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센/마키센] 월한강청(月寒江淸)
동양풍 판타지 AU
월한강청(月寒江淸)
「달빛은 차고 강물은 맑게 조용히 흐른다.」는 뜻으로,
겨울철의 달빛과 강물이 이루는 맑고 찬 정경(情景)을 이르는 말.
본디 자연이 어떠한 연유로 자아를 가지게 되면 그 자연에 속한 정령이 되는데, 정령이 된 영들은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자연의 힘을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고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 강한 힘을 가진 위대한 정령들은 인간들에게 신으로 받들여지기도 했다.
날이 추워 며칠간 쌓여있던 눈들이 조금씩 녹기 시작한, 드물게 포근한 겨울날이었다. 바다와 맞닿은 카나가와 지역에선 대부분의 주민들이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는데 일 년 중 추운 겨울은 바다에 나가기 가장 고된 계절이었다. 긴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면 어민들은 풍어와 어로의 안전을 비는 풍어제(豊漁祭)를 열었는데, 이는 바다의 신에게 바치는 제사라고 하여 ‘용왕제’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카나가와의 북쪽에 위치한 쇼호쿠에서도 용왕제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루카와는 제단을 만들 나무를 구하러 산에 올랐다. 그러나 겨울의 산에서 마땅한 나무를 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루카와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점점 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듯한 깊은 산으로 들어가자 멀리서 매우 튼튼해 보이는 벚나무를 발견했다. 저 정도 나무면 까다로운 마을 노인네들도 토를 달지 않겠지. 벚나무 앞에 다다른 루카와가 망설임 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야!!! 당장 멈추지 못 해!!!”
등 뒤에서 우렁찬 호통 소리가 들리자 루카와가 휘두르던 도끼가 나무 앞에서 멈췄다. 휴, 십년감수했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루카와가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보자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붉은 머리를 한 거대한 남성이 보였다.
“너 인간이지? 대체 인간이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거야? 그 도끼 내려놓고 썩 꺼져!”
“...싫어”
“싫긴 뭐가 싫어! 너 인마, 그 벚나무 베면 천벌 받는다?”
“싫어, 벨 거야.”
“야, 야!! 멈추라고!! 그 나무는 평범한 나무가 아니란 말야!! 이 멍청이가!!!”
루카와가 다시 도끼를 들어 올리자 붉은 머리를 한 남자가 아연실색하며 달려와 도끼를 붙잡았다. 그렇게 두 남자는 서로 도끼를 잡아당기며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붉은 머리 남자의 휴전 선언에 잠시 도끼를 바닥에 내려두었다. 붉은 머리를 한 남자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어휴, 이 무식한 녀석… 근데 네 녀석은 대체 왜 이 나무를 베려는 거냐?”
“나무 필요하니까.”
“그럼 다른 나무 베면 되잖아!!”
“싫어, 이게 맘에 들어.”
“진짜 말이 안 통하네… 그럼 나무 말고 다른 필요한 거 없어? 다른 거 구해줄 테니까 이 나무는 포기해.”
다른 걸 구해준다고? 루카와는 잠시 고민하더니 간결하게 대답했다. 돈.
“돈? 아아, 인간들이 필요한 물건을 구할 때 지불하는 거 맞지? 어디 보자, 돈하고 바꿀 만한 게…”
뭘 제시하는지 어디 들어나 보자는 듯, 루카와가 팔짱을 낀 채로 붉은 머리의 남성을 째려보았다. 그 붉은 머리는 잠시 고민하더니 드디어 무언가 생각난 듯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돈하고 교환할 만한 가치 있는 거면 되는 거지?”
끄덕-
“저쪽으로 나가면 언덕이 하나 나오는데 그 언덕 남쪽 료난에 강이 있거든? 그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넓적한 바위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서 낚시하고 있는 녀석한테 가서 금송어를 달라고 하면 돼.”
루카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금송어는 확실히 희귀한 물고기여서 구하기만 한다면야 나무보다야 훨씬 가치가 있겠지만. 루카와는 저 붉은 머리가 영 못미더웠다.
“그 의심스런 눈초리는 뭐야! 내가 설마 인간한테 거짓말을 하겠냐! 그 녀석이 내 친구니까 걱정 말고 가기나 해.”
미심쩍긴 했지만 루카와는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가보자고 생각했다. 만약 저 녀석 말이 거짓이라면 내일 당장 올라와서 저 벚나무를 다 베어 버려야지. 루카와가 언덕을 오르는데 벚나무 앞에 서 있던 붉은 머리의 남자가 소리쳤다.
“그 녀석 이름은 센도야! 센도한테 사쿠라기가 부탁했다고 하면 돼!”
