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애 사춘기(1)

둘의 만남을 상상하는건 언제나 재밌기에... 첫 인상이 안 좋았어도 좋겠다로 시작한 의식의 흐름.

○◎● by 신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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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이름

우리 가족은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신 할머니와 엄마, 나, 그리고 삼촌뿐이다. 삼촌은 내가 아는 유일한 남자 어른이었다. 나는 삼촌을 무척 따랐다.

왁스를 바른 앞머리, 세련된 옷차림, 여유로운 미소가 걸린 얼굴. 삼촌을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특징은 원래도 동안인 삼촌을 더욱 어려 보이게 했다. 같이 밖에 나가면 우리를 형제라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장난기가 많았는데 특히 말장난으로 사람 속을 긁기를 잘했다. 삼촌의 주요 타깃은 나였다. 내가 반박도 못하고 분해서 울면 ‘울보가 또 운다’ 또 속을 긁었다.

나는 삼촌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똑같은 방법으로 괴롭혀줄 거야.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삼촌만큼 말을 잘하려면 어휘를 많이 알아야 했다. 처음에는 나이에 맞는 어린이용 책을 읽었다. 하지만 거기엔 삼촌이 쓰는 말은 없었다. 나는 방법을 바꿨다. 집에 몇 없는 어른용 책을 읽었다. 어른용 책에는 외국어와 한자가 많아 어려웠지만 ‘삼촌을 놀리겠다’라는 일념으로 사전까지 펼쳐가며 전부 완독했다.

의도는 불순하지만, 독서를 많이 한 덕분에 말이 빨리 늘었고, 아는 게 많아질수록 정신도 단단해져 억울해 우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반대로 내 쪽에서 장난을 거는 일이 잦아졌다. 삼촌은 당하지만은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궁합 좋은 만담 콤비처럼, 네트를 빠르게 오가는 탁구 랠리처럼, 낚싯줄을 사이에 두고 어부와 물고기가 힘겨루기하는 것처럼 팽팽하고 빈틈이 없었다.

삼촌은 취직 대신 여러 곳을 전전하며 아르바이트했고 번 돈은 전부 여행 자금으로 썼다. 이왕 섬에서 태어난 인생, 섬 전체를 여행할 거라고 했다.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바이크 하나로 전국을 유랑하는 남자. 짐은 1인용 텐트와 침낭, 지도, 작은 랜턴, 표지가 해진 낡은 책, 반년 정도 일해 모은 아르바이트비가 전부.

수많은 곳에 남겨진 삼촌의 바퀴 자국을 상상한다. 자국을 길게 이으면 지구 한 바퀴는 너끈히 돌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최초로 달에 착륙한 사람은 별것도 아니었다. 달 표면에 발자국 하나 찍은 것 보다 지구 전체 둘레에 바퀴 자국을 남긴 게 더 멋있으니까.

다른 아이들이 장래 희망으로 우주비행사를 쓸 때 나는 다른 걸 썼다.

지구에 바퀴 자국을 남기고 싶어.

선생님은 그건 직업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경찰관’ 같은 적당한 단어로 거짓말을 했다. 직업이 아닌 다른 하고 싶은 일은 왜 장래 희망이 될 수 없는지 의아해하면서.

술과 사람을 좋아해 자주 집에서 술판을 벌였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정말이지 다양했다. 삼촌의 또래부터 노인, 여자, 외국인 등등. 그렇게 다양한데 모두 ‘친구’라고 했다. 말도 잘 안 통하면서,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데, 여자 친구인데 친구라고 뻥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면, 삼촌은 이야기 잘 통하고 술 잘 마시면 남녀노소 나이불문 다 친구라고 호탕하게 웃었다.

난 술판을 좋아했다. 음료수와 과자를 얻어먹으며 어른들의 뒷얘기를 들었고 야쿠자나 마피아가 나오는 연령 제한 비디오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좋았던 건 용돈이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쉽게 지갑을 열었고 백엔, 많게는 오백 엔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아주 가끔은 천 엔도 있었다. ‘사고 싶은 건 용돈을 모아 스스로 해결하자’는 엄마의 지침 아래 심부름으로 일엔, 십 엔으로 겨우 배를 불리던 저금통은 삼촌의 친구들 덕분에 금세 두둑해졌다. 이 속도라면 중학생이 되자마자 오토바이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삼촌이 자주 친구들을 데려오길 바랐고, 그 바람이 전달됐는지 우리 집 술판은 늘 성행했다.

그 밖에도 삼촌은 나에게 여러 가르침을 주었다. 상대방의 기선제압 하는 법이나 주먹을 쓰는 법-집안 대대로 체격이 작으니 싸움을 잘해야 한다나-, 오토바이 조작법을 알려주었고 쉽게 호감을 얻는 화법과 어수룩하게 사기당하지 않는 법도 알려주었다.

삼촌이 가장 중요하게 가르친 것은 따로 있었다. ‘인간관계에서 절대로 빚을 지지 않는다.’

빚을 지지 않으려면 ‘기브앤테이크’를 잘해야 한다고 했다. ‘기브앤테이크’는 남에게서 1을 받으면 1을 주고, 10을 받으면 10을 주는 것이라 설명했다. 받은 만큼 줘서 결괏값이 제로가 되면 언제든 헤어져도 뒤끝이 없다고 덧붙였다.

“너무 쉬워.”

“그치? 근데 못하는 사람이 있어.”

셈을 못 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주지 않거나 받은 것보다 더 많이 준다. 전자는 미움을 사고 후자는 손해를 보지만, 둘 다 멍청해서 그런 줄도 모른다고 했다.

“넌 똑똑하니까 할 수 있지.”

“응. 할 수 있어.”

난 정말 자신 있었다. 내가 똑똑한지는 모르겠지만 삼촌이 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요헤이, 그리고 ‘기브앤테이크’가 가능한 사람만을 곁에 둬라. 그렇지 않으면 평생 손해만 보는 사람이 될 거야.”

이 말은 삼촌의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삼촌은 어느날 오토바이와 함께 사라졌다.

엄마는 삼촌이 직장을 다니게 되어 따로 집을 구했다고 했다. 나는 삼촌이 사는 집이 어디인지, 언제까지 거기서 일하는지, 우리 집에 놀러 올 건지 물었지만 엄마는 당분간 만나기 힘들다 할 뿐 더 상세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삼촌은 새 직장이 바쁜지 전화도 편지도 없었다.

삼촌이 떠나고 독서는 그만두었다. 대신 그만큼 침묵했다. 침묵하며 타인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거짓말인지. 거짓말을 할 때 버릇이 어떤지. 진짜 경험인지 주워들은 풍문인지. 듣는 쪽인지 말을 자르는 쪽인지. 내뱉은 말을 지키는 횟수가 몇이나 되는지. 허풍과 뒷담, 감사와 사과 어느 쪽을 자주 하는지. 그건 ‘기브앤테이크’가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석할 수 있는 토대였다.

데이터가 쌓일수록 판단이 빨라졌다. 물건을 빌려주기 전에 돌려주는 아이인지 아닌지 예측할 수 있었고, 무리 안의 미묘한 기 싸움과 서열을, 나에 대한 호감과 질투를, 선생님의 무지를, 어른의 빈 말을, 모두의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었다. 뒷자리에 앉아 교실 전경을 훑어보면 그 흐름이 전부 눈에 들어와 재미있었다.

나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삼촌의 말대로 ‘기브앤테이크’가 가능한 사람만 남겨두었다. 그렇다고 아닌 사람에게 너무 척지는 건 좋지 않으니 최대한 천천히 멀어졌다. 친절하게, 삼촌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나는 빚을 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친구가 먹을 걸 주면 나도 주고 내 일을 도와주면 나도 도와주었다. 물론 ‘기브앤테이크’가 익숙하지 않아 제때 보답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했는데, 답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서 찾았다. 아르바이트 구인 광고였다.

