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열백호]하나만 바꾸자

바뀐 게 많은 강백호와 바뀌지 않은 양호열 사이에서. #호열백호_한주전력 #없는_곳에서_230909

호백 뽀뽀해 by 여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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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그리움’, 대사 “나 없는 곳에서 외로워하지 마.” 사용.

강백호. 빨간 머리에 덩치 크고 사납게 생긴 양아치. 머리를 넘기고 교복을 줄여 입은 친구들과 스쿠터를 타고 빠칭코를 다니는 문제아. 쉽게 흥분하고 거친 싸움을 몰고 다니는 불량아.

이건 오랫동안 강백호를 따라다닐 것 같은 수식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고등학교 1학년 농구를 만나고서부터 많은 것이 바뀌었다.

강백호. 빨간 머리에 덩치 크고 사납게 생긴 농구 선수. 짧게 친 머리에 스크래치를 내고 누구보다 빠르게 코트 위를 누비는 악동. 높은 점프로 공을 막고 빼앗고 골대로 집어넣는 허슬 플레이어.

그리고 국내를 넘어서 미국에까지 진출해 활약 중인 훌륭한 농구 선수.

자신이 이렇게까지 바뀔 줄은 백호도 몰랐다.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것이 바뀌었다. 사는 곳, 쓰는 언어,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 그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

다만 바뀌지 않은 게 있다면 지금 걸려 오는 이 전화다.

“Hello?”

-여보세요. 백호야!

“어, 호열아.”

백호는 목소리를 좀 더 자연스럽게 내려고 노력했다. 양호열은 딱히 이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에도 그들은 통화했고 그때와 똑같이 호열은 백호를 반가워했다.

근데 백호는 불편했다. 뭐가 불편했냐면 심장이 욱신거리는 게. 호열을 상대로 자꾸 말을 머뭇거리게 되는 게.

그리고 호열은 강백호를 잘 알았다. 이런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한참 시답잖은 얘기를 하던(이상할 정도로 항상 할 얘기가 많다. 전화만 하면.) 호열이 넌지시 묻는다.

-근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없어? 많이 피곤하냐?

“어엉? 그건 아니야….”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또 잠 설친 거 아니야? 피곤하면 이만 전화 끊,

“아냐! 끊지 마!”

백호는 서둘러 막고는 아무 얘기나 주워섬겼다. 오늘따라 밥이 맛이 없었고, 하지만 다섯 그릇은 먹어버려서 코치한테 잔소리를 좀 들었고, 몸이 좀 무거워서 가 본 병원에선 완벽한 컨디션이란 얘기를 들었고, 어제 경기도 완전 찢어버렸다고.

이상할 정도로 두서없고 버벅거리는 말이었는데 호열은 가만가만 맞장구치며 들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빌어먹을. 양호열 진짜 어쩌려고…. 아니지. 이게 호열이 잘못은 아니지…….

백호는 호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말실수를 했다.

“그리고 어제 네 사진 봤는데….”

-사진? 내 사진 갖고 있어?

“헛, 아니?!”

-뭐야.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어, 아. 갖고 있지. 군단 애들하고 찍은 거 있잖냐.”

아차차. 하필 그걸 말하다니! 백호는 서둘러 거짓말을 했다. 여전히 거짓말에 서툴러서 말투가 어색했지만 호열은 알면서도 넘어가 준다.

-그래서 내 사진을 봤구나.

“어엉. 좋더라구….”

강백호는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자꾸 입이 멋대로 나불거린다!

호열은 잠시 말이 없었다. 백호는 긴장해서 또 실수하기 전에 통화를 마치기로 했다.

“아무튼! 다음에 볼 수 있음 좋겠다, 호열아. 이만 끊는다!!”

호열의 인사를 듣기도 전에 끊어버린 백호는 잠시 후회했다. 목소리 더 듣고 싶었는데…….

그러니까, 강백호는 많이 변했다. 양아치에서 농구선수가 됐고, 불량아에서 허슬 플레이어가 됐다.

그리고 절친한 친구를 짝사랑하게 됐다.


이렇게 된 건 백호 생각에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양호열은 언제나 백호에게 잘해주었다. 장난도 많이 쳤지만 항상 의지가 되었고 백호가 힘든 일이 있으면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재활 기간이나 아버지의 장례식, 그리고 맨 처음 고백에 차였을 때도 그랬다.

