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열백호]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본의 아니게 도망공이 되어버린 양호열의 사연.

호백 뽀뽀해 by 여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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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라이징, 시대 고증 미흡, 짭사투리 등 온갖 주의…

*개그물로 시작했으나 개그는 흔적만 남고 말았습니다ㅠㅠ

*12.30 호백온에 후속편과 외전을 포함한 소장본 발매 예정. 트위터에서 선입금 받고 있어요!(~12.15까지)

갓 스무 살이 되던 해. 양호열은 도망치듯 고향을 떠났다.

이유는 터무니없었다. 미리 말하자면, 결국 고백 한 번 하지 못하고 짝남을 미국으로 보내야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연 끊긴 지 한참 된 친부가 사람을 죽였댄다. 그것도 도박장에서.

“씨이발….”

목격자에 따르면 홧김에 사람 찌르고 홧김에 자기도 찔러서 그 자리에서 사망.

양호열은 더러운 기분과는 별개로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장례만 치러주면 다시는 그 인간 문제로 골치 아플 일 없을 테니까.

참 어리고 안일한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안 됐냐?”

“…이제는 이름만 듣고 알더라. 이 동네엔 무슨 비밀이 없나?”

“아니, 양호열 그래도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사람들 그거 싹 무시하고 뭐 하는 짓거리야.”

어디서 샜는진 몰라도 친부 이야기가 동네에 돌았다. 그 인간이 얼마나 한심한 인간이었는지는 싹 빠진 채 악질 도박중독자가 살인까지 저질렀다는 자극적인 소문으로.

그리고 그 아들이 양호열이라는 것까지 전부 알려졌다.

연좌제가 폐지된 지 언젠데 양호열은 벌써 아홉 번이나 취직에 실패했다.

“어른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졸업만 하면 일 가르쳐준다더니….”

사실 오랫동안 일해온 분식집이나 정비소 사장님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안다. 동네 장사는 단골 장사다. 단골을 놓치면 장사가 망하는데 그 단골들이 양호열 친부가 누구인지 알아버렸으니….

양호열은 소주를 병째 들이켜다 선언했다.

“됐다 그래. 더러워서 내가 이 동네 뜬다!”

백호 없는 백호군단은 말리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도 호열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소문이 어찌나 무섭게 몸집을 불리는지 어디서는 그 아비에 그 아들 아니겠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호열이 제일 싫어할 말이니 전하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그게 나을 수 있겠다. 굶어 죽는 것보다는 말이야.”

“우리 백호군단의 돌격대장이라면 어딜 가든 잘 살 걸!”

“적당히 자리 잡으면 언제든 연락해라. 기다릴 테니까!”

술김에 지른 결심이지만 홧김은 아니었다. 호열은 다음날 바로 자취방부터 빼고 있는 돈 없는 돈 박박 긁어모아 챙기고 버스표를 샀다.

도착지는 부산. 소문이 따라붙지 않도록 최대한 멀리까지 가버릴 작정이었다.

“건투를 빈다, 양호열!”

“몸조심해라!”

얼마 안 남은 괜찮은 인맥인 북산 농구부원들(모두 졸업했지만)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고, 이제는 셋만 남은 백호군단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양호열은 인천을 떠났다.

그리고 약 12시간 뒤. 버스에서 정말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겨우 잡은 부산의 한 모텔방.

“이런 미친.”

양호열이 떠나기 전에 액땜할 겸 산 복권이 1등에 당첨됐다.

“악! 지급처 서울이야!”


깔끔하게 세금 처리된 15억이 통장에 꽂혔다. 부산과 서울을 왕복하느라 만 하루를 버스에서 보냈더니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지만 양호열은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으하하, 이제 먹고 살 걱정은 덜었네. 좀만 일찍 당첨됐으면 백호 비행기 푯값에 더 보태는 건데.”

미국 비행시간이 13시간이랬나. 버스를 12시간 타는 것도 죽을 맛이었는데 하늘을 13시간이나 날아야 한다니 얼마나 힘들지 가늠이 안 됐다.

양호열은 임시로 잡은 숙소 전화로 김대남에게 전화했다.

“여, 대남아.”

-호열이냐? 짜식, 부산 도착하자마자 연락 안 하고 뭐했냐?

“일이 좀 있었어. 백호랑은 연락됐냐? 잘 도착했대?”

-이게 우리보다 한국에도 없는 백호를 먼저 찾네.

김대남은 툴툴대긴 했지만 백호 소식을 전해주었다. 새벽에 대뜸 전화해서는 하늘이 어떻냐느니 땅이 끝없다느니 자기 말만 떠들다가 끊었댄다.

백호다운 소식에 양호열은 낄낄 웃었다.

-암튼 우리도 다 잘 있다. 별로 안 궁금하지?

“안 궁금하기는. 물어보려고 했거든?”

-됐다, 됐어. 넌 이제 거기서 뭐 할 거냐? 생각해 둔 거 있어?

“글쎄…….”

