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열백호] 산중호걸(山中豪傑)
동양풍 수인 AU
* 이 글은 동물 보호나 생명의 가치를 논하고자 쓴 글이 아닙니다. 작중에 들어간 묘사는 호열이 죄책감을 가지고 백호를 밀어내는 게 보고 싶어서 가져온 장치일 뿐입니다. 픽션이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주세요. 부디 즐겁게 읽어주시길.
어느 마을에 호랑이를 잘 잡기로 유명한 사냥꾼이 살았는데 그의 집 대들보엔 ‘바를 정(正)’ 자가 20개나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 중 맨 마지막에 있는 한 자는 아직 획이 4개 밖에 그어져 있지 않았다.
집의 주인인 사냥꾼은 팔짱을 낀 채로 그 마지막 한 획이 그어질 자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최근 의뢰 받은 산에서 호랑이를 잡으면 드디어 저 마지막 한 획을 그을 수 있게 되고 그러면 그가 지금껏 살며 잡아 온 호랑이의 수는 무려 백 마리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백이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거나 본인의 업에 특별히 자부심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호랑이를 잡는 행위는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백이라는 숫자에 가까워졌을 뿐이었다.
그는 오늘도 산에 오른다. 어쩌면 백 번째의 호랑이를 만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냥꾼이 호랑이를 잡을 때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덫을 놓는 것이었다. 조총이나 활을 쏘는 방법도 있었으나 혼자서는 잡기가 어려웠고, 덫을 놓으면 시간은 좀 걸리지만 기다리기만 하면 손쉽게 잡을 수 있었다. 또한, 호랑이 가죽은 매우 비싸게 팔렸기에 되도록 외관에 손상이 가지 않는 방법을 선호하다 보니 주로 덫을 놓는 쪽이었다.
그는 최근에 의뢰 받은 산에서 호랑이의 서식지를 발견하고 그 근방에 덫을 몇 군데 놓아두었다. 이제 슬슬 잡힐 때가 되었구나 싶어 그는 덫을 놓은 곳으로 향했다.
덫을 놓아둔 곳에 점점 가까워지자 미세하게 땅이 울리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제대로 걸려든 모양이었다. 게다가 무척 힘이 좋은 놈이었다. 사냥꾼의 발걸음이 덩달아 빨라졌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니 역시나, 움푹 파인 구덩이 안에 빠진 호랑이 한 마리가 연신 주변을 긁어대며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래봤자 소용없어. 네 힘만 빠진다고.”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위를 올려다본 호랑이와 눈이 마주쳤다. 호랑이의 눈동자에 살기가 돌더니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지만 사냥꾼은 코웃음 칠 뿐이었다. 덫에 걸린 호랑이는 그에겐 독 안에 든 쥐나 다름 없었다.
품에서 줄을 꼬아 만든 올가미를 꺼내어서 구덩이 안으로 던졌다. 수십번도 더 던져봤던 올가미다. 역시나 한 번에 호랑이의 목에 감긴다. 올가미에 걸려든 호랑이가 뒤늦게 발버둥 쳐 보지만 그럴 수록 더욱 거세게 조여온다.
올가미에 연결 된 줄을 힘껏 당겨서 간신히 근처에 있는 거목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매듭을 지은 다음 힘껏 잡아당기자 올가미에 걸린 호랑이가 구덩이 밖으로 점점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간신히 머리와 앞발까지 꺼내었는데 여전히 저항이 거세었다. 밖으로 빠져나온 앞발로 연신 땅을 긁었고 아직 미처 구덩이에서 나오지 못한 뒷발은 흙벽을 걷어찼다. 사냥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보통 이 정도로 궁지에 몰리면 용써봤자 소용 없다는 걸 알아서 제아무리 호랑이여도 불필요한 저항은 하지 않고 힘을 비축하는 편이었는데, 이 호랑이는 그 정도 머리가 안 되는지 부질없는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아, 설마 그런 건가?
무언가 떠오른 듯 사냥꾼이 당기던 줄을 다시 팽팽히 묶어두고 구덩이에서 반쯤 빠져나온 호랑이 앞으로 다가갔다. 잔뜩 경계하며 으르렁대는 소리를 무시하고는, 앞에 쭈그리고 앉아 호랑이의 입 안을 유심히 살폈다. 아직 덩치에 비해 작은 송곳니가 보였다.
사냥꾼의 예상이 맞았다. 아직 유치가 빠지지도 않은 어린 호랑이였다. 태어난 지 1년 정도 되었을까. 이 시기면 부모형제와 함께 다니는 게 일반적이었다. 근데 이 어린 호랑이는 어쩌다가 홀로 덫에 걸려든 건지.
그는 고민에 휩싸였다. 처음 의뢰 받고 산을 둘러봤을 때 발견한 호랑이의 흔적은 한 마리 뿐이어서, 관아에서 퇴치를 의뢰 받은 호랑이는 분명 이 호랑이가 맞았다. 아마 마을 사람들이 보기엔 덩치가 크고 사나우니 어린 호랑이일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 했을 터였다.