‘야, 호열아. 미영이가 나 머리가 빨갛다고 싫대.’

허어엉 애처럼 우는 자기보다 큰 친구를 호열은 한심하게 여기지도 않고(사실 속으로 어땠을진 모른다. 다만 호열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백호가 보기엔.) 성심껏 달래주었다.

‘걔가 보는 눈이 없네. 네 빨간 머리가 얼마나 멋진데.’

‘크흥, 미영이 욕하지 마! ……근데 그 말 지, 진짜냐?’

‘그럼. 그리고 넌 보면 볼수록 멋진 구석이 많단 말이지. 지금도 봐 봐.’

호열은 중1에 키도 작은 꼬마 주제에 아주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백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햇빛에 비치면 네 눈동자는 다갈색으로 반짝반짝하거든? 진짜 예쁘다고.’

‘오… 그럼 미영이한테도 보여줄까? 그럼 고백을 받아줄지도!’

‘……근데 울다 웃으니까 얼굴이 좀 못나졌는걸? 이래서야 다시 고백한다 한들….’

‘뭣이!’

기껏 멋진 말로 위로해 주던 호열은 다시 장난꾸러기가 되어 백호에게 짓궂은 말을 던지곤 했다. 하지만 덕분에 백호는 첫 실연의 아픔에서 금방 벗어날 수 있었다.

성인이 된 지 한참은 지난 백호가 이 일을 떠올린 건 호열에게 말한 대로 사진을 보면서였다. 요즘 들어 이상하게 잠이 안 오는 밤이 늘어 고민하던 차에 남는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하기 위해 집 정리를 조금씩 하던 중이었다.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학창 시절 앨범이 먼지 쌓인 상자에서 나왔다.

상자가 먼지를 대신 맞아주어 앨범은 오래된 것치고 깨끗했다. 잠시 이게 뭔가 고민하던 백호는 첫 장을 보자마자 친구들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만들어 준 앨범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신이 나서 앨범을 구경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이다. 처음으로 리젠트 한 날 구식이가 기념이라며 찍은 사진을.

‘자, 이렇게 하면 네 눈이 더 잘 보이니까 인기가 늘어날지도 몰라.’

호열은 그렇게 말하며 백호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못난이라며 놀릴 땐 언제고 이제와 멋지게 만들어 주는 거냐며 투덜거리자 씨익 웃었다. 백호가 혼자선 못 할 것 같다니까 한동안 일찍 찾아와 손수 넘겨주기까지 했다. 그게 계속 이어져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이 등교를 하게 됐고.

그때 참 즐거웠지. 하며 앨범을 넘겨보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호열이 얼굴만 찾고 있었다. 백호는 앨범을 쭉 보고 덮은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와 처음 찍은 사진의 양호열을 들여다봤다. 왜지?

왜 이러지? 갑자기?

양호열. 이 천재 강백호의 첫 번째 친구.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 날 가장 이해하는 사람.

양호열은 여기서 많이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가장 친했고, 전화를 하면 항상 받아주었고, 먼저 거는 일도 많았고, 종종 편지를 쓰고 택배도 보내주고, 항상 백호의 경기를 챙겨보며, 직접 응원하지 못해 아쉽다고 하고, 언제나 그를 바라보는 사람.

양호열은 항상 그랬다. 강백호가 양아치일 때도, 농구선수일 때도, 아파서 드러누운 환자일 때도, 거친 플레이를 일삼는 허슬 플레이어일 때도.

한결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왜 이러지?

‘햇빛에 비치면 네 눈동자는 다갈색으로 반짝반짝하거든? 진짜 예쁘다고.’

왜 이러긴. 이렇게 된 건 백호 생각에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양호열은 한결같았고, 언제나 백호에게 잘해주었다. 비교하고 싶진 않지만, 다른 친구들도 그에게 엄청나게 잘해주었지만. 양호열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백호는 무의식적으로 그걸 알았고 그도 호열을 무척 소중하게 여겼다. 그런 게 쌓이면 사랑으로 변하기도 하는 건가? 백호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아는 건 지금 당장 양호열이 엄청나게 보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곤란하다. 정말 곤란하다. 호열이가 이런 마음을 알면 어떻게 나올까?!