언덕을 넘자 그새 해가 져서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강을 찾아야 하는데. 귀를 기울이자 멀지 않은 곳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루카와는 물소리를 따라가 어렵지 않게 강을 찾을 수 있었다.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는데 강이 점점 넓어지더니 주변이 밝아졌다. 커다란 보름달이 강물에 반사되어 주변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설마 인간?”
처음 듣는 목소리에 루카와가 고개를 돌리자 넓적한 바위에 앉아 강에 발을 담그고 있는 한 남성이 보였다. 달빛이 밝아서일까, 아니면 저 사람의 몸에서 빛이 나는 걸까? 루카와는 눈앞의 존재의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놓았다. 그런 루카와를 빤히 보던 남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인간이 어떻게 여길 들어왔을까. 어찌 됐든 밤이 깊어지기 전에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어?”
돌아가라고? 그제야 루카와는 이곳에 온 목적이 떠올랐다. 자세히 보니 바위에 걸터앉은 남성의 옆에 낚싯대가 놓여 있었다. 아, 저 녀석이 바로…
“센도?”
“응? 내 이름을 알고 있네?”
“...사쿠라기가 너한테 가라던데.”
그 이름을 듣자 센도가 눈을 끔뻑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센도의 표정에 루카와가 자초지종을 간단히 설명했다. 루카와의 말이 끝나자 센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사쿠라기의 부탁이니 금송어는 너한테 줄 게. 자, 여기.”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어망이 센도의 손에 불쑥 잡혀서 루카와의 앞에 놓였다. 얼떨결에 받아들였더니 안에 정말로 귀한 금송어가 펄떡이고 있었다. 이걸 정말 받아도 되는 건가? 루카와가 쳐다보자 센도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가볍게 묵례를 한 루카와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데 발이 왜이렇게 무거운지. 걷다 말고 잠시 멈춘 루카와가 다시 센도를 돌아보았다.
“있잖아…”
“응?”
“내일도 여기에 있어?”
루카와의 물음에 센도가 소리내어 웃었다. 루카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응, 난 이 강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있어.”
다음 날, 루카와는 평소와 다르게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시장에 가서 금송어를 팔았다. 금화로 두둑해진 가방을 다시 집에 가져다 놓고 빈 어망을 챙겨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료난에 있는 센도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어제 돌아올 때는 그렇게 걸음이 무겁더니, 지금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언덕 아래로 내려가 료난에 도착하자 익숙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며 어제 센도와 만났던 넓적바위 근처에 다다르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오늘도 그 자리에 있을까? 또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윽고 넓은 강줄기가 나타나고 달빛이 비추던 강물이 이번엔 햇빛에 찰랑거렸다. 그리고 어제저녁, 센도가 낚시를 하던 그 바위엔 오늘도 어김없이 강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있는 센도가 보였다. 센도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루카와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하, 정말 다시 왔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나를?”
“그래, 너를.”
미소 짓는 센도의 얼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역시 어제 빛이 났던 건, 달빛이 비췄기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센도한테서 빛이 나는 거였어. 루카와는 센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질 못 했다. 옆에 와서 앉으라는 듯, 센도가 바위를 손으로 두드렸다. 그 자리에 루카와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센도는 한겨울에 맨발로 차가운 강물에 발을 담그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역시 센도는…
“너 선녀야?”
“응?”
센도가 휙 고개를 돌리자, 루카와의 눈앞에 센도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당황한 루카와가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더듬더듬 자신이 알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저기 바다 건너 어느 나라에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잠시 목욕을 하는 호수가 있는데,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무꾼이 선녀의 날개옷을 훔쳐서 하늘로 돌아가지 못 한 선녀와 결혼한 이야기. 루카와는 자신이 재밌게 말하는 재주가 없다는 걸 잘 알아서, 중간중간 센도의 반응을 살폈는데 센도는 무척 흥미롭다는 듯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진짜 재미있네. 그래서 다음엔 어떻게 됐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너 선녀 맞냐고.”
“그건 아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건 비슷하긴 하네.”
센도의 말에 루카와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인간이 아닐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로 다른 존재였다니.
“난 이 강의 정령이야, 루카와. 강은 하늘에서 내린 빗물이 모여서 만들어지고, 바다로 흐르면서 생명력을 갖게 돼.”
“정령?”
“맞아, 난 이 강이 생기면서 태어났어. 이 강이 곧 나인 셈이지.”
“어쩐지… 그럴 것 같았어.”
“응? 뭐가?”
센도가 궁금하다는 듯 묻자 루카와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처음 봤을 때 너가 너무 예뻐서…”
루카와의 말에 센도가 잠시 놀라더니 이내 해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루카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더니 말했다.