집에 손님이 뚝 끊기니 저금통에는 다시 녹슨 구리색의 동전만 쌓였다. 이래서는 절대로 오토바이를 살 수 없었다. 중학생이 되면 바로 아르바이트하기로 결심하고, 미리 게시판이나 잡지에 실린 구인 광고를 유심히 보곤 했다. 이삿짐 옮기는데 시급 사백엔, 설거지 삼백엔, 음식 배달 삼백오십엔. 수많은 일거리와 제각각의 시급을 보고 있자니 이거야말로 정확한 ‘기브앤테이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제때 보답하지 못한 일들을 최저 시급을 고려하여 계산했다. 그리고 그 값만큼의 간식으로 주었다. 대부분 라무네 맛이 나는 코코아시가렛 한두 개 정도면 해결됐다.

계산은 갈수록 능숙해졌고 나중에는 반대로 구인 직무만 봐도 시급이 어느 정도인지 예측할 수 있었다.

소학교를 졸업할 땐 나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반 전체가 돌려가며 쓴 롤링 페이퍼에는 ‘친절하고 상냥하다’와 ‘어쩐지 무섭고 친해지기 어렵다’가 혼재했다. 선생님에겐 ‘똑 부러지고 어른스러운 아이’거나 ‘선이 분명하고 반항적인 면모가 있는 학생’이었다. 어떤 평가건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나는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친 적이 없으며 나 또한 받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완벽한 제로의 관계. 나는 삼촌의 가르침을 지켜 기뻤다.

졸업과 동시에 우리 가족은 급하게 가마쿠라로 이사했다. 엄마가 일하는 술집이 요코하마로 확장 이전한 탓이었다. 당연하지만 요코하마에 집을 얻는 건 불가능했다. 새집을 구하면서 엄마는 출퇴근 거리보다 집세를 따졌고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지도를 훑으며 내려가다 멈춘 곳이 가마쿠라였다. 구불구불한 지형과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전차 노선보다 하늘색으로 넓게 펼쳐진 바다가 먼저 존재를 뽐내는 동네였다.

“앞으로 바다 실컷 보겠다. 좋지?”

엄마가 트럭 문을 열며 물었다. 나는 운전석과 보조석 사이, 어떻게 엉덩이를 붙여도 불편한 자리에 몸을 구기고 앉았다.

“아니, 구려.”

“본 적도 없으면서.”

운전기사가 놓고 온 물건은 없는지 물었고 엄마가 없다고 대답하자 출발했다. 요란한 엔진 소리가 났다.

“꼭 이사 가야 해돼? 여기서 요코하마까지 멀어?”

이사가 정해진 날부터 나는 계속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리고 계속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

“응. 멀어.”

엄마도 분명 지겨울 만한데 얼굴에는 딱히 티가 안 났다. 포커페이스라면 정말 수준급이었다.

“그러면 가게를 옮기면 되잖아.”

“그만큼 좋은 사장 찾기 힘들어.”

좋은 사장. 삼촌도 그렇게 말했다.

네 엄마 일하는 거 보면 참 놀라워. 임신했거나 혼자 애 키우는 여자는 어디를 가도 잘 안 받아 주거든. 왜냐고? 현실이 그래. 그 가게가 마지막이어서 누나는 무릎 꿇고 매달릴 각오 했는데, 사장이 받아준 거야. 참 훌륭한 양반이야. 산부인과 알아봐 줘 출산휴가 줘. 거기에 팁도 안 뺏어가고 병신같은 놈들 전부 쫓아내 주고. 넌 기억 안 나겠지만 사장이나 가게 직원이 가끔 돌봐주기도 했어. 그런 좋은 사장 밑이면 몇십 년이고 일할 수 있지.

“그리고 난 요코하마 가고 싶어. 여기보다 재밌을 거야. 너도 그럴걸?”

새로운 보금자리에 들뜬 엄마는 가방에서 얇고 긴 담배를 꺼내 끝에 불을 붙였다. 차내에 담배 냄새가 확 퍼졌다. 라무네의 달달함이 아닌 후각세포를 억지로 찔러 깨우는 독한 향이었다. 집중하면 은은한 초콜렛 향이 난다는데, 아무래도 뻥인 듯 했다.

“재미없으면 어쩌려고.”

운전기사가 조그맣게 허허, 웃었다. 어린아이 투정이라 생각했나 보다. 안타깝지만 이건 저주에 가까웠다.

“이사 가는 게 그렇게 싫어? 헤어지기 싫은 친구라도 있었어?”

“아니, 없어.”

“그럼?”

나는 입을 꾹 닫고 운전석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의 풍경이 비디오가 되감기 되듯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나는 사라지는 풍경 속에 삼촌과 술판, 숨겨왔던 장래 희망을 떠나보냈다.

대신 뻥 뚫린 마음의 구멍을 다른 것들이 채웠다. 섭섭함과 외로움, 그리고 새로운 곳에는 재미있는 건 절대 없을 거라는 치기 어린 자신감.

키는 금방 자라니 크게 입는 게 이득이라며 산 중고 교복은 바지 밑단이 질질 끌렸다. 소매도 손등을 다 덮어서 제 돈 주고 산 새 옷이 아니라 물려받은 남의 옷이란 게 티가 났다. 입은 게 아니라 걸쳤다는 것에 가까웠고 거의 흘러내리고 있어서 꼴불견이었다. 엄마는 유심히 보더니 상의는 줄이는 게 낫겠다, 옆집에서 미싱을 빌려 소매와 기장을 수선했다. 그게 교복 개조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엄마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포댓자루 교복보다야 수선한 게 훨씬 보기에도 좋고 입기도 편했다. 키도 더 커 보였다.

나는 거기에 왁스로 머리를 올렸다. 삼촌이 머리 손질하는 걸 옆에서 지켜본 보람이 있어 꽤 그럴듯하게 만질 수 있었다. 기름칠 된 부분이 백열등에 반사돼 하얗게 빛났다. 단단히 고정된 앞머리는 아무리 얼굴을 털어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좌로 봐도 우로 봐도 멋있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려보았다. 왁스를 바른 앞머리. 여유로운 미소. 내가 선망하는 모습이 거울 속에 있었다.

엄마는 입학 선물로 새 가방을 주었다. 검은색 인조 가죽이 반짝반짝했다.

“이걸로 끝이야.”

자기가 챙겨주는 건 여기까지이니 다음부터는 스스로 준비하고 책임지라는 뜻이었다.

“알았어.”

“좋아.”

석유 냄새가 나는 새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와코중학교로 향했다. 가는 길목이 벚나무로 가득했다. 세찬 봄바람이 만개한 벚꽃을 부추겼고 귀가 얇은 벚꽃은 가지에서 떨어져나와 둥실둥실 떠다녔다. 덕분에 꽃잎이 머리며 어깨에 잔뜩 붙었다. 귀찮은 손길로 하나하나 전부 털어냈다.

배정받은 반에 들어가자 어색한 기류 없이 시끌벅적했다. 인근 초등학교 출신이 많았고 그들끼리 벌써 뭉쳐 있었다. 나처럼 다른 학교에서 온 소수의 아이만이 그 광경을 뻘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반가움과 긴장으로 난장이 된 교실을, 나는 으레 그렇듯 뒤에서 지켜보았다. 턱을 손에 괴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 가며 가늠했다. 잘 보이려고 포장해도 알맹이는 속일 수 없다. 피할 놈은 누구고 곁에 둘 놈은 누구일까.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을 데이터에 대입하여 가늠할 때, 뒷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놀랄 틈도 없는 갑작스러운 침입이었다. 시끄럽게 등장한 녀석은 큰 키를 자랑하듯 모든 것을 시선 아래로 깔고 콧방귀를 꼈다. 그리고 빈자리를 찾아 걸어갔다. 발걸음도 요란해서 낡은 교실 바닥이 삐걱거렸다. 녀석은 모두가 기피하는 교탁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주제 없이 중구난방 튀던 말들이 순식간에 한 점으로 모였다. 붉은 머리다, 빨간색이야, 빨간 머리 처음 봐, 붉게 염색했나, 빨간색, 붉은색, 빨갛다, 붉다….