농구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백호의 연애 사업은 완전히 멈춘 상태였지만 호열은 또 어떨지 모르겠다. 양호열은 분명 인기가 많았다. 백호 기억에 한 학기에 한두 번은 꼭 고백을 받았다. 하지만 호열은 언제나 조금 곤란하다는 얼굴로 정중히 거절했고 이유를 묻는 백호에게는 아직 누굴 사귈 마음이 없다고만 했다.

지금은 또 어떨지 모르겠다. 호열은 일주일에 두세 번은 전화를 하면서 백호의 일과를 묻곤 했다. 백호는 언제나 말이 많았기에 혼자서 실컷 떠들었고 할 말이 떨어지면 호열이 바톤터치하듯 친구들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나 호열의 이야기는 몇 마디 채 되지 않았다. 카센터에서 일하는데 그날이 그날이라 할 말이 없다면서.

그렇다면 호열이 누군가를 사귀고도 백호에게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정말 싫지만 백호는 아주 조오오오금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호열은 백호에게 거짓말을 안 하지만 말하지 않는 건 거짓말과는 다르니까.

탁! 앨범을 덮은 백호가 단숨에 전화기 앞으로 달려갔다. 집을 사자마자 가장 먼저 들인 전화기를 들고 가장 먼저 외운 전화번호를 반쯤 눌렀을 때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화해서 뭐라고 하게? 고백이라도 할 거야?

이제는 까마득하게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 중학교 시절. 백호는 3년 동안 50번의 고백을 하고 그대로 차였다. 보통 사랑을 깨닫고 나서 평균적으로 하루이틀만에 고백을 갈겼다고 대남이가 계산해 준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바로 전화를 했다간 그 성질 그대로 고백을 해버릴 것 같았다.

호열이한테 고백한다고? 그래도 되나?

첫눈에 반해 하루이틀만에 고백까지 해버리는 건, 상대를 모를 때나 발휘되던 용기 덕분이었다. 상대를 알면 알수록 고백은 힘들어진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농구의 길로 이끌어 준 소연이에게도 그래서 고백하지 못했다. 덕분에 지금까지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었고.

그런데 양호열은 그런 소연이와도 비교도 안 되게 긴 시간을 알고 지냈다. 그런 호열에게 이렇게 바로 고백한다고?

강백호는 그대로 수화기를 내려놓았고 몇 시간 뒤, 아마 잠들기 전에 전화했을 호열과 엉망진창으로 대화했다.

어떡하냐, 어떡하지?

백호는 자신이 지금까지 호열과 어떤 식으로 대화를 했는지 다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저 그 애가 자신을 보는 눈빛, 천진한 표정, 부드러운 목소리 따위만 머리에 남았다. 그리고 그가 아는 양호열이라면, 자신이 양호열을 아는 만큼 자신을 알 양호열이라면. 이 짧은 통화만으로 자신의 이상을 눈치채고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걱정시키는 건 재활하던 때로 끝내고 싶었는데. 하지만 내가 널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돼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이 마음이 절대 작지 않다는 거였다.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을 뿐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처럼 호열을 향한 마음은 백호에게 발견된 순간 작은 폭발을 일으키더니 순식간에 몸집을 불렸다.

양호열이 좋다. 양호열이 보고 싶다. 양호열이 그립다….

그래. 강백호는 양호열이 그리웠다. 지금이라도 당장 만나러 가서 얼굴을 맞대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그때 해준 말이 정말 기뻤다고, 아직도 내 멋진 구석을 찾을 수 있냐고 묻고 싶었다.

백호는 어쩔 줄 몰라 온 집안을 뛰어다니다 하마터면 훈련에 지각할뻔했다. 겨우 늦지 않게 도착한 훈련장에서도 평소처럼 집중하지 못한다며 꾸중을 들었다. 얼빠진 얼굴에 물이나 끼얹고 오라는 말에 화장실에 가서 문뜩 거울에 비친 제 눈을 보았다.

‘다갈색 눈동자가 예쁘다고….’

이 말을 양호열에게 한 번 더 들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Yup, it’s Song.

“썹썹! 나야.”

-엇, 백호냐? 거 꽤 오랜만이다. 요즘은 잠 좀 잘 자나 봐?

