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이몽

1월 1일에 올리고 싶어서 급하게 쓰기

○◎● by 신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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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양호열, 25살을 앞두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만나 매년 새해를 같이 맞이한 친구와 올해도 어김없이 타종 행사에 왔다. 나는 그 친구를 좋아한다.

백호를 좋아한 시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19살까지는 그냥 멍청하고 착하고 의리 넘치고 재미있고 옆에서 챙겨줘야 하는 막내 같은 친구라고 생각했다(물론 이 생각은 나중에 완전히 뒤바뀐다). 각성은 19살에서 20살로 넘어가기 직전 23시 59분, 한밤중에 일어났다.

우리-여기서 우리는 나와 백호를 포함해 구식, 용팔, 대남을 포함한다-는 그때도 타종 행사를 보기 위해 오후 5시쯤 종각으로 갔다. 이제 미성년자 딱지를 떼니까 평소와는 다르게 새해를 맞이하는 게 어떠냐는 노구식의 제안 때문이었다. 어디를 가나 사람밖에 없었다. 검은색 롱패딩 무리가 빽빽했다. 다행인 건 백호가 남들보다 머리 두 개는 커서 훌륭한 이정표가 됐다. 낙오돼도 백호 밑으로 모이면 됐다.

저녁은 대충 편의점 컵라면으로 해결하고 보신각으로 갔다. 정확히는 가고 싶었다. 보신각은 이미 만석이었다. 서울 시민 전부가 여기 있는 듯했다. 발 디딜 틈 없는 곳을 후발대가 억지로 끼어들어 가니 사람들은 검은 물결처럼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렸다. 여기저기서 곡소리와 사람 찾는 소리가 가득했다. 전쟁통이 따로 없었다.

“종 보이냐?”

“아니. 사람들 뒤통수만 보인다.”

“그러니까 그냥 티비로 보자니까.”

처음부터 계획에 반대한 용팔이 짜증을 냈다. 용팔은 나보다 키가 작으니까 더 답답했을 것이다.

“난 잘 보여.”

백호의 말에 대남이 반박했다. 네가 안 보이면 전 세계 사람들 다 안 보인다.

추위 때문에 손이 자꾸 곱아들었다. 양손을 비볐다가 주머니에 넣었다가 입김을 불었다가 핫팩을 쥐었다가…. 별짓을 다 했지만 100년 만의 최고 추위는 그 작은 온기마저 쉽게 앗아갔다. 다른 애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목도리, 장갑, 귀마개까지 하고 왔는데도 벌벌 떨고 있었다. 구식이 ‘펭귄들은 추울 때 서로 뭉쳐있다던데.’ 말하자 대남과 용팔이 후다닥 그를 꼭 껴안았다. 나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토나와.

그 와중에 백호만은 달랐다. 백호는 원래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어서 한겨울에도 안에 민소매를 입는 기행을 보이곤 했다. 귀여움이라곤 하나도 없는 징그러운 남자 세 명이 뭉쳐있는 걸 보고 춥지도 않은데 징그럽게 왜 껴안고 있냐고 호통을 쳤다.

“냅둬. 쟤넨 글렀어.”

나는 서서히 열기가 사그라지는 핫팩을 미친 듯이 흔들며 말했다. 백호가 물었다.

“너도 추워?”

“어. 졸라 추워.”

멋없이 흘러내리는 콧물을 훌쩍 마셨다. 멀리서 진행요원이 외쳤다. 이제 2분 남았습니다!

“너 코 나온다.”

“알아.”

“그렇게 춥냐. 난 시원한데.”

“그러시겠지.”

아무리 흔들어도 반응이 없던 핫팩은 그대로 사망했다. 씨발. 싸늘히 식은 부직포를 주머니에 넣으려고 한 순간, 뒤에서 거대한 인파가 또 밀려왔다. 종을 어떻게든 가까이 보겠다는 무시무시한 압력이었다. 이게 무슨 콘서트 스탠딩석이냐고. 소리만 들어도 상관없잖아.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핫팩을 떨어뜨렸고 방향감각도 잃어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나를 백호가 붙잡았다.

“양호열!”

그러고는 내 왼손을 쥐고 그대로 자기 주머니에 쏙 넣었다.

백호는 정말이지 체온이 높았다. 온기가 아닌 열기. 습기도 느껴졌다. 주머니 안의 두 손은 누구 것인지 모를 땀으로 서로 촉촉해졌다. 이제 1분 남았습니다!

“따뜻하지?”