“이걸 어쩐다…”
사냥꾼의 속내도 모르고, 눈앞의 어린 호랑이는 여전히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그러면서 지치지도 않는지 여즉 빠져나오지 못 한 뒷발을 연신 버둥거렸다. 그 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덩치만 컸지 저런 미숙한 모양새를 보니 역시 어린 놈이 맞았다.
결국 그는 답지 않게 변덕을 부렸다. 거목에 묶어둔 줄의 중간 즈음에 쇠꼬챙이를 바닥에 꽂고 망치로 두들겨서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고 올가미에 연결 된 줄을 다시 쇠꼬챙이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곤 줄을 마저 당겨 호랑이를 구덩이에서 완전히 꺼내주었다.
네 발이 모두 자유로워진 호랑이가 사냥꾼에게 달려들었으나 꼬챙이에 단단히 묶인 줄에 걸려서 더는 가까이 오지 못 했다. 당황한 호랑이가 줄을 당겨보며 그 주변을 빙빙 돌았다.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다른 사냥꾼 눈에 안 띄게 조심해라.”
손까지 흔들어 보이며 호랑이에게 안녕을 고하고 사냥꾼은 지체없이 뒤돌아서 그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겨진 어린 호랑이는 영문도 모르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어딘가에서 날아온 화살이 호랑이를 묶고 있던 줄을 관통해 땅바닥에 박혔다. 깜짝 놀란 호랑이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러자 목을 옭아매던 줄이 스르르 풀어져 땅으로 떨어졌다.
아마도 안전한 곳에 오른 사냥꾼이 호랑이를 묶어둔 줄을 풀어주려고 활을 쏜 것일 테지만, 호랑이는 그것까진 알지 못 했다. 그렇지만 그 사냥꾼이 자길 죽이지 않고 놓아줬단 사실만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어린 호랑이가 땅바닥에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거렸다. 그리고 희미하게 남아있는 냄새의 뒤를 쫓았다.
호랑이가 사라진 걸 확인하자 절벽 위에 숨어 있던 사냥꾼도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다시 마주치지 않으려면 빙 돌아서 마을로 내려가야 했다.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면서 사냥꾼은 관아에 무슨 핑계를 대야 할 지 고민했다.
산의 중턱쯤 내려왔을 때 무언가 땅이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사냥꾼이 인상을 찌푸리고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저쪽 수풀 쪽인데 대체 뭐지? 그러나 그 잠깐 사이에 쿵쿵거리는 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냥꾼이 산 밑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곧바로 거대한 형체가 뒤를 덮쳐서 그는 순식간에 바닥을 뒹굴었다.
저 자식이 은혜를 웬수로 갚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숨소리만 들어도 아까 놓아준 그 호랑이임을 알 수 있었다. 이래서 짐승한테 함부로 은혜를 베푸는 게 아니었는데! 바로 뒤에서 닿아오는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사냥꾼이 눈을 감았다. 그래, 언젠간 이렇게 사냥하던 짐승한테 사냥 당해서 죽을 것만 같았어. 오늘이 그날이었구나.
체념함과 동시에 느껴지는 건, 목덜미에 닿는 축축하고 까슬한 촉감이었다. 등 뒤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잔뜩 굳어버린 근육 위를 축축하고 커다란 혀가 연신 핥아대자 비로소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아무래도 저 호랑이가 은혜를 웬수로 갚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몸을 옆으로 비틀어서 빠져나온 사냥꾼이 저를 쫓아 여기까지 달려온 호랑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보며 눈을 끔뻑이던 호랑이가 가만히 앉아 있는 제 몸에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덩치 큰 고양이었다. 사냥꾼은 헛웃음이 나왔다.
“야, 인마. 저리로 가. 나 따라오면 안 돼.”
사냥꾼의 말에도 아랑곳않고 곁에 풀썩 드러누운 호랑이가 이번엔 배를 보이며 땅바닥에서 몸을 배배 꼬았다. 애초에 알아들을 거라 기대하고 말한 건 아니었으나 저 정도로 들은 척도 안 할 줄은 몰랐다. 난감함에 잠시 이마를 짚은 사냥꾼이 다시 말했다.
“난 해가 지지 전에 마을로 내려가야 해. 그리고 널 데려갈 수는 없어.”
진짜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건지, 사냥꾼의 말이 끝나자 움직임을 멈춘 호랑이가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듯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얌전히 앉았다. 여전히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며 사냥꾼이 마저 말을 이었다.
“안타깝지만 마을은 인간들이 사는 곳이라 너처럼 커다란 짐승은 들어갈 수가 없…”
“그럼 인간의 모습이면 되는 거지?”
…근데 이건 누구 목소리지?
머릿속 의문이 가시기도 전에 눈앞에 광경에 머리가 도로 하얘졌다. 분명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호랑이가 어느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앉아 있었다. 마치 호랑이처럼 두 손을 바닥에 가지런히 모으고 다리는 굽혀서 쭈그려 앉았는데 문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차림이었다. 새하얀 몸과 대비되는 붉은 머리칼은 호랑이 가죽보다도 훨씬 더 붉었다. 눈앞이 절로 아찔해졌다.