“사실 나도 널 처음 봤을 때 당연히 네가 정령일 줄 알았어. 너도 무척 아름다웠거든. 인간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쿵쾅거렸다. 그렇게 홀린 듯 센도를 바라보던 루카와의 앞에 불쑥 어망이 내밀어졌다. 깜짝 놀란 루카와가 뒤로 몸을 피하자 센도가 얼른 받으라는 듯 루카와의 무릎에 어망을 올려두었다. 분명 가지고 왔을 땐 빈 어망이었는데, 지금 무릎 위에 올라간 어망엔 또 금송어가 들어있었다.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준 보답이야. 사양 말고 받아도 돼.”
잠시 고민하던 루카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강의 정령이라는데, 물고기 잡는 것 쯤이야 일도 아니겠지. 센도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루카와는 센도와 좀 더 함께 있고 싶었지만 오늘은 오후에 할 일이 있어 얼른 가봐야 했다. 루카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센도도 그를 배웅하러 일어섰다. 강물에서 올라온 새하얀 다리가 바위 위에서 물방울과 함께 반짝였다.
“잘 가, 루카와. 오늘 와줘서 고마웠어.”
“...내일 또 올 게.”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루카와가 말했다. 그런 모습에 센도는 자꾸 웃음이 나왔다. 정말 재미있는 인간이라니까. 멀어지는 루카와를 향해 센도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루카와는 매일 같이 센도를 찾아왔다. 이렇게 매일 와도 돼? 너 할 일 없어? 센도가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루카와에게 물었다. 루카와는 겨울에는 한가해서 괜찮다며 얌전히 센도의 무릎에 누워 하늘을 보다가, 센도와 이야기도 나누고, 중간중간 졸기도 했다. 센도는 웃으며 루카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 날은 루카와가 물었다. 정령은 어떻게 되는 거야? 센도는 인간인 루카와가 이걸 왜 궁금해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루카와의 표정이 제법 진지해 보여서 순순히 알려주었다.
“자연이 자아와 생명력을 가지면 정령이 되는 거야.”
“그건 어떻게 가지는데?”
“글쎄, 나 같은 경우는… 내가 빗물이 모여서 강이 만들어졌다고 저번에 얘기했었지?”
루카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센도는 오래 전 자신이 태어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런데 물이 고인다고 해서 강이 되지는 않아. 물은 바다로 흐를 수 있어야 강이 되거든. 그러기 위해선 바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해.”
“허락?”
“응, 난 강이 되고 싶었어. 그래서 바다에 허락을 구했지. 당신에게 흐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그 말을 하는 센도의 표정이 아련해 보이기도 설레어 보이기도 했다. 그런 표정의 센도는 처음이라 루카와는 센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질 못 했다.
“허락 받았어?”
“그래, 감사하게도. 그렇게 나는 바다로 흐를 수 있었고 강이 되었어. 내 이름도 그 분이 지어주신 거야. ‘센도(仙道)’라고.”
루카와는 센도를 태어나게 하고 이름까지 지어준 바다라는 존재를 떠올렸다. 얼마 뒤면 마을에선 용왕제가 열린다. 센도를 받아줬다는 그 존재는 용왕 같은 것일까?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던 바다의 신이라는 위대한 존재가 센도의 곁에 있었구나. 순간 루카와는 자신이 태어났을 때를 이야기하던 센도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왠지 그 바다라는 존재가 거북해졌다.
늦은 오후, 센도는 즐거운 걸음으로 강의 하류로 내려갔다. 강의 맨 아래이자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 잔잔히 파도가 치는 해안에 다다르자 센도가 누군가를 불렀다.
“마키 상, 저 왔어요.”
센도의 부름에 응답하듯 넘실거리는 파도 너머로 어떤 인영이 나타났다. 이 바다의 정령이자, 신이라고 불리는 마키였다. 센도가 반가운 듯 달려가 그의 가슴에 안겼다. 구릿빛으로 빛나는 팔이 센도를 마주 안아주었다.
그들은 해가 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해안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만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센도가 재잘거렸다. 처음엔 루카와를 만난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루카와에게 들은 다른 나라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까지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는 나무꾼에게 시집 갈 수 밖에 없었대요. 진짜 재밌죠?”
“교훈적인 이야기네. 인간을 너무 믿지 말라는.”
“그런가요? 하지만 선녀도 사실은 나무꾼을 사랑해서 곁에 있었던 게 아닐까요?”
마키는 말없이 센도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안 보인다 싶었더니 오랜만에 나타나서는 이상한 인간 이야기나 하고 있다니, 영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물론 한낱 인간이 센도에게 해코지를 하진 못 하겠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마키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센도, 저기 바다 너머엔 이런 이야기도 있어.”