자고로 복권 당첨은 가족한테도 말하지 말랬다. 백호가 한국에 있었다면 달라졌겠으나 미안하지만 백호군단에게도 당첨 소식은 전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스무 살에 벼락부자가 되었지만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하는 거랬다. 백호도 없는데 놀아봤자 재미도 없을 테고.

그러니 일단 일하는 시늉은 해야 하는데….

그때 마치 운명처럼 숙소 식당의 테레비젼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담장을— 넘어갑니다! 역전에 성공하는 자이언츠!!]

동시에 식당에서 소주를 까고 있던 아저씨들이 안 그래도 벌건 얼굴을 더욱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그라췌!!”

“마! 느그도 잘할 수 있지 않나!”

“한 잔 받아라! 소주가 달다!”

“사장님, 여기 소주 댓 병 주이소!”

식당 주방이 분주해졌다. 호열은 즐거워하는 사장님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식당이나 열어볼까? 야구장 근처에.”

야구는 알지도 못하는 어린 양이 지옥불에 발을 들이는 순간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양호열의 가게는 제법 잘 나갔다. 욕심내지 않고 조그맣게 낸 통닭집은 마진이 거의 없는 저렴한 가격과 하루에 50마리만 판다는 대담한 희소성으로 뜻밖의 인기를 끌었다.

“싸장님, 오늘도 공 튀기는 거 틀어놨습니꺼?”

“농구에요, 농구. 이것도 야구만큼 재밌다구요.”

매일 같이 야구를 보러 사직으로 오는 아저씨들은 성실하고 싹싹한, 젊다 못해 어린 사장을 마음에 들어 했다. 비록 가게 테레비에는 외국 공놀이를 틀어놨지만 통닭은 이 값을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맛있었고 서비스로 캔맥주도 끼워주니 넘어가 줄 수 있었다.

“이만치만 받아서 우예 돈을 버는교? 내사 좋지마는 가게 망할까 억수로 걱정된다 아입니꺼.”

“입에 풀칠할 만큼은 버니까 걱정은 마시죠.”

가게는 겨우 적자만 면하는 수준이었지만 호열은 괜찮았다. 아직 통장에 10몇 억이 남아 있으니까.

“올해는 꼭 우승하면 좋겠네요! 그럼 즐거운 관람 되세요.”

“올해가 우승 적기지, 적기! 올해는 다르다! 고럼 싸장님도 욕보이소!”

통닭 50마리는 야구가 시작하기도 전에 다 팔렸다. 그럼 호열은 미련 없이 가게 문을 닫고 퇴근했다. 야구가 이기면 이기는대로, 지면 또 지는대로 술에 꼴은 야구팬들을 상대하는 건 전직 불량 청소년도 피하고 싶은 일이다.

몇 달이 지나 달궈진 기름 냄새가 익숙해졌을 무렵엔 백호군단에게도 연락을 넣어 꾸준히 소식을 주고받았다. 통닭집이 잘 나간다고 하니 용팔이는 언제 한 번 얻어먹으러 갈 테니 각오하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대남이와 구식이도 축하를 전했다.

물론 세 사람도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 가는 중이었기에 부산까지 내려오지는 못했다.

운이 좋은 날엔 백호와도 통화했다. 백호는 호열이가 고향을 떠났다는 소식에 크게 분개했지만, 부산에 자리 잡았다고 하자 안도하며 응원했다.

-이 천재의 친구가 통닭 천재로 거듭났구나! 너 요리 진짜 잘하니까 네가 만든 통닭도 엄청 맛있을 거야!

“하하, 당연하지. 매일같이 주문이 쏟아진다고. 너야말로 잘 지내고 있어? 뭐 필요한 건 없고?”

-어어, 좀 귀찮게 구는 놈들이 있긴 한데 나름 괜찮아! 이 몸의 엄청난 슬램덩크를 보면 죄다 놀라 뒤집어지거등. 글구 필요한 거는….

백호는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나중에 말해주겠다며 얼버무렸다. 대체로 말에 숨김이 없는 백호에게는 드문 일이라 호열은 걱정하면서도 추궁하지 못했다.

물건 같은 게 필요했다면 숨길 리 없다. 백호에게 필요한 건 아마도 사람. 사람의 온기일 터.

그 부분을 채워주는 건 절친인 호열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남모를 마음을 품고 있는 이상 더더욱 그래선 안 된다.

그렇다고 위로를 건네기엔… 백호는 위로를 받으면 울어버리고 만다. 눈물을 닦아 줄 수도 없는데 울릴 수는 없다.

“알았어. 필요한 게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또 통화하자.”

백호와의 통화를 마치고, 그날 호열은 통닭 50마리를 팔고 퇴근을 야구장으로 했다. 자신을 알아본 단골들이 몰래 찔러준 소주를 마시고 부산 갈매기를 목청껏 불렀다.

“파도치는 부둣가에 지나간 일들이 가슴에 남았는데!”

“우리 싸장님 노래도 억수로 잘하네!”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너는 정녕 나를 잊었나!”

다른 사람들처럼 술에 꼴아 노래 부르고 소리 지르니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이 사람들이 야구를 보나? 그렇다기엔 항상 화가 나 있는데….