“어때? 이 정도면 마을에 내려갈 수 있겠지?”
“야, 야! 너무 가까이 붙지 마!”
호랑이 대신 나타난 남자가 벌떡 일어서자 하늘로 솟을 듯 쑤욱 커졌다. 사냥꾼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그러나 자신이 크다는 자각이 없는 건지, 그 큰 덩치를 잔뜩 구겨서 몸을 부대꼈다. 보드라운 맨 살결이 닿자 사냥꾼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사냥꾼은 두르고 있던 모피를 벗어서 헐벗은 남자의 허리에 둘러주었다. 아랫도리만 간신히 가려졌지만 눈 둘 곳이 없었던 아까보단 나았다. 몸에 닿는 촉감이 영 어색한지, 그 호랑이인지 인간인지 모를 녀석이 제 허리에 둘러싸인 모피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사냥꾼이 한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너 정말 그 호랑이야?”
“응. 나 호랑이 맞는데?”
답을 듣자 머리가 더 아파온다. 일단 저게 호랑이는 맞다 이건데, 도대체가 어떻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지. 사냥꾼이 알고 있는 상식선에선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나 벌써 날이 어둑해졌기에 서둘러 산을 내려가야만 했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바라던 말이었는지 붉은 머리의 인간의 모습을 한 호랑이가 환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를 으쓱해 보인 사냥꾼이 먼저 앞장서서 산을 내려갔다. 그 뒤를 따라붙으며 호랑이가 그를 불렀다.
“인간아, 같이 가!”
“인간이라고 부르지 마. 이래 봬도 멀쩡한 이름 있어.”
“누? 그럼 뭐라고 불러?”
“호열이야. 양호열.”
인간으로 둔갑한 호랑이가 잠시 멈춰서 중얼거렸다. 호열. 양호열. 입안에서 맴도는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기분이 좋아 갸르릉 소리를 내며 웃고 있는데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호열의 뒷모습이 보였다. 신난 걸음으로 그에게 폴짝 뛰어갔다.
“같이 가, 호열아!”
마을에 들어설 즈음엔 해가 완전히 져서 캄캄한 저녁이었다. 다행히 호열이 사는 집은 산에 가깝고 마을에선 가장 외진 곳이라 다른 이들의 눈에 띄는 일 없이 붉은 머리의 거대한 인간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툇마루에 앉아 신을 벗고 등에 메고 있던 짐까지 풀어놓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드러누웠다. 정말 고된 하루였다. 호랑이를 잡으러 갔을 뿐인데, 호랑이를 하나 달고 돌아올 줄이야. 심지어 보수는 하나도 못 받게 되었는데 군식구는 하나 늘었다.
그 문제의 손님은 집이 신기한지 마당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키가 어찌나 큰지 담장을 훌쩍 넘어서 밖에서 보면 머리가 다 보일 정도였다. 아무래도 저 붉은 머리는 너무 눈에 띈단 말이지. 호열이 서둘러 그를 불러 집안으로 들였다.
문보다도 훨씬 큰 탓에 허리를 잔뜩 굽혀가며 집 안에 들어온 호랑이가 이번엔 집 안 광경이 신기한지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킁킁 거렸다. 입을 만한 옷을 찾아온 호열이 그 모습을 보고선 피식, 옅은 웃음을 지었다. 가져온 옷을 입히자 기장이 짧아서 팔다리가 소매 밖으로 튀어나오긴 했으나 얼추 입을 만 했다. 그래도 옷을 갖춰 입혀 놓으니 제법 사람 같았다. 저 붉은 머리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되지만.
그 때, 꼬르륵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집 안에서 울렸다. 배에 손을 얹은 호랑이가 돌아보며 말했다.
“호열아, 나 배고파.”
“그래. 일단 뭐 좀 먹자.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고개를 끄덕이는 호랑이를 혼자 내버려 두고 부엌으로 향했다. 시간이 늦어서 제대로 차려 먹기는 글렀고 대충 요깃거리 할 만한 것들로 챙겼다. 호랑이가 말린 육포를 먹으려나 모르겠네, 중얼거리며 돌아왔는데 호랑이를 발견하자마자 그만 몸이 굳어버렸다.
“호열아, 이건 뭐야?”
“…그건, 아무, 아무 것도 아니야.”
호랑이가 가리킨 건 대들보에 새겨진 수많은 ‘바를 정’ 자였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태연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떨려왔다. 다행히 그런 호열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지, 호랑이는 들고 온 음식에만 관심을 보였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무시한 채 상을 펴고 호랑이와 자리에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우려와는 달리 호랑이는 뭐든 잘 먹었다. 허겁지겁 입에 넣는 모습에 안심이 되면서도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구덩이에 얼마나 갇혀있었던 걸까?
“너 아직 독립할 시기는 아닌 거 같은데, 부모님은 어디 가셨어?”
