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열백호]바래다줄게

호열백호 60분 전력. 키워드 여름 사용. 백호를 바래다주는 호열이.

호백 뽀뽀해 by 여른
15
0
0

“바래다줄게.”

양호열이 처음으로 이 말을 한 건 중학교 2학년 여름. 강백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백호군단은 언제나처럼 다섯이서 한가롭게 뒷골목을 어슬렁거렸다. 다들 내색하지 않고 최대한 백호 곁에 있어 주려 했지만 해가 지고 밤이 깊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백호야, 나 그…….”

“어엉, 집 가야지? 어머니 걱정하시겠다.”

평소보다 늦게 귀가하는 친구들이 괜히 미안해하는 게 싫어서 백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내일은 더 오래 같이 놀자고 약속한 친구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자 호열과 백호만 남았다.

백호는 공원 벤치에 반쯤 기대 누운 채 호열의 눈치를 살폈다. 여름의 밤공기는 후텁지근했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돌아다니는 통에 입고 있는 교복은 땀에 젖어 축축했다. 헤어스프레이와 왁스로 깔끔하게 넘긴 호열의 리젠트도 더위 때문에 많이 흐트러져 버렸다.

멋 부리길 좋아하고 은근히 깔끔 떠는 호열이 가장 먼저 돌아가지 않은 게 신기했다.

“양호열, 너는 집에 안 가냐.”

내키지 않지만, 정말 묻기 싫지만 달이 벌써 머리 위에 있었다. 호열이도 집에 가긴 해야지. 그치만……. 백호는 입을 삐죽였다.

그런 백호를 흘끗 확인한 호열이 대답했다.

“가긴 해야지.”

“그치……?”

“응, 그니까 앞장서.”

“어엉…?”

벤치에 늘어진 백호를 두고 호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백호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바래다줄게.”

호열이 가면 공원에서 좀 더 죽치고 있을 생각이었던 백호가 우물쭈물했다. 호열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의 등을 꾹꾹 밀었다.

“자, 자. 이쪽이던가?”

“……아니거덩. 저쪽이야.”

“그래. 가자.”

백호는 발을 질질 끌며 집으로 향했다. 차마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동정 어린 시선은 이미 학교에서 충분히 받았다.

만약 양호열마저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본다면 백호는 아주 비참해질 것 같았다.

빌라 앞까지만 같이 갈 줄 알았던 호열은 머뭇거리는 백호를 툭툭 치며 기어코 집 현관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러곤 현관에 서서 문을 닫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백호를 말없이 바라봤다.

“바래다줘서 고맙다.”

“뭘. 친구잖아.”

호열은 그렇게만 말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어쩐지 조급해진 백호는 머리를 벅벅 문지르다 물었다.

“……그, 뭐냐, 괜찮으면 어… 마, 만화책 읽고, 갈래?”

기다렸다는 듯 호열이 씨익 웃었다. 백호가 가끔씩 멋지다고 생각하던 미소였다.

“그럴까?”

그날 호열은 흐트러진 리젠트와 땀에 전 교복 차림으로 백호의 집에서 놀다가 결국 잠까지 자고 갔다. 잘 때는 백호의 옷을 빌렸지만, 다음날 학교 가기 전에 교복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르느라 지각을 하고 말았다.

백호는 그런 호열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에.

이후로도 호열은 백호를 매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백호가 혼자 사는 집에 익숙해질 때까지.


“바래다줄래?”

“어엉?”

“바래다 달라고.”

“…호열이 넌 무슨 그런 얘기를 재활 끝난 다음에 하냐.”

병실 침대에 늘어져 있던 백호가 툴툴거렸다. 인터하이가 끝나고 재활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몸을 사리지 않고 경기를 뛴 대가로 얻은 부상은 작은 움직임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타고난 강골로 사흘 이상 아파 본 적 없는 백호에게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감각은 아주 생경한 것이었다. 특히 이게 치료하는 건지 더 아프게 하는 건지 모를 재활이 끝나면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중학교 시절 집까지 바래다주던 양호열이 떠올랐고, 그때처럼 오늘도 덥디더운 여름날이었기에.

백호는 호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일으켜 줘.”

호열은 백호의 손을 잡고 오른팔로는 백호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 일으켰다. 백호는 힘겹게 침대에서 내려와 조심조심 걸었다. 아이의 걸음마를 돕듯 호열의 손이 그를 이끌었다.

그렇게 딱 다섯 걸음. 병실 문 앞에 도착하자 호열이 잡은 손을 한 번 세게 쥐었다 놓았다.

“여기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

“고작 문 앞인데? 이걸로 된 거냐?”

“충분해.”

호열이 웃었다. 이제 백호는 저 미소가 기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런 어른스러운 얼굴을 할 때마다 호열은 억지로 어른이 되려 하는 것 같았다.

“이제 들어가서 쉬어라, 백호야. 다음에 또 올게.”

그렇게 말해놓고는 호열은 백호가 비틀거리며 침대로 가 눕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야 돌아갔다.

이럴 거면 왜 바래다 달라고 한 거지? 백호의 의문은 한 달쯤 지나고 나서야 풀렸다.

“오늘도 바래다주라, 백호야.”

