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열백호]우리 언제까지 사귀는 거냐?
강백호의 생일에 백호군단이 남친 양호열을 선물합니다.
"생일 축하한다, 강백호!"
4월 1일. 만우절이자 자신의 생일을 맞이한 강백호는 아침 훈련을 위해 문을 열자마자 화려한 꽃가루 세례를 받았다. 이른 시간인데도 대기하고 있었는지 깜찍한 고깔모자를 목에 건-머리가 망가지면 안 되니까- 백호군단이 왁자지껄하게 들이닥친 것이다.
작년이나 재작년, 친구가 되고 생일을 알려준 뒤로 이런 시간에 축하받은 적 없던 백호는 얼떨떨하게 있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너희들 이 몸의 생일을 축하할 이런 시간에 우리 집까지 온 거냐? 짜식들, 학교에서 축하해줘도 됐을 텐데 고맙다!"
"그러려고 했는데 올해 생일 선물은 좀 특별해서 말이지."
"특별하다고?"
피차 서로의 처지를 잘 알기에 생일 선물이래 봐야 매점빵이나 라멘을 사주거나 자잘한 심부름을 해주는 소원권 따위로 퉁치곤 했다. 그러니 특별하대 봤자 라멘을 두 번 사주는 거려나? 의심 반 기대 반인 백호에게 대남이 무언가를 건넸다.
"자, 받아라."
그것은 백호의 예상대로 작년에 받은 소원권과 같이 공책을 찢어 만든 쪽지였으나 쓰여 있는 글자가 달랐다.
남친 양호열 이용권.
오늘 하루 이용 가능!
"이, 이게 뭐...냐?"
눈이 휘둥그레진 백호는 삐걱삐걱 고개를 들어 이제껏 말이 없던 양호열을 찾았다. 언제나처럼 백호를 향해 열심히 꽃가루를 뿌렸지만 오늘따라 조용하던 호열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뭐기는. 쓰여 있잖냐."
"나, 남친 양호열 이용권?!"
"그렇게 크게 말하진 말라고!"
"그니까 남친 이용권이 뭔데!"
민망한 나머지 버럭 소리친 호열을 두고 뒤로 쭉 빠진 나머지 백호군단이 히죽히죽 웃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다, 백호야! 오늘 하루 양호열은 네 남친이다!"
"중학생 때부터 연애하고 싶어 했잖냐! 모처럼 사귀게 되었으니 해보고 싶었던 거 다 해봐라!"
"그럼 좋은 하루 보내라!"
도망치는 백호군단을 잡을 생각도 못 하고 벌건 얼굴로 부들부들 떠는 백호를 보고 호열은 한숨을 참았다. 슬슬 터지기 일보 직전이니 박치기당하기 전에 설명할 때였다.
"그게 말이다, 백호야...."
호열이 늘어놓는 얘기는 뻔했다. 백호가 재활을 무사히 마치고 농구부에 복귀한 뒤로 처음 맞는 생일인 만큼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돈이 부족했다는 소리다.
"그래서 나온 생각이 이거였는데, 내가 가위바위보에서 져버렸지 뭐냐."
이건 만우절 거짓말. 대남과 구식, 용팔은 합심해서 강백호의 남친으로 양호열을 주장했다. 호열이 제 속을 들켰을까 봐 얼타는 사이 밀어붙였고.
정말 싫었다면 이용권을 찢어버렸을 테지만.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그냥 여자친구 생기면 해보고 싶었던 걸 맛보기 하는 걸로 치던가."
이건 거짓말 반, 진심 반. 아니, 호열 스스로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진지하게 생각해 줬으면 하는 동시에 장난으로 넘어가 주었으면 했다.
아무튼 호열은 머리를 넘기는 척 터질 것처럼 뜨거워진 귀를 감추며 백호를 살폈다.
"역시 좀 그러냐? 마음에 안 들면 돌려줘라. 다른 거로 바꿔줄게."
"......다른 건 뭐 있는데?"
역시 별로지? 호열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씩 웃었다.
"라멘 사주기 쿠폰 세 개!"
"흠."
"설마 부족하냐? 그럼 매점 사주기 쿠폰도 얹을까?"
"흐으으으음."
백호는 무언가 고심하는 얼굴로 '남친 양호열 이용권'과 호열을 번갈아 보았다. 호열이 슬슬 그렇게나 싫은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백호가 이용권을 반으로 접어 품에 쑤셔 넣었다.