“누? 나 부모님 없는데…”
아뿔싸. 호열이 눈을 질끈 감았다. 경솔하게 물었다는 생각에 사과라도 하려 입을 여는데, 호랑이가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먼저 답했다.
“엄마, 아빠 다 어릴 때 돌아가셨어.”
“...미안.”
“괜찮아! 네가 왜 미안해, 호열아.”
정말로 괜찮다는 듯 밝은 목소리였으나 호열은 마음에 돌덩이가 얹힌 듯 가슴이 무거웠다. 호랑이가 앉아 있는 머리 위로 ‘바를 정’ 자가 새겨진 대들보가 보였다. 칼로 새겨진 그 글자들이 호열의 가슴을 후벼파는 듯 아려왔다.
그 날 밤, 호열은 꿈을 꾸었다.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호랑이의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걱정되는 마음에 그를 찾아 헤매던 호열이 구석에서 고개를 무릎 사이에 묻고 쭈그려 앉아 울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곤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다.
“호랑아, 왜 그래? 왜 울고 있어?”
“…니까.”
“뭐라고?”
“네가 우리 엄마, 아빠를 죽였으니까.”
고개를 들어 올려 마주친 호랑이의 눈빛엔 분노와 원망이 가득 차서 눈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대로 뒷걸음질 치던 호열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99마리의 호랑이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누, 눗!”
“야, 호랑아! 좀 가만히 있어 봐!”
불편한지 몸을 가만히 두지 못 하고 바르작거리는 탓에 머리에 두르던 천이 자꾸만 풀려서 호열은 무척 애를 먹고 있었다. 볼일이 있어 외출을 해야 하는데 호랑이 녀석이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탓에 어쩔 수 없이 그 눈에 띄는 붉은 머리라도 가려보려고 하는데 녀석이 도무지 협조를 않는다. 한참을 씨름하던 호열이 마침내 호랑이의 머리에 흰 천을 둘둘 감는데 성공했다.
얼추 이마와 뒤통수를 전부 감싸서 붉은 머리는 정수리 부분 밖에 드러나지 않았다. 정수리야 모자라도 씌우면 되니 이만하면 성공적이었다.
“쓸 것 좀 가져올 테니 여기 꼼짝 말고 있어. 머리에 손대면 안 된다!”
“알겠어. 빨리 와!”
울상인 얼굴로 호랑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바보 같은 얼굴이 자꾸 생각 나서 호열은 모자를 찾으면서도 히죽히죽 웃었다. 쓸만한 게 어디 없나 보는데 구석에 놓인 패랭이모자가 눈에 띄었다. 모자 양쪽에 달린 하얀 목화솜 두 개가 마치 호랑이 귀가 달린 것만 같아서 호열은 그 모자를 쓴 호랑이의 모습이 절로 상상되었다. 그 모습에 참지 못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호열의 상상대로 그 모자는 호랑이한테 아주 잘 어울렸다. 정작 당사자는 머리에 무얼 씌우는 게 어색한지 끙끙대며 안절부절못했지만 그 모습조차 귀여웠다.
“이제 가자, 호랑아.”
슬슬 출발하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문득 여즉까지 그를 호랑이라 부르고 있단 사실이 신경 쓰였다. 생각해보니 그에겐 아직 이름이 없었다.
“아무래도 네 이름을 지어야 할 것 같아. 밖에서도 호랑이라 부를 순 없잖아.”
“누?”
정작 당사자는 그런 고민은 안 해본 듯 고개만 갸웃거렸다. 호열은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이름을 지어줘야겠단 생각을 했을 때 바로 떠오른 이름이 있었으나 그 이름을 내뱉으려니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달리 떠오르는 다른 이름이 없어서 결국 그 이름을 불렀다.
“백호라고 부를까, 어때?”
“네 마음대로 해, 호열아!”
호열의 속내도 모르고, 신이 난 목소리로 답한 호랑이가 먼저 마당으로 나섰다. 호열은 툇마루에 앉아 신을 신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 백번째 호랑이, 백호.
한 번 더 속으로 불러보았다. 아마 자신은 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지난 밤 꿈을 떠올리게 될 지도 몰랐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이것조차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절대 혼자서 멀리 나가면 안 되고 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한 후에야 호열은 관아로 발을 들였다. 그러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관아의 담벼락 너머로 우뚝 솟은 백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담벼락에 매달려서 점점 멀어지는 호열에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빨리 와야 돼, 호열아!”
그 모습이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아서, 호열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볼일만 얼른 끝내고 바로 돌아와야지. 급한 마음에 힘껏 내달려서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관리가 있는 곳까지 금세 당도했다.
“그게 무슨 말인 가? 의뢰를 포기하겠다니. 그러면 호랑이 퇴치를 못 하겠단 말이오?”
“아, 사실 퇴치를 하긴 했습니다만. 호랑이 시신을 가져오진 못 하여서…”
“그거야 부수적인 일이고. 어쨌든 우리는 호랑이 퇴치만 하면 되었네. 허나, 시신이 없는데 이걸 어떻게 증명한담.”
