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열백호]야구... 좋아하세요?

자리에 없으면 입방아에 오르기 마련. #호열백호_한주전력 #봄에는_240302

호백 뽀뽀해 by 여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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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봄' 사용.

*양 대리 직장 동료들의 대화가 대부분인 짧은 글입니다. 약 3천 자.

 

 

 

 

 

 

“양 대리 아무래도 야구 좋아하는 것 같어.”

 

야근에 지쳐 탕비실에서 넋 놓고 있다 보면 아무 재미 없는 얘기라도 떠들고 싶어지는 법이다. 스마트폰으로 프로야구 시범경기 중계를 보다 오만상을 쓰며 팍 꺼버린 구 과장이 대뜸 말했다. 수다쟁이 구 과장이 잡은 오늘의 타겟은 양호열 대리. 자리에 없는 게 죄라면 죄였다.

영혼 없는 눈으로 유튜브 쇼츠를 쭉쭉 내리던 민 사원이 예의상 말을 받았다.

 

“예? 양 대리님이요? 그래 보이시진 않던데.”

“민 사원이 작년에 입사했지? 양 대리 첫인상 어땠어?”

 

어떻기는 존나 잘생겼다고 생각했지. 연애적으로 다가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아무튼 미남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힘든 회사 생활에 몇 없는 복지 중 하나였다. 민 사원은 이런 감상을 사회적인 언어로 출력했다.

 

“차분하고 조용하고…… FM 느낌? 일을 굉장히 열심히 하시는 분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지금이라고 딱히 변한 건…… 아, 보기보다 유연한 분이신 거? 그리고 요즘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 봄이 좋으신가 생각한 적은 있어요.”

 

구 과장이 바로 그거라며 동의했다.

 

“매년 이맘때, 봄만 되면 양 대리 기분이 유난히 좋아진단 말이지. 양 대리가 원래 얼마나 일만 하는 사람인지 민 사원도 봐서 알지? 공적으론 유도리 있게 굴어도 사적으론 선이 확실하잖아. 내가 양 대리 처음 본 게 5년 전인데 그때부터 그랬어. 근데 봄만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건 역시…….”

 

구 과장이 제 스마트폰 뒷면을 보여줬다. 그가 응원하는 구단에서 낸 스마트폰 케이스가 반들반들 빛났다.

 

“야구 개막이 다가와서 그런 거 아니겠냐고. 민 사원은 응원하는 구단 없어?”

“저 스포츠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요.”

“그럼 모를 수 있지. 야구라는 게 말이야 4월부터 9월, 길게는 10월까지 근 반년 동안 거의 매일 경기를 하거든? 주에 여섯 번, 항상 같은 시간에 챙겨 보던 시즌이 끝나면 얼마나 서운한지 몰라. 겨우내 심심해 죽겠다고.”

 

민 사원은 기억했다. 작년 가을, 응원팀이 치열한 5강 다툼에서 장렬히 패배해 입에서 불을 뿜던 구 과장을. 그때 했던 말들을 생각하면 야구가 끝나서 서운했다는 저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말에 책임져야 하는 사회인으로서 딴지를 거는 대신 얌전히 경청했다. 머릿속으론 아까 본 아기 고양이 쇼츠 영상을 재생하면서.

 

“FA를 잡았다느니 놓쳤다느니, 전력 보강을 어떻게 하고 새 감독을 선임하고 어쩌구저쩌구 겨울에도 나오는 얘기는 많지만 그런 거로는 부족해! 시합을 못 봐서 승리에 목마른 팬들은 시범경기 일정만 잡혀도 올해는 다르다는 기대에 부풀기 마련이라고! 양 대리도 그런 거지!”

“아, 그렇구나…….”

 

시합을 못 봐서 승리에 목마른 게 아닐 텐데. 민 사원은 생긋 웃으며 목구멍을 넘어오려는 말을 꿀꺽 삼키고 사무실로 돌아갈 각을 쟀다. 그러나 구 과장의 수다는 끝나지 않았다.

 

“그것뿐이게? 봄만 지나면 다시 귀신같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도 분명 응원하는 팀이 봄에만 잘한 다거나 더워지니까 타자들이 선풍기 틀어서 그런 걸걸.”

“과장님이 응원하는 팀처럼요?”

“……아무튼 양 대리 심심하면 스포츠 뉴스 뒤적거리고 긴 휴가는 꼭 가을에 내는 거 보면 야구 좋아하는 거 맞아. 타팀이어도 가을야구는 그만의 재미가 있거든.”

“되게 잘 아시네요.”