아무튼 양호열은 유달리 짝사랑이 도지거나 백호와 통화한 날이면 야구장에 갔다. 그걸로 이 지독한 연심을 달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멋대로 좋아해 놓고 멋대로 백호를 원망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3년 정도 통닭을 튀기며 살았다. 점점 늘어나는 단골들이 하도 닦달하는 통에 하루에 판매하는 통닭 수를 100마리로 늘릴까 고민하던 차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이렇게 갑자기 전셋값을 올린다고요?”

조금 이르게 재계약을 하자며 찾아온 건물주가 전셋값을 두 배 가까이 올려버린 것이다.

양호열은 기민하게 눈치를 봐 사태를 파악했다.

보아하니 건물주는 호열의 통닭집이 잘 나가자 그걸 그대로 꿀꺽하려는 심산 같았다. 절대 말해주지 않는 사정을 들먹이며 전셋값을 올리게 됐다면서, 미안하니까 가게를 내주면 호열을 주방장으로 고용하겠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갑작스러운 갑의 횡포에 호열은 기가 찼다. 장사하는 건 고되지만 익숙해져서 할만했고 단골들과도 정이 들었지만 이런 대우를 참을 만큼은 아니었다.

“됐습니다. 장사 접죠, 뭐.”

건물주는 아쉬운지 재차 주방장 자리를 제안했지만 호열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포기했다. 어차피 적당한 사람 고용해서 비슷한 상호로 재개업하면 될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호열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그간 통장에 쌓인 예금 이자를 보며 달랬다. 0의 개수를 헤아리니 절로 마음이 진정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른 지역으로 가서 새로운 일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든든한 통장과 함께라면 어딘들 못 가겠는가.

‘백호 보러 미국에 가는 건…….’

무심코 떠오른 생각을 호열은 재빨리 지웠다. 간다고 하면 백호가 무척 기뻐하겠지만 호열이 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몇 년 만에 만난 절친이 갑자기 고백해버리면 백호가 얼마나 당황하겠는가.

친구와 재회한 기쁨을 그런 식으로 실망시킬 순 없었다.

호열은 다음엔 몸을 많이 쓰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몸이 고달프면 이 마음도 닳아 버리겠지.

부산을 뜨겠다고 마음 먹자 일도 손에 안 잡혀서 호열은 가게를 일찌감치 정리했다. 아쉬워하는 단골들과 야구장에 다니며 간을 조지기를 며칠.

“느그가 그러고도 프로가!”

“해체해라! 해체해!”

부산을 연고지로 둔 야구팀이 2년 연속으로 꼴찌를 확정 지었다. 열성적인 야구팬들은 광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모든 야구팬이 그런 건 아니지만 머릿수가 많다 보면 선을 넘는 놈들이 한둘쯤은 섞이기 마련이었다.

“이야….”

야구장 쓰레기통이 불타올랐다. 어쩌다 그 불씨가 여기까지 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열의 가게였던 건물에도 불이 붙었다.

“차라리 잘 됐다.”

공교롭게도 어제부로 계약이 만료됐다. 닭 튀기던 기름이 남아 있었으면 큰 화재로 번졌겠지만 다행히 외벽이랑 내부 인테리어만 조금 타고 금방 진압됐다.

호열이 남기고 간 걸 고대로 써먹으려던 건물주는 결국 죄다 뜯어고쳐야 할 것이다.

‘어차피 떠날 거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떠나라는 것 같네.’

호열은 조금 헛헛한 마음으로 광주행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이번에도 액땜 겸 산 복권 세 장이 모두 2등에 당첨됐다.

“깽값도 아니고 이게 뭐야?”

이러면 안 되는데 헛헛한 마음이 조금 채워졌다.


몸 쓰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호열은 정비소에 취직했다. 고향에서 기본은 배웠던 일이라 금방 적응했다.

“워메, 이게 뭔 일이다냐!”

광주에 온 지 1년 좀 지났을 무럽, 정비소 사장 내외의 외아들이 갑자기 가수로 대성했다. 호열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 가수의 악성팬들이 정비소를 찾아오는 등 문제가 생겼다.

안 그래도 은퇴를 고민하던 사장 내외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정비소를 닫아버렸다.

사장 내외는 호열에게 정비소를 물려줄 생각까지 했지만 호열이 거절했다. 무언가에 빠진 사람 중 정도를 넘어서는 사람이 한둘은 꼭 있다는 사실을 지난 경험으로 뼈저리게 알았기 때문이다.

몇몇은 누구누구 부모가 운영하는 정비소의 직원으로 호열을 알아보기까지 해서 호열은 그냥 미련 없이 광주를 떠났다.

“설마설마했는데…….”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떠나기 전에 산 복권이 당첨됐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됐다. 광주 다음으로 간 대구에서는 과수원에 취직했다가 폭염에 호되게 당했고, 이번엔 시원한 곳에 가자 싶어 도착한 강릉에서는 토목 공사 노가다를 뛰다가 임금 체불 문제가 터지는 바람에…….