관리가 손에 턱을 괴며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호열은 제법 찔리는 구석이 있었으나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어찌 됐든 호랑이를 데리고 산에서 내려온 건 사실이니까 퇴치했다는 말도 거짓을 고한 건 아니었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지. 몇 달 더 지켜보고 정말 그 산에서 호랑이가 출몰하지 않는다면 그때 보수를 주도록 하지. 어떤 가?”
“제 불찰인데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이게 웬 횡재인가? 영락없이 날아간 보수인 줄만 알았는데, 그렇게라도 받을 수 있다면 가만히 앉아서 코 푸는 격이었다. 덕분에 호열은 밝은 표정으로 관아를 나설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을 백호에게 돌아가는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호열아!”
관아를 나서는 문 앞에 가까워지자 백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반기는 백호의 환한 표정에 호열의 얼굴에도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백호야, 가자! 맛있는 거 사줄 게!”
“누? 좋아!”
신난 걸음으로 백호를 데리고 저잣거리로 향한 호열이 가게에서 팔고 있는 꼬치구이를 두 개 사서 하나를 백호에게 내밀었다. 백호는 많은 인파와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 찬 길거리가 신기한지 입을 다물지 못 한 채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런 백호의 손에 꼬치를 들려주자 백호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고기를 물어뜯었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맛있어하는 게 느껴져서 호열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만 같았다.
“어이, 양호열!”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호열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마을에서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온 친우들이었다. 그들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이 커다란 녀석은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백호라고, 새로 사귄 친구야. 인사해, 백호야. 여기는 내 친구 대남이, 구식이, 용팔이.”
“눗? 안녕. 난 백호야.”
입에 고기를 가득 문 채로 백호가 인사를 건넸다. 그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커다란 백호를 보고 그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구식이와 용팔이가 신이 나서 백호에게 말을 걸었다. 백호는 별 관심이 없는 듯 그들의 말을 들으며 고기나 뜯고 있었다.
“호열아, 너 최근에 의뢰받은 건은 어떻게 됐어?”
“아, 그건… 퇴치하긴 했는데 시체는 못 구했어.”
“뭐? 그게 무슨 말이야? 호랑이 사냥 전문가인 양호열 네가?”
대남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호열이 서둘러 백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백호는 양옆에서 떠드는 구식이와 용팔이에게 시선을 빼앗겨서 이쪽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대남이를 잡아끌어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호열이 그에게 말했다.
“대남아, 나 이제 호랑이 사냥 그만둘 거야.”
“뭐? 갑자기 왜? 그게 가장 돈이 되잖아.”
“아무튼 그렇게 됐다.”
“이해할 수가 없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든 거야?”
“글쎄, 호랑이 새끼라도 기르게 되었나 보지.”
호열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 말은 들은 대남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서 덧붙인 말은 불길하기 그지 없었다.
“농담으로도 그런 말은 마. 옛말에 호랑이 새끼를 기르면 우환이 생긴다고 하잖냐.”
그 날 이후, 호열은 정말로 호랑이 사냥을 그만두었다. 다행히 그 후로 인근 마을이나 산에 호랑이가 출몰하는 일이 없어서 혹여나 의뢰가 또 들어오진 않을까 마음 졸일 일도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생계를 이어 가야 했을 무렵부터 해왔던 일이 사냥뿐이어서, 호열은 사냥꾼이라는 직업을 완전히 놓지는 못하였다. 계속해서 여우나 멧돼지 등을 잡으며 살았는데 이제는 백호까지 사냥에 합세해서 그는 더욱 수월하게 일할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일찍이 사냥을 마치고 산속에 있는 커다란 계곡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호열이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쉬는데 백호가 옆에 서서는 갑자기 옷을 훌러덩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덕분에 엄청나게 튀어 오른 물세례에 홀딱 젖은 호열이 고개를 휘저으며 물기를 털어내는데, 수면으로 호랑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유유자적하게 앞발과 뒷발을 첨벙거리며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맞다, 백호 쟤 진짜 호랑이였지.
첫 만남 이후 줄곧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호랑이의 모습을 한 백호는 어쩐지 어색하기만 했다. 그러던지 말든지, 백호는 간만에 하는 물놀이가 즐거운지 도무지 물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호열은 문득 궁금해졌다. 백호는 어떻게 인간이 되었다가, 호랑이가 되었다가 하는 걸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백호의 물놀이가 끝나고 나서야 들을 수 있었다.
“누? 나도 잘 모르는데.”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다른 호랑이들도 인간으로 변할 수 있어?”
“응. 일단 내가 알던 호랑이들은 전부 둔갑할 수 있었어.”
백호의 마지막 말은 그날 호열의 머릿속에 남아 끊임없이 맴돌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를 괴롭히던 생각은 결국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그를 지배했다.
그날 밤, 호열은 또다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백호는 지난번과 똑같은 모습으로 울고 있었다. 호열은 이번엔 선뜻 그에게 다가가지 못 했다. 그러다 발뒤꿈치에 무언가 채이는 느낌에 뒤를 돌아본 그는 눈 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놀라 몸부림치다가 잠에서 깨었다.
