오, 호열아!”

호열은 속으로 단말마와 같은 비명을 질렀다.

‘젠장, 난 틀렸어!’

양쪽 입꼬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애써 힘주고 있던 눈도 힘이 빠지며 큰 호선을 그렸고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묻어났다.

“어! 백호야!”

바보 같은 얼굴로 웃어버린 호열을 백호는 반갑게 맞이했다.


중학교 3학년. 낭랑 16세 호열은 철학적인 고민에 사로잡혔다.

‘대체 사랑이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 바보로 만드냐.’

다섯 명의 백호군단 중 가장 똑똑한 사람을 고르라 하면 호열은 당당하게 자신을 고를 것이다. 다른 녀석들은 바보니까 의견을 구할 필요도 없었다. 호열은 다른 학교 놈들과 패싸움할 때 흐름을 읽을 줄 알았고, 친구들이 위험할 때 적재적소에서 치고 빠질 줄도 알았다. 1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터라 나름 사회생활도 했으며 일머리 좋다는 칭찬도 많이 들었다(뒤에 꼭 나이답지 않게, 양키답지 않게 라는 말이 붙는 건 좀 불만이었지만).

이런 건 학교 성적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똑똑함이다, 라고 호열은 혼자 생각했다.

아무튼 그런 자신이 백호 앞에서는 이렇게까지 바보처럼 군다는 게 정말 말도 안 됐다.

“호열아, 그거 맛있냐?”

당당하게 옥상을 차지하고 매점에서 쓸어온 빵으로 배를 채우던 점심시간. 제 몫의 빵을 게 눈 감추듯 먹어버린 백호가 친구들의 일용할 양식을 탐내기 시작했다. 이미 김대남 외 두 명은 강백호 기준 한 입 일반인 기준 다섯 입을 털린 상태.

아무리 많이 먹어도 돌아서면 배가 고픈 청소년기에 한 입만을 시전하는 건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싸움 날 여지가 되건만. 호열은 초롱초롱 빛나는 백호의 눈이 너무 예뻐서 냉큼 자신의 빵을 내밀고 말았다.

“응. 먹어 볼래?”

“엉!”

둥글둥글 보름달 같던 메론빵이 거대한 티라노의 입질에 초승달이 되었으나 호열은 양 볼이 빵빵해져서 행복하게 웃는 백호를 귀엽게 볼 뿐이었다.

“…….”

“…….”

“…….”

흠칫. 따가운 시선에 돌아보니 티라노 입질의 다른 피해자들이 호열을 노려보고 있다. 뒤늦게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자각한 호열이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 이 정도는 친구끼리 괜찮지 않아?


아니. 딱히 괜찮지 않았다.

호열은 백호가 졸리다니까 무릎베개도 해 주고(자는 얼굴이 귀여워서 내내 봐도 질리지 않았다), 방과 후에 출출하다길래 카페에 가서 파르페도 사주고(저렇게 커다란 녀석이 딸기 하나에 히히 웃는다니 이거 괜찮은 거냐? 귀엽잖아!), 아직 집에 가기 싫다는 말에 오락실에 데려가 실컷 놀아주었다(자꾸 져서 성질내는 얼굴까지 귀여울 일인가?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온종일 백호 옆에 붙어 있으면서 하도 웃었더니 얼굴 근육에 경련이 올 지경이다. 아, 그래도 너무 재밌었다. 역시 백호는 재밌고 귀여워…….

‘어라, 뭔가 까먹지 않았어?’

스쿠터를 타고 백호를 집까지 데려다주던 호열은 퍼뜩 떠올렸다. 오늘 아침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날린 엄중 경고를.

‘바보 같은 웃음은 집어치워!’

……나 오늘 대체 얼마나 웃은 거지?

시원한 밤공기를 맞던 뺨이 파르르 떨렸다. 혹사한 얼굴 근육에서 피로가 느껴졌다.

젠장, 틀려먹었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 정도로 틀려먹었을 줄이야. 적어도 다른 애들 앞에서만이라도 조심했어야 했는데 옆에 애들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백호군단 중 가장 먼저 같이 다니기 시작한 게 호열과 백호였기에 다른 친구들보다 가깝게 지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태도에 차이를 보이는 건 좋지 않았다. 다른 녀석들도 다 소중한 친구들이었으니까.

‘내가 백호를 좋아하게 되는 바람에 군단에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어.’

그러니 잘 숨겨야 한다고 아침부터 그렇게 다짐하고 결심하고 경고까지 했거늘!