짧으면 1년, 길어봐야 2년 겨우 일하기를 반복하다, 진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향한 대전에서는 오래된 빵집의 체인점에 취직했지만 금방 부도가 나버렸다.

그렇게 온갖 이유로 일자리가 터지고 그 지역을 떠날 때마다 산 복권은 모조리 당첨됐다.

그게 호열에게는 이 돈 받고 빨리 떠나라는 독촉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딜 가도 자리 잡지 못하는 건가…….”

별의별 터무니 없는 일이 계속 터지는 통에 어느 순간부터는 친구들에게 선뜻 알리기도 어려웠다. 작년까지만 해도 광주에 있던 놈이 갑자기 대구를 찍고 강릉에 왔다고 하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괜히 백호에게까지 알려져서 괜한 걱정을 시킬 수는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해 주길 바랄 뿐이다.

“백호 보고 싶다.”

고향을 떠난 지 어언 9년째. 백호를 비롯한 백호군단과 연락을 끊은 지는 3년이나 됐다. 양호열은 서울 모처의 호텔에서 40억이 찍힌 통장을 품에 넣은 채 청승을 부리고 있었다.

돈만 많으면 뭐 하나. 마음 뉘일 곳도 사랑하는 님도 여기 없는데.

몇 년 전 깡소주나 까던 자신이 들으면 주먹을 날릴 만한 생각을 하며 호열은 위스키를 들이켰다.


양호열도 이게 이상한 일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정착할라치면 이상한 일이 터지고, 그곳을 떠나면 복권에 당첨되고.

하도 이상해서 신빨 좋다는 무당도 찾아갔다. 무당은 호열의 생년월일과 생시만 듣고는 대뜸 말했다.

“쌔빠지게 돌아다녀야 잘될 팔자구만. 보통 역마살이 아니야.”

“예? 그럼 어디 정착도 못 하는 겁니까?”

“머문 곳에서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도착지에서 오래 지낼 수는 있겠지. 근데 어디 뿌리내릴 생각은 포기하는 게 이로워.”

참 힘 빠지는 소리였다. 호열이 그럼 역마살 막는 부적이라도 써달라고 요청하자 무당은 고개만 저었다.

“자네는 그런 거 필요 없어. 다른 당집 돌아다녀도 도움은 못 받을 테니 다신 찾지 마시게나.”

그러면서 복채도 안 받고 쫓아내니 호열은 따질 기운마저 잃고 말았다.

팔자라니 어쩌겠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차라리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사실 평생 떠돌아다녀야 한다는 게 그렇게 절망적이진 않았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인지라 9년쯤 이렇게 살다 보니 도에서 도로 이사하는 것도 익숙해졌고 고향 친구들만큼 정가는 사람도 없어서 이별이 아쉽지도 않았다.

다만 이런 팔자가 못내 서러운 이유는 강백호 때문일 테다.

강백호가 미국에 정착해 자기 자리를 잡아 가는 동안, 양호열도 대한민국 한구석에 자기 자리 한 군데 정도는 두고 싶었다. 너처럼 나도 여기서 잘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만이 네가 돌아올 곳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마지막까지 남는 건 나일 테니.

먼 훗날 사람이 그리워지거든 언제든지 오라며 변하지 않을 주소를 적어 보내고 싶었다.

백호가 편히 쉴 수 있는 방 한 칸만 마련할 수 있다면 호열은 아주 만족할 것인데. 평생 비어 있어도 좋을 그 방을 쓸고 닦으며 살아도 좋은데. 통장에 쌓인 돈도 그의 팔자는 고치지 못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만나러 가야겠지?”

호열은 호텔 룸에 비치된 스포츠 신문을 보며 피식 웃었다.

1면에 자랑스러운 천재 농구 스타 강백호의 귀국 소식이 요란하게 실려 있었다.


제 팔자를 받아들인 호열은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가 친구들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간 숨긴 건 혹시 돈 앞에서 변할지 모르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지만 이제라도 백호군단의 의리를 믿어보기로 했다.

…정 안 되면 영영 떠나버리면 된다는 선택지가 생긴 것도 용기를 내는 데 일조했다.

그리하여 9년 만에 돌아온 고향 인천. 호열은 크게 바뀐 것 없는 동네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살펴보다가 익숙한 공중전화 부스를 발견했다.

고등학생 때 저기서 종종 백호한테 전화하곤 했는데. 왠지 좀 감상적이 된 호열은 부스 안으로 들어가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번호를 눌렀다.

-Hello? 아, 아니. 여보세요?

“…….”

수신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익숙하고 너무나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렸다. 설마 아직도 이 번호를 쓸 줄 몰랐는데. 양호열은 속절없이 숨을 떨었다.

그 떨림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는지 강백호가 대뜸 물었다.

-양호열이냐?

“……배, 백호야.”

-너, 너 이 자식! 지금 어디야!

호열은 숨이 차서 대답하지 못했다. 뭐가 이리도 북받치는지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대답 없이 씨근거리기만 하는 호열에게 백호가 외쳤다.