"좋아. 사용한다, 이용권!"
"뭐? 진심이야?"
"그래. 남친 양호열."
호열이 입을 떡 벌리자 백호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그, 그럼 이제 뭐하면 돼냐?"
강백호가 여자친구를 사귀면 하고 싶었던 것 첫번째.
"......."
"......."
같이 등교하기.
호열과 백호는 나란히 등굣길을 걸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집 방향이 비슷했으니까.
백호가 농구부에 들어가 아침 훈련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이렇게 같이 등교하는 게 드물긴 했다. 물론 오랜만이라 이렇게 침묵이 깔리는 건 아니었다.
"호열아."
"왜, 백호야."
"...뭔가 좀...... 달라야하지 않겠냐."
"으음...."
그러니까 이건, 친구 양호열이 아닌 남친 양호열과의 첫 등굣길이었다. 호열은 백호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 알았다.
남친이니까 어떻게 좀 해 봐....
백호는 남자친구는커녕 여자친구와의 등굣길에서도 무얼 하면 좋을지 생각해본 적 없었던 것이다.
잠시 고민한 호열은 백호와 나란히 걸을 때면 항상 주저하던 짓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 팔 좀 내려볼래?"
"엉?"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있던 팔이 내려오자 호열은 검지로 백호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차마 덥석 붙잡기엔 아직 용기가 부족했다.
"이러면 어때? 남친이니까 손잡는 정도는...."
이 정도는 괜찮지? 라고 말하려는데 백호가 손가락을 쏙 빼내더니 호열의 손을 콱 잡았다.
심장이 거의 종아리까지 떨어졌다 올라온 호열이 고개를 휙 돌려 백호를 올려다봤다.
"그! 게 무슨... 손잡는 거냐? 손가락 잡기지."
앞을 노려보는 백호의 옆얼굴처럼 자신의 얼굴로 벌게졌을 거라 확신한 호열은 말문이 막혀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 이러면 백호가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얼른 억지로 말을 끄집어냈다.
"그러게. 역시 넌 천재야."
"당연하지."
백호의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손끝이 저려오기 시작하는데도, 호열은 땀이 차기 시작한 제 손 때문에 백호가 손을 놓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이 손을 놓는 일은 없었다.
강백호가 여자친구가 생기면 하고 싶었던 것 두 번째. 같이 점심 먹기.
"우린 자리 비켜줄게!"
"옥상도 우리가 깨끗이 치워놨으니 편하게 먹어라!"
백호군단의 열렬한 협조 덕분에 호열과 백호는 단둘이 옥상에서 밥을 먹었다. 이건 좀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더 놀랄만한 일은, 호열이 백호의 도시락을 싸 왔다는 것이었다.
"전에 여자친구가 싸준 도시락 먹고 싶다고 했었잖아. 난 남자친구지만 그래도 괜찮지?"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백호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호열이 자신도 잊어버린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몹시 쑥스러웠다.
"호열아, 이거 엄청 맛있다."
"진짜?"
"엉. 진짜."
솔직히 맛은 평범했다. 모양새는 조금 엉성했고.
하지만 백호는 뒤늦게 기억해냈다. 좋아하는 사람이 싸준 도시락을 먹고 무조건 맛있다고 해주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젠장, 그놈들.... 대체 어떻게 눈치챈 거야?
백호는 호열이 활짝 웃는 걸 보면서 대남이, 구식이, 용팔이를 향해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왜 오늘 하루만이라고 적어 놨냐.... 너무 짧다고.
강백호가 좋아하는 사람과 하고 싶었던 것 세 번째. 이건 비교적 최근에 생긴 거다.
"봐라, 이 천재의 슬래앰 덩크!"
멋지게 덩크하고 그 사람을 향해 세레모니하기.
부활동이 끝나 남은 사람은 두 사람뿐인 체육관에서, 백호는 호열을 항해 주먹을 질끈 쥐여 보였다. 호열은 양팔을 번쩍 들며 열렬히 환호해주었다.
사실 연습 중에도 엄청 하고 싶었는데 도깨비 주장 송태섭이 도끼눈을 뜨고 보는 바람에 하지 못했다. 농구부원들은 호열이 백호의 남친이라는 말을 만우절 장난으로 받아넘겼지만, 송태섭은 '농구부 규칙에 연애 금지 조항을 추가하기 전에 연습이나 하라'며 엄하게 굴었다.
