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열백호]마지막 편지, 첫 번째 러브레터

호열백호 60분 전력. 키워드 ‘처음과 끝’ 사용. 강백호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받은 양호열.

양호열이 처음으로 받은 강백호의 편지에는 우표가 잔뜩 붙어 있었다. 바다를 건너느라 조금 지저분해진 편지 봉투를 한참을 쓰다듬던 호열은 우표 하나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뜯었다.

봉투 안에는 무려 다섯 장의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호열에게.

안녕, 호열아. 잘 지내니. 나 강백호다.

갑자기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하기에 연필을 들었다. 그런데 방금 통화해 놓고 무슨 말을 써야 할까? 일단 오늘 있었던 일은 다 말했으니 적지 않으련다. 너도 뒤늦게 부탁을 취소했으니 불만은 없겠지.

룸메이트인 제이쓴의 말로는 미국에서 한국까지 편지를 보내면 한 달 뒤에나 도착한대. 한국 사람과 펜팔을 해보았다면서 보내는 법까지 알려주었어.

너는 취소했지만 한 달이나 걸려서 받은 편지가 달랑 한 장이면 많이 아쉽겠지. 그러니 두어 장 더 쓰고 한꺼번에 보낼게.

뜻밖에도 강백호의 문장은 정갈했다. 중학교 시절 백호가 숱하게 써재끼던 러브레터를 검토해 주곤 했던 호열에게는 그것이 더 잘 보였다.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엉망이고 어린애가 쓸 법한 단어와 말투에 호열은 웃음을 참으며 이런저런 수정을 권했었다. 백호가 그걸 전부 반영하자 처음에는 만족스러웠으나 어느 날부터는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저 어설프지만 사랑이 잔뜩 담긴 편지를 지적으로 난도질하는 게 아니라 애정 어린 문장마다 입을 맞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백호의 러브레터를 고치는 일이 버거워졌다. 그래서 직접 보지 않고 백호가 단어 선택이나 문장 구성에 의견을 구하면 말 몇 마디 얹는 식으로 도왔다.

백호의 편지를 받은 일이 없으니 백호가 어떤 문장에 어떻게 마음을 담는지 호열은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이게 생각보다 아쉬웠는지 미국으로 떠난 백호와의 통화에서 멋대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미국은 정말 알록달록한 나라다. 여기서는 내 빨간 머리가 그렇게 튀지 않아. 대남이가 죽어라 사수하던 금발 머리도 자주 눈에 띈다.

물론 이 몸과 같은 새빨간 색깔을 가진 녀석은 아직 못 봤다. 나보고 자기랑 같은 진저라면서 웃던 대니얼의 머리카락은 내 눈에는 적갈색에 가까워 보였거든.

역시 나는 이런 것도 천재인가 봐.

차분하게 이어지는 문장은 정말 백호가 쓴 게 맞나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지만, 내용 자체는 백호가 생각할 법한 것들이었다.

호열아, 미국놈들은 빨간 머리를 진저라고 부르더라. 근데 진저라는 놈들은 빨간 머리가 아니야. 적갈색이라고! 이 천재만 진짜 진저고 나머지는 가짜야!

백호가 말로 했다면 이런 문장이 나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입으로 바로 나가지 못한 말이 머리를 거쳐 손으로 흘러나오는 바람에 훨씬 정제된 문장이 적히는 듯했다.

호열은 몹시 신기한 기분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가다가 한 부분에서 멈칫했다.

오랜만에 편지를 쓰니까 예전에 네가 내 러브레터를 봐줄 때가 떠오른다. 너한테 많이 배웠지. 그땐 고마웠다. 지금은 그때보다 잘

아니다. 예전에 쓴 편지는 잊어버려라. 절대 떠올리지 마!

백호도 기억하고 있었네? 그리고 나한테 배웠다라….

혹시 백호의 문체가 나로 인해 바뀐 걸까?

자취방에 앉아 있던 호열이 스르륵 드러누웠다. 이게 뭐라고 얼굴이 뜨끈뜨끈해지는지 모르겠다.

그토록 받고 싶었던 백호의 편지에서 자신의 흔적이 묻어나오다니 왜인지 굉장히 부끄러웠다.

“편지 써달라고 하길 잘했다….”

호열은 조심스럽게 편지를 품에 안았다. 백호가 적었고 호열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문장이 심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백호에게.

백호야, 편지 잘 받았다. 무심코 한 부탁을 흘려듣지 않고 들어주어서 정말 고마워.