식은땀에 상의가 다 젖은 채로 거친 숨을 내뱉는 호열의 옆에서 백호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호열은 꿈속에서 들었던 백호의 울음소리가 귓가에서 계속 울리는 것만 같았다.
지난 꿈에서 보았던 99마리 호랑이의 시체는 그날 이후 꾸게 된 모든 꿈에서 사람의 시체로 변해있었다.
“백호야,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누? 뭔데?”
요즘들어서 호열이 이상했다. 낯빛이 점점 안 좋아지고 기운이 하나도 없고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백호는 영문을 몰랐지만 매번 물어봐도 호열이 제대로 답해주지 않아서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대뜸 할 말이 있다며 말을 걸어오는 호열의 모습에 백호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하지? 그때 네가 빠진 구덩이 말야, 그 곳에 굴을 파고 덫을 놓은 건 바로 나야.”
호열의 말에 백호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 구덩이를 파놓은 게 호열이라고? 이건 무슨 뜻이지?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도무지 호열이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백호야, 이런 데도 나랑 같이 지낼 수 있겠어?”
“응.”
백호의 대답에도 호열은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반응에 백호가 안절부절못하자 호열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잡아서 죽이려고 했어. 그런데 왜 내 옆에 있는 거야?”
“그치만 호열이 넌 나를 구해줬잖아. 죽이지도 않았고.”
“난 지금까지 많은 호랑이를 죽였어.”
“그건 네가 먹고 살기 위해서잖아.”
설마 백호가 거기까지 알고 있으리라 생각지 못 한 호열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너 그런 건 어디서 들었어?”
“저번에 장터에서 만난 친구들이 그랬어. 호열이 네가 아주 훌륭한 사냥꾼이라고.”
백호의 말을 듣고선 호열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올라간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호열을 보자 걱정스런 마음에 백호가 덧붙였다.
“나도 먹고 살려면 나보다 약한 동물을 잡아먹어야 돼.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아니야. 이건 그거랑은 달라, 백호야…”
내가 네 부모를 죽였을 지도 모른단 말야.
호열은 급기야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황한 백호가 호열의 곁에서 그를 위로하려는 듯 어색하게 양팔로 호열의 어깨를 끌어안았지만 호열은 도무지 울음이 멈추지가 않았다.
대들보에 새겨진 ‘바를 정’ 자가 그의 온몸을 난도질 하는 것만 같았다.
참지 못해 울음을 토해냈던 밤이 끝나고 날이 밝자마자 호열은 백호를 이끌고 다시 산에 올랐다. 호열과 백호가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산이었다. 백호는 호열의 속을 짐작조차 하기 어려워서 요즘 호열이 왜 이럴까 싶은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산 속 아주 깊은 곳에 들어오자 붙잡고 있던 백호의 손을 놓은 호열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 이제 다시 여기서 살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애초에 너는 호랑이고 나는 사람인데, 우린 같이 살면 안 되는 거였어.”
그렇게 말하는 호열이의 목소리도 표정도 너무나 냉랭해서 백호는 덜컥 겁이 났다.
“싫어! 나는 너랑 같이 살 거야!”
“그동안 너한테 숨긴 게 있어. 난 호랑이 사냥꾼이야.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죽인 호랑이의 수는 99마리나 되고, 그 중엔 네 부모님도 포함되어 있을지도 몰라. 아니, 너희 가족이 이 근방에서 살았다면 무조건 내가 너희 부모님을 죽였을 거야.”
말이 마치 날카로운 칼이라도 되는 듯 아팠다. 백호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눈에선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호열아… 왜 그런 말을 해…”
“그러니까 너는 내 옆에 있으면 안 돼! 난 네 부모님의 원수라고! 다시는 내 눈앞에 띄지 말고 마을로 내려오지 마!”
가시돋친 말에 결국 바닥에 주저앉은 백호가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그런 백호를 홀로 내버려 두고 호열은 야속하게 등을 돌렸다. 그대로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 떼자 백호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호열아, 가지 마! 날 두고 가지 마! 호열아-!”
뒤에서 들려오는 흐느끼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호열은 산 아래를 끊임없이 내달렸다. 당장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다시 백호에게 돌아가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 순간 호열은 그저 백호가 자신을 잊고 잘 살았으면, 그러지 못 하겠다면 차라리 날 미워하고 증오하기를 바랐다.
호열이 심적 고통에 몸부림치건 말건, 시간은 자비 없이 흘러갔다. 이 집의 한켠에서 같이 지내며 제 곁을 데워주던 존재는 사라졌는데 여전히 시간은 흐르고 밤이 되며 다시 날이 밝기를 반복했다.
머리는 죄책감과 그리움이 소용돌이쳐서 괴로운데, 몸은 정직하게 부족한 잠을 원하고 굶주린 배를 채우라며 아우성치었다. 그 모든 감각들이 잔인하게만 느껴져서 호열은 속이 쓰렸다.