-거기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기만 해, 양호열! 가만 안 둘 줄 알아!

그리고 통화가 끊겼다. 호열은 겨우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뺨이 온통 축축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겨우 나와 전화 부스에 기대섰다. 백호의 집에서-여전히 그곳에서 산다면- 여기까지 걸어서 10분 거리다. 백호가 오기 전에 이 꼴사나운 모습을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양호여어얼!”

하지만 백호는 3분 만에 도착했다. 어디 다른 곳을 헤매지도 않고 전속력으로 달려온 게 분명했다.

예전보다 커진 키와 덩치, 바싹 깎은 머리 옆면과 눈썹의 스크래치가 낯설다.

동시에 여전히 타오르듯 붉은 머리칼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단단히 화가 난 듯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호열은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백호를 넋 놓고 보다가 그대로 끌어안겨졌다.

“너 인마,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한 거야!”

“……백호야.”

“내가 진짜 너 찾으려고…….”

“미, 미안.”

“크흥, 너 진짜 나쁜 새끼야.”

“맞아. 내가 진짜 나빴어. 다신 안 그럴게. 그러니까 울지마…….”

백호는 호열을 껴안은 채 한동안 훌쩍이다가 한 번 힘주어 꽉 안은 뒤 풀어주었다. 그리고 호열의 옷을 들추며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배, 백호야아?”

“너 어디 나쁜 데 끌려갔던 거 아니지? 신장 두 짝 다 달렸어? 간은? 새우잡이 배 타고 그랬던 거 아니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그냥 평범한 일만 하고 다녔어.”

“하지만 너 통닭집 불타서 건물주한테 쫓겨나고, 일하던 정비소도 망하고, 과수원에서 비료 나르다 쓰러졌다며!”

“그런 건 어떻게 안 거야?”

호열이 뜨악해서 묻자 백호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있어. 돈 좀 주면 뭐든 해주는 사람들.”

“너야말로 이상한 놈들하고 엮인 거 아니야?”

“이 천재를 뭘로 보고! 불법은 안 저지른다고 했거덩!”

아무튼 백호의 사정은 이러했다.


호열의 연락이 끊기기 전부터 백호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부산에서 잘 나간다던 통닭집을 돌연 접고 광주로 가더니 거기서도 1년 겨우 채우고 대구로 갔다지 않은가.

자신이 중학생 때부터 보아 온 양호열은 새로운 시도를 자주 하진 않아도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었다. 그런 녀석이 단기간에 이렇게 자주 돌아다닌다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 하하, 그럭저럭하고 있어. 괜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백호야.

거주지를 옮기니 전화번호도 수시로 바뀌어서 백호는 호열이 새로운 번호를 알려주어야만 연락할 수 있었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호열은 언제든 먼저 연락을 끊을 수 있다는 게 백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네 일인데 뭐가 괜한 걱정이냐? 헷갈리니까 번호 좀 그만 바꿔, 짜샤.”

-그게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서…….

예전이라면 되든 안 되든 그러겠다고 했을 녀석이 모호하게 말꼬리를 흐린다. 백호는 이미 다른 녀석들에게서 호열이와 연락하기 힘들다는 푸념을 들은 상태였다.

그건 호열이 백호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백호보다도 더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다닌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백호는 전화하면 언제든 받아주는 친구 녀석들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백호가 최대한 빨리 귀국해야 했다고 마음먹었을 무렵, 걱정하던 대로 호열의 연락이 끊어졌다.

“나만 난리 친 게 아니야. 대남이, 용팔이, 구식이 모두 야단났었어.”

가장 먼저 호열의 잠적을 알아챈 건 대남이었다. 호열이 일한다던 대구의 과수원으로 전화를 걸었다가 이미 호열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확철이 끝나자마자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가버려서 과수원 사장이 퍽 아쉬워했다나.

“그렇게 부려 먹었으니 아쉬워할 만하지…….”

“헉! 역시 거기서 무슨 노예 계약이라도 한 거냐!”

“그런 일 없었대두. 대체 왜 자꾸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하지만 너 찾으려고 고용한 사람들이 네 행적이 이상하다고 했단 말이야!”

대남에게서 호열의 잠적 소식을 들은 용팔과 구식은 일단 그들끼리 호열을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인천 토박이인 그들이 다른 지역으로 떠난 사람을 찾기란 요원했고 결국 사람까지 고용해야 했다.

그러던 중 호열에게서 오래도록 연락이 없어 그들에게 전화한 백호도 호열의 잠적 소식을 듣게 됐다. 훌륭하게 NBA 1군에 자리 잡은 백호는 당장 돈부터 부쳐서 친구들을 지원했다.

호열은 면목이 없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흥신소 직원이 백호의 지갑을 노리고 과장되게 말해 겁을 준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죄가 흐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내가 정말 미안하다…….”

“당연히 그래야지. 나 말고 다른 녀석들도 엄청 걱정했다고.”

“근데 나 진짜 어디서 노예처럼 일하거나 장기 팔아야 할 정도로 힘들게 살진 않았어. 다 설명해 줄게.”