바로 뒤에 앉은 아이가 시야가 막히자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곤란해했다. 나도 그랬다. 녀석의 등장으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사방으로 뻗친 붉은 머리카락만이 내 머릿속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뜨거운 걸 알면서도 가까이 가게 되는 불처럼 녀석의 뒤통수에 온 집중력이 빨려 들어갔다. 나는 어느샌가 손을 풀고 팔짱을 낀 채 자라처럼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뒷자리 아이가 가냘픈 손짓으로 녀석의 등을 툭툭 쳤다. 정면을 향한 얼굴이, 찰나이면서 천천히, 시계 향으로 돌았다. 쌍꺼풀 없는 사납고 큰 눈이 보였다. 콧잔등이 1초도 가만히 있지 않고 씰룩였다. 잔뜩 골이 난 듯 튀어나온 아랫입술이 무슨 말을 하더니 실없이 헤실헤실 웃었다.

와.

진짜 바보 같은 얼굴.

녀석은 뒷자리 아이를 위해 등을 굽혀 키를 낮췄다. 최선을 다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행동인지도 모르고.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데이터에 대입하기도 전에 직감이 앞섰다. 저 녀석은 피하자.

직감은 결론을 낸 다음 이유를 찾았다. 겉모습부터 화려한게, 그만큼 사건사고에 휘말리고 쉬워. 또 저런 녀석은 이기적이야. 자기만 알아.

삼촌은 경험에 바탕을 둔 선택도 중요하지만, 위급할 땐 직감을 우선시하라고 했다. 빨간색은 위험 혹은 멈춤, 위급상황 경고등 색.

맞아. 나는 동의하며 책상에 납작 엎드리고 눈을 감았다. 최대한 엮이지 않기 위해 나를 숨겼다. 어둠 속에서 붉은 잔상이 춤을 췄다.

제비뽑기로 뽑은 자리는 창가 바로 옆 1열, 뒤에서 두 번째였다. 운동장이 보이는 창가 자리는 선택받은 학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나는 특권에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맨 뒷줄은 키가 유난히 큰 아이들을 위한 지정석이었고, 1열 맨 끝자리, 그러니까 내 바로 뒷자리는 바로 그 빨간 머리였다.

앞뒤로 앉았다고 꼭 엮인다는 보장은 없지만 확률은 높았다. 선생님들은 조 단위로 하는 수업 활동이 있으면 편하게 ‘뒤에 있는 짝꿍이랑 해라’ 지시했다. 체육이나 가사처럼 장소를 옮기는 수업이 아니라면 반드시 그랬다. 그게 아니더라도 통신문이나 유인물을 나눠주며 손가락이라도 스칠 수 있었다. 그 작은 접촉조차 난감할 만큼 난 녀석과 거리를 두고 싶었다. 하지만 반대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게 됐으니 계획이 크게 어긋났다.

덕분에 나는 등 뒤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몸만 꼿꼿이 칠판은 향했지 정신은 반대쪽에 팔려있었다. 녀석은 언제라도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이렇게 됐으니 친하게 지내자, 너스레를 떨 것 같았다. 포식자에게 등 뒤를 노려진 야생동물처럼 의자 끄는 소리에도 어깨가 움찔했다.

혹시라도 상상한 상황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까. 나는 그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변명을 만들어 놓기로 했다. 친하게 지내자고 하면 그냥 못 들은 척 무시하자. 안 먹히면 나랑 같이 있는 걸 재미없게 만들어야지. 아니면 툭 까놓고 너 같은 애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할까. 그랬다간 더 귀찮아지려나. 다른 애랑 먼저 친한 척하는 게 나으려나.

공부에는 영 관심이 없어 나는 수업 시간 내내 수십 가지 상황에 맞는 수십 가지 변명을 떠올렸다. 마찬가지로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 녀석이 손톱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크게 하품하고 결국엔 코 골며 자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대비가 허무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래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녀석을 경계했다. 그동안 수집한 정보가 몇 가지 있다.

녀석의 이름사쿠라기 하나미치.. 타지역 초등학교 졸업생. 특이한 머리카락 색 덕분에 벌써 교내 유명인사였다. 사실 모를 수가 없었다. 아침마다 그 난리를 치는데.

“태어날 때부터 이 머리라고 몇 번을 말해!”

머리가 희게 세고 눈이 푹 꺼진 풍기 위원 고문 선생님은 와코 중학교의 명물이었다.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팔로 얇은 대나무 살을 휘두르고 다녔고, 행실이 불량한 학생 선도에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정년이 멀지 않은 고문에게 빨간 머리는 게임으로 따지면 마지막 보스요, 평생을 걸쳐서라도 갱생시켜야 할 학생으로 보였을 것이다.

녀석은 매일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당겨 뿌리를 훤히 보여주며 천연 모임을 인증했지만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고문에게는 천연보다는 빨간색인 게 중요했다. 검은색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검은색으로 염색하라고 몇 번을 말했어.”

“염색하면 안된다면서 왜 나보고는 염색하래!”

그럼 고문은 감히 선생님에게 할 태도가 아니라며 염색 명령에 1학년 교실 복도 청소를 추가했다. 녀석은 당연히 불복종, 가볍게 시작한 실랑이는 점점 커져 체육 선생님이 뛰쳐나와 흥분한 녀석을 붙잡아야 마무리가 됐다.

학생들은 처음에나 놀랐을 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되는 싸움에 익숙해졌다. 아침 안부나 가벼운 잡담에 딱 좋은 소재로 전락하였다. 나는 일부러 소란이 커지길 기다렸다가 교문을 통과했다. 이러면 왁스 바른 머리를 지적받지 않고 등교할 수 있었다. 이것도 ‘받은’게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난 상황을 이용하는 것 뿐이다.

옆을 지나치며 생각했다. 저 억센 빨간색은 어떤 염색약을 들고 와도 덮어지지 않을 거라고. 오히려 얼룩덜룩 보기 싫어질 게 뻔했다. 그럴 바에는 저 빨간색을 그냥 놔두는 게 좋지 않을까? 물론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녀석은 호의에 약했다. 친절히 대해주면 쓸개라도 꺼내줄 듯 속을 활짝 내비쳤다. 녀석이 받은 게 친절이 맞느냐 물으면 애매했다. 체육 축구 시간에 팀원으로 뽑아주거나(체격이 좋으니까) 이동 수업 시간이라 알려주거나(당번이니까) 숙제를 제출했는지 물어보는 게(반장이니까) 특별한 친절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녀석은 세상 바보 같은 얼굴이 되어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기꺼이 골키퍼가 되어 모든 공을 다 막았고 너 아니면 큰일 날 뻔했다 온갖 호들갑을 떨었다. 의도치 않게 친절을 베푼 상대방이 당황할 정도였다.

여자에게는 특히 더 약했다. 자리를 스쳐 지나가기라도 하면 숨을 참았다. 부끄러운 건지 긴장한 건지, 숨 참는 소리가 너무 커서 나는 물론 인근 아이들도 다 들을 정도였다. 마주보기라도 했다간 더 큰 일이 났다. 눈 마주치는 건 고사하고 제대로 듣지도 못했고 손바닥 땀을 몇 번이나 바지춤에 닦곤 했다.

좋게 말하면 순진한거고 나쁘게 말하면말하면 호구 잡히기 딱 좋은 성격. 그래서인지 녀석을 부르는 곳은 많았지만, 반에서 친구라 부를만한 아이는 없는, 애매한 포지션이었다.

부끄러움이 많은 데 비해 너무나도 큰 성량, 양말은 하나도 없는지 여태 신은 걸 본 적이 없고 수업 시간에는 ‘모르겠는데요’가 기본인 말투가 불량한 녀석.