“무슨 이야기요?”
“자신이 구해준 인간을 사랑한 바다의 정령이, 그 인간의 사랑을 얻지 못 하자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
센도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그런 센도의 머리를 마키가 손을 들어 쓰다듬었다. 저를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했지만 저를 바라보는 마키의 눈빛은 단호했다. 마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센도…
인간에게 너무 정을 주지 마.
센도는 큰 고민에 빠졌다. 전날 마키의 충고를 듣고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인간에게 정을 주지 말라는 말에 어떠한 긍정의 말도 뱉지 못한 자신이 이상했다. 그냥 ‘알았어요’ 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목에 무언가 걸린 듯 도저히 말이 나오질 않았다.
실체가 없는 정령들은 감정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부정적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하거나 심한 감정의 변화를 겪으면 힘이 약해지는 건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엔 소멸하기도 했다. 그래서 정령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금기시 되었다. 거짓을 말하거나 맹세를 깼을 때 뒤따라오는 감정의 여파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어제 침묵했던 건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였겠지. 그러니까 사실은 인간에게 정을 주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내가 이런 마음을 가졌다는 걸 마키 상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일부나 마찬가지니까.
“역시… 루카와는 이제 만나지 말아야 겠다…”
센도가 중얼거리며, 강물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루카와와 헤어질 생각만 했는데 벌써부터 어딘가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키 상은 이런 걸 예견했던 걸까? 이 고통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싫어.”
루카와가 눈을 매섭게 뜨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예상했던 것 보다 더 거센 반응에 센도도 답지 않게 쩔쩔매었다.
“싫고 좋은 문제가 아니야, 루카와. 이제 나 만나러 오면 안 돼.”
“왜?”
“왜냐니, 원래 인간하고 정령하고 만날 이유가 없는 거야.”
“난 있어.”
역시나 고집불통. 인간하고 말이 통할 거라 생각한 내 잘못이지. 센도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루카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안녕, 루카와. 이제 여기 와도 날 만날 수 없을 거야.”
“센도…?”
놀란 루카와가 센도를 붙잡으려 했으나 센도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아도 물소리만 들릴 뿐 센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센도를 찾던 루카와가 이내 포기한 듯 강가를 벗어났다. 모습을 숨긴 채 몰래 지켜보던 센도는 루카와가 사라진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절대 안 떠날 것처럼 굴더니,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바로 가버리네. 홀로 남은 센도가 쓸쓸히 웃었다. 알 수 없는 통증이 또다시 느껴졌다.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몰랐다면 좋았을 걸.
그러나 루카와는 순순히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센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루카와는 강으로 찾아왔다. 그렇게 매일 센도를 만나지도 못 하고 한참을 홀로 바위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해가 지면 다시 돌아가곤 했다. 지켜보는 센도도 애가 탔다. 대체 왜 그렇게 인간들은 고집이 센 건지.
어느 날은 아예 작정을 했는지 해가 진 지 한참이 되어도 루카와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급기야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바위에 누워서 잠들어 버렸다. 저렇게 잠들어도 괜찮은 걸까? 센도가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새벽이 되니 쌀쌀해진 기온에 루카와의 몸이 점점 파랗게 질려갔다. 결국 물 밖으로 나온 센도가 가까이 가보니 루카와의 몸이 추위에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러다 큰일 나겠어. 바위 위로 올라간 센도가 루카와를 옆으로 뉘이고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조금씩 체온이 돌아오는 건지 몸의 떨림이 멈추었다. 센도가 안도하며 루카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두근두근. 루카와의 가슴에서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센도가 귀를 가져다 대자 루카와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인간들은 심장이 이렇게 뛰는 구나. 정말 신기하고 아름다워. 그렇게 센도는 루카와를 끌어안고 날이 밝을 때까지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해가 중천에 뜨자 눈이 부신 지 루카와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가슴 부근이 묵직한 느낌에 눈을 떠보니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센도가 보였다. 놀라기도 잠시, 루카와가 센도를 부서져라 꽉 껴안았다.
“센도…!”
“루카와! 일어났어?”
루카와가 믿기지 않는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센도가 가만히 제 품에 안겨있다니.
“이제 안 놓칠 거야.”
“알겠어. 나 이제 안 도망갈 테니까. 이것 좀 풀어줘.”
품에서 벗어난 센도가 바위 위에 앉자 루카와도 따라서 옆에 앉았다. 그러면서도 센도가 다시 도망갈세라 그의 팔을 꽉 붙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한 센도가 소리내어 웃었다.
“내가 졌어, 루카와. 네가 오고 싶을 때 언제든 날 찾아와도 좋아.”