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니 두 사람은 일단 백호의 집으로 향했다. 백호가 살던 집은 남은 백호군단이 관리해 준 덕에 제법 깔끔했다.

떠나지 않아도 됐으면 내가 쓸고 닦고 다 했을 텐데. 망령 같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호열은 설명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 떠나기 전에 복권을 샀었는데…….”

본의 아니게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복권에 당첨됐지만 결국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었다, 무당 찾아가니 이런 얘기까지 하더라, 믿기 힘들면 이 통장을 봐라.

호열은 통장까지 까서 주기적으로 입금된 거액과 입금자명을 확인시켜 주었다. 만약 입금 횟수만큼 장기를 팔았다면 호열은 가죽만 남았을 게 분명했기에 백호도 드디어 납득했다.

“이… 이런 거면 진작에 말할 것이지!”

“진짜 미안……. 한 번 숨기니까 말할 타이밍이 애매해져서. 내 팔자가 그럴 줄도 몰랐고….”

여기서 네가 돌아올 곳이 나였으면 해서 이러쿵저러쿵했다고 지껄일 순 없으니 호열은 그렇게만 말했다.

백호는 박치기를 한 대 꽝 날려 응징했다. 친구란 놈이 천재한테 비밀이나 만들고 말이야!

이마저도 그리웠기에 호열은 고통을 핑계로 눈물을 찔끔 흘렸다.

“팔자가 그렇다는 건 딴 데서 살다가 다시 여기로 올 수 있다는 소리냐?”

“음, 그럴걸. 근데 올 수 있어도 안 오려고. 멀리 이동할수록 오래 지낼 수 있다는데, 이동할 때쯤 되면 항상 이상한 일이 터졌거든. 나야 떠나면 되지만 혹시 다른 애들한테 불똥이 튀면 안 되니까.”

“흠, 멀리 이동할수록이라…….”

“이번에는 아예 섬으로 가볼까? 제주도나 울릉도 같은데 말이야. 바다를 건너면 한 4년쯤 살 수 있지 않겠냐.”

“뭐? 양호열, 너 바보야?”

갑작스러운 매도에 얼떨떨해하는 호열의 어깨를 백호가 붙들었다.

“바다 건널 작정까지 했으면 당연히 미국으로 가야지! 이게 멀리 갈수록 좋단 말까지 들었으면서 생각한 게 고작 제주도냐? 사내자식이 이렇게 포부가 없어서야!”

“아, 어깨 부러져! 놓고 말해, 놓고!”

“당장 미국으로 가겠다고 말해!”

“알았어! 미국 갈게! 간다고!”

이거 분명 멍들 거야. 이미 멍들었을 거라고. 호열은 얼얼한 어깨를 문지르며 금세 기분 좋아진 백호를 째려보았다.

……망했다. 웃는 얼굴을 보니 화낼 마음도 싹 사라진다. 호열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제지하며 애써 툴툴거렸다.

“근데 왜 미국이야? 미국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나라였나?”

“엄, 고건 몰겠고. 이 천재가 있는 곳이잖냐.”

“응?”

“이 몸이 그새 천재 계획을 세우셨단 말씀!”

백호는 낄낄 웃으며 신나게 설명했다.

“너 인천에서 부산 갔을 때 3년은 괜찮았다며. 고럼 미국까지 가면 10년은 괜찮지 않겠냐?”

“어어… 잘 모르겠는데.”

“암튼 적어도 3년보단 길게 괜찮을 거 아냐. 근데 내가 딱 그만큼만 미국에서 더 뛸 생각이거덩.”

“뭐? 너, 너 은퇴하려고?!”

“이 천재가 그럴 리가 있겠냐! 다시 한국 와서 뛴다는 소리다!”

그러면 미국에서 3년, 한국에서 3년. 최소 6년 이상 문제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게 백호의 주장이었다. 무슨 일이 터지기 전에 이사하면 호열이 걱정하는 것처럼 백호에게 불똥이 튈 일도 없을 테고.

일리 있는 소리였다. 호열은 혹해서 고민하다가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근데 너 한국 올 때 나도 같이 오는 거냐?”

“당연하지.”

“…왜? 기껏 미국까지 갔는데 몇 년까지 괜찮을지 확인하는 게 낫지 않나.”

그러자 백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양호열…….”

“으응…?”

“너 내 말 제대로 안 들었냐?”

“아니… 다 들었는데, 네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면 너한테 피해 갈 일 없으니까…….”

“다시 묻는다. 신중하게 대답해라.”

백호가 팔짱을 끼고 호열을 노려보았다.

“나랑 같이 미국 가자는 말, 무슨 의미인지 진짜 모르겠냐고.”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호열의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차마 백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짜 그런 뜻이야…?”

“그래.”

“나랑 같이 살려고…?”

“그렇다니까.”

“내가 착, 각하는 건…….”

“내가 언제 너 헷갈리게 했냐?”

“아니, 그치만…….”

호열은 흉하게 달아올랐을 얼굴을 양팔로 가리며 웅얼거렸다.