그도 한낱 인간이라 결국엔 몸이 원하는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밖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저잣거리에 나와 아무 가게에나 들어간 뒤 대강 끼니를 때웠다. 기계적으로 입 안에 들어온 음식물을 씹어 삼키면서도 도무지 백호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창 밖으로 꼬치구이를 손에 들고선 즐겁게 웃고 있는 백호가 지나가는 환영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잠시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텅 빈 거리만 시야에 가득했다.
백호 녀석,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밥은 잘 챙겨 먹었을까. 설마 아직도 울고 있지는 않겠지.
홀로 있을 백호를 떠올리니 도저히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그릇에 남은 밥알들을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는데 창밖으로 익숙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어? 양호열이잖아!”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구식이 먼저 알은체를 해왔다. 호열은 고개만 까닥여서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구식이가 무언가를 품에 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누런 털을 가진 강아지였다. 호열의 시선을 눈치챈 구식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선 호열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우리 집 새 식구 누렁이야. 서로 인사해.”
입으로 직접 멍멍, 개 짖는 소리까지 내가면서 가만히 있는 개의 앞발까지 대신 흔들어 보이는 구식이의 얼굴이 꽤나 즐거워 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호열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짐승이 무슨 식구냐.”
“에이, 섭섭한 소리. 뭐 꼭 피를 나눠야만 가족이냐. 내가 가족이다, 라고 생각하면 가족인 거지.”
그 말에 무언가 떠오르는 듯 호열이 생각에 잠겼다. 그냥 강아지 자랑이나 하려고 들어온 건데 분위기가 가라앉자 머쓱해진 구식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채비를 하는데 옆에서 호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구식아, 가족이 된다는 건 어떤 거냐.”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쉽사리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인지 구식이 좀처럼 입을 열지 못 하고 있자 잠시 기다리던 호열이 결국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게 밖을 나서려는데 그제서야 나름대로 답을 내린 구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개를 키워보니까 알겠는데, 가족이 된다는 건 내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일이야.”
그 말은 떠나려던 호열의 발을 붙들기에 충분했다.
“하루는 똑같이 흘러가는데 나는 얘랑 보낼 시간을 따로 내줘야 하고, 우리 집은 그대론데 얘가 지낼 공간도 만들어 줘야 하잖아. 근데 그게 싫지가 않아. 기꺼이 하고 싶어져. 그러면 이제 더 이상 짐승이 아니라 가족인 거지.”
그랬구나. 그게 가족이었구나.
호열은 다시 돌아온 집이 무척이나 다르게 보였다. 그동안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대들보에 새겨진 글자보다 집안 곳곳에 남은 백호의 흔적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백호의 발자국 만큼 파여있는 마당에 흙도, 백호가 안으로 들어오려다 머리를 부딪혀서 금이 가버린 기왓장도, 백호가 실수로 뚫어버린 창호지의 구멍도, 방 한쪽에 가지런히 놓인 백호가 입던 옷가지와 외출할 때면 늘 쓰고 나가던 패랭이모자도, 하나같이 전부 다 백호의 손길과 체취가 묻어 있었다.
호열은 그렇게 백호와 함께 지내던 집에 홀로 앉아서 그의 자취를 더듬어 갔다. 그러다 복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 하고 바닥에 엎드려 흐느꼈다.
나는 너와 가족이 되고 싶었다.
그건 내가 너의 가족을 빼앗았을 지도 모른다는 죄의식 때문에,
너를 동정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너에겐 나의 시간과 공간을 기꺼이 내어주어도 좋을 만큼,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해가 지기 시작해 하늘이 붉게 물들었지만 호열은 허겁지겁 산으로 올랐다. 지금 산을 올랐다간 어둑해진 밤하늘 아래에서 산길을 헤맬 것이 뻔했지만, 하루라도 더 지체했다간 백호가 점점 더 멀리 떠나버릴까 봐 불안한 마음에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백호를 두고 떠났던 장소부터 시작해서 그 근방을 돌며 혹시라도 남아있을 백호의 흔적을 샅샅이 뒤졌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백호가 머물렀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아직 멀리 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백호야! 백호야!”
남겨진 백호의 흔적들을 따라가며 호열은 계속해서 백호를 불렀다. 하지만 돌아온 건 산속에서 메아리치던 제 목소리 뿐이었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서 발밑조차 잘 보이지 않았고 호열은 이미 깊은 산속까지 들어와 있었다.
이대로 계속 백호를 찾아야 하나 아니면 포기하고 마을로 내려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무렵,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세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사냥꾼인 호열이 너무나도 잘 아는 소리였다. 발톱을 숨긴 맹수가 들키지 않으려 몸을 낮추고 살금살금 다가오는 소리.
백호일까? 아니면 다른?
소리만 들어서는 백호인지 아닌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 호열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만약 등이라도 보였다간 수풀 너머에 숨어 다가오는 저 맹수가 백호가 아니라면 그대로 습격 당하기 십상이었다. 더군다나 빈손으로 산을 오른 탓에 지금 호열은 제 몸 하나 지킬 방도가 없었다.