“더 걸을 수 있다고? 하하,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야, 백호 너. 이제 걸음이 제법 반듯해졌다. 아프진 않아?”

호열은 시간이 나는 대로 병문안을 왔기에 일주일에 네 번은 만날 수 있었다. 그때마다 백호는 호열을 바래다주었고 언제부턴가는 호열이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래다줄 수 있는 한계가 병실 앞에서 복도, 계단 앞, 병원 로비까지 멀어지니 호열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이제 이 정도는 끄떡없다. 재활 선생님도 엄청 빨리 낫고 있다고 하셨어. …점점 더 나아지겠지?”

“하하하! 천재잖아. 재활 천재.”

“후후후… 그래, 맞아. 이 몸은 재활도 천재시다!”

백호가 전처럼 천재를 자처하면 호열도 전처럼 맞장구치며 웃었다. 어른스럽지 않고 그저 또래 같은 다정한 얼굴이 백호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양호열이 강백호를 감당하기 위해 억지로 어른이 될 필요는 없었으니까.


“호열아, 오늘은 좀 더 걷다 가면 안 되냐.”

하루는 백호의 제안으로 함께 바닷가를 걸었다. 오늘치 재활도 잘 끝냈고 힘들어서 울지도 않았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모르겠다고 호열은 생각했다.

해 질 녘의 바닷가는 꽤나 아름다웠지만 해변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푹푹 발이 빠지는 모래사장을 백호가 성큼성큼 걸어가면 호열은 열심히 발을 맞췄다. 혹시라도 백호가 비틀거리거나 넘어지면 잡을 수 있도록 양팔은 반쯤 들어 올린 채였다.

그걸 본 백호가 호열의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팔 아프게 왜 그러고 있냐. 이게 더 확실한데.”

“어? 어어… 그렇지.”

호열은 부디 해가 천천히 지기를, 그래서 자신의 얼굴이 노을 때문에 붉은 것처럼 보이기를 속으로 빌었다.

짭짤한 바닷바람이 입가를 스치자 어쩐지 달게만 느껴졌다. 백호의 조금 길어진 붉은 머리가 하늘하늘 흔들렸다.

“열아, 내가 처음에 너 바래다줄 때는 병실 밖을 못 나갔잖냐.”

백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혹시 기분이 안 좋은가? 호열은 열심히 적절한 대답을 찾았다.

“뭐, 재활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니까.”

“사실 그때 침대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일 것 같았는데, 네가 손 잡아주니까 다섯 걸음은 갈 수 있더라고.”

“음, 그랬냐? 잡아주길 잘했네.”

“엉. 그래서 네가 잡아주면 내 생각보다 더 멀리까지도 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호열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백호를 흘끗 올려다봤다. 시험 치다가 커닝페이퍼를 훔쳐보듯이.

하지만 노을에 물든 백호의 옆얼굴은 붉은색이었고 호열은 답안지에 아무것도 적을 수 없었다.

“그러다 넘어지면 너는 날 또 집까지 바래다줄 것 같으니까… 그게 되게 좋더라고.”

백호가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뭘 적어도 정답이었을 문제에는 침묵도 정답이 되었다.

“나 네 손 안 놓을 거다. 너 데리고 아주 멀리까지 가버릴 거야.”

“…….”

“이제 못 물러, 양호열. 애초에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내, 내가 뭘 시작했지……?”

“어쭈, 모른 척하시겠다? 중학교 때 나 바래다준 거 생각 안 나냐?”

해가 다 저버려서 호열의 얼굴은 이제 노을이 가려주지 못했다. 호열이 딸꾹질을 시작하자 백호는 만만찮게 붉어진 얼굴로 킬킬 웃었다.

“내가 언제까지 모를 줄 알았냐? 이 몸은 성장하는 천재다 이 말씀이야.”

양호열이 억지로 어른이 될 필요 없도록, 강백호도 나름 어른이 됐다. 적어도 호열이 숨겨 둔 마음을 알아챌 만큼은 컸다고 자부한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해도 양호열도 고등학생이니 못 따라잡을 것도 없었다.

“백호야, 나는…….”

호열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백호를 올려다봤다. 멋지게 웃는 얼굴도, 다정한 친구의 얼굴도 좋았지만 이렇게 흔들리는 얼굴도 참 좋았다.

백호는 꽉 잡은 호열의 손을 흔들었다.

“나 또 바래다줄 거냐?”

“……평생. 평생 바래다줄게, 백호야.”

우히히 웃은 백호가 호열을 꽉 끌어안았다.

“번갈아 가면서 하자. 나도 너 바래다주고 싶어.”

그날은 호열이 병실까지 백호를 바래다줬고, 다음번엔 백호가 호열을 병원 앞까지 바래다줬다.

백호가 퇴원을 하고 무사히 코트에 복귀한 뒤에도, 고등학교 3학년 인터하이에 드디어 전국을 제패했을 때도.

둘은 번갈아 가며 집까지 서로를 바래다줬다.

그러다 백호가 미국으로 가게 되자 더는 바래다줄 수 없었다. 같이 사는 집으로 가는 걸 바래다준다고 하지는 않으니까.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아주 멀리까지 함께 갔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