데이터는 순조롭게 쌓여 일단 부정으로 시작했던 평가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로 바뀌었지만, 그뿐이었다. 곁에 둘 만한 사람인지 아직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 녀석이 처음이었고 그것엔 이유가 있었다. 계속해서 직감이 경고했다. 가까워졌다간 큰일 날 것 같다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일이 터졌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바지런히 돌아다녔다. 연령 무관 구인 광고 중 괜찮은 시급을 골라 연락을 돌렸다. 나이를 밝히면 면접까지 가는 경우는 50퍼센트, 면접을 보러 가면 생각보다 더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전부 퇴짜를 맞았다. 대신 가끔 당장 일손이 급해 하루만이라도 괜찮으면 와도 된다는 제안을 받았고, 무조건 받아들였다. 주로 이삿짐센터나 단체주문을 받은 도시락집이었다.

그날도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퇴짜를 맞은 길이었다. 혹시 광고 없이 가게에서 직접 구인하는 건 없을까 싶어 상점가를 훑으며 다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낡은 맨션이 밀집한 뒷골목까지 와있었다. 그런 곳은 대개 폭주족의 아지트였고 재수 없게도 그린 듯한 4명의 폭주족과 마주치게 되었다.

“야. 너 어디 구역이냐?”

선생님에게 몇 차례 경고를 받았지만 난 계속해서 왁스로 머리를 만지고 줄인 교복을 입었다. 얄팍한 가방에는 빗과 지갑, 손수건뿐. 누가 봐도 완벽한 불량 학생, 거기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네에서 생소한 얼굴. 이 구역을 점령한 그들에게 나는 다른 구역에서 정찰 나온 말단 같아 보였을 것이다.

“누구 밑에 있냐고 묻잖아.”

3명은 무기가 있었다. 야구 배트, 쇠 파이프, 단검. 1명은 다리를 넓게 벌리고 쪼그려 앉아 가래를 퉤 뱉었다. 저놈이 리더겠지.

싸우는 법을 배우긴 했지만, 무기를 든 상대와 4대 1로 싸우는 건 승산이 없었다. 나는 손바닥을 쫙 펼쳐 보였다.

“그냥 지나가는 길인데요. 누구 부하도 아니고.”

“우리가 그 말을 믿을 만큼 만만해 보이냐? 아앙?”

단검을 든 사람이 귓가에 소리를 질렀다. 그래, 단검인 거부터 알아봤다. 성격 급하고 나대기 좋아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잔재주만 있지 싸움은 못 한다. 뒤가 뚫렸으니 단검의 명치에 훅을 먹이고 주춤한 틈을 타 도망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리라.

“뭐, 진짜 아니더라도 돈 되는 건 내놓고 가라.”

“그래. 너한테 아까운 시간 낭비했잖냐. 시간은 금이라는데.”

야구 배트와 쇠 파이프도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중 반소매를 입은 야구 배트는 어깨의 근육이 상당했다. 야구는 아니더라도 운동을 한 사람. 맞붙으면 큰일이었다. 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자 쇠 파이프가 퇴로를 막았다. 사면초가였다.

돈 되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갑에 있는 푼돈으로 이들이 만족할 것 같진 않았다. 역시 싸워야 하나? 4명에게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나?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쇠파이프에게 선공하면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저건 또 뭐야?”

리더가 말했다. 그가 바라본 곳엔 빨간 머리가 서 있었다.

빨간 머리?

“으억!”

인식과 동시에 쇠 파이프가 녀석의 박치기에 나가떨어졌다. 녀석은 쇠 파이프의 멱살을 감아쥐고 얼굴에 주먹을 여러 번 날린 뒤 단검 쪽으로 집어 던졌다. 두 사람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단검은 기절한 쇠 파이프를 밀어내려 했으나 체중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야구 배트가 녀석을 향해 배트를 휘둘렀다. 가방으로 간신히 막아냈지만, 무게가 실린 충격은 그대로 전달되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야구 배트는 녀석의 머리를 가격하기 위해 폼을 잡았다. 위험하다. 나는 파이프를 주워 들고 야구 배트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억 소리와 함께 놈이 벽에 기대어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려 하기에 목과 어깨 사이를 내리쳤다. 순식간에 세 명이 녹다운되었다.

“너네 지금 뭐하냐?”

리더가 소매를 걷고 나섰다. 덩치가 큰 놈이었다. 하지만 녀석도 놈과 비슷했다. 그때야 나는 새삼스레 빨간 머리 녀석이 크구나, 느꼈다.

선공을 날린 건 리더였다. 굳은살이 잡힌 주먹이 묵직하게 녀석의 볼과 광대에 떨어졌다. 입 안쪽이 터졌는지 핏방울이 픽 솟았다. 리더는 괴성과 같은 환호를 지르며 계속 주먹을 날렸다. 저러다 죽는 거 아냐? 난 다시 파이프를 잡았다. 틈을 노려 공격하려고 하는 순간, 녀석이 리더의 주먹을 한 손으로 꽉 잡았다. 리더가 당황하여 다른 손을 날리자 그 손도 붙잡았다. 녀석은 리더의 양손을 꽉 잡고 손목을 비틀었다.

“애새끼가!”

“흥.”

녀석은 입을 삐쭉이더니 그대로 쭉쭉 리더를 밀었다. 막상막하일 것 같던 힘겨루기는 예상보다 빠르게 승패가 갈렸다. 녀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욕만 내뱉는 리더를 묵묵히 밀다 어느 순간 손을 풀고 주먹을 쥔 뒤 아래에서 위로, 턱을 올려 쳤다. 앞니 하나가 공중에 붕 뜨는 게 보였다. 싸움은 끝났다. 압승이었다.

“너…”

“괜찮냐?”

삐익!

승리에 도취하기도 전에 가까운 곳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났다. 주민이 싸움을 신고한 모양이었다.

“거기 학생 두 명!”

“후눗!”

녀석이 이상한 울음소리를 냈다.

“야, 이쪽! 달려!”

나는 우물쭈물하는 녀석과 함께 샛길로 달렸다.

남의 화분을 떨어뜨리고 어린아이 키만 한 휴지통을 뛰어넘고 낮잠 자던 길고양이를 놀라게 하며 꼬불꼬불한 길을 끊임없이 달렸다.

무사히 순경을 따돌리는 데 성공한 나와 녀석은 녹초가 되어 쓰러졌다. 공사에 쓸 모래를 쌓아놓은 곳이었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목구멍으로 침을 삼킬 때마다 넘어오는 피와 모래의 맛이 기분 나빴다. 가쁜 숨을 애써 진정시킨 뒤 녀석에게 물었다.

“왜 도와줬어?”

도와준 사람에게 예의는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불필요한 도움이었다. 일부러 피하고 있는 상대라면 더욱.

녀석은 몸을 일으키고 머리에 붙은 모래를 털어냈다. 숱 많은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더 부풀었다.

“그야…”

빨리 대답해. 왜 날 도와준 거야. 모래가 섞인 침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한자 읽는 법 알려줬잖아.”

까마귀 한 마리가 비웃으며 전봇대 위로 날아올랐다. 내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걸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국어 선생님은 졸음을 방지하고 수업 참여율을 높이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교과서 읽기를 시켰다. 8일이니까 18번부터 24번까지 읽어. 선생님 돈 필요하니까 성에 金이 들어간 애들이 읽자. 앞뒤가 맞지 않아 아이들은 국어 선생님을 남몰래 싸이코라고 불렀다.

이번에는 내가 속한 1열 전체를 지목하며 교과서를 읽으라고 했다. 자기 아들이 아빠가 1번으로 좋다고 했다나 뭐라나. 앞자리부터 차례대로, 장편소설의 지루하고 긴 묘사를 한 문단씩 읽어나갔다.

서정적인 글인 데다 체육 다음이어서 졸음은 막을 수 없었다. 나는 하품을 겨우 참아 내며 읽었고 녀석의 순서가 되었다. 등 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사쿠라기, 네 차례다.’

싸이코의 재촉에도 녀석은 말이 없었다.

‘사쿠라기.’

‘….’

두 번째 재촉도 먹히지 않자 하나둘 수군거렸다.

‘개기나 봐.’

‘싸이코가 쟤 별로 안 좋아하잖아.’

‘쟤 좋아하는 선생이 있긴 하냐?’

교실이 술렁이자 싸이코는 지시봉으로 교탁 측면을 두드렸다. 탕탕탕!