종이로 듣는 너의 일상은 말로 듣는 것과 차이 나는 색다른 매력이 있더구나. 이 기분을 너에게도 알려주고 싶어 답장을 쓴다.

그래. 먼젓번에 통화했을 때 나는 너에게 거짓말을 했다. 사실 편지를 받은 지 며칠이나 지났었어. 이미 답장도 조금씩 쓰고 있었고.

그런데 네 목소리를 듣자 양아치 시절의 치기가 끓지 않겠니. 고약한 장난이지만, 기대 않던 답장을 받고 깜짝 놀랄 네 모습을 상상하니 조금 들뜨고 말았다.

나는 네 편지를 받고 아주 기뻤거든.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벌인 일이니 용서해 주기 바라.

“뭐냐, 양호열.”

깜깜한 방에 스탠드만 켠 채 책상에 앉아 있던 백호는 몸을 뒤로 젖혔다. 의자 등받이 뒤로 넘어간 얼굴이 커다란 손에 뒤덮인다. 그래봤자 붉어진 귓바퀴는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이런 장난이나 치고. 진짜 깜짝 놀랐네.”

호열의 부탁이 충동적이었듯이, 백호도 충동적으로 편지를 썼었다. 그러다 이것이 호열에게 쓰는 첫 편지라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래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 편지 쓸 일이 없던 호열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라니. 얼마나 기념비적인 일인가.

그래서 며칠에 걸쳐 쓴 편지를 부치고 한 달 동안 입을 싹 다물었다. 호열이 기대하지도 않은 편지를 받고 무척 기뻐하길 바랐으니까.

마치 호열이 그랬던 것처럼.

백호는 잠시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다가 룸메이트인 제이슨이 잠꼬대로 욕설을 내뱉고 나서야 겨우 진정했다.

다시 들여다본 호열의 편지는 주인을 닮아 마냥 다정했다.

꼬박 한 달에 걸쳐 편지가 배달되는 동안, 우리는 주기적으로 전화하며 일상을 나누고 있겠지. 이 편지는 그렇게 쌓여가는 시간에서 빗겨나 있는 셈이다. 편지를 쓴다고 우리가 딱히 말을 덜 하거나 하지는 않잖니.

물론 편지 보낸 걸 숨기긴 했지만 그건 예외로 두자.

나는 그게 참 재미있다. 한 달 뒤의 너를 향해 편지를 쓰면 꼭 한 달이라는 시간이 덤으로 얹어지는 것 같아서.

그래서 이 편지에 무슨 내용을 담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너와의 통화를 마치자마자 나는 들뜬 채로 밤을 새웠다.

타지에서 생활하는 너의 나날이 한 달 동안 평탄하기를, 네가 나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이 있다면 한 달 동안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를, 네가 여전히 건강하고 즐겁게 너의 농구를 하고 있기를.

고작 가벼운 종이 한 장이지만 그런 바람을 연필로 꾹꾹 눌러쓰면 아주 특별한 걸 만들어 낸 기분이 들어. 이 편지는 나의 바람을 담은 채 한 달 동안 너를 향해 날아가겠지.

한 달 뒤의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니? 나의 바람은 이루어졌을까?

만약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이 편지로 너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을까.

백호는 호열의 편지를 읽고, 처음부터 다시 읽고, 내리 다섯 번을 연거푸 읽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다정한 바람이 가슴에 휘몰아친다.

양호열 이 자식은 어떻게 이런 편지를 쓰는 거지?

백호가 괜히 속으로 꿍얼거렸다. 첫 번째 편지를 쓸 때 나름대로 고심해서 쓴 문장들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역시 이 천재의 러브레터를 수십 번이나 고쳐준-

악, 이건 생각하지 말아야지.

사랑에 빠질 때마다 러브레터를 쓴 건 후회하지 않지만, 매번 호열에게 보여줬던 건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다. 설마 남에게 쓴 러브레터의 맞춤법을 고쳐주던 친구를 좋아하게 될 줄은 천재도 예상하지 못했다.

등받이에 기대 까딱까딱 몸을 흔들던 백호는 다시 바르게 앉았다. 호열에게 보낼 두 번째 편지는 좀 더 멋지게 쓰고 싶었다.


“여보세요. 백호냐?”

-yes, this is Kang.

“우왓, 발음 뭐야! 이제 완전 미국 사람 다 됐네!”

-헤헹, 뭐 이 정도로.

호열과 백호는 일주일에 두어 번 전화 통화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하고 싶은데 아직 국제 통화비를 감당하기는 어려운 처지였다.

번갈아 가며 시간 맞춰 전화를 걸고 받는 건 번거로운 일이다. 그러나 기껍기도 했다.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예전에 등을 맞대고 싸우던 때의 기분이 들었다.