백호는 갓 떠오른 해처럼 강렬하고 환하게 웃었다.

밤 23시 59분, 새해가 되기 직전, 20살까지 남은 시간 고작 1분. 나는 각성했다.

좋아해, 백호야.

몇 달은 내 마음을 의심했다. 들떠서 착각한 게 아닐까? 추운 나머지 이성이 마비된 게 아닐까? 인파에 밀려 흔들다리 효과가 발동한 게 아닐까?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과거의 일까지 수면 위로 올라왔고 나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좋아한 지 참 오래됐구나.

그래, 오래됐다. 오래돼 묵다 못해 쉬어버린 감정이 더 삭아 문드러지기 전에 폭발한 것이다. 여기 있다고, 무시하지 말아 달라고. 물론 그 감정을 억지로 누르고 억압한 것 또한 내 감정이었다. 친구로도 충분하지 얼마나 욕심내려고 그래? 파티 분위기 망치지 마.

멍청이는 백호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이 쉰내 나는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고백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고백을 위한 온도, 분위기, 장소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람을 잃느냐 잃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나는 백호가 좋다. 거기에는 평생 친구로 남아도 좋다는 의미도 있다. 근데 섣불리 한 고백에 백호가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떠나버린다면? 상상만으로도 타격이 너무나도 컸다. 그건 싫어. 절대 싫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백호 옆에 있고 싶었다. 평생 옆에 붙어서 시시한 일을 잔뜩 하고 싶었다. 다른 애들 결혼식 때 같이 축가를 부르고 싶었다. ‘꽃보다 청춘’처럼 해외여행을 하고 싶었다. 팔순 때 같이 틀니 끼고 잔치하고 싶었다. 재미있겠지.

하지만 반대로, 내 옆에 백호가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만만치 않았다. 손을 잡고 다니며 말랑말랑한 일을 마음껏 하고 싶었다. 한강공원에서 2인용 자전거를 빌려 한 바퀴 돌고 싶었다. 영화관에서 커플 할인 받고 커플석에 앉아 커플콤보를 먹고 싶었다. 마라탕 4인분을 조지고 탕후루를 과일별로 먹인 뒤 포토이즘에서 깜찍한 머리띠를 끼고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포즈로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 사진들을 앨범에 보관했다가 이 삼십 년 뒤에 우리 참 어렸네, 그래도 지금 네가 제일 귀엽네 따위를 하고 싶었다! 아아아, 미친 존나 하고 싶어! 이게 더 하고 싶어! 솔직히 결혼식 축가도 해외여행도 팔순 잔치도 커플이면 더 재미있을 거 같아! 친구보다 애인하고 싶다고!

나는 결국 고백을 하기로 했다. 당장은 무리고 25살이 되는 날 하기로 했다. 25살인 이유는 다들 25살만 되면 인생 다 산 것처럼 얘기해서 그렇다. 젊음이 끝났다고 난리를 치니까. 인생과 젊음의 마지막이라면 고백 정도는 해도 되겠지. 게다가 사랑이 넘치는 백호가 갑자기 애인을 만들 수도 있고. 나름의 준비기간, 유예기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25살을 앞둔 12월 31일 23시 59분.

대남은 여자 친구, 구식은 가족여행, 용팔은 집에서 가요대제전을 보겠다고 불참해서 우리 둘뿐이었다. 딱 좋았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추우니까 껴안자고 하면 저번처럼 징그럽다고 하려나. 10! 9! 8! 7!

준비한 대사가 수정되어 더욱 긴장됐다. 6! 5! 4! 3!

그래도 저지를 수밖에 없어. 2! 1!

해피 뉴 이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화려한 폭죽이 터지고 25살이 됐다.

“백호야.”

내 이름은 강백호. 조금 있으면 25살이 된다. 이번에도 친구랑 같이 종 치는 걸 보러 왔다. 그 친구는 나를 좋아한다.

호열이의 마음을 깨달은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이 천재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2학년 때 우리는 다른 반이 됐다. 아쉽긴 해도 바로 옆 반이니까 상관없었다. 호열이는 쉬는 시간만 되면 나한테 왔다. 그건 구식이나 대남, 용팔이도 마찬가지였지만 매번은 아니었다. 호열이만 매번 왔다. 나 혼자 놔두는 게 신경이 쓰인다나. 중식이가 있어서 괜찮다고 해도 그랬다.