‘조용히 해! 사쿠라기, 빨리 읽어.’

녀석이 한 번 더 거부하면 체벌을 가할듯한 기세였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나로 인해 교실의 모든 눈이 녀석을 바라보았다.

두툼한 입술이 본드를 붙여놓은 듯 꽉 맞물려 있었다. 옅은 갈색의 홍채는 필기 하나 없는 깨끗한 지면이 뚫어져라 째려봤다. 녀석의 동그란 이마를 따라 땀 한 방울이 또르르 굴렀다.

반항치고는 소심하지 않나? 오히려 곤란해하는 표정. 어린아이가 과자 봉투를 열지 못해 쩔쩔매는 얼굴.

내 눈동자는 땀방울을 따라 움직였다. 이마, 미간, 콧잔등, 콧방울, 입술, 턱 끝.

톡. 마침내 교과서 위로 떨어진 순간.

왜 참견했을까. 가만히 있는 녀석이 답답했거나, 이 분위기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거나, 수업이 길어지는 게 싫었을 수도 있다. 그래, 그랬을 거다. 아니다, 사실 잘 모르겠다. 왜 참견했을까. 어쨌든 나는 녀석에게 문장의 첫 단어를 읊어주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게 입을 가리고.

‘できあい(溺愛).’

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칠판을 향해 돌아앉았다. 녀석은 더듬더듬 글을 읽어나갔다.

그게 끝이었다. 어려운 한자도 아니었다. 한자를 몰라서 굳어 있었을 줄도 몰랐고. 알았으면 참견하지 않았겠지. 충동적으로 저지른 행동에는 기브앤테이크도 논외다. 녀석이 보답할거라는 기대도 안 했다. 근데 그걸 이렇게? 이 녀석 진짜.

“멍청이냐?”

“누가 멍청이야!”

녀석은 하반신에 힘을 주더니 우뚝 섰다. 벌써 체력이 회복됐나 보다. 괴물 같은 녀석.

“궁금한 거 풀렸으면 간다.”

“순경.”

그냥 보내면 되는 걸 나는 또 말을 걸었다.

“순경이랑 마주치면 어쩌려고.”

“됐어. 집이 여기 근처니까.”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녀석은 멀어졌다. 그 장면이 마치 깨끗한 하늘색 도화지에 갓 짜낸 빨간 물감같았다. 나는 빨간색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두 색은 마침내 섞여 하늘은 서서히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녀석이 사라지고 30분 후, 몸을 추스르고 집으로 돌아갔다. 문을 여니 엄마가 신발장에 걸린 거울을 보며 화장을 점검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엄마는 나를 위아래로 훑고는 마스카라를 집어 눈썹을 빠르게 문질렀다.

“옷이 왜 그래? 싸웠어?”

“어.”

물 한 잔이 급해 부엌으로 갔다. 식탁에는 비닐봉지가 잔뜩 쌓여있었다. 풀어보니 자주 사 오는 반찬가게의 반찬이 가득했다. 연근조림, 고기감자조림, 야채절임, 계란말이, 청경채볶음, 가지볶음. 우리 집은 반찬을 한꺼번에 사놓은 뒤 냉장고에 넣고 두고두고 먹었다. 엄마는 요리를 못하고, 일어나 움직일 때쯤엔 가게 대부분이 문을 닫았기 때문에 사 놓을 수 있을 때 왕창 샀다.

윤기가 흐르는 반찬을 보니 갑자기 허기가 찾아왔다. 나는 빠르게 물을 마신 뒤 전자레인지에 냉동 밥을 돌리고 넓은 쟁반에 반찬을 조금씩 덜었다. 인스턴트 미소시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한 모금 마시니 굳은 근육이 풀리며 이곳저곳 쑤셨다.

“멀쩡한 거 보니 이겼나 봐.”

“응.” 입 안에 밥과 반찬을 집어넣으며 대충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경찰서장이 말해줬는데.”

엄마가 개인적으로 경찰서장과 만날 일은 없으니 손님으로 만났겠지. 젓가락으로 감자를 이등분했다.

“상점가 끝 쪽 맨션 촌에 폭주족 조심하라더라.”

상점가 끝 쪽 맨션 촌? 이등분한 감자를 또 이등분했다.

“파이프랑 단검 같은 무기를 들고 힘도 세서 위험하대. 걔네한테 맞아 입원한 애도 여럿 있고. 너도 알고 있으라고.”

파이프? 단검? 순간 오늘 녀석에게 깨진 4명의 폭주족을 떠올랐다. 머리가 깨지고 옆구리가 꺾이고 체중에 눌리고 앞니가 날아간 그들을.

켁. 감자가 목에 걸렸다. 내가 미친 듯이 기침하자 엄마는 물을 떠다 주었다.

“게네랑 싸웠어?”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

“혼자서 어떻게 이긴 거야? 도망쳤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같은 반 애가 지나가다 도와줬어.”

거짓말은 아니었다. 도와준 이유가 생략되기는 했지만.

“대단하네.”

그리고 엄마는 등을 팡! 내리쳤다.

“빚졌네?”

“빚?”

“걔가 목숨을 살려줬잖아. 엄청나게 큰 빚이지.”

결국 그렇게 되는 건가. 빚. 빚인 건가. 녀석에게 빚을 졌다니. 빚은 응당 갚아야 한다. 인간관계에서 빚을 남기면 안 된다. 기브앤테이크, 내가 지키려고 애쓰는 삼촌의 가르침. 그토록 조심했는데 왜 일이 꼬이는 거지.

목숨을 살려주는 건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녀석이 위험할 때 구해주면 되나? 그런 일이 생길 확률은 너무 낮고 애초에 녀석은 스스로를 구해낼 힘이 있었다. 그렇다면 목숨은 최저시급으로 계산이 가능한가? 전처럼 코코아 시가렛 한두 개로 퉁 칠 수 있나? 어림도 없는 소리. 불가능하겠지. 애초에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지부터가 문제다. 가능하다면 목숨값은 심장 무게만큼인가? 그럼 내 목숨은 얼마지? 엄마는? 삼촌은? 녀석은? 녀석은, 자기 목숨값을 걸고 날 도와준 건가? 아니. 도대체 왜? 한자가 어쨌다고? 그건 별 뜻도 없는 한자였는데!

나는 국어 시간에 저지른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했다. 알려주지 말걸. 고개를 돌리지 말걸.

“사람의 목숨은 얼마야?”

엄마는 내 질문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으으음, 목을 길게 울리다가 시침이 숫자 12를 가리키자, 외투를 걸치며 말했다.

“우리 엄마 보험금이 아마 600만엔쯤 했지.”

백만 단위는 당연히 알지만 괜히 손가락으로 0의 개수를 세었다. 쥐고 있던 젓가락까지 내려놔야 했다. 식욕이 싹 사라졌다.

600만엔. 보험사가 결정한 할머니의 목숨값이자 내가 녀석에게 진 빚, 중학생이 갚기에는 너무 큰 금액.

운 좋게 시급 500엔짜리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어도 한참을 일해야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녀석이 위험에 닥쳤을 때 도와주는 게 베스트지만, 그 정도 힘이면 혼자서 해결할 것 같았다.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이른 시일 안에 갚는 방법은 없었다.

학교 오는 게 죽을 맛이었다. 평소에도 일어나기 싫은 아침이 더더욱 지옥 같았다. 할 수 있을 만큼 이불 속에 있다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뒤 머리를 만지고 등교했다. 얼마나 넋이 빠져있었냐면 녀석과 고문의 실랑이를 기다리지 않고 교문을 통과해서 딱 걸렸다. 대나무 살로 헤집은 머리는 엉망이 됐다.

이래저래 짜증이 나 자리에 앉아 한숨을 푹 쉬는데 책상 위로 그림자가 졌다. 녀석이었다.

“여어.”

녀석은 날 아는체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어.”

“훔.”

반사적으로 명찰을 숨겼다. 명찰을 보면 멋대로 이름으로 부를까 봐. 이름으로 불릴 생각은 절대 없다. 빚만으로도 성가시다. 나는 녀석이 묻기 전에 먼저 말했다.