송태섭은 늦은 저녁임에도 동문, 동향 후배의 전화를 그럭저럭 반갑게 받아주었다. 백호는 그에 마음이 풀어져서는 자신이 만 하루 동안 품어온 고민을 약간의 허구를 섞어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이 절친한 친구를 좋아하게 됐는데 너무 멀리 떨어져 살지만 고백하고 싶어 한다고.

-……그러니까, 강백호 너가 양호열을 좋아한다고?

“나, 나 아니라니까! 글구 호열이 이름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딱 봐도 너네 얘기구만 뭘!

간단하게 말하면 될 것을 뭐 그리 돌려 말하냐며 가볍게 성질을 낸 태섭은 곧장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기대했던 고백에 대한 조언은 아니었다.

-근데 그거, 정말 좋아하는 거 맞냐?

“아앙? 그럼 이게 뭔데!”

-그러니까 내 말은… 너 요즘 살짝 슬럼프였잖아. 밤에 잠도 잘 못 잤고. 그거 향수병 같았는데, 그거랑 양호열 좋아하는 거랑 헷갈린 거 아니냐고.

“써비 바보야? 그런 걸 어떻게 헷갈려?”

-이 자식이 목청만 커서는. 우리 팀에 비슷한 놈 있었어서 그래. 그러니까 너도 잘 생각해 보라고.

외로워서 양호열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양호열이 좋아서 그립기도 한 건지.


송태섭의 말에 백호는 또 고민했다. 이 마음은 뭘까. 진짜 외로움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착각한 건가.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도 될 수 있는 건가. 하지만 호열이가 진짜 보고 싶은데….

연심이라 생각했던 마음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갑자기 불안하기도 한 한편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강백호가 양호열을 좋아하게 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후누우우, 호열이 보고 싶다. 호열이이….”

한 번만. 어떻게 한 번만 얼굴 보면 따악 감이 올 것 같은데!

언제나 그랬다. 고백하기 전까진 생각이 마구마구 많아지고, 러브레터도 몇 번이나 다시 써야 할 만큼 엉망으로 써지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머릿속이 꽉 차 터져버릴 것만 같은데.

상대를 마주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진다. 그저 진심으로 마음을 전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이게 외로움이라면 호열을 보는 순간 그저 반갑고 기쁠 것이다. 하지만 아니라면…

딩동.

아니라면 역시 고백을…….

딩동.

근데 시즌 중에 갑자기 돌아갈 수도 없고, 호열이한테 미국 오라고 하는 건 내 마음 확인한다고 오라가라 하는 것 같아서 쪼옴….

딩동, 딩동! 쿵쿵쿵!

“아! 누구쇼?!”

전화기 앞에 서서 없는 척할 생각이었던 백호는 끈질긴 방문객의 시도에 결국 쿵쿵거리며 현관으로 나갔다.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가 상상도 못 한 얼굴을 보고 만다.

“야, 양호열?!”

“여어. 뭐 하느라 이렇게 오래 걸렸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식겁했네.”

제 몸만 한 캐리어를 옆에 둔 양호열이 백호 앞에 서 있었다. 백호는 순간 헛것을 보나 싶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좀 갑작스러웠나? 근데 네가 그렇게 전화 끊으니까 걱정이 돼서….”

집으로 들이지도 않고 딱 굳어버린 백호를 보고 호열이 머쓱하게 웃었다. 하지만 백호가 자신을 환대하지 않는다거나 불편해한다고 오해하지는 않았다. 그는 백호를 잘 알았으니까.

강백호는 많은 부분에서 바뀌었고, 양호열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제법 바뀌었다. 그런데도 바뀌지 않은 게 있다면 자신이 백호를 잘 안다는 것일 테다. 그들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살고, 마음의 색이 조금 다르고, 참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라 해도. 호열은 자신이 백호를 잘 안다고 자부했다.

지금 백호의 표정만 봐도 증명되는 사실이었다.

“너 잠 설친다니까 구식이네 와이프가 베개라도 바꿔보라고 나한테 들려주더라. 용팔이랑 대남이한테는 사진 잔뜩 받아왔어. 사진 보고 좋았다고 해서. 그리고…….”

말할까 말까. 백호 요즘 힘든 것 같았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기민하게 백호를 살피던 호열은 쑥스러움에 살짝 눈을 굴렸다. 그 바람에 제가 뭘 놓친 줄도 모르고 묵은 마음을 걱정으로 포장해 꺼냈다.