“네가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어서…….”

“어엉? …아, 맞다! 그것부터 말했어야 했는데 너 울어버려서 깜빡했다!”

우와악하고 머리 한 번 휘저은 백호가 호열의 팔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호열만큼이나 새빨개진 얼굴로 외쳤다.

“좋아합니다! 저랑 사귀어 주세요!”

“읏…….”

“언제부터였느냐면… 미국에 있을 때 네가 필요한 건 뭐든 보내주겠다고 한 거 기억 나냐? 그때 문득 네가 오면 좋겠다 싶더라고. 다른 애들도 보고 싶었지만 네가 진짜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무지하게 했어.”

처음에는 단순히 향수병 때문에 이러나 싶었다.

하지만 호열이 작은 통닭집이지만 테레비도 설치해서 자기 경기를 본다는 말을 듣고 그날 경기에서 멋진 활약을 펼친 후 저도 모르게 카메라를 찾았을 때.

이젠 사장이 아니라 채널 변경권이 없다는 말에 이상할 정도로 서운했을 때.

한동안 연락하기 힘들 거라는 얘기를 듣고도 매일 같이 전화기 앞을 서성거렸을 때.

그제서야 백호는 알게 되었다.

“내가 양호열을 좋아하는구나……. 이 강백호가 양호열 너를.”

“…….”

“나 맨날 고백할 땐 편지 썼으니까 너한테도 러브레터 보내고 싶었는데, 넌 이미 딴 데로 가버려서 주소도 모르고… 연락도 아, 안 되고…….”

백호의 눈가가 천천히 젖어 들었다.

“애들이랑 사람 구해서 너 찾으려고 하니까, 나오는 얘기라곤 갑자기 떠났다, 미련도 없이 종적을 감췄다 이러니까… 우리한테도, 흡, 나한테도 미련이 없어서 떠나갔다 싶어가지구……. 근데 또 아저씨들은 네 상황이 안 좋을 수 있다잖아.”

그래서 한국에 들어왔다. 호열이 어디로 도망을 갔든 붙잡혀 있든 이 강백호가 왔다는 걸 알 수 있게 최대한 소란스럽게.

도망을 쳤다면 붙잡으러 갈 거라는 선포였고, 붙잡혀 있다면 구하러 갈 거라는 신호였다.

그리고 양호열이 스스로 강백호에게 돌아왔다. 호열은 도망가지도 붙잡혀 있지도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백호의 작전대로 됐다.

백호는 손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야, 열아. 사귀자고 한 말은 취소할게. 고백 안 받아줘도 되니까 그냥 내 옆에 있어만 주면 안 되냐? 나 진짜 너 없으면 안 되겠거등….”

“……지마.”

“엉?”

“취소…하지 말라고.”

호열이 겨우 흐느낌을 참으며 말했다.

“나도… 네 생각 많이 했어. 사실 연락 끊기도 싫었고, 너 보러 미국에도 가고 싶었어.”

“근데 왜 안 그랬는데.”

“못 참고 고백해 버릴까 봐. 그래서 널 힘들게 만들까 봐.”

“이익, 바보 양호열! 연락 끊은 게 더 힘들었다고!”

“응, 미안. 근데… 나는 진짜 네가 돌아올 곳이 되고 싶었는데…….”

네가 쉬고 갈 방 한 칸 만드는 게 소원이었는데…….

결국 호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넘쳤다.

“지금은 그냥… 같이 가자고 해주니까 너무 기쁘다. 진짜…. 좋아해, 백호야. 정말 너무 좋아해. 내가 너를, 계속…….”

호열이 말을 잇지 못하자 백호가 그를 끌어안았다.

“같이 살면 매일매일 너한테 돌아가는 거잖냐. 매일 네 곁에서 쉴 수 있고. 근데 그거 나한테도 좋은 일 아니냐? 왜 내가 너 거둬주는 것처럼 말을 해. 나는 지금 같이 미국 가 달라고 너한테 부탁하는 거라고.”

백호는 호열의 머리에 대고 뺨을 비볐다. 아, 이 온기가 얼마나 그리웠던지.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너야말로 나 하나만 보고 미국 가도 괜찮겠어?”

“…당연하지.”

어렵게 눈물을 그친 호열이 백호를 마주 안으며 대꾸했다.

“몇 년 단위로 이사하면서 전국 일주하는 것보다 너 못 보는 게 더 힘들었어. 너 있는 미국 가는 건 힘든 일도 아냐.”

“짜식, 못 본 사이에 듣기 좋은 말 하는 실력이 늘었구만.”

백호가 낄낄거리며 호열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호열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 그러는 너는 미국에서 남자 꼬시는 법이라도 배워 온 거야?!”

“헹, 너 꼬셔서 옆에 딱 붙여놓으려고 배웠다면 어쩔래.”

“……이미 옛날 옛적에 다 꼬셔졌거든?”

“누우웃?! 진짜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언제부터였냐고 묻는 백호를 보고 호열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백호의 양 뺨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언제부터였느냐면…….”