“미토.”

“미토.”

안심과 동시에 짜증이 났다. 바로 앞자리인데 이름을 몰라? 모르면서 도와준 거야?

“나는-”

“알아, 사쿠라기잖아.”

분명 하나미치라고 소개하겠지. 역시나 이름은 사양이다. 이번에도 선수를 쳤다.

“아?”

이크. 나는 또 실수를 한 게 아닐지 신경 쓰였다. 자기 말을 잘랐다고 화를 내면 어쩌지.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내 이름 알고 있네!”

녀석은 좋아했다. 광대가 볼록 솟았다.

녀석의 얼굴을 덕지덕지 뒤덮은 반창고들이 광대를 따라 올라가 주름이 졌다. 그 주름을 보니 심장이 따끔했다. 나 대신 맞았다는 죄책감과 빚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부담감 때문이었겠지.

사쿠라기는 쉬는 시간 내내 교무실에 불려 갔다. 얼굴의 상처가 싸움의 흔적 같다는 이유였다. 교무실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사쿠라기는 교실로 돌아올 때마다 날 보고 잇몸까지 보여가며 미소 지었다. 마치 ‘네 이름은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의리의 증표처럼 말이다. 당연히 반 아이들은 우리 둘 사이에 무언가 있었다 수군거렸다. 일부러 캐물을 만큼 용감한 아이가 없다는 게 다행일까, 그렇지만 나와 사쿠라기를 한 세트로 묶는 취급은 영 불편했다.

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 종이 울렸다. 도시락을 꺼냈다. 오늘은 흰쌀밥과 냉장고에 남은 야채 반찬, 계란말이 3개였다. 젓가락으로 밥을 한입 먹고 계란말이를 집는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반찬가게에서 계란말이 10개를 500엔 팔지.

그럼 이 1개가 50엔. 내가 계란말이 1개를 사쿠라기에게 주면 빚에서 50엔이 차감되는 거고. 그걸 6일을 반복하면 300엔. 한 달은… 암산이 어려워 공책을 펼쳐 곱셈했다. 한 달은 대충 1,200엔, 일 년에 14,400엔. 예상보다 상당한 빚이 탕감되었다. 괜찮은 계산이었다. 그냥 계란말이를 1개 덜 먹으면 된다.

나는 의자를 뒤로 돌려 앉았다. 사쿠라기의 점심은 커다란 주먹밥 2개였다.

“뭐야?”

사쿠라기는 주먹밥을 크게 베어 물었다. 절반이 사라졌고 안에는 아무 속도 없었다. 그냥 소금 주먹밥이었다.

“자.”

다짜고짜 계란말이 1개를 건네주었다.

“주는 거냐?”

“응.”

“오우. 고맙다.”

사쿠라기는 별 의심 없이 젓가락 끝에 달린 계란말이를 손으로 집어 그대로 입에 넣었다. 씹으면서 부드럽고 맛있다, 너네 엄마 요리 잘한다, 설탕 들어간 건 오랜만에 먹는다고 말이 많았다. 나는 다시 돌아앉기도 뭐해서 별 대답은 하지 않고 밥만 먹었다.

그렇지만 계란말이는 항상 있지 않았다. 엄마는 불규칙적으로 장을 봤고 계란말이를 안 사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반찬은 값을 매기기 어려웠다. 청경채나 감자, 두부 같은 건 도저히 등분할 수 없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엄마에게 ’계란말이가 먹고싶다’ 했더니 엄마는 딱 잘라 말했다.

“먹고 싶으면 직접 사 먹어.”

새삼스럽게 우리 집 규칙을 잊었냐는 얼굴로.

그래서 계란말이가 없는 날엔 우유 한 팩을 사주었다. 밥을 워낙 허겁지겁 먹는 탓에 밥 알갱이가 자주 목에 걸러서 마실 게 필요하기도 했다 했다. 사쿠라기는 입이 커서 우유를 뜯으면 한 번에 다 마셨다. 옛날 술판에서도 목구멍을 열고 술을 원샷하는 아저씨들을 종종 봤는데, 이 녀석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주 가끔 사쿠라기는 도시락이 없었다. 그럴 땐 우유 대신 매점에서 딸기잼이 얇게 발린 콧페빵을 사주었다. 야키소바 빵이나 메론빵을 사줄 수도 있었지만 50엔보다 큰돈을 쓰고 싶진 않았다. 이미 충분히 지출이 컸다.

콧페빵을 처음 사주었던 날, 사쿠라기는 거절했다.

“됐어.”

나는 의외의 거절에 깜짝 놀랐다. 뻔뻔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책상에 엎드린 녀석의 팔꿈치 틈 사이로 빵을 밀어 넣었다. 빵은 원래 형태를 잃고 휴지 뭉치처럼 뭉개졌다. 사쿠라기가 벌떡 일어났다.

“안 먹는다니까?”

“왜?”

“왜냐고? 그럼 넌 왜 이러냐?”

왜 이러냐고? 빚 갚으려고 그런다. 계란말이는 덥석덥석 잘만 받아먹더니 빵은 왜 안 먹겠다는 건데? 도시락도 없으면서. 평소에 먹는 무식하게 큰 주먹밥으로도 배가 안 차서 수업 끝날 때까지 꼬르륵 소리 내는 주제에.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아냐? 진짜 시끄럽다고. 꼬르륵, 꼬르륵. 그러니까.

“먹어, 그냥.”

내가 막무가내로 나가자 사쿠라기는 더 거절을 못했다. 봉투를 뜯고 빵을 씹는 걸 보고서야 나는 도시락을 꺼냈다. 안 먹으면 갚은 게 아니니까. 먹는 걸 봐야지 안심이 됐다.

빚을 갚기 위한 물량 공세가 계속되자 사쿠라기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나 보다. 5월 하순, 반에서 친한 친구가 정해지고 무리가 나뉘는 시기. 사쿠라기가 물었다. 손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잡으려다 말고.

“너 왜 자꾸 나한테 먹을 거 주냐?”

5월임에도 나와 사쿠라기는 여전히 친한 친구도, 어느 무리에도 끼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완전히 혼자인 건 아니었다. 점심은 이렇게 둘이 먹으니까. 그러니 사쿠라기가 하고 싶은 말은 ‘점심때만 친한 척하면서 왜 자꾸 나한테먹을 걸 주는 거냐’’ 일 거다. 사쿠라기는 말할 때 많은 내용을 누락시켰고 그건 그동안 많은 오해를 불렀다.

“너도 나한테 주잖아.”

사실이었다. 얻어먹기만 한 게 미안했던지 몇 번 작은 주먹밥을 만들어 주었다. 이러면 또 빚이 쌓이잖아, 곤란했던 차에 사쿠라기는 ‘내 거 만들다 남아서 만든 거야. 덤이지 덤!’이라고 했다. 덤이라니까 계산에 넣지 않고 그냥 받았다. 역시나 아무것도 없는 소금 주먹밥이었다.

“넌 맨날 주잖아. 너희 집 부자냐?”

“별로. 그냥 그래.”

“그럼 이제 주지 마. 부모님도 그렇고 선생님도 내가 너한테 삥 뜯는 줄 알걸?”

그건 안되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바해서 번 돈이니까 상관없어.”

“알바? 아르바이트? 너 일해?”

“응.”

“오오!”

사쿠라기의 눈동자가 호기심에 빛났다.

“그거 나도 할래!”

“하아?”

“너도 하면 나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내가 너보다 키도 더 크고 어른처럼 보이잖아.”

뭐가 어른처럼 보인다는 거야. 폭주족이나 양아치라고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이지.

“매일 하는 거 아냐. 나도 가끔 하는 거야.”

“가끔 뭘 하는데?”

“이삿짐 나르기나 도시락 포장.”

“나 그런 거 잘해.”

“해본 적 있어?”

“아니!”

이제 막 말문이 트인 애랑 얘기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돌려 거절하면 적당히 눈치를 채야 하는데,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알바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단순 호기심이라면 바로 거절할 생각이었다.