시간은 착실히 흘러 어느새 추운 겨울이 끝나가고 자연은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즈음 루카와는 고민이 생겼다. 날이 풀리면 지금보다 할 일이 많아질 텐데, 그럼 센도를 만나러 료난까지 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센도.”
“응?”
“나한테 시집와.”
“...갑자기? 너 나한테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
“좋아해.”
“그게 아니라…”
“사랑해.”
당황한 센도가 뒷걸음질을 칠 때마다 루카와가 한 발짝씩 따라붙었다. 그러다 막다른 곳에 닿자 센도는 루카와의 양팔에 갇힌 꼴이 되었다. 센도를 뚫어져라 보던 루카와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센도가 팔을 들어 저지했다.
“루카와, 난 강에서 벗어날 수 없어.”
“괜찮아. 여기서 집 짓고 살면 돼.”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난 너랑 절대 혼인 못 해.”
절대 못 한다고? 루카와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센도가 저한테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오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루카와는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루카와가 손을 들어 자신을 막고 있는 센도의 양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곧 루카와의 얼굴이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루카와가 센도를 잡아먹을 듯 쳐다보며 말했다.
“하고 말 거야. 네 날개옷을 훔쳐서라도.”
그리고 당혹감에 벌어진 센도의 입술에 그대로 입 맞췄다. 굳어버린 센도의 입안에 거침없이 침투해서 안쪽까지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센도가 숨을 헐떡여도 놔주지 않고 오히려 턱을 붙잡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그 순간 갑자기 센도가 사라졌다. 당황한 루카와가 돌아보니 센도가 강물에 쓰러진 채로 목을 붙들고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루카와가 서둘러 강가로 달려갔지만 센도가 오지 말라며 소리쳤다. 센도의 외침에 걸음을 멈춘 루카와는 그제야 센도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센도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루카와를 보았다.
“이제 그만하자, 루카와… 나는 더 이상 버티기가…”
“뭘 그만해?”
“...이제 그만 날 찾아와 줘. 부탁할게.”
“안돼, 못해!”
결국 참지 못하고 루카와가 강물로 뛰어들어 센도를 끌어안았다. 센도는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안겨 눈물만 흘렸다.
“넌 내 거야, 센도.”
센도를 으스러질 듯 껴안으며 루카와가 말했다. 센도가 가만히 안겨 눈을 감았다. 내가 이 품에서 벗어나도, 루카와는 계속 나를 찾아오겠지. 마키 상,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난 네 것이 아니야, 루카와. 바다의 것이지.”
“바다?”
“그래, 난 바다에 종속되어 있어. 그리고 절대 벗어날 수 없어.”
“그래서 나랑 혼인 못 한다고 한 거야?”
루카와가 묻자 센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센도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 망할 바다한테서 센도를 빼앗고 말겠다고 생각하며 루카와가 이를 갈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센도는 씁쓸하게 웃었다. 마키 상이 절대로 자신을 놓아줄 리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센도는 루카와를 만나고 그와 가까워질수록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키에게 종속 된 정령 주제에 그의 뜻을 거스르고 인간에게 정을 주고 있었으니. 이 고통은 섭리를 거스른 대가이다. 그러니 달게 받아야만 한다.
“너한테 갈 수 없어, 루카와. 난 강의 정령이야. 바다로 흐르지 못 하면 나는…”
“센도?”
“바다로 가지 못하는 강물은 결국엔 고여서 썩어버리겠지. 그리고 소멸할 거야.”
“이해가 안돼. 나랑 같이 살면서 계속 바다로 흐르면 되잖아.”
“그럴 순 없어. 그가 허락하지 않을 거야.”
센도가 말하는 ‘그’는 틀림없이 그 바다임이 분명했다. 센도를 태어나게 했고, 살아있게 하는 존재. 빌어먹게도 거대한 존재였다. 센도가 소멸하게 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센도를 포기할 수도 없다. 루카와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인간인 게 원망스러웠다.
“이게 내 운명이야, 루카와. 그러니까 이제 날 잊어.”
루카와가 세차게 고개를 젓자, 센도가 눈물범벅인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리고 붙잡을 새도 없이 사라졌다. 루카와가 뒤늦게 주위를 둘러봤지만 센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센도의 이름을 부르며 루카와가 강 사이를 뛰어다녔다. 한참을 불러도 센도가 나타나질 않자 강 한 가운데에서 루카와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너도 나한테 운명이야! 내 이름은 루카와(流川)야! 나도 너한테 흐를 운명이라고!”
그러니까 나한테서 도망치지 마, 센도. 루카와가 중얼거리며 강 밖으로 나와 강가의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바위 끝에 위태롭게 서서 또다시 소리쳤다.