“고럼. 5년이나 봤다니까.”

“아니, 양 대리님 말고 가을야구요.”

 

구 과장의 눈이 살짝 촉촉해졌다. 스포츠에 문외한인 민 사원도 구 과장이 응원하는 팀이 얼마나 오래 가을야구에 못 갔는지 알 정도였다. 겨우 웃음을 참은 민 사원은 구 과장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에 재빨리 인사하고 탕비실을 빠져나왔다.

구 과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민 사원이 보기엔 여전히 양 대리가 야구를 좋아할 것 같진 않았다. 구 과장처럼 폰으로 중계 틀어놓고 화내는 걸 본 적도 없고 상상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구 과장의 촉은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을 정도로 구리다는 걸 입사 1년차인 민 사원도 알았다.

 

‘요즘은…… 그래. 차라리 연애를 시작한 사람처럼 들떠 있던걸?’

 

그런 생각을 하며 사무실로 돌아가던 민 사원은 이제 막 퇴근하던 양 대리와 마주쳤다.

 

“앗, 대리님! 이제 가시는 거예요? 먼저 퇴근하신 줄 알았는데.”

“아, 저 약속이 있어서 맞춰 나가느라요. 그럼 내일 봅시다. 고생해요.”

“넵. 내일 뵙겠습니다!”

 

인사를 하며 바쁘게 나가는 얼굴에선 넘쳐 오르는 설렘과 기대가 엿보였다.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는 얼굴. 역시, 연애를 시작한 거였어! 민 사원은 자리에 앉아 괜히 시린 옆구리를 문질렀다. 대체 어떤 능력있는 여성분이 저런 존잘남을 데려간 걸까? 부럽다, 부러워…….

솔로에겐 시리기만 한 봄을 괜히 원망하며 일을 겨우 마쳤다. 퇴근을 앞두고 업무 메일 온 거 없나 확인하러 들어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큼지막한 속보가 민 사원의 눈에 띄었다.

 

“‘현 NBA 선수 강백호, 전격 결혼 발표! 상대는 오랜 기간 교제한 일반인’? 와, 진짜 봄은 봄이구나.”

 

여기도 저기도 사랑이 넘치네. 민 사원은 한숨만 내쉬고 퇴근했다.

자신의 촉이 구 과장만큼이나 좋지 않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채로.

 



 

공항에 도착한 양호열이 차에서 내렸다. 봄이라지만 아직 밤에는 날이 찬대도 그의 얼굴은 봄바람을 맞은 양 부드럽게 풀려 있다. 야근과 장거리 운전으로 인한 피로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알아차릴 만큼, 양호열은 지금 온몸으로 이 순간을 기다렸다고 외치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중 그가 가장 사랑하는 봄. 사랑이 찾아오는 계절. 자신이 찾아가는 가을도 즐겁지만 봄만큼 특별하진 않았다. 점점 따사로워지는 공기와 바람결에 섞이는 달콤한 꽃내음. 보드라운 새순의 풋내마저 사랑스럽고 가장 먼저 피어나는 분홍빛 꽃에서 누군가의 미소를 떠올릴 수 있는.

봄은 그의 연인을 닮았다.

호열은 먼저 화장실에 들려 매무새를 정리했다. 운전하느라 걷었던 셔츠 소매를 정리하고 주름 잡힌 바지를 탈탈 털었다. 정장 자켓은 다시 입는 대신 팔에 걸었으며 넥타이는 살짝 풀었다. 이 모습이 멋있다고 했던 걸 기억하니까.

미국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도착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상대가 온다는 확신이 있으니 기다림조차 기쁘다. 기껏 정리한 매무새가 다시 흐트러질까 봐 호열은 앉지도 않고 게이트 앞을 서성였다.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 미국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안내 멘트가 흐르고 게이트를 통해 사람들이 밀려 나온다. 호열은 혹여나 놓칠세라 나오는 사람들의 면면을 열심히 살폈다.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절대 놓칠 수 없는 사람인데도.

과연, 저 멀리서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훌쩍 큰 인영이 눈에 들어온다. 호열이 사랑하는 붉은 머리칼은 모자를 눌러 써 가렸지만 호열의 눈엔 이미 붉은빛이 아른거렸다.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얼굴에 한가득 담고 손을 번쩍 들어 외쳤다.

 

“백호야!”

 

그러면 호열과 똑같이 이 순간을 기다려온 강백호가 고개를 들고 곧장 호열을 찾아낸다.

이윽고 눈이 마주치면,

 

“호열아!”

 

그들에게 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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