자주 놀러 와서인지 우리 반 사정에 훤했다. 담임과 반장 이름은 물론이고 무슨 요일 몇 교시가 어떤 과목인지, 그게 이동 과목인지 아닌지를 나보다 더 잘 알았다. 적당히 시간이 되면 나한테 ‘체육인데 체육복 준비했냐?’, ‘이제 슬슬 3반 가야지.’ 알려주곤 했다. 덕분에 곤란해질 상황을 무사히 넘긴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중식이는 그런 호열이가 대단하다고 했다.

“이 천재의 친구니까, 하하핫.”

“네가 자고 있을 때도 그냥 가는 일이 없어.”

“응?”

그건 몰랐다. 뭐, 자고 있었으니까.

“내가 자는 동안 호열이는 뭐 하는데?”

“뭐하냐고? 그러니까… 네 소지품을 뒤적거리거나 핸드폰 했던 것 같은데.”

양호열 시시하네. 난 내 얼굴에 낙서라도 하는 줄 알았다.

나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바로 다음 쉬는 시간에 자는 척을 했다. 드르렁 푸푸, 배우 뺨치는 코골이를 내고 있는데 옆자리에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아주 살짝 눈꺼풀을 떠서 확인했다. 호열이었다.

중식의 말대로 호열은 핸드폰을 했다. 화면을 가로로 눕혀놓고 엄지손가락만 움직이는 걸 보니 한참 빠져있는 마작 게임 같았다. 저것 때문에 점심을 거른 적도 있었다.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론이니 리치니 뜻 모를 단어를 외쳤다. 여러 번 설명해 줬는데 하나도 이해 못 했다. 게임은 간단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마작은 별로다.

게임을 한 3분 정도 했나. 호열이는 흥미가 떨어졌는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기지개를 쫙 켜고는 하품을 쩍 했다. 그리고 내 가방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는 거 뻔히 알면서 말이다. 정말 심심해 보였다. 그럴 거면 너희 반 가던가, 왜 여기 죽치고 있는 거냐? 나는 입이 근질거리는 걸 간신히 참았다. 자는척 하는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호열이도 반에 가고 나도 일어나게 빨리 쉬는 시간이 끝났으면 싶었다. 시계를 보려고 살짝 눈을 뜬 순간 호열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잽싸게 눈을 감았다.

천재의 오감은 뛰어나다. 계속 나를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호열이가 나를 보고 있다 인식하니 연기한 게 들통날까 봐 점점 얼굴이 굳었다. 나도 모르게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그때 찰칵 소리가 났다.

“큭큭. 콧구멍 개웃겨.”

호열이는 내 콧구멍을 찍은 듯했다. 안 그래도 호열이의 핸드폰 앨범에는 내 엽사가 가득한데 한 장 더 늘어나면 곤란했다. 나중에 슈퍼스타가 됐을 때 이미지 손상이 심하다. 분명 엽사 그만 찍으라고, 잘생긴 모습만 찍으라고 했는데! 나는 일어나 화를 내려고 했다. 호열이가 내 머리를 쓰다듬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나는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라 일어나는 타이밍을 놓쳤다.

한번 쓰다듬고 끝날 줄 알았던 호열이의 손은 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중독된 사람처럼 계속하려 했다다. 언젠가 소연이가 내 머리카락이 병아리 솜털 같다 했던 게 기억났다. 그래서 그런가? 암만 그래도 호열이는 너무 많이 쓰다듬었다. 뭔데, 왜 그만두지 않는 건데. 왜 이렇게 상냥하게 쓰다듬는 건데.

종이 울려서야 호열이는 손을 뗐다. 그러고는 내 귓가에 속닥거렸다.

“다음 시간 음악실이다, 백호야.”

호열이는 휘파람을 불며 나갔다.

나는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오래 엎드려 있어서 등이 아프고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보다 더 중대한 사안은 호열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일을 한나 선배에게 말했다.

“그게 널 좋아한다는 증거라고?”

“당연하죠.”

“자신만만하구나. 아니면 쪽팔릴 텐데.”

“필이 빡 왔다니까요? 천재잖아요.”

“이걸 왜 나한테 말하는데?”

한나 선배의 질문에 드리블을 놓쳤다.

“호열이가 너 좋아하는 거 자랑하려고? 아니면 같이 웃자고?”

“아뇨!” 나는 소리를 빽 질렀다.

절대로! 절대로 그런 건 아니었다! 어떻게 남의 진심을 멋대로 자랑하고 웃을 수 있어. 그건 쓰레기나 하는 짓이다.