“응. 돈 필요해.”

하지만 사쿠라기의 이유는 꽤 진지했다.

“우리 아버지는 커다란 트럭 몰고 이곳저곳 물건 옮겨주는 게 일이거든. 짧으면 일주일, 길면 몇 달 집에 없어. 떠나기 전에 나한테 생활비를 주고 가는데 이번 일이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돈이 똑 떨어진 거야. 엄청 아껴 썼는데…. 아버지한테 돈 많이 남았다 거짓말해서 외상도 더 못해. 이대로면 당장 다음 주부터 먹을 것도 없어서 너한테 사달라고 할걸!”

사쿠라기는 호랑이처럼 으르렁 목을 울리며 위협했다. 별로 무섭지 않았다. 이미 얻어 먹고 있으면서.

같이 점심을 먹으며 사쿠라기는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가정사는 처음이었다. 나는 대충 사쿠라기의 집을 상상할 수 있었다. 자주 집을 비우는 아버지와 어설프게 살림을 꾸리는 사쿠라기. 주머니 사정이 여의찮으면 일단 외상. 외상은 아마 아버지가 돌아와서 갚는 거겠지. 어머니의 부재는 오래돼 보였다. 덥수룩한 머리와 뒤꿈치가 성할 날이 없는 맨발, 맨날 먹는 소금 주먹밥, 가끔 그것조차 없는 날들이 겨우 연결이 됐다. 녀석도 우리 집처럼 다사다난하구나. 비슷한 처지라는 동질감이 결국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오늘 학교 끝나고 가자.”

“응? 어딜?”

“이삿짐센터. 내일 일 있다고 그랬어.”

“진짜!” 사쿠라기가 내 손을 꽉 잡았다.

“너 좋은 녀석이구나. 왜 자꾸 먹을 거 주냐고 의심해서 미안.”

“손 안 놓으면 안간다.”

“눗! 그럼 안되지.”

사쿠라기는 잽싸게 손을 떼더니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싱글벙글 떠들었다. 트럭을 운전하며 전국을 떠돈다는 사쿠라기의 아버지는 삼촌을 생각나게 했다. 나는 몇 년간 연락도 없는 삼촌이 잠시 그리워졌다가 다시 알바 이야기를 꺼내는 사쿠라기 때문에 현실로 돌아왔다.

방과 후, 이삿짐센터 사장님 앞에 선 사쿠라기는 땀을 한 바가지 흘렸다. 그리고 자기가 나보다 힘이 세다는 둥, 집 청소는 자기가 다 하는 둥 자길 쓰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라는 둥 헛소리를 했다. 가만히 있으면 덩치가 좋으니 나와도 좋다고 할 텐데 오히려 점수를 깎아 먹고 있었다. 데려온 내가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헛소리는 장장 20분이 지나서야 끝났고 사장님은 벌벌 떠는 사쿠라기를 가만히 보더니 한마디 했다.

“얌마, 사내자식이 그만 좀 떨어라. 내일 일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이삿짐센터 로고가 박힌 파란색 모자와 조끼를 입었다. 나한테는 팔 넣는 구멍이 크고 헐렁한 조끼가 사쿠라기는 딱 맞았다. 모자를 그냥 눌러쓰려고 하기에 고개를 숙이게 한 다음 앞머리를 넘기고 모자를 씌워 주었다.

“그러면 앞이 안 보이잖아.”

“맞네. 너 똑똑하다.”

같이 일하는 인부들은 우리를 보고 세 번 놀랐다. 사쿠라기의 키를 보고 한 번, 그 옆에 선 나를 보고 한 번, 마지막으로 나이에서 한 번. 부모님이 주는 용돈이 모자랐냐는 누군가의 농담에 사쿠라기는 다음 주에 지어 먹을 쌀을 사야 한다고 말해서 분위기는 잠시 싸해졌다.

이번 이사하는 집은 단독주택에 짐이 많았다. 작업반장은 나와 사쿠라기에게 작은 가구 위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깨지기 쉽거나 고가품이 있으면 반드시 자기를 부르라고도 했다.

“어리다고 무시하는 거지!”

“어쭈? 네가 부수고 전액 보상할 수 있으면 어디 옮겨봐라.”

“으윽. 작은 거 옮기면 되잖아.”

우리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어린이용 가구가 가득한 방으로 들어갔다. 책걸상 사이즈로 미루어보아 방 주인은 소학생쯤 되어 보였다.

서랍과 옷장을 열어 남겨진 물건이 있는지 확인했다. 미처 집주인이 챙기지 못한 물건은 따로 종이상자에 넣어 밀봉했다. 그리고 빈 가구를 양쪽에서 잡고 조심히 밖으로 나갔다. 어린이용이어도 원목 가구라 꽤 무게가 나갔다. 게다가 사쿠라기가 키가 커서 내가 팔을 더 써야 겨우 균형이 맞았다. 2층 계단을 내려와 골목에 주차된 트럭까지 갔다. 겨우 서랍 하나 옮겼는데 어깨와 손목이 뻐근했다.

이송된 가구를 목록에 적으며 아주머니가 말했다.

“사쿠라기 군, 미토 군이 너무 힘들어 보여. 두 사람 키가 안 맞아서 그런가?”

“누? 그래요? 너 힘드냐?”

“버틸만해.”

“흠.”

사쿠라기는 뭘 생각하는가 싶더니 다음 장식장을 옮길 때에는 허리를 바짝 숙였다. 내가 힘을 쓰는 것 보다 본인이 키를 낮추는 게 낫다고 판단한 듯했다.

“야. 너 그러면 다쳐.”

“이 몸은 아이언바디라 괜찮다 이거야.”

“아이언 뭐?”

“아이언바디! 완전 튼튼하고 멋진 몸이란 거지!”

저런 촌스러운 말은 어디서 배운 걸까. 내가 두어 번 더 말렸지만 사쿠라기는 그 상태로 끝까지 작은 방의 모든 가구를 다 옮겼다. 나중에 허리를 펴며 작게 신음을 냈는데 바로 ‘이삿짐 옮기는 거 별것도 아니네!’ 호들갑을 떨었다. 아픈 걸 들키지 않으려고 발악했다.

작은방의 고가품은 작업반장에게 맡기고 우리는 다른 인부들의 일을 도와주었다. 일부러 작고 쉬운 일만 하는 나와는 반대로, 사쿠라기는 힘쓰고 높은 걸 꺼내야 하는 일을 찾아다녔다.

사쿠라기가 가는 곳은 금방 잡담과 웃음으로 왁자지껄해졌다.

“아저씨는 그거 못 들어. 나? 나야 아저씨보다 젊고 팔팔하니까 누워서 껌 먹기지.”

“내가 꺼낼게! 쬐끄만 아줌마는 받아주기만 해. 이런 건 키 큰 사람이 하는 거야.”

“문어, 뭐 도와줘? 왜 문어냐고? 거울 보면 알잖아.”

무례함에 발을 살짝 걸친 사쿠라기의 가벼운 말을, 사람들은 전부 좋아하며 웃었다. 그래, 젊고 팔팔한 네가 힘 써라. 역시 키 큰 사람이 있으니까 좋네. 문어는 무슨 반장님이라고 불러. 그렇게 받아주면 사쿠라기는 더욱 발발 돌아다녀서 바닥에 깔아놓은 종이상자가 벗겨질 정도였다.

학교에 있을 때와 다른 모습이었다. 학교에서는 더 경직되어 있달까, 인상을 쓰고 불편해 보였다. 반면 여기서는 잘 웃고 나이 성별 상관없이 장난치고 까불었다. 그 무시무시한 친화력에 중독되어 벌써 ‘하나미쨩’ 이라고 부르며 챙겨주는 사람도 몇 있었다.

태풍. 그야말로 태풍처럼 주위 사람을 거침없이 자기 사정권으로 빨아들였다. 저 녀석은 재해였다.