“너한테 흐르지 못 하면 나도 죽을 거야! 차라리 너랑 같이 소멸하겠어!”
루카와의 몸이 강 쪽으로 기울자 등 뒤에서 누군가 루카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센도였다. 센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내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센도…”
“나라고 너와 함께하고 싶지 않아서 이러겠어? 나도 마음에 없는 말을 할 때마다 온몸이 천갈래로 찢어지는 것만 같아!”
마음에 없는 말이라니? 그럼 역시 너도…
“센도, 날 사랑해?”
루카와가 센도의 양팔을 붙들고 물었다. 제발, 대답해줘. 흔들리는 루카와의 눈동자를 보며 센도가 손을 들어 루카와의 얼굴을 감쌌다.
“내가 어떻게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루카와…”
센도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카와의 입술이 센도의 입을 막았다. 이번엔 센도도 거부하지 않았다. 서로 혀를 섞고 입술을 맞대며, 루카와가 센도를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센도의 허리에 매어진 끈을 풀고 옷자락을 열었다. 드러난 상체에 끊임없이 입 맞추던 루카와가 센도의 귓가에 사랑을 속삭였다. 센도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루카와에게 사랑 받는 건 고통스럽지만 너무나 행복했다. 이것 또한 운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겠지. 센도가 양팔로 루카와의 목을 끌어안자 루카와가 그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둘은 밤이 깊어갈 때까지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날이 밝자 뒤척이던 루카와가 무언가 허전함을 느끼고 눈을 떴다. 역시나 센도가 없었다. 분명히 마지막까지 끌어안고 있었는데, 또 어딜 가버린 건지. 루카와가 센도를 찾아 강가로 가보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어제까지 분명 맑게 흐르던 강물이 강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마른 땅 위에 얇은 물줄기만 겨우 흘러갔다. 루카와는 직감적으로 센도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단 사실을 알았다.
아무리 찾고 소리쳐 불러도 센도가 나타나질 않자. 결국 루카와는 료난을 벗어나 언덕을 뛰어올랐다. 벚나무, 벚나무. 그 나무 어디에 있더라. 기억을 더듬어 발걸음을 옮기던 루카와가 마침내 센도를 만나게 해줬던 벚나무를 찾았다. 그리고 그대로 달려가서 벚나무를 힘껏 발로 찼다.
“야, 이 미친 놈아! 남의 몸을 왜 걷어차고 난리야!”
루카와의 목덜미를 잡아 당기며 붉은 머리를 한 남성이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벚나무 정령인 사쿠라기였다. 루카와는 다짜고짜 사쿠라기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도와줘! 센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앙?”
흥분한 루카와를 겨우 떼어놓고 벚나무 아래에 앉은 사쿠라기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전부 루카와에게 들었다. 사쿠라기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센도, 이 자식은 어쩌자고 저런 인간이랑… 따지고 보면 본인이 원인 제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사쿠라기도 센도가 걱정돼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봤자 눈앞에 있는 저 인간만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러니까 강이 말라가고 있다는 거지?”
루카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쿠라기는 머리가 아파졌다. 그건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최악의 경우였기 때문이다.
“잘 들어. 센도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거야.”
“센도가?”
“그래, 인간을 사랑해버렸는데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니까 고통 속에서 말라버리는 거지.”
“어째서? 내가 센도와 함께하겠다고 했잖아.”
“넌 모르겠지만, 정령한테 자신이 종속 된 존재는 절대적인 거야. 너를 선택하면 그건 마키의 뜻을 거스르는 거고, 그렇게 돼서 마키와 종속이 끊어지면 센도는 바다로 흐르지 못하고 결국엔 소멸하겠지.”
한 마디로 진퇴양난이로군. 어떤 선택을 해도 결과는 같은. 사쿠라기의 중얼거림에 루카와가 주먹을 부서져라 꽉 쥐었다. 이대로 센도가 소멸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 마키라는 녀석한테 허락 받으면 되는 거 아냐?”
“그게 되겠냐?! 어떤 정신 나간 신이 자신한테 종속 된 정령을 인간한테 내어주겠어?”
“...그 마키라는 녀석, 센도와 이어져 있는 바다 맞지? 카이난에서부터 료난까지 걸쳐있는.”
“그렇지. 잠깐, 너 어디 가?”
더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루카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루카와의 등 뒤에서 사쿠라기가 소리쳤지만 루카와는 멈추지 않았다.