어라? 그럼 나는 왜 말한 거지? 농구장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러고 있자니 구름처럼 뭉개뭉개 호열이가 피어 천장을 하나 둘 덮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던 호열이가 생각났다. 음악실이라고 말하는 호열이도. 매번 놀러 와서 날 지켜보고 갔던 호열이도. 농구 경기 때마다 보러 오던 호열이도. 이런 호열, 저런 호열, 그런 호열, 요런 호열, 조런 호열. 높다란 천장이 전부 호열이의 생각으로 덮히고 나서야 나는 한나 선배에게 말할 수 있었다.

“친구에서 애인이 되면 다른 놈들이 질투할까요?”

나는 호열이의 고백을 기다렸다. 여태까지 내 쪽에서 고백만 51번 했으니 한 번쯤은 상대방에게서 받아 보고 싶었다. 그 정도 욕심은 부릴 수 있잖아. 게다가 호열이는 고백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귀중하고 소중한 첫 기념을 나에게 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첫 고백에 바로 사귀다니, 호열이는 운도 좋다. 천재에다 멋지고 배려심 넘치는 날 좋아한 걸 영광으로 여겨라.

그래. 정말이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쭈욱, 계속, 줄곧, 내리, 끊임없이,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내가 네 마음을 안다는 어필도 슬쩍 했다. 발렌타인 때 특별히 하트가 들어간 초콜릿을 줬으며 결승전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안아주고 새해 때 과감하게 손을 잡기도 했다. 그래. 이렇게까지 했는데. 호열이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딱 1년만 더, 1년만 더 했던 게 이제 7년을 앞두고 있었다. 7년 동안 호열이는 여전히 날 좋아한다. 고2 이후로 쭉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아니! 정정한다! 더더더더더 좋아하게 되었다! 7년 동안 식을 만도 한데 그게 안 됐다. 왜 갈수록 멋있어지는 건데, 내 이상형에 가까워지는 건데! 억울해 돌아가실 지경이다.

나는 결심했다. 그냥 내가 먼저 하자. 답답해서 못 살겠다. 첫 고백을 날리는 양호열이 멍청이다. 내일 만나기로 했으니 종 치자마자 해야지. 아, 근데 진짜 억울한데?

그리고 마침내 종이 울렸다.

“양호열.”

“30살 돼도 애인 없으면 나랑 사귈래?”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아는데 언제 고백할 거냐?”

내 이름은 이용팔. 25살이 됐다. 백호 군단과 늦은 신년회를 하기로 했다. 대남은 지각, 구식은 일이 늦게 끝난다고 해서 나와 백호, 호열만 셋이 먼저 호프집에 들어가 술과 안주를 시켰다. 그리고 백호와 호열은 싸우고 있다.

시작은 백호와 호열이 1월 1일부로 사귄다는 소식이었다. 놀라긴 했지만, 천지가 개벽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지겨운 면도 있었다. 드디어. 이런 느낌? 그래서 대답도 비슷하게 했다.

“결국?”

“그게 끝이냐? 놀랍거나 신기하지는 않고?”

“일어날 일이 일어났는데 뭐.”

모둠 과일 안주가 나왔다. 나는 가지런히 썰린 파인애플을 한 조각 집었다. 숙성이 잘 되었는지 달큼한게 입맛을 돋우기에 딱 좋았다. 뒤이어 맥주 500 세 잔도 나왔다. 그걸 마시면 안 됐는데.

술이 들어가자 강백호는 이런저런 푸념을 내뱉었다. 호열이 자길 좋아하는 걸 18살 때 알았고, 호열의 고백을 계속 기다렸다고 했다. 저 정도 참을성 있는 녀석이 아닌데, 어지간히도 오래 기다린 게 신기했다. 겨우 기다려서 받은 고백은 백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악이었다. 30살 돼도 애인 없으면 사귈래? 라니. 이건 호열이가 잘못하긴 했다. 너무 구렸다. 유튜브도 안 보나.

“30살이 뭐냐고 30살이! 나보고 5년을 더 기다리라는 말 아니야!”

“차라리 결혼하자 하지 그랬냐.”

“그래! 그게 오히려 더 화끈하네!”

“나도 사정이 있었다니까.”

호열의 사정은 이러했다. 멋진 고백을 준비했는데(이건 죽어도 안 알려줬다) 저녁을 먹으면서 백호가 내년 2월부터 미국에 가게 됐다 말을 꺼냈단다. 경사는 경사인데, 호열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당장 미국 가는 애한테 고백해도 되나? 괜히 부담 주는 거 아냐? 만약 받아줘도 국제 연애 돼버리는데 괜찮나? 미국에서 더 좋은 사람 만날 수도 있잖아. 이런저런 생각들. 호열은 생각이 많은 게 문제다. 나도 남 일이라 이렇게 말하는 거지만.