편지를 쓰는 것도 비슷했다. 호열도 백호도 통화 중엔 편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주고받는 데 한 달이 걸리는 편지가 각각 다섯 통이 넘어가도록 그랬다.

-그래서! 이 천재의 활약을 보고 명함을 준 스카우터가 다섯이 넘는단 말이지! 주장이 나보고 슬슬 에이전시를 찾아보라고 해서 알아보는 중이야.

“우와. 그럼 진짜 NBA에 가는 거야? 강백호가?”

-후후후, 내년 대학 리그에서 잘해야 좋은 조건을 받을 수 있겠지만 어지간해선 가게 될 것 같다더라.

“진짜 대단하다, 백호야. 정말 멋있어….”

-뭐야, 양호열. 이 천재한테 반했냐? 흐흣.

“응…….”

-후, 후눗…?

아차. 지금 무슨 말을 한 거냐. 호열이 황급히 둘러댔다.

“어? 방금 뭐라고 했어? 나 제대로 못 듣고 말했는데.”

-…됐어! 다음에 제대로 듣고 만다, 내가.

“으응?”

-그보다 너 미국엔 언제 올 거냐? 저번부터 온다고 해놓고 암말도 안 하네.

“어… 생각보다 비자 발급이 늦어져서. 미안하다. 일정 확실히 잡히면 알려줄게.”

심통이 난 백호를 잘 달래고 통화를 마친 호열은 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에 올려둔 여권과 미리 끊은 비행기 티켓을 보며 연필을 쥐었다.

백호에게.

이번 편지도 잘 받았다, 백호야. 내 편지가 그렇게나 힘이 되었다니 정말 기쁘다. 나도 네 편지를 보며 많은 힘을 얻거든.

그런데 이 편지가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다.

미리 말해두는 데 편지 쓰기가 질렸다거나 힘들어서 그런 건 아니야.

우리는 전화로 즐겁고 재미난 소식을, 편지로 내밀한 생각이나 고민을 나누었지. 전화로 고민을 말하면 바로 걱정을 끼치지만, 편지로는 한 달 뒤에나 전해지니까. 한 달 전의 고민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적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나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 둘 다 통화로도 편지로도 하지 못한 말이 있다는 걸 너도 알 거다.

보고 싶다, 백호야.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이 그리움은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너도 그럴까?

그래서 나는 편지 쓰기를 그만두고 너에게 가기로 결심했다. 조금 전에 너에게 일정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고 통화를 끝냈지만, 나는 다음 달에 미국으로 갈 거다. 어쩌면 네가 이 편지를 읽을 즈음에 도착할지도 모르겠다.

너를 직접 마주하고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건 편지에 쓰지 않을게.

그럼 이따가 보자.

양호열 보냄.


백호는 호열의 편지를 읽고 급하게 연필을 쥐었다. 항상 책상에 놓아둔 편지지에 지금 당장 떠오르는 생각을 되는대로 휘갈겼다.

양호열.

네 멋대로 편지를 그만두는 게 어딨냐! 마지막 편지라니 나는 인정 못 한다. 나는 네가 옆에 있어도, 같이 살게 되어도 계속해서 편지를 받고 싶단 말이야.

아니지. 그럼 편지는 그만두고 이제 러브레터를 주고받는 건 어떠냐. 이 편지가 바로 천재가 너한테 보내는 첫 번째 러브레터가 되는 거지!

좀 더 멋있는 말을 쓰고 싶은데 이렇게 멋없는 러브레터라니. 다 네 탓이다. 나한테 시간을 더 줬어야지! 각오해라. 두 번째부터는 아주 끝내줄 테니까.

그래도 명색이 러브레터인데 이 말이 빠질 순 없겠지?

좋아합니다. 저와 사귀어 주세요.

대답은 직접 듣겠다. 네가 하고 싶다던 말도.

강백호 씀.

백호가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는 순간, 룸메이트 제이슨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강, 로비에서 누가 너를 찾아. 검은 머리 동양인 남자였는데….”

백호는 편지 봉투를 쥐고 바로 방에서 뛰쳐나갔다.

강백호가 양호열에게 쓴 첫 번째 러브레터는 쓰인 지 5분도 되지 않아 양호열에게 배달되었다. 양호열은 강백호를 마주 보고 아주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전할 수 있었다.

다음날, 양호열은 처음으로 쓴 러브레터를 강백호에게 주었다. 백호가 활짝 웃자 호열도 얼굴을 붉히며 마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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