“야, 멍청아! 설마 마키한테 대항할 생각이라면 그만둬! 그자는 거대한 자연 그 자체야. 인간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루카와는 바다를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이때만 해도 루카와는 그 바다의 신이라는 존재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빌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센도를 살릴 수 있다면 뭐든 하려 했다. 그러나 해안에 다다른 루카와의 눈 앞에 펼쳐진 건, 그간 보았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성난 파도였다. 루카와는 이를 악물었다.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파도는 해일이 되어 더욱 매섭게 강해졌다. 저 거대한 자연을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어쩌면 결과가 뻔히 보이는 대결이었지만 루카와는 물러설 수 없었다. 절대 센도를 소멸시킬 수 없었고, 이대로 센도를 놔줄 생각도 없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루카와가 바다를 향해 달려들었다.
깊이, 더 깊이 들어갈 수록 점점 바닷물이 턱까지 차올랐다. 파도가 칠 때마다 눈코입에 바닷물이 부딪혔지만 루카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계속 소리쳤다.
“센도는 내 거야!! 센도를 내놔!!”
절대 포기하지도, 너한테 지지도 않을 거야. 바닥에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이 들어가고 성난 파도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지만 루카와는 계속 소리치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결국 눈앞에 들이닥친 거대한 해일에 삼켜지고야 말았다. 루카와를 삼킨 바다는 여전히 분노를 참지 못하는지 거세게 소용돌이쳤다.
쇼호쿠와 카이난의 경계에 위치한 넓은 초원엔 오래된 적목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살아온 세월을 보여주듯 그 나무는 성인 남성 여러 명이 빙 둘러설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였는데, 쇼호쿠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지나치는 길목에 위치해서 대대로 쇼호쿠에선 그 나무를 수호신으로 삼았다.
수호신이라 불리는 나무 앞에 한 남성이 서 있었다. 구릿빛 피부에 왼쪽 눈 밑에 점이 있는 남성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는지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오랜만이군, 아카기.”
“마키, 당신이 바다를 나와서 이 멀리까지 오다니. 보통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자네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
아카기라 불린 커다란 사내는 이 적목나무의 정령이자 쇼호쿠의 수호신이었다. 오랜 시간 인간들과 가까이 지냈던 아카기이기에, 마키는 그에게 인간에 관해 묻고 싶었다.
“아카기, 인간을 사랑하고도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은 정령이 있나?”
뜻밖의 질문에 아카기가 당황한 내색을 감추지 못 했다. 설마 마키 본인이 인간과 사랑에 빠졌을 리는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설마 센도가?”
“그래, 인간하고 정을 통했어.”
아카기가 알기로, 센도는 마키가 가장 아끼는 강의 정령이었다. 바다에서 신이라 불리는 마키가 땅 위로 직접 행차할 정도면 센도는 이미 심각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고심하던 아카기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안타깝지만 인간을 사랑했던 정령들의 말로는 대부분 좋지 않았지. 사랑을 맹세했던 인간이 변심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거나, 사랑했던 인간의 수명이 다했을 때 그 슬픔을 이기지 못 하고 소멸하거나 둘 중 하나야.”
답을 들은 마키의 얼굴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대로 센도가 소멸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마키는 센도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마키, 자네가 센도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나도 잘 알아. 절대 보내주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인간은 고작 백년도 못 사는 존재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센도가 자네 곁을 떠나서 있는 시간은 우리의 기준에선 아주 찰나에 불과하다는 말이지.”
마키가 얼굴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을 하는 듯 보였다. 아카기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하지만 그 인간을 잃은 다음에 센도가 소멸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없어.”
“그럼 자네가 센도에게 확신을 주면 되지. 그렇게 자신이 없나?”
“예전엔 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군.”
센도의 모든 걸 알고 있다고 믿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센도를 가장 아끼듯 센도도 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날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한 인간이 센도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마키는 몰아치는 해일 속에서도 센도를 내놓으라며 자신에게 악을 쓰던 그 인간을 떠올렸다. 인간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건 마키에겐 일도 아니었지만 그러지 못 했다. 그 인간을 잃은 걸 알면 센도가 더는 버티지 못 할 걸 알았으니까.
“마키, 자네가 놓치고 있는 게 있어. 센도가 인간을 사랑한다고 해서 더 이상 자네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과연 그럴까.”
“그건 자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겠지. 센도는 자네의 일부니까.”
잠시 먼발치를 바라보던 마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아카기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아카기가 작별을 고하자 마키는 본래의 자리인 바다로 돌아갔다. 마키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아카기는 그들의 무운을 빌었다.
주변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루카와는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졌다. 몸을 일으키고 싶은데 온몸이 얻어맞은 듯 아팠고, 무언가에 짓눌린 듯 무거워서 좀처럼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쥐어짜서 겨우 눈을 뜨자 여러 사람들이 루카와의 머리맡에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깨어났다! 루카와가 깨어났어요!”