“요즘 밥맛이 없는 게, 너 집에서 혼자 먹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서. 예전에도 그랬었잖아. 그래서 얼른 와봐야겠다고 생각했지.”

“…….”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외롭고 쓸쓸할 때 같이 있어 주는 게 친구지. 너 먹을 것도 잔뜩 가지고 왔다.”

“…….”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 부르라고. 혼자 앓지 말고. 나 없는 곳에서 외로워하지 마라, 백호야. 그럼 내가 뭐가 돼.”

……어라. 호열은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아 당황했다. 슬슬 턱을 호두처럼 찌그러뜨린 백호가 자신을 집 안으로 끌어당긴 뒤 뭐가 그리 외롭고 쓸쓸했는지 다 털어놓을 거라 생각헸는데.

백호는 그저 언젠가 보았던 것 같은 강렬한 눈으로 호열을 응시할 뿐이었다.

저런 눈을 한 백호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서서히 이변을 느낀 호열의 얼굴에 어리둥절함이 떠오를 무렵, 백호가 드디어 답했다.

“틀렸어, 양호열.”

“어? 뭐가?”

“역시 나는 외로웠던 게 아니야.”

갈피를 못 잡고 마구잡이로 떠올랐던 생각들이 단번에 정리됐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보고 싶었다, 호열아. 네가 많이 그리웠어.”

친구 좋다는 게 뭐냐니. 백호가 잠깐 잊고 있었다. 양호열은 한결같아도 너어어무 한결같아서, 전화 한 통에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날아온 주제에 여전히 자신의 친구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마주하고 알게 된 게 있는데.

“너 웃을 때 볼따구 올라가는 거 귀여워.”

“뭐, 뭐어?!”

호열이 펄쩍 뛸 만큼 놀라며 얼굴이 새빨개졌다. 자기 말에 부끄러워진 백호도 얼굴이 벌게진 채로 헹!하고 웃었다.

“기억나냐? 너 내 눈 예쁘다고 했던 거.”

“갑자기 무슨… 근데 내가 그랬어?”

“엉. 햇빛에 비추면 반짝반짝하다면서. 글구 나는 보면 볼수록 멋진 구석이 많다고도 했었는데.”

“아, 너 처음 차였을 때였나?”

“그런 건 넘어가고!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야.”

백호가 성을 내자 호열이 작게 웃었다. 편하지 않은 억지스러운 웃음이었다. 대화의 흐름을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일 테다.

백호는 지금이 진심으로 마음을 전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보면 볼수록 멋진 구석이 많다는 건, 계속 봐야지만 알 수 있는 거 아니냐?”

“…….”

“멋진 구석을 많이 찾으면, 더 많이 보고 싶어질 거고.”

어쩌면 양호열은 그때부터 날 좋아한 게 아닐까? 언제나 바뀌는 것 없는 친구였으니까.

계속 바뀌지 않고 날 봐왔던 거라면은…….

“그런 거였으면 좋겠는데.”

“음…….”

“왜인지 안 물어봐?”

호열은 혼란스러운 낯으로 입술을 한 번 꾹 물었다. 도망가고 싶은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기도 했으나 이내 단단히 중심을 잡았다.

“왜?”

그래. 그 양호열이 도망가서야 쓰나. 이런 건 바뀌지 않아도 좋다. 백호가 바꾸고 싶은 건 하나다.

“나도 네 멋진 구석을 많이 알고 있거등.”

너만큼 오래된 마음은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나도 네가 나를 아는 만큼 너를 안다. 외로움과 그리움을 구분할 정도로 알고 있어. 잠깐 온 향수병도 네가 너무 그리워서 묻혀버렸잖냐.

그러니까 우리 같이 하나만 바꾸자.

“나 너 좋아해. 나랑 사귀어 주세요.”

그러면 양호열은, 강백호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던 양호열은 그 자부심이 산산이 조각나더라도 오직 한 가지 대답만을 돌려줄 수밖에 없다.

대답을 들은 강백호는, 아주 많은 게 바뀌었지만 양호열이 사랑하는 웃는 얼굴은 그대로인 강백호는 활짝 웃으며 있는 힘껏 그를 끌어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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