"쳇, 송섭섭이 때문에 멋진 모습을 많이 못 보여줬잖아."
"하핫, 주장이니까 어쩔 수 없지."
"뭣, 호열이 너... 남친 편 안 들고 남 편이나 드는 거냐!"
추가 연습이 끝나고 밤이 깊어져 가는데도 두 사람은 미적거리며 가능한 한 오래 체육관에 머물렀다. 호열은 백호를 따라 공을 튀기며 드리블을 해보았고, 백호는 호열의 어깨나 팔을 건드리며 자세를 봐주었다.
시답잖은 대화를 하거나, 괜히 바닥을 다시 닦거나, 공을 주고받으면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었지만....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엔 체육관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백호가 여자친구랑 하교도 같이 하고 싶어 했던가? 호열은 어쩐지 무거운 다리를 움직이며 그런 고민을 했다.
호열이가 가위바위보를 원래 잘 못 하던가.... 백호도 평소보다 보폭을 줄이며 아침에 들은 말을 곱씹었다.
등교할 때와는 다른 침묵을 두른 채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깍지를 낀 채였다.
걸음이 아무리 느려져도 시간은 똑같이 흐르고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기에.
호열은 백호의 집에 도착하자 잡았던 손을 놓았다.
"다 왔다, 백호야."
"어."
평소라면 그럼 들어가라고 말할 테지만, 오늘은 정리해야 할 게 있었다.
남친 양호열 이용권은 오늘 하루만 쓸 수 있는 거였으니, 내일은 다시 친구로 만나야 한다.
"그럼 내일은...."
"야, 호열아. 우리 언제까지 사귀는 거냐?"
백호가 호열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그야.... 이용권은 오늘까지였으니 오늘까지지."
"얼마 안 남았네. 그럼 내일은 남친 아니야?"
"남친은 아니지만 친구잖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오늘만 해도 그랬잖아?"
같이 등교하고, 밥을 먹고, 연습을 구경하고.
남친이 아니라 친구일 때도 해왔던 일들이다. 추가된 건 손잡는 것 정도였다.
"맛보기니까 이 정도로 끝내는 게 맞지. 다른 건 여자친구랑 해야 하는 거잖냐."
손잡는 것도 이렇게 좋아서 아쉬운데 다른 걸 했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호열은 애써 안도했다.
백호는 묵묵히 호열을 바라보다가 품에서 이용권을 꺼냈다. 그러곤 아침에 그랬듯이 이용권과 호열을 번갈아 보다 말했다.
"싫어."
"뭐라고?"
"싫다고. 친구로 돌아가는 거."
그는 이용권을 반으로 찢었다.
남친 양호열 이용권.
오늘 하루 이용 가능!
"이건 생일 선물이고,"
백호가 이용권이라 적힌 쪽지를 흔들었다.
"이건 만우절 장난."
그리고 다른 쪽지는 구겨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너 계속 내 남친해."
"배, 백호야...?"
"난 너랑 손잡아서 좋았단 말이야."
백호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너랑 계속 손잡고 등교하고, 둘이서 밥 먹고... 아 물론 다른 놈들도 가끔은 끼워주긴 해야겠지만. 아주 가끔! 그리고 나 덩크할 때 호열이 너 보면서 같이 웃고 싶어."
호열은 현실감을 잃은 채 백호의 말을 들었다. 혹시 만우절 장난인가? 싶었지만 만우절은 이미 백호 집까지 오는 길에 지나버렸다.
무엇보다 백호의 표정이, 눈빛이 작은 의심의 싹마저 모조리 태웠다.
"아, 암튼 난 그런데.... 호열이 넌, 어떠냐?"
그런 백호에게 호열이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벅찬 마음이 차올라 목구멍을 꽉 막는 바람에 그마저도 꺼낼 수 없었다.
그래서 양호열은 강백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쪽.
만우절은 끝났지만 남친 양호열은 강백호의 생일 선물이었기에 끝나지 않았다.
이로써 사귄 지 이틀만에 뽀뽀를 하고 만 두 사람은 다음 날에도 손을 잡고 등교를 했다.
백호 생일에 전력으로 참여한 첫 연성입니다! 재미 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트위터에서 공오님(@0___5___AA) 트윗을 보고 쓰게 된 글입니다. 너무 좋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써버렸어요....
https://twitter.com/0___5___aa/status/1641840889285988354?s=46&t=GTuQklfze4Rt6e_HHArG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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