호들갑 떠는 몇몇 사람들 사이로 모래사장과 잔잔한 바다가 보였다. 나 그 바다에서 살아남은 건가? 센도는 어떻게 된 거지? 루카와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다시 드러누웠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며, 용왕의 은총 덕분일 거란 말을 주절거렸다.
용왕의 은총은 무슨. 그럴 힘이 있으면 내가 아니라 센도를 되살려내란 말이다. 루카와는 정신이 멀어져감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센도, 센도.
…마키 상?
아주 작은 물줄기에 의지해서 힘겹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던 센도가 자신을 부르는 마키의 목소리에 물 밖으로 나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센도의 곁에 어느새 다가온 마키가 그를 붙잡아 지탱했다.
“센도, 힘들면 나한테 기대도 돼.”
“마키 상,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해요…”
센도가 그의 품 안에 안겨서 말했다. 센도가 기댈 수 있게 강가에 앉은 마키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센도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에 마키 상이 저를 이렇게 안아주셨었죠.”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키가 저를 끌어안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그러나 이다음 마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센도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센도, 너의 종속을 풀어줄게.”
“네? 하지만 그러면 전…”
“완전히 끊지는 않을 거야. 아주 약하게 남겨놓고.”
그러면 네가 그 인간한테 가더라도 강물이 말라버리진 않겠지. 마키가 쓰라린 웃음을 지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마키의 품에서 벗어난 센도가 그와 눈을 맞추고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운지 센도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더욱 보내주고 싶지 않았지만, 센도를 위해서 마키는 마음을 다 잡았다. 기다림은 아주 잠시일 테니까. 내가 확신을 가지면 너도 확신을 가지고 나한테 돌아오겠지. 결심을 굳힌 마키가 센도에게 물었다.
“...거야. 맹세할 수 있겠어? 센도?”
루카와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완전히 깜깜해진 밤이었다. 몸이 좀 회복됐는지 움직일 만 하자 루카와는 얼른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자신이 쓰러진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센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루카와는 쉬지 않고 달렸다. 이윽고 센도가 있는 료난 근방에 도착하자 루카와는 놀라움에 발걸음을 멈췄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힘차게 들리고 있었다. 그 소리에 서둘러 강가로 뛰어간 루카와가 다시 전처럼 맑게 흐르는 강물을 보자 안도의 숨을 쉬었다. 강물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센도는 무사해.
루카와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센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이 자주 시간을 보냈던 바위에 도달하자,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서 강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는 센도가 보였다. 처음 만났던 그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센도!”
“루카와, 기다렸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센도가 웃으며 답했다. 루카와는 그대로 달려가 센도를 끌어안았다. 한참을 껴안다가 떨어지고 나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루카와가 센도의 손을 꽉 붙들었다.
“너 괜찮은 거야?”
“응, 이제 괜찮아. 마키 상이 내 종속을 풀어주었거든.”
“그럼 더는 소멸하지 않는 거지?”
센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을 붙들고 있는 루카와의 손에 깍지를 끼어 잡았다. 그리고 루카와의 얼굴에 닿을 듯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
“루카와, 네 청혼에 대한 대답을 다시 해도 될까?”
가만히 센도를 바라보던 루카와가 대답 대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센도가 입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서로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붙어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강물에 반사 된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루카와, 우리 강의 상류에 집을 짓고 살자.
봄이 되면 꽃잎이 흐르는 강을 구경하며 강가를 거닐자. 함께 손을 잡고.
여름이 되면 같이 강물에 발을 담그고 놀자. 물고기를 잡는 것도 좋겠지.
가을이 되면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며 저 바위에 누워서 쉴까. 내 무릎을 베고.
겨울이 되면 집안에서 눈이 쌓인 풍경을 보는 거야. 서로 체온을 나누면서.
그렇게 사계절이 수없이 반복되고 너의 수명이 이 땅에서 다할 때까지,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너의 곁에 있을게.
바다와 맞닿은 카나가와 지역엔 전설이 하나 있다. 먼 옛날에 강의 정령을 사랑한 인간이 있었는데, 사랑하는 정령이 자신 때문에 운명을 어겨 강물이 말라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인간은 바다의 신에게 찾아가 그를 놓아달라 소리쳤다. 목숨을 건 외침이 신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던 걸까. 그 후 말랐던 강은 다시 차올랐고, 인간은 사랑하는 정령과 숨이 다할 때까지 함께 할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강의 정령이 인간과 함께 살았을 땐 강의 하류엔 물살이 아주 약하게 흐르고 있었는데 그 인간이 세상을 떠나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고, 비가 그치고 난 뒤엔 하류의 물줄기가 예전처럼 다시 힘차게 바다로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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