가까워지는 백호의 집을 보며 호열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표정 관리하자. 단번에 안 웃으려고 하는 건 무리였어. 차근차근 바보처럼 웃는 시간을 줄이고 다른 녀석들 대하듯 백호를 대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다 왔다! 데려다줘서 고맙다, 호열아.”

백호가 스쿠터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호열은 불시에 사라진 온기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웃지 않기 위해 입을 일자로 말아 물고 천천히 백호를 돌아보았다.

“오늘 지이인짜 재밌었다! 그치?”

아… 정말이지……

왜 저렇게 눈부시게 웃는 거야!

호열은 관념적인 눈부심에 눈을 찌푸리는 동시에 웃지 않으려고 입매를 굳혔다. 그 괴상한 표정에 깜짝 놀란 백호가 물었다.

“뭐, 뭐야. 넌… 재미없었냐…? 나랑 노는 거?”

“므어? 아, 아니?! 그럴 리가!”

오히려 너무 재밌어서 문제인 건데! 차마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는 없어 호열은 양손을 맹렬하게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러자 백호는 금방 마음이 풀어져서는 헤헤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역시 그렇지? 호열이 넌 나랑 잘 맞는다니까.”

“당연하지. 나 말고 누가 강백호랑 더 재미있게 놀겠어?”

“히히히! 그렇지! 우린 절친이니까!”

짝사랑 상대의 절친 발언은 강력했지만 호열은 개의치 않았다. 일단 백호가 마음 상하지 않는 게 우선이었으며, 절친이라는 말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좋지 않나? 좋아하는 사람이랑 가장 친하고 가깝다는 뜻이잖아. 뭐, 몇 년 뒤엔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호열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비밀인데 말이다. 나… 다른 애들이랑 놀 때도 재밌지만 너랑 놀 때가 제일 재밌고 좋다?”

아, 강백호…. 호열은 히죽히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저지하지 못했다.

이젠 모르겠다. 다른 녀석들한테도 열심히 잘해주지 뭐. 백호한테 하는 것만큼은 못 하겠지만.

호열이 활짝 웃었다.

“나도 그래. 너랑 노는 게 제일 좋아!”

좋다는 말이 백호랑 완전히 같은 의미는 아니겠지만…. 백호는 모르겠지. 모르게 두는 게 낫겠지. 어쨌든 지금 백호가 행복해 보이니 된 거다.

호열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역시 강백호가 너무 좋았다.


“알아, 네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응? 나 무슨 말 했어?”

백호의 뜬금없는 말에 호열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백호는 씨익 웃더니 같이 구경하던 앨범 속 사진 한 장을 가리켰다.

“여기 네 표정 좀 봐라.”

“이야, 이거 언제야? 중학생 땐가?”

“엉. 구식이가 삼촌한테 사진기 받았다면서 한동안 엄청 찍었잖냐. 중3 때.”

그런 적도 있었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추억을 회상한 호열이 다시 사진을 살폈다. 다섯을 한꺼번에 찍으려고 한 건지 구식, 대남, 용팔의 얼굴 일부가 큼지막하게 차지한 사진 구석에 백호와 자신이 떠드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뭐라고 열심히 말하는 백호 옆에서 호열도 열심히 들어주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아.”

백호가 한 말의 뜻을 깨달은 호열이 탄식하자 백호는 키득거리며 그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아주 ‘너는 내 마음을 모르겠지만 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고~대로 드러났잖냐.”

“음… 중학생이었으니까. 표정 관리가 어설플 만하지.”

호열이 민망한 마음에 살짝 달아오른 뺨을 문질렀다. 막 사랑에 빠졌을 무렵에 자신이 얼마나 마음을 주체 못 했었는지 머리론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눈으로 보게 되니 상당히 민망했다. 반면 백호는 그 사진이 몹시 마음에 들었는지 싱글벙글이었다.

그는 사진 속 호열의 얼굴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아무튼! 이젠 안다고.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사랑하는 연인이 자신을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걸 느낄 때마다 어찌나 행복한지. 긴 시간 몰라봤다는 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호열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주었다.

백호가 몰랐던 그 시간 속에서도 자신은 충분히 행복했다면서.

그렇기에 백호는 미안해하는 대신 호열이 더 행복하도록 활짝 웃었다.

“그리고 나도 너 사랑한다, 양호열!”

그의 기대대로 호열은 행복해졌다.

“응. 나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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