재해는 모든 걸 앗아갈 뿐, 주는 것이 없다. ‘손해’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더 큰 개념의 피해를 당한다. 모든 걸 잃고 폐허가 되지 않으려면 절대로 휘말려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글렀으니 나 혼자만이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나는 최대한 사쿠라기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언제 경로를 바꿔 올지 모르니 예의주시하며 포장 작업을 계속했다.

이사한 새 집에 가서 또 짐을 옮기고 마무리 청소를 하고 나니 하루 반나절이 꼬박 지났다. 다 같이 봉고차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작업 반장이 흰 봉투를 건네주었다. 빳빳한 천 엔 지폐가 3장 들어있었다. 돈을 보고 사쿠라기는 퍽 감동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많이 줘도 되나?”

“그런가? 그럼 한 장 빼자.”

“안돼!”

봉투를 두고 티격태격하는 게 옛날부터 친했던 사이 같았다. 분명 오늘 처음 만났는데.

“문어, 나중에 또 불러주라.”

“이 놈 끝까지 반장님이라고 안 하네. 그래, 잘했으니까 또 불러주마.”

“아싸!”

“수고하셨습니다.”

우리는 모자와 조끼를 반납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땀에 전 머리카락과 티셔츠가 볼만 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사쿠라기는 내게 고맙다고 했다. 내가 아니었음 다음 주부터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덕분에 아버지 돌아오실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나는 사쿠라기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며 빚에서 3천 엔을 차감했다.

“야.”

“고맙다는 말은 이제 됐다고.”

“아니, 그거 말고.”

“뭐.”

“배고프지 않냐.”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빛바랜 노랜이 걸린 라멘 가게가 있었다.

“먹자.”

“난 별로.”

“아! 사양 말고 빨리 와.”

그러고는 내 손목을 잡고 가게로 끌고 갔다. 사양 말라니, 이건 겸손이 아니라 진짜 먹을 생각이 없는 거라고.

사쿠라기는 문을 열자마자 곱빼기에 차슈 추가를 외쳤다. 나는 그냥 보통을 시켰다.

“꼴랑 그거?”

“너야말로 막 써도 되냐?”

“먹고 싶은 걸 어떡해.”

생활비 진짜 아껴 쓴 것 맞나? 외식으로 다 날린 거 아냐? 나는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사정을 들었을 땐 나름대로 생각이 깊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돈이 생기자마자 이런 식이라니.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물건값이 얼마든 일단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퉁칠 녀석이었다. 역시 도와주는 게 아니었나. 후회가 들었다.

라멘이 나오자 사쿠라기는 호쾌하게 나무젓가락을 뜯고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크게 했다. 어지간히도 배가 고팠는지 면은 세 젓가락 만에 끝났다. 푸짐하게 올라간 숙주며 차슈도 마술처럼 사라졌다. 건더기를 눈 깜짝할 사이에 먹은 다음은 국물이었다. 목울대가 꿀꺽, 꿀꺽, 꿀꺽, 꿀꺽, 위아래로 움직였고 내려놓은 그릇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 맛있다.”

고작 5분. 난 아직 반의반도 못 먹은 상태였다.

“뭐야. 안 먹어?”

사쿠라기는 젓가락을 뻗었다. 어떤 의도인지 확실했다. 예의상 먹어도 되냐 물어보기라도 하던가.

어차피 배도 별로 안 고팠고, 저렇게까지 탐내는 모습을 보니 먹을 의욕도 사라져서 나는 라멘 그릇을 밀었다.

“먹어라.”

“히힛, 감사.”

배고픔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됐는지 아까보다 젓가락질이 느려졌다. 그래도 남들보다 빨랐지만 적어도 먹으면서 말은 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아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넌 어른이 편하냐?”

“엥?”

“그래 보여서.”

“시골 살 때 옆집 영감님이랑 놀아서 그런가? 우리 할아버지랑 친해서 자주 봤거든.”

“시골?”

“응. 작은할아버지가 시골에 있어서 거기서 살다가, 소학교 졸업하고 아버지랑 이사 왔어.”

할머니와 삼촌만 들어 본 나에게 작은할아버지 호칭은 생소했다.

“거기는 애들이 진짜 별루 없어. 우리 학년은 2반이 전부였고 거의 다 남자였다. 여기 와서 깜짝 놀랐잖아. 반도 많고 여자애들도 많아서. 여자애들은 왜 그렇게 쪼그맣고 좋은 냄새가 나는 거냐….”

뺨이 고추기름에 물들듯 빨개졌다.

시골의 아주 작은 단체 활동만 해왔던 사쿠라기에게 도시는 그야말로 별천지였을 거다. 학교도 반도 사람도 모두 상상 그 이상의 사이즈. 그럼 당연히 기합과 긴장될 수밖에. 행동이 과하고 뻣뻣한 이유가 있었다. 부끄러움이 많은 건 진작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심했다.

“덩치가 아깝네.”

“뭐라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차슈 한 장을 낼름 먹었다. 이왕 왔으니 맛은 봐야겠다 싶었다.

“왜 먹어?”

사쿠라기가 짜증을 냈다.

“이거 원래 내 거였거든?”

“나한테 줬잖아.”

“쪼잔하네.”

“줬다 뺏는 네가 양아치지.”

사쿠라기는 왼팔로 그릇을 사수하는 벽을 만들더니 코를 박고 먹었다. 그 꼴이 얄미워서 나는 빈틈을 노려 차슈 한 장을 더 뺏어 먹었다. 그랬더니 녀석이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테이블이며 내 어깨에 면발 파편이 튀었다.

“아 더러워!”

“그러니까 왜 먹냐고!”

“좀 먹어도 되잖아!”

“나한테 줬잖아!”

“넌 곱빼기 먹었잖아 돼지야!”

“돼애지? 이 꼬맹이가!”

“죽을래?”

“덤벼!”

우리는 서로의 멱살을 잡고 일어났다. 우당탕탕, 의자가 뒤로 넘어지고 젓가락이 굴러떨어졌다. 사쿠라기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흥분해 씩씩거리는 눈썹이나 입매가 전혀 나 같지 않았다. 내가 보는 나는 언제나 여유롭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는데.

잠깐 다른 생각에 빠진 사이, 사쿠라기는 멱살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사장님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대로 메어쳤을 것이다.

“이놈들!”

제삼자의 깜짝 등장에 나와 사쿠라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사장님은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탁자에 작은 접시를 하나 올려놓았다. 차슈 2장이었다.

“싸우지 말고 먹어.”

사장님은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너무 놀란 나머지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 했다.

사쿠라기는 덤으로 얻은 차슈를 보고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새 젓가락을 뜯었다. 한 장을 집어 국물에 적시고는 입에 넣고 씹었다. 나머지 한 장도 국물에 푹 적시더니 그건 다시 작은 접시로 옮겼다. 그리고 내 쪽으로 밀었다. 나도 새 젓가락을 뜯어 차슈를 먹었다. 짭짤한 돼지 사골과 간장에 조려진 살코기의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맛있었다.

라멘 가게를 나오며 사쿠라기는 시골에 살던 이야기를 했다. 시골은 해가 지면 사방이 깜깜해져서 도시처럼 밤늦게까지 놀 수 없었고, 놀아도 여기처럼 좋은 놀이터나 큰 상점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산을 뛰어다니며 버섯이나 나물을 캐거나 남자애들끼리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공연히 싸움을 만들어 매일 주먹질했다고 했다. 웃긴 건 당장 절교할 것처럼 진심으로 치고받고 싸워도 다음날이면 다시 사이좋게 지냈다는 점이다.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동체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아니면 사쿠라기의 천성이거나. 그러면서 자신은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자랑했는데 폭주족 때를 미루어 짐작하면 분명 압도적인 체격과 체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본인은 싸움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걸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야깃거리는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나왔다. 사쿠라기는 헤어지기 직전까지 떠들었다. 잠시도 귀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얼마나 시달렸는지 잠들기 전까지 내 이름을 부르는 녀석의 목소리가 이명으로 남을 정도였다. 그래서 말이야, 미토. 미토 듣고 있냐? 야, 미토. 미토! 미토?

미이토오.

베개로 귀를 막고 라디오를 크게 틀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덕분에 잠을 조금 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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