“그런 걱정을 왜 하냐니까? 사장님 500 하나 더!”

“할 수 있지. 500 두 개요.”

백호와 호열은 서로의 답답함을 맥주로 풀고 있었다. 추가 주문한 500 두 잔이 도착했다.

“그래도 30살은 최악이야.”

백호가 원샷하고

“미안하다니까.”

호열도 원샷했다.

호열의 잔이 빈 걸 보고 이상한 승부욕이 생긴 백호가 500을 또 추가했고 호열도 질세라 두 잔을 불렀다. 그리고 그걸 둘 다 원샷하고 다시 추가한다. 얘네 지금 미쳤나? 둘 다 얼굴이 빨간 게 터지기 직전이다.

“너 고백 다시 해. 이거 무효야.”

입에 거품을 잔뜩 묻힌 백호가 말했다.

“뭐?”

호열은 아예 흰 수염이 생겼다.

“고백 중에 제일 저질이라고.”

“다시 말해봐.”

“저질이라고.”

“그 전에.”

“무효! 네 고백 무효.”

호열이 빈 잔을 쾅 내려놓았다. 호프집 사람들이 모두 우리 테이블을 봤다.

“씨발 사귀기로 했으면 사귀는 거지 무효가 어디 있어!”

“여기 있다!”

뭐야, 그냥 사랑싸움이잖아. 다행히도 사람들의 관심은 확 식었다. 나는 혼란함 속에서 먹태를 주문했다. 여기 호프집 마요네즈 소스가 기가 막히다. 청양고추를 쫑쫑 썰어놓아서 개운함이 있다.

“안 돼!”

“돼!”

꽐라들은 무효냐 아니냐로 언성을 높였다. 결국 사귈 거면서 지랄도 저런 지랄이 없다.

“야, 나가서 싸워. 나가서 ”

이 녀석들이랑은 고상하게 술 마시기 참 어렵다.

“용파리 너 말 잘했다. 야! 나와.”

“누가 겁먹을 줄 알고.”

두 사람은 외투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마침 들어오던 대남과 부딪혔다. 백호도 호열도 대남을 보지 못했다.

“쟤네 뭐냐?” 대남이 자리에 오며 물었다. 마침 먹태도 나왔다.

“사귄대.”

“아하.”

대남은 메뉴판을 보고 맥주와 프라이드치킨을 주문했다. 그래, 여긴 프라이드도 맛있다. 좋은 닭을 쓰는지 누린내가 하나도 없다.

“왜 나간 건데?”

“싸웠거든.”

“뭐로?”

“진짜 알고 싶냐?”

“아니.”

먹태를 질겅질겅 씹던 대남이 지갑을 꺼냈다. 카드보다 현금결제가 더 간지 난다는 지론이 있는 녀석이라 지갑이 아주 두툼했다.

“싸우다가 둘 중 한 명이 키갈 하고 늦게 온다에 오만원 건다.”

나도 지갑을 꺼냈다. 문득 현금이 5만원도 없다걸 깨달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키갈 받고 백호네 집에 가서 안 온다에 오만원.”

“벌써?”

“쫄?”

“걸어.”

두 사람이 나간지 10분이 지났다. 프라이드치킨이 나왔다. 둘은 계속 싸우고 있을 터였다. 키갈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20분이 지났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첫키스는 뒷골목에서 하려나? 대남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30분이 지났다. 구식에게서 전화가 왔다. 스피커폰으로 받았다. 매장 노래가 시끄러워서 다른 테이블에는 들리지 않았다.

<야, 강백호랑 양호열 집에 간다는데 그냥 놔둬?>

구식이 호프집에 오는 길에 두 사람을 만난 모양이었다. 집이라는 말에 나는 반색하고 대남은 이마를 짚었다.

“어어, 냅둬.”

“야, 대신 콘돔은 꼭 사라고 전해줘.”

내 요청에 구식이 외쳤다.

<야! 너네 콘돔 꼭 사라!>

나와 대남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백호 목소리가 들렸는데 뭐라고 하는지는 안 들렸다.

“어때?”

<급하게 편의점 들어가는데? 쟤네 입술은 왜 저렇게 부었냐?>

나는 대남의 지갑에서 오만 원을 꺼냈다. 거금을 날렸어도 대남은 아까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곧 도착한다는 구식을 위해 골뱅이 소면 무침을 미리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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