“...백호야? 백호 맞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백호를 불러보았으나 아무런 답이 없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치는데 문득 찬바람이 등 뒤를 스쳤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절벽 끄트머리에 낭떠러지가 보였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영락없이 덫에 걸려든 것이다.
평생 덫을 놓을 줄만 알았지, 제가 덫에 걸릴 줄도 모르고. 꼴 좋다, 양호열.
더는 발 디딜 곳이 없어 절벽 끝에 멈춰서자 곧 수풀 사이로 번쩍이는 두 눈이 보였다. 호열을 궁지에 몰아넣은 포식자가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과거에 호열이 수도 없이 잡았던 표범이었다.
표범은 호랑이보다도 잡기 어려운 맹수였다. 워낙 잘 뛰어올라서 덫에 걸리지도 않았고 나무를 잘 타서 도망도 잘 쳤다. 아마 호열이 이 절벽 아래로 뛰어들어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따라 뛰어든 표범에 의해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여기서 끝이라는 생각이 들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그날 홀로 산에 두고 온 백호의 우는 얼굴이었다. 호열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날 너를 그렇게 혼자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백호야…
그 때였다. 반대편 숲에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놀란 호열은 물론이고 눈앞의 표범 또한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건 호열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호랑이의 모습을 한 백호였다.
“안 돼, 백호야! 오지 마!”
사색이 된 얼굴로 호열이 소리쳤다. 제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해도 백호는 아직 어린 호랑이였다. 성체로 보이는 표범을 당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백호는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서로 탐색하는 듯 두 맹수가 노려보며 빙글빙글 돌았다. 연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백호에 비해 표범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워 보였다. 호열은 여차하면 그들 사이로 뛰어들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적대감을 보이는 백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표범이 먼저 등을 돌려서 다시 숲속으로 돌아갔다. 호열은 넋이 나간 얼굴로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표범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반면 백호는 표범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표범의 냄새가 사라지고 나서야 경계를 늦추고 발톱을 감췄다.
“백호야…”
호열이 부르자 그를 돌아본 백호가 그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호열이 백호를 향해 손을 뻗었는데 그 손 끝에 닿기 직전에 몸을 돌려버리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호열에게 등을 돌리고 털썩 엎드렸다. 그러면서 마치 시위라도 하는 듯 꼬리를 연신 바닥에 탁탁 부딪쳤다.
마치 나 삐졌어요, 하는 모양새라 호열은 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곧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백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저번에 했던 말들은… 거짓은 아니야. 난 정말로 너희 부모님을 죽였을지도 몰라.”
바닥을 치던 백호의 꼬리가 허공에서 멈추었다. 호열이 눈을 내리깔고 마저 이야기했다.
“그래서 사실은 널 볼 때마다 줄곧 죄책감이 들었어. 그게 너무 힘들어서 너를 밀어냈는데… 너와 떨어져 있으니까 알겠더라. 내 안의 죄책감보다 너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훨씬 크다는 걸.”
호열의 두 눈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백호야, 너를 혼자 산에 버려두고 와서 정말 미안해. 이런 나지만 네가 날 용서해준다면 너의 곁에 있고 싶어.”
전하고 싶은 말을 전부 뱉어냈지만 호열은 여전히 백호를 쳐다보지 못 했다. 바닥에 떨어진 눈물방울이 땅에 번져가는 걸 보면서 애꿎은 주먹만 꽉 쥐고 있었다. 그때 호열의 위로 사람의 그림자가 졌다.
“호열이 네가 정말 우리 부모님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네가 밉고 원망스러워.”
호열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백호가 호열의 앞에 서 있었다. 호열을 내려다보는 백호의 두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하지만 방금처럼 네가 위험에 빠진다면, 나는 또다시 너를 구하러 갈 거야!”
몸을 낮춰 호열의 품으로 뛰어들며 백호가 말했다. 호열이 그런 백호를 마주 안았다. 여전히 눈물 젖은 얼굴이었지만 호열도 백호도 비로소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고마워, 백호야. 정말 고마워.”
“호열아… 이제 나 안 버릴 거지?”
“응, 절대로. 다시는 안 그럴 게, 약속할 게.”
둘은 서로의 어깨에 기댄 채 서로 머리를 맞대고 나란히 앉았다. 등 뒤에 낭떠러지가 있었지만 이젠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절벽 위로 동그란 보름달이 그들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백호야, 우리 산에서 같이 살까?”
“마을에서 살지 않고?”
“마을에서 살면 네가 불편하잖아. 네가 좋아하는 개울가 근처에 집을 짓고 살자. 그리고 가끔은 함께 마을에 놀러도 가고.”
“장터에도 가고?”
“그러자. 그리고 또…”
백호야, 우리 가족이 되자.
서로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고, 미움과 원망조차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그렇게 가족이 되자.
- 完.
* 백호와 호열이가 가족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가족엔 여러 가지 형태가 있고, 사랑도 꼭 연인 간의 사랑으로만 정의될 필요는 없으니까요. 서로 사랑해서 가족이 된 호열백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이 이야기 속 둘은 앞으로도 산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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