그 긴 시간을 다 말하려면 한참은 걸릴 것이다. 평생 전하지도 못할 마음을 끌어안고 떠돌아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정리하지 못하고 쌓인 말들이 많았으니까.

그래도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강백호의 곁이었다. 호열은 그 곁에서 평생에 걸쳐 전할 자신 있었다.


대남과 구식, 용팔은 돌아온 호열을 보자마자 주먹부터 날렸다. 지은 죄가 있는 호열은 피하지도 막지도 않고 싹싹 빌었다.

“이 자식이 말도 없이 사라져서는 말도 없이 돌아와?!”

“우리가 너 찾는다고 부산에 갔다고, 부산에!”

“통닭 튀기다 망해서 사채라도 쓴 줄 알았다!”

“악, 윽. 미안, 미안하다!”

이들의 걱정과 오해는 단지 흥신소 직원의 과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탄 통닭집에 심통이 났는지 건물주가 호열을 찾는 그들에게 통닭집이 망해서 도망쳤다는 식으로 말한 모양이었다.

호열은 굉장히 억울했지만 차마 친구들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야, 야. 적당히 때려라. 고의는 아니었댄다.”

백호 역시 잠시간은 지켜만 봤다. 호열과 마음이 통해 연인이 되긴 했지만 친구들끼리 좀 거칠게 화해하는 걸 막기는 뭐했다.

호열이 거의 납작 엎드리다시피 하며 사과하고 모든 사정을 설명하자 세 친구도 그럭저럭 넘어가 주었다.

호열과 백호가 사귀게 되었다는 소식엔 그런가 보다 하는 반응이었고.

“너네 예전부터 친구 안 같았어, 인마들아.”

용팔의 말에 백호는 머쓱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였다. 친구 놈들도 애저녁에 눈치챈 것 같은데 자신은 얼마나 둔탱이면 이제야 알았나 싶었다.

놓친 시간이 아깝긴 하지만 이제라도 마음이 통했으니 됐다. 백호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로부터 몇 주 뒤, 급하게 여권을 발급받은 호열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복권을 세 장 샀다. 그리고 공항까지 배웅하러 온 친구들에게 한 장씩 나눠주었다.

“이, 이거 설마 당첨되는 거냐?”

“나도 모르겠네. 항상 떠난 뒤에 확인했어서. 이번엔 나만 가고 복권은 두고 가니까 안 될 수도 있겠지.”

“끄응, 그럼 일단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하나….”

“호열이 넌 안 아깝냐? 어쩌면 미국 가서 팔자가 바뀌어 버릴지도 모르잖아. 그럼 이게 마지막 당첨 복권이 되는 거라고.”

그 말에 호열이 크게 웃었다.

“하나도 안 아까워. 난 더한 걸 받았으니까.”

“호열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

잠시 화장실에 들렸던 백호가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멀리 갈수록 잘될 팔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백호와 함께 있는 게 그 무엇보다 잘된 일이었다.

호열은 미국에서 아주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후기를 가장한 잡썰.

이게… 왜 이렇게 길어졌을까요…??

정말 간단한 의식의 흐름으로 시작한 글인데 이렇게나 길어져서 쓰는 내내 정말 당황스러웠네요ㅋㅋㅋ

첨엔 대충

현생 뭣같은데 로또나 됐으면 -> 난 안 될 것 같으니 호열이라도 당첨되라 -> 근데 그냥 당첨되면 재미없으니까 이사 갔다고 할까? -> 어, 이사 갈때마다 복권 당첨된다면? 본의아니게 도망공이 돼서 백호가 쫓아오면 재밌겠당ㅋㅋㅋㅋ

딱 이 생각 만하고 시작한 글이었거든요ㅋㅋㅋㅋ

근데 멀리 보낸다고 얘를 부산으로 보내니까 웃긴 에피소드로 넣을 만한 게 야구밖에 안 떠올라서…ㅋㅋㅋㅋ 게다가 슬덩 작중 연도를 93년으로 치면 호열이가 부산 갔을 시기가 딱 96-98이더라고요ㅎ 그래서 좀 끼워맞춰봤습니다…

야구 모르시는 분들은 재미없으셨을 것 같지만… 일단 전 좀 재밌었네요… 저만 재밌었다면 죄송합니다…ㅎ

항상 느끼는 거지만 개그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전 태생이 노잼인간이라 웃수저인 분들이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이번에는 먼가 삘이 와서 좀 질러봤는데 반쯤 쓰니까 몸살이 나버려서(이상하리만치 연성만 하면 아픈 사람) 개그물의 꿈은 흐지부지 되어버렸습니다…^^

암튼 꼴린 글도 웃긴 글도 못 쓰지만 사랑은 넘치게 하려고 노력 중이랍니다. 호백은 평생 사랑을 하도록 해라!

긴 글과 뻘한 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호백한 하루 되세요!!

+참!! 혹시 사투리 심하게 틀린 부분 있으면 제보 부탁드려요ㅠㅠㅠ 열심히 찾아봤지만 네이티브가 아니라 틀렸을 것 같아서요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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